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 이승열 소장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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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회 디아코니아의 역사
필자는 앞서 기독교 사회봉사(디아코니아)가 신학적으로는 실천신학과 공적신학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것과 사회선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교파의 분열이 너무 심해 그 신학적 정체성을 분석하고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많은 교단이 보수적 복음주의 내지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해 사회봉사를 단편적으로만 바라본다. 교회와 신앙인의 사회봉사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복음전도와 선교 그리고 개교회의 교회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에 국한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봉사를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책임적 과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 개신교회는 신학정체성과 신앙정체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디아코니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 못했을까?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에서 왜 한국교회는 사회참여적이고, 사회책임적이며 사회봉사적인 신앙을 전수받지 못하였나? 역사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구한말 선교 초기에 서양에서 온 내한 선교사들은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교회를 설립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디아코니아적 선교, 즉 의료선교, 교육선교, 고아와 장애인을 위한 복지선교, 문서선교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교회를 설립하고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들의 디아코니아 선교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선교 역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회의 디아코니아 발전 과정과 중요한 역사적 흔적을 통해 오늘의 디아코니아를 반성하고 성찰하고자 한다.
내한 선교사들의 디아코니아
19세기 구한말 서양에서 공식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이전에 비공식 선교사 몇 사람이 짧게 방한했다. 그들의 선교적 활동과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들의 활동에서 디아코니아 선교의 흔적, 의미와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인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51)는 한국 땅에 3년에 걸쳐 세 차례나 방문했다. 그는 충남 보령의 고대도 등지에 머물면서 환자를 치료했는데, 주로 감기약 같은 의약품을 나누어주었다. 또한 감자 씨종자를 보급하여 재배를 지도했고, 야생 과일을 이용한 질 좋은 음료수를 개발해 알려주었다고 한다.1 오늘날 귀츨라프 선교사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학회가 존재하는데, 고대도에서의 선교역사와 흔적을 기념하는 자료를 만들어 보관하며 그 의미를 귀히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로버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1839-66)는 1863년에 런던선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서 중국 상하이로 왔다.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많던 토머스는 1866년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는데,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당시는 가톨릭이 박해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서양과의 무역에 관심이 없던 조선 정부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며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버렸고, 선원 모두를 붙잡아 참수형을 집행했다. 토머스는 참수당하기 직전 중국어로 된 신약성경책을 한 군인에게 전해줬는데, 훗날 그 군인이 세례교육을 받는 22명 중에 있었다는 사실이 새뮤얼 모펫(Samuel Moffett, 마포 삼열, 1864-1939)에 의해 밝혀졌다.2 이처럼 당시 순교의 역사는 선교와 복음 전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32년에는 평양에 토머스 선교사 순교기념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복음 전파와 선교 또한 디아코니아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성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선교사이다.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의 파송을 받아 1872년에 중국 산둥반도에 도착한 그는 같은 해 만주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74년에는 고려문에서 조선인 상인 이응찬을 만나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서상륜(1848-1926)의 도움으로 요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번역했다. 서상륜은 1882년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고, 최초의 매서인이 되었으며,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했다.3 이러한 성서번역과 복음 전파 그리고 교회 설립은 선교와 봉사적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구한말 조선에는 미국공사 신분으로 온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을 비롯하여 북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스크랜턴(W. B. Scranton, 1856-1922), 의사 헤론(John W. Heron, 1856-1890),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 1860-1938), 릴리어스 호턴(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 기퍼드(Daniel L. Gifford, 1861-1900), 게일(J. S. Gale, 1863-1937) 등 여러 선교사가 계속 내한하여 선교에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은 의료선교, 교육선교, 고아복지사업, 장애인복지사업, 문서선교, 성서번역 등에 참여했다.
또한 1885년 제중원을 선두로 서양식 병원이 시작되었는데, 몇 개월 뒤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은 ‘시’(施, 베풀다)병원을 설립했다. 선한사마리아인병원으로 이름을 지으려다 시병원으로 지었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디아코니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윌리엄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조선 여성이 남자병원 출입을 꺼리는 것을 보고 여성병원 설립을 고안했다. 그의 노력으로 여성 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58-1932)가 조선에 파송되었고, 이를 통해 1887년 ‘보구녀관’이라는 이름의 여성전문병원이 개원되었다.
이처럼 의료선교사들을 통한 서양식 의료교육제도의 설립과 운영은 구한말 조선의 의료 수준이 발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선교사들은 그 예방과 치료를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했다. 의료선교는 사회개혁적인 의미로 미신 및 무속적인 구습의 타파, 평등사상의 전파, 박애정신과 기독교적 이웃사랑 실천의 의미를 우리 사회에 강하게 전해주었다.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메리 스크랜턴의 이화학당, 언더우드의 고아학교와 경신학교, 애니 앨러스의 정신여학당 등은 교육선교4와 사회복지 사업5의 일환으로 디아코니아의 의미를 널리 전해주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선교사들을 통해 설립된 유치원, 고아원, 장애인 시설,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농아를 위한 시설과 점자개발 등은 사회복지와 디아코니아의 의미를 고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중원 원장으로, 이후에는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수고한 에비슨(O. R. Avison, 1860-1956)은 디아코니아의 의미를 드러내는 ‘기독교 사회봉사’(Christian social service)라는 용어를 1914년에 최초로 사용했다.6 그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가난한 민중들에게 무료로 의술을 베풀었다.7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디아코니아
1901년 새뮤얼 모펫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8 1907년 7명의 목사를 최초로 배출하면서 독노회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1912년에는 장로회총회가 설립되었다. 길선주(1869-1935) 목사는 도교에 심취하던 삶을 청산하고 그레이엄 리(Graham Lee, 이길함, 1861-1916)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후 1년 뒤인 1898년 판동교회 영수(領袖)로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고, 1901년에는 장로가 되었다. 1902년 조사(助事)가 되고서는 평양 장대현교회와 황해도의 여러 교회를 섬겼다.
그는 영적인 목회사역뿐만 아니라 나라사랑, 민족사랑 그리고 불타는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지역사회와 민족의 영역에까지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보이며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는 곳을 찾아가고 섬기는 전형적인 디아코니아적 목회자였다. 그가 어떻게 디아코니아 신학에 영향을 받았는지, 어떻게 가치관이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목회 전반에서 사회봉사적인 책임의식, 참여와 노력이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9
길선주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복음이 활동하는 집이자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도 해야 될 것이다.”10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목회를 했다. 그의 아들 길진경 목사가 쓴 부친에 관한 책에는 길선주의 디아코니아 사상과 실천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첫째는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한 것, 둘째는 판동교회에서 기독교 주간학교를 설립한 뒤 이후 첫 번째 사립학교인 예수학당(훗날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교로 발전)과 숭현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한 것, 셋째는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고 보호 개발을 통해 여성 인력을 개발한 것, 넷째는 안수집사 제도를 수용하고 서리집사 제도를 도입하여 교회의 사회봉사사역을 활성화한 것, 다섯째는 민족을 사랑하여 3·1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길선주의 말을 들어보자.
교회의 직능은 전도와 자선사업이다. 전도는 복음운동이요, 자선사업은 사회복지사업이다. 이 둘이 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사랑의 실천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세속화는 절대로 방어해야 하며, 사회의 복음화에 주력하는 것이 교회의 최고 임무이다. 교회는 예수의 친구인 창기와 세리와 죄인을 성신과 함께 가까이하는 성도들의 집단이므로 교회가 존재하는 그 지역사회에서 사랑의 집으로 공개되어야 한다.11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일 정도로 사회개혁과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길선주는 아쉽게도 훗날 사회봉사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근본주의 신학의 말세론에 심취하고 만다. 전천년설과 미국교회의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말세론을 신봉하며 부흥강사로 전국을 돌아다닌 것이다. 이로써 한국교회의 보수적 복음주의 내지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앙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반면 길선주의 디아코니아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실천과 수고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의 사상은 계승되지 못했다. 이는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실천신학과 목회론을 강의한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 선교사는 1932년에 『교회샤회사업』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하여 출판했는데 이 책은 평양장로회신학교 강의를 목적으로 쓴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1930년대 신학교에는 디아코니아 강의가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개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 이 책은 비록 보수적인 복음주의 가치관과 사상의 틀 안에 머물기는 하지만, 사회책임적이며 사회봉사적인 교회의 사명과 책임에 대하여 그 영역과 과제를 훌륭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1921년 선교보고서를 참고하면 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사회봉사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최근까지 상대적으로 작은 관심 사안이었다.13 한국교회가 현 시점의 성장에 이르렀을 때,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필요성과 책임감에 대한 시각을 한국교회가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교사들의 명백한 임무이다.14
또한 곽안련은 사회봉사에 관한 목회자들의 지도력을 강조했다. 목사가 사회봉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15 이뿐만 아니라 그는 이 책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도와주고 섬겨야 할 대상과 분야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중의 경제생활, 자선사업, 고아, 양로원의 노인, 난치병자, 한센병자, 장애인, 죄수, 매춘업 종사자, 금주와 금연에 대한 책임, 동물학대, 오락 등이다.16
일제강점기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봉사(디아코니아)적 의미는 애국애족과 민족사랑의 차원에서도 크게 나타나는데 3·1운동을 비롯하여 국채보상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감리교 역사학자인 송길섭은 3·1운동의 디아코니아적 의미를 신학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라는 강도를 만난 한국 민족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기독교적 사랑으로 구해내는 것이 한국교회 성도들의 디아코니아적 구제행위17라고 본 것이다.
1918년 에큐메니컬 연합회로 창립된 ‘한국교회연합공의회’(Korean Federal Council)는 1920년 제4차 총회에서 한국선교공의회의 제안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위하여 정신장애인 지체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시설, 고아원,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직업학교,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 장애인과 맹인을 위한 시설, 나약한 부녀자들을 위한 부녀보호소, 폐결핵환자들을 위한 요양소 같은 사회적 시설의 건립을 해야 한다.18
한국교회연합공의회는 1925년 사회부를 설치했고 1930년에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농촌부를 설치했다. 3·1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사회봉사적인 활동을 통하여 알코올중독, 아편중독, 축첩제도, 매춘과 같은 사회악을 근절하기 위한 사업을 펼쳤으며, 기독여성절제운동도 전개해 나갔다. 장로교총회는 1928년부터 절제회를 조직하여 알코올금지운동을 펼쳤다. 한국교회의 농촌계몽운동은 192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28년 농촌부를 설치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농촌운동을 지원했다. 농촌운동을 통해 선진국의 개량된 농사기법과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다양한 세미나 및 훈련 프로그램이 도입되어 실제로 많은 농가가 소득 증대의 효과를 맛보았다. 당시 개량된 벼농사, 양계 등 가축 기르기, 과수원, 양잠, 통조림 등의 장기적 저장식품뿐만 아니라 문맹퇴치(문해)운동, 건강계몽운동, 농업협동조합운동 등도 새롭게 도입되고 시도되었다.19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적·문화적 억압과 수탈에 신음하고 있었다. 전 국민의 85%가 농촌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절반 이상이 가난한 소작농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무거운 부채에 시달렸다. 전체 교회의 73%가 농촌에 있었기에 교회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8년 예루살렘 콘퍼런스에 참석한 한국교회연합공의회 의장 양주삼은 “한국기독교회의 상황”이라는 글에서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필요에 대하여 더 이상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라며, “사랑의 섬김의 정신이 없는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20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복음주의 차원에서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에 초점을 맞춰 교회 설립과 부흥운동에만 더욱 힘썼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선교사들의 정치적 중립정책과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영향이 있다고 본다.21
해방 후 한국 개신교회의 디아코니아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 각각 정부를 수립했다. 당시는 남북 사이뿐만 아니라 남한 안에서도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극심했다.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개혁사상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으나, 과연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나라와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식을 제대로 갖췄는지는 의문이 든다. 그들이 큰 이념적 혼란과 갈등을 겪는 사이에 북한이 남침했고,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엄청난 인명 피해와 이산가족 그리고 피난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피난민의 생존과 이들을 위한 생계구호가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월남한 목회자 중 대표 격인 한경직은 미군정의 도움으로 영락교회(구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여 피난민 구호, 이산가족 상봉 등 사회봉사의 중심 역할을 했다. 더불어 전쟁고아와 과부를 돕는 모자원과 고아원(보린원), 노인을 위한 경로원을 설립 운영했고, 특별히 친분을 유지해온 미국인 밥 피어스(Robert Williard Pierce, 1914-78)의 도움으로 한국선명회를 설립하여 고아들을 돕는 사업을 전개했다. 이것이 이어져 오늘날 월드비전코리아(World Vision Korea)가 되었다.
한경직은 1947년 대광중·고등학교를 세웠고, 이후 서울, 대구, 부산, 제주에 피난민을 위한 영락교회도 설립했다. 또한 1969년 영락여자신학원을 세워 여성 목회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학교를 세우는 일뿐 아니라 무너진 학교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는데, 1950년에는 보성여중·고등학교를, 1954년에는 숭실대학교를 재건하는 등 다양한 사역을 통해 사회봉사적 섬김을 모범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한경직은 영락교회 4대 신앙노선을 만들어 강조하기도 했다.
1.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
2. 경건한 청교도적 생활 훈련
3.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교회 상호 간의 협력과 연합사업
4. 사회를 향한 교회의 양심 구현
이처럼 한경직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신학, 경건주의 그리고 사회정의와 사회참여적 신앙’을 신학적 기준으로 삼아 목회를 했다. 이러한 그의 신학정체성과 지도력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신학논쟁 당시 확립된 것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교단의 신학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22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회는 산업사회로 진입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이농 현상과 도시화 현상23이 나타났고,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문제가 발생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의 노동착취 현상이 불거진 것이다. 자본가를 옹호하고 수출을 지향하는 경제정책으로 경제는 성장해갔지만, 노동자들의 권익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디아코니아였다. 이것은 도시산업선교24와 도시빈민선교25의 형태로 나타났고, 이 사역에 참여한 민중목회자들은 그야말로 디아코니아의 삶을 실천한 선각자들이었다.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 등에 영향을 받은 이도 있었고, 섬김의 본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 목회자도 있었다. 이들은 순수한 영성을 밑거름으로 실천한 참된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민중목회를 해온 목회자들은 오늘날에도 그 정신을 이어서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을 섬기는 목회, 북한이탈주민인 새터민을 위한 목회,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등을 통해 지역사회를 섬기는 목회, 장애인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섬기는 목회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고 있다.
21세기 한국 개신교회의 디아코니아
2000년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수가 전 국민의 7%에 이르는 고령화사회로 진입했다. 2018년에는 그 비율이 14.8%로 급증하여 고령사회가 되었으며, 현재 초고령사회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하여 노인복지가 매우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여 세계적인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으나 양극화의 문제는 여전하고, 노후대책이 준비되지 않아 노인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노인 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의 시행과 국민건강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 대한 복지 혜택 등의 복지제도가 세워지며 발전하고 있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다양한 도움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개교회에서는 독거노인 섬김 프로그램이나 지역사회의 빈곤가정을 섬기는 일 등 여러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IMF)로 수많은 노숙인들이 생겨났을 때 시작된 ‘밥퍼’ 프로그램과 쉼터 운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정부 또는 지자체로부터 사회복지시설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교회도 증가하고 있고, 자체적으로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대형교회도 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선교 사상이나 기독교 사회봉사(디아코니아)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의미가 결여된 채 개교회주의적 양적 성장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봉사와 사회복지를 수단으로 삼는 목회자들과 교회가 각성해야 할 지점이다. 이처럼 에큐메니컬 연합봉사는 여전히 쉽지 않다. 디아코니아는 교단 차원의 교육훈련 과정,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씁쓸한 현실이다.
나가는 말
한국 개신교회의 기독교 사회봉사 발전의 최대 걸림돌은 여전히 보수적 복음주의(근본주의) 가치관이다. 그렇기에 신학적 반성과 회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학교육 과정에 교과 개설과 교육훈련이 필히 동반되어야 한다. 개교회주의적 전통과 경향에서 에큐메니컬 연합봉사의 지혜와 참여가 우선되는 과감한 시도와 노력이 요청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단총회의 사회봉사 담당 부서와 정책 부서에 전문가들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총회의 정책적 연구, 정치적 결단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점이다.
오늘날 ‘디아코니아’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선교와 봉사, 즉 ‘마을목회’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디아코니아’라는 용어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적용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마을목회’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역사회와 주민 전체를 목회의 대상으로 삼고 기도하며 봉사적 섬김을 꾸준히 행하여 좋은 평판과 신뢰를 회복하고 있는 교회들의 사례가 많다.26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봉사(디아코니아)를 통해 ‘생명목회’를 실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양들이 생명을 얻어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오늘날 생명목회가 강조되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생명목회의 내용을 현장에서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사례를 소개해야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여러 교단 총회와 한국교회가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한다.
주(註)
1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Missionar Gützlaffs dreijähriger Aufenthalt in Siam und seine erste, zweite und dritte Reise nach China,” in Magazin für die neueste Geschichte der evangelischen Missions- und Bibelgesellschaft (Basel: Missions Institutes zu Basel, 1835), 251-273.
2 S. A. Moffett, “Early Day in Pyo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21, no. 3 (1925): 54. 1893년 10월 새뮤얼 모펫은 세례 교육반을 직접 조직하여 세례교육을 시행했는데, 22명의 사람이 참석했다. 그중에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매서인 토머스로부터 중국어 성경책을 받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외에도 한 사람은 황해도 신천에서, 다른 한 사람은 황해도 안악에서 온 사람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매우 호감이 넘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매일 소책자를 교육했고, 설교 말씀을 전했다. 이처럼 도시와 시골에서 매일 밤 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열렸고 세례교육이 이루어졌다.
3 이만열, “로스본의 번역출판 권서사업,” 두란노서원 편, 「빛과 소금」 통권 29호 (1987년 8월): 195-203.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단행본을 참고하라. Seung-Youl Lee, Die Geschichte der Diakonie in den protestantischen Kirchen Koreas und Perspektiven fur die Erneuerung ihrer diakonischen Arbeit (Peter Lang, 1999), 43-45.
4 1926년 장로교단은 1,188명의 교사, 3만 7,767명의 남녀학생(2만 4,170명 남학생, 1만 3,597명 여학생)이 다니는 766개 학교를 운영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한국인이었다. James Earnest Fisher,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 Teachers’ College Columbia University Contributions to Education (New York: Teachers College, Columbia University, 1928), 2.
5 1886년 언더우드(Underwood)의 고아원 설립, 1892년 랜디스(Landis)의 고아원 설립, 로제타 홀(Rosetta Hall)의 맹인·농아인 교육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 그리고 1911년 해주에서, 1915년 연못골에서 유치원이 설립된 것은 한국 사회복지의 효시로서 의미를 지닌다.
6 O. R. Avison, “Social Sevice and the Hospital,” The Korea Mission Field 10, no. 7 (1914): 203-206.
7 O. R. Avison, “The Value of Social Contact in Mission Work,” The Korea Mission Field 15, no. 7 (1919): 137; Seung-Youl Lee, 앞의 책, 89-90.
8 첫 입학생은 방기창과 김종섭 두 사람이었고, 교수는 새뮤얼 모펫과 그의 매코믹신학교 동창생인 그레이엄 리 두 사람이었다. 추후 학교 발전 과정에 대한 서술은 김인수, 『레널즈(W. D. Reynolds)가 한국장로교 선교상황의 발전과 변화에 끼친 영향 연구』,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엮음(한들출판사, 2012), 186-188를 참고하라.
9 길진경, 『영계 길선주』(종로서적, 1980), 214-230.
10 위의 책, 215.
11 위의 책, 158.
12 “곽안련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목회학과 설교학을 가르친 교수로서 늘 새롭게 연구하면서 강의를 개설했다. 어린이교육, 청년사역, 사회봉사, 개인봉사, 기독교심리학, 어린이심리학, 주일학교조직, 예배규칙서 등 한국의 목회 상황에 맞게 강의를 개발하고 강의 내용을 집필하는 데 많은 노력과 정열을 쏟았다.” 2013년 7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행사에서 발제한 필자의 논문 “작은 이들을 섬기는 화해의 디아코니아-사회봉사신학과 사회선교신학의 이해”를 참고하라.
13 C. A. Clark, “Home Letters,” 15 November 1921; 이호우, 『초기 내한 선교사 곽안련의 신학과 사상』(생명의말씀사, 2010), 192.
14 C. A. Clark, “Social Welfare Achievments and Forward Plans,” The Korea Mission Field 35 (March 1939): 57; 이호우, 위의 책.
15 이호우, 위의 책, 192-193.
16 곽안련, 『교회샤회사업』(조선예수교서회, 1932); 한국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 편, 『곽안련 선교사의 교회샤회사업에 관한 현대적 해석』(한들출판사, 2012), 14-166. 이 책은 곽안련의 『교회샤회사업』을 현대어로 번역한 것으로, 사회복지학과 교수들과 필자가 각각 집필한 네 개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대한기독교서회는 당시 언어로 된 책을 원본 그대로 재출판하기도 했다.
17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 1994), 255.
18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90), 379.
19 전택부, 『한국기독교 청년회운동사』(정음사, 1978), 331; 대한YMCA연맹 엮음, 『한국 YMCA 운동사: 1895-1985』(로출판, 1986), 58; 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228-229; Gorden W. Avison, “Beginning of Y.M.C.A Rural Work,” The Korea Mission Field 24, no. 9 (1928): 197.
20 J. S. Ryang, “The Condition of the Christian Church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24, no. 9 (1928): 190.
21 이승열, “곽안련 선교사의 『교회샤회사업』의 디아코니아 신학적 의미,” 한국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 편, 앞의 책, 261-283. 1905년 7월 27일 미일 간에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이 이루어진 후부터 한국교회와 한국 목회자들에 대한 역사의식과 사회봉사적인 사회책임을 감당하는 교육훈련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선교정책은 한국교회에 사회봉사 정신과 사상을 긍정적으로 물려주거나 교육훈련을 시키기보다는 교단 중심의 교회, 영성주의에 치우친 교회로 훈련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네비우스 선교정책 중에 10개 항목에 걸친 구체적인 한국인 목회자 양성 지침에는 수준 높은 지도자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 중심 그리고 평신도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교육, 즉 낮은 수준의 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미국 유학의 기회도 주지 말아야 한다며, 성령의 사람으로서 영적 성숙에만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
22 Seung-Youl Lee, 앞의 책, 168-202.
23 1967년에 376만 명(전 국민의 12.8%)이 지방에서 대도시로 이주했다. 박천복, “공장근로자에 대한 견해의 과제,” 「기독교사상」 통권 124호 (1968년 9월): 52.
24 한국교회 최초의 산업선교는 산업전도라는 이름으로 1957년 영락교회의 목회자 파송으로 영등포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10년 후에는 본격적으로 산업선교 차원으로 전환되어 도시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돕는 사역이 억압과 핍박 가운데 이루어졌다.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성문밖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25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이끈 박형규 목사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사업으로 설립한 연세대학교의 도시문제연구소를 통하여 빈민선교에 눈을 뜨고 훈련을 받은 소수의 뜻 있고 의식이 있는 목회자들은 빈민촌에 들어가서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았다. 이처럼 민중을 섬기며 목회를 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바람직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빈민운동가인 알린스키(Saul David Alinsky, 1909-72)의 공동체 조직이론과 방법론이 한국의 민중선교와 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6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의 경우 총회교육연구원이 마을목회라는 주제로 『마을목회 매뉴얼』을 비롯한 20여 권 이상의 책을 출판하여 일반 목회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이승열|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디아코니아학으로 박사학위(Dr.Theol.)를 취득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부산장신대, 숭실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고, 대치동교회 위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장, 한국교회디아코니아아카데미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