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기
*9회(1992. 홍진기) *10회(1993.김정희) *12회(1995.이문형)
...................................................................................
(제9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2)
*빈 잔 외 5편* / 홍 진 기
언제나 내 곁에는
빈 잔이 놓여 있다.
가진 것 모두 담아도
차지 않는 이 잔을
단숨에
그대로 들면
은회색 허공이 된다.
언젠가 달빛 한 줄기
이 잔을 다녀가고
아내의 한숨 소리도
가끔은 드나들지만
시대의
증언을 풀면
전쟁같은 물이 고인다.
*낙엽을 쓸며*
혀 끝에 감겨 도는
녹차의 여운 같은
봄처럼 피어오른
여인의 향기 같은
안으로
익는 살내음을
나는 알고 있는가
해마다 이맘 때면
무심히 뜰을 걷다
버릇처럼 쓸쓸하게
낙엽을 쓸지마는
정말로
쓸어야 할 것을
나는 쓸고 있는가
*봄소식*
오밤중에도 내 귀는
열두 폭으로 열려 있었다
일천문을 닫고 사는
모진 세월을 생각하며
떨어도
문틈으로 새는 바람을
막지 않고 있었다
나목이 진저리치다
유령처럼 우는 밤이면
모닥불 사윈 잿빛같은
어둠을 열어제치고
어디쯤
봄이 오는 소리를
내 귀는 듣고 있었다.
*풍경소리*
바람 한 알 건드려도 너는 같이 노래했고
산새 하나 깃을 쳐도 뎅그렁 줄을 골라
속세에
흩어진 정을 온몸으로 말하였다
무섭도록 고요한 날 여운의 실을 뽑아
밤중만 깊어지면 오욕의 귀를 씻고
뎅그렁
달여울에도 후광으로 둘렸다
*아내의 손*
아직도 아내의 손은 땀기가 남아 있다
저승보다 더 시린 이 도시의 막장에서
옹성을
지키는 병사의
이마처럼 끈끈하다
아내의 손가락은 어쩌면 쓸쓸하다
서 돈 짜리 금가락지 들렀다 간 자리에
장난감
흑진주 만한
저승꽃이 피어 있다
*산촌 일기*
한뎃잠에 길들여진
저 자유의 빈 손짓
사는 일 짐이 된다며
소식조차 끊고 사는
누이의
모진 가슴처럼
떨리는 저 매화 가지
양지에 손을 내미는
민들레 속잎에서
포박을 감고 나온
상처들도 참지 못해
밤새워
울던 문풍지
목이 시린 저 청매화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23∼128)
◐홍진기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79년 <현대문학> 자유시 천료
* 1980년 <시조문학> 시조 천료
*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현대시협, 시조시협, 시조작가회원, 경남문협 시조분과위원장, 한국문학회 기획상임이사, 가락문학회장, 창원문협, 함안문협 회장 역임,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
* 창원대학교 평생교육원, 경남문예대학 강사
* 작품집 5권
* 창원시 문화상, 경남예술인상(본상), 경상남도 문화상(문학) 등 수상
..............................................................................................................
(제10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3)
*봄, 아지랑이 외 5편* / 김 정 희
'사람은 하늘이니라'
하늘 말씀 우러르면
언 하늘 맴을 돌던 혼령이 내리시어
아련히 산허리 감도는 도포자락 보이고.
피로 얼룩진 세월
백년도 꿈결이듯
서풍을 마다하고 동풍 따라 나서던
아비의 베잠방이도 먼 들녘에 가물거린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꽃보라로 손짓하며 구름결에 나부끼는 것
공중에 걸린 현수막 '개벽'이라 쓰여 있다.
*망월동 백일홍*
'무쇠를 녹이리라'
'무쇠를 녹이리라'
망월동 무덤가를 달구는 저 불가마
장대비 백날을 쏟아도 불길은 끌 수 없고
천둥번개 내리치던
아수라 지옥의 날
사태진 언덕 위에 불기둥으로 솟아
허공에 빛을 뿌리고 몸을 사룬 혼백들.
내 눈물 땅에 묻고
돌아서는 이 길목
은은히 들려오는 우렁찬 저 종소리
에밀레, 종 치는 나무여 네 울음에 발이 묶인다
*어떤 해일(海溢)*
대학로 은행잎이 재채기하며 쏟아진다
때 아닌 황사(黃砂) 한 떼 한치 앞이 몽롱하고
어디쯤 해일이 이는가 포효하는 파도 소리.
밀물을 거느리고 바람기둥 울러 메고
성큼 다가선 태풍의 눈 언저리에
한마당 어우러진 신명 소용 도는 굿놀이.....
무너지는 산의 소리 귀를 막고 듣는다
비 몰고 오는 바람 회오리 감긴 속을
눈앞에 벼랑을 보며 종일 물에 젖는다
*세한도(歲寒圖) 속에는*
하얗게 언 하늘에 별곡(別曲)이 흐르고 있다
서슬 푸른 창대이듯 서 있는 소나무
그 곁에 휘느러진 노목(老木)
예서체 쓰는 날에.
눈 덮인 바닷가엔 솔빛만이 푸르다
용솟음치는 성난 파도 먹물 풀어 잠재우고
적막이 숨죽인 자리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다만, 우주와 교신하는 외딴집 둥근 창 하나
사람은 뵈지 않고 신명만 넘나드는 곳
깡마른 조선의 혼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아버지*
녹두꽃
진 자리에
일어선 한 줄기 바람
세상을
바꾸려는 뜻
천지를 휩쓸었건만
소나무
휘인 가지에
옹이로 굳어 있다.
*연못에서 만난 바람*
연못으로 갈거나
연꽃 만나러 온 바람같이
꽃진 자리 잎만 남아 수화(手話)를 읊조리는 곳
눈감고 헤아려보는 마음의 보금자리.
그대 말씀 언저리
산울림인가 먼 종소리
진구렁에 발 딛고 발목 빼지 못해도
눈부신 화엄(華嚴)의 날을 꿈꾸며 살라 하네
연꽃에서 만난 사람
옷깃을 스치누나
저문 날 들녘에서 이마 맞대는 인연
꽃인 듯 그림자인 듯 무릎 꿇고 맞으리라.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31∼136)
◐김정희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75년 <시조문학> 천료 등단
* 시조집 :『素心』(1974), 『山여울 . 물여울』(1980), 『빈 잔에 고인 앙금』(1986),『풀꽃은유』(1994), 『녹두꽃 진 자리에』(2002)
* 수필집 :『아픔으로 피는 꽃』(1990), 『차 한잔의 명상』(1999)
* 수상 : 한국시조문학상(1988), 성파시조문학상(1993), 문학의 해 표창(1996), 경남도문화상(1997), 허난설헌 문학상(2000)
* 현재 :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시조문학작가회 경남지부장, 진주여성문학인회회장, 연대 동인
...............................................................................................................
(제12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5)
*그 얼굴 외 5편* / 이 문 형
십 리 산골길에
오두막 한 채
강담 너머 내다보던
나이 잊은 가시버시
이 빠진 누룽지 같은 얼굴
겸연쩍게 웃더라
어쩌다 창 너머로
산을 보다 생각나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구름 봐도 생각나고
길섶의 쑥부쟁이를 봐도
어리어리 그 얼굴
*搖鈴*
쇠녹 떨어지는 목쉰소리를 하는 반벙어리 무지렁이 사내는 구천길 앞소리꾼이 흔들던 그런 요령을 갖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사내는 요령 하나 가슴에 품고 목소리보다 더 고운 요령소리를 내면서 다니고 있었다.
쬐그만 요령소리는 반벙어리 작은 가슴 울리다가,
파문처럼 나무를 잡고 흔들다가,
성큼 강둑 건너 강마을 고샅을 돌고 돌아 마을 사람 죄 새벽잠 깨워 뙤창에 귀대고 엿듣게 하다가,
다시 들을 지나 산을 넘어 아스라이 실낱같은 하늘 길 건너 알 수 없는 어느 문턱까지 닿고 싶었노니,
오늘도 무지렁이 사내는 가슴 속 요령소리를 듣는구나.
*廢家*
1.
바람이
허문 종부담,
살다 버린
거미집.
풀벌레 몇 마리쯤
놀고보면 제격인
삶이란
다 쓸어가고
낡아빠진 지게 하나.
2.
뒤안 감나무는
누가 돌보고
바자 밑 부추밭은
누가 가꾸고 있노.
산들만
빙 둘러앉아
굽어보고 있구나.
*개구리 소리*
땅 속서 三冬 나고 꽈리 하나 가져왔네.
三時 밥 먹는 일과 잠밖에 모르는 만석꾼 영감탱이가 어느 골에 살았었네.
개구리 울음소리 알 턱 없는 무지렁이 영감탱이는 시끄러워 잠 못이루겠다고 家奴시켜 밤새워 무논에 돌멩이를 던지게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