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마지막날 동이 트려한다.
추워서 잠을 깻다.
어젯밤 창문을 열어 놓고 잠이 들엇다.
지금이 날씨가 최고로 더운 7월말이지만
시골이라는 것의 매력이 여기 잇는 모양이다.
도심을 떠나 피서가는 곳,
시골
마음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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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정겹고 애틋한 그리움
내 마음속 풍경-에드워드 김 추모사진전, 8월21일까지, 흰물결갤러리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값진 인생 살다가 이제 천상으로 돌아갑니다. 부족한 나의 인생에 따뜻하고 귀한 인연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모두들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아가시고 아낌없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녕…!”<김희중, 굿바이, 2019년 3월10일>
봉은사 가는 길(서울,1955)
한적한 시골길 지게를 지고 가는 아낙네와 맨발로 아장아장 따라오는 아이모습이 재롱스럽다. 1955년 촬영한, 현재의 경기고 언덕에서 한강을 내려다본 ‘봉은사 가는 길’ 풍경이다. 그런가하면 경주 장날 새끼줄 묶음을 지게에 메고 팔러나가는 농부표정엔 뭔가의 기대감이 묻어나고58년 안양 인근서 이웃마을 잔칫집에 가는 일행인 듯 열 분이 넘는 어른들의 행렬도 포착했다.
신작로 따라 나들이(수원,1958)
“신작로 한복판에서는 앵글이 맘에 안 들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찍으면 좋겠더라고요. 문득 아까 신작로에 있던 고장 난 트럭이 생각나는 거예요. 돌아서서 수백 미터를 달려갔지요. 트럭에 올라 땀을 훔치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쫘악 걸어오시는 거예요. 녹색 들판 사이로 신작로가 하얗게 빛나고 포플러가 잎사귀를 뒤집으며 햇살에 반짝이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이 장중하게 다가오는 겁니다.”<월간독자 Reader, 2019년 6월호, 에드워드 김 인터뷰 中>
경주 장날2(1956)
◇사진의 힘!
사진작가 에드워드 김(Edward Kim, 한국이름 김희중, 1940~2019)은 경기고 시절 두 번의 사진전을 가졌고 연세대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했다. 텍사스주립대학 신문학과, 미주리대학 신문방송대학원을 거쳐 1967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입사해 1980년 동양인 최초 편집팀장을 지냈다.
백악관출입기자단 사진취재상 등을 수상했다. ‘TIME’서울특파원으로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대초빙교수, 대구사진비엔날레조직위원장, 상명대석좌교수로 활동했다. ‘한국화보’를 제작해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린 공로로 국민훈장동백장을 받았다.
빨간 스카프를 두룬 중학생들(평양,1973년)<사진=흰물결갤러리>
흰물결갤러리 전시장엔 자녀들과 함께 온 어머니, 노년의 신사 등 다양한 연령층의 관람객들이 일생 동안 세계 곳곳을 촬영 다니면서 평생 가슴에 품어온, 삶과 사람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작품세계와 만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의, 한국인의 일상풍경들을 담은 흑백사진의 아우라가 묘하게도 편안함을 전했다.
그리고 작가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일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촬영한 사진, 60년대 미국풍경, 70년대 북한 취재의 문을 열고 찍어온 사진, 고국으로 올 때마다 촬영한 70~90년대 한국 사람과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의 생생한 모습 등 총97점이 성황리에 전시 중이다.
아이스께끼 파티(서울, 1956년). 에드워드 김 작가는 ‘Reader’지 인터뷰기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사진을 찍어 인화해보니 오른쪽 귀퉁이에 구두닦이 소년의 까맣게 때에 절은 발이 찍혀있는 거예요. 맛있게 아이스께끼를 먹는 가족 옆에서 얼굴을 감싸고 힘없이 앉아있던, 어쩌면 전쟁고아였는지도 모르는 그 소년을 같이 앵글에 잡았더라면 전쟁 직후 서울의 표정을 잘 나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어요.”
한편 그는 1957년 경복궁에서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의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전을 보고 더욱 사진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나는 그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방황하던 중이었는데 이 전시회에서 다양한 인생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어요. 꼭 무엇에 홀린 것처럼 전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요. 사진 한 장 한 장이 모두 경이롭고 신비했어요.…인생의 해답이 한 가지일 거라 생각했는데 삶은 다채롭고 가치관도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진의 힘’ 덕분이었지요.”<Reader 中>
△권동철 미술전문기자/데일리한국-주간한국 2019년 7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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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희중
1940년생 지난 4월 사망 80세로 돌아가셧다.
적은 나이가 아닌데 요즘으로 90은 사셔야 좀 사셧다고 말이 되는 시대이다.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값진 인생 살다가 이제 천상으로 돌아갑니다. 부족한 나의 인생에 따뜻하고 귀한 인연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모두들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아가시고 아낌없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안녕…!”<김희중, 굿바이, 2019년 3월10일>
돌아가시기 한달전에 이런 글을 남기고 가셧다.
평소 온화하고 잘 사신 분임을 이글을 통해서 읽을 수 잇다.
경기중 2때 아버지가 쥐어준 카메라로 그져 사진을 찍고 다니셧다.
당시 경기중은 그져 좀 하면 다녓다.
연대를 다니신걸 보면 거기서도 좀 처지셧던 듯.ㅋ
울 사촌오빠 얘기를 좀 빌자면
저쯤의 연세인데 집안의 코흘리게 엿는데
경기고를 다녓고 서울대를 나왓다.
지금도 맘씨좋은 아저씨로 가족간 유대를 돈독히 하며 잘 사신다.
60년대 초반에는 일제시대때 일본사람이 두고 간 땅
625때 돌아가신 주인 땅
나라땅 등
줄만 그으면 내땅된다는 시대도 잇엇다.
나라 행정이 다 못미친 시절이엇다.
각설하고
시대와 부모님을 잘 만나 곱게 정 많게 사시다 가신 훌륭한 분이다.
그리고 기록을 잘 보관해 놓으셧다는 점.
크게 평점을 드리고픈 부분이다.
지금 그 때의 그 기록들을 보니
과거를 모두 회상할 수 잇는 것이다.
사진속 어른들은 돌아가셧을 테고
저 속에 어린애들이 자라서 지금 내가 된 것이다.
상구머리
동생을 업고 잇는 언니
우리 어려서는 형제들이 많게는 10명, 적개는 5명
위가 아래동생을 업어 키우는 일이 많앗다.
방과후 동네에서 동생잇는 애들은 애기를 업고 잇어서 놀지를 못햇다.
산아제한이 없던 시절.
그후 우리시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엿으며
중국에서는 한명낳자 운동으로 두번째부터는 출생신고를 안받아줘서
아들선호 사상이 투철한 시절 아들 낳을 때 까지 낳고
딸은 호적에도 없엇던 시절
불과 40여년후 지금
애들을 안낳아 인구감소로 좀 더 가면
나라가 존폐위기에 놓인다고들 말한다.
중요한 현재와 미래
잘 알지도 못하니 그져 과거에 대하여 쓸데없는 얘기나 해본다.
나이들면 과거를 먹고산다고 말하면서...
오늘도 시원하게 잘 보내시고 다음달 정모때 뵈요.
첫댓글 그 옛날로 돌아간듯 하네여~ㅎㅎ
포풀러 나무 가로수 하며 신작로~아이스께끼~빠스라는 용어가 옛날을 지칭하기도~ㅋㅋ
완죤 재래식 파마~언니 오빠글구 형이었으면 누구나 동생을 등에 엎어 잠을 재웠을게다
그 옛날 그 시절을 재현 시켜 주시는 시니 칭구님~출석부에 감사 드려유~꾸벅
션한 신림에서 무더위 잊으시궁 힐링하시길유~핫팅
'신작로'란 말이 재미잇어요.
신지식선생님이라고 수필을 쓰시는 정말 깨끗한 인상의
국어 선생님이 계셧습니다.
그 분의 '하얀길'라는 시집, 중학생때 읽은 책
거기에 신작로가 잇엇습니다.
길이 없던 시절에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의 신작로
보통명사지요.
벌써 7월이 끝나가고 있어요^^
마른 장마끝 폭염으로 지치고
힘든 무더운 일상이지만
항상 변함없는 사랑으로
서로 지켜주고 아껴주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월 마무리 잘 하시고
싱그럽고 푸른 8월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희망찬 8월을 맞읍시다.
옛날의 우리들의 생활상,정말 정겹습니다.
과거는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워.
저 때는 희망이 잇엇어요.
어딘가 불안하기도하고
늘 몰라서 겸손하구요.
지금은 오만이 가득한 듯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아요. 경제는 힘들엇지만 정은 많이 잇엇죠.
추억 돋는 사진들입니다.
오늘도 폭염경보가 내렸네요.
외출시 항상 조심하세요.
태짱님은 일자리가 시원하지요?
추억은 늘
그립고 아련한거!!!!!
좋은일 나쁜일
지나고 나면
아쉽고 그립고...
그래도 돌아가기 싫은 과거입니다.
자꾸 빨리 흘럿으면 좋겟습니다.
그때 그시절 암홀했던
보리고개 를 살아온 우리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