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65)
겨울 日記 /김회선
놀이터 옆 감나무에 까치밥 하나 떨고 있다
이용 금지 표시가 붙어 있는 놀이터
놀던 아이들 모두 따뜻한 나라로 사라지고
북쪽에서 불어 온 바람만 벤치 근처를 서성인다
두 딸과 사위가 다녀가고 난 설날 오후
나는 홀로 집에 남아 보일러 온도를 낮추고
황량한 바깥 풍경을 손님 맞이하듯 집안에 들인다
감나무가 끝에 달린 마지막 잎을 떨구며
먼 길 매고 온 봇짐을 내려놓듯 길게 숨을 토한다
북한산을 막 넘고 있는 해는 헐떡거리며
숨차게 달려온 오늘 하루를 갈무리하는 중이다
나는 막담배 힘껏 빨아 시간을 묶고
지난 시간 되돌리며 삶의 주석을 단다
메마른 감정이 내 눈 안쪽으로 눈 녹듯 스민다
나무들이 몸이 가려운지 꿈틀대고
가지들은 모두 남쪽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다
어둠이 내리며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나는 풍경을 닫고 저녁을 위해 쌀을 안친다
건조해진 손에 크림을 바르고 침대에 누우려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자 메시지에 답을 한다
따뜻한 감정이 손끝을 타고 허공으로 퍼진다
추운 새벽, 장독 위에 井華水 떠놓고
자식들 무탈하기 빌던 어머니가 보고 싶은 저녁,
머지않아 이곳에도 봄이 올 것 같다
겨울 천렵 /서대범
강이 그리우면 가야지
아카시아 찔레꽃 만발해서
봄나들이하던 오월은
그 사람도 있고 그림도 있어
햇살에서 부서진 파편
가슴에 박히던 하루였습니다
총 천연색 필름 출렁이던
개울이었습니다
아리도록 추운 날
흑싸리 껍데기 서러워
또 다른 봄을 시험했습니다
12월 화투판 짝 맞추던
밑장 빼기는
어설픈 힘만 남았습니다
그대 이야기가 그리워
예쁜 그림 앞에 서성거렸습니다
흐르는 물살에
일렁이는 편린
잠잠한 바윗돌 안에는
꿈꾸는
찔레 먹은 꺽지 퉁가리
뾰족한 가시 돋아 있었습니다
겨울 참나무 숲 /허만하
다람쥐는 겨울 참나무가 내뿜는 미나리 냄새 같은 가랑잎 향기를 좋아한다.
바스락거리는 잎새를 말끔히 떨어뜨린 참나무는 시린 실가지 끝에서 윤곽을 지우기 시작한다.
알몸의 가지 끝이 먼 산등성에 번지는 가무스름한 갈색 물안개가 되는 것은 그 때다. 목쉰 바람
이 여윈 가지 끝을 건널 때 엷은 안개는 잠시 흩어지는 시늉을 할 뿐 다시 실가지 끝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두 팔을 쳐들고 소리를 지르던 참나무 숲 우듬지 끝이 스스로 맑은 바람소리가 되는 순간을 사람
들은 보지 못한다.
겨울 /나병춘
겨울은 거울이다
맑고 투명한 거울 앞에서
지난 날을 되돌아본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뜨거웠다
숨막히게 치달리던 젊은 근육질의 포효소리
청천벽력 번개칼 저미는 매미 태풍 소리
지난 가을은 정말 쓸쓸했다
모래밭에 서성이던 발자국들 다 지워지고
마시다 버린 소주병 콜라 캔들 질펀하다
이제는 썰물에 다 쓸려가
텅 빈 쓸쓸함
텅 빈 고독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빛나는 이마 바래기한다
형형한 눈빛 저 알 수 없는
충일감
상실은 또한 새로운 약속을 잉태한다
썰물은 밀물을 불러오고
절망은 또다시 소망을 일깨운다
벼랑 앞에 서 본 자는 알리라
바람의 냉찬 열기를
소나무의 튼실한 알뿌리를
겨울은 꽁꽁 얼어붙은 거울
내 마음도 영혼도 햇살 아래 반짝인다
높고 외로운 상고대 환한 눈물이 되어
겨울자락 /배태성
칼 바람 휘익
낡은 창문을 헤지도록 두들기고
길게 드리운
오래된 감나무 가지들
부스러지는 바람결 잡아
밤새도록 비벼 밟는다.
떠놓은 물그릇 덜커덕
창가엔 색 바랜 커텐 조각처럼
겨우 숨죽이고 매달린채
끈이랍시고 동여메고,
엉성한 문짝
삐익 소리내며 열려도
긴 겨울 아랫목은
이부자리 달랑 하나있는
흙 바랜 단칸방.
겨울, 운문사에서 /한도훈
겨울, 구름의 문을 열면
칼끝에 스며드는 향기가 절정에 선다
여기가 진정 삶의 벼랑 끄트머리인가
막걸리 스무통 먹고 갈짓자로 뻗어
땅바닥을 기고 있는 반송은
부처 수염 잡아채고 싶어
뻘건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아참, 운문사 부처는 수염이 없다지
회오리바람이 구름문을 닫아버리면
낡은 바랑에 숯검댕이 가슴을 쓸어 넣고
팔도 유람이나 해볼까
그려 숯은 참숯이 최고지
길가 고랑 해우소 만나
속엣것 남김없이 토해내고
머릿속에 든 지식 찌꺼기마저 둘둘 말아
햇빛에 불 지펴 태워버리면
저녁 범종은 지상에 낮게 깔릴 테지
겨울 새 /박인걸
겨울 새 한 마리 가엽다.
눈 쌓인 산속을 온종일 헤맸으나
한 톨 식량을 찾지 못해 날개를 접고
썩은 삭정에 앉아 눈을 감았다.
내가 땀 흘리며 노동에 절었을 때
너는 온 종일 낭만의 노래만 불렀고
내가 가파른 산길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날
너는 날개 짓 몇 번에 산을 넘었다.
활공하는 자유를 난 부러워했고
축지법보다 더 신통한 기술에
꿈속에서라도 산을 건너뛰고 싶었다.
하지만 난 너를 동경하지는 않았다.
노동 없이 사는 자유는 속박이며
땀 흘리지 않고 산 결과는 궁핍이다.
공중 나는 새도 조물주가 먹인다기에
굶어 죽는 새는 없는 줄 알았다.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게으른 새와 계절을 잃어버린 새는
폭설 혹한에 방향을 잃었고
예리한 눈과 날카로운 발톱도
비축 하나 없이 살아온 발자국에는
씁쓸한 후회만 눈처럼 쌓인다.
새들만 사는 숲에는 구호단체도 없다.
목숨이란 언제나 치열할 뿐이다.
겨울 이력서 /박병란
고졸이라고 썼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소리 없는 것들이 중력을 습득하는 중이다
가라앉지 않아도 된다면
날개 없이 나는 방법이 있을 거야
서울로 왔다
수표동, 겨울의 청계천은 모두가 열심이었고
발을 놓아주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버스에 내려 몇 걸음 못 가 울곤 했다
백 년 후를 상상하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아이를 낳고 한 곳에 눌러앉았다
무엇을 지켜야 할 때가 되면
연습 없는 삶은 자꾸 가라앉았다, 두터워지는 중력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다는 위로가
눈처럼 쌓인다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이력서를 쓴다
여자도 아내도 졸업했는데
고졸이라고 쓴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겨울 축복 /유안진
아모리 조고마한 아낙이어도
어머니라 부르면 무한 커지듯
눈이 내리면 겨울도 따뜻해라
눈 덮인 동네마을도 대지 같아라
도시 변두리도 고향 같아라
아아 이 축복 더 크게 받고싶어
눈 속에 얼굴 박고 따뜻이 울자
대지의 체온이 느껴지도록
어머니의 젖가슴이 느껴지도록
한 두 끼쯤 굶어 보자.
색다른 겨울체험 /손병흥
눈 내린 강원도의 빼어난 설경이 아름다운
낭만적인 색다른 겨울체험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자연환경
평창 강릉시를 비롯해서 주위 경관이 멋있는
평균 해발고도가 600m 이상에 이르는 고원
태백산맥 중심 위치한 정성군 횡성군 영월군
인간은 물론 동식물의 생육에도 적합한 환경
눈이 덮여진 평창 발왕산 정상 오르는 곤돌라
울창한 숲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대자연
화려한 비경 속에 눈썰매도 즐겨볼 수 있는 곳
또다른 겨울여행 짜릿한 질주 매력적인 볼거리
오대산국립공원 비롯한 대관령일대 용평 리조트
스키 외에도 골프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명소
겨울 명동 거리 /정민기
십이월이면
캐럴이 아이들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지하철역 바닥에는
아기 예수처럼
웅크린 사람들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던 구세군 종소리가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왔다
땡그랑땡그랑
동전이 되어 바닥에 쌓여만 갔다
겨울 사랑 /매향 도현영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흐느끼는 잎새 하나
칼바람에도 하늘거린다
보내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시리고 아프겠지만
자연의 이치는 냉혹하다
미련을 접어두고 순응하면
훗날 붉게 피울 네 세상 올 거야
식어버린 심장 밑거름될 마음으로
미련 없이 불태우거라
혹한에도 버티는 몸짱의 나목은
눈꽃 송이의 러브스토리로
추억의 한 페이지 장식하겠지
먼 훗날
가슴 쓸어내릴 위안으로
한 번씩 미소짓는 평온을 맞으련다
나의 겨울은… /유창섭
나의 겨울은
어둠 속 흩날리는 눈발 맞으며 홀로 선
아직 눕지 못한
옥수수 대궁으로부터 온다
별들도 차가운 바람에 숨을 죽이는
저 어둠 보다도
몇 곱 밀도 깊은
너의 그리움으로부터 온다
응달진 꼬불길, 미끄러운
일어서기도 힘든 길,
위태롭게 뒤뚱거리며 몸을 세우는
나의 그리움 길엔
언제나 네가 서 있고,
그 환영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넘어지고,
일어서다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가슴이 멍이 드는,
나의 겨울은
슬픈 눈빛만 보이는
절벽 꼭대기
찬바람 견디며 숨죽이는 청청한
너의 소나무로부터 온다
겨울 구곡폭포 /신달자
추억이 시려 등 굽고
심장 얼어 터져 눈 내리는 날
더 더 추운 기억을 찾아가네
가평군 대성리 구곡폭포
뼛골 휜 전라(全裸)로
훌렁 벗은 채 멈춘 저 오욕
언제였는지
그대가 등을 돌렸나 주변 겨울의 언 옷자락까지 붙들고
처절하게 튀어 나온 근육이 날카롭다
말문은 아예 닫아 버렸다
지난 세월을 뒤적뒤적
바람이 한 번 더 난장으로 불고
저 처형의 백색 소리 속에서
그대를 찾는다
나뭇가지 걸려 찢긴 비닐조각도 뒤적인다
다시 눈발 독수리 날개처럼 덮어오고
정금 같은 불호령으로 뼛골 휜
푸른 인광 날빛으로 천 개의 입을 닫은 체
번뜩이는데
그대가 남긴 말이 이것인가
치솟는 울화도 두 손 놓고 멈춰서는
숨죽인 절명의 순간
너의 말은 바람 속에 섞이고
나는 널 만나지 못한 체
더 깊은 얼음의 침묵 속으로 발을 옮기고.
겨울의 창 /홍윤표
사랑창 열어보니
상현달이 날 부른다
어둠 밖 비친 달빛
홀로서 허공드니
가는 길
삶의 길이런가
생명다해 걸으리
교회탑 높은 시선
바람소리 무겁다
무서리 내린 아침
네온불 간지르면
불빛도
한 커풀이런가
새샘내는 겨울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