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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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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필 산문 및 기행문 스크랩 (전북 전주)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전동성당
은하수 추천 0 조회 364 16.03.09 08: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전북 전주 전동성당(完州 殿洞聖堂)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호남 최초로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 전북 전주(全北 全州) 소개 」

전통문화도시! 역사의 땅 '천년전주'

전주는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및 완산칠봉 등이 동,남,서방으로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시가지의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방 전주천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천은 시의 남동방 26km의 관촌평야와 경계한 분수령에서 기원하여 시가지의 중심을 남동방에서 북서방으로 관통하고 삼천은 노령산맥 북부를 흐르고 있는 삼진강의 북평 분수령인 임실군 운암면과 안주군 구이면계에서 시작되어 전주시 서부 농경지를 남방에서 북방으로 흐르다가 전주천에서 삼천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흐른다.

또한 소양천은 곰치에서 기원하여 전주시역의 북동 경계를 흘러 전주천과 합류되며 3개의 하천이 전주역의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풍광이 명미하고 산자수명한 녹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206.22㎢, 연평균 기온 13.3℃, 연강수량 1313.1mm, 행정구역은 2구 3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전주 지명의 유래 》

전주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이라 하였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16년(757)부터이다.

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 전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을 빌렸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 자도 실은 온임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백(百)자도 온을 빌어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나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온겨례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 결국 "온 다라"는 온겨레가 온 뜻을 어울러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져 있다.

 

《 전주의 역사 》

송천동 사근 유적과 효자동 봉곡 유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전주 지역에서 인류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마한·백제시대에는 중심지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만경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지대가 발달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중심지로의 성장을 예고되었다.

990년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웠으며, 후백제의 왕도 전주성(견훤성, 지방기념물 제44호)은 승암산에서 기린봉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구릉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고려 성종(983) 때 12목 체제를 실시하였는데, 전주목과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현종(1018)때 5도 양계체제로 개편되면서, 전주권과 나주권이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하여,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분명히 하였다.

전주는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의 수부였고, 한강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던 전주부성은 객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앞쪽으로 서편에 전라감영, 동편에 전주부영이 자리하였었다. 영조10년(1734) 감사 조현명이 전주성을 보수하고 4대문을 다시 쌓았다.

임진왜란 때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중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에 보관하였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탔으나 전주사고분만은 오희길, 손홍록, 안의 등에 의해 실록과 태조어진을 지킬 수 있었다.

전주는 호남 제일의 곡창지대 수부로 물산이 풍부하여, 호수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였고, 인구수는 한양,평양,의주,충주에 이어 5번째로 큰 지역이었다.

조선의 문화예술을 선도한 예향의 도시 전주는 조선후기 대사습놀이가 열렸던 소리의 고장이며, 음식문호가 발전한 맛의 고장이다. 한지의 본가이며,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한양과 함께 출판문화를 주도했던 기록의 도시였다.

임진왜란(1592) 때 전주는 왜군이 들어오는 두 길목 웅치와 이치에서 전주성을 지켰으며, 정유재란(1597)때는 진주성이 함락되지만, 왜란 초 전주성과 호남수호는 7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된 우국충절의 도시였다.

 

【 일 정 표 】2015년 5월 10일(일)-11일(월) 1박2일

                             ◈ 첫째날(5/10) 완주 탐방 : 화암사-위봉사-위봉산성-송광사

                             ◈ 둘째날(5/11) 전주 탐방 :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객사(풍패지관)-전주향교-만고사&남고산성

 

이번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완주군에서의 일정은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어머니의 품 같은 명산! 모악산 등은 이미 일반산행과 금남정맥 종주 산행 등으로 몇 차례 산행을 실시하였으므로, 완주의 3대 명찰인 화암사, 위봉사, 송광사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산성과는 달리 유사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위봉산 고개에 자리한 위봉산성을 탐방하였다.

전주에서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 문화재들인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호남지방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전주 전동성당,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주향교, 그리고 남고산성과 남고사를 탐방하는 여행이었다.

 

전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5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전주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 풍남문(豊南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전동성당(殿洞聖堂)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경기전(慶基殿)

조선시대의 객사! 풍패지관(豊沛之館)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하는 지방 교육기관! 전주향교(全州鄕校)

 

『 전주 전동성당(全州 殿洞聖堂) 』

*사적 제288호(1981년09월25일 지정)

*면적:679㎡

*소재지: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전동)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했던 풍남문 밖에 세워진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전주시 안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호남 전체에서 최초로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사용해 지은 건물은 겉모습이 서울의 명동성당과 비슷하며,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영화의 촬영지나 결혼식 장소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본당의 수호 성인은 성 프란치스코 하바에르이다.

1937년에서 1957년까지 천주교 전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었다.

 

                      ▲ 전주 전동성당 종탑

 

원래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풍남문 밖으로 1791년 신해박해 때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르(1759~1791)를 비롯한 그의 외종형 권상연 야고보(1751~1791),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 유관검(1768~1801)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 프란치스코(1764~1801), 김유산 토마스(1760~1801), 이우집(1761~1801) 등이 교수형을 당한 호남지역의 많은 카톨릭 신자가 순교한 자리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개항지가 아니었던 전주시에도 선교사가 들어왔으며, 1891년에는 전주성당(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는 신자가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인 대승리, 고산 되재, 천호동, 배재 등지에 밀집해 있었으나,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 공사가 착공되었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공사가 마무리되었고,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931년에 완공이 되었다. 그 해 6월18일 대구대목구의 드망즈 교구장을 주례로 하여 축성식을 가졌다.

1937년에는 대구대목구에서 전주지목구가 분리되면서 주교좌ㅏ 성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첫 교구장인 김양홍 신부가 착좌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주교좌 성당으로의 역할을 하다가 1957년 중앙성당으로 주교좌가 옮겨감으로써 다시 평범한 성당으로 돌아왔으나, 이후로도 계속 전주지역의 천주교 성지 중 하나로써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가 성당에서 몇 차례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임신부 및 보좌신부가 경찰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1988년에는 원인 불명의 화재가 일어나 성당의 일부가 전소되는 등의 일도 겪었다.

2009년에는 일부 기독교 교회가 사회 봉사보다는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하는 것에 분노한 20대 청년 2명이 건물 정면에 반기도교적 낙서를 하였다가 붙잡혔다.

 

 

                      ▲ 전주 전동성당 후면

 

호남 지역 치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주춧돌인 화강암은 착공 당시인 1908년에 대한제국을 간접 통치하고 있던 조성통감부가 헐은 전주읍성의 풍납문 인근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하였다.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도 헐린 성벽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명의 채석장과 송암산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면의 채석장과 송암산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 전동성당 내부 전경

 

전주교구의 남전주지구에 속해있으며, 완산구 전동,교동,경원동,풍남동,남노송동,동완산동,서완산종, 중앙동, 다가동을 관할하는 교회구의 중심 성당이다. 교회구를 총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사목하고 있다. 현재 교회구 내에 총7521명의 신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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