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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나와 런던 시내를 말리기 시작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취조실에서 나와 택시를 부르며 브쥐 파슈는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레이 티빙은 큰 소리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성배와 비밀문서, 신비한 단체 등등에 관한 두서 없는 얘기들은 이 교활한 영국인 역사가가 자기 변호사들을 통해서 정신적 문제를 들고 나와 청원하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니야.’
파슈는 생각했다. 티빙은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계획을 세워 놓는 정교함을 보였다. 티빙은 바티칸과 오푸스 데이를 몰아세웠지만, 양쪽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티빙의 더러운 작업은 광적인 수도승과 필사적인 주교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졌다. 더욱 교활한 것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에 전자 도청기지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실제 도청 작업은 티빙의 집사인 레미가 했다. 유일하게 티빙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레미는, 참 편리하게도 알레르기 반응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신 능력이 결여된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작업이지.’
파슈는 생각했다.
빌레트 성에서 나온 콜레의 정보에 따르면, 이 영국인의 교활함은 너무 대단해서 파슈 자신이 한수 배워야 할 정도였다. 파리의 주요 사무실들에 도청장치를 성공적으로 숨겨놓은 이 영국인 역사가는 그리스인에 비유할만했다.
‘트로이의 목마 수법이지.’
의도적으로 타깃이 된 티빙의 손님들 중 일부는 사치스러운 예술품을 선물로 받았다. 일부는 아무 생각 없이, 티빙이 구체적으로 물품을 배치한 경매에 참가해 물건을 가져갔다. 소니에르의 경우,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다 빈치 관(館)’에 대해 티빙이 자금을 댈 수 있는지를 의논하기 위해 빌레트 성으로 저녁 초대를 받았다. 티빙의 초대장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추신을 달고있었다. 소니에르가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로봇 기사를 보고 싶다고 썼던 것이다.
‘기사를 저녁 식사에 데려와 주십시오.’
소니에르는 그대로 했고, 문제는 레미 르갈뤼데크가 눈에 띄지 않게 부속품을 달아 놓을 정도로 기사를 오랫동안 홀로 두었다는 데 있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파슈는 눈을 감았다.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세인트메리 병원의 회복실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아링가로사를 내려다보며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주교님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어요. 기적 같다고나 할까요.”
주교는 연약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항상 축복을 받았지요.”
간호사는 일을 마치고 떠났다. 햇살이 주교의 얼굴을 따뜻하고 환하게 비추었다. 지난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밤이었다.
낙담한 채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에 대해 생각했다. 사일래스의 시체는 공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거라, 내 자식아.’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획의 일부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난밤 브쥐 파슈가 전화를 걸어, 생 쉴피스 교회 안에서 살해된 수녀와 주교와의 관계를 물었다. 그때 아링가로사는 그 밤이 무섭게 변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사람이나 더 살해됐다는 소식은 공포를 분노로 변질시켰다.
‘사일래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스승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아링가로사는 자신이 차단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용당했다.’
자신이 일으킨 끔찍한 사건의 고리들을 끊을 유일한 방법은 파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아링가로사와 파슈는 스승이 다시 살인을 부추기기 전에, 사일래스를 붙잡으려고 했다.
뼈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링가로사는 눈을 감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유명한 영국 기사인 레이 티빙을 체포한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스승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게 벌거벗고 누워 있구나.’
티빙은 바티칸이 오푸스 데이와 결별하려는 계획을 알아챘다. 그리고 자기 계획의 완벽한 장기의 졸로 아링가로사를 고른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성배를 쫓아 맹목적으로 뛰어들 자가 누가 있겠는가? 성배는 그것을 가진 자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 줄 테니까.’
레이 티빙은 자기 정체를 교활하게 감추었다. 프랑스 말투를 쓰고 신앙심이 깊은 척했다. 그리고 주교가 필요로 하지 않는 한 가지를 대가로 요구했다. 돈이었다. 아링가로사는 의심을 하기에는 너무 몰두해 있었다. 2천만 유로라는 가격표는 성배를 얻고, 바티칸이 오푸스 데이에 결별의 대가로 지불하는 액수에 비하면 하찮은 돈이었다. 계산은 깨끗했다.
‘장님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물론 티빙이 저지른 최고의 모욕은 돈을 바티칸 채권으로 지불해 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일이 잘 되면, 범죄 수사는 로마를 향하게 될 터였다.
“많이 나아지셔서 기쁩니다. 주교님.”
아링가로사는 문가에서 들리는 우락부락한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얼굴은 생각과 달랐다. 완고하고 힘이 넘치는 외모에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매끄럽게 넘긴 남자는 짙은 색상의 양복 위로 두꺼운 목이 보였다.
“파슈 반장?”
아링가로사가 물었다. 지난밤 아링가로사의 비행을 위해 반장이 보여준 연민과 걱정스러운 어투는 훨씬 부드러운 이미지의 인물을 연상시켰다.
반장은 침대로 다가와서, 무거워 보이는 낯익은 검정 서류가방을 들어올렸다.
“이 가방은 주교님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아링가로사는 채권으로 가득 찬 가방을 바라보다가, 부끄러움이 일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손가락으로 침대보의 솔기만 어루만질 뿐 아링가로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반장, 난 이것을 어떻게 할까 깊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습니다.”
“물론이지요, 말씀하십시오.”
“파리에 사일래스의 가족들이......”
감정을 삼키며 주교는 말을 멈추었다.
“어떤 금액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장이 이 가방에 든 내용물을 나누어서......남겨진 가족들에게......” 파슈의 짙은 눈동자가 오랫동안 주교를 응시했다.
“아름다운 생각입니다. 주교님. 주교님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지켜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삐쩍 마른 프랑스 경찰관이 대저택 앞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었다. 파슈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BBC기자의 어조는 비난에 가까웠다.
“콜레 부관, 지난밤 프랑스 경찰국의 반장은 무고한 두 사람에게 공공연히 살인죄를 씌웠습니다. 로버트 랭던과 소피 느뵈가 경찰국에 책임을 물을 것 같습니까? 파슈 반장은 이 일로 파직되는 겁니까?”
콜레 부관은 피곤해 보였지만 침착했다.
“제 경험상 브쥐 파슈 반장은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반장님과 얘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반장님이 어떻게 수사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느뵈 요원과 랭던 씨를 범인 수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진짜 살인범을 유인하기 위한 계략의 일부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콜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랭던 씨와 느뵈 요원이 이 작전에 의도적으로 참여한 것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파슈 반장님은 항상 창조적인 수사기법을 행해 오셨으니까요.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확인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반장님이 범인을 체포했고, 랭던씨와 느뵈 요원은 모두 안전하며 무고하다는 것입니다.”
아링가로사를 향해 돌아설 때, 파슈의 입술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좋은 사람이지요. 저 콜레라는 사람 말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아링가로사를 내려다보던 파슈는 마침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이마를 문질렀다.
“주교님, 제가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의논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주교님이 하늘에서 런던으로 방향을 튼 일 말입니다. 항로를 변경하기 위해 조종사에게 뇌물을 주셨더군요. 그렇게 하면 국제법을 일부 위반하는 일이 됩니다.”
아링가로사는 풀이 죽었다.
“난 아주 절박했습니다.”
“압니다. 제 부하들이 조종사를 심문해 보니, 조종사도 그렇게 말했다더군요.”
파슈는 주머니에 손을 뻗어 수공예 홀이 박힌 낯익은 자수정 반지를 꺼내놓았다.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다시 끼울때, 아링가로사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교는 손을 내밀어 파슈의 손을 쥐었다.
“매우 친절하군요. 고맙소.”
파슈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창가로 걸어가서 시내를 내다보았다. 파슈의 마음은 멀리 어딘가로 떠나 있었다. 그가 돌아섰을 때,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주교님, 여기에서 나가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전날 밤, 아링가로사는 간돌포성을 떠나며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내 길도 반장의 길처럼 불확실하다오.”
“그렇군요. 저는 좀 일찍 은퇴할 것 같습니다.”
아링가로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은 믿음도 경이로운 일을 해낼 수 있답니다. 반장.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말이오.”
104
로슬린 예배당은 종종 암호로 이루어진 예배당이라 불린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남쪽으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슬린 예배당은 고대 미트라교 사원 터에 자리잡고 있다. 1446년 성전 기사단이 지은 예배당에는 유대교, 기독교,이집트,프리메이슨,그리고 이교도의 전통에서 비롯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상징들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예배당의 지정학적 위치도 글래스턴베리를 지나는 남북의 자오선 위에 정확히 자리잡고 있다. 이 로즈 라인은 아서왕의 아발론 섬을 전통적으로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고, 영국의 신성한 기하학의 중앙 기둥으로 간주되었다. 로슬린 예배당의 이름은 신성한 로즈 라인에서 따온 것이었다.
랭던과 소피가 렌트한 자동차를 절벽의 아래쪽에 있는 주차 구역에 세울 때, 로슬린 예배당의 낡은 첨탑은 긴 저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의 짧은 비행은 편안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들 앞에 놓여 있을 것에 대한 기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쓸쓸하게 서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랭던은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꿈일 거야.’
하지만 랭던은 소니에르의 마지막 메시지가 이보다 구체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
랭던은 소니에르의 ‘성배 지도’가 도표일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X표시가 된 그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시온의 마지막 비밀은 소니에르가 처음부터 그들에게 준 해답과 같은 형식이었다.
‘단순한 글귀’
시의 네 줄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름으로도 로슬린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시는 예배당의 유명한 건축학적인 특징을 여러 가지 언급했다.
소니에르의 마지막 메시지가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랭던은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랭던에게 로슬린 예배당은 너무나 명백한 장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수백년 동안, 이 석조 예배당에 성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지질 침투 레이더로 예배당 밑에 존재하는 놀라운 구조물을 밝혀냈을 때, 최근 몇십년 간 이 소문은 속삭임에서 외침으로 변해 버렸다. 예배당 밑에 거대한 밀실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예배당 아래에는 깊은 지하실만 있을 뿐, 지하실로 이르는 출입구나 통로가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신비한 밀실에 도달하기 위해 기반암을 폭파시키자는 청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슬린의 신탁관리재단은 성역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공론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로슬린 재단이 숨기려는 것은 무엇일까?
로슬린 예배당은 이제 미스터리 신봉자들에게는 성지 참배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좌표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자기장에 이끌린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는 지하실의 숨은 입구를 찾아 언덕을 조사하러 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단순히 이 땅을 돌아보고, 성배의 전설을 느끼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랭던은 로슬린에 와본 적은 없었지만, 이 예배당이 현재 성배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묘사될 때마다 웃고 말았다. 하긴 오래 전에 성배가 여기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오래가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로슬린은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끌었고, 조만간 누군가는 지하실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진짜 성배학자들은 로슬린이 미끼라는 것에 동의한다. 시온 수도회가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가짜 종착지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시온의 쐐기돌이 제시하는 시는 곧장 이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랭던은 더 이상 잘난 체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심란한 질문이 그의 마음을 달리고 있었다.
‘소니에르는 왜 이렇게 명백한 위치를 안내하고자 그런 수고를 들여야만 했을까?’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논리적인 대답만이 가능했다.
‘여기에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로슬린에 관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로버트? 같이 갈래요?”
차 밖으로 나온 소피가 랭던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피는 파슈 반장이 돌려준 장미목 상자를 들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크립텍스 두 개가 원래 상태 그대로 조립되어 쉬고 있었다. 파피루스 시는 가장 핵심에 안전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물론 깨진 식초병은 제거되고 말이다.
긴 자갈길을 따라 올라가며, 랭던과 소피는 예배당의 유명한 서쪽 벽을 지나쳤다. 일반 방문객들은 이상하게 튀어나온 이 벽이 예배당이 완공되지 않은 증거라고 보았다. 진실은 더 흥미롭다는 것을 랭던은 기억했다.
‘솔로몬 신전의 서쪽 벽.’
성전 기사단은 로슬린 예배당을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신전과 같은 건축 도안으로 디자인했다. 서쪽 벽. 좁은 직사각형의 성역, 그리고 성배가 들어 있던 지하 저장실. 원래 성전 기사단 아홉 명은 솔로몬 신전의 지하실에서 매길 수 없는 보물을 발굴했다. 성배가 원래 숨겨져 있던 장소와 일맥상통하는 성배 보관소를 지으려 했던 기사단의 아이디어는 위대하다는 것을 랭던은 인정했다.
로슬린 예배당의 입구는 랭던의 기대보다 훨씬 수수했다. 작은 나무 문에는 두개의 경첩이 있고, 참나무로 된 간단한 표지판이 있었다.
로슬린
이 옛날 이름은 예배당이 앉아 있는 로즈 라인, 즉 자오선에서 유래한 것임을 랭던은 소피에게 설명했다. 성배 학자들은 로즈 라인이 장미의 혈통, 즉 마리아 막달레나의 조상 가계도라고 해석하기를 좋아했다.
문을 열자, 예배당 안의 따뜻한 공기가 훅 하며 빠져나왔다. 마치 고대의 건축물이 긴 하루를 끝내고 지친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예배당 입구의 아치는 장미 꽃잎으로 새겨져 있었다.
‘장미들. 여신의 자궁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며, 랭던은 한눈에 유명한 성역을 둘러보았다. 로슬린 예배당의 정교한 돌 세공에 관한 자료들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보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기호학의 천국.’
랭던의 동료는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
예배당의 모든 면에는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독교의 십자가, 유대교의 별, 프리메이슨의 봉인, 기사단의 십자가, 풍요의 뿔, 피라미드, 점성술의 기호, 식물,채소,별 그리고 장미. 유럽 전역에 교회를 세운 성전 기사단은 석공의 대가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로슬린은 기사단의 사랑과 존경이 담긴 가장 고상한 노력의 결실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 석공의 대가들이 새기지 않고 남겨둔 돌이란 없었다. 로슬린 예배당은 모든 믿음의 성지였던 것이다...... 모든 전통들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과 여신에 대한 성지였다.
예배당에는 오늘의 마지막 안내를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밖에 없었다. 청년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우고, 예배당의 유명한 바닥선을 따라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이 보이지 않는 선은 예배당 내부의 주요 지점 여섯 군데를 연결한 길이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각 꼭지점을 연결하는 라인을 걸어가며, 끊임없이 발자국으로 예배당 바닥에 거대한 상징을 새겼다.
(별그림 육각형 모양의 별그림 있음)
랭던은 생각했다.
‘다윗의 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솔로몬의 봉인으로도 알려진 이 육각형은 한때 별을 연구하는 사제들의 은밀한 상징이었다. 그후에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솔로몬이 이 상징을 채택했다.
청년이 들어오는 랭던과 소피를 바라보았다. 예배당의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청년은 명랑한 미소를 건네며 두 사람에게 마음껏 둘러보라는 몸짓을 보냈다.
랭던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예배당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소피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왜 그래요?”
랭던이 물었다.
소피는 예배당을 둘러보았다.
“여기...... 와본적이 있는 것 같아요.”
랭던은 놀랐다.
“하지만 로슬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소피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예배당을 살폈다.
“그래요......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데리고 왔던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익숙한 느낌이에요.”
예배당을 살피던 소피가 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소피는 예배당 앞쪽을 가리켰다.
“그래요. 저 두 개의 기둥...... 본 적이 있어요.”
랭던은 예배당 저편 끝에 있는 정교하게 조각된 한 쌍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레이스 모양으로 안이 비치게 세공한 기둥들은 서쪽 창을 통해 들어온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통 제단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기둥들은 이상하게 맺어진 한 쌍이었다. 왼쪽에 있는 기둥에는 수직선이 간단하게 그어져 있지만, 오른쪽에 있는 기둥은 화려한 꽃무늬들이 나선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다.
소피는 이미 기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랭던은 서둘러 그녀를 쫓아갔다. 기둥에 다다랐을 때, 소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확실해요. 이것들을 봤었어요!”
“당신이 이 기둥을 보았다는 걸 의심하지는 않소. 하지만 이런 기둥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소피가 돌아섰다.
“무슨 뜻이에요?”
“이런 기둥은 역사적인 건축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오. 복제품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오.”
“로슬린의 복제품?”
소피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아니, 기둥의 복제품. 좀 전에 내가 로슬린 예배당 자체가 솔로몬 신전의 복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오? 이 두 기둥은 정확하게 솔로몬 신전의 머리에 세워져 있던 두 기둥의 복제품이오.”
랭던은 왼쪽에 있는 기둥을 가리켰다.
“저건 ‘보아즈’라는 거요. 또는 석공의 기둥이라고도하지. 오른쪽에 있는 것은 ‘제이신’이라고 불러요. 도제의 기둥이라고도 하고, 사실, 세상의 모든 프리메이슨 교회에는 저런 기둥들이 두개 있어요.”
랭던은 이미 성전 기사단과 현대 프리메이슨 비밀 단체들과의 강한 역사적 유대를 소피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현대 프리메이슨 비밀조직들의 직위는 도제 프리메이슨, 동료 프리메이슨, 마스터 메이슨으로 그 명칭은 초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피의 할아버지의 마지막 구절은 마스터 메이슨을 직접 언급하고 있었다. 마스터 메이슨은 그들의 예술적인 세공 기술로 로슬린을 꾸민 사람들이었다. 시는 또한 로슬린의 중앙 천장에 대해서도 적고 있는데, 로슬린의 천장은 별과 행성들로 새겨져 있었다.
여전히 기둥을 쳐다보며 소피가 말했다.
“난 한 번도 프리메이슨의 사원에 가보지 않았어요. 분명 여기에서 본게 확실해요.”
소피는 기억을 되새길 뭔가를 찾는 것처럼 예배당으로 돌아섰다.
관광객들은 예배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젊은 안내원은 명랑한 미소를 띠며 예배당을 가로질러 그들에게 걸어왔다. 안내원은 20대 후반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스코틀랜드 사투리에 딸기나무 빛깔의 머리카락이었다.
“이제 예배당의 문을 닫으려고 합니다. 뭔가를 찾으시는 것 같은데 도와드릴까요?”
‘성배는 어떻습니까?’
랭던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갑자기 소피가 불쑥 말했다.
“기호, 여기 기호가 있어요!”
청년은 소피의 열성에 즐거운 표정이었다.
“예, 거기 있습니다.”
소피는 오른쪽 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것은 천장에 있었어요. 저 위 어딘가...... 저기.”
청년이 웃었다.
“로슬린에 처음 오신 분이 아니군요.”
‘기호.’
랭던은 전설의 일부를 잊고 있었다. 로슬린의 수많은 미스터리들 가운데 수백 개의 돌덩어리들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며 기묘한 다면 표면을 만드는 둥근 아치형 천장이 있었다. 각각의 덩어리들에는 하나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상징들은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새겨진 것 같지만, 헤아릴 수 없는 비율로 암호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천장의 기호들이 예배당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타내고 있다고 믿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성배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암호 해독가들은 수백년 동안 그 의미를 풀어내려고 노력해 왔다. 오늘날까지 로슬린 재단은 은밀한 의미를 밝힌 누구에게나 보상을 해주고 있었지만, 기호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걸 보여주게 되어......”
안내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나의 첫째 암호.’
암호가 새겨진 아치형 길을 따라 홀로 걸어가며 소피는 생각했다. 장미목 상자를 랭던에게 건네주고, 잠시나마 성배와 시온 수도회, 며칠 간의 수수께끼들에 대해 잊을 수 있었다. 천장 아래에 이르러 머리 위에 있는 상징들을 보았을 때, 옛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소피는 여기를 처음 찾아왔던 때를 기억해 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예기치 못한 슬픈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소피는 어린아이였다...... 1년이나 그 전쯤, 소피의 가족들은 죽었다. 짧은 휴가를 얻은 할아버지가 그녀를 스코틀랜드에 데리고 왔다. 그들은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로슬린 예배당을 보러 왔던 것이다.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예배당은 닫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안에 남아 있었다.
“집에 가요, 할아버지.”
피곤함을 느끼며 소피는 애원했다.
“곧 갈 거야, 우리 귀염둥이. 곧 떠날 거란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남겨두고 있단다. 차에 가서 기다리련?”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어른들이 하는 볼일이에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아오마.”
“아치형 길에 있는 암호를 다시 한 번 봐도 돼요? 그거 재미있어요.”
“잘 모르겠구나. 할아비는 밖으로 나가야만 하거든. 여기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겠니?”
소피는 발끈하며 말했다.
“물론 안 무서워요! 아직 어둡지도 않은 걸요!”
“잘됐구나, 그럼.”
할아버지는 소피를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정교한 아치 길로 데려갔다.
소피는 즉시 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등을 대고 누웠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는 퍼즐 조각들의 콜라주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이 암호를 깨버릴 거예요!”
“그럼 경주하자꾸나.”
할아버지는 몸을 구부려 소피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옆문으로 걸어갔다.
“할아비는 요 밖에 있을 거다. 문을 열어 둘 테니. 만일 내가 필요하면 부르거라.”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저녁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소피는 바닥에 누워 암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졸기 시작했다. 얼마 후, 상징들이 뒤죽박죽 섞이더니 모두 사라져 버렸다.
소피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바닥이 차가웠다. “할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소피는 일어나서 몸을 털었다. 옆문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밤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으로 걸어나간 소피는 할아버지가 교회 바로 뒤에 있는 돌집의 현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망이 쳐진 문 뒤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몸짓을 했다. 그런 뒤에 할아버지는 천천히 안에 있는 사람과 마지막 몇 마디를 나누고 망이 쳐진 문 안으로 키스를 보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피에게로 돌아왔다.
“왜 울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소피를 들어올려 꼭 안았다.
“오, 소피, 너와 나는 올해 많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구나. 너무 힘든 일이야.”
소피는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고와 엄마, 아빠, 할머니, 어린 남동생에게 한 작별인사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왔어요?”
“내가 무척 사랑하는 친구에게 하고 왔단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할 것 같아 두렵구나.”
깊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대답했다.
안내원과 함께 서서, 랭던은 예배당의 벽들을 살펴보았다. 막다른 골목이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피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암호를 보고 있었다. 장미목 상자는 랭던에게 맡겨둔 채였다. 상자 안에 든 성배 지도는 이제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니에르의 시는 분명히 로슬린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랭던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에는 ‘칼날과 잔’이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랭던은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
그녀의 입구를 지키는 칼날과 잔.
랭던은 다시금 이 수수께끼의 일부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만, 이 상자......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랭던의 손에 있는 장미목 상자를 보며 안내원이 말했다.
랭던은 지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주 긴 얘기라서.”
다시 상자에 눈길을 보내며, 청년은 망설였다.
“이상한 일이군요. 제 할머니도 이것과 똑같은 상자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보석 상자인데, 윤기 나는 장미목에 똑같이 상감된 장미 문양, 심지어 경첩의 모양까지 같아요.”
랭던은 청년이 실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상자는 수도회의 쐐기돌을 위해 고객 주문형으로 제작된 것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상자였다.
“두 상자가 매우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옆문이 시끄럽게 닫혔다. 아무 말도 없이 예배당을 나간 소피는 근처에 있는 돌집을향해 서성거리고 있었다. 랭던의 소피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그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온 이래, 소피는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랭던은 안내원에게 돌아섰다.
“저 집이 무슨 집인지 아십니까?”
소피의 모습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집은 교구 사제관입니다. 교회 관장이 살고 있지요. 관장은 로슬린 재단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청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제 할머니이시기도 하고요.”
“당신의 할머님이 로슬린 재단의 대표란 말씀입니까?”
청년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할머니와 사제관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지키고 관광 안내하는 일을 돕고 있지요. 저는 제 생애를 온통 여기서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 저 집에서 저를 키우셨지요.”
소피가 걱정된 랭던은 예배당을 가로질러서 문으로 다가갔다. 반쯤 걸어갔을 때, 랭던은 걸음을 멈췄다. 젊은이가 얘기한 뭔가가 마음에 남았다.
‘할머니께서 저를 키우셨지요.’
랭던은 절벽에 있는 소피를 내다보았다. 그런 뒤에 손에 든 장미목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
랭던은 천천히 청년에게로 돌아섰다.
“할머님이 이런 상자를 가지고 계시다고 했습니까?”
“거의 똑같아요.”
“할머님은 상자를 어디에서 구하셨답니까?”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아기일 때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아직도 할아버지 얘기를 자주 하시지요. 할아버지는 손으로 뭐든지 만들어 내는 천재라고 말하곤 하세요. 별의별 것을 다 만드셨답니다.”
랭던은 상상하기 어려운 거미줄이 서로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가 당신을 키웠다고 했지요? 부모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청년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고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분들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도 함께요.”
랭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동차 사고로?”
청년의 올리브 빛 눈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그렇습니다. 차 사고로요. 그날 가족이 모두 죽었습니다.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청년은 망설였다.
“당신의 누나.”
벼랑 위, 돌집은 소피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제 밤이 내리고 있었다. 따뜻하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집이었다. 빵 냄새가 열린 망사 문을 통해 퍼져 나오고, 창문에는 황금색 불이 비쳤다. 가까이 가다간 소피는 집 안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망사 문을 통해, 소피는 나이든 여인이 복도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의 등은 문을 향하고 있었지만, 소피는 여인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길고 우아한 은발 머리는 예기치 않은 기억을 몰고 왔다. 안으로 이끌리며, 소피는 현관 계단으로 올라섰다. 여인은 한 남자의 사진이 든 액자를 꼭 쥐고, 사랑이 담긴 슬픈 손가락으로 사진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소피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여인은 지난밤,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슬픈 뉴스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소피의 발 아래에서 발판이 삐걱거리자, 여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슬픈 눈동자가 소피의 눈과 마주쳤다. 소피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진을 내려놓고 망사 문으로 다가오는 동안, 여인의 뜨거운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여자가 얇은 망사를 통해 서로 바라볼 때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났다. 천천히 파도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여인의 얼굴에 의혹에서...... 불신으로...... 희망으로......그리고 마침내 기쁨으로 변해갔다.
문을 밀고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 벼락을 맞은 듯한 소피의 얼굴을 감쌌다.
“오, 우리 아이...... 이걸 봐!”
소피는 여인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조차 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
여인이 흐느끼며 소피의 이마에 키스했다.
소피의 말은 속삭임으로 막혀 버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어, 당신이......”
여인은 소피의 어깨에 부드러운 손을 얹으며 낯익은 눈동자로 소피를 응시했다.
“안다. 네 할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하게 강요받았단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 안전을 위해서 그런 거였단다. 프린세스.”
소피는 여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즉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프린세스라고 불렀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로슬린의 고대 돌들 속에서 메아리치다가, 땅속으로 자리를 잡으며 알려지지 않은 지하실 안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소피의 어깨를 팔로 안았다. 눈물이 갑자기 솟구쳤다.
“네 할아버지는 너에게 모든 것을 얘기하고 싶어했단다. 하지만 너희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어려웠지. 그는 노력했어. 설명할 것이 아주 많구나. 그래, 설명해야할 것이 아주 많아. 더 이상의 비밀은 없다. 프린세스. 가족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온 거야.”
여인은 다시 한 번 소피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소피와 그녀의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 껴안고 현관 계단에 앉아 있을 때, 안내원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청년의 눈은 희망과 불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누나?”
눈물을 흘리며, 소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소피는 청년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껴안았을 때, 청년의 정맥에서 힘차게 흐르는 핏줄의 힘을 느꼈다...... 그녀가 이해하는, 그들이 공유하는 핏줄이었다.
랭던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들과 자리를 함께했을 때, 소피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자기는 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꼈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낯선 곳에서 잘 알지 못하는 세 사람과 함께 앉아, 소피는 마침내 집에 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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