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날 인 7월 21 일 속초로 올여름 두번째 휴가를 왔습니다.
7월초에 남해로 갔던 첫번째 휴가에서 구내염으로 고생했던 보상으로 동해안을 택했답니다.
고향에도 들렸고요. 7차 항암인 이번에는 참을수 있는 부작용이라 견딜만 했습니다.
고성까지 올라가면서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맛있는거 찾아먹고 그야말로 아주 편안한 휴가르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상 관광이 취소가 되면서 전체적으로는 을씨녕 스런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사 그리 오래사는것도 아니건만 이미 1세대가 흘러간 지금 시점까지 동족끼리 갈라서서
아직도 총부리를 마주대고 쏘아야 하는지
북녁 하늘을 바라다 보면서 문득 어린시절 받았던 북에대한 교육이 생각납니다.
암환자가 그것도 4기 환자가 너무 많은걸 생각하는건 아닌지 ^^ 에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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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당시에는 휴전후의 어수선함이 채 가시지 않은 그런 봄날이었습니다.
머리는 모두 까까머리(삭발)였고 개중에서 그래도 면내에서 좀 산다는 집
아이들 몇명 정도만 상고머리를 하고 있을정도 였고요.
여자 아이들은 모두 귀가 들어날 정도로 잘라버린 단발머리 였읍니다.
물론 책가방이라는 물건은 아주 귀하고 정말 가지고 다니고 싶은
귀한것 이고요.
거의 책보에 학용품을 싸서 남학생은 등에다 둘러메고
여학생들은 허리에 메고 다녔답니다.
도시락(알류미늄으로된)도 귀해서 왠만하면 놋그릇에다 점심을 담아 가지고 다니던 시절 이었답니다.
당시에 다니던 초등학교는 일제때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는데요.
중간 중간에 옹이 빠진 자리가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답니다.
물론 교실 바닥이나 복도(당시는 낭하라고 했음 역시 일본식 단어임)도 모두 마루로 되어있어서
교실 한편에는 마루 밑으로 들어갈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출입 할수 있게 만들어 놓았지요.
교실에서 연필이라든가 지우개 같은 물건을 떨어 트리면 마루 틈새로 빠지고
그러면 마루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꺼내와야 했답니다.
청소는 각 분단별로 했는데요.마루 바닥에 초를 칠(촛불을 켜는 초)한 다음 마른걸레로
반들 반들하게 닦는게 일과였읍니다.
보통 책,걸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일렬 횡대로 나란히 무릎을 꿇고
박자에 맞추어 닦아 나가곤 했답니다. 박자는 주로 구구단이었지요.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구구 팔십일
그렇게 몇번 되풀이 하다보면 미끄럼을 탈정도로 매끈해지지요.
교단 위에는 예의 다 낡은 칠판이 있고 정면 중앙에 태극기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사진이 있고 좌측에 교훈이 우측에는 급훈이 있엇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호칭은 이승만 박사님 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박사 호칭은 그야말로 대단한 존경의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장면 정부에서도 장면총리를 장면 박사님으로 호칭 했답니다.
사진으로본 이박사는 여느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었고
부인이신 프란체스카 여사는 호주댁으로도 불리워 졌는데요.
그분의 출신국인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 생긴
애칭이었답니다.
당시는 자유당 정권말기라 이박사 신격화에 온정부의 힘을 쏟아 부었을 때구요.
통일 정책은 북진 통일 이었읍니다.
교실 뒷편에는 한반도그림을 배경으로 한손에는 총을 들고 온몸에는 수류탄을
감고 한손을 번쩍들고 포효하는 국군의 그림이 있었구요.
인민군을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그림등 은 흔하게 걸려 있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참 살벌한 그림들 이었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구호는 "찾아내자 오열" 이라는 포스터 였는데요.
오열이 무슨 뜻인가 하면요. 육이오 전쟁때 인민군이 남하 해오면서 공산정권때에
전투병력은 일선으로 가서 전투를 해야 하니까 지방의 치안은 거의 토착민 중에서
숨어지내던 공산주의자들이 담당을 했는데요.
치안 교육을 받지 않은 민병대의 수준 정도 였으니까 부작용이 대단히 많았나 봅니다.
주로 사적인 감정에의해 처형하고 집행했답니다.
결국 수복을 하는과정에서 그들중 일부는 북으로 길을 잡았고 미처 도망하지 못한 사람들이
숨어서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그사람들을 강원도 에서는 "지방 빨갱이"라고 했는데 그게 오열 이랍니다.
오열에 관련된 가족들은 결국 그 지방에서 살만한 환경이 않되어
대다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답니다.
그당시 교과서에 실린 동요중에 이런 노래도 있었답니다. 제목이 잘기억이 안나는데요
"간호원의 노래"인지 "백의천사의 노래"인지 정확하지 않고 가사도 처음만 기억 나는데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상처입은 아저씨를 간호해주는
흰모자의........" 어쩌구하는 가사 였답니다.
지금생각하면 도저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만한 내용으로는 부적절 한 동요 였는데요.
그당시의 사회상을 엿볼수있는 한대목이지요.
지금 금강산 문제로 한참 문제가 복잡한데요. 결국 금강산 가는길이 막혀서 착잡한 마음으로
어렸을때 보고 배운 북한에 대한 교육이 생각 나서 몇자 적어 보았읍니다.
북진통일이라는 구호와 이박사 시절 결코 오래전이 아닙니다.
언제나 마음놓고 남북이 왕래를 하고
통일이 될런지 .............
암 4기 환자인 필자가 살아있을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 호 국(에이원)
첫댓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상처입은 아저씨를 간호해주는 흰모자에 적십자 간호언니는 천사와 같이도 거룩하지요~~ 저도 노랫말을 정확히 기억하네요.
나팔꽃님도 동시대 분이시군요 ㅎㅎㅎ 얼마후에 그 노래가 교과서에서 사라졌는데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저도 어려서 포스터를 그리면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고 중간에 철조망 그려 놓고 낫과 도끼를 엑스자로 그려 놓았던 생각이 납니다. 두살 위의 오빠가 그림을 아주 잘 그려서 도움을 줬는데, 표어도 지금 생각하면 엄청 무서븐 거로 지었었지요.. 큰아버지가 6.25 때 전사하셔서 조부모님들이 아픔이 컸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때 생각하면 참 살벌했지요? 정서적으로 너무 강하게 주입을 시켜 놨는데 그런 강한 주입을 받았으니 암은 무조건 이겨 낼듯한데요^^
에이원님과는 조금의 세대차이가 있지만 대광리,,전방에 살때 아침에 일어나면 논이나 밭에 삐라가 떨어져있나 살펴보던 시절이있었습니다,, 그것을 주워서 학교에 가져가면 공책등 상품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6.25날느겨보지 못한 남과북의 분단이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오늘 아침 새삼 느겨집니다 어려서 잘은 몰랐지만 힘들고 어려웠던시절이었던것 같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세상사 근심걱정없는 그때가 좋았습니다,,남북통일이 곧될것처럼 이산가족 상봉하고고 왔다갔다했는데 이젠 그런 희망을 가져보기도 힘들어진것 같아 맘이 불편합니다,,, 건강하세요
삐라!! 그게 있었네요.. 맞습니다. 학교에 가져가면 공책주고 그랬네요!! 바람부는 이튿날에는 유난히도 많았었는데요. 이제는 잊혀져 가는 단어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