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과 장흥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장흥은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장군생전에 장흥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하였을까? 장흥을 고향으로둔 우리로서는 궁금히 여기지 않을수 없어 충무공탄신 466주년을 맞아 나름대로 몇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보고자합니다.
1.지리적 군사적 측면에서의 이순신장군과 장흥
(1)이순신장군은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본영은 우수영(해남우수영)과 좌수영(여수)에서 위치하여 지휘하였다고 할수 있으나 그휘하 만호벼슬이 오늘날의 해역사령관격이 회령진(회진)에 있어 인연이 깊다고 할수있다. 당시의 회령진은 서로는 고금도 동으로는 녹도(녹동)만호와 협력하여 남해안의 방어진지로서의 특성을 가진 장흥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2)회령진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보급하고 선박(거북선,판옥선)을 만들어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그목재등은 천관산 수동뒷산에 울창했던 소나무가 주재료였다고 한다. 따라서 훈련의 독려나 순시나 연합훈련등을 통하여 이순신장군이 회령진에 자주 들렸을것으로 보여진다.
(3)이순신장군이 3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참수형을 받았으나 원균의 패전과 전사로 감형되어 백의종군 할때에 한양에서 문초로 지친몸을 이끌고 도보로 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도착 백의종군 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매우 의미있는 인연이다.
(4)왜 장흥에서 백의종군 하였는가? 는 두가지 측면에서 이유가 있는것 같다. 하나는 전선을 피하여 빨리 전장에 도착하기 위하여 쉬지않고 걸어서 장흥까지 왔을것이다. 또 하나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원균휘하에서 싸우는척하면서 판옥선 12척을 거느리고 도주하여 장흥의 회진 덕도라는 곳에 숨겨놓아 이 판옥선을 인수하기 위하여 이곳을 선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도원수 권률장군의 즉결처분에 의하여 참수되었다고 한다.
(5)판옥선 12척이 중심이 되어 장비와 군수물자를 장흥을 통하여 조달받고 마지막 전장에서 승리할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고 할수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판옥선이 있습니다." 라고 왕께 올린 장계에서도 알수 있드시 이순신 장군에게는 이 판옥선 열두척이야 말로 마지막 해전을 승리로 이끌수 있는 중요하고 필요한 병기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배설이 왜 하필이면 장흥에 감춰두었을까? 이순신 장군에게는 정말 다행인것이었다. 장흥과 이순신장군의 인연을 확고히 해주는 사건인 것이다.
2.인적 측면에서의 이순신장군과 장흥
(1)이순신장군은 임난중에 장흥에서 고경명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거병하는등 장흥의 인물들이 의인 충신들이 많다는데에 굉장한 호감을 갖았던것 같다.
(2)특히 반곡 정경달 장군과의 인연이다. 이순신장군과는 정말 아끼고 존경하는 장수였다고 한다. 반곡 정경달장군은 장동반산에서 출생하였으며 고경명,백광훈등과 사귀면서 성장하여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난 당시에는 경상도 선산부사로 있다가 왜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육전에서의 난중일기가 있다고 한다. 반곡 정경달장군은 무인이 아니라 문인이다. 이순신장군보다는 더 연상이었으며 드라마 난중일기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휘하장수로 전라도사투리와 코믹한 인물로 묘사하였으나 실제로 논리와 언변을 갖춘 인물로 이순신이 사형을 받게되자 선조왕을 직접만나 이순신장군을 살려야 한다고 적극변론하였다고 하며 나중에는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이순신 장군의 중요 참모 역할까지 하였다고 전해지며 그 인연으로 장동의 반계사에 정경달,이순신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고 한다. 훗날 강진에 유배온 정약용은 정경달에 대하여 대단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제자들에게 정경달의 저서를 필독서로 추천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다.
(3)이 외에도 많은 장흥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포진하여 전쟁을 치루었으리라 미루어 생각할수 있다. 바다라는 특수성과 배를 잘부려야하고 기질적으로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이순신장군,정경달장군의 인품에 흡인되어 스스로 휘하에 들어가 처자식과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함께했으리라 미루어 생각할수 있다.
3.맺으면서
장흥과 이순신장군의 연관성에 대하여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차제에 이와같은 측면에서 예양강,뚜르아르등 우리포럼의 회원님들의 관심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며 자료와 관심을 기대해봅니다.
첫댓글 ㅡ잘 읽었습니다. <이순신과 장흥> 하면 저도 부전공입니다요 ^^ ^^
ㅡ자응사람들만 아직껐 이순신 장군님을 잘 못 팔아먹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ㅡ이순신 장군은 <경상도 초계>에서 14박15일 백의 종군길(정확히는 삼도수군 재건의 길)을 시작하여 장흥 회령포에서 드디어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습니다.
ㅡ보성에서 장흥 회천,안양쪽을 거쳐 회령포로 들어옴에 있어 <군영구미,백사정>이 과연 어디인지도 부수적 쟁점입니다.
ㅡ우리 안양의 <초계변씨 12형제들>이 참전,순사하였는데, 이순신 장군의 할머니,어머니가 <초계변씨>여서 더 열심히 싸웠다군요. ㅡ 고향의 일, 잘 읽었습니다.
-예양강님의 설명에 귀가 번쩍 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지리에 굉장히 밝았다고 합니다. 발포(오늘날의 고흥포두)만호로 있으면서 동헌의 오동나무를 거문고를 만들기 위하여 베려하는 전라좌수사 이용에게 관청의 동헌에 있는 나무는 국가의 것이므로 함부로 벨수 없다고 못베게 하여 이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내용은 주지의 사실, 그런데 당시 좌수영과 우수영의 경계가 회령진 부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이작전회의를 하면 광양현감 방답첨사 보성현감 순천부사 발포만호 녹도만호까지는 점호를 하는데 회진만호는 잘 보이지 않아 그런 생각도 듭니다.
ㅡ 회령포 경우는 그 지적대로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경계에 위치하여 그 관할이 몇번 오갔습니다.
실록에는 <좌수영에 속한 회령포 등을 우수영으로 다시 넘겨달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ㅡ장흥 회령포의 설치 및 이전 내역에 관하여 깔금하게 정리한 글은 아직 없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