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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얼마나 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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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얼마나 더
저의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마음 아파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주님께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하신
말씀도 제가 무척 마음 아파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벌이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저는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손가락만으로 일하는 사람이요,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 옆에 있으면 늘 일이 많아 웬만한 사람은 제게 다가오지 않는데
그런데도 제게 다가오는 분들은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분들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저나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의 문제는
일을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문제 또는 불성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위선의 문제이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처럼 윗자리를 좋아하거나
군림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그들의 심각한 문제는 하는 모든 짓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 인사와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그들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있습니다.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의 문제는 위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사람들 앞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의 두 번째 문제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것의 문제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는 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저와 그들이 받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세상의 것들이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들이며 그래서 저나 그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스승의 자리를 가로채 자신이 차지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이 하느님께 향하게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그러고는 군림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라고 하신 다음
그런데도 누가 자신을 높이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경고하심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복음에 비춰 저 자신을 성찰하였는데도 개운치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찰을 해도 반성이 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고
머리의 반성에 그쳐 이 나이가 되었어도 그리고 하느님께 갈 날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도 여전히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더 성찰을 해야 반성이 머리에서 마음까지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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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15일 화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어떤 사제든 공경하라
사제들이 말을 잘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좋은 일입니다. 사제들이 잘 가르친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것은 받아들이고 남의 것에 관해서는 뭐라 하지 마십시오. 사제들이 악한 이들 때문에 선한 이들을 소홀히 하기보다는 선한 이들을 생각해서 악인들을 좋은 일로 부추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신자들을 위해 비신자들을 가르치듯이, 여러분도 나쁜 사제들 때문에 훌륭한 사제들까지 매도하는 일이 없도록 선한 사제와 악한 사제를 다 공경해야 합니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이들을 멸망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악인들을 그대로 둘 망정 의인들을 지켜 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쁜 사람을 훌륭한 신앙으로 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버려진 땅에서도 귀한 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버려진 땅에서 나왔다고 해서 금이 멸시받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땅은 그대로 두고 금만 취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들의 가르침은 받아들이고 그들의 행실은 벼리십시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텍스트, 컨텍스트, 계기
끝으로, 우리는 텍스트를 두고 계기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 이런 개념을 통해서,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책들의 진지함, 그 권위, 그에게 고유한 확고함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거룩한 텍스트의 풍요다산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그 역사의 시초에서부터 이것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텍스트물을 만들어 내도록 부추기고 시사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적인 성경은 인간의 글쓰기에 (가장 고귀하고도 진지한 의미에서) 계기가 되어, 이 글들로써 자신을 연주하고 호위하도록 한다. 지나치면서 한번 더 강조하지만, 바로 성경의 이같은 계기적 성격의 이름으로 교회 교부들의 주석학적 주해서들에 대한 옹호론을 펼칠 필요가 있다.(94)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 1화요일 거룩한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신 당신을 흠숭하며 감사드리나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처럼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고 활동하면서 당신을 교육하고 보살폈습니다. 예수님, 성령의 능력으로 지치지 않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좋은 모범을 보여주며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모든 부모 안에서 찬미 찬양받으소서. 그들이 언제나 예언자가 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성령의 은총으로 그들의 말이 자녀들의 마옴에 뿌리내려 풍성한 열매를 맺게하소서!
사람들이 갚이 신뢰하는 교육자 · 교리교사 · 교수들을 한없이 축복해 주소서. 대중 앞에 선 모든 이가 예언의 성령으로 일하며 존중하고 섬겨야 할 진리를 힘차게 살며 수호하게 하소서. 그들이 악의와 속임수룹 대적하고 죄와 타협하거나 악에 동조하지 않게 하소서. 정치권 사람들을 예언의 성령으로 비추시어 그들이 두려웅 없이 정의와 진리를 위해 써우면서 주어진 역할을 보람차게 수행하게 하소서. 권력과 돈과 특권에 대한 욕망으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이 부패되지 않게 하소서.
모든 부모와 교육자 두려움 때문에 거짓과 불의와 폭력에 협조한 이들, 나라를 책임진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 모든 이의 상처룹 치유하시고 저희 백성이 예언자가 되재 하소서.
(침묵 가운데 부모와 교육자와 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이를 돌아보며 예수께 봉헌한다.)(186)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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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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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 방에 공기청정기가 있습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옆에 두고 작동시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 주위의 공기가 제일 깨끗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공기청정기가 있는 방에서 공기 오염도가 가장 높은 곳은 공기청정기 옆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기청정기는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여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장치이지요. 따라서 오염된 공기가 어디로 모일까요? 공기청정기 옆으로 모이고, 그래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장소가 되기에 공기청정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 재물 때문에 가족이 갈라져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불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모으겠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도 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공기청정기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할 수 있는 것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 좋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계도권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의 행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는 것, 옷단에 술을 길게 달고 다니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열성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허영의 표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건성을 보이고, 사람들의 신뢰심을 얻기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이 하느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한 형제이며, 하느님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쳐 인도해 주시는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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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원수를 독살하기를 바라면서 그 독을 내가 마시는 것과 같다(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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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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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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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행함으로써 행복하라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 자를 거꾸로 하면 ‘푹’ 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만 잘났다고 하며 상대의 소리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오늘만큼은 행동함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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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진실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악마는 그 진실을 거짓으로 가리거나 덮어서 방해를 합니다. 역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진실과 거짓이 치열하게 다투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빛으로 거짓을 들추어내어 진실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전체를 보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스핑크스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을 거대한 신상으로 만들어 섬기던 이집트의 우상숭배를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서도 뱀이나 물고기 같은 짐승의 상을 거대한 나무나 돌로 만들어서 숭배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에 직면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비롯된 이들 주변 민족들의 문화는 이런 우상숭배 종교를 위해 화려하고 눈부시게 발달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종교는 역사상 징표를 드러내실 뿐 우상숭배 종교들의 화려한 문화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화려한 우상숭배 종교와 그 문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이사야는 동족을 향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두 도시의 이름을 소환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앙에 따른 윤리를 가르쳤는데, 그 윤리는 무미건조한 듯하지만 올바르고 깨끗한 길이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에 지배층과 민중을 다 함께 지배하고 있던 정신 풍조인 바리사이즘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마태 23,2)는 말이 그 서론입니다. 모세가 받들었던 하느님 신앙도 없이, 그 신앙 덕분에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권위만 취하고, 신앙 없는 윤리만 공허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내세운 형식논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그 핵심을 찔러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형식논리는 율법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그 자구(字句)대로 지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핵심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섬기듯이 사람들을 섬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도 6백 가지도 넘은 규정들을 다 알지도 못해서 규정과 규정이 충돌할 경우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허구헌 날 입씨름을 하기 바빴으며, 그러한 공리공론의 와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가?”를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들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사소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 일쑤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으면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헌금한다고 자랑했고, 기도를 해도 성전이나 저자 거리에서 보란 듯이 길게 빈 말을 늘어놓으며 기도 바쳤으며, 기도 중에도 겸손하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거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을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축복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청중들에게도,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말을 따라서 지키도록 힘쓰되, 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인간관계에 필요한 지혜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진정성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윤리에서도 사랑의 최대한과 최소한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먼저 그에게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연이나,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해서 맺은 인간관계에서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더 없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며, 이 진실한 말로 한 약속이라면 행동으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목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흠나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가능한 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이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예의를 갖추어 대함으로써 그 관계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겪다 보면 분명하게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임이 드러날 경우가 있습니다.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고 행동에 진정성이 없는 속물형 인간임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럴 때에는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 처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엮여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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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선택이다
- 섬김의 선택, 섬김의 훈련 -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종과 섬김의 영성이라 강조했던 적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영어에서 보다시피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선적으로 섬김의 직무, 즉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 초창기 30년전 수도사제생활 초창기에 있었던 벼락같은, 참 끄러웠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러 차례 강론에 인용했던 일화입니다. 이때는 제가 40대 초반 수도원 원장으로서 주방장, 손님접대, 피정집관리, 일체의 면담과 고백성사 등 1인5역으로 참 분주할 때였습니다.
한밤중 늦게 피정 신청 전화를 받았고 잠에서 깨어난 저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듯 합니다. “수도원에 사시는 분이 왜 그렇게 불친절하느냐?”는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즉시 사과를 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즉각적인 깨달음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 즉 섬김의 직무를 지닌 이들은 세 필수요소를 명심해야 하겠구나. 첫째, 사람이 좋아야 하고,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병원, 학교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우만 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식당이 잘되려면 주인이 친절하고 좋아야 하며 유능하여 음식 솜씨가 좋고 식당 환경이 편안하고 청결해야 할 것입니다. 병원의 경우라면 의사 역시 친절하고 실력이 있어 유능하여 잘 치료해야 하며 병원의 환경도 편안하고 쾌적해야 할 것입니다. 교사의 경우 역시 친절하고 실력이 있어 유능하여 잘 가르쳐야 하고 교실내의 환경도 편안하고 아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나 수도원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피정집을 운영하는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라면 모름지기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영적 실력이 뛰어나 유능해야 하며 수도원 피정집의 환경도 고요하고 편안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좋은 사람, 좋은 실력, 좋은 환경이 서비스업의 3대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요셉수도원은 이 세 조건을 전부 갖추었나 깊이 자성했습니다.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야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당신 수도원을 주님의 섬기는 학원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 머리말;46)
베네딕도 성인의 참 멋지고 매력적인 섬김의 영성입니다. 수도원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인 학원으로 졸업이 없이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섬김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쉽,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영성 등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섬김과 종의 영성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만인이 형제들이고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선언이자 모든 우상들을 타파하는 참 멋진 선언입니다. 스승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한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겸손한 섬기는 종이 될 것을 당부하는 주님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바로 겸손의 섬김으로 낮아질 때 높아지고 교만으로 높아질 때 낮아진다는 역설적 영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의 결정적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겸손으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시고 비우시어 하늘 높이 올라가시어 아버지 곁에 영원히 살아 자리 잡으시니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섬김의 영원한 모범인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정의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신을 가리켜 ‘세계 총대주교’라고 칭하자, 이에 반발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즉시 교황의 신원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 정의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 시몬베드로 아빠스님이 취임시 자신을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 명명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책임자는 물론 모두가 주님의 심부름꾼이자 종으로 생각하여 섬김의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도 섬김의 권위 하나뿐이요, 참된 리더쉽도 섬김의 리더쉽 하나뿐입니다. 세속적 지배와 통치의 권위가 아니라 섬김의 권위가 참 권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국의 좋은 대통령이라면 지배와 통치의 “왕王”이 아니라 참으로 모두를 충실히 섬기는 종, 공복公僕이요 충복忠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처신, 즉 겸손한 섬김의 사랑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소돔의 지도자들은 물로 백성들에게 경청과 섬김의 구체적 실천 내용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하여라.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모든 국가, 사회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참 멋지고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새삼 섬김과 종의 영성과 자세야 말로 복음의 핵심이자, 온인류의 보편적 본질적 영성이자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한 섬김은 바로 참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한가운데 섬김의 모범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으며 거창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선택이며 훈련입니다. 바로 평범한 일상 가까운데서부터 주님을 닮아 부단히 섬김의 삶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 할 때 구원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과 종의 영성을 충실히 살게 하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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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이 살아 꿈틀거리는 몸짓으로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알맹이 없는 소리와 말뿐인 공염불(空念佛)이 무성한 오늘이다. 이는 영성생활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좋은 강의나 강론의 백만분의 일만 실행했다 해도 이미 수십번 성인, 성녀가 되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앙에 바탕을 둔 바른 정치를 펴라고 지도층에 권고한다. 그러나 귀족들과 부자들은 도적과 짝하고 뇌물에 취하고 사례금을 강요하며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면서 종교의식에는 열심이었다. 이사야는 오늘의 대목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은 희생제물이나 문화적 행사가 아니라 정의의 실천과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는 하느님의 자비심임을 힘주어 말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나약하고 악에 물들기 쉬운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회개하는 인간을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야말로 이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임을 확신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과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수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자기를 과시하려고 잔칫집 윗자리와 회당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23,3-7 참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일곱 번이나 그들을 꾸짖으신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23,13-29 참조) 위선은 불행을 불러모을 뿐이다.
우리도 실천은 하지 않고 말만을 위하여 모세의 자리에 머무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우리는 고요와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새기기보다는 ‘미친 듯 소리를 좇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참으로 영적으로 자극을 주고 도움이 되는 많은 것을 접하면서도 마음과 혼에 새기지 못하고, 귀에서 곧바로 입으로 쏟아버리는 그 끝은 얼마나 공허할지.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신앙은 위선이다. 이제 제 분수를 알고 좀 더 진실해져보자! 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어떤 죄와 어둠 상황에서도 용서해주시고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그 힘에 기대어 내 안에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내 뜻을 내려놓고 힘을 빼고 바보가 되어보자.
내 말과 행동이 일치하면 덕 있고 좋은 사람일 수 있으나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앙인에게 언행이 일치한다는 것은 단지 덕행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내 뜻을 내려놓고 나의 움직임 안에 말씀이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내 몸짓와 마음과 영혼의 작용을 통해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곧 하느님이 되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언행일치는 곧 영을 따라가는 향기로운 몸짓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2)라고 가르치신다. 이어 하느님 앞에 한없이 낮추고, ‘모두가 형제이므로’(23,8) 동료 인간 누구에게도 ‘스승’이나 ‘선생’이라 불리거나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동료 인간 사이에 수직의 지배 관계나 종속 관계를 형성하는 바로 그때 하느님은 변두리로 밀려나시게 되고 우리는 위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빠져버리고, 잊혀지고, 소외되고,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바로 거기에 ‘주인이요 왕’이 되어버린 위선적인 자신이 흉물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위선에서 벗어나 언행이 일치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하느님을 내 존재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하며, 나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도 목적도 오직 그분이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내 심장(心)의 버금(亞) 자리로 밀어낼 때 악(惡)이 발생하고 육(肉)의 노예가 되어 어둠 속을 헤맬 것이다. 내 삶의 가장 귀한 보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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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5. 사순 제2간 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하느님을 의식하는 사람,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여러 욕구 중에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과시욕이 있습니다. 오늘 퇴근하는 길에 홍성남 신부님의 유튜브 강론을 들었습니다. 간혹 신부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강의는 이와 같은 주제였는데 조금 성질을 달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성질을 달리하지만 인간 속에 내재하는 모든 욕구는 공통분모가 있는 듯합니다.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는 보편적으로 정상적인 기준에 들어가지만 그 정도가 어느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건 문제가 되는 욕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욕구, 욕망이 현대에 와서는 옛날 중세시대와 같은 잣대로 평가를 한다면 우리는 죄라는 구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요즘 현대 심리학에서는 특히 과시욕이나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내면의 결핍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현상을 사람이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치부를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긴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달리 해석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하나의 병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입니다. 원심력과 구심력과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구심력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고 원심력은 하느님을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과 어쩌면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게중심이 하느님쪽으로 쏠리느냐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우리는 교만으로 가느냐 겸손으로 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느님 중심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행동은 오히려 정반대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시는지요? 제가 지금까지 읽은 영성서적에서 답을 찾는다면 우리는 신앙인이라 하느님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사람을 더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인데도 우선 사람들의 평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어리석은 일은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설령 하느님의 일을 하더라도 당장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는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바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평판에 주목하려고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엄밀하고 냉혹하게 말한다면 그런 믿음이라면 사실 하느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런 하느님의 가치가 너무나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고 지금 당장에 어떤 가시적인 결과물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신뢰를 못하는 하느님이라면 당연히 그런 하느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걸 잘 묵상해보면 어느 누구도 이 논리에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보다도 율법이나 계명을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들은 그 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오히려 힘없는 사람들을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르고 실천 못하는 사람보다도 알고도 실천 못하는 사람이 더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이 더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게 있습니다. 바로 선생 이야기입니다.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문명을 이루고 살면서 발전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문명을 후세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선생'이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령 이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 부정하시려고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선생을 두 가지로 양분한다면 정말 어떤 사심도 없이 누군가를 깨우쳐주려고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선생이라면 그런 선생은 오히려 선생님이라고 대접을 해드리고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생은 마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남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포장하는 선생을 가리킬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선생의 삶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런 삶을 경계하신 것일 겁니다. 결국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일은 결국에는 어떤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길은 교만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 마지막 말씀이 대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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