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17일 길 떠나서 10.10일 귀가 하였습니다.
국토 종단을 혼자서 다녀온 후기를 올려 드립니다.
이것은 저 또한 카페등을 통한 그런 후기들을 바탕으로 해서 간 것이였기에 참고로 할 분이 있을것 같아 올리고자 하니
많은 격려와 관심을 바랍니다.
비리버
국토종단(해남땅끝~통일전망대)을 다녀와서
직장생활이나 가정에서 힘들거나 좋았을 때는 누구나 있었을 것이나, 나는 평소에 기회가 닿으면 산티아고 순례만은 꼭 갈것이라고 마음 먹었었다.
정년퇴직을 하고서도 그것이 차일피일 미루어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퇴직 후 일자리를 그나마 구해 일을 하다가 짬이 나는 9월 이기에 가족들에게 산티아고 순례얘기를 하였더니 국내에서 하길 원하기에 내가 수정하기로 마음먹은 차에 집가까이 있는 도립도서관에 가서 걷는데 필요한 책들을 구해 읽던 중 국내에서 국토횡단종단여행한 내용들을 접하고 산티아고 순례가 약800km이고 40일 소요되니 국내에서 그 거리에 비슷한 코스로 국토종단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준비를 하기로 하고서, 난생처음 카페에도 가입을 하고 참고 자료도 찾고, 적응하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는 준비운동을 위해 4~5kg을 넣은 배낭을 지고 집뒤에 있는 광교산과 수원천길을 30일(계속은 아님)쯤 10km 이상씩 걸었다.
계절적으로 추울때를 피해서 가려고 9월초에 가려했으나 추석이 있어서 추석명절에 차례는 지내고 가기로 하여, 드디어 9월17일 일찍이 아침을 간단이 먹고 약간 무거운듯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pc로 검색해서 갔는데 수원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가 오지않아 출발부터 늦장치게 될 까봐 택시를 타고 도착하였더니 수원버스터미널은 업무이전 시간이라며 1층에서 표를 끊으라기에 1층에서 표를 끊어 광주에 와서 주차장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해남가는 차를 탔다. 1시간쯤 걸려 도착되어 해남서 땅끝가는 일반시내버스를 타니 왁자지껄하였으나 토속적인 분위기가 구수하다.14:00쯤 땅끝 표지석까지 도착하여 잠시 가방은 내려놓고서 잠시 기도하고, 혼자서 폰에다 셀프로 찍다 여의치 않아 지나가는 분께 부탁드려 나온게 어정쩡한 것이 꼭 그 때의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한 과연 걸어서 끝까지 잘 갈수 있을까 하는 그런 내 엉성한 모습.
전망대와 배타고 관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걸으러 왔으니까 낮 시간이니까 걷기로 하고 해변 도로를 돌아 걸어 첫날 8km이상을 걸었는데 등짐진 가방이 무거워졌다. 자기 체중의 10%정도로 등짐무게를 하여야 무리가 없다는 걸로 볼때에 내짐은 5kg 내외이었다. 더 이상의 장비를 지고 감은 내 몸에 무리가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숙박은 여관이나 민박하기로 하였으니 우선 민박할 곳부터 정하기로 하고, 들린 첫째집은 버스가 회차하여 가는 지점의 수퍼와 같이 딸린 집이였는데 너무 허름하고 별로여서 조금 더 가기로 하고 걷는데 아침부터 차를 타고 온 탓인지 오후시간이 되니 피곤하기도 하니 가방은 점점 더 무겁고 이제 빨리 쉬고 싶어 조금가다가 해변가에 제법 부지도 너르고 편안한 곳에서 밭일을 하시는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민박이 된다고 하여 해남땅끝마을 팬션에서 밤을 지내게되었다. 근처에는 식당도 없어서 지나온 수퍼식당에라도 가야지 생각하였는데 저녁은 그냥 주겠다고 하였다. 저녁을 먹으며 아침에는 일찍이 갈거니 저녁밥을 밥만 따로 한그릇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아침에 주인 아저씨와 같이 드시라하여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먹고 바로 나왔다. 첫날을 지낸 인심이 좋은 집이였다. 그 집은 국토종단이나 횡단하는 부산가는 길로서 많이 지나가는 코스이니 순례자들이 들리기에 좋을 것 같다. 땅끝 남단의 해변을 가는 도중 영전리에 영전성당이 있었는데 문이 닫겨있어 밖에서만 잠간 기도하였는데 성당이라기 보다 공소같았다. 계속 강진방향으로 가다가 신전면은 신전성당이 있어 들려서 기도하고 강진에 가서 버스주차장 옆에 모텔을 정했다. 보통 시가지 주변을 둘러보면 보통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숙박업소가 있기에 버스터미널 근처를 주로 이용 하였다. 강진에서 걸어 장흥으로 향하여 가다가 은행따는 부부를 만나 길목에서 유명한 콩물국수집이 있으니 가자고 하여 콩물국수를 감사히 얻어 먹었다. 장흥 다음 보성으로 가는 길은 그곳을 먼저 거쳐가신 어느선배분의 글에서 아주 험하고 어려운 터널이 있다는 것이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부담이 되었었다. 그래서 장흥에서 충분히 힘을 충전하여 부딪쳐 보기로 하고 아침에 장흥 모텔에서 나와 호계터널이 어려우면 다른길을 가려고(그길 가는 진입도로 교차로에서 전날 사전 현지답사함)하였으나 다른 길도 여의치 않아 그냥 가보기로 하였는데, 전날 도로아래에서 차달리는 속도와 차소리를 듣던것과는 달리 막상 도로위에서는 그렇게 공포스러울 것은 아니였다. 한참을 지난 후 터널에서 차의 굉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위해 귀마개(이어플러그)를 끼고, 호계터널에 진입하였다. 역시나 터널길은 차가 달리는 그 소리자체가 울리고 거기다 경적이라도 치는 때에는 공포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생각을 하면서 가도 끝이 금새 끝나진 않고 지루하게 빠져나오는데 (약 2.4km)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래도 무사히 지나왔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금가니 또 제암터널이 나왔다. 다행이 호계터널보다 짧았다. 그리하여 터널 두군데를 통과하니까 이제 어떤길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었다. 이후 통일전망대까지 터널은 없었다. 보성 모텔에서 숙박하고 걸어서 외서까지 갔는데 민박이 없어 낙안읍성민속마을 모텔에서 숙박하였다. 다음날 외서에서 송광을 거쳐 석곡에서 숙박하고 곡성성지에 갔다가 남원에 장급여관에서 묵었다. 아침에 식사하고 나오는데 비가 오길래 우산을 하나 얻어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거리를 검색할 때에 지방국도 벗어나는 지리산 둘레길은 안심하고 편안한 순례코스가 되려니 하고 생각했던 구간이었는데 주천 관광안내소에서 비가 올때는 계곡물이 갑자기 불어 날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니 그런 곳이 두어군데 있다 하면서 다른길로 가든지 차를 타고 가기를 권하였다. 그렇다고 아니 갈 수 없는 것 국도로 가기로 하고, 신발은 오면서 (출발하고 4일되던날 발가락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고 왼발 가운데 발가락하나가 시커멓게 빠졌음) 샌달로 바꿔 신었으니 각오하고, 거대한 어머니 품같은 분위기가 나는 지리산줄기 운봉으로 향하여 60번국도로 고개길을 힘들여 갓길에 우산쓰고 앞에서 오는 차를 살펴가며 가는데 길다란 뱀 두 마리가 엉키어서 커다란 용수철 모양이 되어 둥글게 굴러 내려오는 것이였다. 깜짝놀라서 얼른 발걸음을 크게 뛰어 피하고 보니 아마 짝짖기 한 상태로 무게에 의해 도로 아래쪽으로 저절로 둥글둥글 굴러대야가 되었는가 보다. 신발은 구두도 아닌 샌달에다, 뱀2마리와, 달려오는 차와 함께 마주쳤다면 생각만해도 아찔한 순간이였다.
출발하고 이튿날 왼발가락이 3개 물집이 생겨 부르트고 가운데 발가락 발톱이 한 개 시커멓게 피가 맺혀 붇기시작해 난감해 하다가 결국 트레킹화를 포기하고, 가져온 샌들로 바꿔 신고, 위기 상황도 겪고, 걸어 보고픈 둘레길도 못걷게되었지만 힘이 들었으나 편안할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니까 여기서 말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먹고 길을 재촉 하였다. 고갯길을 오르고 또오르는데 점심때가 되어 어디 비를 피해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길을 가면서 보아도 아무 건물도 의지할 민가도 보이지 않는데 오른쪽아래 깊숙이 옛날 기와집이 하나가 보여 길을 횡단하여 내려서니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어 100m정도내려 가니 순흥안씨재실 ‘영모재’라는 재실인데 그앞에 집에 노인 한분이 개 한 마리와 살고 있었다. 개짖는 소리에 노인이 나오기에 정중히 인사하고, 라면 끓여먹고 가겠노라고 하니 쾌히 승낙하면서 왜 그렇게 걷느냐고 어찌 그렇게 걸어서 가느냐고 차비가 없어서, 그러면 얼마드는지 내가 주겠노라고 까지 하시였다. 정말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운봉에 도착하니 비는 멎었고 마음이 놓였다. 민박하는 농가에서 잠을 자고서 지곡을 거쳐 안의서 민박을 하고 점심 때가 되어 라면은 있는데 끓여 먹을 물이 없어서 함양 진입로에 진주강씨재실이 있어서 거기서 물이라도 얻으려 했으나 문은 열려있으나 사람이 없어, 길 건너편에 있는 장애인사회복지관에 가서 자리만 빌리려 했으나 책임자 되는 분께서 직접 라면을 끓여 주었으며 밥에다 김치까지 주어 고맙게 아주 잘 먹었다.오늘은 33km를 걸어 안의까지 도착하였다. 걷는 것 보다 배낭무게가 내 신체구조상 어깨가 조이는게 목에서 어깨까지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증상이 생겼다. 9.27일 열흘째되는 날이다. 거창 고제에서 무풍쪽으로 오다가 한재마을(한치)입구 정자에서 트래킹화를 꺼내어 샌달과 바꿔 신었다. 설천까지 왔으나 설천성당엔 주일특전미사가 없어서 무주까지 차로 이동하였다. 무주에서 반디랜드청량리를 거쳐 영동민주지산 휴양림 각호산(1,178m)의 도마령(843m)을 고개넘어 오다가 계곡에 물을 떠서 라면 끓여먹고 내려왔다. 고갯길에서 길옆 도로 세멘옹벽위에서 긴뱀이 내가 가는 길(차선이 그어진 나머지 보행자의 갓길은 두뼘정도)에 툭하고 떨어졌으나 돌발사태없이 잘 피했다. 황간 청수장에 짐을 풀고서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황간에는 올갱이국밥집이 여러집이 있었는데 혼자 식사하기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식사하는 복잡한 식당이여서 혼자서 망설이다가 어쩌다가 나혼자 기다리는 탁자에 마침 어느 부부가 와서 앉아도 되겠느냐고 하여 합석하고 얘기하다보니 같은 교우라하며 고맙게도 식대를 자기들이 계산하여 주었다.
황간에서 밤을 지내고, 상주로 넘어오는데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상주는 재래시장이 크고 공룡같은 마트나 할인점 같은게 안 보이고 재래시장을 활성화하였는지 재래시장이 규모가 크고 물건들이 신선하고 활기에 넘쳤다. 시장안에 홍두깨로 칼국수를 직접 만드는 집이 몇집있었고 쌀의 고장인 만큼 검은 콩이든 흰 떡이 크고 값이 쌌다. 상주시장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시청 민원실에 들려 천주교성지옥터를 물으니 잘몰라서 그냥 나오는데 자기도 교우라고 반가워하며 우산을 하나 주었다. (비에 대비해서 우의는 2개 가져있지만 우산은 남원에서 얻은건 무거워 이튿날 숙소에 두고 왔는데 또 우산을 얻게 되어 고맙게 썼다.) 시청을 나와 농협에 가서 가방 정리하다가 문의 했더니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싸인펜으로 그려주었다. 상주경찰서 뒤로 옥터에 가니 거기가기 전까지 옥터는 옛날 우시장하던 자리로 아무것도 없고 함석조각에 글씨 써있는 안내판있는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아담한 경당을 지어 잔디밭도 있고 남성동성당에서 성지 관리를 하며 8명의 봉사자가 있다고 하며 인근 마원성지와 박상근성인에 대한 책자까지 주었다.신앙고백비까지 도보로 갔다오니 저녁때가 되어 옥터옆 숙소에서 자다가 심한 악몽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못자고 일어나 또 옥터에 가서 담력이 약한 동생을 데리고 와서 낫게한다는 30여명 순교옥터에서 기도하고 나왔다. 그리고 문경새재로 갔다. 문경새재에는 특이하게 옛길 박물관이 있어서 입장료 1,000원이였는데 도보순례자는 꼭 한번 가볼만한 곳이였다. 우리나라 한반도 전체에서 의주대로, 경흥대로,삼남(해남)대로, 동래대로가 있었으며, 한국의 고개 영남의 고개 문경의 고개라고 정리된 한반도 모형이 있었는데, 영남의 고개중에 죽령고개는 대나무 미끄러지듯하고 추풍령은 추풍낙엽 같다고 하여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하다. 옛날 보붓상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물건들을 볼 수 있었고 옛날에 중앙에서 지방관의 주요연락처로 30리마다 역이 있었고, 원은 10리마다 있어 일반인이나 보부상들이 여점이나 객주로 이용되었다한다. 문경새재 앞에 마원성지 갔다가 문경새재 넘는 기도굴에 간다는 것이 3관문을 지나면서 혹시 하는 마음에 마원성지에서 얻은 책자를 꺼내어 연락해보니 1관문근처라고 하여 ‘수원에서 그걸 볼려고 여기 왔는데’ 하고서 포기 하고 가려다가 다시 또 오기가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고 문경에 가서 자드라도 가보기로 하고 문경새재를 다시 넘어 거의 어두워질 때 기도굴을 찾아보고서 문경새재 입구 민박집서 자고 새벽같이 나오다가 밥은 먹고 걸어야지 하니 일찍이 문을 연 집에서 콩나물해장국을 먹으며 국물까지 먹었다가는 배가 불러 힘들거라 생각에 건물위주로 단단이 먹고서 새재고개를 3번만에 넘어 고사리 주차장옆 운동장에 캠프장시설이 있어 라면을 끓여서 먹고 계속 걸어오다 한수까지 가서 월악산 영봉이 최단거리에 있는 동네에서 잤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숙박비가 얼마인지가 궁금하고 사실 관광목적이나 유흥적이 아닌 도보순례는 좀 소홀해도 잘수만 있으면 되는데 이제 날씨가 밤에는 추워 보일러 기름값이 많이 든다고 하며 비용이 만만찮았다.
월악산 아래 팬션에서 나와 단양방향으로 걸어걸어 점심때에 수수밭 언덕위에서 짐을 풀어놓고 큰 패트병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수석의 고장 수산까지 왔으나 숙박할데가 없어 밤에 단양에 가서 숙박 하였는데 단양은 관광 소비도시로 이미지는 깨끗하였다. 숙소에 보일러를 잘때는 넣어 줄줄 알았는데 냉골방에서 자고 일어나니 몸이 상당이 무거웠다. 제천쪽으로 향하기로 하고 단양시내를 벗어나는데 단양서 제천가는길은 도담삼봉으로 가는데 도전교는 다리폭이 좁고 걸어서 통과하기는 엄청 위험하고 다리난간대도 낮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것이 서커스를 하는 것 같았다. 도로 또한 도보자 인도가 전혀 확보되지 않고, 거기다가 가면서 쉴수 있는 정자나 쉼터도 전혀 없어서 길바닥에 가방을 내리고 쉬었고, 걸어본 길중에서 아주 힘든 길이었다. 발이 탈이 날것같아서 아킬레스건이 부어올라 트레킹화를 집어넣고 샌달 슬리퍼로 걸었다.
10.4토요일 영월에서 박물관에나 있을 1970년대 허름한 여인숙에서 나마 자고 일어나니 고단한 잠을 잘 자서인지 컨디션을 회복하여 평창가는일을 물어서 도로표지판을 보면서 단종을 모신 장릉을 거쳐 걷고 걸어 큰고개가 나오는 다종이 갤러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점심을 먹을건데 하고서는 지나쳤더니 허기가 져서 주린배를 움켜쥐고 산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다가 고개 끝나는 지점에 민가가 나오길래 아침식당에서 가져온 김치랑 라면먹었다. 강원도 바람은 쎄개부는데 돌담길 옆에서 간신이 바람을 피해 라면을 끓일수 있었다. 평창에는 88올림픽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러니까 88올림픽을 기념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평창동계올림픽도 유치되는 보람을 갖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의 고장이기도 하다 아니러니한 것은 정작 메밀은 평창이 본향같은데 오히려 영월시장이 메밀부침개와 메밀요리가 많고 풍요로웠다.
10.5일요일
평창~진부의 길은 차도의 가에 비스듬한 사다리꼴의 흰 보도선이 있어 좋았으나 영월~평창 길보다 차가 많았다. 7분정도 조용하다가 10여대씩 쌩쌩 질주를 하니 조금도 전방시야를 방심할 수 없었다. 정오쯤 걷는 길에 대화성당이 있어 들렸으나 일요일 교중미사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 바로 나와 라면끓여 먹을 곳을 찾았으나 여의치 않아 패트병 물로 대화초등학교 담벼락에서 짐을 풀어서 라면 먹었다. 진부는 교통의 요지이고 교회가 상당히 많은 동네였다. 성당은 초등학교뒤편에 산밑에 제법 규모가 있는 성당이었다. 동네전체가 왠지 따뜻해보였다.
10.6월
밤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잤더니 밤에 잠을 깨어 못자다. 오대산 정상휴게실(해발960m,진고개정상)을 거쳐 아래 삼산공소를 지나와 연곡농협을 지나 산고개정상에서 내려오는 맑은 계곡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속초로 향하는 7번국도길은 교통량이 많고 속도가 있어서 걷는 조건이 좋지는 않다. 주문진에서 재래시장 양말집에서 질긴 양말 구입했다.(양말은 2컬레 조그만 구멍때는 테이프로 붙여 며칠 견디었는데 아예 커다랗게 구멍이 나서 버렸다.) 신발은 다시 샌달 슬리퍼로 갈아신다. 발가락은 3개가 물집이였고 발톱은 한 개가 빠지려 하였는데 계속테이프로 붙였다가 밤에는 풀어서 자고 다음날 테이프 감고 걷고 관리를 철저히 하니 발가락은 이제 거의 아물어들었다.
10.7화
어제 민박집 큰 방에 자는곳만 겨우 보일러가 들어왔으나 괜찮았다. 항호리부터 걸어서 오다가 오후에 3시쯤에 양양 3km 전지점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하이킹에게 지금까지 만나는 자전거하이커들에게 하였듯이 손을 들어 흔들어 주었더니 자기는 통일전망대에서 부산까지 간다고 하면서 선뜻 패트병 물을 하나 주어 물이 없던차에 반가이 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였더니 길에서 이런 것은 서로 공유해야 한다고 하며 나이먹은 내가 도리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통일전망대까지 가는 것은 교육을 받고 신청하는 절차가 있다고 하니 미리 숙소에서 잘 알아 보라는 정보도 알려 주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서 내일 걸으며 먹을 떡을 하나 샀다. 어제 산 새양말을 신고 걸으니 한결 좋았다. 지금까지는 양말을 부드럽고 폭신한 것만 찾았는데 그것은 샌달에 비벼대며 걷게되니 질기고 까끄리한 것이 좋았다.
10.8수
이제 국토종단 도보도 막바지라서 오늘은 많이 걸을 욕심에 떡까지 준비했으니 아침에 두유나 홍시가 없어서 서울우유를 하나 사서 식사를 끝내고 8시부터 걷기 시작하여 7번도로라서 이정표만 보고서 부지런히 걸었다. 속초시내서 조금 둘렀지만 곧바로 7번국도를 찾아 계속 걸었다. 아시아 하이웨이라고 알림판은 차에만 해당되는 홍보물이었다. 길가 도보자를 위한 간격은 아예 없는 곳은 아니었으나 공사를 몇군데 하고 있었고 차가 워낙 고속이여서 잠시라도 전방주시에 긴장을 늦출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12시쯤 속초에 진입하여 걷다가 도로변 노인회관의 벤치(걷는 순례자에게는 이런 정자나 휴식할 공간이나, 버스주차장도 좋은 쉼터였다.)에서 떡하고 우유로 점심을 떼웠다. 부지런히 걸어 백도에 도착 수퍼에서 물을 하나 사서 마시고 일단 전날에 삼포까지로 예상하였기에 삼포에서 민박을 하려 하였더니 민박집은 집집마다 많았으나 민박집 아주머니 말로, 삼포는 해변가 해수욕장으로 벌써 아침,저녁으로 보일러를 돌리는 유류비도 들어, 엄청 비싸 포기하고 고성에서 밤을 지냈다.
10.9목
다시금 삼포로 가나 갈등하다가 집서 빨리오라고 연락도 왔고 또 숙박하는 애로를 생각하니 바로 마치는 것이 좋을거 같아 통일전망대까지 걸어가면 시간이 4시에 마감한다고 하니 시간이 안될거 같아 아예 전망대까지 갔다가 거기서 걸어 오도록 하려 생각하고서 바로차로 대진까지 갔다. 내려서 100m정도가니 출입신고서가 있었다. 거기서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온 관광객들이 인산인해였는데 2번째로 기다리다가 출근하는 직원들(재향군인회상조회?)이 신청서류를 막 접수하기 시작하는데 개인이 도보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여 그냥 걸어서 민통선 입구까지 가 보기로 하고 갔더니 군인들이 여기서부터는 못들어간다고 하여 도보순례자는 관광목적이 아니니 걷는목적이니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사단군사작전지역이니 소대장이 나와서 사정얘기를 듣고 민통선앞에서 한참 앉아서 생각하다가 언젠가 분단된 나라의 통일이 되면 경흥대로로 함흥까지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서 다시 걸어서 나오게되다. 왕복 10km를 걸으면서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진성당까지 걸어서 기도하고 마무리하였다. 그날이 대진성당에서는 디모태오 길 순례행사하는 날이여서 문이 열린채로 아무도 없어 조용하고 기도하기 좋았다. 성지 최남단은 해남 영전리성당이였고 최북단은 대진성당으로 조신철 가롤로 주보성인 성당으로 성인이 이 지방민이니 성지성당이였다.
참고로 빨래는 모텔이나 여관같은데서는 곤란하여 민박집 마당 같은데서 하였음.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으려고 토요특전미사라도 꼭 참석하고 숙박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있었고, 민통선에서 통일전망대가는 비무장지대의 특수성 때문에 100%완주는 아니였음을 밝힘니다. 그러나 첫날 8km제외하고 22일간을 20~30km(당초20~30이 목표였음)를 계속 걸었습니다.
발가락3개 물집잡히고 발톱이 하나가 빠지고 가잖아 마른 얼굴과 목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숙박비만 59만원들었으나 아무런 득이 없는거 같아도 길에서 정말 감사하였고 너무나 많은 체험을 피부로 접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믿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그렇게 내공을 쌓은 것이 어디로 가겠나. 무사히 잘 다녀올수 있었음은 묵묵히 보아준 가족들의 헌신과 카페와 참고자료들의 힘이 되었음을 말씀드린다.
걸으면서 제일 애로점은 숙박이였으며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자고 쉬어가나 였으며, 사실 카페나 책자를 통해서 짐작은 하였으나 걷다 보면 보통 3개면소재지를 통과해야 하는데 걸으면서 미리 주민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이 좋음. 그냥 물어보는 것 보다 자연스러이 물하나라도 사면서 수퍼아주머니께 민박하는집 없느냐고 물으면 없다고 하며 혹시 모르겠는데 저 멀리 보이는 마을회관에 가서 어른들게 얘기해 보라고 하면서 여기서 보냈다고는 말라고 하여 회관에 가면 문은 잠겨 있고 아무도 없어 온 길을 도로 걸어 나오게 된다.(혹 중고등 청소년아이들이라면 회관 이용 할 수도 있다고 함) 사실 요즘 정서에는 민박을 묻는 것 자체도 실례 되는 일일까
혹자는 왜 그런 무의미한 걸음을 하냐고 죽기살기로 그런짓은 않는다고 합니다마는 난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90이신데 저는 60중반으로, 우리 어른세대는 90세대 시대라면, 우리세대는 100세시대이고, 우리아래 세대는 120을 넘본답니다.
내가 지금부터 100살까지 산다면 생각하니 아득하고 답답해 좋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에 독수리가 제일 오래 산다는데 70까지 살려면 40에서 중대결정을 해야 한답니다. 죽느냐 그렇지않으면 150일 동안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자기의 부리를 쪼아서 부리가 새로이 나도록 해서, 새부리로서 깃털을 새로이 갈아입는 고통의 환골탈퇴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내 인생에 있어 지난 삶을 조명해 보며, 얼마나 어떻게 잘 또는 잘못 살았는지를 살펴보고, 내몸과 영혼을 새로갈아엎듯이, 소심하고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성격을 고치고 대범하게 긍정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는 기회였다고 했습니다.
이 두서없으며 별 내용없는 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혹 참고가 될 분을 위한 글임으로 부족한 점은 널리 격려와 양해를 빕니다.
끝으로 걸으면서 동물과 다를바 없는 나를 생각하면서 Daum라이프‘로드킬, 인간과 동물의 공존’ 마지막 부분의 글을 붙임니다.
P.S
도로에서 절대강자는 자동차다. 그 밑으로 자전거가 있고, 또 그 밑으로 보행자가 있다.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곳들은 대부분 걷기 좋고 자전거 타기 좋은 곳들이다. 교통약자들을 우선으로 배려하는 교통정책을 펼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동물복지를 강조하면서 2012년에는 더이상 비좁은 우리에서 닭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2013년 부터는 어미돼지를 금속틀(스툴)에서 키우지 못하게 한 것 그리고 보행자와 자전거 우선 정책은 모두 한 줄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약자에 대한 관심은 보행자와 동물에게까지 이어진다. 동물복지와 보행자•자전거 배려 정책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순망치한'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약자가 사라지면 그 다음엔 중간층이 약자가 돼버린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비약자가 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다. 자동차를 살 형편이 안돼서, 자동차가 달릴 도로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타는 도시와 나라들의 경우, 형편이 나아지면 어김없이 자동차로 바꿔 타게 된다. 한때 자전거를 많이 탔다고 알려진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 이제 자전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추세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공존에 대한 이해 없이 타는 자전거가 오래 갈 수 없다는 증거다. 도로에 나섰을 때 자동차 쪽에서 보면 자전거와 보행자는 길고양이와 다를 바가 없다. 공존해야 하는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서로 양보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할 것이다. 생각에서 행동이 나오고, 인식에서 결과가 나온다. 큰 고민 없이 엉뚱한 곳에 만들어진 자전거도로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전거 이용자조차 불편하게 만든다.마하트마 간디는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로의 진보는 자전거와 보행자가 얼마나 안전한지로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우리나라의 도로 진보 점수는 몇 점일까?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려보거나 걸어본 뒤 스스로 답을 매겨볼 일이다.
도보순례 코스
해남 - 도암 - 강진 - 장흥 - 보성 - 외서 - 송광 - 석곡 - 죽곡 - 곡성 - 남원 - 운봉 - 지곡 - 안의 - 위천 - 고제 - 무풍 - 설천 - 용화 - 둔전 - 황간 - 상주 - 문경새재 - 대사 - 한수면 - 수산 -계란리 - 단양 - 제천 - 영월 - 평창 - 대하 - 진부 - 연곡 - 주문진 - 양양 - 삼포 - 통일전망대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멋진 추억 오래 간직하세요.
산티아고길의 꿈도 꼭 이루시길~~
형제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나를 이기고 완주하심에 존경함니다
누구나 가질수없는 추억을 부러워 함니다
국토종단 말로만듣고 책이나 후기에서
여러번접했지요
저도 산티야고 는꿈속에서라도 걷고싶은 길이랍니다
비리버님에 국토종단길이 한편에. 인생성공기같습니다
길위에서 인생을 배우는 멋진스토리
읽는내내 조마조마했답니다
오늘은 어디서주무셨으며 식사는제대로 하셨을까궁금증도 유발됬으며
제고향 지리산을지나가셨군요
혹시알았드라면 따뜻한쌀밥에 된장찌개라도 끊여드리고 군불따뜻이땐 방한칸내들이고
밀린빨래얼른해서 방바닥에 널어노시라 하고픈 그런 마음에 배려가 듭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100세시대에 걸맞는 인생길에 피가되고살이되는 그런 종단길였기를
저두언젠가 떠날때꼭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