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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실
붉은 벽돌로 육중한 담을 쌓고 15칸의 방에 철창을
달아 만든 감금실(監禁室)은 한쪽 마루 바닥을 들어올리면
변기가 나오는 형무소 바로 그겄이었다.
이 감금실은 나예방령 제6조 및 동 시행규칙 제8조의
규정에 따라 원장이 징계 검속권을 행사하여 구금하고
감식 (減食)하며 체벌도 할 수 있는 형형장(珩刑場)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끌어다 수용해 놓고 철권 관리하면서
중노동으로 혹사 하거나 온갖 가학(加虐)에도 굴종케 하고
또, 그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예방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는
이 감금실이 형무소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이었다.
일제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는 환자들이
이 감방에서 무수히 죽어 갔으며 살아서 나온다 하더라도
신체의 불구가 되어 출감한다 .
출감하는 날 예외 없이 정관절제 수술을 시켜 버렸다.
[소록도중앙공원을 조성할 때 환자들은 강제노역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들에게 항거하거나, 일을 게을리 하거나,
그들의 시선에 잘못보였을 때 감금실로 끌려 갇혀
위의 일과 같이 당하였던 곳이다.]
단종대
단종대는 감금실에서 불구가되어 석방되면서
단종대에 끌려가 정관절제를 당해야만 하였던 곳이다.
1936년 부부가 소록도에 오면 강제 별거를 시켰다.
원인은 자녀를 못두게 하기위한 정책이란다.
여자분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못느꼈으나 남자들은 불편하여었다.
강제노역을 마치고 집에와서 식사준비와 빨레가 힘겨웠으리라,
여자분에게 부탁하여 도움을 받다보니 이성문제가 대두되어었다 한다.
환자대표가 일본인 원장에게 부부동거를 시켜줄 것을 요청하자
그럼 동거를 하되 남자는 단종을 하라고 하였단다.
살아남기위해서라도 피 눈물을 삼키면서도 단종을 하여야만 하였다는
비통을 담은 한마디의 노인분들, 절로 안타까움이 솟아오른다.
당시 남생리 마을에 거주하던 李 東 (25세)은 벽돌만드는
원토 채취장에서 사또 간호부장(감독)이 작업에 걸리적 거리는
조그만한 소나무 두그루를 옮겨 심어라는 명을 받아었다.
그 시간에 남생리 이 동氏 집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연락을 받고서 집으로 달려가 응급환자를 업고서 본관에
달려오는사이 명을 까맣게 잊어버려었다.
다음날 사또 수간호장(감독)이 호출을 하여 다짜고짜
소나무 생명만도 못한 인간이라면서 폭행을 가한뒤
감금실에 가둔후 석방과 동시에 단종대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통곡을 하듯 뱉고서 순수하게 누워
단종을 당했다고 한다.
* 단 종 대 * 이 동(李 東)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해부대
해부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린 당한 곳이다.
당시 부녀자가 임신을 하게되면 강제로 낙태를 시켰다고한다.
환자가 사망하면 가족이나 친지에게 한 마디 의사도
묻지도 않은채 마음대로 해부 하였던 곳이며,
또 한 생체 실험으로 20명에게 주사를 주입 후 24시간 내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하자 바로 해부를 하였으며,
또한 죽은 부녀자의 뱃속에 든 태아 까지도 해부 하여었다 한다.
(작은 사진은 당시 진열되어있던 해부용이다.)
히말리야시다
히말리야시다는 히말라야 산이다. (소나무과)
솔송나무와 히말리야시다는 소록도공원에서
유일하게 한그루로 아름드리로 되어 있다.
히말라야 시다는 히말라야 북서부가 원산지이며
나무 모양이 아름다워 세계 3대 미수 중 하나로 꼽힌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쓰일 무렵인 193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록수가 바로 히말라야 시다였다.
요즘 전 세계에 걸쳐 공원 조경수 및 가로수로
사랑받는 히말라야 시다가 ‘친일 잔재’ 논란에 휘말린 것이다.
정부 사람들이 친일파로 몰아붙여온 박 전 대통령 때
주로 심었다는 사실이 원죄로 작용한 것이다.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나무 심기를 국책사업으로 밀어붙였던
박 정권 시절 일본에서 수입한 3대 수종인
일본잎갈나무(낙엽송), 편백, 삼나무들도 이런 구분법으로 치면 ‘
친일 잔재’에 속할 것이다.
원산지 : 히말라야 북서부지방
종 류: 소나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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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 얘기를 읆어보면 2005년 도
전라북도 '전북대학교 박물관'앞에 서 있던
30년 생 된 히말리야시다를 모 청장이 방문하여 나무를 보고서
친일잔재라고 하자 학교당국에서 베어내었다는
TV뉴스를 보신 분은 잘 알것이다.
제대로 상식을 알았더라면 그러한 헤프닝은 없을 듯도 하엿는데
무식이가 罪인가, 유식이가 罪인가?
한번쯤 묻고 싶은 말인데...ㅋㅋ
황금편백
학명해설
Chamaecyparis : chami(지상의)+kyparissos(사이프러스)
obtusa : 뭉뚝하다
편백 (Chamaecyparis obtusa)
측백나무과(Cupressaceae )
잎 : 인엽, 잎끗 둔함, 녹색표면의 뒷면 백색 점 꽃
일가화, 자웅이주, 수꽃황색, 4월개화
열매 : 둥근 구과, 갈색, 종자삼각 (날개)
가지 : 수평, 소지는 편평, 수피는 적갈색
성상 : 상록침엽교목
수형 : 원추형
원산지 : 일본(삼나무와 더불어 대표적)
내공해성 : 중간
크기 : 40m, 흉고 2m
생육지역 : 중부이남
내건성 : 적윤지
질감 : 중간
음양성 : 음수
이식 : 용이 번식
실생 : 종자 건조저장, 춘파
무성번식 : 삽목-4월, 접목-봄에 복접
용도 : 독립수, 차폐용
비고,br> 'Nana Aurea'(황금편백): 황금색잎, 난장이형
(황금편백은 여름에는 녹색이지만 늦은 거을 부터
햇빛 받는 곳에는 황금색을 띠는데 잎사귀 끝부분에
연두색이 햇빛에 반사되어 황금색을 이룬다.)
축배나무(카이스키아 향나무)
축배나무는 아름드리가 한그루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그루에서 여섯그루까지 심어서 안에서는
가지를 잘라내고 밖에서는 전지를 하여
오늘날 한그루가 아름드리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원산지 : 일본
향나무과 종류다.
축배나무도 80년 이상된 고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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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엽수 > 측백나무과 > 향나무속 > 가이쓰까향나무(나사백, 가이즈카향나무)
가이쓰까향나무(나사백, 가이즈카향나무)
학명 Juniperus chinensis var. kaizuka Hort.
(일)カイズカイブキ
향나무의 변종으로서 일본에서 들여온 원예종이다.
향나무와 거의 같으나 침엽이 없고 주로 비늘잎(인엽)을
가지는 것이 차이점이다.
어릴 때는 침엽이 나오기도 하지만 자라면서 비늘잎으로 된다.
향나무는 흔히 짧고 날카로운 침엽이 발달하여 조경수로
심기를 꺼려하고 한다.
그래서 향나무 중 비늘잎을 가진 개체를 선발하여 품종
고정한 것이 가이쓰까향나무이다.
전정을 하여 여러 가지 인위적인 모양을 만든다.
자연스런 뻗음보다 사람의 손길이 너무 가버려서 오히려
운치를 떨어트린다.
가지가 나선상으로 뒤틀려 있어서 나사백(螺絲柏)이라고도 한다.
그 외 작은 가지가 예각으로 달리는 것이 특징이다.
건조에 강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조경수로서는 가장 널리 심겨지고 있는 나무다.
어디에서나 너무 흔히 만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본나무’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극일(克日)을 상징하는 우리의 문화유적, 예를들어
아산 현충사, 한산도 등에는 심기를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로 보이지만
실은 3그루 ~ 7그루로 심어져 안에서는 가지를 자른 상태에
공간이 만들어져 있고 밖에서는 다듬어져 있다.)
나 한송
원산지는 중국(일본)
소나무 과
나한송나무는 소록도에서 두번째로 인기가 높다.
아름드리 한그루 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그루의 나무로
전지하여 다듬어서 한그루의 아름드리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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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엽수 > 소나무과 > 나한송속 > 나한송
나한송
Podocarpus macropyllus var. maki Siebold
(일) ラカンマキ
중국이 원산지이고 조경용으로 남부지방에 심고 있으며
높이가 4-5m정도 자라는 상록 침엽수이다.
잎은 어긋나기하고 좁고 긴 모양이며 길이가 6cm전후,
나비가 0.6cm정도이고 잎의 양쪽 끝이 차츰 좁아지며
밑 부분은 짧은 잎자루로 이어진다.
잎의 표면은 진한 녹색이며 뒷면은 연한 황록색이다.
능수매화 꽃
능수매화는 80년 이상된 고목이다.
한국 매화는 4월 중순경 꽃이피기 시작하지만 향이 약하다.
그러나 능수매화꽃은 수양버들가지처럼 축 늘어져서
꽃이피며 향기가 강하다.
봄을 제일먼저 알린다하여 2월 중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여
3월 말경에 시든다.
우리나라에서 남부지방에 일부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지만
나무수령은 소록도의 나무가 제일 오래된 것이다.
원산지 : 중국
나무이름 : 능수매화, 장미과 로 속한다.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 하는 꽃이기도 하다
2월 15일경 부터 피기 시작하여 3월 말경에 꽃이 진다.
솔송나무
솔송나무는 일반관광사들로 인해 얇삭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어느 해는 1억에서부터 18억의 가격으로까지 치닫더니
이제는 1,2천만원 정도의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단다.
하지만 국립소록도병원에서는 가격평가를 받아본 적이
결코 없었단다.
소록도공원조성의 숨은 내력이 담긴 솔송나무를 두고
가격평가를 한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시초한
인권유린과 노역의 고통에 서린 恨을 가격으로
환산한다는 말이 되는데 물론 쉬운 생각으로
나무를 돈으로 환산해 본다는 것이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만은 아니다.
한센 환자로 고인이 되어 안고가셨을 이승의 恨과
고통 받은 아픈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모욕적인 가격평가가 아닐 수 없겠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전임 J 대통령이 청와대에 나무를
옮겨 갈려고 했다.
트레일러로 수송하자니 도로교통을 마비 시킬듯 하고
헬기로 옮기자니 장시간 밧줄에 메달려 있으면
나무가 죽을 확률이 많다하여 차라리 그자리에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는 헛소문이
관광오신 손님들 말로는 관광기사가 그러한 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
또는 J 비서실장이 나무를 뽑아간 흔적인 자리가 어디냐?라고
질문들을 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러한 사실이 없다.
그러나 솔송나무가 유명세를 치를 나무임엔 틀림이 없다.
밑에 사진과 같이 사람이 둥글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가지 자체가 둥글게 만들어진 것이다.
수령은 100년 이상 이며,
원산지인 울릉도 대하동에만 100여 그루 군락을 이루고 있고
그곳에는 천연기념 제 50호로 지정된 장소이기도 하다.
육지 전체에는 겨우 50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지만
주로 관상용으로 분재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 걸로 알고있다.
소록도공원의 한 그루 솔송나무에서수십 개의 나뭇가지가
자연스럽게 뻗어져 나온 것은 보는 사람마다
한결같은 감탄사로 탄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벽돌제조공장 터
1933년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연화공 한 사람을 데려와서 환자들에게
붉은벽돌 만드는 기술을 전수시켜 숙련되자 하루에 생벽돌을
사만장씩 찍어내었고(현 녹생리 마을) 그곳에서 건조시킨 벽돌을
공원으로 일일이 옮겨 가마에 일회 구워내는데 십 만 장씩을
구워냈단다.
당시 가마굴뚝 자리가 십자가상이 서 있는 연못 자리이다.
연간 천 사백 만 장씩 생산한 벽돌은 당시 원생 6,200여명이
살 공공건물을 짓는데 소비하였고 한편으론 육지로 옮겨 졌는데
부녀자는 머리에 이고, 남정네는 지게를 져서
동생리 선창에서 배에 실었다고 한다.
구라 탑
오마도 간척사업 1962년 조창원 원장님께서 환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 다섯개의 무인도 섬을 간척하여
환자들에게 분배하여 독립을 시켜주기위해 야심차게 추진 하여었다.
희망찬 꿈을 안고서 불구한 손으로 일을 하다보니
상처가 생겨 피 투성인채로 자진 작업을 강행 하여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발, 정치인들의 반발, 당시 국회의원의
선거의 공약 등 의 악조건에 어쩔 수 없이 공사진행률은
74.6%가 진행 되었던 것을 전라남도에 반환되고
조창원 원장님은 서울국립병원으로 강제 전출 되었고
원생들은 소록도로 귀환 되어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가하였던 "국제 워크캠프단"133명도
집으로 귀가 하기전에 한센환자들이 현대의학으로 꼭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서 구라 탑 을 세워주어었다.
도안은 조창원 원장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이다.
미카엘 천사가 창을 들고 사탄(뱀)을 찌르는 모습이다.
세월이 흐른뒤에 '이청준으 작품'소설(당신들의 천국)에서
일부분을 다루고 있다.
공원에 조성되어있는 바위는 완도, 득량만(보성대)일대
해변에서 채취하여 수십명이서 목도로 하여 옮겨 온 것이다.
바위만도 힘든데 위에는 일본인들이 선채로 지휘를 하여었다.
아무리 힘들고 뼈가 으스러진다해도 일본 감독관이
쉬어라는 명령 없인 자유로이 쉬지도 못했다고 한다.
("보리피리 시 비"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두 그루의 산다화 꽃이다.)
[산다화 꽃]
처음보는 순간 동백꽃!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름표에 일본 원산의 차나무과 산다화 라고
적혀있습니다.
"산다화는 동백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약명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일본 원산 흰동백이라고 해도 되겠죠?"
다른이름
산다목, 산다화, 산다수 등
과 명
차나무과의 상록교목
특 징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서 관목으로 되는 것이 많습니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이고 잎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잔 톱니가 있으며 윤기가 있습니다.
꽃은 붉은색으로 이른봄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꽃잎은 5∼7개가 밑에서 합쳐져서
비스듬히 퍼지고, 수술은 많으며 암술대는 3개로 갈라집니다.
열매는 삭과(果)로 둥글고 지름 3∼4 cm로서 3실이며,
씨는 검은 갈색을 띱니다.
꽃말은=
'신중·허세부리지 않음’이며, 꽃잎이 납작하게 활짝 퍼지는 것을
뜰동백(var. hortensis)이라 하며 가장 많은 품종이 있고
흰꽃이 피는 것을 흰동백(for. albipetala), 어린가지와 잎 뒷면에
털이 많이 나 있는 것을 애기동백이라고 합니다.
분 포
우리 나라의 남부지방·중국·일본 등지에 분포
용 도
관상용으로 심으며, 씨는 기름을 짜 이용.
(소록도 중앙공원 산다화 꽃은 11월 말경에 피기 시작하며
12월 중순부터 근처엔 신다화 향기가 은은하게 흐르기도 하고
겨울내 꽃이 피었다 2월 말경에 꽃의 절정은 막을 내린다.)
「 보리피리 詩 碑」
배경사진 '보리피리 시 비'는 무게가 수십 톤이 넘는 바위인데
본래 완도 땅으로부터 옮겨왔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의 강제노역으로 가져왔는데
수백명의 당시 환우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양 옆에선 지렛대로 움직여서 이동해온 것이라한다.
현재 육안으로 보이는 부분보다 1.5배의 크기가
땅속에 묻혀있다고하는 이 바위를 옮긴 한센환우들은
채찍에 맞아 살점이 찢어지면서 튕기는 핏방울 뿌렸고
더러 몽둥이에 맞아 죽는 이도 많았으니
죽어가는 동료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 때 그 분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차마 못견디는 심정에 불구의 육신으로도
살기 위한 힘을 써야했던
기막힌 마음들....... "죽어도 놓고 놓아도 죽는 바위"라고 했었단다.
이곳 노인 분들이 경험한 노역장 이야기를 듣노라면
상상을 초월한 참혹함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위에 하고많은 좋은 글 중에서
왜 하필 ‘보리피리’ 詩가 새겨져 있을까?
소록도 '보리피리 詩 碑'는
1972년 5월 17일 개원 56주년에 제막식을 가졌다.
'보리피리 시’는 한센인을 모르는 일반에
아주 중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시인데
작자(한하운시인)와 작품이 구설수에 올랐는데(1953년 여름)
이른바 <나 시인사건 癩 詩人事件>으로,
발단은 아마도 '한하운시초'의 재판再版이 출판된 6월로 보인다.
「1953년 8월 1일부터 주간지 '신문의 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이라 말한 데서 사건은 일어나고 심지어는
한하운이라는 아호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하여
시의 내용마저 적색시라는 것이었다.
또한 혹독하게도 나 자신마저 허구의 인물이라고 날조하여 떠들어댔다」
----<이상, 한하운 著 '보리피리에 관하여'에서 발췌>---
여기에 사실확인을 하기 위해 취재를 지시한 사람이
서울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吳蘇白)이었다.
최초의 '한하운시초' 중에 <데모>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피빛 기빨이 간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당시 평론가 이모라는 사람이
정음사(正音社)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모양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물론 동기는 시시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경찰뿐만 아니라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으나
한하운이란 인물이 실존함은 물론 그의 시도
불온하지 않다는 이 밝혀졌다.
------<이상, 오소백 회고담>-----
이 사건을 취재토록하면서 사건을 확대했다하여
오소백과 사회부 차장이던 문제안(文濟安) 기자가
신문사로부터 파면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러나 그 취재과정에서 한하운으로부터
그의 대표작인 <보리피리>를 얻어내었다.
신문사를 찾아왔던 시인(한하운)은 편집국 사무실에서
즉석의 <보리피리>를 썼던 것이다.
이 시는 1955년에 간행된 한하운 제 2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56년부터 그를 사귀었던 김창직(金昌稷)은
「그는 떡대가 크고 씨름대장처럼 생겼지만 보기보다는 내성적이고
깐깐한 편이었다」고 그의 성격을 말하면서도
술도 보통 이상으로 잘 마셨다고 한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보리피리> 이후의 작품들이
그 전의 작품들에 비해 처진다는 데에 일치한다.
나병이 치유되고 유명해짐으로써
그만큼 치열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문단의 일각에서 추리하는 것처럼
어떤사람(이병철)의 첨삭이 들어 있었던 까닭일까.
그렇다면 그가 남 앞에서 직접 쓴 <보리피리>의 탁월성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보리피리> 이후에도 유수한 문예지에는
그의 시가 거의 실리지 않았다.
그는 73년 여름 수뢰(受賂) 혐의로 당국에 구속되었다가
오소백의 진정으로 풀려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병인 간경화를 앓다가 75년,
십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의 글을 다 읽고나면 무슨 메시지가 전달될까?!
읽으신 분들의 가늠만을 상상하면서.....)
보리피리 / 시인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때 그리워
피 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畿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ㅡㄹ 닐니리.
4대 하나이원장 동상이 있던 서있던 자리이다.
당시에 환자가 소록도에 오면 소록도에서만이 사용하는 돈을
바꿔 주었다.
원인은 도주를 막기 위해서라고한다.
그러한 돈을 기금을 모금한답치고 빼앗은거나 다름없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돈으로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환자들을 참배를 시켰다.
매일 누가 참배를 하고 누가 참배를 안했는가를 보고 하겠끔
조직적으로 감시도 시켰다고도 한다.
더구나 매월 20일 [보은 감사일]로 정하고서
원생 모두가 참배를 하겠끔 하였다고한다.
어느날 원장이 참배 계단을 오르기전에 이춘상 이란 원생이
길을 가로막고서 품고있던 칼로써 "너는 환자들에게
너무 못할짓을 많이 시켰다.
내 칼을 받아라" 하여 왼쪽 가슴을 찔렀다고한다.
이춘상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원장은 출혈이 심하여
그날 저녁에 자택에서 숨졌다고한다.
이춘상은 광주법원에서 사형, 대구 고법에 항소에도 사형,
상고에는 기각되어 사형되었다고한다.
동상은 태평양 전쟁때 일본에서 군수품을 만든다고
강제 징발하여가고, 비석은 1956년 개원 40주년 기념하여
사각면을 깎아내고서 다시 소록도병원에서 새긴 것이다.
그래서 철거를 하질 않았다고한다.
백목련 (5월 중순에 피기 시작하여 6월 말에 꽃이 진다)
백목련을 향목련이라고 한다.
일본산이며 관상용으로 심는다.
원산지에서는 높이 20m, 지름 1m 정도 자란다.
나무껍질은 연한 회색이며 가지가 굵고 엉성하다.
잎은 어긋나지만 가지 끝에서는 모여달린 것 같고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의 긴 타원형이다.
잎 표면에는 털이 없고 뒷면에는 흰빛 잔 털이 있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5∼6월에 가지 끝에 1개씩 피고 지름 15cm
정도로 흰색이며 향기가 강하다.
꽃받침조각 3개, 꽃잎 8∼9개이고, 수술과
암술이 많으며 수술대는 분홍색이다.
열매는 타원형이고 구과처럼 생겼으며 길이 15cm
내외로서 가을에 홍자색으로 익는다.
종자는 골돌 속에 2개씩 들어 있고 벌어져서 나오며
흰색 실에 매달린다.
관상가치가 있어 정원이나 공원에 심는다.
목재는 연하고 가공하기 좋으므로 가구재와 조각재로
사용하고, 나무껍질은 한약재로 쓴다.
(백목련의 전설)
옛날 하늘 나라 왕에게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는데,
많은 귀공자들이 그녀를 따랐으나
공주는 오직 늠름한 북쪽 바다지기 사나이만을 좋아하였습니다.
어느 날 몰래 궁전을 빠져 나온 공주는 먼 길을 걸어 바다지기에게 갔는데
이미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공주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고 그만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바다지기는 공주를 고이 묻어 주었고,
자기의 아내도 잠자는 약을 먹여 공주 옆에 나란히 묻었습니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하늘 나라에서는 공주는 백목련으로,
바다지기의 아내는 자목련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다지기는 평생을 홀로 살았다고 전해지고고 있답니다.
오엽송(섬잣나무)
오엽송이란 정원수로도 심고 분재도 하는 정식 명칭은
"섬잣나무"를 말합니다.
겉씨식물 구과목 소나무과의 상록교목.
학명 Pinus parviflora
섬 지방에서 자란다. 높이 30m, 지름 1m에 달한다.
줄기가 곧게 자라 수관이 좁고 수피는 갈색이다.
잎은 5개씩 달리고 길이 3.5∼6cm, 나비 1∼1.2mm로
양면에 4줄의 흰 기공조선(氣孔條線)이 있으며
단면에는 2개의 외위(外位) 수지구(樹脂溝)가 있다.
암수한그루로서 꽃은 6월에 핀다.
수꽃이삭은 긴 타원형으로 길이 8mm이고 노란색이며
새가지의 밑부분에 20개 내외가 달린다.
암꽃이삭은 길이 1cm 정도의 달걀 모양 타원형으로
연한 녹색이고 1∼6개가 새가지 끝에 달린다.
구과는 원통 모양 또는 달걀 모양이고 길이 4∼7cm,
지름 4∼5cm이다.
25∼40개의 열매조각으로 이루어지며 노란빛을 띤
갈색으로 이듬해 9월에 익는다.
종자는 달걀 모양 원형이고 뒷면은 검은 갈색이다.
얇은 막으로 덮이고 길이 10∼15mm이다.
날개는 종자의 길이보다 다소 짧다.
생장속도는 느리지만 재질이 좋아 기계재·건축재
등으로 쓰며 잎의 감촉과 색깔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흔히 재배한다.
한국(울릉도)·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이 나무 외에 잎이 5개로 되어 있는 소나무류는 잣나무.
스트로브잣나무, 누운잣나무 등이 있는데 스트로브잣나무를
제외한 다른 나무들은 우리 토종나무들입니다.
따라서 오엽송(섬잣나무)은 무조건 일본서 들여온 나무가 아니고
우리나라 울릉도에도 자생하고 있으므로 틀리는 말이지요.
오엽송중에 잣나무는 우리나라 토종수종입니다.
오엽송이 일제시대때에 강제로 심어진거라는 말은 자주 듣는데,
오엽송중에 어떤 나무가 일제때에 강제로 심어졌는지
이름을 알려주시면 좋을듯합니다.
적송 소나무는 순 한국산이다.
분재 처럼 생겼다고 하여 자주 분재로 다듬었는지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소나무를 손질 하시는 분은 없는 줄로 안다.
적송 소나무가 생긴대로 살아 온 것이다.~
반송나무
잎 : 상록성, 침형, 2개 속생
꽃 : 일가화(암, 수), 5월중순
열매 : 난형, 4.5cm
가지 : 수피는 적,흙갈색
성상 : 상록침엽교목
수형 : 하형
원산지 : 한국
내공해성 : 약하다
크기 : 5-10m
생육지역 : 전지역
내건성 : 적윤지 토양
질감 : 곱다
음양성 : 중용수
이식 : 보통
번식 : 파종 1개월전 노천매장
용도 : 독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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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존사진 .글 잘보갑니다...어제 진짜 전화 목소리 감사합니다...오늘도 즐겁게 사세요..
전시끄러워서 목소리가 어케 들렸는지 ...너무 소리크게 질러서 정말로 남자로 아실라
잘보고 갑니당요..
네 허브님 늘씩씩하신 주인님
하이고..참말로 구경 잘 했씨유~^^*
네 아씨님 ㅎㅎㅎㅎㅎ 무엇이라도 있어야 보고 즐기지요. 그래서 오늘은 부지런을 좀 떨었어요. 어제저녁에 먹은 술값할려고요. ㅎ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번개님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