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이후 약 7개월 만에 MBC 금토드라마를 본방사수했다. 6월 23일 시작해 7월 29일 끝난 12부작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이다. SBS 금토드라마 ‘악귀’와 같은 날 시작했는데, 나는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을 택했다. 꾸준한 10%대 시청률로 인기를 누린 ‘악귀’를 마다하고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을 본 것은 이른바 오컬트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어서다.
4.4%(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같음.)로 시작한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은, 그러나 4.7%(3회)를 한 번 찍었을 뿐 세 번이나 2%대로 주저앉는 등 영 뒷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4.7%가 최고 시청률로 나타났다. 최종회 시청률은 2.4%다. 이를테면 실패한 MBC 금토드라마에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이 추가된 셈이다.
일일극 빼곤 사실상 유일한 미니시리즈라 할 MBC 금토드라마가 탄탄대로와 거리가 먼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2021년 9월 ‘검은 태양’을 시작으로 신설된 MBC 금토드라마는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까지 11편(12ㆍ16부작 기준)이 전파를 탔지만, 그중 10%대 최고 시청률을 보인 건 ‘옷소매 붉은 끝동’ㆍ‘빅마우스’ 단 두 편에 불과하다.
지상파 경쟁사인 SBS 금토드라마와만 비교해봐도 그야말로 처참할 지경이다. 2019년 2월 ‘열혈사제’로 시작, ‘악귀’까지 방송된 25편중 10%대 최고 시청률을 찍지 못한 SBS 금토드라마는 5편뿐이니까. 평일드라마에 비해 고정 시청층이 폭넓게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MBC 금토드라마의 저조한 시청률은 작품선택의 문제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은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도 그렇다. 단적인 예로 나는 몇 번이나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을 그만 볼까하는 충동에 시달렸다. 이 글을 써야 해서 꾹 누르며 중도하차하진 않았지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처음 보는 회계사들의 업무를 주로 다룬 회사생활이 경제 내지 금융 전문용어들로 가득차 있어 너무 낯선 데다가 어렵게 느껴져서다.
회사의 파산이니 합병 따위는 전혀 관심 사항이 아닌 터라 흥미를 끌지 못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로선 응당 재미가 없는 경제드라마일 뿐이고, ‘악귀’를 볼 걸 하는 후회가 일기도 했다. 뭐 하나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할만한 게 없는 드라마에 아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5회 장지수(김유리)가 본격 등장하면서부터다.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은 장호우(김명수)가 자신을 아들처럼 길러준 아저씨를 투신자살하게 만든 태일회계법인의 회계사가 되어 복수하는 이야기다. 한승조(최진혁)의 특별채용으로 고졸 회계사가 된 것인데, 그 대상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태일회계법인 부대표 한제균(최민수)이다. 알고 보니 제균은 호우의 부모를 죽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호우의 복수는 승조가 제균에게 “당신 아들 한승조는 이제 없어요”라 선언하며 본격화된다. 가령 지산은행을 손에 넣으려는 제균을 아들인 승조가 호우와 함께 막아내는 식이다. 많은 회계사들이 동조하기도 한다. 글쎄, 그런 게 ‘휴먼 오피스 활극’일지 몰라도 회계사 범죄가 그 정도인지 깜짝 놀랄 드라마의 세계이긴 하다. 허구라고 밝히긴 했지만, 고졸이라고 업무도 주어지지 않는 따위 학력차별 민낯 묘사도 ‘그게 실화야?’ 할 만큼 충격적이다.
급기야 제균은 11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지만, 이내 사면으로 풀려난다. 호우가 복수와 함께 이뤄낸 정의구현을 무색하게 하는 이런 결구는 좀 의아하다. 제균이 직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새로 설립한 리츠투자사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있는 결말도 마찬가지다.
호우와 승조가 출소후 또 다른 은행을 인수하려던 제균을 막아내긴 하지만, “열심히 사는 당신의 살이가 크게 나아지지 않는 건 숨어있는 나쁜 놈들 탓”이고 응징을 통해 정의가 살아있음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고 안겨주려는 기획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해 보여서다. 차라리 11회가 최종회였으면 나을 뻔했다.
12회 최종회에서 마치 로맨스 드라마인 양 승조와 지수, 호우와 진연아(연우)를 비롯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모두 해피엔딩으로 늘어놓고 있어서다. 보통 최종회 시청률은 직전 회차보다 더 높게 나타나곤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일반적 현상과 전혀 다르게 최종회에서 최저 시청률(10회와 공동)을 기록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응징을 통해 정의의 살아있음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고 안겨주려는 기획의도가 확 와닿지 않는 게 그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일단 난해한 금융용어들 때문이다. 몇 가지 적어보면 클라이언트ㆍ뉴스탭ㆍ세일 앤 리스백ㆍ사모펀드ㆍLPㆍ유동성비율ㆍ채권유동화ㆍ파킹ㆍBIS비율ㆍ리스크 헷지ㆍ엔젤투자자ㆍ스텔스계좌 등이다.
그러나 낯선 의학용어가 수시로 나오는데도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가 높은 인기를 끈 걸 보면 그게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이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받은 이유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내가 보기엔 너무 빠르고 되게 빈번히 이루어진 장면 전환의 전개가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 실패에 한몫했지 싶다.
허겁지겁 마무리한 듯한 인상도 풍긴다. 가령 제기하려던 제균이 승조와 호우에게 맥없이 당했는데, 그에 대한 분노 등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그렇다. 수감중 면회 한 번 오지 않은 승조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를 제균이 몰래 만나러 온 것도 생뚱맞거나 억지스러워 보인다.
절친 송여진(도연진)과 공희삼(김선빈)이 아저씨 자식들도 아닌데 고교시절 어떻게 호우와 어울려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는지 등 구체적 묘사가 미진해 아쉽기도 하다. 고교 시절 호우가 그들을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자신을 길러준 해빛건설 사장 장인호(남명렬) 자식들인지 헷갈릴 정도여서다.
협찬을 가장 많이 한 업체인지 모르지만, ‘호당원’에 대한 간접광고가 3번씩이나 나와 어색스럽게 하더니 배우들이 발음상 오류까지 범해 미간을 찌뿌리게 한다. “진 비슬(빚을→비즐) 갚아야”(5회), “이런 산골짜기에 ‘창꼬’(창고)가 다 있네요”(8회) 등이다. ‘창꼬’는 이외에도 두 번 더 나오는데, 각기 다른 배우 발음인 걸 보면 대본의 문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