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인데, 문항별로 여기에 기록을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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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번 문제
ㄹ 선지를 봅시다.
ㄹ. 갑, 을: 다른 나라에 빈곤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원조의 의무를 정당화한다.(갑은 롤스, 을은 싱어)
나는 이 선지가 오류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선지 내용이 2017학년도 9평 13번 선지 ⑤와 상충한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선지를 다시 써보겠습니다.
⑤ 갑, 을: 절대 빈곤 해결을 위한 원조는 보편적 의무로 간주해야 한다.(갑은 롤스, 을은 싱어)
당시에도 이 선지는 크게 문제가 되었고, 나는 이 선지가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평가원 게시판에 올렸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음). 이게 왜 오류인지는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17학년도 선지가 옳다면, 이번 수능 ㄹ 선지는 왜 옳지 않은 내용일까요? 17학년도에서는 '절대 빈곤'인데, 이번 수능에서는 그냥 '빈곤'이기 때문에?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17학년도 선지가 오류고, 이번 수능 선지는 오류가 아닙니다. 그런데 17학년도 선지를 암기한 학생들, 또는 인강강사들한테서 괴상한 설명을 들은 학생들 중 이번 ㄹ 선지를 틀린 학생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제가 가르친 학생들은 어떻게 이번 수능 ㄹ 선지를 맞혔을까요? 저는 17학년도 선지를 설명하면서 "이 선지는 오류이지만 평가원 입장을 무조건 암기해라. 평가원 입장은 다음과 같다. '절대 빈곤 해결을 위한 원조는 보편적 의무다'. 평가원은 아무래도 '절대 빈곤'인 경우에는 개인에게도 원조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절대 빈곤인 경우에는 롤스도 보편적 의무 인정'(평가원 입장)이라고 암기하고 있었는데, 이번 ㄹ 선지에서는 '절대'라는 말이 빠졌기 때문에 평가원이 원하는 정답을 고를 수 있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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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평가원 기출 선지 오류가 너무나 많고, 거기에 연계교재 오류도 널려 있어서, 저는 학생들한테 "팩트는 이것이지만, 평가원 입장과 연계교재 입장을 무조건 암기하라"고 가르칩니다. 나아가, 평가원이 어떤 용어나 표현을 어떤 의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것까지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까지 가르치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작년에도(작년에는 윤리와 사상), 올해에도(올해는 생윤) 모두 만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평가원 어린이들이 우둔하니, 현장에서는 정말 기막힌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정말 이 사태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요? 수능에서 윤리 과목을 빼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할까 두렵습니다.
2. 15번 문항
ㄴ을 다시 써봅시다.
ㄴ. B: 인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연과 관련해서도 인간의 의무가 발생한다.(칸트 입장)
칸트는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인간의 의무를 인정합니다. 이건 그냥 주지의 사실이죠. 그런데 평가원은 과거 이상한 선지들,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인정된다는 식의 선지들을 제시해왔습니다. 이게 생윤이 수능에 도입된 초창기 어설플 때 일이라, 이제 와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과거 오류 선지들에 반하는 선지(그러므로 내용이 올바른 선지)를 제시하기는 어렵게 되었죠.
그런데 현재 연계교재들은 칸트가 마치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의무'를 인정한다는 것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5번의 칸트 내용(감정의 공유)과 마찬가지로 학생들한테 '무조건 암기'하라고 얘기해두었습니다.
평가원 어린이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칸트가 '자연과 관련해서' 인간에게 어떤 의무가 있다고 했나요? 만일 평가원 어린이들의 의도가 '간접적 의무'에 있었다면, 저 선지에 맞지 않죠. 왜냐하면 '인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라는 표현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이미 다 포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간접적 의무' 역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실제로 그렇게 말하잖아요? '(어떤) 자연이나 동물에 대한 의무는 모두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일 뿐이라고요.
그러므로 '자연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의무는 '인간과 무관하게' 오직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의무를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가원 어린이들에게 물어봅시다.
칸트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인정했나요?
명백한 오류입니다. 덧붙여, '자연과 관련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범위가 너무 넓어집니다. 이것 역시 10번의 ㄹ 선지에서 지적한 '조건 없이'라는 표현과 그 맥락이 같은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정확히 '학문적 용어, 팩트, 표현'을 모를 때 이런 티미한 표현을 제시하게 된다는 거예요. 고딩 애들한테 한번 선지 만들어 보라고 해보세요. 그럼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정말 평가원 어린이 여러분! 안 쪽팔립니까?
3. 17번 문항
④번을 다시 써보겠습니다.
④ 과시 소비는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지는가?(베블런의 입장)
이미 어떤 학생이 이 선지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압니다. 그 학생의 이의제기 내용은, 과시 소비가 하류계층에서도 이루진다고 할 때 하류계층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과시 소비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죠.
정확한 지적입니다. 하류계층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과시 소비를 한다면, 자신이 '하류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과시 소비를 한다는 것이 되는데, 이거 말이 안 되죠?
그럼 이제 남은 건 베블런이 과연 '하류계층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과시 소비를 한다고 말했는가 하는 겁니다. 베블런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모두 평가원이 원하는 정답을 골랐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다른 선지를 모두 소거하다 보니 그나마 ④번 선지만 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류 선지가 오류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죠.
하나만 더 힌트를 주겠습니다. 그렇다면 베블런은 하류계층의 과시 소비의 동기(목적)가 어디에 있다고 했을까요? 이를 위해 베블런이 사용한 용어가 무엇일까요?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4. 19번 문항
④번 선지를 다시 써보겠습니다.
④ E: 사형은 일반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실행되어야 함을 간과한다.(루소가 칸트에게 하는 비판)
평가원은 이 선지가 '옳은 내용'인 것으로 발표했는데, 그러려면 루소가 사형제도의 목적이 '일반 시민들의 안전에 있다'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한번 찾아보세요. 루소는 그 어디에서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아가 '일반 시민들의 안전'이 형벌의 목적이라면 공리주의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요?
물론 일부 교과서와 연계교재에서는 위 선지처럼 루소가 '일반 시민의 안전'을 형벌의 목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와 연계교재가 선지의 오류 여부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거, 우리 평가원 어린이들도 알고 있죠? 나는 물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한테 "오류이지만 연계교재대로 무조건 암기하라"고 말해두었기 때문에 그 학생들이 틀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제발 부탁인데, 책 좀 읽어보세요. 네, 제발....ㅎㅎㅎ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2.11 10:44
그냥 그렇게만 해설했나요? 이유 설명 없이?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2.13 09:16
@일체 해설지가 수능 직후에 나오는 모양이죠? 저는 잘못된 해설이라고 봅니다. ebs 해설은 신경 안 쓰는 게...
다만, EBS가 뭔가 다른 생각으로 그런 설명을 했을 수는 있는데, 그럼 기존 평가원 입장과도 달라지고...
선지에서 '자연'이 뭘까요? '관련'은 또 뭘까요? 애초에 선지에 사용된 표현이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