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촌(점말)마을에서/정원대
칠흑같은 어둠은 내리고
별빛의 안내로 길을 재촉하였다
긂주림과 질병을 짊어진 채 혹독한 박해를 피해
길이 아닌 길을 걸으며 유포리 서내 평창읍 유동
상리 미탄 산너미 대화 고인돌에 둥지를 틀고
하일리에 교우촌을 짓기도 하였다
또 한해가 지나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
점토흙을 마련하기도 하고 서로 서로 눈빛으로
신앙의 불꽃을 지피며 질그릇 꺼매기를 빗어
묵주 천주실의 담아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점촌店村(점말)
평창군 평창읍 유동리 3반 . 평창읍 상리1반 .
평창읍 도돈리 보건진료소 뒤 옹기터(평창강로 854번지)
1869년 유베드로 황요한 붙잡힌 곳(추정)
방림면 계촌1리 창수동, 계촌3리2반 병모루(어우실) ,계골,
굴아우窟巖, 향교촌
(1866 병인박해 피난지및 순교자 )심능석(심 스테파노)
이유일 안토니오 미탄면 창3리 옹기장골
미탄 회동리 산너미 옹기장골
용평면 장평리(고인돌)) 옹기터가 있고 후손들이 살고 있다
진부면 옹점골 : 호명초등학교 앞 500m(피대골 너머가는
입구),진부 거커리 옹기골
교우촌 : 평창읍 하일리, 물푸레 (두루안지) .산너미 고인돌
서내-속새목이(벌막)-개수 황골(시내지)- -창수동 어우실-
거커리- 피대골
굴아우 : 계촌 향교촌마을과 함께 굴아우 마을이 있는데
굴아우에는 굴이 9개소(아홉개) 있다
고 하며(4개소 획인) 피난지 굴 아래에 큰굴이 있고
황골(시내지)-속새목이(벌막) -서내 공소 -서내 분교(추정)
연결되어 있다 향교촌-원당리-느릅골-덕말재-중무재 -
판운-김삿갓면-주실
주실 : 1)영월 하동면주문리 주실마을(김삿갓면 주실)
2) 제천 배론舟論
1801년 황사영 사건으로 박해가 심화되자 배론에서
영월 하동면 주실마을로 숨어든 것으로 추정되며
1900.11.18 평창 하일리 공소에 참석 뮈텔주교님
고해성사 기록이 있다(독짓골 독지미 마을이 있다)
옥동광업소 자리이다
평창읍 유동리 점말 (1973년경 옹기터 사라지다) 옹기 받침대 등 발견하다
순교자(평창지역 거주하다 붙잡힌 사람) :1)계촌 : 심능석 (심 스테파노)
이유일 안토니오 2) 도돈리: 유베드로 황요한 3)김희달(미확인) 5명
평창군 방림면은 옛 강릉 이었으며 계촌 굴아우(향교촌)및 창수동 교우촌에
뮈텔주교님 (1900,11,14- 1900.111,22)평창 지역 사목 방문
방림면 계촌3리 향교촌 공소: 굴아우 - 계촌3리2반 병모루(어우실)
1900년대 평창지역 교우촌(박해를 받은 이들이 숨어 살았던 평창)
대화 개수 황골(시내지)-봉평 유포리 2리 속새목이(벌막))-서내 -
-창수동(어우실)-굴아우 향교촌- 평창 하일 물푸레(두루안지)
- 하일리 -영월 하동면 주실 미탄 산너미(회동리) - 평창읍
새골(조동리64번지)-대화 교우촌(신리 추정) - 장평리 고인돌(기록에는
유포리 서내 가장 큰 신앙마을)1882 미탄 산너미(회동리)에
신자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특히 굴아우에서 4km 떨어진
창수동 점말(어우실) 가는 옛길이 있다 .
1930년대 교우촌 : 유동리 교우촌(평창읍 유동리3반 .1973년경
옹기터 문닫음)
1代 옹기장 김병식(1915년생 ) 2代 옹기장 金元植(26,4,19 요셉)
1900년 이후 제천 미기미 마을에서 평창으로 이주
증언 : 김원식의 子 김학근 바오로 (1948.8.15) 전 평창군청 기획실장
(이주하기전에 옹기터거 있었다고 함)
출처 : 천주교 춘천교구 교회사 연구소 제7회 심포지엄
미탄면 율치리 1반: 분청사기 도요지는 15-16세기경으로
추정으로 발표 (강원대학교)
평창읍 도돈리 옹기터 : 증언 : 도돈리 거주 이용강(1937)
판운- 도돈리- 물푸레 공소-하일공소 연결되어 있다
*대관령면(도암면) 유천3리 피대골 稷臺洞:1866년 피난와서
살다가 깅릉 금광리공소- 명지리 공소로 옮겨 갔다고 한다
(양양의 명지리 현북공소 회장 이계용 5대조 평창군 도암면
피대골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난하였다는기록이 있다 )
주민들은 동쪽 골짜기는 稷臺洞 , 남쪽마을은 元卜洞 ,
옹기점골 : 호명리 호명초등학교 앞 500m
1866년 병인박해(고종3년)로 천주교인들은 혹독한 빅해와
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산속등으로 쫏겨 다니다가 옹기대장으로 생활하면서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옹구터(옹구점골)라고 한다
*천주실의 天主實義 :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전해 젔으며
천주교의 교리 책으로 종교의
원리와 이치를 기록한 책(한글 번역본은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평창읍 주진2리 가마실 골이 있는데 산세 지형이 가마솥을
닮아 부기동釜基洞 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2)평창읍 대하리 가정골 가마골은 기와굽는 터,
옹기터와 관련이 없음
3)진부면 간평2리 사기막골 (청자을 굽는 옹기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진부면 거커리 옹구터(교우촌) : 진부면 외거문리1반 오세웅(42.5.1)집
앞 밭가 거커리 옹구터(교우촌)
가마터 2개소 추정 (주변에 옹기 깨진 것이 산재되어 있다)
재확인 : 대화면 개수리 황골(시내지) : 대미산 너머 좌측
:향교촌(창수동)어우실 봉평 속새목이 서내
거문리5반 음골 저수지 (뮈텔주교님이 목격하신
정선 작은 저수지)
추가확인 : 대화면 신리657번지 신리 옹기터(옹기대장 김갑준1900년생 추정)
년도 불상 년경 묵호에서 대화7리 천주교 마을로 이사왔다(당시 묵호는
강릉대도호부에 속해있었다) 옹기흙은 강릉,횡성지역에서 가져왔다 ,
1960년경 대화 신리로 이사와 1970년경 옹기 굽다가 불상지로 이사 갔다
. . 주민들은 옹구집이라고 불렀다
증언 : 대화면 대화리 너브내 거주 이기화1924년생,이봉기1944년생
참고 : 뮈텔신부님 기록 : 대화면 대화리 교우들이 마중나왔다(
현지 답사한 결과 수해로 옹기터 사라지고 주변에 옹기 파손된 것이
산재되어 있다) 1900년경 박해가 사라지고 뮈텔주교 교우촌 방문이후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떠나 더 좋은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되며
(1904년까지 기록이 있다) 그틈을 타 화전민들이 교우촌이 있는 곳에
정착하면서 이승만 정권 (1950)1차 토지개혁(조치법)으로 경작지에 본인의
땅으로 등기하여 교우촌은 역사에 사라지게 되는 등 , 1968년 화전정리법
시행 1976년 종료 후 그곳에 나무를 심어 교우촌 터 사라졌다고 함) 특히 평창에
교우촌이 많은것은 숨어 살기에 좋은 두메산골)
* 직업관
예수 : 목수 , 사도바울 : 천막짜는 기술자 . 베드로 : 어부 .
박해시대 한국천주교인 : 옹기대장(기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