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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손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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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료실 스크랩 한국의 성지(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
비손강 추천 0 조회 1 06.12.26 11: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구 관덕정 순교자 기념관

 


순교 기념관 조각물

 


기념관 내 스테인 글라스 그림


순교 기념관 현판



지하 경당 내부 제대

 


 

 


성 이윤일 영정

 


돌형구

 


척화비

 


2층 전시실 유물
3층 전시실

 

 

관덕정(觀德亭)

 

조선 시대 무과의 시험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 (都試廳)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이다. 관덕정은 옛 아미산 언덕 밑 전부에 해당하는 너른 앞마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곳은 무과의 과거를 보던 연병장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위한 승마장으로 사용되었고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이곳에서 행해지곤 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 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 부터이다. 이 아미산 처형장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장이었던 장대벌(봉덕동), 비산동 날뫼 뒤에 있는 큰 들인 꼬부랑개와 함께 조선시대 중죄인들을 처형하던 3대 처형장의 하나로 꼽힌다. 이곳은 원래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이었으며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조선 시대에 대구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위치상 또는 군사상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593년 달성에 감영이 설치된 후 선조 34년(1601년)에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설치키로 확정함에 따라서 포정동(현 중앙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 때부터 도내 전역의 중죄인들을 다스리는 최고 사법권을 가진 감사가 주재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각종 죄를 지은 이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 감영 부근인 서내동(西內洞)에 설치됐으며 또한 처형장들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박해 때마다 경상도 전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와서 감영 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수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에서 순교한 분은 을해박해 때 7명, 정해, 기해박해 때 4명, 병인박해 때 14명 등 25명이며, 감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을해박해 때 26명, 정해박해 때 3명, 병인박해 때 2명 등 31명이다. 그리하여 대구 감영옥과 관덕정에서 순교한 신자수는 56명에 이른다. 도시청(都試廳)으로서의 용도가 필요 없게 된 1906년, 대구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관덕정을 수리하고 경상 북도 교원 양성소인 사범 학교를 개설했으나 폐교됐고 해방 후 완전히 헐렸다. 일제 시대에는 관덕정 마당에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와 새장터 또는 남문 시장으로 불리다가 1937년 남문 시장이 옮겨 간 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관덕정이 순교 성지의 모습을 갖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요한)이 시성되면서 부터이다. 사형 터로 고증된 병원 옆 땅 1백55평을 확보,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순교자 기념관이 건립됨으로써 관덕정은 경상도 지역의 순교자들을 다수 배출한 순교성지의 풍모를 갖추고 수많은 순례자들을 맞게 된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이 순교자 기념관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와 함께 영남 지역의 천주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갖가지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관덕정 - 대구의 순교 터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老萊山,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 진보 머루산(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안동 우련밭(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교우촌 등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경상도 산간 지역으로 숨어든 초기의 교우들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은거지를 찾던 중에 교우들을 만나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그 안에서 교리를 외워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러다가 탐욕스런 밀고자 때문에 체포되었고, 신앙을 끝까지 지킨 김종한(안드레아) 등 7명은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은 뒤 관덕정 앞에서 칼날 아래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관덕정'(觀德亭,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 앞은 본래 무과를 치르던 연병장으로, 아미산에서 내려오는 산자락 끈이 냇물과 맞닿는 곳에 자리잡은 넓은 공터였다. 그 때문에 이 곳은 일찍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이 곳과 함께 대구의 형장으로는 장대벌(현 봉덕동)에 있던 군사 훈련장과 날뫼(현 비산동) 등이 있었는데,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은 주로 관덕정 앞이었다고 한다. 관덕정(본래의 이름은 관덕당)은 1749년(영조 25년)에 관찰사 민백상이 세웠다. 1816년 11월 1일 이 곳에서 순교한 7명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관덕정 인근에 정성스럽게 매장되고 무덤마다 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그대로 형장에 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듬해 봄에 주민들 몰래 그곳으로 가서 시신들을 찾아다가 더 적당한 곳으로 옮겨 무덤 네 개에 안장하였다. 바로 이때 다음과 같이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교우들은 시신을 옮기는 일을 인근 주민들에게 들킬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 때 천주의 특별한 보호로 시체들이 묻혀 있는 읍내 쪽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하늘은 내려앉은 듯하였고,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겨우 일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빛을 발하였다. 최성렬(바르바라)의 시체만 짐승이 파먹은 듯하였으며, 나머지 6구의 시신은 조금도 썩지 않아 숨을 거둔 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이 보였다. 무덤을 파헤쳤을 때 나던 냄새도 땅 밖으로 시신을 끌어내자 이내 없어졌다. 옷가지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습기는 차 있지 않았다. 이를 본 모든 교우들은 감탄하였다("한국 천주교회사" 중, 82-83면). 1827년의 정해박해 때 경상도의 교우촌은 다시 한 번 약탈당했다. 이 때 상주 멍애목(문경군 동로면 명전리)과 앵무당(상주군 화부면 평온리) 교우촌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상주와 안동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도중에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보록(바오로) 등 6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다른 박해 때와는 달리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옥에 갇혀 있다가 바오로의 아들 박사의(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 3명만이 기해박해가 진행 중이던 1839년 5월 26일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로부터 27년이 지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경상도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우리는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한 성 이윤일(요한) 회장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충청도 홍주 출신의 유명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은 혼인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문경 여우목(문경읍 증평리)으로 옮겨 와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던 중 여우목 교우촌에도 박해 소식이 들려오게 되었지만, 요한의 가족은 순교할 원의를 품은 채 오로지 포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866년 10월,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 교우촌의 실상을 알아내고는 포졸들을 보내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포졸들이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요한은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문경을 거쳐 상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던 중에 수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요한의 마음은 오히려 굳어져만 갔으며, 상주 목사는 그를 천주교의 두목으로 지목하여 대구 감영에 보고한 뒤 그곳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그는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날 것이다.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나의 뒤를 따라오너라." 하고 당부하였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다시 형벌을 받고 관덕정 형장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 26일(양력 1867년 1월 21일)에 휘광이의 칼날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가족들은 우선 급한대로 요한의 시신을 거두어 날뫼(비산동)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훗날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인척이 살고 있던 용인 먹뱅이(용인군 이동면 묵리)의 심방골로 이장되었으며, 1976년에는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먹뱅이 심방골에 있을 당시 인근의 교우들은 그의 무덤을 '거꾸로 된 무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훗날 그 무덤을 찾기 쉽도록 시신을 거꾸로 안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의 유해는 1984년 시성식이 있은 지 2년 만인 1986년 12월 22일 미리내에서 발굴되어 대구대교구청 옆의 성모당에 안치되었다가 1990년 관덕정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2호(2000년 1월호), pp.88-90]


관덕정 순교기념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경당 축복 및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이 있었고, 5월 31일 개관을 하였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순교로써 하느님을 증거하신 이윤일(요한) 성인을 찬미하고 기념하고자 건립된 것이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 건립사업은 대구대교구에서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지개발의 첫 사업으로 시행된 것이다. 건물모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단청무늬색체로 된 누각이며 건물벽은 근세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축조된 보루와 같이 네모로 된 구멍이 있고 건물 바깥벽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돋음새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지하층에 경당이 있고 경당을 향하여 오른편에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돌제대와 영정이 모셔진 유해실이 있다. 경당 맞은편엔 제1전시장 있는데, 여기엔 대구대교구의 발전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 로비에 있는 스테인드글래스의 그림은 순교자를 상징하며 바닥에는 조선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입증하는 척화비와 조선조 형구인 황새바위가 놓여 있다. 지상 2층에는 제2전시장이 있다. 지상 3층은 제3전시장과 누각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이윤일(요한)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 발전사를 스테인드글래스에 잘 묘사하고 있으며 드망즈 주교와 서정길 주교의 유품이 있고, 한역서학서를 비롯하여 각종 공과책이 있다.


대표 순교자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23-1867)


일명 '제헌'으로도 불리는 성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자 11월 가족, 마을의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3일 간 혹형과 고문을 받은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 소위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다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형이 집행될 때까지 기쁨과 여유를 갖고 기도하며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성 이윤일이 만든 문경 여우목 교우촌

 


성지 문경 여우목 안내판

여우목 성지는 103위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대구 관덕정, 대구교구 2대 주보 성인, 당시 여우목 공소회장)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부근의 교우촌인 ‘건학’과 ‘부럭이’(부락이)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여우목 성지는 소백산맥이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북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잡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 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고 산지를 개간하며 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 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이 충북 청원에서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때 순교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의 가정이 몇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으로 우거해 살았다. 또한 경상도 첫 신자 가정 중의 한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이 1839년 기해박해쯤 이곳 여우목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 서치보 요셉(1791-1840)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이 있는 뒷산)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아들 서인순 시몬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인순 시몬은 경산 모개골에 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익순 요한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가서 서울 절두산에사 백지사 치명을 하였다. 서태순 베드로는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진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음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고성대 베드로 ( ? -1816년)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래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베드로는 부모께 효성을 다하였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아우인 고성운(요셉)과 함께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성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후로는 가끔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곤 하였다. 그러다가 아우와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15년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가 2월 22일경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베드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다른 교우들을 모두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대구에서는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내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대구의 감사는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성대․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며,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순교 후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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