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점은 협소했다. 좁지 않았다면 이렇듯 선명하게 기억이
살아나기나 했을까? 꼭 구입해야 하는 물건을 매점에서 사야 하는 날이면,매점 문턱 판매대 앞은 밀고 밀리는 몸싸움으로 터져나가는 듯했다. 저마다 상반신을 내밀어 서로 물건을 사려고 아등거리는 모습은,
그곳이 매점임을 알리는 익은 풍경이었다. 매점 구매대 맨 앞쪽의 아이들은 뒤쪽에서 덮치듯 올라타는 친구들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그런데
그게 재미있었다.
매점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구입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우리가 구입한 것은 그냥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모두 추억의 상징물이 되었다.
처음 입학하여 송설 뺏지를 사고, 로마 숫자로
표시된 학년 뺏지를 사고, 교복에 달 소매 단추를 사고, 모자에 붙일 모표를 사고, 모자에 두를 백선 두 줄을 샀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흰색 체육복 바지를 사고, 매스 게임에 쓸
곤봉을 사고, 잉크를 사고, 철필을 사고, 도화지를 사고, 물감을 사고, 판화 새기는 칼들을 사고, 줄넘기를 사고, 삼각자를 사고, 콤파스를
사고, 실습용 글라이더 부품들을 사기도 했다.
조금 주머니 사정이 좋으면, 가끔씩은 우리끼리 차고 노는 작은 고무공을 사기도
했다. 그걸로 농구장에서 간이 축구를 했다. 농구 골대 기둥 하단의 삼각 지지대 안으로 공을 차 넣는 변칙 축구이다. 그것들 모두 이제는 추억의
소도구들이 되었다.
아! 또 있다. 그 무렵에는 왜 그렇게 광을 내는 일이
많았는지. 매점에는 광내는 약이 있었다. 우리는 매점 앞에서 모표도 닦고, 단추도 닦고, 박클도 열심히 닦았다. 닦을수록 모표는 광채가 나고,
대신 우리들 손은 시커멓게 더러워져 갔다.
오늘 우리는 녹슨 추억의 가닥들을 열심히 닦는다. 세월이라는
티끌에 섬세한 기억들이 자꾸만 가리워진다. 닦을수록 흐릿하게 저만치 물러서는 추억들. 이 나이쯤에는 또 다른 마법의 매점이 있다면 좋겠다. 정녕
녹슨 추억을 환하게 닦아내는 묘약을 파는 매점이 송정 어디쯤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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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매점 전경[200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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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매점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누어 있었다. 좁은 마루 위에
상품진열공간이 있고, 그 마루가 끝나는 곳에 높이 1미터가 약간 넘는, 큰 나무 칸막이가 있어서, 상품 놓인 곳과 구매 학생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학생들은 상품에 직접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가로막이 나무 이쪽에서 학생들은 사고 싶은 물건을 요구하였다. 가로막이 너머의
주인아주머니를 통하여 비로소 물건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매점은 교실에서 너무나 멀었다. 어쩌다 쉬는 시간에 찹쌀떡
하나라도 사서 먹을라치면 전 속력으로 달려 떡을 입에 물고 헐떡이며 교실로 달려와야 했다. 선생님보다 늦게 들어오면 한 두 대의 매는 피할 수가
없었다. 매점 다녀오느라 늦었다는 변명은 할수록 손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군것질 자체가 악덕(惡德)으로 치부되는 시절이었다. 요즘 10대들은
어떻게 이해를 할지…….
매점 뒤쪽 공간은 식당이었다. 10여 평 될까말까 한
공간이었다. 식당 삼면 벽을 따라, 우동 그릇을 놓을 수 있도록, 식탁 대를 설치해 두었다.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이리라.
배식구에서 가끼우동 한 그릇을 받아들고, 왜간장 한 방울에 고춧가루 한 술을 집어넣으면 그게 그렇게 맛이 있었다. 서서 우동 한 그릇을 후루룩
먹고 가도 그 맛은 으뜸이었다. 1962년 화폐개혁 전의 가격으로 한 그릇에 40환이었던가, 50환이었던가. 지금으로 치면 얼마쯤 되는
금액일까.
'가끼우동 한 그릇’은, 먹고 싶다고 쉽사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돈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 일년 내 가야 주머니에 돈 한 푼 넣고 다니기 어려웠던 시절이니, 그야말로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 먹을
수 있기도 했다. 입학시험 치던 추운 겨울날, 부모님이 데리고 가서 사 주셨던, 그래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매점 식당의 가끼우동 한 그릇은 영원한
맛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 강남 최고의 호텔 뷔페식당이라 한들 어찌 그만한 맛의 추억을 줄 수 있겠는가.
학용품 진열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하얀 찹쌀떡이나, 그
옆에 고소한 냄새를 피우던 도너츠 과자는 ‘먹었던 기억’보다 ‘먹고 싶었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포만의 경험’은 쉽사리 잊혀지지만
‘먹지 못했던 경험’은 오래 남는다. 그러나 바로 그 ‘먹지 못했던 경험’의 힘 때문에, 우리는 삶의 오기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몸을 내던지듯
이를 악물고 일하여 이만한 풍요를 이룬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세대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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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끼우동 한 그릇 주문하여, 친구와 더불어 젓가락 함께
나누며, 국물 훌쩍거리며 들어 보시게나. |
매점에서 우리가 사 먹었던 것들은 모두가 맛이
있 었다. 맛이란 본래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추억마차에서 느끼는 매점의 맛은 더욱 각별하다. 가난 속에도
성장과 우정의 추억이 그 맛 속에 어리어 있으니, 감회를 불러온다. 오늘 돌이켜 보는 학창 시절 매점의 모든 것들은 더욱 아름다운 맛으로 휘감겨
온다.
친구여! 오늘 하루쯤 그 옛날의 매점을 추억의 환상 속에서
찾아가 봄이 어떻겠는가. 그리하여 송설 모표도 하나 사고, 흰색 체육복 바지도 하나 사고, 파일로트 잉크도 하나 사고, 줄넘기도 하나 사고,
스케치 북도 한 권 사고, 찹쌀떡도 사고, …사고, …사고, … 사게나.
그리고 큰 맘 먹고 가끼우동 한 그릇 주문하여, 가장 친했던
친구와 더불어 젓가락 함께 나누며, 국물 훌쩍거리며 들어 보시게나. 매점 나오는 길에 도너츠 하나씩 입에 물고 송정에 올라 “우정 만세! 송정
만세!” 이렇게 파안대소(破顔大笑) 해 보시면 어떻겠는가.
환상이지만 제법 그럴듯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