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청어람ARMC 오수경 대표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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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청년 그리스도인,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나다
'기독교사상' 원고 청탁을 받자마자 K 생각이 났다. K는 우리 단체(청어람ARMC)에서 진행한 ‘페미니즘 이슈 북클럽’ 멤버였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K는 지역 교회 청년부에 속해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나눌 대상이 없어 고민하다가 매주 상경해 우리 모임에 참여했다. 어느 날, 모임에 일찍 온 K와 ‘스몰토크’를 나눌 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K의 책에 눈길이 갔다.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커버가 씌어 있었다. 커버가 예쁘다는 나의 말에 K가 대답했다. “일코(‘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이다. 여기서는 비주류인 사람이 평범한 사람인 척하는 경우를 뜻한다.)하려고요.”
일코? 그게 왜 필요했을까? 교회 사람들이 페미니즘 책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어느 순간부터 일코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말하기보다는 침묵하며 적당하게 공동체에 섞이길 선택한 것이다. K의 이 말에 다른 멤버들도 공감했다. 페미니즘은 사회적으로 ‘리부트’(reboot)1 되었으나 교회는 여전히 페미니즘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논쟁적인 주제는 아예 꺼내지도 못하는 ‘침묵의 무덤’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교회를 탈출하고, 어떤 이는 K처럼 보호색을 띤 채 조용히 공동체에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 남아 뭐라도 해보려는 이들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교회에 관한 판단은 동일하다.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에 안전하고 수용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일까?
나는 페미니즘이 나를 비롯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더 입체적이고 풍요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수년 동안 여성 그리스도인들과 페미니즘 모임을 하고 있다. 물론 내가 만나는 여성 중 청년 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일부이지만, 놀랍게도 교회에 관한 생각은 세대를 뛰어넘어 (부정적으로) 교통할 때가 많다. 그만큼 교회의 여성 차별과 억압은 오래된 현실이다. 어느 때부터 그 집요한 차별과 억압을 직면하며 용기 내 말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동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마다 존재했다. 다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더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고, 이런 흐름이 최근 부각된 ‘탈교회’ 현상과 맞물려 포착된 것일 뿐이다. 이 글은 그렇게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과 교통한 이야기의 일부이다. 특별히 교회를 떠난 혹은 떠나고 싶어 하는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교회는 우리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재미는 없지만 의무는 있는 곳”, “편안함은 없고 시선과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에 매번 노출되는 곳.” 교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C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함께 대화에 참여한 M도 짧지만 강렬하게 한마디를 거들었다. “구려.” 가톨릭 ‘냉담자’ 도우리 씨도 비슷한 평가를 한 바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된 건 철학과 지망 친구가 나에게 신의 존재 증명을 끈질기게 요구한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노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의 가치는 소중하다거나 모든 일에는 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말이 한 시간 넘게 반복 재생되던, 미사 중 ‘신부님 말씀’은 학교 조회 시간 중 ‘교장님 훈화 말씀’처럼 고강도 듣기 노동을 필요로 했다. 또 성당은 성별 이분법이 뚜렷한 공간이었다. 남성 신도와 여성 신도가 나눠 앉고, 여성 신도는 미사포(미사 등 공식 전래 때 세례를 받은 여성 신자들이 쓰는 머릿수건)를 머리에 쓰고 조신히 앉아 있어야 했다. 무릎 위 기장의 치마나 스키니진을 입으면 성당 어르신들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다. 그때는 페미니즘이니 뭐니 몰랐을 때였는데도 그런 분위기가 갑갑했다.2
이 이야기는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경험한 것과 많이 닮았다. 교회에 관하여 이들의 생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구림’과 ‘노잼’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가부장제’의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서 청년(특히 여성)에게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고 낙후된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이 공간에서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다음세대’로 밀려나 ‘충조평판’의 대상이 될 뿐, ‘현재 세대’로 인정되지 않는다. 당연히 재미도 없다. 하지만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 될 것, 때 되면 결혼하고 힘껏 출산하여 양육에 최선을 다할 것, 잠잠히 봉사할 것 등의 의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래처럼 반복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하다. 요즘 세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네? 제가요? 왜요?’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은 단지 소수의 것은 아니다. 각종 통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한국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3 조사를 시작한 1984년 이래 종교인은 꾸준하게 줄어들고 있다. 2021년 기준 19-29세(22%)와 30대(30%) 종교인 비율이 특히 낮다. 이런 추세는 개신교 내부 통계에서도 발견된다.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4에 따르면, 교회를 떠나는 그리스도인(가나안 성도)이 2012년에는 10.5%였으나,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실시한 “2023 국민 종교 분포 및 현황”에 따르면, 2023년에는 26.6%에 이르렀다. 10년 사이 2.5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청년 세대가 견인하고 있는데, 관련하여 목회데이터연구소는 2017년과 2023년 사이 2030 세대의 종교인 비율이 절반가량 감소했으며 특히 여성의 감소 폭이 컸다고 밝혔다.5 중요한 건 종교를 떠나거나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이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비종교인에게 현재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를 물었는데 ‘관심이 없어서’(54%)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고,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으로’(19%)가 그 뒤를 이었다.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에서도 결과는 비슷하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이유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39.7%로 가장 높았고,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28.1%로 그 뒤를 이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꾸준하게, 단호하게 낮아져 ‘종교 없음’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게’ 되기까지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쌓일 때까지 교회는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청년, 특히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교회가 이들의 상황과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그런 교회에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떠나는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에서 실시한 “2023 기독청년 인식조사: 가치관, 마음, 신앙”6 결과를 보자. 여성들은 사회에서 ‘신체적 안전’과 ‘정서적 안전’을 느끼지 못한다는 응답이 남성의 경우보다 높게 나왔다.(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자주 불안하다’는 항목에 ‘그렇다’(26.2%)고 응답한 여성 비율이 특히 높았다. ‘대중교통 이용 시 불안함’(18.8%) 역시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이 느끼고 있다. 이런 여성 청년에게 교회는 어떤 곳일까? 청년에게 사회에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다.’는 비율은 58.9%로 교회(22.9%)의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교회에 속해 있으나, 마음을 터놓고 교제하는 친구는 교회 바깥에 더 많다는 의미이다. 이 비율은 여성과 29세 이하에서 특히 높았다. 즉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도, 교회도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 아닌 셈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나다
누군가는 여성 청년들이 ‘페미니즘’ 때문에 교회와 멀어지고 신앙이 ‘떨어졌다’고 판단하지만(그래야 마음이 편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앞의 통계에서도 봤지만, 페미니즘은 물이 거의 차오른 컵에 떨어진 한 방울의 역할만 했을 뿐이지, 근본적 원인이 아니다. 나는 그 ‘한 방울’의 시기를 2016년으로 꼽고 싶다.
현재의 여성 청년들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는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 공공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번화한 도시 한복판에 있는 건물 화장실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노린 남성에 의해 일어난 사건 말이다. 한국 사회 여성들의 시간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 사건’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가부장제와 여성을 향한 멸시와 혐오를 알고도 모른척 하거나, 그게 왜 문제인지 정확하게 감각할 언어를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 특히 여성 청년들을 각성하게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으며 토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광장으로 나와 ‘나일 수도 있었던’ 피해자들과 강력하게 연대했다. 이 사건은 이후 사회 각 분야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 디지털 성폭력 항의 시위 등으로 이어졌고, 젠더 이슈 공론화와 정치 의제화 등을 비롯하여 페미니즘을 일상과 공적 영역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015년 이후에는 ‘믿는 페미’, ‘갓페미’를 비롯하여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결성한 페미니즘 모임들이 생겨났으며, 남성·지식인·목회자의 언어로 가득한 성서해석에 대항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학습의 장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이들의 관심은 여성의 안전과 여성에게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가부장적 사회문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연대, 자본주의와 기후위기 등 사회체제에 관한 관심과 실천으로 확장되었다. 물론 교회 바깥에서 말이다.
사회가 페미니즘을 학습하며 젠더 감수성을 키워가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각성하고 변화하는 동안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 어느 여성의 사례를 살펴보자.
한 교회 여성은 설교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성차별적인 비유가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당시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시기였다. 결국 어느 소모임 시간, 그는 용기 내어 사회적으로 여성혐오가 문제가 되고 있는 시기에 설교 때마다 여성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바로 ‘인간 중심적인 생각, 즉 사탄이 주는 생각’이니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라는 피드백이었다. 이 여성은 결국 말문이 막혀버렸다고 했다.7
내가 만난 대부분의 여성 청년들의 경험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많은 교회가 여성 차별적 성서해석에 기반을 둔 설교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위 ‘정상가족’ 중심의 가부장적 체계를 고수한다. 몇몇 교단은 여전히 여성 목사안수를 ‘성경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또한 혼전순결·임신중지·결혼과 임신과 출산·성역할 등에 관한 시대착오적 성서해석과 적용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남성 목회자 성범죄 사건에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동성애 혐오나 차별금지법 반대에는 어느 집단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신실하게(!) 혐오를 실천하며 사회적 진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페미니즘이라고 무사할까? 교회에서 페미니즘은 ‘빨갱이’ 수준으로 호도되고, 페미니즘 책들은 불온서적으로 취급된다. 물론 그렇게까지 대놓고 반대하지 않는 곳도 있을 것이다. 다만 ‘교회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교회 바깥에서 “그런 교회를 왜 다녀요?”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현실이다.
“저는 신앙을 지키고 싶어서 교회를 떠났어요.” 모임에서 만난 P는 자신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아니,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떠난다고? P는 페미니즘을 접하고 그동안 자신이 교회에서 왜 불편했는지, 그토록 은혜로운 성서와 신학적 가르침이 왜 자신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페미니즘이, 자신이 가진 신앙과 공존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교회에서 몇몇 청년들과 책모임을 꾸렸지만, 담당 목회자의 방해로 모임은 강제 해산되었다. P는 결국 교회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곳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떠났다.
앞서 소개한 K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이후 못 만난 사이 K는 드디어(!) 교회를 떠났다고 했다. 교회 바깥에서 지인과 느슨한 예배공동체를 만들었고, 여전히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비건 지향의 삶을 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해주었다. J는 레즈비언 그리스도인으로서 페미니즘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한번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났다. 교회 바깥에서 만난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자주 은혜를 받는다고 했다. J에게는 그곳이 교회인 셈이다.
‘아버지의 집’8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만나다
교회를 떠난 여성 청년들이 ‘쉽게’ 교회를 떠난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자신의 일상과 신앙을 형성한 교회를 떠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니다. P와 K의 경우처럼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들은 1차적으로 혼란을 겪지만, 페미니즘과 신앙의 공존을 모색한다. 교회에서 동료를 만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이들의 기대와 노력을 존중하기는커녕 위험하고 불편하게 여기며 경계한다. 많은 여성 청년이 그런 불화를 경험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어디 가서 이토록 성차별적인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서.
교회는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도무지 변화할 것 같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야 내 신앙이 지켜질 것 같아서.
비록 과정은 실패와 불화, 상처였을지 모르나 나는 이들을 마냥 상처 입은 그리스도인이라 여기고 싶지는 않다. 교회를 떠난 여성 청년들은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를 넘어서 새로운 신앙을 추구하는 세대가 출현했음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존재이다. 오히려 이들을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즉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만난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사회적 소수자와 연대하며,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를 슬기롭게 통과하기 위해 일상과 세계를 어떻게 재구성할지 고민하며 뭐라도 해보려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고민과 실천 또한 ‘신앙’이라 믿는다. 페미니즘 때문에 교회를 떠난 게 아니라, 페미니즘을 통해 신앙을 더 깊고 넓게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는 교회를 떠나는 여성 청년들을 이해하는 정확한 대답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가 이 시대에, 새로운 세대에게 적합한 신앙 체계인지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제도 교회인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인가? 후자가 맞다면, 페미니즘과 신앙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편협하게 이해해온 성서를 더 입체적이고 풍요롭게 이해하게 하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지혜이다. 관련하여 내가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운동가 벨 훅스(bell hooks)가 상상한 세계를 소개한다.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 말이다.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혁명을 통해, 우리는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완전한 자기실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우리의 꿈을 실현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오라. 페미니즘이 당신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지켜보라. 더 가까이 다가와 페미니즘 운동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라. 더 가까이 다가오라. 그러면 더 잘 보일 것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9
이 문장이 어떻게 읽히는가? 나는 하나님 나라가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페미니즘과 신앙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페미니즘과 신앙을 연결 지어 생각하며 교회에서 신실한 페미니즘 동료를 만나고 싶어 한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한 세계도 이 문장 속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여성 청년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단지 자신들을 억압한 ‘아버지의 집’을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그 새로운 세계가 되어주지 못한 건 교회이다. 여성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떠남’은 교회의 교회 됨과 신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할까?
주(註)
1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는 페미니스트 영화 평론가 손희정이 고안한 용어로 2015년 즈음부터 사회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확산된 현상을 의미한다.
2 도우리,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한겨레출판, 2022).
3 한국갤럽은 1984년부터 거의 10년 주기로 종교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6차 조사는 올해(2024)에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최근 종교 인구 급감과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에서의 종교에 관한 인식을 기록하기 위해 2021년에 일부 항목에 관한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종교 현황’과 ‘종교에 대한 인식’ 두 편으로 나누어 발표했다.(https://bit.ly/3ScNsXr)
4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엮음,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998-2023』(대한기독교서회, 2023).
5 설문조사에 관한 자세한 결과는 목회데이터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bit.ly/3HnDM6j)
6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23 개신교인 인식조사 ‘기독청년 인식조사: 가치관, 마음, 신앙’”(https://bit.ly/3H6h6aE).
7 이민지, 『언니네 교회도 그래요?: 교회 내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바꾸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들녘, 2020).
8 이 글에서 ‘아버지의 집’은 가부장 체제를 의미한다.
9 벨 훅스, 이경아 옮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문학동네, 2017).
오수경|신앙과 사회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청어람ARMC 대표이며,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사인」, 「경향신문」, 「한겨레21」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드라마의 말들』, 『을들의 당나귀 귀』(공저), 『신데카메론』(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