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리수는 항상 큰 나무로 거기 있었다. 나무가 원체 큰 노거수여서 그늘 또한 넓고 깊었다. 그늘 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쉬고 있었는데, 속명(俗名)이 한문호(韓文鎬)인 나도 오랫동안 그 회상(會上)에 머물러 있었다.
불나비가 불을 찾아 모여들 듯이 안팎으로 지치고 병든 심신의 치유를 위하여 보리수 그늘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행렬은 그칠 줄 몰랐다. 혜운사, 금산사,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추강사, 동광사, 무등암, 백장암, 태안사, 화엄사, 보현사, 정법사, 장암…… 모두 보리수 그늘 밑에 있었고, 그 회상의 일원인 나는 속절없이 많은 인연의 실타래 속에 둘둘 휘말린 채 오랫동안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구려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얼키고 설킨 인연의 매듭은 차차 느슨해졌고, 느슨해진 만큼 가닥 가닥 풀어헤치기도 한결 쉬울 듯 싶었다. 게다가 나는 그동안 남이 알게 모르게 열 마리 소를 쫓아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소를 찾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도 많아서 내 나름대로는 소를 찾아 몰고오는 방법도 다소간 터득한 지 오래여서, 그 지혜도 한번 원용할 겸사 겸사하여 감히 인연의 해체작업이라는 걸 시도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는 그 첫작업을 운수납자(雲水衲子) 법운(法雲)스님과 나 사이에 얽힌 인연의 실타래를 한 가닥, 한 가닥씩 풀어가는 일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물론 나는 그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풀리지 아니한 매듭이 생기면 뒤로 미루어 놓았다가, 문득 한 소식(깨달음)을 얻으면 다시 풀고 또 풀고 해야만 할테니까.
그는 항상 혼자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자코메티의 가늘고 긴 그 청동조각 같은 남자…… 그 남자는 산에 있을 때도 바다 냄새를 풍겼다. 밤 항구, 해풍에 마멸되어가는 낡은 건물들과 짭짤한 갯내음으로 다가오는 바닷바람, 노을이 비낀 석양 속으로 짐짓 빨려 들어가버리고 마는 갈매기 떼, 그리고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뭉툭한 뱃고동 소리, 문득 나타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밤배…… 『우리들의 불타』는 운수납자 법운스님을 위해서 쓰기 시작했었고,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붓을 꺾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나의 미완성 소설작품이다.
법운스님은 이 소설에서 독고(獨孤)라는 아주 특별한 사내로 등장한다.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
뼛속 깊이 스며드는 고독을
모르는 사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한 사람을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인생을 알았다고
말하지 말라.
고백하거니와, 나는 아직 그 남자의 성도 이름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고용한 마담언니는 그를 독고(獨孤)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그건 다만 우리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닉네임일 따름이지 그의 본명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나는 지금은 사천 시로 이름이 바뀌어 버리고만 삼천포 시 서동, 그 부두가 찻집 <환성>에서 만났습니다. 실내장식이야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시골 찻집이었지만, 부둣가 이층에 위치한 까닭에 전망만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는 비릿한 생선 냄새와 짭짤한 갯내음이 풍겨오는가 하면,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수많은 섬들이 마치 푸른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것만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남자가 찻집에 처음 나타나던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날은 비가 왔던 모양입니다. 그는 노타이 차림이었으나, 옷매무새가 세련되어 보였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숱 많고 까만 머리카락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습니다. 그는 홀 안으로 들어서자 걸음을 멈추고 한바퀴 쓰윽 둘러보더니, 이내 창가에 있는 빈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재털이와 성냥곽을 들고가서 그의 앞에 놓았습니다.
ꡒ코오피!ꡓ
그의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내게 얼굴조차 돌리지 아니한 채로 귀찮다는 듯이 불쑥 내배앝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야 상했지만 어쩝니까? 여기 오는 손님들 대다수가 우리들의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걸요. 헌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화석(火石)이라도 된 듯이 꼼짝 않고 앉아서 마냥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가 처음 오는 손님이기도 해서 인사치레로 그의 앞좌석에 슬그머니 앉으면서 짐짓 말을 걸었습니다.
ꡒ비가 오시는군요?ꡓ
나는 혼잣소리마냥 나직히 물었습니다.
ꡒ네.ꡓ
그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일별(一瞥)할 때 잠시 시선을 흐트렸을 따름이고, 그의 얼굴은 이내 본래대로 바닷께를 향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할일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바다 위엔 안개와 같은 뿌연 빗발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차례,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그는 밤이 되도록 거기 그렇게 앉아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밤 바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환성찻집에서 내다보는 밤 바다의 경치만큼은 일품입니다. 가까이서 멀리서 등댓불은 간헐적으로 깜박이고, 바닷속으로 길게 뻗어나간 잔교(棧橋)의 맨 끝에 켜있는 외등을 파도가 부서지며 일으킨 물보라가 오색의 띠가 되어 둥글게 에워싸고,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저편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여겨지는 여객선…… 부우웅! 부우웅! 울음 같은 뱃고동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나도 어디 먼 곳으로 훌쩍 떠나고만 싶어집니다.
ꡒ이제 가시는 거예요?ꡓ
ꡒ네.ꡓ
그는 찻값을 치루고 등을 구부정하게 숙인 자세로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올 때도 그러했듯이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거나 아닌지…… 게다가 그는 웃으면서도 울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로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ꡒ참 이상한 사람도 다 보겠네.ꡓ
혼잣소리마냥 중얼거리는 내 말끝에,
ꡒ이상하긴 뭐가?…… 저런 청승 한 두 번 보아온 것도 아니고…….ꡓ
마담언니가 눈을 흘기면서 윽박질렀습니다.
나의 미완성 소설작품인 『우리들의 불타』는 운수납자 법운(=독고)스님을 사랑했던 네 사람의 여자들의 증언으로만 채워진다. 깡마른 체구에 멀대같이 키만 큰, 그래서 더욱 외로워 보이는 그 남자가 어느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나는 비탄과 회한의 수렁에 빠져서 마냥 허우적거렸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싶으면 어느 때고 찾아가 쉬던 그 보리수 그늘…… 거기 또 하나 빈자리가 생기고 말았다는 안타까움도 안타까움이려니와, 미처 다 풀어버리지 못한 질긴 인연의 실타래 때문이기도 했다.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그것은 일찌기 소멸시켰어야만 하는 업보였다. 그리고 진작 풀어버렸어야만 하는 매듭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풀리지 아니하는 매듭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아니하는 법인데……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도 소멸되지 아니하는 업장이 존재한다는 말씀을 들어본 바가 없었는데…… 결국, 방법이 문제였다.
나는 문득 한소식(깨달음)을 얻었다. 다음 순간 나는 법운스님이 살았던, 감히 짧았었다고 말해버릴 수 없는 그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네 사람의 여자…… 환성찻집의 미스 김과, 두 번씩이나 약혼했으나 끝내 결혼식까지는 올리지 못하고 마는 청자라는 여인과, 그림자처럼 그의 주위만을 맴돌다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끝내 해보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고 말았다는 순네와, 항상 떠날 것만을 생각하는 그를 붙잡아 두려고 갖은 애를 다 쓰면서 살았노라던 그의 아내…… 나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차례로 증언을 들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다싶던 그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내 법운스님이 우리 모두에게 사랑받는 바로 그 <우리들의 불타>로서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또래의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생일을 두 개쯤 갖게 되는 게 예사다. 호적에 기재되는 생일은 양력이고, 정작 집에서 생일상을 받는 건 음력이기 때문이다. 간혹 가다 생일이 세 개인 사람도 있는데, 내 경우가 그렇다.
나는 동짓날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동짓날이 음력으로 스무나흗날이었다. 지금도 나의 노모님께선 내 생일을 동짓달 스무나흗날로 기억하고 계신다. 호적에는 양력으로 11월 2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동짓날은 양력으로 12월 22일인데, 출생신고를 할 때 음력날자를 양력으로 환산하지 못한 소치였다. 대개는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11월 24일이 맨 먼저 다가오는 생일이기 십상인데, 이날은 왠지 진짜 생일같지가 아니해서 그냥 저냥 넘겨버리기가 예사이다. 20대까진 생일 미역국을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나흗날에 챙겨먹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게 아니지 싶었다. 내가 태어난 날은 분명히 동짓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일을 챙겨먹는 스무나흗날이 동짓날과 겹쳤던 때는 태어날 때 말고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동짓날 태어나서 아명도 <동지>였던 나는 정작 그 동짓날이 아닌 엉뚱한 날에 생일상을 받고 있었던 셈이었다. 집사람도 동감하기에 10수년 전부터는 아예 동짓날로 못박아 버렸다. 그 뒤부터는 내 팔자가 그러려니 여기고 동지팥죽 한 그릇으로 생일을 때우기로 하고 있다. 내가 원체 팥죽을 좋아하는 식성이기도 해서 동짓날 챙기랴 생일상 챙기랴 법석 떨어댈 것 없이 무방하다 싶었는데……, 나나 집사람이나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까 가끔은 동짓날 팥죽 쑤는 일마저 깜박 잊고 넘기는 수가 더러 있다.
ꡒ어마나! 내 정신 좀 봐, 오늘이 동짓날이었네. 당신 생일인데, 팥죽도 못쑤고 어쩌죠?ꡓ
ꡒ기왕 이렇게 된 것, 올해에는 음력으로 생일을 새지 뭘.ꡓ
민망해하는 집사람을 위로하기 위하여 짐짓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것도 아니겠다, 그냥저냥 넘어가버릴 건 불을 보듯 빤했다.
나이라는 것도 그렇다.
생일이야, 어느 날이요? 묻는다면 대뜸 동짓날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당신 나이가 올해 몇이요? 묻는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나이 또래의 한국 사람, 그 중에도 시골출신이면 대개 그러하듯이 나도 나이를 셋씩이나 가지고 있다. 실제의 나이와 호적에 기재된 나이, 그리고 서양식으로 셈하는 만으로 몇 살…… 불혹(不惑)을 넘기고는,
ꡒ내 나이도 이제 불혹이로구나!ꡓ
각오를 새롭게 했었더랬는데, 웬걸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서는 얘기가 달랐다. 무엇보다도 내 나이가 이제 지천명을 넘겼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아니했었다. 그래, 누가 내 나이를 물을라치면 아직도 40대인 호적의 나이를 말하기도 하는 등 그냥저냥 얼버무리기가 예사였었다. 그러는 한편,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이따윌 당분간은 잊고 살기로 작심했었다. 휴일이면 춘란 변이종을 찾아 근처의 산을 이 잡듯이 뒤진다거나, 그동안 미뤄왔던 원고를 마무리한다거나…… 잠시의 여유도 없이 열심히 살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나이따윌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봄이 왔나부다 싶었는데 어느새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으면 이내 겨울이다.
간밤에 서리가 내려
내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노인이 된 줄 알고 기뻐했는데
서리가 녹아 다시
내 머리는 새까맣게 되고
아아, 젊음이 슬프구나……
질긴 세월을 원망하면서, 하얗게 센 머리를 한 노인을 부러워하던 20대, 30대 시절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가는 세월을 부처님인들 어찌 막을손가?
ꡒ김 선생님 잘 계시니?ꡓ
ꡒ돌아가셨어요?ꡓ
ꡒ아니, 언제?ꡓ
ꡒ벌써 여러 해 지난 걸요.ꡓ
언제부터인가 이런 일들이 내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분들이 타계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알았을 때, 이젠 다시 보지못할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게 되고…… 나도 이제 머잖았구나! 생각하면서, 싫든 좋든 그 <나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법운스님도 말하자면 어느날 갑자기 내 곁을 홀연히 떠나버린 그리운 사람들 중의 한 분이시다.
내가 법운스님을 처음 만난 곳은 지금은 헐리고 없는 동광사(東光寺)였다. 이른바 <불교재산 관리법>에 의하여 해묵은 비구승(조계종)과 대처승(태고종)의 분규가 재현되어 소란스럽던 대흥사에서 나의 사형 혜산(慧山) 수자와 함께 도망치듯 빠져나온 건 아직 겨울안거가 해제되기 전인 63년 초였었다. 나는 새학기에 복학할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혜산 수자도 못다한 대학 공부를 마저 끝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고, 그 나름대로는 이미 마음의 준비까지 다 되어있던 상태였다.
혜산 수자는 동향 선배인데, 나와는 특히 인연이 깊어 초등학교서껀 고등학교까지 동문이다. 그는 마도로스가 되어 오대양을 누빌 희망으로 해양대학에 진학했었다. 당시로선 수재가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하던 학교였다.
대학 3학년 때였던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에 걸려 학교를 휴학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고, 고향에 내려와 폐결핵을 치료하고 나서는 못다한 향학에의 꿈도 채울 겸 큰스님께서 창건한 혜운사로 입산했었다. 서울 법대에 재학 중 6․25동란이 발발하여 그 와중에 행방불명이 된 그의 맏형과 큰스님과는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란 죽마지우였었다. 그는 큰스님을 어릴 적에는 형님으로서, 중학교 때는 스승으로서, 출가한 다음에는 은사스님으로서 모실 수 있는 복된 세연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도 나처럼 대학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하다가 광주에 있는 사립학교인 <C대학>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할 뜻을 굳히고는 절집으로 따져 사제가 되는 나를 이끌고 도망치듯 신새벽에 산사를 빠져나와 버리고만 것이었다.
우리들은 무등산록에 있는 증심사(證心寺)에서 며칠을 보냈다. 증심사 바로 아래엔 의제 허백련 화백께서 세운 농업기술학교가 있었는데, 길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차밭 주변을 산책하는 노인을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ꡒ저분이 바로 그 유명한 남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 선생이시구나!ꡓ 감탄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ꡒ마침내 우리들의 거처가 마련되었네.ꡓ
온종일 시내에 머물다 온 혜산수자가 증심사에 들어서기 무섭게 내게 속삭였다.
ꡒ수고하셨습니다. 시내에 있는 절입니까?ꡓ
ꡒ응, 동광사라구…… K여고 바로 옆에 있는 절일세.ꡓ
ꡒK여고 옆이라면 시내 복판인데 재주가 좋으시군요?ꡓ
ꡒ이 사람아, 그게 어디 재주래서 될 말인가? 인연이래야지…… 하하하하.ꡓ
동광사는 소유권 문제로 소송중에 있는 일련종(日連宗) 계통의 일본절이었다.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종단의 거물급 승려 한 분이 그 절을 개인 명의로 불하받았는데, 위치가 좋은 탓에 재개발을 노린 여러 건축업자들이 자주 군침을 흘렸었다. 때마침 불교재산 관리법이다 뭐다 해서 종단 안팎이 시끄럽던 차라 예의 거물승려는 자신의 노후를 생각해서였던지 불교양로원 설립 자금으로 쓴다면서 동광사를 팔아치우기로 자신의 신도이기도 한 건축업자와 매매계약을 체결해버린 것이었다. 헌데 동광사의 신도단체인 선우회가 이에 승복하지 않고, 매매계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애시당초 자연인 아무개로서가 아니라 승려 대표 아무개로서 불하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동광사가 자연인 아무개 마음대로 팔아치울 수 없는 공공건물이며, 따라서 실소유자는 당연히 이 절의 신도단체인 선우회라는 것이었다. 딴은 그럴 법했다. 게다가, 그 선우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의 주역이며, 참의원도 지낸 바 있는 송 아무개 변호사가 오래 이끌어온 이름난 불교단체이고, 그 분이 타계한 뒤에도 그 변호사의 두 아들이 포함된 대학교수들을 주축으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손꼽는 신도단체라는 것이었다.
ꡒ그렇다면야 소송에 이겨 절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겠네?ꡓ
혜산수자의 긴 얘기를 다 듣고난 내가 벙긋 웃으면서 말했다.
ꡒ두 말하면 잔소리지.ꡓ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광사의 솟을대문을 들어섰다. 들뜬 기분 탓에 책이 가득 들어있는 바랑의 무게조차 미처 느끼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말로만 들었지 일본 절에 와보기는 그게 처음이어서 이곳 저곳을 마냥 기웃거렸었다.
문간을 넘어서자마자 대뜸 마주치는 건 높이가 까마득한 돌기둥이었다. 그 원통형의 돌기둥에는 ꡐ나무묘법연화경ꡑ이라는 일곱 글자가 한문으로 커다랗게 음각되어 있었고, 주변에 잘 가꿔진 수목들도 일본식 정원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건물은 모두 단층 목조가옥으로 법당은 물론 요사까지 왜식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절이었다. 법당의 부처님 뒤켠 영단 한 구석에는 미처 본국으로 가져가지 못한 일본사람들의 화장한 유골이 상자에 담긴 채 채곡채곡 쌓여 있어 법당에 들어갈 때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을 우리 두 사람이서 맡아 주인행세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디냐 싶어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해 삼월 나는 복학을 했고, 혜산수자도 예정대로 야간부가 있는 C대학 법학과에 편입할 수 있었다. 나의 사형인 혜산수자가 야간 대학생인 까닭에 둘이서 주야로 바꿔가며 절을 지켰다. 그래, 중노릇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우리들은 절에서만 승복을 입었었고, 학교 갈 때는 교복이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을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에 모자만 눌러쓰면 우리가 스님이라는 사실조차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었다.
내가 법운스님을 처음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동안(童顔)의 얼굴에 훤출한 키를 한 미남…… 겉으로 보기에는 서발막대 거칠 게 없는 팔자좋은 사내였다. 그렇지만 그건 그의 허상일 따름이었고, 나는 그걸 깨닫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아니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 비하여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인데, 해방 후에는 38선 이남이어서 남한 땅이었지만 6. 25 후에는 휴전선 북방이 되어버린 실향민이었다. 그는 한때 미군의 특수부대인 <켈로부대>에서 낙하훈련까지 받을 만큼 건장한 청년이었는데, 결핵을 심하게 앓아 한쪽 폐를 통째로 도려내는 대수술을 받았었다. 수술 때 도려낸 갈비뼈 때문에 한쪽 가슴이 납작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힘든 수술이었는가는 나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ꡒ인사하시게나, 법운스님이라구, 자네도 아마 얘긴 들었으리라 믿네만…….ꡓ
학교에서 돌아와 요사로 들어서는 내게 혜산이 소개했다.
ꡒ아아, 네, 말씀은 들었습니다만…….ꡓ
내가 머뭇거리자,
ꡒ내 모습이 이래서 이상하지요? 장발에다 양복차림…….ꡓ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ꡒ법운스님께선 건강에 문제가 좀 있어서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다네.ꡓ
혜산 수자가 법운스님의 근황을 얘기했다.
ꡒ아아 참, 그러고보니 생각이 납니다.ꡓ
진불암에서던가, 큰스님과 겨울안거 한철을 좌선 수행하고 나선 건강 때문에 다시 요양원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법운스님의 얘기를 하면서 도반 스님들 모두가 안타까워하던 일들이 어제런듯 다가왔다. 당시 나는 호기심 많은 문학청년 시절이었던 관계로 요양소로 다시 떠나야만 했다던 법운스님에 관한 얘기를 이것 저것 알고 싶어했었다. 선운사 도솔암에서 축발득도(祝髮得道)한 금산선사가 나를 상대해 주었다. 금산선사는 도솔암 뒷편 바위벽에 있는, 배꼽 속에 비기를 숨겼던 것으로 더 유명한 그 곳 미륵부처를 닮은 스님이었다. 그래 그런지 미륵부처님의 배꼽에서 비기를 꺼내 들고, 바야흐로 민중의 시대가 열렸음을 소리소리 외쳐대면서 앞장서 혁명군을 이끌었던 동학군 장수의 풍모를 금산선사는 지니고 있는 분이기도 했다. 그 분의 말씀 중에, 기독병원 식당에서라든가 병원에서 남긴 밥을 걷어모아서 산골 냇물에 씻어 말렸다가 요양원 환자들의 식량으로 충당한다던 얘기,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한 푼의 보수도 받질 아니하는 자원봉사자라는, 그리하여 의지가지 없는 환자들을 요양원에 입소시켜 건강한 새 사람으로 환생시킨다는 감동적인 얘기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아니했다. 그 얘기를 듣던 날 밤, 나는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울음을 가눌 길 없어 홀로 법당 곁에 있는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었다. 건너편 산록 어디에선가 짝을 찾는 고란이가 꺼우우 꺼우우 슬프게 울었었고 달도 없는 밤, 하늘에는 별빛만 영롱했다.
별아
우러러어 네게 기도하랴
뉘라서
억겁의 정적을 여기 모아
제단을 무으었더냐
소리쳐 통곡해도
다함없는 마음
마음마다에
남기고 간
사념일랑 아예 잊고
별아
우러러어 네게 기도하랴.
내가 한때 서양춤을 배우겠다는 엉뚱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 무덤에 침을 뱉아라>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시드니포이티에였던가, 피부가 새까만 잘생긴 청년이 백인 여자와 단둘이서 추던 지르박…… 영화관을 나와서 절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그 흑인청년처럼 춤을 잘 출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했었다.
ꡒ내 친구 동생 중에 춤이라면 아주 끝내주는 친구가 있는데…….ꡓ
때마침 동광사에 온 법운스님이 내 얘기 끝에 말했다.
ꡒ그 참, 잘되었군요. 그 친구에게 춤을 좀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주세요.ꡓ
ꡒ그 거야 어렵지 않지만…….ꡓ
ꡒ안됩니다! 신도들의 눈도 있고…….ꡓ
혜산수자가 끼어 들었다.
ꡒ딱 지르박 한 가지만 배우고 말건데요, 뭘?ꡓ
내가 어거지를 썼다.
ꡒ안된다니깐!ꡓ
혜산수자가 막무가내로 반대했다.
ꡒ혜산수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한 군이 비록 대학생이기는 하나 이 동광사 안에서는 스님이니까 그 사실을 망각해서는 아니될 터이고…… 어쨌거나 내가 그 춤 잘 추는 친구동생을 한 번 데려올테니까 서로 만나 얘기나 해보라구.ꡓ
법운스님은 약속대로 예의 춤선생을 데리고 왔었다. 한때 소문난 어깨였다는 말처럼 우락부락한 사내이기는 커녕 영화 속의 그 새까만 청년보다도 오히려 잘 생긴 남자였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춤 얘기며, 영화얘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 뒤에도 몇 차례 그 춤선생과 만나기는 했으나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서양춤만은 끝내 배우지를 못하고 말았다.
법운스님은 시내에 나오는 기회가 있을 때면 동광사에 들려 우리를 보고갔다.
ꡒ요양원이 예서 가깝습니까?ꡓ
내가 법운스님께 물었다.
ꡒ가깝다면 가깝구…… 순창이예요. 전라북도…….ꡓ
ꡒ고추장으로 유명한 그 순창 말씀예요?ꡓ
ꡒ네…… 말이 요양원이지 산중에 있는 암자나 다를 바 없어요.ꡓ
이렇게 시작된 법운스님과의 인연은 세월과 함께 그 두께를 더해갔고, 나는 법운스님이 책임자(원장)로 있던 순창의 그 요양원에서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병마와 싸우는 젊은 남녀의 외로운 요양생활을 몇 차례 겪어보기도 했었다.
내가 종교문제, 특히 개종(改宗)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세연(世緣)을 잘 타고 태어난 덕택에 불교에 입문한 동기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한국전쟁이 끝나던(휴전) 바로 그 해에 시골 국민학교 육학년이었던 나는 중학에 진학할 만큼 가정형편이 넉넉치 못했다. 당시에는 중학에 가려면 목포나 광주 등지의 도회지로 유학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진학에의 길이 아주 막혀버린 건 아니었다. 왜정 때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교사로 재직했던 큰스님께서 고향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몸소 교장 겸 교사노릇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교한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아니한 그 고등공민학교는 마치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만 같았고, 나는 스님이 세운 학교에서 스님으로부터 중학과정을 이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불교에 입문했다. 어찌어찌 고교 삼 년을 다 마친 나는 대학 진학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중학시절의 은사님이셨던 큰스님께서 주지로 계시는 절을 찾아가서 이 또한 정해진 코스이듯이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렇듯 종교가 생활의 일부로 치부되어 있는 내가 바로 그 종교문제로 번민하며 온 밤을 뜬눈인 채로 하얗게 밝혀야만 하는 날들이 계속되다니…… 그것은 한 마디로 법운과 법운이 원장으로 있던 그 결핵요양원의 분위기 탓이랄 수 있었다.
기독교에도 불교의 종파보다 더 많은 종파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는데 그 결핵요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주체의 그 집단이야말로 난생 처음 들어보는 종교집단이었다. 이름하여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들…… 불교에도 물론 처처불상(處處佛像)이란 말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선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도 않았으나, 종교집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가 서로 다르다면 다른 점이랄 수도 있을 터이었다.
5.16 혁명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이란 게 해묵은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규를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아, 이른바 <절뺏기싸움> 따위에 신물이 나있던 터여서 나는 ꡐ무교회주의ꡑ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신선함만으로도 짜릿한 감동을 받았었다. 게다가, 그들은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들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소생시킬 목적으로 세운 결핵요양소……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그도 어려운 사람은 직접 나와 노력봉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노력봉사요원 중에 정규적으로 말린 밥을 가져오는 부인이 있었다. 직업이 기독병원 식당에서 일하는 잡역부라던가, 그 부인은 병원에서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 먹고 남긴 밥을 모아다가 무등산록 맑은 시냇물에 깨끗이 씻어서 말린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이 정성스레 마련해온 그 말린 밥은 죽을 끓이거나 잡곡을 섞어 밥을 지었다. 가난한 요양원생들은 죽이나 밥을 먹는다기보다 그 부인의 정성을 먹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 죽과 밥이 더욱 살로 간다는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대흥사의 산내 암자인 진불암에서 선운사 도솔암의 그 미륵부처님을 닮은 금산선사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었다. 건강이 나빠져서 다시 요양소로 가야만 했던 법운스님과 법운스님이 원장으로 있는 이 요양소에 관한 얘기를 하던 끝에 들려준 얘기였다. 금산선사님도 출가 전에는 법운스님과 마찬가지로 무교회주의자들의 집단에 소속되어 있던 기독교도였다.
나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예의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요양원의 식량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아보였다. 일박 이일로 다녀온 그 첫번째 여행에서 나는 도착한 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 두 끼니 식사를 환자들과 함께 했었는데, 저녁은 밀가루 수제비였고, 아침은 쌀 대신으로 밀가루 덩이를 떼어넣고 지은 보리밥이었다. 그렇지만 원생들이 손수 재배한 신선한 채소는 넉넉한 듯 두 끼니 모두 한소쿠리씩 푸짐하게 내와서 배불리 쌈을 싸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ꡒ어때요? 예서 보면 내가 영락없는 거사 같지요?ꡓ
ꡒ그렇군요. 마치 병석의 유마거사…….ꡓ
ꡒ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습니다.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가고, 생사가 있으면 병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병은 오로지 큰 자비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ꡓ
<유마경>에 있는 말이다.
법운스님은 기독교 재단의 후원을 받는 요양원에서, 그 대부분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인 요양원을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승복과 바랑을 벽장에 넣어두고 건강을 되찾아 훌훌 털고 나설 날만을 고대하고 있다는 거였다.
오래잖아 그의 뜻은 이루어졌다.
지금은 태안사 선원장이신 금산선사님께서 화엄사의 주지스님으로 내려와 계실 때였다. 그때 나는 화엄사의 말사이기도 한 태안사에서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재무스님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화엄사로 다시 입산한 법운스님과는 오명가명 가깝게 지냈었다. 그는, 말하자면 예수님과 부처님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었던 보기 드문 삶을 살다 간 아주 특별한 인물인 셈이었다.
그의 모습이 멀대같이 키만 큰, 자코메티의 빼빼 마른 청동 조각상으로 맨처음 내게 다가온 것도 바로 그해 겨울, 지리산 언덕배기 낙엽진 고목 곁에 서 있던 그의 쓸쓸한 모습을 저만큼 떨어진 뒷쪽에서 지켜보고 난 다음부터였다. 지는 해를 바라본 채 고목 곁에 움쩍도 않고 서있던 법운스님……. 그가 바로 『우리들의 불타』의 주인공 독고씨였다.
ꡒ선생님, 성함이 뭔지 물어봐도 돼요?ꡓ
ꡒ성함?ꡓ
ꡒ네, 성함…….ꡓ
ꡒ그런 게 없다면?ꡓ
ꡒ에잇! 성함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ꡓ
ꡒ여기 있지 않습니까?ꡓ
ꡒ정말이세요?ꡓ
ꡒ정말 같아요?ꡓ
ꡒ아아, 이제 알았다. 선생님은 제게 성함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으신 게지요? 그렇지요?ꡓ
ꡒ그런 걸 자랑하고 다닐 만큼 잘나지도 못했고…… 그딴 것 굳이 알 필요가 없잖습니까?ꡓ
ꡒ그럼 선생님, 제가 하나 지어드려도 되겠어요? 이곳 환성찻집에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다가…….ꡓ
ꡒ좋으실대로…….ꡓ
ꡒ독고(獨孤)씨! 어때요?ꡓ
ꡒ독고?ꡓ
ꡒ선생님께서 우리집에 두 번째 오셨던 날, 마담언니가 지어부른 이름이예요. 선생님께는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ꡓ
ꡒ그럴까?ꡓ
그가 마침내 내게로 얼굴을 돌리면서 살포시 미소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나는 그의 미소 뒤에 방울방울 맺혀있는 눈물을 기어코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떤 여자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뭔가 해주질 않고는 배겨내질 못했을 터이니깐요.
ꡒ선생님, 제가 딱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어요?ꡓ
ꡒ뭔데요?ꡓ
ꡒ아이, 괜찮다고 대답하세요?ꡓ
ꡒ…….ꡓ
ꡒ싫으세요?ꡓ
ꡒ말씀해보세요.ꡓ
ꡒ선생님, 실연하셨지요?ꡓ
ꡒ…… 그렇게 보입니까?ꡓ
ꡒ네, 저는 선생님께서 우리 찻집에 처음 오시던 날에 대뜸 그렇게 느꼈는 걸요. 그렇지요, 선생님?ꡓ
ꡒ글쎄요.ꡓ
고백하거니와 그에 관해서라면 도무지 어느 것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사람 보는 데는 일가견을 가졌노라고 감히 자부하고 있는 이 미스 김도 독고씨에게만은 두손 번쩍 들고 말았다면 말 다했지 뭡니까. 사귀면 사귈수록 더더욱 알 수가 없는 사람…… 독고씨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ꡒ선생님께선 날마다 바다만 바라보시면서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계셔요?ꡓ
ꡒ…….ꡓ
나의 물음에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도 없이 그는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분히 어리광이 섞인 어투로,
ꡒ나, 선생님 이러는 것 참 싫다!ꡓ
짐짓 이렇게 말했습니다.
ꡒ무슨?ꡓ
그가 재털이에 담배를 부벼끄면서 반문했습니다.
ꡒ아무 말씀도 해주질 않고 줄창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것…….ꡓ
ꡒ이런 게 바로 벽이라는 거요. 미스 김과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ꡓ
ꡒ벽이라 하셨어요?ꡓ
ꡒ그렇소. 나와 미스 김 사이만도 아니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동물 사이, 사람과 식물 사이…… 모두가 벽이요.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는 그 벽을 허물어뜨리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 거기서만이 얻어지는 거요.ꡓ
ꡒ점점 모를 소리만 하시네.ꡓ
내가 투덜거리자,
ꡒ미안, 미안……ꡓ
그는 자신의 입을 가볍게 때리면서 이내 바다께로 눈을 돌려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여러분도 독고씨께서 벽 어쩌고 말하던 때의 그 표정을 봤어야만 합니다. 뭐랄까요. 꿈꾸는 모습도 아니고, 무엇을 간절히 갈구하는 표정…… 아니, 틀립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신들린 사람의 모습,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순간, 독고씨에게서는 눈에 보이지 아니한 강한 열기가 뿜어져 나와서 나를 친친 옭아매어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끝내 독고씨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도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미완성인 채로 있었던 나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불타』는 삼천포에서 머잖은 남해의 용문사에서 그 집필을 시작했다. 따지고보면 그해 여름이 나와 법운스님이 함께 보냈던 마지막 여름이었던 셈인데, 내 입장에서 보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문단에 갓 데뷔한 신인이었으나, 등단작품이었던 장편소설이 문예지에 연재되던 참이어서 딴에는 대단한 자만에 빠져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단을 축하한다며 술을 사준다, 밥을 사준다……, 들뜬 기분에 글 한 줄 쓰여지지가 아니했다.
바로 그럴 즈음에 법운스님의 편지를 받았다. 등단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법운스님 자신이 총무로 재직하고 있는 남해의 용문사에 와서 여름 한철을 보내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 용문사가 풍광이 수려하고 한 여름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시원한 곳이어서 소설 한 편 쓰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도 없으리라는 얘기까지 덧붙여 있었다. 고소원(固所願)이나 불감청(不敢請)이라 했던가? 어디를 가시나 커다란 보리수 그늘을 만들어, 지치고 피로한 중생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시는 큰스님께서도 남해 금산에 있는 토굴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정진하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던 참이겠다, 이런 인연이 또 어디 있겠느냐 싶었다. 나는 법운스님의 편지를 받기 무섭게 짐을 꾸렸다.
때마침 나는 삼천포 아가씨와 열애 중이었다.
우리들은 작가와 독자로 만났다. 처음엔 반 년 넘게나 서로 편지만 주고 받았었다.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쓰고 받고 했었다. 그해 오월 하순이었지 싶다. 나는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삼천포 아가씨와 첫 대면을 했었고, 우리들은 이내 뜻이 맞아 장래를 함께 설계하기에 이르렀다. 고백하거니와, 그때 나는 법운스님의 편지에서 <남해 용문사>라는 글자를 읽자마자 바다 건너에 있을 삼천포의 부두와 그 부둣가 머잖은 곳에 살고 있는 삼천포 아가씨를 떠올렸던 게 사실이었다. 내가 법운스님의 편지를 받자마자 만사 젖혀놓고 훌쩍 집을 떠날 수가 있었던 것도 그러저러한 인연들이 얼키고 설킨 때문이기도 했었다.
내 소설작품 『우리들의 불타』에서 첫번째 증언자로 등장하는 미스 김이 근무하는 부둣가 찻집 <환성>은 내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열애 중이던 삼천포 아가씨를 기다리던 바로 그 찻집이기도 했다. 그 찻집, 창가에 앉아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독고씨…… 그는 소설가 한문호, 바로 나였다.
ꡒ마도로스가 되고 싶어.ꡓ
어느 날, 밑도 끝도 없이 독고씨가 내게 불쑥 내뱉는 말이었습니다.
ꡒ……?ꡓ
나는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본 채 두 귀를 곧추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만이었습니다. 그는 항구 밖에 묘박(錨泊)한 외국 화물선의 거무튀튀한 선체만 이윽히 바라보고 있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아니했습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들렸습니다.
ꡒ부우웅…… 부우웅…….ꡓ
그와 마주 앉아서 듣는 뱃고동소리는 항상 울음소리마냥 슬픔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그랬습니다. 내 가슴을 마구 휘저어 놓는 듯한 뱃고동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ꡐ내가 저 남자, 독고씨를 사랑하고 있구나!ꡑ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ꡒ마도로스가 되고 싶어.ꡓ라고 말하던 독고씨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ꡒ선생님, 저두요. 저도 마도로스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에고 따라가고 싶어요.ꡓ
내가 말했습니다. 일종의 애정고백이라 할까요? 아무튼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줄 몰랐으니까요.
ꡒ무슨 까닭으로?ꡓ
그가 물었습니다.
ꡒ선생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길이니깐요.ꡓ
ꡒ미스 김이 뭘 단단히 오핼 하고 있군.ꡓ
ꡒ오해라뇨?ꡓ
ꡒ난 누구와 함께 가려는 게 아냐. 선원들 말고는…….ꡓ
ꡒ건 또 왜?ꡓ
ꡒ아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한 망망대해에 오래도록 떠 있노라면 이토록 지겨운 인간세상도 조금은 그리워질테니까.ꡓ
ꡒ선생님은 지독한 염세주의자이시군요?ꡓ
ꡒ아냐. 난 살고 싶은 거라구. 치열하게, 아주 치열하게……ꡓ
그가 마도로스가 되는 대신 수도승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이 일이 있은 지 달포가 조금 지난 뒤였습니다. 고맙게도 독고씨는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엽서 한 장을 보내주더군요. 이것이 바로 그 엽서입니다.
<미스 김, 마침내 입산하기로 했소. 다시 한 번, 이 어두운 폭풍 속에서 헤어나고 싶기 때문이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며 빛이고 싶소. 그 동안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하오. 부디 복된 생활이 되도록 빌어드리겠소. 독고.>
내 소설작품 『우리들의 불타』에서 이를테면 그 첫장(章)이라 할 수 있는 미스 김의 증언은 여기서 끝난다. 원체 성격이 느리고 굼뜬 탓이겠지마는 나는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편이다. 장편소설이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어느 모로 따져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건 당연한 노릇이겠으나, 단편소설일 경우에도 그러하니 문제다. 반 넘어 써놓고도 십수 년이 넘게시리 원고지만을 만지작거릴 뿐 아직까지도 끝을 내지 못하고 있는 소설작품만도 대여섯 편이 넘는다면 할말 다했지 뭔가 말이다. 이 소설 『우리들의 불타』의 경우는 특히 더 했다. 쓰다가 말다가…… 그러구려 세월만 자꾸자꾸 흘러갔다.
ꡒ한문호 선생님! 부탁드린 원고를 언제 가지러 갈까요?ꡓ
ꡒ한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셔요? 이러다간 또 기일 안에 잡지가 못나옵니다.ꡓ
ꡒ한 선생님, 이번에도 설마 공수표 떼지는 않으시겠죠?ꡓ
지방에서 동인지 비슷한 문예지를 발행하고 있는 후배가 나를 볼 때마다 소설 한 편 써달라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나는 후배녀석의 성화에 견디다 못해 미처 반도 못쓴 이 소설의 앞부분만을 따로 떼어 <전락의 시집>이라는 제목을 붙여 후배녀석에게 넘겨주어버리고 말았다. 당초의 계획대로 법운스님(독고)을 사랑했던 네 사람의 여자의 증언을 쓰되, 연작소설 형식을 빌어 한장(章) 한장씩 발표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헌데, 동인지 비슷한 문예지를 일년에 네 번 계간으로 발행하고 있는 예의 후배녀석은 나보다 한술 더 떴다. 소설가 한 아무개의 전작중편소설이 4회 분재로 그 문예지에 발표된다고 지방신문에 광고까지 해버린 것이었다. 전작소설 분재라면 이미 탈고한 중편소설을 네 번에 나누어 싣는다는 얘기였다. 후배녀석의 작전이라면 작전이랄 수도 있는 그 일 때문에 나는 막판에 이르러 예의 『우리들의 불타』라는 소설 집필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릴 밖에 없었다. 타의에 의하여 배수의 진을 쳐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는 나의 클라스메이트였습니다. 헌데, 한 학기도 채 다니지 않고 전과(轉科) 운동을 해쌓더니 2학년이 되기 무섭게 철학과로 옮겨 가버렸습니다. 하기야 그는 처음부터 어딘가 우리와는 다른 점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누구와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커다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가 군중 속에서도 홀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는 훗날 나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만, 그때도 외로움은 무슨 끈적끈적한 콜로이드용액처럼 그를 휩싸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외로움의 정체가 도대체 뭐였느냐고 묻는다면 정말이지 저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 실상 그러한 물음은 나 혼자서도 수없이 묻고 또 물어봤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는 다 낡은 가죽가방에 책을 담뿍 담아서 무겁게 들고 다녔습니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온 모습을 하고, 항상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느릿느릿 걸어다녔습니다…….
내가 쫓기는 듯한 마음으로 청자의 증언(제2장)을 허겁지겁 마무리 할 무렵 쯤에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혀 낯선 음성이었다.
ꡒ여보세요! 여기 무거동인데, 누구십니까?ꡓ
ꡒ이 사람, 유명해지더니 옛 도반도 잊었나?ꡓ
그 말 끝에, 헛헛헛헛…… 속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웃음소리였다.
ꡒ그럼, 혹시……?ꡓ
ꡒ그래, 날세. 법운…….ꡓ
나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떨어뜨릴 뻔하던 수화기를 가까스로 거머쥐었다.
ꡒ…….ꡓ
ꡒ왜? 놀랐는가?ꡓ
ꡒ놀라다 마다요? 대체 거기가 어딥니까?ꡓ
ꡒ진주…… 그 곳에서 발행되는 문예지 말일세. 책방에 우연히 들렸다가 자네 이름이 보이기로…… 제목이 <전락의 시집>이었던가, 그랬지 아마?ꡓ
ꡒ이럴 수가…….ꡓ
ꡒ그 소설 재밌던데?ꡓ
ꡒ읽어보셨군요?ꡓ
ꡒ읽어보다마다…… 법운이 법운의 만가(挽歌)를 읽는 맛도 괜찮더구만.ꡓ
ꡒ죄송합니다. 누구에게던가 법운스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ꡓ
ꡒ죄송할 것 없네. 어차피 승려 법운은 죽은 지 이미 오래니까.ꡓ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승려 법운이 죽었구나! 독고씨는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고, 법운스님만 돌아가셨구나!)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귀가 뚫렸음을 깨달았다. 수화기에서는 진주에 오거든 한번 들리라면서 전화번호를 일러주는 사내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으나 나는 개의치 아니했다. 전화기야 울리거나 말거나 나는 책상에 돌아앉아서 이제는 필요 없게 된 원고지를 북북 찢어 발겼다. 독고씨와 두 번씩이나 약혼을 했으나 결혼식까지는 끝내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는 청자의 증언이 찢겨나갔고, 그림자처럼 그의 주위만 맴돌다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끝내 해보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내고 말았다는 순네의 증언도 없어졌고, 항상 떠날 것만을 생각하는 그를 붙잡아두려고 갖은 애를 다 쓰면서 살았노라던 그의 전처의 값진 증언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ꡐ우리들의 불타ꡑ는 우리들의 불타가 아니었고, ꡐ우리들의 불타ꡑ로서 내게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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