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무서운 게 없던 고등학교 2학년시절, 세상이 다 내 것이었
고, 세상은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감히 큰소리 뻥뻥 치면서, 우리들은 학창시절을 보냈었다.
새벽 6시,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셨다. "덕길아 ! 아 얼른 일어나라. 일어나서 밥먹고 학교가야쓰지
굶고가면 어디 쓰겄냐? " '끄응, 예, 일어나고 있구먼요.'
떠지지 않는 눈 배시시 뜨고, 서둘러 세면장에 가서 세수를 했다.
양치질은 밥 먹은 후에 해야 개운하다는 진리를 알고부터, 식사 후에 양치질을 하였다.
첫차를 타면, 그래도 버스 안은 한가했다.
그런데, 첫차를 놓지고 다음 차를 타면,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고 1학년 때는 일부러 첫차를 탔다. 보기 싫은 선배들 눈치 안 보려고, 일부러 학교를 일등으로 갔다.
그때는 내가 키가 컸었다. 난 가만히 바라보는데도, 선배들은 내가 째려본다라고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것 때문에 어느 날, 밤에 화장실로 끌려가, 안죽을 만큼 맞은적도 있었지만 하하
사실 내 폼이 좀 건들건들 하긴 했었나 보다. 키가 크니까. 허리가 유독 굽어보였었다.
세수를 마치고, 서둘러 밥을 먹었다. 밥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찬물을 말아서 후루룩 마셨다.
찬물에 섞인 더운밥은 다 씹히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진 체, 식도를 타고 스르르 밀려 내려갔다.
한시간이 지나면 위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반복운동으로 말미암아 소화가 될 것이다.
일부는 피와 살로 갈 것이고, 일부는 몸 속 어딘가를 떠돌다,
결국은 자기자리를 찾지 못하고 밖으로 배출되어지겠지.
인생도 어쩌면, 사람의 몸 속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싶다.
자리를 잘 잡은 이들은 성공해서 보란 듯이 살 것이고,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세상을 떠돌다
결국은 지치고, 힘들어하다 병이 생기고, 그러다 술로, 혹은 담배로, 혹은 마약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끝이 나고 말 것이다.
갑작스레 먹은 밥이 온전할 리 없었다. 화장실로 달렸다.
무아의 세상에서 무념 무상의 시간을 가졌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보다.
'앗........시간'이 6시 30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무심한 시계는 벌써 40분을 넘기고 있었다.
'7시 30 분 버스를 타게 되면, 그야말로 지옥일 텐데,' 연신 장 탄식을 하며, 다 체념한 듯
'어머니 밥 더 줘요' 밥 위에 얹은 호박잎에 구수한 된장을 얹고, 거기에 청춘을 싸서 한입 가득 먹었다. 여유 속에 씹히는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잘게 씹힌 밥은 부드럽게 식도로 넘어갔다.
한결 가슴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대문을 나섰다. 어머니는 벌써 상을 치우고, 밭으로 향하셨다.
오른손엔 물 한 병을 왼손엔 호미 한 개 꾹 들고, 총총히 샛길을 따라 밭으로 향하셨다.
어머니의 몸배 바지가, 그날 따라 유난히도 펄렁거렸다.
땡땡이 보라색 물방울 몸배 바지가 아직도 기억저편에서 날 가물가물 손짓하고 있었다.
중학교 들어가는 진입로엔 코스모스가 만발하였다. 붉은 꽃. 하얀 꽃. 분홍 꽃.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꽃이 없었다. 새벽이슬 머금고 탐스럽게 맺힌 예쁜 꽃들 틈으로
아직 피지 못한 꽃망울 서너 개가 빤히 날 바라보았다. 어찌나 망울이 영롱한지 오래오래
바라보고 서있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노래의 가사보다도 더 영롱한 꽃망울에
넋을 잃고 있을 때쯤, 멀리서 버스 한 대가 살살 기어 오고있었다.
창동교 앞에는 학교 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후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기에, 그들이 보내는 가벼운 목례가 으레 당연한 듯, 나 역시
눈짓만 한번 찡긋 해 주었다.
고 3 선배들은, 대부분 자취를 하였기에, 통학을 하는 선배들은 거의 없었다.
이 시간 이 버스 안에서는 가히 우리 고 2학년들이 주름을 잡다시피 하였다.
희뿌연 먼지를 펄펄 날리며 보무도 당당하게 엉금엉금 버스한대가 다가왔다.
다리에 다다른 버스 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단 눈치를 한번 쓰윽 보았다.
'음. 역시 선배들은 없구만'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뒷 칸에 손짓을 했다. '야! 창문열어.
얼른!' 나의 고함소리에 후배녀석은 냉큼 창문을 열었다. '받어! '라는 말과 동시에 나의 가방이
춤을 추었다.
나의 가방은 버스안으로 던져졌고, 이제 내 몸만 타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버스에 조수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그만타라고 한다.
그러면 그 다음 버스 올 때까지 한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어디 그럴 수 있는가? 기어코 타리라.
아랫동네 친구녀석은 조수에게 차비를 던져주며 "난 뒤로 탈게요 말리지 마요 " 라며 뒤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쏜살같이 버스 창문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버스 창문에 몸을 반은 집어넣었는데, 반이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 엉덩이를 사정없이 밀었다. '야 임마 그니까. 좀 살살좀 먹어.
따식. 영차.....영차' 버스 안에 여학생들은 난리가 났다. 반은 포복 절도하고, 반은 어찌 웃어야
우리 남학생들에게 이쁘게 보일까 궁리중인지 연신 입을 손으로 가리고, 호호호, 까르르 웃고 있었다.
세 명이 더 타야했다. 조수는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군대식 훈련을
시켰다. 뒤로 밀착하세요. 밀.....착. 밀.......착. 밀. 이라는 구령소리에 사람들의 엉덩이가
한 뼘씩 뒤로 포개졌다. 착이라는 구령에 사람 한 사람 탈 공간을 만들었다.
가히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었다. 조수가 나에게 말했다.
" 저기 학생 더 이상 못 타니깐 다음 차 타고 와요."
오라이...탁탁." 오라이란 구령에 맞춰. 조수는 신나게 버스 모서리를 탁탁 쳤다.
운전사는 내가 타던 말던 액셀을 밟고있었다. 나는 순간 열이 팍 뼏혔다.
'아........지금 뭐하는거얏. 사람이 타지도 않았는데 출발하면 어떡해요! 내 가방 차에 있당게롱.
난 꼭 타야혀. 태우고 가욧! ' 그러면서 이미 발 하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십여 미터를 한발로 타고 가던 나는 겨우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비오 듯 하였다.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 안을 한바퀴 쓰윽 훑어보았다.
대 정읍고 후배가 몇 명인지, 정읍여고생이 몇 명인지, 호남고등학교 학생이 몇 명인지
통밥이 착 나왔다. 차창 밖으로 초가을의 시원함이 물씬 들어왔다.
에어컨도 없는 찜통 버스에 가을 바람은 그야말로, 구세주나 같았다.
버스 천장의 환풍기를 버스 가는 방향으로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환풍기 안으로 밀려들었다.
정읍에 거의 도착하면서, 하나둘 학생들이 썰물처럼 내렸다.
정주여고생이 내린 다음, 배영고등학교 학생이 내렸다. 그리고, 호남 고등하교 학생이 내릴 때쯤,
맨 뒷자리까지 학생들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나는, 내 가방을 찾아보았다.
가방은 예쁘장한 여자 후배의 무릎에 살포시 안겨있었다.
괜히 머쓱해서, 한마디 툭 던졌다. '가방 받아줘서 고마워, 잘 가. 안녕' 겉으론 무지 터프한
내가 여자 앞에만 가면 얼굴부터 붉어졌다. 들리는 풍얼에 그 여학생이 날 좋아했었다는
풍얼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한번도 그 여학생을 볼 수 없었다.
방학 때가 되면, 버스 안을 주름잡던 나도 얌전한 고양이가 되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나는 버스를 탔다. 방학 때는 학생보다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기에
어쩔 수 없기도 했었지만, 더 마음이 아린 것은 어머니와 내가 약관에 갈 때였다.
새벽부터, 밭에 가서 부추를 베어왔다. 한 리어카 베어서, 낑낑대며 집까지 싣고 왔다.
그리고, 그 배추잎사귀 하나하나 골라보며 다듬어야 했다. 밤늦게 까지 다듬어야 겨우
일곱 관 정도 되었다. 1관이 4키로니까. 일곱 관이면 약 30키로의 부추를 다듬는 꼴이다.
부추는 파 다음으로 메웠다. 종일 그걸 다듬다 보면 관절이 무척 아팠다.
나중에는 부추 이파리가 여러 개로 갈라져 보였다.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부추 일곱 관을 내일 아침 일찍 버스에 싣고 정읍약관에 내야한다.
물건을 잔뜩 가지고, 버스를 기다리면 버스 기사는 한마디 톡 쏘았다.
"아니 버스가 뭐 짐찬 줄 아쇼? 사람 타는 버스지 짐 싣는 버스 간디요? 타지 마요.
" 나이 많은 울 어머니한테 기사는 야멸차게 내 뱉었다. 난, 속으로 울화통이 치밀었다.
"아이고, 기사양반 그러지 말고 좀 탑시다. 촌에서 버스에 안 싣고 어디다 싣겠소?
내 운임 더 줄텡게롱 좀 싣자고...." 어머니는 기사가 듣거나 말거나 말을 하면서,
이미 부추 일곱 개를 다 실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 뒤에서 물건만 들어주었다.
두 사람인데 세 사람의 차비를 주고서야 버스는 출발하였다.
약관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부추를 한꺼번에 내려놓지 않았다.
한꺼번에 내려놓으면 값을 덜 쳐준다며, 세 개는 청과물 시장에, 네 개는 원예시장에 내려놓았다.
한곳은 내 이름 탁 써놓고, 한곳은 가장 고생을 많이 한 막내딸 이름을 탁 써서 올렸다.
경매시장엔, 상인들 반, 물건가지고 온 사람 반, 농산물 반으로 뒤섞였다.
싱싱한 채소들이 팔려나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상인 십 여명이 손에 종이 쪼가리 한 개씩 들고 장갑을 낀 채 둘러서고, 경매를 담당한
경매 관은 호각을 길게 불었다. 경매를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일반인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경매를 하기 시작하였다." 바라바라 바라바라 솔.솔 솔 바라바라......우.......우......천원...3번 두 개 5번 1개 다음" 내가 가지고 온 부추(솔)가 한 관에 천원인데,
3번 상인은 두 개를 가져가고, 5번은 1개를 가져가라는 명령이었다.
난, 어머니를 하도 많이 따라다녀서, 그곳 사람들이 모두 날 알아볼 정도였다.
나 역시 하도 다녀서,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 어쩐 데요?
오늘은 천 원 밖에 안 한다는데요. 전에 비오는 날은 1관에 오천 원 씩 했었는데.
이놈의 채소는 어찌 이렇게 기복이 심한지 모르겄당게요.' 말을 하면서도, 어머니를 똑 바로
뵐 면목이 없었다. 하루종일 고생해서 칠 천 원을 벌었으니, 그 심정 오죽하겠는가.
다행이 저쪽 약관에 누나이름으로 놓았던 부추는 1관에 2000원을 받았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철모르던 내가 자가용 탁 끌고 시골집에 내려갔다. 어머니는 여전히 부추를 다듬고 계셨다.
신작로도 포장이 되어 예전의 그 혼잡함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학생들은 현저히 줄었고,
조수도 다 사라지고 토큰 한 개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머니, 지금도 부추를 다듬으세요? 참 대단하십니다. 그거 팔아야 얼마나 번다고
이제 좀쉬세요 어머니!' "덕길아! 그래도 그런 것이 아녀, 늙은이가 이것도 안 하면 뭐해서
돈을 벌겠냐? 이게 다 사람 사는 이치지. 그래도, 이거해서 너그 팔 남매 키운거 아니간?
"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돈을 쓸 때면, 항상 무언가가 콕콕 가슴에 걸리곤 하였다.
'내가 만원을 쓰면, 내 어머니는 만원을 벌기 위해, 저 뙤약볕에서 이틀을 꼬박 고생하셔야 한다'.
흔히 군대에서 후배들에게, 이런말을 했었다. '야 ! 너의 어머니는 너 키우려고 허구헌날 깻잎
팔아서 널 먹여 살렸는데 임마 네가 그럼 쓰겠냐?'
물론 군대에서 우스갯소리로 후배들에게 했던 말이지만, 난 알고 있다.
그 깻잎 속에 숨겨진 그 피눈물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절절한 고난의 길이었는지..........
오늘도, 정읍 행 시내버스는 잔뜩 폼을 재고, 조금은 더 늙어버린 모습으로 엉금엉금 기어오고있었다.
첫댓글 ㅎ 아침에 글 잘봤네요^^* 어머님은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지켜주시죠 ~~ 자주 찿아뵈세요^^*
뒤돌아 보는 추억은 언제나 정겹고 아름답습니다......비오는 아침 교복시절 추억의 한페이지를 넘겨 봅니다.....좋은 시간~ 감사합니다...섬님^^*
좋은 추억속에 우리들의 어머님의 애한이 담겨있어 더욱가슴아픔을 느껴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셔요!
우리네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이 한껏 묻어있군요.. 정말이지 돈이 문제가 아니구 소일꺼리도되구 사람사는이치인듯합니다......옛시절을 생각케하는 정겨운글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