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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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66)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요한은 보좌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말 <개역개정>은 앉은 ‘자’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틀린 번역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매끄러운 번역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놈 자(者)는 사람을 낮춰서 부를 때도 쓰이는 단어거든요.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앉아계신 보좌에 앉은 사람이라니, 그들이 도대체 누구일까요?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 우상숭배를 하지 않은 사람들, 이마와 손에 우상숭배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짐승의 표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계시록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13:17, 14:9, 14:11, 16:2, 19:20입니다. 표는 로마 제국이 체제의 안정화를 위해서 실시한 제도로 보입니다. 우리의 주민등록증 비슷한 것이겠지요. 이런 표가 없으면 당연히 일상생활이 크게 불편했을 겁니다.
그들이 ‘살아서’라는 말은 부활을 가리킵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순교 당한 이들은 최후의 부활이 있기 전에 먼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간 세상을 다스립니다. 요한의 이런 묵시적 환상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전체 신앙과 연관해서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세계의 마지막 날에 잠에서 깨어나서 온전한 몸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이와 달리 순교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여 세계의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 순교자들의 부활은 첫째 부활이고,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둘째 부활입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릅니다.
순교자들은 천년 간 ‘왕 노릇’을 한다고 했습니다. 왕 노릇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ἐβασίλευσαν(에바실류산)입니다. 영어로는 reigned, 즉 ‘다스렸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온 단어가 바로 바실레이아(나라, 통치, 다스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통치는 바벨론이나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입니다. 순교자들이 왕 노릇한다는 말은 세상 왕처럼 지배한다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세상이 오면 로마 제국의 폭력은 힘을 잃겠지요. 오늘의 현실에서도 우리가 모두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한다면 지금처럼 자본주의의 폭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요한은 그런 천년왕국을 꿈꾸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괄호로 묶인 대목은 일부 전승에 빠진 내용입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성경 원본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실되었습니다. 그 원본을 베끼어 쓴 사본은 많습니다. 사본에 따라서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위 5절의 괄호 부분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첫째 부활’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교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첫째 부활이 있다면 둘째 부활이 있겠지요. 둘째 부활은 그야말로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마지막 때 주어지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활을 첫째와 둘째로 구분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순교자와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늘나라 자체가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데 거기서 황금 면류관을 쓰는 사람이 있고, 개털 모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순교자나 일반 그리스도인, 교황이나 목사나 신학자나 평신도, 교회에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나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습니다. 똑같이 죽고, 똑같이 부활합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첫째 부활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가 순교 시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순교자가 나온다는 말은 교회가 백척간두의 처지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말이 순교이지 누가 순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당시에 순교자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교회가 로마 제국 안에서 중심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로마 문명권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보면서 뭔가 영적으로 크게 감동을 하였겠지요. 이런 점에서 순교자들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야만 부활 생명을 얻을지가 결정 나지만 순교자들은 그런 최후 심판을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분명한 생명을 얻은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기계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건 문제가 되겠으나 순교자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한다는 뜻이라면 크게 문제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모든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비밀입니다. 그 비밀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깊이 들어가는 게 최선이겠지요.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은 둘째 사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년 간 왕 노릇 합니다. 이 문장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세속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가서 사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는 낯섭니다. 완전히 판타지 동화나 영화처럼 들립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 관해서는 바로 앞에서 설명했으니까 여기서는 순교자들이 제사장이 된다는 말씀만 짚겠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 행위를 집행하는 일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제사의 종류는 여럿이지만 가장 중요한 제사는 희생 제사입니다. 희생 제사를 바칠 때는 동물을 잡았습니다. 주로 양이나 비둘기입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 있거나 제사를 바치는 이가 부자일 경우에는 소를 잡기도 했습니다. 희생 제사에서 핵심은 피입니다. 제사장은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생명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피를 뿌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가 없는 시대를 삽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세상이라면 초조하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겠지요. 러시아나 베트남이나 쿠바에서 보듯이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신앙생활은 가능합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체제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일단 교회 숫자가 얼마 안 되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반기독교적이라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겠지요.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리스도교 세력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칠골교회, 봉수교회 등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북한에도 ‘조선 그리스도교 련맹’이라는 교회 조직이 있습니다. 남북한 교회가 해외에서 모일 때 남한 교회 대표로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가, 북한 교회 대표로는 ‘조그련’(조선 그리스도교 련맹)이 참여했습니다. 어쨌든지 오늘날 순교 없는 시절을 산다는 건 한편으로 다행이기는 하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초적 깊이를 잃어간다는 점에서 불행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난 1960-80년대 가난했던 시절을 넘어서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20: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7절 말씀은 요한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사탄이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난다는 거 아닙니까. 이미 3b절에서 암시된 내용입니다.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이 천년 간 세상을 다스렸는데도 일시적으로나마 사탄이 다시 발호할 수 있다는 말은 요한이 볼 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탄의 저항이 끈질기다는 뜻으로 읽히긴 합니다. 여기서 사탄은 그리스도교를 무지막지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가리킵니다.
요한의 생각을 더는 따라갈 수 없으니 저는 이 말씀을 우리의 실존과 연결해서 일종의 ‘큐티’ 식으로 간략히 해석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생 구도적으로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평화를 누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된 삶을 어느 정도는 살아갑니다. 기복이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한평생을 삽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걸 실제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시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고 다른 이들을 판단합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출가 수도자들도 이런 실존에서 크게 다르지 않으니 세속에서 사는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한마디로 죽어야만 사탄의 유혹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탄의 유혹은 아무리 끈질기고 강력해도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잘 버티면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천년왕국 후에 잠시 활개를 칠 사탄이 미혹하는 대상은 ‘곡과 마곡’이라고 합니다. 곡은 왕 이름이고 마곡은 그 왕이 다스리는 지명입니다. 이 이야기는 에스겔 38-39장에 나옵니다. 에스겔은 구약에서 대표적인 묵시문학에 속하는 성경이니까 요한이 곡과 마곡을 언급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겔 38: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도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 ” 물론 곡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오기 때문입니다. 겔 39:4-5절은 이렇습니다. “너와 네 모든 무리와 너와 함께 있는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사나운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 먹게 하리니 네가 빈 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선지자가 언급한 ‘사나운 새’라는 표현은 새들이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의 살을 먹는다고 한 계 19:18절과 21절에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혹의 영은 정말 끈질깁니다. 오죽했으면 천년왕국이 끝나고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기 직전에 잠깐이기는 하나 다시 기승을 부린다고 요한이 말했겠습니까. 우리가 미혹 받을 때는 그게 왜 미혹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미혹은 우리 삶의 전체 영역에서 발생합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세련되게 일어납니다. 미혹에 한두 번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반복하지 않으면 좋으나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처음 아담과 이브는 뱀의 미혹에 속수무책 넘어갔습니다. 뱀의 미혹이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함 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마귀에서 세 번이나 미혹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받은 미혹 역시 아주 그럴듯하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미혹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기에 죽을 때까지 미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미혹에 떨어졌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기만 하다면 언젠가는 그 미혹에서 벗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