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면 시조묘소 시향 참배 후기>
카페 대종회 헌납건에 대한 문서를 전달하려고 대종회 방문시 시조묘소 시향 전날밤 기계재실 화수헌 회의에 카페 소개가 예정됨에 따라 마음이 바빠집니다.
내용 및 인쇄물준비에 대의원회장님과 카페회원들이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야 했습니다. 다행히 카페회원들의 도움으로 11월7일(일)에 카페 소개 인쇄물(160부)이 완료되었습니다.
11월10일(수)부터 귀중한 3일간 연차휴가를 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 5시에 집을 나섭니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에선 비가 그치질 않습니다.
포천 회장님댁은 초행길이라 전화로 10여 통화 끝에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냉정리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고 밤길이여서 길을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회장님과 일가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과 내일 오전까지 비가 오지만 시조묘소 시향일(11월12일)에는 예보상에 비가 오지 않는다니 다행입니다. 지난 여름의 경안공묘소 방문시 비가 오다가 우리가 참배할 때쯤 비가 그쳐 참배를 무사히 하였는데 그때 말씀하셨던 동재부회장의 “여재”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포천회장님댁은 강원도 철원과도 경계지역이고 고석정 및 월정리 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포천에 도착하니 재성(홍보위원)씨는 벌써 도착해 있었고 포천 아주머니(회장님 어머님)가
김장김치와 갓김치에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셨는데 밥 한그릇을 뚝딱해치웠습니다. 시골고향집에 온 것처럼 회장님댁 식구들이 얼마나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지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밤늦은 시간까지 회장님과 재성씨와 환담을 하고 회장님이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하셨으나 재성씨와 밤늦도록 예기를 하다가 새벽 2시경이 겨우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1월11일(목) 우리 일행은 6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회장님댁 식구들의 환송을 받으며 회장님댁을 나와 도중에 철원에 사시는 유병수조카님(대종회운영위원)를 태우고 관광버스 출발예정지인 포천 만세교에 도착했습니다. 포천 일가분들이 한, 두명씩 모이고 8시경에 출발하여 도착 목적지인 포항 기계면으로 향합니다.
1박2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할 사람들은 포천지역종친회장 겸 대의원회장님(유섭)과 포천지역종친회 총무님(유덕근)을 포함, 포천 일가분 20명으로 얼마나 따뜻하게 대하여 주시던지 일가(一家)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버스는 중앙고속도로에 접어들었고 이 무렵 포천총무님이 한분씩 일가분들을 소개해 주셨고 회장님은 “기계유씨네” 카페소개와 우리 일행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포천일가분들의 대단한 환영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회장님은 오늘의 일정(부운교육관준공식)과 내일의 일정(시조묘소 시향 및 대구 상덕사 고유제)을 소개하였고 기계유씨 문중의 뜨거운 감자인 “신사육신”문제에 대응하여 충목공
(휘 응부)의 후손인 월성군파(포천지역의 대다수 차지)의 적극적인 협력과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정오 12시경에는 충주호 인근 태조왕건 셋트장과 수경분수(152-160m)가 장관을 구경할 수 있었고 제천시 청풍명월 문화재단지(충주호 수몰지역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복원)는 비가 와서 아쉽게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근처에서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하였다.
버스는 충주의 명물 단양8경, 전통문화의 고장 안동, 임하 땜, 청송을 지나 포항으로 접어들었다.
오후 4시경에 기계유씨 시조 유허비가 있는 포항 기계면에 도착하여 유허비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뒤에서 오는 승용차에서 “회장님”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굴까 뒤를 돌아보니 병국 감사님과 영재군(감사님 아드님), 성순누님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우리는 사진과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다.(실물이 훨씬 낫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한건가. “기계유씨 시조 유허비”는 후손 유한모 공이(조선 정조때) 기계에 살던 고로(故老)들에게 물어 시조가 살던 터와 우물(井)터에 비각을 세웠다고 합니다.
------------------------------------------------------------
<“기계유씨 시조 유허비” - 부운보 제3호 ‘85.10.10 >
후손 한모(漢謨)가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고로(故老)들에게 물어 시조 사시던 터와 우물(井)을 기계면에서 찾아 단비를 세우고, 신라 아찬 유공(兪公) 유허비(遺墟碑)라 표하면서, 그 비 세운 전말을 부운재에 두었다. 그 글을 을병기사라 한다.
을묘중추(정조 19년) 불초가 이 지방 부윤이 되었는데 마침 10일 상순은 곧 기계 답계리(현 미현동) 시조산소에 해마다 지내는 시향의 날이라 하루전에 약간의 제수를 갖추어 산하에 나가 부운암에서 자게 되었다 족제(族弟) 한인(漢人)이 자인 수령으로 왔으며 근읍에 사는 유성(兪姓) 가진 일가가 상하 모신분이 38명이나 되었다. 족질(族姪) 영주(永柱)가 연전 산하로 들어와 일을 살며 접대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산소에 올라와 봉심하고 행사한 후 재실에 들어와 여러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며 음복한 다음 다시 도동(현 계전동)으로 가서 선조묘소에 전작 참배하였다.
이 산소는 곧 족(族) 대부(大父) 주기(胄基)가 좌병사로 와서 찾은바 마을 사람들이 표석 각자를 깍아 버려 어느 분의 산소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유씨 선산이라고만 전해지고 있으니 혹은 고려 공진사 진경묘라고 말한다.
날이 저물어 창사에 와 자게 되었다. 이 창은 기계고현으로 답계(현 미현동)와의 거리는 10리쯤 되는데 읍내 한 들판이 예로부터 신라때 유씨 세거지라고 하며 또 유씨 우물이 있다 한다. 읍내 이씨가 10여대 이 땅에서 대대로 사는 바 그 선조의 저술 가운데 또한 유씨 우물이 있다는 고치지 못할 문자가 있는 것을 보면 전설이 진실로 불상(不爽)하나 우물은 이미 인폐하였으니 듣기에 새롭고 그리울 뿐이다. 다시 고로(故老)에게 캐물으니 한 농부가 있어 말하기를 왕년에 우연히 경작하던 밭에서 옛날 우물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봄이 되어 밭을 갈려하니 큰 돌이 튀어나와 그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물이 출렁거렸다. 물맛은 달고 상쾌하였다.
이럴 즈음 홀연히 개인하늘에 비가 쏟아져 모여 구경하던 사람들이 미쳐 피신할 겨를도 없었다 한다. 이런 일이 우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우물 옆에 단비
(短碑)를 세워 유허비(遺墟碑)를 표하였다. 끝에 아우 한돈(漢敦)이 마침 서울에서 내려 왔기에 글씨를 쓰게 하고 각자(刻字)가 끝나 4월 1일 묘시에 입석(立石)하니 아우와 자인원이 함께 와서 밭주인 이생과 경계를 정하여 사기로 계약하고 창해로 돌아와 동족(同族)들이며 이웃 노소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놀았다. - “이에 비(碑) 세운 내력을 기록해 둔다. 후손 한모(漢謨)”
--------------------------------------------------------------------------
우리 일행은 카페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부운재가 있는 미현리로 향하였다. 부운재를 부운보에 나와 있는 글로 소개를 하면,
------------------------------------------------------------------------
<“부운재기(富雲齋記)”- 부운보 제1호 '83,6.15>
우리 선조 삼재(三宰) 공(公)은 경주부(현 포항) 기계현 분으로 신라말에 벼슬이 아찬(阿찬)에 이르시니 우리 기계유씨의 보첩이 이로부터 시작 되었으되 휘(諱)가 전하지 않고, 산소 또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찾지 못하였던바, 숙종 사년에 후손 하겸이 경주 부윤이 되어 참혈을 기계 답계리에서 찾아 봉축을 더하고 단표를 세우니 지금 미현동 임좌원이 여기라. 세상에서 이르기를 영남 이름난 산소중의 하나라 일컫더라.
숙종 경인년에 장헌공 명홍이 경상감사가 되어 묘사 십육간을 세워 부운암(浮雲菴)이라 액을 하고 승도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또 제전을 두어 시제사를 받들게 하되 가까이 사는 후손된 자로 그 일을 맡게 하고, 영조 병오년 문익 유척기 순찰사가 되어 산소에 비(碑)를 세우고 그 뒤 기묘년에 또 지석을 묻고, 먼저 사년전에는 주기 병사가 되어 묘사를 이십오 간으로 증축하고 정조 을묘년에는 효정공 한모 경주 부윤이 되어 인근 고로에 물어 공이 사시던 옛터와 우물을 찾아 단표를 새겨 세우고 집을 지어 수호하고 그 이듬해 병진에는 또 허물어지는 묘사를 수리하고 순조 신사년에는 산하 가까이 사는 자손들이 힘써 돈을 모으고 승도가 도와 크게 수리하니 공환, 동환의 공로가 컷더라. 이러한 내용들이 기록된 것은 다 벽에 걸려 있노라. 순종 경술 후 삼년 계축에 도유사 길준이 우리 아버지와 종약을 바르게 고쳐 후세 법이 되게 하였고, 7년후 경신년에 경문장 치형이 진철, 성준과 더불어 각파의 자손들로부터 돈을 걷어 정사 십이간을 다시 세우고 랑무 십팔간을 수리하매 석환, 치화가 감독하여 이루고, 이때에 부운암(浮雲庵)을 부운재(富雲齋)로 고쳤더라. 이십이년 뒤인 신사년에 불초 치웅이 억겸과 두 번 산소를 두루 살피고 묘사가 퇴락함을 근심하여 재유사 영준, 형식에게 수리할 것을 부탁하여 임오년 봄에 시작하여 정사와 랑무를 수리하고 재직실과 일랑 육간을 증축하고 또 유허비각을 수리하여 갑신년 겨울에 이르러 준공하고 산화입은 피해목을 매각하여 그 비용를 지급하였더라. 이상이 수백년 동안에 있었던 산소 연혁의 개항이라.
회고 하건데, 우리 선조는 이미 천여년을 넘어 지난 어른이시니 사적을 잃고, 보첩이 없어 사행이 소상하지 못하나, 자성음휴가 오래 미성하여 울연히 명덕거족이 되고 또 긔게 사람이 산소를 일러 유삼재묘라 하고, 유허의 우물을 유정(兪井)이라 하고 또 지나던 다리를 유교(兪橋)라 전하여 오는 말들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후손이 영역을 봉축하고 사시던 곳을 표식하여 추모하는 생각을 펴게 되니, 향방에 음덕을 베풀고 자손에게 혜택을 머물게 안하였으면 능히 이러하리오.
무릇 후손된 자는 마땅히 조상의 덕닦으심을 생각하여 제몸을 욕되게 함이 없을진대 오직 이 묘사는 곧 덕을 닦고 일가를 모아 돈독케하자는 곳이니, 또한 중하지 아니하리오, 이에 예전 어른들이 처음 이룩하시느라 고생하신 내력 사실을 적어 앞으로 오는 이에게 전하려고 하노니 이를 계속하여 오래 닦아 폐하지 말기를 기원하노라.
대한민국 삼십년 무자 가을 후손 치웅 근기
재사 전체를 중수한지 불과 십오년에 또다시 퇴락하여 기해년 봄에 경문장(京門長) 치웅이 발의하여 각파에 수전하여 큰 수리를 하고 정문 삼간을 또한 증축하니 경유사 동근과 재유사 영준 등이 이 일을 주관하여 칠개월이 지나 준공하니 이 실로 자손된 이는 더없이 다행이로다. 부운재 정사가 본래 기초가 부실하여 퇴락하여 감을 걱정하던 나머지 경문장 주선으로 일본 경도에 사는 봉식이 일금 오천이백만원을 봉납함으로써, 명지건설사장 영구에게 공사를 위촉하여 화수헌만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철근 시멘트를 써서 구식 목조형 그 모습으로 건축하기로 하고 무오년(1978년) 8월 16일 시공하여 동년 12월말에 준역하니 익랑 기타 건물도 동시 수리도장하다. 중문소액일기문은 경문장 글씨라, 부운재 부속건물 중 재직실, 창고, 대문이 몹시 헐어 경문장이 발의 재유사에게 위촉하여 경향 각파 문중으로부터 찬조를 받아 재직실, 대문은 수리하고, 창고는 개축 한바 임술년 4월 입찰 착공한 것이 한해로 인하여 추석전 겨우 준공하니 공사비로 일금 칠백육십이만원을 지불하니 유허비각 담장까지 하게 되어 일금 삼십삼만육천육백원을 지불하다.(치웅)
--------------------------------------------------------------------------
부운재에 도착하니 17시경인데 150여명의 종인들이 참석하여 부운재 옆 부운교육관 준공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건물은 2층 현대식 건물로 깔끔하게 잘 지어졌으며 기념컷팅으로 준공식이 마무리 되었고 기념품 증정도 있었다.
18시경에 교육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카페회원들(회장님, 홍보위원, 감사님, 성순누님, 영재군)은 미리 기계재실 화수헌에서 자리를 잡고 카페소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20시경에 화수헌으로 전국 일가 150여명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회의 진행은 부운재 유사님(유원식, 1971년부터 유사재직)이 맡았으며 회의진행순서는 개회사, 구당선생 종중규약 낭독, 회장님 인사말씀, 부운재결산보고, 시조시향 집사분정, 토론, 폐회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카페소개시간은 토론시간 이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준비한 카페 소개물을 부운재결산보고서와 비학보(대구경북종친회보), 단성보(단성공파화수회보)와 함께 나누어 주었다.
회의는 진지하게 진행되었고 잠시후에 역사적인 카페 소개시간이 있었다. 10분여에 걸친 유섭회장님의 연설이 끝나고 카페임원소개(대의원 부회장 유동재, 감사 유병국, 운영위원장 유보근, 총무위원 유선목, 홍보위원 유재성, 대의원 유성순)가 이어졌고 대종회회장님(유동준)의 부연설명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전국 일가분들은 답례를 해주셨다.
회의가 끝나고 카페임원들과 대종회 운영위원분(대종회회장님, 사무처장님, 부산지역종친회장님, 부운보편찬위원장님 등)들과 카페에 대하여 잠시 환담을 나누었는데 카페의 종중자료에 대한 검증에 대하여 대종회 운영위원분들의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격려의 말씀이 더 많았다. 특히 부운보편찬위원장님(유병하)의 부운보 한글화일 제공에 대하여 확답을 얻어 좋은 성과라고 생각된다.
이후 카페회원들은 막걸리 파티로 이어져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하지만 성순누님은 인사도 드릴사이도 없이 벌써 울산으로 출발하고 안계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 뵈어서 너무 반가웠고 기계여성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누님같은 분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열띤 대화와 토론을 하였고 부운재의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저는 잠시 짬을 내어 전국부제학공파화수회 前 총무님(유병림씨, 카페회원)의 소개로 전남 지역(고흥, 함평 등) 일가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는데 환대하게 맞아 주시었고 카페에 대한 관심과 격려가 대단했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숙소(화수헌)로 돌아오니 약주가 과한 일가분들의 열띤 토론(?)에 적응하지 못하여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화수헌 대청마루에서 카페 회원분들과 그동안 못다 한 대화를 하다가
새벽 2시경에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익숙치 않은 베게(목침)와 일가분들 코고는 소리에 부운재 새벽은 오고 말았다.
11월12일(금) 7시경에 기상하여 눈을 뜨니 오늘은 나로서는 최초의 시조묘소 시향이며 가슴이 설레이는 부운재의 아침이다. 고양이 세면(?)을 하고 교육관에서 아침식사를 하니 8시경인데 유섭회장님, 재성씨, 병국감사님과 영재군은 시조묘소에 벌써 가고 총무위원과 부회장님과 나뿐이다. 부회장님(유동재)과 총무위원(유선목)과 시향에 사용할 약주를 들고 시조묘소까지 올라가는데 경사는 좀 졌지만 보통걸음으로 20여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부회장님의 시조묘소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수십년전에 산소에 산불이 크게 나서 큰 노송을 모두 태웠고 불에 탄 목재를 팔아 부운재를 중수했다는 예기와 신씨 시조묘소, 파평윤씨 시조(윤신달장군) 묘소, 기계유씨 시조묘소를 모두 참배하여 보았는데 가장 웅장하고 위치가 좋은 곳은 우리 시조묘소로 과연 명당이라고 하셨다.
산소에서 바라본 전경은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산 밑 계곡물(저수지)과 기계, 안강 및 경주평야로 이어졌으며 멀리 치술령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비학산의 명당임이 틀림없었다. 시조 묘소 봉분의 크기가 높이 4미터, 직경 10미터 정도 되는 묘소가 상하쌍분으로 모셔져 있어 왕릉에 비하여 손색이 없었으며 지수재 휘 척기 할아버님의 전자로 된 비석은 오래된 느낌을 받았으나 상석, 망주석과 석등은 배치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리석의 자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여러 각도에서 사진 셔터를 눌러 보았다. 카페회원분들과 기념촬영도 빼놓지 않았다.
<“시조(始祖) 아찬공 묘비문” - 부운보 제2호 ‘84.10.20>
경주(현 포항) 기계현 북쪽 10여리 되는 당동(현 포항시 기계면 현내동)은 비학산으로 주봉이 되고 치술령으로 안(案)이 된 임좌 병향의 언덕은 우리 시조 신라 아찬 유삼재 부군이 묻히신 곳이다. 신라 관제에 아찬은 정승자리이니 지금의 의정(議政)과 같다. 이래서 뒷사람이 삼재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삼재가 부군의 휘(諱)요 직명이 아니라 한다. 그후 의신이라는 분이 있어 신라가 망하게 되매 전조 세신으로 고려조에 불복함에 끄릴새 고려 태조가 미워하여 기계호장을 삼으니 그 자손이 기계인이 되었다.
부군의 분영(墳塋)은 실전(失傳)되어 본토박이 사람의 점령한 바 되었더니 숙종기사 후손 하겸이 이곳 부윤이 되어 비로소 산소를 찾아 봉분을 다시 쌓올리고 표석을 세웠고 경인년 후손 명홍이 감사로 와 분암을 처음 마련하고 중으로 하여금 지키며 금양하도록 하고 제전위토를 두어 한해 한번 제향을 받들게 하되 그 후손의 가까이 사는이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석물은 아직 겨를를 못하였더니 금상병오(금상 즉 영조병년)년에 후손 척기가 감사로 재임하여 묘비를 비로소 새겨 산소좌측에 세웠다.
의신 후에 성미라는 분이 있어 섭호장이 되고 진경이라는 분이 공진사가 되고 여해라는 분이 급제하여 사재주부가 되었다. 당시 최충헌 부자가 국정을 잡은지라 시를 지어 비방하다가 해도로 유배되니 그 사실은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주부공으로부터 위로 거슬로 5대로 족보에는 오히려 세차를 많이 잃고 있다 한다.
주부가 상승국내승·추봉좌복야, 득선을 나시고 복야가 판도판서 선을 나시고 판서가 승계를 나시니 또한 벼슬이 판도판서라 대를 이어 크게 현달하였다. 승계가 전서 천경, 군기시판사 성리, 부정 성보, 사재감판사 성복을 나시다.
이제 유성(兪姓)으로 벼슬한 분과 타성(他姓)으로 가장 현달한 분을 기록하려 한다.
공조전서 현, 예조정랑 준, 홍문부제학 진, 청송백 심덕부는 선의 증손항이오. 집현제학 효통, 병사 박정은 현손항이오. 성균직강 목로, 전적 선로, 현령 경로, 현감 공로, 첨지중추 기창, 대사헌 김승경은 5세손항이오.
사간 중익, 판관 순거, 별좌 여익, 예조판서 여림, 현량과 여주, 찬성 한계회, 대사헌 류세침, 보덕 김전, 좌랑 여계는 6세손항이오.
찰방 경, 부사 신, 호조판서 강, 대사간 이윤번, 참의 박세옹, 충정공 송환종, 사간 조치는 7세손항이오.
현감 호, 좌의정 기성부원군 홍, 현령 순, 군수 영, 좌의정 안당, 판서 홍경림, 판윤 남치근, 우윤, 유탁, 교리 박증영, 장령 최사철은 8세손항이오.
첨추 대회, 동지 대기, 봉사 대록, 참판 대정, 첨정 대술, 대사간 대건, 참의 대진, 동돈령 대일, 감찰 대숙, 문과 부사 대수, 문과 군수 대경, 첨정 대칭, 감찰 대우, 군수 대형, 영의정 심열, 판중추 김집, 찬성 이명규, 판서 이개, 권예, 윤의립, 참판 허진, 강형, 동돈령 홍희는 9세손항이오.
군수 달증, 직장 노증, 군수 선증, 감사 석증, 승지 진증, 필선 수증, 전첨 무증, 정랑 찬증, 참판 기평군 백증, 판관 효증, 시정 학증, 참봉 양증, 현령 면증, 주부 후증, 현감 독증, 도사 호증, 감사 성증, 군수 희증, 좌의정 정창연, 국구 능원부원군 구사맹, 판중추 허휘, 참판 홍인서, 이상신, 대사헌 심의겸, 영원군 신경식, 청천군 류순익, 감사 최동립, 판결사 이심, 승지 변효성, 집의 이형원, 조덕원, 전한 김홍도, 교리 이주, 류시행, 시정 조희진, 좌랑 김선여는 10세손항이오.
별좌 결, 사평 영, 군수 필, 참봉 율, 사의 방, 별제 훈, 정랑 삼, 저작 장, 감찰 진, 우후 적, 참판 계, 감역 비, 감사 황, 대사헌 철, 도승지 헌, 병사 정, 감역 석, 첨추 업, 참봉 직, 지중추 후, 국구 서평부원군 한준겸, 영의정 윤승훈, 이홍주 좌의정 허욱, 밀천부원군 박승원, 판서 권징, 한여직, 이현영, 윤강, 박신규, 신정, 종실 풍내군 번, 참판 신유, 윤헌, 지사 권설, 대사헌 송석경, 감사 이동직, 원만석, 부윤 채충원, 심제, 민주면, 판결사 남습, 승지 류담후, 이화진, 심노, 최정운, 참의 한백겸, 오윤해, 오정, 사인 홍적, 권흔, 조대수, 집의 이석관, 박승휴, 장령 박승건, 홍익한, 박천영, 사간 성여관, 박중휘, 권양, 보덕 강여재, 대교 심흔은 11세손항이오.
판서 하익, 도사 하진, 승지 하겸, 박사 명정, 참봉 명선, 군수 명담, 지평 명함, 현감 명시, 이조정랑 명윤, 병조좌랑 명철, 부윤 명일, 정랑 명홍, 군수 명익, 현감 명직, 정랑 명기, 감역 명뢰, 우참찬 명웅, 판서 명홍, 대사간 명응, 목사 명건, 목사 명악, 판서 황신, 영의정 홍명하, 좌참찬 신임. 판서 이식, 엄즙, 윤이도, 종실 익풍군 속, 임양군 환, 감사 이집, 승지 임단, 이정, 이하, 황윤, 조성보, 장령 강학년, 김덕승, 권두추, 교리 오달제, 김환, 이인숙은 12세손항이오.
도사 세중, 군수 처중, 봉사 재중, 현감 도중, 정랑 건기, 좌랑 면기, 부사 일기, 참군 정기, 현감 정기, 좌랑 광기, 정랑 학기, 설서 최기, 감사 척기, 도사 득기, 참봉 진기, 정랑 업기, 좌랑 두기, 정랑 우기, 참봉 묵기, 참봉 성기, 국구 신풍부원군 장유, 영의정 김육, 신완, 국구 청송부원군 심호, 종실 봉산군 형신, 판서 임담, 서필원, 이인엽, 이정영, 참판 정중휘, 이희무, 감사 권흠, 박진규, 조구석, 맹만택, 윤세유, 좌윤 김석익, 참의 윤안국, 종실 광선군장, 승지 윤홍리, 장령 한이원, 성진, 지평 남적명, 응교 심유, 교리 이우겸, 김용경, 사간 박세검, 수찬 채명윤, 봉교 이수인은 13세손항이오.
지평 언명, 정언 언통, 신급제 언협, 좌랑 언철, 감찰 언박, 참봉 언종, 국구 청풍부원군 김우명, 참판 김재현, 승지 이동명, 이현록, 봉교 한현모는 14세손항이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부군이 신라초에 벼슬하여 관직이 일찍이 상공에 이르도록 국정에 참여하셨으니 그 우모공벌의 거룩하심과 덕문풍렬의 아름다움을 가히 후세자손에게 전하여 밝게 보이심이 무궁할 것인데 사첩이 망매하여 상고할 길 없고 집에 전하는 문헌이 또 병화에 다 탕진한 나머지 오직 후손이 창대하고 고관이 현달하여 고려를 지나 국조에 들어와 오늘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여 현저히 보첩에 기명된 분이 거의 수천을 넘어 달관명경이 수를 들 수 없도다.
우리 인헌왕비를 비롯하여 인렬, 인선, 명성, 단의 등 5성후가 부군의 대로부터 나시어 우리 동방에 자리하여 이남의 덕화를 이루고 국가만년의 대업을 세웠으니 아 아름답도다 가지가 번성하면 뿌리가 두텁고 물이 멀리 흐름은 그 근원이 깊은 것이라 바로 우리 내외 본지의 번성함은 부군이 적덕축지하여 후손을 음호하여 주신 증좌라.
아 이제부터 부군의 후손된 자는 항상 부군을 거울삼아 더욱 부지런히 일하고 힘써 선조에게 부끄러운 누를 끼치지 안함이 추원 보본하는 도리라 우리 선조의 승강하시는 영혼이 또한 반드시 내 뒤가 있다 하시리라 아 뒷사람이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리오 삼가 글을 써서 이후 백세 이 산소에 올라와 이 비(碑)를 보는 분에게 보이련다.
승정무진기원후재 정미(영조 3년) 7월 일 입
후손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 명홍 근찬
후손 조산대부 행세자시강원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 최기 근서
후손 통정대부 수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 척기 근전
--------------------------------------------------------------------------
9시30분경에 시조묘소에 200여명의 전국 일가들이 모여들었고 산신제를 시작으로 시조시향이 시작되었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상석에 올리고 부운재유사님(유원식)의 홀기에 따라 시작한 시향이 1시간 남짓하여 마무리가 되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곧바로 포천일가분들과 함께 대구 상덕사 참배일정이 있어 버스에 올랐다. 피곤하여 눈을 부치고 어디쯤 왔을까 눈을 뜨니 13시 30분경에 대구 상덕사에 도착하였다. 옛날에는 시골에 비를 세웠을 것인데 지금은 대도시 한 가운데 위치하여 찾기도 쉽지 않거니와 도시의 정경과 상덕사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상덕사에 들어서니 좌측엔 문우관, 정면에 상덕비각, 우측에 관리인의 집이 있었다.
-------------------------------------------------------------------------
<대구 상덕사에 대하여 - 카페유적지탐방에서 발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2동 570
○ 모시는분 : 유척기, 이숙
경상감영(慶尙監營)의 동쪽 한 마장쯤 되는 곳에 있었던 상덕사(尙德祠)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명명(命名)하였고 그 편액(扁額)은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선생이 썼으며 관찰사 이숙(1626∼1688)공과 관찰사 유척기(兪拓基, 1691∼1767)공을 함께 향사(享祀)하고 있다.
이숙 공은 1672년(현종, 顯宗 1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使) 겸 대구부호부사(大丘部護府使)로 재임중 영남지방의 대흉년을 구휼(救恤)하였으며 양로연(養老宴)을 베풀며 향사례(鄕射禮)를 익히고 시서(時書)와 학교를 거듭 밝혀 한 지방이 크게 변하도록 하였다.
또한 1726∼1727년과 1737∼1738년 2차에 걸쳐 같은 직에 부임한 유척기(兪拓基) 공 역시 선정의 공적이 이숙 공에 못지 않게 크다 하여 함께 상덕사(尙德祠)에 병향(倂享)하였으니 1826년 경상감사(慶尙監司) 조인영(趙寅永)이 비문(碑文)을 지어 상덕사뜰에 비각(碑閣)을 세우고 매년 음력 9월 9일 이 비(碑)앞에서 제(祭)를 지냈다. 1910년 일본인들이 대구 이사청(理事廳, 현 대구시청의 전신)의 신축공사로 인하여 상덕사를 헐게 되자 상덕사비(尙德祠碑) 외에 순찰사이공숙청덕선정비(巡使李公淸德善政碑), 관찰사 유공척기영세불망비(兪公拓基永世不忘碑), 순찰사유상국휘척기영세불망비(巡使兪相國諱拓基永世不忘碑), 도순찰사친군남영사리공호준영세불망비(都巡使親軍南營使李公鎬俊永世不忘碑)도 함께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여 보전하고 있다.
○ 충헌공(휘 숙, 1625 ~ 1690 )은 본관 우봉(牛峯). 자 중우(仲羽). 호 일휴정(逸休亭). 시호 충헌(忠獻). 1636년(인조 14) 11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포로로 선양[瀋陽]에 붙잡혀 갔다가 회은군(懷恩君)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1648년 진사에 합격하고 1655년(효종 6)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삼사(三司)에 출입하였으며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 문익공[휘 척기, 1691 ~ 1767] 은 본관 기계(杞溪). 자 전보(展甫). 호 지수재(知守齋). 시호 문익(文翼).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급제, 한원(翰苑) ·삼사(三司)를 거쳐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책봉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집권한 소론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홍원현(洪原縣)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호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오르자 앞서 세자 책봉문제에 연좌되었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燎 命)을 복관시키고 유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재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만년에 이천보(李天輔)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다시 등용되었다가 사퇴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에 《지수재집》(15권)이 있다.
--------------------------------------------------------------------------
집례를 맏기로 한 동재부회장님이 기계면 계전동 묘소(현재 누구의 묘소인지 불명확) 참배하고 오시느라 좀 늦은 관계로 14시경이 되어서야 상덕사 지수재 할아버지 고유제가 시작되었다. 초헌관 유섭회장님, 아헌관 유덕근 포천지역 총무님, 종헌관에 유재영씨, 집례 유동재부회장님, 좌집사 유병국감사님, 우집사 유재성 홍보위원, 축사 유세준씨가 맡았다. 부회장님의 집례로 초헌관 유섭회장님의 참례로 경건하게 고유제를 끝내고 음복을 하고 늦은 점심식사를 대구에서 하였다.
식사 후 부회장님과 감사님, 영재군, 유병길 대구경북종친회 총무님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15시 30분경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구를 출발하여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도착목적지 포천 만세교로 향합니다.
18시 30분경에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닭갈비와 소주에 저녁식사를 곁들인 우리 일행은 주기까지 더하고 흥겨워져 노래 가락으로 하나가 됩니다.
21시경 경기 포천 만세교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포천일가분과 회장님, 재성 홍보위원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집니다.
저는 다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보니 23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2박3일간의 일정은 새로운 경험이였고 一家란 무엇인가를 배웠으나 너무 피곤하여 곧바로 잠이 들었고 깨어보니 다음날 정오였습니다.
생애 최초 시조묘소 참배경험을 무임승차하게 해주신 포천종친회 일가분(유섭 회장님 및 유덕근 총무님 등 20여분의 성함을 모두 나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04.11.13
카페운영위원장 유보근 上
※ 시조묘소 시향 참배 후기가 늦어 죄송합니다. 참배사진은 용량이 허락되는 데로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수고하셨네. 시조묘 참배의 완결편일세그려.
수고하셨습니다.
글만 보더라도 이번 일정이 빠듯하게 진행되어 많이 힘들었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참배기 또한 잘 봤습니다.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여러모로 고생도 많았고 보람도 컸으리라고 믿네, 수고한 만큼 수확이 되야 하는데. 참으로 애들 많이쓰셧네
참 많은 수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 있기에 그 모임은 이루어집니다..
다시한번 새롭네요!
편집에 회장님이 수고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여러모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