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인간시장(6권) 64. 현대판 식인종들

[물 안 개]

현대판 식인종들 저녁 무렵, 다혜는 친구 집에 가야 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침부터 하루종일 두 사람이 쏘다녔지만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오히려 아쉬움 뿐이었다. 다혜가 집에 전화 연락을 하고 다시 친구 집에 연락하더니 급하게 나갈 차비를 서둘렀다. "남자는 몰라도 되는 일야." "세상에 남자 모르는 일이 어딨어? 얘기해 봐." "소현이 알지. 걔가 첫앨 낳았대." "시집 갔으면 애 낳는 게 당연하잖아. 만들어 버릴 테니까." "단순한 얘기가 아냐. 자세한 얘기는 가봐야 알겠지만." "애가 나오자마자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갈일성이라도 했냐?" 어린애를 낳은 뒤의 문제라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심각할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고 태반이란 거 있잖아. 그게 어떻게 잘못 돼서 기분이 언짢나 봐." "태반?"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애 낳고 바로 돌아왔는데 친정 어머니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태반을 찾으러 병원엘 갔었나 봐. 처음엔 처리했다면서 딱 잡아떼더니 친정 어머니가 악을 쓰니까 지하실 냉장고에서 깨끗하게 씻어서 주더래. 그냥 받아오긴 했는데 식구들이고 산모고 모두 마음이 찜찜하다며 나더러 확인해 줄 수 있느냐는 거야. 나로선 방법이 없다니까 답답하다며 다녀라도 가래." "그러고 보니 나도 들은 얘기가 있어. 시중에 태반탕이 비밀리에 돌고 돈 많은 사내들이 강정식으로 퍼먹는다는 얘길 들었어. 퇴계로 어떤 골목에 가면 태반탕하고 태반회를 파는 집도 있댔어. 끔찍한 인종들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안 들었으면 모를까 이왕 들었으니 나도 갈게." "남자가 별걸 다 아네.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너무 끔찍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소문 못 들었어? 그 병원이 어딘지 모르지만 지하실의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까지는 적출물 처리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포장육처럼 깨끗하게 빨아져 있었다면 보통 일은 아니겠는데. 안 그래?" "그래서 끔찍하다는 거야. 내가 한때 병원에 있었고 간호대학 출신이어서 뭔가 알 거라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내가 따라가면 얘깃거리가 생겨. 진짜 사업가들이나 여유 있는 사내들은 그런 거 안 먹지만 설부자나 얼치기 사업가, 또 진짜 말썽 잦은 그놈의 벼락부자란 투기꾼 녀석들이 할 짓 없으니까 즐기는 일만 골라가며 하느라고 지렁이든 태반이든 안 가리고 처먹는단 말야." "좋아. 같이 가 봐." 내가 알고 있는 태반의 시중 유출과 태반의 이용자 부류는 일단은 그냥 해 본 소리였지만, 전에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한번 캐볼 생각을 했다. 어떤 녀석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태반의 판매망의 일원 노릇을 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났다. 그때도 웬만한 일에 담대하던 내가 인간이 태반을 먹고, 그것도 정력 강정제라는 명목으로 먹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구역질이라도 날 것 같았었다. 사람 탈을 쓰고 못하는 짓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출산부의 몸 속에서 나온 부류인지 낯짝이라도 보고 싶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게 세상인가 봐."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은 정력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당연하겠지. 적당히 운동하고 음식을 섭취하면 그게 정도일 텐데 그 이상의 잡질을 하려면 뭔가 위안받는 게 있어야겠지. 내가 들은 바로는 여자들도 태반회를 먹는다는 거야." "뭐라구?" "정말야, 미용에 좋다고 처먹는다는 얘길 들었어." "차암, 할 말 없네. 내가 병원에 있었고 내가 아는 상식으론 적출물 처리법에 따라 화장시키거나 매장하거나 그래야 하는 다혜는 몹시 우울한 기분인 것 같았다. 그녀가 간호대학 출신이 아니거나 간호원 노릇을 하지 않았던들 태반 얘기에 구역질부터 했을지 모른다. 소현네 집까지 가면서 우리는 내내 그런 얘기만 했다. 다혜는 아파트 앞의 상가에 들어가 신생아복을 사들고 소현네 집으로 가고 나는 찻집에 앉아 다혜가 알아오게 될 태반 얘기와 어떤 애들에게 손을 써야 이 사건을 풀어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 숨도 쉬지 말고 이 얘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봐 주세요. 이 현대판 식인종들의 상판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당신의 다혜가 돌아온 것은 거의 한 시간 정도 시간이 걸린 뒤였다. "뭐래?" "소현이 말이 맞는 것 같애. 정말 포장육처럼 깨끗하게 씻어뒀는데 필요 없다 싶은 건 잘라내고 비닐봉지에 넣은 냉동 포장육 같았어. 아무래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친정 어머니가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대. 그래서 부랴부랴 쫓아가서 그 산모의 태반을 달라니까 엉뚱한 소리만 하더래. 벌써 처리했다고 말야. 그래서 떼를 썼더니 아주 불쾌하게 그까짓 걸 누가 팔아먹을까 봐 그러느냐며 되레 산부인과에서 산모에게 태반을 내 주면 자신들도 편하지만 대부분 준다더래. 본래 출산비 속엔 태반 처리비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말야." "그것 말고 달리 들은 소문은 없어?" "큰 병원들은 아주 엄격하게 처리한대. 우리 학교 때 실습나갔던 애들 얘기 들으면 산부인과로 제일 유명한 J병원 같은 데는 매일매일 엄격한 감시 속에서 처리를 하고 큰 병원들도 대개 그런가 봐. 개인이 하는 의원도 대개는 제대로 처리를 하는 모양인데 부분적으로 일부 병원이나 의원에서 유출되겠지." 언제나 그 일부라는 것, 흔히 소수라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일부라는 게 다른 데 적용되는 것은 몰라도 산모의 태반 유출이라면 간파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방법으로 캐지?" "방법이 나서겠지." 당장은 방법이 나설 리 없었다. 병원 지하실을 뒤질 수도 없었고 병원 근처에서 기다리며 태반을 빼내는 현장을 추적하기도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내 생각엔 루트를 아는 녀석들을 찾아내서 역으로 뚫고 들어가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끔찍한 일이 많다많다 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참 너무들 한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이라면 그런 짓을 못할 텐데 말야. 의사라고 하면 무조건 허가낸 도둑 취급을 받는 것도 사실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단체로 덤터기를 쓰는 거야. 좋은 의사들이 얼마나 많다구. 세상 위해 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무료로 간병해 주고 또는 번 돈을 사회사업에 투자하고 말야." 의료인에 대해선 다혜도 꽤 아는 편이었다. 그래서 할 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도 알아. 의료인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면, 정말 모두가 돈벌레라면 인류는 벌써 파멸했겠지. 문제는 나쁜 부류들이 적잖이 존재한다는 사실야. 더구나 태반을 빼돌려서 몇 푼이나 벌겠다고 그런 짓을 하느냐 이거지." "설마 의사가 그럴까? 정말 몇 푼이나 되겠다고 말야.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혹시 적출물 처리하는 사람들 짓인지도 모르잖아?" 팔아먹겠지. 제 마누라 것도 물론 안 팔 테고." "꽤 비싸겠네. 그렇게 쉬쉬 하면서 팔아먹으려면." "아냐. 의외로 상상 밖으로 싸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애. 애 낳는 여자는 많고 필요한 사람은 그렇게 수요만큼 많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다혜를 집 앞에 내려 주고 곧장 광철이를 찾아나섰다. 종로통 어디선가 전자오락실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광철이라면 그쪽 일에 꽤 밝은 녀석이었다. 한때 그런 일하는 애들을 거느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방송통신대학에 등록하여 공부도 했고 골재 장사를 하다가 요즘 군데 들르지 않고도 광철이가 경영하는 전자오락실을 찾을 수 있었다. "사장 계신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계집아이가 쪽문을 가리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둑을 두고 있던 녀석이 바둑판을 엎어 버렸다. "야아! 총찬아 임마!" 우리는 얼싸안았다. 바둑을 같이 두던 녀석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몇 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이에 적당하게 살도 오르고 가슴도 더 벌어진 것 같았다. 무교동에서 이른바 삼총사라는 전문가였는데 손을 싹 씻고 살아가는 광철이가 대견해 보였다. "이 새끼, 왜 이제사 찾아왔냐? 나가자. 너 만나서 술 안 마시면 평생 후회한다." 우리는 종로통의 뒷골목 지하 술집으로 내려갔다. 할 얘기가 무진장하게 많았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서로가 살아가는 걸 듣다가 만난 것이었다. 처음 서울에 무작정 올라와 그때야말로 똥창이 맞아 흔들고 돌아다니던 친구였다. 광철이는 고아 출신으로 온갖 고생을 해서 소갈머리가 넓었고 실력에 있어서도 거물 대접을 받았었다. 어려서부터 그 바닥에서 자랐기 때문에 흔한 말로 족보가 높은 친구였다. "원철이 그새끼 연락되냐?" 광철이가 제 이름을 마음대로 지은 것은 원철이와 의형제를 맺으면서 그전에 갖고 있던 이름을 버린 때문였다. 그만큼 원철이와 광철이는 건드릴 사람이 없는 광철이도 그 바닥에서 뛰쳐나온 것이었다. 대학에 다니다 말고 훌쩍 외국으로 돈 벌러 떠난 뒤로 소식이 끊겼다. "언젠가 연락 오겠지. 그녀석한테 빚도 많은데." 원철이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던 의리의 사내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원철이에게 빚이 많았다. 밤을 꼬박 새더라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추억이나 감정들을 다 나눌 수는 없었다. "쌍놈아, 겨우 그따위나 부탁하려고 찾아왔냐?" 얼큰하게 취한 광철이가 이렇게 말했다. "그냥 둘 수 없쟎냐?" "하긴 그래." 녀석은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죄 주었다. 녀석의 말대로라면 태반이 많이 유출되는 것 같고 사람의 태반과 돼지의 태반이 비슷하다는 걸 이용해 재미를 보는 친구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태반의 유출은 의료법 제66조에 의해 오 년 이하 징역에 일백만 원 이하의 벌금이란 규정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료인에 해당하고 몰래 빼다 파는 사람들에겐 적용할 법적 근거가 없어서 고작해야 즉심 정도이기 때문에 그런 조직은 찾아내기도 어렵고 처벌받고 나오면 더 지능적으로 장사를 한다고 했다. 큰 병원에는 자체 소각처리장 같은 게 있어서 자체 처리하는 경우도 많지만 소각시설이 없는 이와 같은 데에서는 매장이나 묘지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한 보사부장관이 인정하는 비영리 의료단체에 위탁 처리할 수 있다는 게 규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흘러나온 태반이 비밀스런 조직에 의해 판매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신선한 것은 붉은 빛깔이 도는 것인데 초산부나 처녀 임신부 것이면 값도 두 배로 뛴다나 봐. 부패된 태반의 경우엔 인체에 해롭다는 데도 그런 경우엔 전기로 말려서 팔기도 하나 보더라. 나도 들은 얘기니까 그녀석 만나서 확인해 보면 속속들이 알겠지." "그녀석이 얘길 해 줄까?" "내 얘기하고, 안 되면 한바퀴 돌려 버려. 손 떼라고 해도 그녀석 돈에 눈이 "그런 녀석이라면 혼 좀 내 줘야겠다." "더 나쁜 짓 않고 그걸로 밥먹겠다는 데야 별로 할 말 없더라." "아무튼 우리 이젠 뭉쳐가며 살자." 우리는 아쉽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철이 녀석만 나타나면 세 녀석이 뭉쳐 무슨 일을 꾸미든 재미있게 한판 벌여볼 일이었다. 나는 광철이와 헤어져 나오며 원철이의 행방을 추적해 볼 생각을 했다.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원철이와 광철이는 잊을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철 모르던 시절, 내 주먹만 믿고 닥치는대로 휘젓고 다닐 때 녀석들은 내가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늘 조언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다른 조직의 끄나풀인 계집애를 따라갔다가 감금당했을 때 목숨 걸고 녀석들에게 끌려가 한강 모래사장에 파묻히기 전에 배반자라는 낙인을 찍혀 가면서도 나를 구해 준 적도 있었다. 집안 형편이 비교적 부유하고 부친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는데도 나 같은 촌놈과 광철이처럼 오갈데 없는 고아를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고 용돈까지 쥐어 주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까짓 주먹을 사내답게 없애 버려야 한다는 얘기도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일이었다. 광철이가 몇 번인가 끌려가 고생할 때도 언제나 인자한 웃음으로 옥바라지를 해 주던 원철이 어머니의 그 모습도 지워질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새벽녘이라 길거리에 사람도 많지 않아서 녀석을 잡아채기 좋을 것 같았다. 아파트 문 앞에서 몇번이나 녀석을 깨워야 하는지 날이 환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질이 급한 놈이었다. 기다린다는 걸 참을 재간이 별로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눌렀다. "누구요?" 한참 만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광철이 형이 급한 일로 만나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누구요?" "광철이 형요." "날 밝거든 오슈." "광철이 형이 급한 일로 상의할 게 있답니다." "할 얘기 있거든 거기서 하쇼." 녀석은 작은 유리구멍으로 나를 확인한 뒤 이렇게 말했다. 광철이가 새 사람으로 소문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무시해도 그만이라는 배짱이 생긴 것 같았다. 광철이가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노여워하진 않을 일이었다. 광철이는 그만큼 소갈머리가 넓은 녀석이었다. "광철이 형이 알면 뭐라겠소?" "당신은 뭐하는 사람요? 광철이 형하고 어떤 사이요?" "심부름하는 사람요." "광철이 형한테 무슨 일 생겼소?" "그러니까 온 거 아뇨?" 나는 먹고 사느라고 뼈가 빠지는 놈이라고." "돈 보태달라고 온 게 아뇨. 잠깐 얘기만 하면 됩니다." "귀찮다니까 왜 이래." 그리곤 그 다음부터 초인종도 내려놓고 대답을 끊어 버렸다. 나는 이녀석을 혼 좀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짝 바로 뒤에 숨을 죽이고 서 있다가 멱살을 잡아챌까도 생각했지만 저런 녀석들은 조심성이 많아서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곧장 내려와 차를 몰고 아파트를 빠져나오면서 얼핏 올려다보았다. 유리창의 커튼을 젖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바퀴 돌아서 다시 주차장으로 차를 댄 뒤에 아파트 문짝 뒤에 숨어 있었다. 밖으로 어둠이 꽤 많이 걷혀서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뜨일 것 같았다. 도구만 가져왔으면 문짝을 뜯어내고라도 들어갈 텐데...... 문고리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손잡이가 돌려졌다. 내 예상대로였다. 내가돌아간 뒤에 곧장 광철이가 달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피신하거나 애들을 불러모아 옛날처럼 광철이에게 얽매어 살 인물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고 할 녀석이란 게 적중한 셈이었다. 나는 문짝을 잡아채고 녀석의 멱살을 옭아 내던졌다. 그리고 문을 잠가 버렸다. "누구?" 녀석은 엉겁결에 구둣주걱을 쥐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차례 더 걷어차 소파 위에 벌렁 눕게 했다. "광철이 친구 장총찬이다." "예에?" 얼굴빛이 금세 창백해졌다. 녀석도 그런 곳에서 밥먹은 적이 있어 내 소문을 들은 것 같았다. "광철이는 알겄냐?" "예, 제 형님입니다." "그런데 아깐 왜 모른 체했어?"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은 된맛 좀 봐야지. 한때는 형님 형님 하면서 붙어먹다가 네 배가 부르니까 깝신거려?" "총찬이 형님,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밥 좀 먹으니까 하도 귀찮게 구는 사람이 많아서 반사적으로 그랬습니다." 얘기였다. "광철이마저 그렇게 봤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그 형님이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 나가서 무슨 짓 하려고 했냐? 내 성질은 알겠지?" "형님 얘기 압니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나가서 광철이 형님이 어떻게 됐는지 소문 좀 들어서 대책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 형님을 도울 일이면 돕고 귀찮은 일이면 피하려고요." "이자식아, 사람 가려가며 그런 짓 해얄 거 아냐?" 나는 두어 대 더 쥐어박고 녀석을 소파 위에 꼼짝 못하고 앉아 있게 했다.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뭇한 채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럼 나한테 네가 먹고 사는 얘기 좀 해 봐라." "무슨 말씀이신지?" "너, 태반 빼돌리고 있지?" "예에." "나눠 먹잔 얘기 아니니까 명단 좀 대 봐. 어디서 빼다가 어디에 팔아먹는지." "형님, 왜 그러시죠?" 녀석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망설이고 있었다. "이자식아, 나도 태반탕 좀 먹고 정력이 남아돌고 싶어서 그런다. 빨리." 녀석은 한대 더 맞고 나서야 불었다. "전 강남 쪽만 맡고 있습니다. 한 이십여 군데쯤 됩니다." "얼마씩 빼내냐?" "개당 오백 원씩입니다." "어떻게 빼내냐?" "수거하는 애가 있어요. 현찰박치기입니다. 병원 쪽에 손 닿는 사람을 통해 상하지 않게 냉동상태로 빼냅니다. 초산부 거나 처녀애 거면 표시를 했다가 탕집으로 빼고 나머지는 한약중간상을 연결하는 애들에게 넘깁니다." "한약중간상엔 왜?" "거기서 말려서 분말 처리를 하는 모양입니다. 중간상이 다시 넘길 땐 천 오백 원쯤 합니다." "탕집은 어디어디야?" "요즘은 경기가 없어서 너덧 군데밖에 안 돼요. 퇴계로하고 이태원 쪽하고 강남 쪽에 좀 있어요." 그려나갔다. 비밀리에 운반하고 비밀리에 영업을 하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선 찾아낼 수 없는 귀중한 정보였다. 태반탕은 한약재를 넣어 태반사물탕이니 태반인삼탕이니 해서 상당히 비싸게 팔리고 있으며 오래된 단골 가운데에는 태반을 잘게 썰어 참기름에 회를 쳐먹기도 하며 불고기처럼 구워먹는 여자 손님도 꽤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초산부 것은 비싸다며?" "예, 개당 이천 원까지 쳐 줍니다." "달릴 땐 돼지 태반도 섞어 팔지?" "저는 그런 짓 않습니다. 다른 애들은 더러 그러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돼지 태반은 귀신처럼 압니다." "좋다. 너는 태반 말고 가짜 해구신도 만들어 배가 불렀지?" "형니임......" 녀석은 내가 너무 정확하게 알고 온 것 때문에 무릎을 덥썩 꿇었다. 태반 판매에 재간이 있다면 그런 쪽에도 밝을 거라는 내 짐작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가짜 녹용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 한번 따져볼 생각이었다. "임마, 나는 벼룩의 간 빼먹는 놈이 아냐. 해구신은 어떻게 만드냐?" 녀석은 입을 딱 봉했다. 이만한 아파트를 지니고 자가용 몰고 다닐 정도라면 태반 장사만 해서는 어려울 것이다. 보나마나 다른 짓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입을 열지도 않을 일이었다. "성질 건들지 마라. 내 주먹은 쉬고 내가 주먹을 치켜들어 허공을 한번 휘두르자 녀석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마치 작은 소리로 얘기하면 가짜 해구신 제조방법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다. "황견으로 만듭니다. 저희들은 진품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더러 밀수하는 애들도 있는 모양인데 전문가 얘기론 그것도 거의 모조품이랍니다. 물개가 흥분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베어낸 것이 효과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어차피 먹고 효과가 있다니까 우리들도 만들어서 대 줄 수밖에 없습니다." "가짜 해구신 먹고도 힘이 남아돈다 이거냐?" "그런 모양입니다." 의학에서 플라시보 효과라는 게 있어서 밀가루같이 별것 아닌 물질로 암시작용을 하여 병을 치유시키는 걸 말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탐험가가 원주민에게 치약가루를 먹여 만병치료를 했다는 기록이나 배멀미 환자에게 밀가루환을 먹여 치유시킨 예가 우리나라에도 많았다. 해구신은 고가품으로 어느 것이나 진품인 것처럼 가짜 상표를 붙여 밀수한 것처럼 팔아먹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황청심환은?" "그건 밀조하는 애들한테 저희들도 사들입니다." "너, 돈 좀 벌었지?" "예, 쬐끔......" "그만 둘 때 됐다." "사람 고기 파는 짓 좀 그만둬라. 무슨 짓을 못해서 그 따위 짓을 하냐? 너 같은 놈들이 돈 벌면 진짜 사람 팔아먹겠다." "형님, 제가 안 해도 다른 애들이 합니다." "이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려!" "형니임......" "그만두랄 때 그만둬라. 네 조직이 있겠지. 걔들한테 말해. 내가 이 짓만은 악착같이 물고 넘어가겠다고." "형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좀 사람처럼 살자 이놈아. 사람 탈을 쓰고 할 짓이 따로 있잖아. 경찰에 알려서 처리하긴 싫다. 내 말 명심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내 손에 걸리면, 그땐 염라대왕 구경 좀 해얄 거다." 메모지를 들고 아파트를 나왔다. 녀석은 울상이 되어 아파트 마당까지 쫓아나와 사정을 했다. "정당하게 돈 벌어라. 개떡 같은 놈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젊은 놈이라도 바로 살아보자." 나는 이렇게 말하고 빠져나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녀석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끝까지 고집대로 손 뗄 것을 강요했다. 소현이가 입원했던 병원은 태반 밀매 명단에 들어 있지 않았다. 아마 다른 밀매 조직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태반 밀매 현장을 덮치는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태반은 냉동상태로 오래 보관하지 현장을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개 오토바이로 태반을 옮기기 때문에 유심히 관찰하면 잡을 수 있는 일이었다. 두 명을 망보게 한 뒤 나는 근처의 찻집에 연락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눅고 어둑어둑할 무렵, 망보던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길로 튀었어요. 구십 시시 짐받이 달린 겁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뛰어나갔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골목길을 쏜살같이 달려오는 오토바이 불빛을 보고 길 옆으로 비켜섰다. 오토바이가 옆으로 스쳐가는 순간 재빨리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사내는 오토바이와 함께 나뒹굴었다. 짐받이 위의 상자를 열었다. 비닐봉지에 싼 태반이 쏟아져 나왔다. 무릎을 쥐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사내의 멱살을 옭아쥐었다. 애들이 쫓아 내려왔다. "데리고 올라가라." "죄송합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튀었어요. 지하실에서 나오자마자 시동을 걸어놓은 오토바이로 그냥 내빼는 바람에 놓쳤어요." "누구였냐?" "나이 든 아저씨였어요." "지금 어딨냐?" "병원에 그냥 있어요." "눈치챘냐?" "아녜요." "그럼 이자식 데리고 올라가라. 애들이 사내와 오토바이를 끌고 올라갔다. 나는 그뒤를 따라가며 나이 든 병원의 고용원을 생각했다. 가난에 찌든 사내가 이 짓이라도 해서 자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사정하면 어쩌나 싶었다. 병원 지하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기계실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사내가 오토바이의 사내를 쳐다보더니 흠칫 놀랐다. "아저씨, 이리 좀 오세요.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죠." 내 말에 고용원 아저씨의 담배 피우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걱정 말고 저쪽으로 가시죠." 휘청휘청 걷는 고용원의 뒷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병원 옆의 아저씨가 느닷없이 돌아섰다. "선상님, 지가 죽을 죄를 졌네유." "걱정 마세요. 대신 어떻게 됐는지 묻는대로 자세하게, 속이지 말고 얘기를 해 주셔야 합니다." "지서에서 나오셨나유?"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저씨가 분명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받고 몇 개 팔았습니까?" 고용된 아저씨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둔 돈을 꺼내 내밀었다. "둘, 두 갠개 벼유." "왜 그런 걸 팔았죠?" "팔라구 허니께......" "누가요?" "관리부 김씨유." "돈은 어떻게 합니까?" "김씨 줘유." "아저씨는 얼마 받아요?" "지는 뭐, 담배나 사 피라구 쬐끔 주느만유." "태반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음식점에두 가구 말려서 가루두 낸다는 소리는 들었구만유." "그게 아니고 어떤 죄 받는지 아느냐 말입니다." "지가 뭘 알겠남유." 관리부 김씨라고 하는 젊은 사내와 밀매 조직의 묵계 아래 태반을 팔아넘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알아요?" "몰르네 벼유. 쉬쉬 허니께." "김씨, 지금 어디 있죠?" "관리부에 있겠쥬 뭘." "사람 뱃속에서 나온 태반을 사람이 먹는단 말입니다. 아저씨가 무슨 짓했는지 알아요?" "지야 뭐...... 먹구 살라니께 시키는대루 다할 수밖에 읍쥬." "아저씨도 한번만 더 이런 걸 팔면 그냥 안 둬요." "야." 아저씨를 공터에 앉혀놓고 관리부로 달려갔다. 관리부 김씨는 젊은 애들과 고스톱 판을 벌이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싱겁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병원 원장 선생님의 조카 되신다구요? 나도 선생 돈 좀 먹어 볼까 왔수다. 한판 껴 주쇼." "어디서 왔소?" 삼십대의 사내는 의아스러운 듯이 이렇게 물었다. 원장의 친척이라는 이유 때문에 병원에서 꽤 거드럭거리는 사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태반 좀 사러왔다가 김 과장 돈 좀 먹어보자고 들른 건달올시다." "뭐라구?" "애들은 내보내고 우리 둘이 흥정 좀 하자." "어허!" 화투를 내던지고 김 과장이 일어섰다. 젊은 애들도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금방 젊은 애들은 엉금엉금 기어나갔고 김 과장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급하니까 용건부터 묻자. 얼마씩 파냐?" "오백 원부터...... 이천 원도 받고요." "언제부터 팔았냐?" "한 육칠 년 됩니다." "너도 먹었지?" "예에." "맛있데?" "약으로......" "쳐죽일 놈......" 사정 없이 걷어찼다. 김 과장은 맨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바른대로만 대라. 태반 팔아먹은 거 아는 놈이 누구누구냐?" "저하고 박씨밖에 모릅니다." "어떻게 모으냐?" "적출물은 박씨가 다 모아다 소각하고 있는데, 그때 모아두게 합니다." "태반은 어떤 놈들하고 나누어 먹었냐? "친구들하구요." "어떤 놈야? 대 봐. 뭐하는 놈들인지. 빨리!" 김 과장은 친구 이름과 회사명을 대면서 용서해 달라고 말만 계속했다. "쳐먹는 걸 누구한테 배웠냐?" "저...... 친구가 병원 하는데...... 한번 먹으러 오래서 갔다가......" "어떤 병원하는 놈이냐?" "산부인과, 강남에서요." "의사란 말이냐?" "예." "이 쳐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산부인과 의사놈이 그걸 가르쳐 줬단 말이냐?" "예."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잊어 버렸다. 현대의학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비과학으로 몰아붙이면서 제 손으로 신성하게 애를 받아낸 그 산모의 태반을 빼내 친구들을 불러모아 안주삼아 소주 파티를 한다는 이 끔찍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이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어떻게 태반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을 병이나 난치병에 태반용법을 쓰는 한방도 점점 없어져 가는 판에 산부인과 의사가 태반을 안주삼아 먹는다는 건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제 손으로 태반의 신선도를 체크하여 제 손으로 그걸 잘게 썰어먹을 수 있다면 그는 정신이상자이지 결코 정상인은 아닐 것 같았다. 그들은 건강이 나빠서도, 신체가 이상해서도 아닐 것이고 정력을 발산하기 위해 그런 짓을 할 것 같았다. 이런 엄청난 충격을 받아보긴 오랜만의 일이었다. 염치 없는 놈들. 나는 이 뿌리만은 끝까지 캐내리란 결심을 했다. "그 의사놈 이름하고 약도를 당장 그려라." 김 과장은 떨리는 손으로 약도를 그렸다. "유상길 산부인과, 좋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 나는 이렇게 외치고 만약 유상길이란 사내에게 알려 주는 날이면 모두 경찰에 넘겨 버릴 거라고 단단히 일렀다. 김 과장은 지금까지 말한대로 상세하게 자술서를 썼고 다시는 태반 밀매를 하지 "널 당장에라도 신고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용서해 주는 이유가 있다. 정확하게 제보를 해 줬고 네 스스로 다시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믿기 때문이다. 네가 사내답게 때려치우고 입만 딱 봉하는 약속만 보여 준다면 나도 꼭 침묵을 지키겠다. 유상길이와는 소원해졌다니까 네 신세 생각해서 나와의 약속을 지켜라. 네가 입만 벙긋해도 결국은 내가 캐내고 만다. 그때, 넌 끝장이 난다. 알겠냐?" "지킵니다. 절 믿어 주세요. 용서해 주셨는데 제가 도와 두리지 못하겠습니까." "당장 너도 때려치워라. 정말 배 고프면 내가 네 밥통만은 해결해 주마." "명심하겠습니다." 각서와 자술서를 안주머니에 찔러넣고 병원을 나왔다. 오토바이 타고 왔던 사내와 고용원 아저씨는 맥 풀린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이녀석 따라가서 왕초 녀석 끌고 와라. 아저씨는 다시 그런 짓 마세요. 들어가 보세요." "고맙네유. 저는 징그러서두 그런 짓하기 싫구만유." 느릿느릿 걸어가는 아저씨 등이 훨씬 더 굽어져 보였다. 애들을 태반 밀매 조직의 소굴로 보낸 뒤에 나는 유상길이란 의사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며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고 강남 지역에 병원을 꾸며 성적이 뛰어났고 마누라도 명문여대 출신으로 여성단체의 간부직을 맡고 있는 집안이었다. 형제들도 모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외관상 나무랄데 없는 상류층이었다. 그이 형인 유동길이는 현직 교수로 경제학계에서 말깨나 많은 사내였고 남동생 유인길이는 재벌 기업체의 부장 직위에 있어 별로 나무랄데 없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결함이 없는 집안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한 증거를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우격다짐으로 물증 없이 추적해 놓으면 도리어 역습을 당할 우려도 있었다. 며칠간 여유를 두고 애들을 시켜 알아볼 만한 건 죄다 알아내도록 했다. 성질 일이지만 증거없이 덤빌 수 없었다. 애들이 매일매일 물어 오는 얘기들은 집안 내력이나 재산상태, 병원의 운영 실태 따위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언제인가 내가 골탕을 먹인 유금동 원장과 가까운 집안이란 사실과 그의 형인 유동길 교수라는 친구가 문중에 아부하여 나중에 그 힘을 받아 정치에 뜻을 두고 유씨가 아니라 류씨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부르짖는 사내이며 형제의 우의가 돈독하여 자주 유상길네 집에 모인다는 사실이었다. 유금동 박사는 아직도 그 병원 간판을 류금동이라고 표기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한테 그렇게 혼이 나고도 그 버르장머리를 고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않아 자숙하고 있는 줄 알았었다. 나는 한글학회라는 곳에 전화를 걸고 내가 알고 있는 우리 한글의 표기법에 류씨 성을 붙일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한글학회에서 내는 책자에마저 류씨 성을 가진 사람이 출연하고 있는 걸 상기하여 전화를 했지만 참으로 애매한 대답이었다. 한글표기법상으로는 틀린 것이지만 그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한글을 갈고 닦고 그걸 지켜온 공헌과 그 성실한 의지에 비추어 너무나 허한 답변이며 한글 질서를 깨뜨리는 이런 분과 작용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유관순 열사마저 류관순으로 쓰고 있는 현실에도 어째서 한글을 지켜야 하는 그들이 속수무책일까? 그렇게들 옳고 바르게 대들던 기개는 어디로 갔으며 그렇게 속 좁게 한글을 편리할대로 지킨다면 이 땅의 한글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대학 때의 은사와 국어학자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학자들은 우리나라 한글은 기분문에 따른 문법이 우선이지 문중에서 주장하고 있는 편수자료가 결코 우선은 아니라고 했다. 1970년대의 맞춤법 개정시안에 터무니없게도 유씨를 류씨로 사용한다는 시안이 나온 것을 가지고 결정사항처럼 부르짖고 있는 것을 통박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글 질서를 깨뜨리는 특권의식의 작용이면 맞춤법도 모르는 어떤 예외 대우를 받으려는 유씨 가운데 일부의 어떤 학자는 그런 주장이 유씨 가운데 어떤 돼먹지 않은 늙은이가 엄연한 한글 질서를 깨뜨려 가며 특권의식에 말려들어가 그런 주장을 시작했고 주체의식이고 또렷한 정신 없는 일부 유씨의 주장이니까 언젠가는 그들의 멍청함이 드러날 거라며 흥분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집단이든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은 항시 잠잠한 법이고 그런 소수의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는 무시하는 게 상수일세. 문중의 표창장 한 개나 앞으로 정치를 하려고 할 때 그 힘을 이용하려는 속 보이는 친구들과 상대하는 건 손해라네. 자네는 혼자지만 저쪽은 여러 가지를 동원하여 별의별 짓을 다한다네. 학자들이 왜 가만히 있겠나?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학자들은 알고 있지. 얼마 안 가서 그들 소수의 주장이 우리 민족의 한글에 얼마나 해독을 끼쳤는지 알 걸세. 자네가 덤벼보게. 자네만 손해가 나네. 그럴 땐 피하는 게 상수일세. 억지부리고 염치 없고 떼 쓰는 사람과 무슨 상대를 한다는 건가?" 학자 한 분이 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동안 싸워온 사람들 얘기며 압력 얘기까지도 해 주었다. "법에도 예외는 있네. 그러나 이런 경우엔 전혀 예외가 적용될 중대한 사안도 없네." "맞습니다. 대한민국의 이 작은 땅에서 도대체 특권의식이니 예외 대접이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바람에 혼란만 계속됐잖습니까.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이란 것 아닌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젊은이의 혈기를 알겠네. 그러나 소수의 정당한 주장이라면 모를까 소수의 억지 주장에 그렇게 신경 쓰다간 어디 살아가겠나? 잊어 버리게. 어느 시대나 그런 어리석은 주장은 있었네. 산천초목이 찌렁찌렁할 때의 리승만과 리기붕도 별 수 없이 이승만, 이기붕이 됐잖은가.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유씨 가문의 인물들은 그런 주장을 않네. 그분들도 유씨이면서 허허 웃고 마네. 자네처럼 말을 함부로 하면 유씨 성을 가진 좋은 분들, 다수의 의식 있고 옳은 분들은 어쩌란 말인가." "죄송합니다." "다수의 유씨 어른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게. 손가락이 곪으면 그곳만 치료하거나 약리학이라네. 마찬가지야."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기 죽지 말게. 젊은이는 잘못 된 걸 보고 싸울 마음가짐이 있어야 되네. 그러나 나이 먹은 내가 말리면 그 이면이 있나 보다 하고 참게. 진실에는 변명이나 잔소리를 사용하면 도리어 낭패가 생기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참고삼아 한마디 더 듣게. 우리나라의 국어학자나 한글 지키는 분들은 자네가 생각하듯 어리석거나 유약하거나 바보가 아닐세. 역사가 비교적 짧아도 지금처럼 갈고 닦은 것은 그분들 덕이고 그렇게 치열하게 연구하고 지키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의 글이 보전되는 거라네. 시간이 그분들에겐 없네. 더 큰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세. 내 말 알아듣겠나?" "예."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나 해 두고 싶네." "말씀해 주세요." "자네 얘기는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있네. 내가 스님 밑에서 공부 할 때는 스님께서 자네 말씀 많이 하셨네. 아직 어리겠지만 자잘한 일에 너무 빠지면 안 되네. 물론 자네 나이에 너무 무리한 걸 요구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또 자네에게 주어진 여건이나 상황을 무시하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보다 넓은 시각과 보다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네." "늘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되질 "이렇게 말하는 나도 뜻대로 살진 못하네. 자네에게 큰 뜻을 펴라고 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네. 사람들은 입으로만 비판하길 좋아하는 법이지. 자네가 더 나이 먹고 철이 나면 더 큰 뜻을 펴리라는 것도 아네. 그러나 귀담아 들을 필요는 있다네. 어리석은 자들은 입으로만 자네를 비난하고 있지. 자신은 아무것도 못하면서 자네의 뜻에 단 한 발짝도 못 따라가면서 입으로는 마치 성인군자고 가장 의식 있는 지식인이고 입빠른 평자이며 잘난 사람들이지. 진짜 입으로가 아니라 뜻 있는 사람들은 잔소리 따윈 않는 법이네. 내 얘기는 촐랑대는 그 어리석은 자들의 질투나 헛소리, 제 몸은 사리고 남이 어떻게 되어 주기만을 바라는 이기주의자들 자네를 아끼는 사람들의 가슴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라는 걸세. 흔히 자네 같은 사람, 주먹을 쓰는 자네 같은 사람을 어리석고 천박하다고 하는 거네. 그러면서 어리석고 행동 못하고 옹졸한 자들은 자네를 부러워한 나머지 자네를 입으로만 찧고 까불어대는 거네. 그러나, 그러나 가슴이 넓은 사람들, 말은 없지만 세상을 꿰뚫어보는 사람들, 주먹보다는 마음이 센 사람들 얘기는 언제가 가슴에 새겨야 하네. 알아듣겠나?" "예." 나는 무려 두어 시간이 넘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얘기를 들었지만 별로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무공 스님 밑에서 공부한 이 노인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갑자기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노인은 칩거하고 있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훤히 알고 있었다. 경망스런 입가진 사람들이 싫고, 높은 뜻에 질투만 뿜고, 그의 학식과 고견에 단물만 바라는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칩거하고 있었다. 노인은 외톨박이였다. 그러나 그는 숨어사는 절개 있는 그냥 늙은이는 아니었다. 그를 범접하지 못하는 것은 촐랑거리는 지식인들과 주둥아리의 애국자와 정치가, 돈벌레들과 떠벌이들, 이중인격자와 위장에 능한 인사들에게 대갈일성 욕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속세로 내려와 대학에서 ㅈ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해도 그릇이 큰 사람이 많았었다. 그러나 점점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그는 괴벽스런 늙은이로 밀려나기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 내려다보고 있으니 참 별의별 씨알머리도 다 있다 싶죠? 치부책에 꼼꼼하게 적어뒀다가 이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오르거든 난장박살을 내십쇼.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성능좋은 비디오 테이프에 인간들의 행동과 생각을 모두 담아두었다가 전 인류가 보는 앞에서 공개를 하는 일입니다. 그때 떳떳한 인간이 과연 누구일지 궁금합니다. 며칠 동안 유상길네 병원 근처에서 잔치가 벌어지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모여드는 날이나 그의 형제들이 모이는 날을 짚어내기도 힘들었다. "할 수 없어요.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여기서 백날 노려보고 있어봐야 건수 올리기는 어렵겠어요." "산부인과를 어떻게 들어가?" "우리가 애를 낳을 재간이 없는 게 한이죠. 그렇다고 이렇게 기다리기만 해서야 되겠어요? 입원환자 가운데 알 만한 사람을 찾아보죠."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문병을 간다든지...... 방법이 있겠죠." "차라리 병원 직원 가운데 손 닿는 사람을 찾는 게 낫지 않겠냐?" "아무튼 어떤 방법이든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유상길네 병원과 잘 통하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그러지요. 형님은 일단 철수하시죠. 우리가 알아서 차려 놓으면 그때 와서 굿이나 한판 멋들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야겠다." 나는 할 수 없이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뒤 마려운 사람처럼 영 개운칠 않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몸과 마음만 무거워져 갔다. 다혜가 외갓집에 다니러 갔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은주 누나네 가게 일이나 돌봐 주는 신세가 되었다. 애들 누나의 성화도 뿌리친 채 여러 날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다혜는 이번 여름에 해수욕장으로 동반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고 외갓집에 갔다. 다혜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 일을 해결해 놓고 싶었다. 은주 누나와 새벽 일찍 공장에 들러 견적서와 견본을 확인하고 가게로 돌아왔다. "경민이라는 사람이 급하게 연락해 달래요. 전화가 세 번이나 왔었어요." 나는 얘기를 전해 받자마자 전화통에 매달렸다. "어떻게 됐냐?" 경민이는 여유 있게 웃었다. "형님, 단단히 한턱 얻어먹어야겠어요. 용코로 뚫었죠. 형님, 내가 경민이입니다. 오늘 밤에 파티가 있대요. 정확한 정보에요. 형제놈들하고 친구놈들이 함께 모이는 모양예요." "제보자는 누구냐?" "지하실 관리하는 아주머니예요." "새나가지 않겠냐?" "걱정 마세요. 그 아주머니도 우리 얘길 듣더니 어쩐지 수상했대요. 가끔 초산부의 태반을 실험실로 가져오라고 하는 모양예요. 깨끗하게 씻어서 갖다 주는데 실험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대요. 그런 날은 꼭 친구들이 오거나 형제들이 모인 것 같았답니다." "제대로 짚긴 짚은 것 같다." "또 있어요. 척출물 처리장이 없어서 태반은 분리 수거를 한대요. 이유는 전혀 모르겠다는 거예요." "수고했다. 다른 얘기는 없었냐?" "저녁 때라도 실험실로 갖다놓으라면 즉시 연락해 주기로 했어요." "너무 시원시원해서 어쩐지 불안하다." "그건 염려 마세요. 봉투를 쥐어 주니까 한사코 거절했어요. 나쁜 사람이 확실하다면 그 아주머니는 참지 못하겠대요. 남의 살을 뜯어먹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두는 거냐고 말예요. 도리어 우리더러 실수 없이 해 달래요. 그 아주머니도 자식 낳아 키웠는데 당신 뱃속에서 나온 아기보를 다른 사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면 평생 꿈자리가 뒤숭숭할 거라는 거예요.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안 거래요." "좋은 아주머니 같다. 그러나 매사는 완벽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한번 더 찾아가서 다짐을 받고 성의껏 도와 드려라. 그리고 카메라 잘 다루는 녀석과 준비한 물건들을 차질 없이 대기시키고 병실의 임산부나 외부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않게 해야 한다." "형님은 어디 계실 거예요?" "집에 있겠다." "그 아주머니 큰애가 국민학생인데 차라리 그녀석한테 학용품하고 물놀이 갈 용돈이나 줄까요?" "우선 네가 해 놔라. 나중에 줄게." "알았습니다. 준비는 완벽하니까 걱정 마세요." "근사하게 사겠다." 전화를 끊고 나자 시간 흘러가는 것이 더 지루하고 답답해졌다. "누나, 창고정리 해야지?" "사람 사서 해야 돼. 엉망야." "몇 사람이나 필요한데." "서너 사람 있어야겠더라. 왜? 너 용돈 떨어진 모양이구나." "귀신이 곡성하겠네. 내가 오늘 해치울 테니까 인건비 줄 테야?" "그래라." "얼마?" "사인분 지불하지. 대신 제대로 해야 된다." "두고 봐." 그 아주머니에게 신세를 갚으려면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힘깨나 쓰는 누나 말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은주 누나가 일러 주는대로 재고와 상품을 구분하여 선반에 표찰과 번호를 매겨붙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종일 땀투성이가 되어 깔끔하게 정리 끝내고 애들과 함께 목욕을 했다. 힘이 그래도 남아도는 녀석들에게 고기도 푸짐하게 먹였다. 여덟 시가 좀 못 돼서 유상길네 병원 앞에 모였다. 아주머니는 오늘 초산부가 네 사람이었고 실험실로 올라간 태반은 증류수로 깨끗이 닦았다고 했다. 망보던 녀석들은 병원 뒤채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걸 알려왔다. "플래시 이상 없지?" 플래시를 맨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닐봉지와 가방도 준비되어 있었고 차를 타고 온 사내들의 차량 번호를 메모할 준비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경민이 너는 애들 데리고 한놈도 밖으로 못 나오게 막고 나머지는 내 신호대로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함부로 사람을 패거나 다루지 마라. 외상이 있으면 안 된다." 애들은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은 치도곤을 내서 씨알머리 교정을 좀 해야 된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가자." 우리는 조심스럽게 담벼락에 붙었다. 경민이가 낚싯줄 끝에 오징어를 꿰어 담을 걸려 갸냘프게 울었다. 내가 재빨리 뛰어넘어 도사견의 혈을 눌러 기절시켜 버렸다. 우리들은 모두 담을 넘어 들어갔다. 우리가 숨어들어온 걸 알 리 없는 그들은 널찍한 대청에 둘러앉아 초저녁부터 영사기를 돌리는지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지 한쪽 벽면을 향하고 있었다. 애들은 뒤채를 둘러싼 채 내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다. "됐다, 가자." 내 신호에 따라 애들은 신속하게 뛰었다. "꼼짝 마라. 움직이는 놈들은 쓰레기통에다가 박아 버릴 테니까." 플래시가 터지며 널찍한 자개상 위에 놓여 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모여 있는 사내들 얼굴이나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가는 "누구요?" 유상길이 물었다. 우물우물 씹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키는 사내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할 말 있으면 손을 들어라. 따귀 한 대씩 맞으면 발언권을 주겠다." "선생은 누구요? 왜 이러는 겁니까?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유동길이가 덩치 큰 몸을 앞으로 내밀며 당당하게 물었다. 나는 따귀를 올려붙이고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금방 말했지, 손들고 말하라고. 태반 먹는 현장을 덮치러온 저승사자다. 잔소리하는 놈은 꺼꾸로 매달아 토해 놓게 하겠다." 사내들은 사진 찍히지 않으려고 얼굴을 짐작했는지 꽁무니를 빼고 한쪽 구석으로 몰려앉았다. 상 위에 있는 태반을 수거하여 비닐봉지에 담고 상 옆에 통째로 놓여 있던 태반을 가방에 챙겨담았다. 비디오 테이프의 음란한 장면이 계속 돌아가자 한 녀석이 테이프를 빼내어 구둣발로 밟아 버렸다. 주방을 뒤지던 애가 또 두 덩어리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애써 냉정하려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방에서 찾아낸 비밀봉지에는 실험용이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서도 이미 난도질해 놓은 태반에서 떼어낸 실험용이란 딱지를 찾아냈다. "유상길, 이리 좀 와라. 살다살다 너 다른 일 같으면 올려붙이고 따질 일인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차마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네 손으로 애를 받고 네 아가리에다 그걸 쳐넣을 배짱이 생기더냐?"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으면 해라. 손 들고 안해도 된다. 사람 같지도 않은, 너 같은 사내하고 마주 앉는 것도 내가 죄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답이나 해라. 성질 돋우지 말고. 당장 물고를 내야 옳겠지만 너도 할 말이 있을 거 아니냐. 언제부터 맛 들였냐?" "선생님, 죽을 짓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 않겠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 하구말구. 너 같은 사내를 용서 않고 이 땅에서 누굴 용서하란 말이냐. 그러니 묻는 말에 낱낱이 대답만 잘해라. 언제부터 맛 들였냐고 물었다." "처음입니다. 정말입니다. 물어보세요. 실험용인데...... 그냥...... 좋다는 말이 있길래 사람들이 놀러왔을 때라 한 번......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유상길 선생, 그래서 처음 맛이 어떠셨소?" "아무 것도 아니고...... 모두 입도 안 대고 버릴 참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먼저 대보고 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러셨겠지. 어련하셨을라구. 의료인의 양심도 지키고 직접 실험을 하셔서 인류 건강에 이바지하시려고 그러셨겠지" "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태아와 산모의 건강과 감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하다가 제가 직접 대보고 어떤 건가 알려고......"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유상길 박사를 걷어찼다. 상 위로 뒹굴어 자빠졌다. 그리고 곧장 일어서서 두 손을 비볐다. "선생님, 믿어 주십시오. 정말 의료인의 양심을 걸고 맹세합니다. 제 연구 보고서나 논문을 보시면 압니다. 태아 감염과 신생아 건강이나 산모 건강에 제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봐, 유상길. 알고 왔다. 주기적으로 이따위 짓을 한다는 걸 알고 왔다. 증거를 경찰서에 가서 대 줄까? 너희들은 적출물 처리법에 의해 태반뿐 아니라 기타 장기도 이따위 짓을 해 왔다. 너 같은 놈이 인간 실험을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어?" 언젠가 의료인들이 투약 실험을 환자에게 협의하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적도 있었다. 유상길과 같은 친구들이라면 더 끔찍한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생님, 개인적으로 말씀 드릴 일이 있습니다. 제 방으로 가시죠." 유상길의 애원이었다. "조금 기다려라." 나는 구석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내들의 모두 방으로 몰아넣고 서로 말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했다. "유동길이 나와라." 같은 형제 사이인데도 유인길과 유상길은 인상에다 거무튀튀해서 한눈에도 언짢게 생긴 사내였다. "대학에서 사랑하는 제자를 가르치는 대학교수님이시지?" 내 물음이 야유라고 생각했는지 대꾸하지 않았다. "경제원칙에서 몸보신에 유익하거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라고 가르치냐?" "우리는 입에 대지도 않았소." "그러셨군. 한가지 더 묻자. 동생들이 그따위 짓을 하면 형 된 입장에서 말려야 하느냐, 아니면 같이 씹어삼키며 음란한 비디오 테이프나 돌려가며 낄낄거려야 하느냐? 어느 게 맞는지 네 입으로 들어보자." "묵비권이라 이거겠지. 좋다. 증인이 있으니까 신문이나 방송에 시끄러워지면 그때 공개사과든지 공개해명서를 발표하면 되겠구나." "선생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죄 없는 사람을 잡고 이러십니까?" "이 알간이 놈아, 네가 명색이 선생인데 스물 네 살짜리한테 선생님이 뭐냐? 죄 없고 떳떳하면 호령을 하든 내 귀쌈을 갈기든 해얄 거 아니냐? 그래서 어린 녀석을 가르쳐야 할 거 아니냐? 넌 상습범이다. 내가 증인을 대 주마. 태반 먹고 힘 길러서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참이냐?" "증거를 대 주쇼." 당당하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출마하려고 비밀리에 운동하고 다닌다는 걸 안다. 이번 사건이 밝혀지면 여성표는 몰표로 얻어내겠구나." "증거를 대쇼."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유동길 교수의 멱살을 잡아 어지럽혀진 상 위에 메어꽂아 버렸다. 초고추장이며 김치 그릇을 뒤집어쓴 사내의 몰골을 한차례 더 걷어찼다. 유동길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번만 봐 주십쇼. 사내답게 빕니다. 용서해 주면 제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보답하겠습니다." "네 마누라가 알면 뭐라고 하겠냐? 이 천하에 야수 같은 놈들! 묻자. 언제부터 "오늘 첨이오. 먹지도 않았소." "만약 증거를 대면 어쩔래? 몇 년 전부터 먹었다는 증거를 대면? 그리고 네가 씹다가 뱉은 걸 그대로 주워 담았으니 타액 검사를 하면 금방 드러날 것이고 아직 위 속에 남아 있을 테니 토해 내게 하면 증거물도 드러난다." "결코 먹지 않았소." "경제학 교수라고 경제적으로 거짓말하는구나." 나는 유동길의 위장과 연결된 혈을 짚어 거꾸로 세웠다. 토해 낸 것들을 애들이 재빨리 비닐봉지에 담아가지고 나갔다. "선생님, 살려만 주십쇼.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전 이제 죽습니다. 학생들이 뭐라고 할 것이며...... 집안에선...... 한 생명을 살리시는 겁니다." "진작 실토했으면 살려 줄 수도 있었지. 지금도 늦지 않았다. 바른대로 대답할래?" "그럼요. 하겠습니다." "언제부터 먹었냐?" "오늘 처음입니다." "알고 왔다." "증거를 대십쇼."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생긴 값을 하느라고 그런지 끝까지 나를 조롱할 셈인 것 같았다. "들어가 있어라. 경찰서에 가서 말하자. 도저히 너하곤 말로 해선 안 되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유동길이를 걷어찼다. "좋습니다. 가서 따집시다.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다루면 어떤 결과가 있소. 나를 잘못 건드렸다가 어떻게 되는지나 알아보쇼. 내가 유동길이오." "알아, 이 녀석아, 배경 좋고 말 많고 집안이 퍼지게 양반 흉내내는 것도 안다. 그러나 태반 처먹는 현장 사진이 공개돼 보면 너도 알겠지. 그때 네 배경이 어떤지 좀 봐 두겠다." "선생, 이러지 말고 타협합시다. 나도 사내요." "벗어봐라, 사낸지 아닌지 좀 보자." "사내대장부끼리 타협합시다. 원하는 게 뭐요?" "네가 사내인지 아닌지 보는 거다." "말을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합시다." "그러지. 바지 벗어라. 좀 보자." "이봐요, 선생. 타협하잔 말요. 얼마가 필요하고 누가 시켰소? 당신 일생을 내가 보장해 줄 수도 있소." "고맙소, 유 선생. 내 일생씩이나 보장해 주신다니." "거짓말이 아니오. 난 그만한 힘이 있소. 그러니 타협합시다. 사내답게 말이오. 나도 사내요." "그러니까 사내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 이거 올시다." "누굴 놀리는 거요?" "그렇소. 당신을 놀리고 있는 거요. 빨리 벗어라!" "왜 이래? 내가 누군지 알아?" "사내가 아니겠지." "얼마가 필요해서 이러는 거요?" "벗어!" "한판 붙어보실까?" 나는 일어서서 유동길과 한판 붙었다. 제법 육중한 체구여서 힘깨나 써보였다. 몇 번 헛손질을 하게 내버려두었다가 허리띠를 끊어내고 바지를 홀딱 벗겼다. 그리고 나머지 옷도 모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유동길을 뒹굴려 버렸다. "사내자식은 맞구먼그려."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원하는대로 주겠소. 그러니 타협합시다. 성실하게 살아온 한 인간을 죽이는 결과요. 우리 서로 타협합시다." "묻는 말에 대답을 잘하면,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타협을 할 수도 있다." "말하쇼." "언제부터 먹었냐?" "정말 처음이오." "됐다. 들어가라." 나는 보기도 싫어 사내를 걷어차 버렸다. 그 사내를 상대한다는게 싫었다. 저런 사내는 늘씬하게 물고를 내어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손대기도 싫었다. 동생들과 동생 친구들을 모아놓고 같이 태반이나 먹어대는 이 사내, 더구나 끝까지 나를 물고 들어가려는 작태가 싫었다. 나는 사내들을 차례로 끌어내어 우리들의 조사가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겨우 알아내었다. 이런 모임은 정기적으로 있어왔으며 고향 친구나 후배들과 함께 밤새 영업하는 강남 몸으로 실험하는 따위의 짓이나 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삼 형제는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볼 수 없는 정으로 뭉쳐져서 유동길의 정치 발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고향 땅에 학교를 세우거나 회사를 차리려는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은 앞으로 이용가치가 큰 사내들이어서 의형제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큰 죄악이란 걸 아느냐?" "예." "정말 그걸 처먹으니까 정력이 샘 솟듯 하더냐?" "모르겠습니다." "왜 먹었느냐?" "처음엔 순전히 호기심이었습니다." 처지가 될 사내들 뿐이어서 쉽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유상길이가 뭐랬지." "한의학 서적을 보면 여러 가지로 좋다고 하면서 동양의학이란 오랫동안 꾸준하게이어져 오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부작용도 적다고 들었습니다. 상길이 형은 양의면서도 한방에 조예가 깊고 그 방면의 연구 실적이 많아서 우리는 믿고 따라간 겁니다." "이 자식아, 나도 알 만큼 알아본 사람이다. 요즘은 인공적으로 태반 호르몬제를 만들어서 약품으로 팔고 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못해서 태반을 먹었냐?" "죽을 죄를 졌습니다."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은 물론이고 포의, 불가사, 선인의 등의 이름으로 허약, 정신병, 복부병과 기미, 쇠약, 결핵, 기침, 신경쇠약과 임포텐츠 그리고 정력에 좋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대에 와서도 임상실험은 물론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 태반의 성분이 밝혀지고 있다. 더구나 화장품이나 약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성분을 과학적으로 생성시켜 태반 호르몬의 효과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실험을 해 보니까 의학적으로 생성해도 완벽한 태반 효과가 안 나니까 처먹었다 이거겠지?" "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아는대로 자술서를 써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갈 생각 말고 살기를 바라진 않겠지." 사내들이 자술서를 쓰는 사이에 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유상길이는 방바닥에 얼굴을 떨어뜨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쳇말로 전모가 드러났다.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앉으시죠." 내가 방 한 가운데에 앉자 유상길이는 큰 봉투 한 장을 내놓았다. "뭐냐?" "얼마 안 됩니다. 현금이 많지 않아서 내 통장과 도장, 주식과 아파트 문서가 들어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십쇼. 그러고 나를 한번만 봐 주십쇼. 제 목을 걸고 다시는 이런 짓하지 않겠습니다." 정도로 넘어갈 사람 같은가? 이 병원 문서는 왜 내놓지 않나? 그리고 당신 재산이 엄청나다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런 문서를 다 내놔 보시지 그래." "내 일생 동안 번 겁니다. 다 내놓으면 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일리는 있다. 그렇다면 얼마쯤 내놓을 수 있느냐?" "말씀 먼저 하십쇼." "요즘 일이억은 돈도 아니더라. 적어도 기백억 쯤은 돼야 돈 아니겠냐?" "생각해 보십쇼. 어떻게 전 재산을 내놓겠습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 하고 이 병원만은 유지를 해야 합니다. 딸린 식구가 많습니다. 내가 문 닫으면 많은 사람이 굶을 거고 자식새끼에게 뭐라고 하며 대하겠습니까. 팔순이 다 된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제발 내 성의껏 드리는 걸로 원만하게 타협을 해 주시면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맹세코 없을 겁니다. 늘 감시하셔도 좋습니다." "내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네 아가리만 바라보고 있으란 말이냐?" "그런 뜻이 아니고, 정말 이런 짓을 않겠다는 겁니다." "이 벼락을 맞아도 하루에 수십 번을 맞을 사내야. 무엇을 못 먹어서 네 손으로 출산시킨 여자들의 태반을 처먹어야 했냐? 하늘이 내려다본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하나님께 맹세하겠습니다. 교회도 더 열심히 나가고 헌금도......" "교회엘 왜 다녀? 그 신성한 교회엘 왜 나가냐? 너 같은 놈이 다니니까 교회가 더럽혀지는 거다. 깨끗하게 태어나는 그 신비스런 새 생명에게 그런 치졸한 짓을 하고 어떻게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했었냐?" "......" 나는 이 사내들이 경찰서로 끌고 갈 작정으로 손대지 않고 사람 다루듯 하고 있었다. 증거는 모두 확보되어서 내 마음 내키는대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아팠다. 나는 별로 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법학공부를 했으면서도 법이라고 하면 괜히 오금이 저리고 짜증이 났다. 내가 법조인을 싫어하는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면 내가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법학과에 입학하는 그 순간에 벌써 사람 마음대로 잡아들여 콩밥 먹여 버리는 법조인이나, 옛날로 치면 암행어사쯤 된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못 배운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첩 놀음에 지치고 곗돈 떼이고 당한 과부 설움과 외아들에 대한 지나친 편애 따위로 얼룩진 일생이지만 자식이 법학과에 입학되는 그 순간부터 법과 자식을 둔 어머니 행세를 하려고 했다. 순박한 주위 사람들도 그걸 믿었다. 주먹질이나 하고 싸움패로 나서려니 했던 내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 어머니의 사랑의 공갈을 믿었던 것이다. 구분도 없었다. 그저 법학과만 졸업하면 내 자식이 보기 싫은 년놈들을 잡아다 곤장을 치거나 콩밥을 먹이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 버렸다. 사실 법이란 상식보다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법이란 아무리 잘 만들어도피해자가 생기는 것이며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피해 가려는 사람이 있는 한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법이란 훨씬 많은 사람을 보호해 왔고 그럴 명분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한다는 것은 신과 같은 혜량 없이 다루어선 안 되면서도 기실 그럴 수가 없는 게 또 법이었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그 법을 집행하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상식적인 인간이 내가 만약 이들을 법에 호소하여 넘긴다면, 이들은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고작해야 형편없는 처벌, 법조문에 태반을 먹었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다는 사항이 없으니까 파렴치한 산부인과 의사라는 토픽 같은 기사로 시끄럽게 장식될 뿐 정상대로 한다면 중형을 선고해도 무방한 이들이 현행법상으로는 간지러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죄악을 저지르며 사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까닭은 역시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죄악의 불감증인 탓이리라. 내가 이자를 처벌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문이었다.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반을 생식하는 유상길이를 도저히 그냥 둘 배짱 또한 없었다. "노부모, 마누라, 자식새끼, 사회 체면과 그 잘난 집안 체면...... 그걸 아는 놈이 태반을 회쳐 먹어? 너 같은 놈은 밤낮 없이 잘 먹여가지고 아프리카에 식인종 사는 곳으로 데려다 줘야 할 놈이다. 식인종도 아마 너 같은 놈은 안 잡아먹을 거다." "용서만 해 주신다면 무슨 짓이고 한다잖습니까? 한 인간을 살려 주세요." "살려 주고 싶다. 너 같은 족속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이 정도 가지고 안 되겠습니까?" 유상길이가 밀어놓은 것은 통장과 도장이었다. 나도 얼핏 펴보고 씨익 "너, 사람 잘못 봤다. 이까짓 몇 억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았냐? 임마, 요즘 몇 억이 돈 축에 끼는 줄 아냐? 적어도 이 병원을 주셔야지." "선생님, 제발 사람 좀 살려 주십쇼." "살려 주려고 병원 달라는 거다. 그만큼 벌었고 그만큼 태반 챙겨먹었으면 병원 그만둘 때 됐잖아."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제발 살려 주십쇼. 제가 큰일을 하겠습니다. 이젠 연구만 하겠습니다. 다른 짓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큰 공을 세워 이바지 하겠습니다." "연구? 너 같은 놈이 무슨 연구냐?" "태아나 산모 건강에 큰 역할을 할 방법이 지금 거의 다 완성되어 가고 나는 한참 동안 유상길과 입씨름을 했다. "그럼 좋다. 내게도 조건이 있다. 너 같은 놈을 살려 주려면 내게도 명분이 있어얄 거 아니냐?" 유상길이는 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네 재산을 다 내어놓으란 얘긴 않겠다. 그 가운데 일부를 떼어내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청소년학교와 야간학교, 장애자학교 같은데 희사할 수 있지?" "하겠습니다." "또, 네가 의사니까 정박아 수용시설을 세워서 운영해라." "하겠습니다. 꼭요." "셋째는 네가 의사 노릇을 하고 싶거든 영세민들에겐 무료시술을 해 줘라. 그만큼 각 구청마다 보호대상자 증명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료료 해 주겠다는 광고를 낼 수 있겠지?" "꼭 하겠습니다." "내일 모레 일간지에 모두 내라. 내가 시킨 그대로. 그리고 공고한 그대로 실행하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발표해 버리겠다. 네 비행 모두를. 오래 하란 얘기도 아니다. 딱 오 년만이라도 약속을 지켜라. 그 뒤엔 상관 않겠다." "두고 보시면 압니다. 평생사업으로 꼭 하겠습니다." "그럴려면 이 집을 헐고 무료병동을 짓는 게 좋을 거다. 이건 내가 주는 돈이다.맞지?" "예." 수표와 문서들을 내밀고 일어섰다. 사내가 꾸벅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꼭 실천하겠습니다. 두고 지켜보시면 압니다. 그런데 저는 여태 성함도 모릅니다." "장총찬이다. 이름이 더럽게 생겼지. 우리 아버지 탓이지 내 탓은 아니다. 어렸을 때 여러 번 이름을 바꾸고 싶었지. 서부 활극에 나오는 긴 총 가진 놈도 아닌데 우리 아버지 때문에 이름이 이따위가 됐다." 사내들을 모두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말씀하세요." "당신들을 그냥 용서하려니까 내 가슴이 쓰려서 그냥은 못 가겠다." "자술서를 다 쓴 사람부터 나한테 몇 대씩 맞아 줘야겠다. 딱 세대씩만 패겠다." "좋습니다." 자술서를 모두 받는 동안의 시간이 꽤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글을 썼는데 유동길 교수만은 변명과 잔소리가 많았다. 나중에라도 무슨 빌미가 될까 봐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유동길 선생. 당신은 앞으로 정치를 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인데 더럽게 치사하시구먼. 정치도 그런 식으로 할 건가?" 내 물음에 대꾸가 없었다. "세 대만 패고 가려는 참인데 당신 버르장머리는 악착같이 고쳐줘야겠다. 이리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인정사정 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유동길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제발 살려 주십쇼. 제발, 제발......" 무릎을 꿇었다. "이 개만도 못한 사내야. 잘못했으면 시인하고 용서받고 그래야 할 거 아니냐? 네가 명색이 대학교수고 앞으로 정치를 할 사내라면 정신 좀 차려라구. 그 꼴로 어떻게 학생을 가르치고 국민의 대변인이 되겠다고 껍신거리냐. 그냥 가려고 했더니 너한테는 한 가지 더 일거리가 남았다." "말씀을 하세요." 주먹은 되게 겁을 내는 사내였다. "언젠가 봤다만 네가 쓴 글을 보니까 한국 경제는 네 말 안 들어서 망조든 꼴이 됐더라. 너는 양심적이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힘쓰는 대학교수다. 그런데 이 나라 한글 질서를 깨뜨리고 있다는 걸 아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유씨냐, 아니면 류씨냐?" "그건 우리 문중에서 그렇게 쓰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럼, 문중에서 결정하면 아무라도 한글 질서 깨고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냐?" "다른 성씨는 안 됩니다. 우리 파만 그렇게 쓰기로 한 거고 문교부에서도 인정한 거니까요." "문교부에서 인정한 법적 근거가 있느냐?" "있습니다." "뭐냐?" "사행령인가...... 그럴 겁니다." 법이 있고 한글엔 문법이 있다. 그걸 어떤 고리타분한 느네 문중의 정신 오락가락하는 늙은놈이 주장해서 압력 넣고 지랄발광해서 쓰고 있다는 걸 네놈도 알겠지. 느네 대학교 국문과 학생한테 물어봐라.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 거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한글 질서가 깨지고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땅의 법 질서가 깨어지고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특수층이 생기는 거다 이놈아. 이 특수한 놈아, 그렇게 특수하려고 태반을 잘게 썰어 처먹여야 했냐? 학생들이 웃는다. 국민학교 애들도 웃어 이놈아. 국민학교 책에 유관순 열사라고 나오지 류관순 열사라고 표기하는 거 봤냐? 그렇게 훌륭한 인물 밑에서 어째서 너 같은 쪼다들이 생겼는지 이해를 양반되고 알아 주더냐? 세종대왕이 너 같은 놈 꼬라지 뵈기 싫어서 지하에서 찡그리시겠다, 이놈아. 더 까불지 말고 네 문중의 수많은 좋은 분들께 큰절이나 한번하고 똥통에다 대가리 처박고 반성 좀 해라. 제발 한글 질서 좀 지켜다오. 상품에 외래어투성이고 애들 앞가슴에 써붙인 외래어가 낯 들고 못 볼 문구가 된 탓은 네 주둥아리로 힐난하면서 도대체 네놈은 어째서 류씨여야 하느냐? 그래서 그런지 네놈 논문의 문장을 보니까 문법 어긋난 것 투성이더라. 그러고도 경제학 교수냐? 국민학교부터 다시 다녀라." 유동길이도 별로 할 말이 없었는지 아니면 얻어맞을까 봐 겁을 먹고 입을 봉했는지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류별종...... 그런 식으로 고치지 그러냐?" "......?" "태반 처먹고 정력 좋아져서 은밀한 데 몰려가 해괴망측한 짓했다는 걸 학생들에게 알려 주고 네 마누라에게 알려 주고 네 고향땅에 알려 주래?"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이제 다 끝난 얘기 아닙니까? 봐 주기로 했으면 화끈하게 봐 주십쇼." "너 만큼은 화끈하게 못 봐 주겠다." "선생님, 무엇이든지 하라는대로 다하겠다잖습니까?" 나는 유동길이를 내 화가 삭을 만큼 가격했다. 방바닥을 뒹굴어 다니다가 내 무릎을 잡고 애원하는 이 사내를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았다. "쓰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묘비명에조차 한글 질서를 깨는 류씨를 쓰지 않겠다는 것과 죽어도 정치를 포기하겠다는 각서 한 장 쓸래?" "다른 건 다하겠습니다만...... 이미 준비도 다해 왔고 차기에 출마하기로 군민들과 약속까지 했으며 쓴 돈도 많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 양심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그것만은......" "거절하면 사직당국에 고발해 버리겠다. 알 만한 놈이 버티는구나." 나는 또 한차례 유동길 교수를 방바닥에다 뒹굴렸다. 이를 앙다물고 버티던 사내가 결국 두 손을 맞잡고 "쓰겠습니다." 내가 내민 종이 위에 떨리는 손으로 겨우 각서를 쓴 유동길은 끙 소리도 요란하게 누워 버렸다. 우리들은 대충 정리한 뒤에 유상길네 병원을 나왔다. "형님, 그자식들을 그냥 두고 나간다니 말도 안 돼요." 한 녀석이 밖으로 나오자 이렇게 울분을 터뜨렸다. 세상을 험하게 살아온 녀석들이지만 마음을 다져먹고 새 사람이 된 애들의 심정에도 그런 일은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안다, 너희들 심정을." "저런 것들이 어떻게 사회 지식층이고 교수고 의사고 그렇습니까? 형님, 저런 건 반쯤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해야 돼요." "다 안다. 그러나 내 말 좀 들어라. 저런 사내들을 처벌해서 얻는 이익과 내버려둔 채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해서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치료하게 해 주고 정박아나 너희들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고발해 봤자 고작해야 형편없는 형기, 즉 죄 값에 비하면 형법에 명시된 저들의 죄 값은 형편없을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면 있는 재산 가지고 땅 투기나 하고, 계집질이나 하면서 일생을 쾌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게 빤하다. 그러느니 저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을 만들어 버리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모르지만 저 사내들이 좋은 일을 해서 이 사회에 빛을 남기고 갔으면 한다. 인간은 실수하게 마련이고 죄를 짓게 마련이다. 우리도 그랬잖아? 그러나 이젠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더라도 저들이 약속만 지킨다면 우리가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한다. 너희들 마음을 모르는 건 결코 아니다. 나도 성질 같아선 그 자리에서 목줄을 눌러 버렸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려면 적어도 고뇌해야 하고 아파해야 하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애들에게 변명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체질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해도 내 행동에 반발하지 않던 애들이었었다. 펼쳐나갔다. "형님이 재산을 뺏어서 그런 사업을 하면 되잖아요." "아니지. 재산을 뺏는 것부터가 죄악이다.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비열한 방법으로 일을 시작하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우리들 몫이다. 방법을 안 가리고 일하는 무리가 많다고 우리까지 그런 짓을 할 수야 없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정말 성질나서 못 견디겠어요." "참자." 우리는 큰일을 했으면서도 시무룩해진 채 근처의 술집으로 갔다. 애들은 취하고 싶어했다. 내 심정도 착잡하기는 애들의 태도로 미루어 헤어진 뒤에 다시 쫓아가 유상길네 일가와 그 친구들을 못살게 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다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내 말을 거역할 생각조차 않던 애들이었는데 이번 일만은 정말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하니님. 할말이 그래도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입이 열 개라도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을 하나님이 분명이 만들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책임을 지셔야 할 거 아닙니까. 조그만 상품을 만들어 팔더라도 책임을 지는 판인데 어째서 이렇게 팽개쳐둬야 하는 겁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인간의 잘못이 하나님 탓이냐고 하더군요. 인간의 잘못은 그 인간만의 잘못이라면 하나님 당신은 인간을 만든 적이 없겠죠. 논리적으로 그렇잖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한 논리적으로 따지지 말란 말인가요? 하나님, 당신도 혹시 인간의 불행이 당신의 행복인가요? 그래서 뭐든 오래 해먹는 법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정신이나 좀 차리십쇼.

[묘안당]

패병 걸리면 태반을 젖갈처럼 양념해서 먹는단얘길 들었고 비싼 요리집에서 요리로 나온단 얘길 들었는데 태반의 고단백질을 소각하기는 아깝단 생각도 들어요 ...ㅎㅎ 오늘 야그는 읽으면서 내내 속이 느글거려 뒤집힐것 같은 기분이기는 하지만...후딱 커피나 한잔 하렴니다...ㅋㅋㅋ 감사합니다

[묘안당]

그리고 또 흘러 들은이야기중에 낙태수술하면 소뱃속에 송아지 고기가 비싼것처럼 사람 낙태시킨것을 먹는단 얘기도 들었는데....소설을 읽다보니 별얘기가 다나오네요.....ㅋㅋㅋ 저는 완전 채식을 하니까~몸이 가볍고 너무나 좋습니다

[미혜]

별별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네요!! 요즘도 그런 인간이 있겠지요?!

[그리운남촌]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