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빛이 되자
2020년 6월 21일 / 빌립보서 3:17-20
지난 6월 6일과 13일 10시에 걸쳐 문자를 보내면서 많은 교훈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나의 남은 생애를 이렇게 보내야 하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 ‘○○○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 KBS에서 2004년 9월 4일부터 2005년 8월 28일까지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만든 이순신 장군이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권 준 부사가 이순신을 두고 한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는다.
<영웅이라 이름 하기에도 너무 큰 인간 이순신.... 우리는 그를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왜적을 맞아 전승을 기록한 위대한 군인으로만 그를 기억코자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싸워야 적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원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할 용기가 있을 때.... 백성을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오스카 쉰들러 : 자기 이익을 위해 유대인들을 고용했던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1993년 개봉) 실제로 그는 후반까지 공장의 유대인들과는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고, 나치의 고위층과 더 교류를 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딱히 유대인들이 착하다거나 하는 묘사는 없다. 그보다는 나치가 저지르는 온갖 만행들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쉰들러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 특별히 나치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아는 사람들을 죽게 둘 수 없다’라는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고자 했던 것. 당시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것만 해도 넘치도록 대단한 것이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면서까지 1,100여 명의 사람들을 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 쉰들러는 수용소에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유대인 1명당 게슈타포에게 7마르크를 지불하는 것을 약속하여 그의 비서를 아우슈비츠로 보내 교섭해 많은 인원을 구해냈다. 쉰들러 부부는 아우슈비츠의 수용시설에서 120명의 유대인을 구출했다. 이 사람들은 친위대의 독일석탄광산에서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 <세계 제2차 대전 종전날 밤에 비서였던 이자크 슈텐과의 대화 중 오스카 쉰들러가 절규하면서>
쉰들러 : 더 살릴 수 있었어, 더 살릴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좀 더 구할 수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할 수도...
슈텐 : 사장님 덕분에 천백 명이 살았어요. 보세요.
쉰들러 : 돈을 좀 더 벌었더라면… 난, 난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네. 자넨 상상도 못해. 내가 만약…
슈텐 : 사장님 덕에 많은 후손이 태어날 겁니다.
쉰들러 : 충분하지 못 했어.
슈텐 : 그 이상을 하셨어요.
쉰들러 : 이 차, 괴트가 사줬을 텐데 …. 왜 팔지 않았을까? 열 명은 더 구했을 텐데 …. 열 명, 열 명이나 말이야. 이 뱃지는 두 명... 이건 금이니까 두 명은 구했을 거야. 아니, 적어도, 한 명은 더 구했을 거야. 한 사람...! 한 사람은 더 구했을 거라고 …. 한 명은 더 …. 한 사람을 말이야. 슈텐, 이거 하나로... 더 구할 수 있었는데... 내가 안 한 거야! 내가...!
오스카 쉰들러는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에 가려던 그의 계획은 나치당 당원의 전력 때문에 좌절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의 이민생활도 실패했다. 1958년 독일로 되돌아 왔다. 그는 자기 덕분에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말년을 보내다가 1974년 사망했다. 그리고 유해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시온산 골짜기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다.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이스라엘에 묻어달라는 고인의 유지에 따른 것으로 여전히 수많은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그의 삶을 기리고 있다.
쉰들러의 묘비 / ‘오스카 쉰들러, 박해받은 유대인 1,200명의 잊지 못할 생명의 은인’
쉰들러 덕분에 목숨을 구한 ‘쉰들러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합하면 모두 6,000명에 이른다. 이에 감사하기 위해 1962년 이스라엘 정부는 쉰들러를 예루살렘으로 초청하여 예루살렘 교외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의 동산 야드 바셈 경에 ‘열방 의인들의 거리’에 기념식수를 하도록 했다. 1965년 11월 5일에는 독일 정부가 그에게 제1등 공로훈장을 수요했다. 2008년 4월 10일에는 쉰들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에서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그 우표에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오스카 쉰들러의 노력으로 생존한 유대인들과 그 후손, 당시 생존했던 에밀리 쉰들러 여사 등이 이스라엘의 쉰들러 묘지에 참배하는 모습이 나온다. 즉 당시 실제로 생존한 본인들이 참배하는 것을 찍은 것이다. 특히 쉰들러의 묘에 장미꽃을 헌화하는 이는 바로 극중에서 쉰들러 역을 맡은 배우 리암 니슨.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아카데미 상 12개 부문에 올랐는데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편집상, 미술상, 작곡상의 7부문을 수상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대하는 독일인의 자세다. 독일인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참혹한 역사일 것이다. 하지만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지금도 철저한 역사 교육을 통해 '나치'를 스스로 경계하는 독일이라는 나라는 <쉰들러 리스트>를 두고 유대인 학살을 공론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1998년 독일 대통령의 이름으로 스필버그 감독에게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독일 최고의 명예인 십자훈장을 수여한다. 조상들의 잘못된 만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독일인들의 자세는 유럽연합 공동체에서 살아가고자하는 몸부림일지 모른다. 그보다 오스카 쉰들러의 자랑스러운 모습도 있었음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찬송가 213장을 부르며 헌신의 다짐을 하였으면 한다. ❶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❷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하소서 ❸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진리 말씀만 전파하게 하소서 ❹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❺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아멘
후일에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순신 장군이나 오스카 쉰들러처럼 그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았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빌립보서 3:17-20
20200621나를 본받으라.hwp
빌 3:17-20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생활을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18) 내가 이처럼 전에도 여러 번 당부한 일을 지금 다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19)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들은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일에만 마음을 씁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고전 4:15-17 / 교사는 여러 명이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단 한 사람이듯이 비록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1만 명이 넘는다고 해도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새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나뿐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16) 그러므로 나를 본받고 내가 행한 대로 따르십시오. 17) 내가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알려 여러분을 돕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입니다. 또한 주님 안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진 내 아들입니다. 그는 내가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고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줄 것입니다.
고전 10:33-11:1 /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바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 삶의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었기에 우리 또한 바울을 본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어린 상태의 사람에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면 너무 높고 멀게 느껴져서 따라갈 수 없다고 하며 포기할 수도 있다. 먼저 된 사람을 본받는 것이 훨씬 쉽다. ‘이 분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본받으라고 한 것이다. 그리하면 결국은 그리스도를 본받게 될 것이다. 앞서가는 양의 뒷다리를 보면서 양들이 따르듯이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다 보면 예수님께로 안내되고, 우리를 닮아가다 보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 그런 중간 모델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식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모습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성품이 변하고 그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삶이 경건의 훈련을 통해 변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가 강조한 바를 보면 더욱 이해하게 될 것이다.
벧전 2:21 /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아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사도 바울도 사랑스러운 제자 디도와 디모데에게 권고한 말은 늘 마음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딛 2:7 /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대가 진리를 사랑하고 모든 일을 진지하게 수행해 나간다는 것을 그들이 분명히 알도록 행동하시오.
딤전 4:6-12 / 이러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 주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따르는 믿음의 말씀과 건전한 가르침으로 성장하여 보다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7) 공허한 이론과 저속한 신화나 전설을 가지고 논쟁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오. 그대의 시간과 힘을 영적인 성장을 훈련하는 데 사용하시오. 8) 육체의 훈련도 좋지만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생활 태도를 몸에 익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시오. 이것은 이 땅위의 생활뿐 아니라 오는 세상의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9-10)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할 이 진리야말로 참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특히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분명히 가르치고 명령하시오. 12)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이게 하지 마시오. 오히려 그들에게 모범이 되시오. 말과 생활로 모범을 보여 그들이 따르게 하고 그대의 사랑과 믿음과 순결한 사상으로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시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비슷한 권면을 하였다.
고전 11:1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엡 5:1 / 사랑받는 아이가 그의 아버지를 닮는 것같이 여러분도 모든 일에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십시오.
사도 바울은 어느 교회 성도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닮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늘 교훈하였다. 성도라면 그리스도를 닮고 본받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결국 성결(성화)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닮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닮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智性)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나님의 뜻과 구원 계획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것에 비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을 얼마나 닮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얼마나 닮아야 하는가? 아니 닮으려고 노력이나 했는가 말이다.
대답을 요구하기보다는 이제부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노력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로우심, 진리에 대하여 보여주신 단호함, 영혼에 대한 구원의 열정, 교회에 대한 사랑, 복음에 대한 헌신,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닮도록 하자.
예수님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다니셨다. 제대로 주무시지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일깨우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동기와 목표와 소원도 닮아야 한다.
혹자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기에 그렇게 최선을 다하셨다고 말을 하지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 26:39)라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히 5:7(현대어 성경) /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위에 계실 때 위대한 성업을 다 이루기 전에 너무 일찍 십자가의 죽음을 맞지 않도록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께 신음과 눈물로 기도하고 탄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게 순종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 김석균 작사 작곡 나의 남은 생애는 / 나의 남은 생애는 복음의 편지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섬김의 향유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주님의 기쁨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사랑의 샘물되어 살리라 일년을 살지 한달을 살지 모를 나의 남은 생에 주님이 주신 사랑 주님이 주신 은혜 빛을 갚으며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은혜의 통로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축복의 통로되어 살리라 일년을 살지 한달을 살지 모를 나의 남은 생애 범사에 감사하며 쉼없이 기도하며 주님 뜻대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하늘에 속한 자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행복한 전도자로 살리라
1.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자.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이것은 굉장히 담대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전 4:16 / 그러므로 나를 본받고 내가 행한 대로 따르십시오.
사도 바울은 완전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좀 추상적이고 큰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사도들이 있고, 우리 앞서 예수님과 교제해본 경험이 있고, 우리 앞서 성결을 충실하게 이루었던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영적 가이드와 같은 분들이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분들의 안내를 잘 받고, 그분들의 뒤를 잘 따르며, 그분들을 본받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고 지혜로운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본이 되는 분들이다. 우리는 그분들을 유의하여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고 하였다.
먼저는 사도들의 말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들이 전하여준 바른 말, 바른 교훈, 바른 교리, 바른 신학, 바른 신앙고백을 본받아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 1:13). 사도들이 전하여준 바른 말 곧 사도적 교훈을 본받아 지켜야 한다. 사도들이 전하여준 바른 말,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 중에 우선적이어야 한다.
또한 사도들과 신앙의 선진들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고 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예배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으며, 어떻게 성찬을 시행했고, 가정생활은 어떻게 했고, 자녀 양육은 어떻게 했고, 어떻게 찬송했고,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보고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결말이 얼마나 복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보고 저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요삼 1:11 /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는 디오드레베가 저지르는 이 같은 악한 일을 본받지 마십시오. 오로지 선한 일만을 본받아 따르십시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만 악한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멀리 떠난 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은 잘 따라하는 반면 선한 것은 잘 따라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로서는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선한 것을 본받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우리는 사도들을 본받고, 교회 역사 가운데에서 본이 될 만한 경건한 분들을 본받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그들의 바른 말, 바른 신앙고백, 바른 예배전통, 바른 교회 정치, 바른 기도생활, 바른 가정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 역사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본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것을 본받는 개인과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를 이루는 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2. 그대로 행하는 것을 보이자(17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욱더 친밀한 분으로 계시기를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그냥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고 구원을 받고 성화(聖化)를 이루고 천국으로 가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화는 교회 역사 가운데에서 계속 되어야 할 은혜의 고리와도 같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의 공동체성, 성화의 역사성을 의미한다.
우리 개인의 성화만 이루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각 가정에 경건한 부모님들이 계시다면, 그 부모의 성화의 꽃과 열매는 그들을 본받아서 같은 성화를 이루는 자녀들을 산출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고 경건하게 사는 본을 보이면, 우리에게서 자라나는 믿음의 자손들이 우리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좋은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이자 열매이다. 나 자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런 은혜의 연결 고리가 끊어질까 두려워하고 염려하였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하였다(18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깃발은 꽂아놓았지만 자기를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만 위하고, 땅의 일만 생각하고,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은 적고, 신앙의 선진들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좁은 길로 걸어가는 순례자도 찾기가 어렵다. 그럴지라도 우리 모두는 끊임없는 경건한 순례자로서 좁은 길을 걸으며 주 안에서 기뻐하며, 항상 선을 좇고, 이를 위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고 이렇게 살게 된 것을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나 자신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큼 닮았는지를 돌아보자. 몇 %나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말씀에 실천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100이라면 우리는 몇 %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을까? 지나간 과거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문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우리 모두 경건한 손에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자.
히 12:1-3 /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3) 만일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 사도 바울의 철저한 모습을 본받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성공 비결이 있다. 어떤 이들은 남다른 능력, 어떤 이들은 남다른 환경, 어떤 이들은 남다른 노력 그리고 어떤 이들은 남다른 기회가 성공 비결이라 말한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성공 비결 하나가 있다. 바로 철저함이다.
철저함이란 말은 한자로 ‘뚫을 철(徹) 바닥 저(底)’를 쓴다. 바닥까지 파헤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행할 때 대충하는 것이 아니고, 끝을 볼 때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했다. ‘속속들이 꿰뚫거나 미치어 부족함이나 빈틈이 없음’
■ 판소리 명인 고 박동진 장로는 국악계의 거목이었다. 그가 국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 철저함 때문이었다. 특히 판소리 인생 70년 동안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 2시간씩 새벽 소리 연습을 했다. 타계하기 얼마 전까지도 온 몸에 땀이 흥건하도록 새벽 소리연습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를 위해서라면 예수 믿기 전에도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철저한 사람들이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는다. 철저하게 준비한다. 철저하게 추진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관리한다. 이런 철저함으로 끝내 성공을 이루어낸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철저함이 필요하다. 대충해서는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해야 한다. 자신에게도 철저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과 세상을 행해서도 철저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신앙생활 성공의 결정적인 비결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철저함이다.
1. 철저한 회개
바울의 회개 사건은 사도행전 9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울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청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갔다. 자기가 다메섹에 가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회개하기 이전 사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앞장을 섰다.
행 9:1-5 / [사울의 개종] 한편 사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다 잡아 죽일 작정으로 살기가 등등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을 찾아갔다. 2) 그는 다메섹에 가서 그리스도인이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올 테니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써달라고 요구하였다. 3) 사울이 이 용무를 띠고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그를 내리비추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5)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울이 물었다. 그러자 곧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180도 달라졌다.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사울의 전도를 받고 개종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행 9:19-23 / …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신도들과 며칠을 함께 지낸 뒤에 20) 회당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예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전파하자 21)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귀를 의심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닌가? 우리가 알기로는 그가 여기 온 것도 신도들을 붙잡아 고랑을 채워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더 열심으로 전도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23) 얼마 후에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회개 이후 바울은 철저하게 변화되었다. 이제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온 사람이 오히려 예수를 전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앞장서서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앞장서서 예수를 전하게 되었다.
훗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렇게까지 말했다.
딤전 1:15-16 /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연현상은 가역적(可逆的) 현상과 불가역적(不可逆的) 현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는 현상과 원래대로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서 고무줄을 조금 늘였다 놓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가역적 현상). 그런데 고무줄을 길게 잡아 당겨서 늘여놓으면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늘어져 있다(불가역적 현상). 잡초는 겉에 들어난 잎만 자르면 얼마 안가서 다시 자란다(가역적 현상). 그런데 뿌리째 뽑으면 다시는 자라지 못한다(불가역적 현상).
회개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역적 회개가 있고 다른 하나는 불가역적 회개가 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했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그 잘못을 저지른다.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으로 가역적 회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잘못을 깨닫고 결단했다.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해서 짓지 않는다. 불가역적 회개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회개했다. 다시는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변했다. 불가역적 회개를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고후 5:17)라고 하였다. 완전히 새롭게 피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예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회개하자. 어설프게 잡초 잎사귀만 자르지 말고 철저하게 그 뿌리까지 뽑자. 한번 회개하고 돌아섰으면 다시는 되돌아가지 말자.
2. 철저한 믿음
바울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나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기본 태도를 정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철저히 회개한 후 자신의 주변을 정리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다 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연마해 왔던 학문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자신이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것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정성을 다해 맺어왔던 모든 인간관계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오물처럼 다 버렸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앞세우게 된 것이다.
3. 철저한 헌신
바울은 이렇게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면서 자신을 철저히 헌신하였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다. 제1차 전도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약 2,240km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제2차 전도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km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제3차 전도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약 5,000km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후 11:23-29 /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합니까? 나는 그들보다 더 오래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이렇게 자랑하고 있는 내가 정신이 나간 사람일까요? 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수없이 채찍으로 맞았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24) 유대인에게 서른아홉 번씩 맞는 태형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습니다. 25)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그리고 밤낮 하루를 바다 위에서 표류한 일도 한번 있습니다. 26) 여러 번 길고 어려운 여행을 하면서 강이 범람하고, 강도를 만나고, 내 동족인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박해 등으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여러 동네에서 폭도들에게 곤욕을 겪고 광야와 사나운 바다 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27) 피곤에 지치고 고통에 시달려 잠 못 이루는 밤을 수없이 지냈습니다. 주리고 목말랐으며 먹을 것 없이 지낸 날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몸에 걸칠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었던 일도 있습니다. 28) 이런 일들 외에도 나는 여러 교회 일로 해서 늘 근심해 왔습니다. 29)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 내 마음이 슬프지 않겠습니까? 넘어진 사람이 있는데 어찌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으니 어찌 그 상처를 입힌 사람에 대해서 격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헌신이라는 말은 한자로 ‘드릴 헌(獻)에 몸 신(身)’으로 표기한다. 여기서 헌(獻)자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재미있다. 솥을 의미하는 ‘헌’鬳)과 개 ‘견’(犬)이 합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옛날에 개고기를 솥에 담아서 종묘에 바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니까 헌신이라는 말은 마치 ‘개를 잡아서 솥에 담아 드리듯이 나를 솥에 담아서 드린다’는 뜻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헌신했다. 자신의 모든 것 곧 생명, 시간, 물질, 마음, 몸까지 다 주님께 드렸다.
그렇다. 헌신이란 하나님께 나 즉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건강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귀한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가 쌓아놓은 명예, 권력, 지식 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절대 헌신]이라는 책에서 ‘헌신이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은 늘 ‘나는 하나님의 손에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신다’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한 끼의 식사를 자기가 먹지 않고 예수님께 드렸을 때에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심으로 그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5,000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듯이 바울이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었다.
그렇다. 헌신이란 나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권능을 주심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절대 헌신이라는 말을 썼다. 철저한 헌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옷을 비유로 들었다. 내가 입은 옷은 나를 위해 쓰임 받는 것이다. 그 옷을 내가 누구와 지금 함께 입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한다면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께서만 쓰시도록 해야 한다. 이럴 때 ‘절대 헌신, 철저한 헌신’이라는 말을 쓴다.
바울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철저했다. 자신에게 철저했다. 그리고 주께서 맡기신 일에 철저했다. 특별히 그는 신앙생활에 철저했다. 우선 철저한 회개를 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 회개를 했다. 다음으로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주님께 맡겼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나아갔다. 그리고 철저한 헌신을 실천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렸다. 하나님을 위해 소중히 쓰임 받았다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바울의 본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고, 내 자신에게 철저하고, 그리고 맡기신 일에 철저해야 하겠다.
■ 삼선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서형선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라는 시이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행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비록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나에게 바라시던 그 모든 것을 주셨사오니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 바울의 영적 생활의 특색(The Point of Spiritual Life)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릇’(행 9:15)인 바울은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로서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기록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진리를 분명하게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그의 서신들은 교회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담은 영적 실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바울은 탁월한 선교사요, 신학자요, 목회자요, 순교자이며, 바울의 인간과 사상은 기독교의 근본이요 초석이 된다.
▶ 그의 생활의 특색으로서는
① 온유와 겸손(엡 3:8, 고전 15:9, 딤전 1:15)
② 감사와 감격(딤전 1:12, 살전 5:18, 엡 5:20)
③ 기쁨(살전 5:16, 빌 4:4, 빌 3:1, 고후 6:10, 고후 7:4)
④ 자족(빌 4:10-12)
⑤ 족한 은혜(고후 12:7-10, 롬 8:28)
⑥ 확신(딤후 1:12, 롬 8:38-39, 빌 4:13)
⑦ 용기(행 2장, 22장, 행 24:25)
⑧ 인내(고전 3:1-2)
⑨ 관용(빌 1:15-18)
⑩ 사랑(살전 2:8, 빌 2:17-18, 13:34-35)
⑪ 기도의 사람(행 9:11, 행 20:36-37, 21장, 22:17, 엡 3:14-19)으로 그는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였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였다.
바울은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일생 목표가 그리스도를 좇으려는 의도 아래서 군인과 같이, 경기자와 같이, 농부와 같이 일생을 살므로 생활로도 모범을 보였다.
그의 생활의 특색을 확대경으로 자세히 보자.
1. 온유(溫柔)와 겸손(謙遜, Modesty)
고전 15:9 / 나는 모든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도로서 자기의 평가 아니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볼지라도 바울을 사도가운데 제일 큰 자로 생각할 터인데, 바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바울 자신이 겸손이라는 것을 의식해서 말도 하고 행동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사도요 겸손의 사람이었다.
엡 3:8 / 생각해 보십시오. 나야말로 그런 일을 할만한 자격도 없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내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이방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바울은 자기 자신의 평가를 일반 성도 가운데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사람보다도 더 작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표현 역시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라는 것보다 솔직한 표현이었다고 감히 평가해 본다.
딤전 1:15 /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을 찬양하면서 처음에는 자기는 ‘모든 사도 가운데에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자기는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작다’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그저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다. 그는 나이가 점점 많아가면서 더욱 겸손하여진 모양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바울은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빛을 향해 나가면 갈수록 자신의 죄와 악이 더 밝히 들어남으로 인하여 거룩해지기 위하여 죄 씻음 받기를 원하였고, 죄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간구하였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다가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인 내가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놀라운 복을 받도록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에 합당한 생활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며, 사랑으로 서로 결점을 덮어 주고 서로 참아 주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엡 4:1-2)라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의 삶의 자세와 성도들의 행동지침을 가르치고 있다.
엔드루 머래이는 “겸손! 그것은 진실로 기독교의 최고 최귀의 도덕이다.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지만 그 사랑은 뿌리를 겸손을 피어나는 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의 비결도 결국은 겸손이다.”라고 했다. 겸손해야 할 이유는 ① 우리는 피조물이기 ② 우리는 죄인이기 ③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온유와 겸손으로서 증명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 구속의 원리이다. 예수님의 8복 가운데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고, 바울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이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8),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 이 온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도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온유(溫柔)의 뜻을 국어사전에서는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 헬라어의 원어에 보면 ‘온화함, 온순함, 유순함, 친절함, 겸손함, 인자함, 인애함’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에는 ‘다스려진 인격, 훈련된 인격, 길들여진 인격, 조절된 인격’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누구나 화를 낼 줄 안다. 그러나 온유한 자만이 정당할 때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사람에게 정당하게 화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하였다.
모세 또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고 할 정도로 위대한 종이 될 때까지 스스로 인내하며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먹을 물이 없어 헤맬 때 백성들의 원망소리에 참지 못하고 혈기로 2번 반석을 칠 때 많은 생수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온유한 사람은 끝까지 참아야 한다. 온유의 다른 이음은 인내요, 인내의 형제는 온유이다.
딤후 2:10 / 내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성령충만(말씀·기도·찬송)할 때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며,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 감사와 감격(感謝와 感激)(Thanks & Deep Emotion)
일평생을 주님께 몸 바쳐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봉사한 사도 바울의 깊은 심령 속에는 항상 이 감사·감격의 신앙이 있었다. 항상 즐거워하고, 찬송을 불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쳤다.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이 감격의 신앙 가운데서 ‘1/10,000 혹은 1백 데나리온/1만 달란트’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벧전 1:18)도 요한(요일 3:16)도 이 감사·감격의 신앙이었다. 어거스틴, 루터, 칼뱅, 요한 웨슬레도 일생을 이 감사·감격의 신앙생활이었다.
바울은 언제나 감사와 감격의 마음이 충만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그는 언제나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다.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제일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는 자기의 죄 사함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아 늘 감사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감사와 감격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 김명혁 목사의 설교 바울의 감사와 나의 감사 /
❶ 사도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다(딤전 1:12-16).
14절에 ‘긍휼’이라는 말과 ‘풍성한’ ‘은혜’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풍성하신’ ‘은혜’로 죄인 중의 괴수가 예수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한평생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나는 죄인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까? 나는 죄인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일꾼으로 그리고 사도로 삼으셨을까? 나는 깨어진 질그릇 같은 자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고 지금도 증인으로 사용하실까?” 바울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중얼거림과 울음을 막달라 마리아가 했고, 한국교회의 아버지이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께서 평생토록 하셨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전라도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평생 새벽마다 강대상을 붙잡고 울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라고 부르짖곤 했다고 한다.
❷ 사도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귀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을 만들어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다.
빌 1:3-5 /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살전 1:2-3 /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자기에게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헌신의 아름다운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빌 3:18).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7-20).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으려고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생각하면서 뜨거운 감사를 드렸고, 감옥에까지 찾아와서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사도 바울을 섬긴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하면서 뜨거운 감사를 드렸다.
롬 16:3-4 /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이 부부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일해 온 나의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4) 목숨을 걸고 나를 살려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과 믿음의 형제들이 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 2:25, 30 / 나는 에바브로디도도 여러분에게 돌려보내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나를 도우라고 여러분이 보내 주었던 그와 나는 친형제처럼 같이 일하고 싸워왔습니다. 30)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내걸고 일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정성을 다해 내 일을 돌봐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자기를 위해서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집을 연 루디아를 생각할 때 마다 뜨거운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즐거워하신다고 말씀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어떤 때는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헵시바’ 즉 ‘나의 기쁨’과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사 62:4).
❸ 사도 바울은 훼방자요 핍박자였던 자기를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을 당하는 수고와 고난의 종으로 만들어주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를 드렸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수고와 고난을 넘치도록 당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 신앙의 선배들도 수고와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이기풍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등 모든 분들이 그 길을 걸어가셨다. 평생 예수에 미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살았던 최권능 목사님(최봉석 목사님)의 수고와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최권능 목사님은 기도와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다. 최권능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수고와 고난을 당했다. 최권능 목사님은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멩이로 맞아서 쓰러지기도 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는데, 그 때에 이런 기도도 했다. “예수님! 소똥에서 익은 콩이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힘이 났으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다시 걸어갔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과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 즉 수고와 고난의 길 그리고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갔다. 지금 우리들은 세상의 안일과 평안과 돈과 명예를 너무 좋아하는데 우리들의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고와 고난의 기쁨을 지니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다. 부끄럽고 고마울 뿐이다.
3. 기쁨(喜悅, Gladness)(<喜樂>)
감사와 감격이 넘친 마음에는 자연히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정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3:1)고 외쳤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늘 충만하였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 하였으며, ‘내가 우리의 모든 환란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라고 말하였다.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기쁨이 충만한 서신은 빌립보서이다. 무서운 환란 가운데서도 늘 기뻐하였다. 과거에도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찬송함으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행 16:25-31).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성경은 기쁨의 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에 가치를 두었다. 특히 자연의 기쁨(희열·만족·즐거움)과 도덕적 기쁨(평화·평온)보다는 영적인 기쁨(신앙의 즐거움·희망의 기쁨·심령상의 마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전도자 사도 바울의 기쁨이 무엇이었나? ❶ 지금까지 바울이 당한 모든 일, 감옥에 갇히는 사건까지도 합력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 ❷ 다른 사람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기쁨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해야만 기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기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도, 다른 사람이 열심히 복음 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기뻐해야 그 사람의 축복이 나에게도 오는 삶을 살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내가 잘되는 것처럼 생각해야 된다. 빌립보서 1:15-18에서 사도 바울은 옥 밖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전도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 ❸ 바울은 감옥에 있음으로 얻은 득(得)과 실(失)을 생각할 때, 얻은 것이 더 많음을 알고 기뻐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다. 무엇이든지 얻기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얻은 것을 생각할 때는 잃은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잃은 것을 생각할 때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얻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잃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얻은 것만 생각했다. 왜일까? 요셉이나 다니엘 나아가서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잃은 것까지도 하나님은 합력해 선을 이루실 줄 믿었기 때문이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누명을 덮어쓰고 죽도로 얻어맞고 감옥에 갇힌다(행 16:24). 겉으로 보기에는 매를 맞아서 건강도 잃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시간을 잃었다. 왜 빌립보에 오게 하셔서 매를 죽도록 맞아야 하는지 ‘???’를 많이 달아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옥사장과 가족이 다 구원을 받았다. 옥에 있던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게 하였다. 감옥에 갇히는 원인을 제공한 귀신들린 여인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루디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왜 성령님께서 가려던 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을 얻게 되었다. 시편 126편 말씀이 바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느껴진다.
시 126:3-5 /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사도 바울의 기쁨은 오직 복음 전파를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갈라디아서 1장의 말씀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은 복음 전파에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있든 밖에 있든, 매를 맞든 맞지 않든, 일이 잘되든 되지 않든,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또 그가 평생 고통으로 여겼던 육체의 가시도 상관이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복음 전파를 위해 유익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고 크게 기뻐할 수 있었다.
예수 믿는 신앙생활은 기쁨과 소망과 축복의 생활이다. 성령의 열매 중 2번째가 희락이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잘되고, 모든 일에 능률이 오르며, 야곱과 요셉과 같이 만사형통하고 복 있는 삶이 된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로 오며, 주 안에 있을 때 오는 축복이다. 참된 평안과 참된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기뻐할 수 있다(신 28:47-48)
② 죄 사함을 받아야 기뻐할 수 있다(행 3:19)
③ 주 안에 거할 때 기뻐할 수 있다(요 15:4) / 우리가 주 안에서 살고, 주님과 매일매일 교통할 때 우리가 그의 생명력을 얻게 되며, 힘 있고, 생기가 있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④ 사랑하면 기뻐할 수가 있다(요 15:4) / 서로 사랑하면서 기쁘게 살아야 하겠다. 신앙생활은 사랑하면서 기쁘게 사는 생활이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던 것이다.
4. 자족(自足, Self Sufficiency)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던 그는 빌립보 교우들이 보낸 선물을 받고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였다.
빌 4:10-17 / 여러분이 나를 다시 도와주게 되어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또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언제나 나를 도우려 애써 왔으면서도 한동안 그렇게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11) 내 처지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몸에 익혔습니다. 13)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여러분이 이처럼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도와주려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15)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내가 복음을 들고 여러분을 처음으로 방문했다가 마게도냐를 떠나서 다른 지방으로 갈 때 재정적 도움을 준 이들은 여러분 빌립보 교회뿐이었습니다. 다른 교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16) 내가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여러분은 물자를 보내 도와주었습니다. 17) 그러니 어찌 내가 여러분의 선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여러분의 친절한 행동으로 오히려 여러분에게 풍성한 보상이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선교 후원을 기뻐하였다.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것과 바울을 향한 사랑의 열매이다.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런데 바울의 기쁨은 결코 그들의 헌금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었다. 물질이 생기고, 사역에 보탬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사람이었다. 풍부할 때에는 풍부한데로, 궁핍할 때에는 궁핍한데로 주의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헌금보다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신앙이 성숙함을 더욱 기뻐하였다.
믿음의 결단이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구체적인 헌신으로 싹이 돋아남을 기뻐하였다. 성도들의 성숙과 헌신, 복음에 합당한 삶의 증거들 때문에 기뻐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물질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면서 그 증거로 자족하는 삶을 증거하였다. 자족하는 삶은 있는 형편을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었다.
자족하는 삶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고 책임지심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이유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도 자족하는 삶은 배워야 한다.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운다는 말은 비법 전수와 같은 말이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이다.
‘도를 텄다’는 단어가 생각난다. 바울은 도가 튼 사람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더불어 내면에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바울이 부럽다. 나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배움일까 되물어본다. 다양한 변화와 인생의 굴곡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세상살이이다. 이 땅에서 성도는 이방인처럼 나그네 인생길을 산다.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다. 가장 좋은 배움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녀답게 살기를 소망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된 뒤에 여러 쓰고 단 경험들을 수없이 겪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자족의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족하는 은혜를 받는 것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자족의 비결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 3장에서 한 말을 기억을 하면서 우리도 그런 은혜를 힘입었으면 한다.
행 3:2-8 /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 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 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8)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5. 족한 은혜(足한 恩惠, Full-Grace)
바울의 육체에는 가시가 있었다.
고후 12:7-10 / 다만 이 말을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놀라운 경험 때문에 교만해질까봐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병은 사단의 사자가 되어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8) 나는 그 병에서 회복되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9)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마. 네게 내리는 은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사람에게 가장 잘 나타난다.' 이제 나는 내 약한 것을 기쁘게 자랑합니다. 나의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10)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시의 정체가 무엇이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가시로 인한 그의 고통은 계속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면서 그러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이유는 그가 겸손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신앙을 통하여 위로부터 오는 족한 은혜를 받고, 약할 때에 강하게 되는 비결을 체득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뿐 아니고, 약함을 통하여 강하게 되는 족한 은혜까지 받자.
6. 확신(確信, Conviction)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가운데 ‘확신’이라는 말을 발견하게 된다.
딤후 1:12 / 내가 여기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고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이 내가 바친 모든 것을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정개역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롬 8:38-39 /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39)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곧 만능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빌 1:6 / 여러분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 일을 은혜로이 성장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완성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케 하신 이는 그들 스스로 한 것도 아니요, 바울이 한 것도 아니다. 그럼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에 바울은 감히 ‘나는 확신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사하는 땅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마른 지팡이를 홍해를 향하여 내어 밀었던 것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 바다를 갈랐던 것이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갔던 것도 그가 믿는 하나님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요일 5:14-15 /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15)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에 반드시 응답해주시리라는 것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요구가 무엇이든 응답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하고 우리의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그분과 밀접하게 동행할 필요가 있다.
7. 용기(勇氣, Courage / 빌립보서 1:12-21)
고래로부터 동양 사람들은 세 가지의 덕을 가르쳐 왔고 그렇게 배우며, 그렇게 힘써오고 있다. 이 세 가지의 덕이란 지(智), 인(仁), 용(勇)을 두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용기는 더 높은 차원에서의 종교적인 용기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확신에 근거한 신앙의 용기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참된 용기를 의미한다.
■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 개혁을 할 때에 많은 적수가 있었다. 교황청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 정치적으로 많은 원수가 있었다. 정말 외롭게 종교 개혁을 이루어 나가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것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인 고민이었다. 이것이 그를 무척 괴롭혔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마틴 루터는 유달리 마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마귀를 표현할 때 까만 마귀, 흰 마귀로 말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마귀 이야기와 마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것이 그의 기록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마틴 루터의 마음속에서 이 마귀가 말을 하였다. "네가 그렇게 종교 개혁을 하겠다고 계속 나서면 나는 너의 과거, 너의 허물, 너의 죄를 만방에 폭로하겠다."며 협박을 하였다. 그럴 때면 마틴 루터는 요한1서 1:7절에 근거하여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나는 마귀 네가 말했듯이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의롭다 하셨느니라.’고 대답함으로 마귀를 이기며 종교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대담한 사람이 되었다.
이 용기는 자기 의의 용기도 아니요, 도덕적 용기도 아니며, 물론 경제나 지식, 사회적인 용기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용기이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구속에서 얻어지는 절대적, 절대 은총적 용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용기! 그러기에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서 두려움 없는 확신 속에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빌립보서 1:12-21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진정한 용기를 보게 된다. 20절 말씀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 ‘담대하다’는 헬라로 ‘팔레시아’라고 하는데 이는 담력 또는 용기라고 하여 담대함과 용기를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다.
영어 번역에는 이것을 풀 커리지(full courage)라고 한다. 대단히 충만한 용기, 아주 꽉 찬 튼튼한 용기를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들 번역을 한다.
이 모든 현상, 나타난 사건의 그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큰 사역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 신비로운 뜻을 아는 사람은 항상 담대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었다. ‘나의 당한 일, 나의 매임’이란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아주 억울하게 붙들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해를 거듭하며 처박혀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몸으로 마음껏 전도하고 싶으나 길은 막혔다. 앞날의 운명을 예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마음은 답답하고 육체는 괴롭다. 그러나 바울은 깊이 생각하였다. 지금의 이 모두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놀라운 일들이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위대 안에 있는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요즈음 말로 VIP이다. 바울이 갇힌 곳이 로마 황실에 속한 감옥이었기 때문에 생각이 깊은 고관들이 밤에나 조용한 시간에 찾아와서는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것을 기회로 바울은 전도하였다.
그 결과 이것이 씨가 되고 뿌리가 되어 마침내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된다. 아마 바울이 이것까지 알았더라면 춤을 추고도 남았을 것이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될 무렵 숫자적으로 보아서는 기독교인이 9%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관들이 먼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기독교 국가로 선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결과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시위대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나 복음을 전한 데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상과 같은 확신을 통하여 그의 삶의 특징이 용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성품이었으나 그에게는 용기 즉 담대함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언제나 담대히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용감히 싸웠다.
8. 인내(忍耐, Patience)
인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겸손, 관용, 견딤 증 다양한 단어들로 표현되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과 관련이 있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성숙함의 열매이기도 하다. 신약에서의 인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은 자기를 대하여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인내를 생각하면서 자신도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본받으려고 애를 썼다. 하나님께서 분노와 심판을 참으신다. 인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의 공의로운 분노와 심판을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참으심으로 죄인이 회개하여 진노를 당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신다(롬 2:4; 9:22). 성도들로서의 인내는 시련과 박해의 맥락에서 언급될 때가 많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최후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구원을 좌절시키려는 악한 세력들의 방해가 있기에 믿는 이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한걸음 나아가 바울은 말할 수 없는 인내로서 후배들을 꾸준히 지도하였다. 모든 덕 가운데 이 인내의 덕이 성도들 뿐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인내의 도를 가르쳤다. 모든 사람들과 교우들을 대하여 인내하였던 사도 바울은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인내는 시간적 제한이 없다. 다만 ‘나중까지, 끝까지, 주님 만날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고전 3:1-2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인지를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어떻게 성령이 충만하여 올바르게 사는 그리스도인을 대하듯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였습니다.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은 소화시켜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젖을 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롬 12:12 /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계획하고 계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십시오. 환난 가운데서도 참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롬 5:2-5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가장 높은 특권을 가진 자리에 오르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모든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와 곤경에 처했을 때도 그것들이 가져다 줄 좋은 결과를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고 4) 인내는 강인함을 길러 주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5) 그렇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속에 채워 주시는 까닭에 우리는 이 따뜻한 사랑을 어디서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등장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인내는 믿음의 뿌리를 한층 깊게 한다. 인내하기 위해선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인내가 인간의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덕목이 아님을 성경은 가르친다.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인내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언급된 것처럼, 고통 중에 인내하기 위해선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 가장 기본적인 ‘씨 뿌리는 자와 밭의 비유’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하셨다.
기도하여 응답받는 경우에도 많은 인내가 필요함을 예수님께서 언급하심과 같이 바울은 매사에 인내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눅 18:1, 8 /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신속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 또한 인생은 인간관계가 행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아픈 상처와 불행의 이유와 원인이 되기도 한다. Eland 기업의 박성수 사장은 회사 내에서 똑똑하지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3명의 부하 직원에 대해서 해고를 생각할 정도로 여러 번 심각한 고민을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계속 신뢰하고 잘 대우해 주면서 오래 참았더니 그들이 결국 변화되어 나중에 회사에 중요한 인재들이 되었다. 어느 날 기도 중 그들을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3명 중에 누가 가장 많이 변했습니까?’물었더니 ‘바로 네 자신이다’라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 대해서 오래 참는 과정에서 가장 변화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고 말한다.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찾아오는 인내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 비전을 가지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끝까지 인내하자. 인내는 우리에게 연단을 가져오고 소망을 이루어준다. 위대한 성과는 힘이 아닌 인내의 산물이다. 수도거성(水到渠成)이라는 말이 있다. 물이 흐르면 자연히 도랑이 생긴다는 뜻으로 조건이 갖춰지면 일은 자연히 성사된다는 의미이다. 물이 흐르면 도랑을 이루고, 외가 익으면 꼭지가 떨어진다. 시기가 무르익고 조건이 갖춰지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때가 아닌데 억지로 하려 든다면 이룰 수도 없고, 인생이 덩달아 피곤해진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남을 원망 하지 않고, 천명을 아는 사람은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9. 관용(寬容, Magnanimity)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소한 일로 서로 분쟁하거나 분열의 행동을 언제나 삼가야 하며, 서로 화목을 도모해야 하겠으며, 피차 협력할 줄 아는 관용의 정신이 매우 필요하다.
빌 1:15-18 /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는 데 대한 질투심으로 덩달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두려움 없는 전도자라는 명성을 듣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6-17)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쓰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애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해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속상해 하고 질투하게 만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그들의 동기야 어떻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은 사실이니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관용의 정신은 복음을 전해야 할 우리 모두의 관용이 되어야 한다.
빌 4:4-5 /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자기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도 이런 말씀을 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서로 용서하라고 했다. 마태복음 18:35과 에베소서 4:32, 골로새서 3:13, 베드로전서 3:8-9, 마태복음 5:44에서의 교훈은 한마디로 서로 용서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23∼35절)는 믿는 사람들이 형제간에 서로 용서해 주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지킬 도리요, 의무라는 것으로. 1만 달란트를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1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용서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10. 사랑(愛, Love)
우리는 흔히 바울을 ‘믿음의 사도’, 베드로를 ‘소망의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얼마나 교우들을 사랑했는지 ‘사랑의 사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살전 2:8 / 우리는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하였습니다.
빌 2:17-18 / 여러분의 믿음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 내 피를 그 위에 쏟아부으라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골고루 이 기쁨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18)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바울은 예수님의 새 계명 곧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오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 34-35).고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실제 생활이 그러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의 기록을 남겼다. 정말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었다. 사도 바울은 실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자’이었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사랑의 실천자가 아니었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을 쓸 수 있었겠는가?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며 가장 큰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도 가장 큰 덕목은 ‘사랑’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또 말씀하셨다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도 바울은 롬13:8-10에서 이렇게 썼다.
롬 8:8-10 / 그러므로 아직도 옛날의 죄에 물든 자아의 지배를 받아 육신의 욕망대로 따라가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사정이 다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의 여러분 속에 계시기만 하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육신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용서해 주셨으므로 여러분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완성되지 않는다. 그 어떤 계명의 실천도 사랑이 없이 행하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어진다.
어떤 사람의 ‘사랑이 없으면’이란 글 한 토막을 소개한다.
사랑이 없는 의무감은 무뚝뚝하게 만듭니다. / 사랑이 없는 책임감은 냉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교활하게 만듭니다. /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령은 비열하게 만듭니다. /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힘은 난폭하게 만듭니다. / 사랑이 없는 명예는 오만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부는 탐욕스럽게 만듭니다. /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미련한 것입니다.
11. 기도(祈禱, Prayer)
위에서 설명한 사도 바울의 삶의 특색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행 9:11 / 주님이 말씀하셨다.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라. 그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 와서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
과거에도 많은 기도를 했겠지만 그는 회개하자마자 과거보다 더 많은 기도를 했을 것이다.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을 무슨 기도를 그렇게 했는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추측도 할 수 있다.
행 9:12 / 내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손을 얹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행 9:15 /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하여라. 사울은 내 복음을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그 왕들에게 전파시키고자 내가 택한 그릇이다.
행 9:16 / 그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겠다.'
사도행전에는 그의 기도한 이야기를 종종 읽을 수가 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고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다. 기도와 찬송은 대단히 중요하다.
에베소서 1:16-19에서는 사도 바울의 기도의 실례가 나온다.
엡 1:16-19 /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려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또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분명히 알게 해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18) 나는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장차 나누어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19) 또 믿음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한 것을 살펴보면 말로 할 것은 말로 가르치고 힘과 수고로 할 것은 최선의 힘을 기울여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말과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기도로서 모든 사역을 감당해 나갔다.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며, 우리 생활의 목표이다.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기도는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며 성화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상 11가지의 사도 바울의 영적 생활의 특색을 검토하여 보았는바 이는 ‘성령의 열매’로 ① 사랑, ② 희락, ③ 화평, ④ 인내, ⑤ 자비, ⑥ 양선, ⑦ 충성, ⑧ 온유, ⑨ 절제의 열매가 중요함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며,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겸손’을 실천한 것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자연히 겸손하게 마련인데 결국 덕이 있고 겸손하게 되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된다. 또한 감사·감격의 신앙, 기쁨, 지족, 족한 은혜, 확신, 용기, 인내, 관용, 사랑, 기도의 사람으로 우리가 실제 실생활에서 본받을 것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러므로 늘 성령충만한 삶, 철저한 그리스도인! 우리도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다.
결 론 / 사도 바울의 유언(딤후 4:16-18)
이 편지서는 그 위대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준 마지막 유언과 증언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바울은 이 편지를 개인적으로는 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교회에게 써 보냈다. 자신의 마지막이 임박한 것을 안 그는 자기 자신의 모본을 통하여 젊은 동역자의 믿음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는 디모데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그의 시대 이후에 교회에 들어오게 될 이단들에 대하여 경고를 발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영감된 말씀을 굳게 붙잡고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분께 충성을 다하도록 하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음을 맞기 직전에 쓴 마지막 서신이기에 그의 유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바른 교훈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지라도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행하고 직무를 다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죽음을 예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을 추억했을 것이다. 그는 수없이 매를 맞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옥에 갇히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채찍으로 세 번 맞았으며, 돌로 한 번 맞았다. 세 번 파선당하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 위를 떠다녔다. 또 여행 중에 강도, 동족, 이방인, 도시, 강, 광야 등의 위험을 받기도 했다(고후 11:23-28).
사도 바울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최고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역을 하였으며, 자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고(갈 6:1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신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자신을 관제와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면서 순교의 마음을 다지고 있다. 특별히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관제로 비유하였다. 관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용어로서 레위기나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매일 두 번씩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어있다. 해가 뜰 때와 질 때에 흠 없는 어린 숫양을 잡아서 드렸는데, 이를 화제라고도 하고 상번제라고도 한다. 그때 제물로 사용되는 숫양 위에 포도주를 부어서 드렸는데 이를 관제 또는 전제라고 한다.
신약 성경에 관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빌립보서 2장 17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는 표현이 있다. 즉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포도주를 부듯이,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빌립보의 성도들과 함께 기뻐한다고 하였다.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려짐을 말할 때 우리는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셨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셨다. 창에 옆구리를 찔려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은 온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쏟으신 관제였다.
바울은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였다. 인생은 누구나 마지막 날을 맞게 된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세월을 따라 나날이 쇠해져 가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세월은 화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고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미래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을 잘 준비했기 때문에 믿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본이 되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난 후 30년 동안 산 사도 바울의 인생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❶ 선한 싸움을 싸우다 / 이 말은 위대한 경주를 완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한 싸움을 싸운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했던 수많은 성도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디모데에게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강조하였다. 선한 싸움이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이웃에 대해 사랑하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너무 많은 싸움들을 접하게 된다. 규칙을 무시하고 악한 방법을 사용하며, 상식 이하의 난장판들을 자주 본다. 음모가 횡행하고 속임수가 난무하며 협잡(挾雜)이 판을 친다.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설 자리가 전무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었지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선한 싸움이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대는 것이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는 것이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해 주는 것이다. 로마 병정들이 채찍으로 무지막지하게 쳐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이고, 가룟 유다가 팔아넘기는 신호인 배반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예수님도 선한 싸움을 싸우셨고, 바울도 선한 싸움을 싸웠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안디옥교회에서 믿음의 선배인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온 이방인들이 방문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사회적 문화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바나바도, 다른 사람들도 따라 나갔다. 그러자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다웁게 ‘왜 외식하는가? 왜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피하는가?’라고 책망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수호와 선한 싸움을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비록 돌에 맞고 공포와 핍박에 처하게 될지언정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다.
우리도 선한 싸움을 위해 받게 되는 고통, 환란, 핍박 등으로 인해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시고 승리하셔서 죄인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❷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 개인적으로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는 문구를 쓸 때,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전에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3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면서 두란노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양육했다.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바울은 새로운 비전을 품고 로마로 가기를 원하면서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붙잡기만 하면 결박해 감옥에 가둘 수 있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목숨마저 빼앗을 수 있는 험악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예루살렘 밑에 있는 항구 도시 밀레도로 불러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겠다는 자신의 비전을 밝혔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장로들은 말렸다. 하지만 바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비전을 말하고 난 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모든 사람들이 실컷 울고 서로 바울의 목을 껴안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 말씀과 디모데후서 4:6-8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바울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❸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 /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보물, 재산 등 귀한 것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비밀을 끝까지 지켰다고 하였다. 디모데전서 6:20에서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였다. 곧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키라고 부탁한 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은 바를 포기하지 않고 모든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다. 또 처음 말과 처음 품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참 모습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 이방 선교에 대한 비전을 주신 후로 바울은 흩뜨리지 않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켰다. 바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많이 닮았다.
이에 충성된 일꾼인 바울의 마지막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위한 의의 면류관이 준비돼 있음을 고백하였다.
올림픽 경기는 각 도시를 대표한 선수들이 출전해 기량을 겨룬다. 고대 올림픽에서 2년의 훈련 기간을 거쳐 경기에서 승리하게 되면 월계관을 쓰고 금의환향한다. 당시 전통은 도시의 모든 성문들을 걸어 잠그고 승리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새로운 문을 달았다고 한다. 승리자는 성벽을 돌면서 자신을 위해 만든 문을 찾아 들어서면 준비된 마차를 타고 스타디움으로 향한다. 모든 관중들은 일어나 환호하고 꽃을 뿌리며 환영 의식을 갖는다. 또 승리자가 조각가 앞에 포즈를 취하면 스케치해 곧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다.
어찌 보면 바울은 그런 그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후로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천군천사들과 믿음의 조상들이 참 잘했다고 축하해 주는 팡파르와 축복의 소리를 들으면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 의의 면류관을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면, 믿음을 지킬 때 필요한 것은 의의 면류관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이다.
믿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해 준다면, 의의 면류관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과 다시 오셔서 바울에게 주심과 같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갖게 해 준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배턴을 넘겨준 것처럼,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처럼,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사명을 넘겨준 것처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사명을 넘겨준다. 그리고 오늘날 그 사명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 비록 신앙생활의 환경이 매우 열악하지만, 낙심하지 맙시다. 뿐만 아니라, 그 날에 받을 위로와 격려 그리고 평가와 칭찬 그리고 상급!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완성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온전히 헌신하십니다. 이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만 주어질 것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성도들 모두는 이러한 의식과 각오로 남은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바를 끝까지 수행하며 죽도록 충성하셨듯이, 이제 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은 동일한 각오와 헌신으로 충성스런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150장 : ❶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❷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❸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❹ 주님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에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와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