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또 다른 인생, 절망 속 가족의 대들보
이학주
영화 <고래사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서울 사창가에서 병태와 민우는 춘자를 몰래 데리고, 춘자의 고향 동해안으로 달아난다. 포주가 뒤를 쫓아오지만 결국 춘자를 고향에 데려준 이야기이다. 충격에 벙어리가 되었던 춘자는 고향에 오자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고래는 청춘들의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영화 <고래사냥>은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깨는 약자들의 몸부림이었다. 고래는 먼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을 도와 알콩달콩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 고래사냥의 촬영장소로 양양의 남애항과 정선 임계와 함께 한 곳이 묵호의 술집거리였다고 한다. 그곳에 가보니 여인숙처럼 방이 여러 개 붙어 있는 술집이었다. 슈퍼 아저씨는 영화 제목은 모르지만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여기다 철로를 쫙 들어놓고서 카메라에서 찍었어. 저 방에서 있다가 나왔어.”
이 영화처럼 묵호의 밤거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힘든 일상이었다. 아무래도 원해서 온 여성들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엄청 많은 여성들이 이 일에 종사를 했다.
“여기 서른세 집까지 있었는데, 아주 대단하지 저녁에 남자들 지나다니지도 못해.”
굴다리 밑 골목에만 그렇게 많은 술집이 있었다. 술집 아가씨 때문에 장사가 잘 됐다. 옷가게, 보석가게, 화장품가게, 구둣가게 등은 술집이 번창할 때 호황을 누렸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은 항구 입구가 바뀌었는데, 옛날 항구 입구에는 사창가가 죽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아파트를 지어서 사창가를 운영했다. 그때 외항선이 들어오면 아가씨들이 줄을 지어서 선원들을 맞아들였다고 했다. 그 때문에 그곳 골목은 남학생들은 갈 수 없는 금남의 집이었다. 사람들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허허 웃었다. 호기심에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용기기 안 나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단다.
묵호항 물류적재지 뒤쪽으로 가면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집창촌 아파트를 지나면 슬레이트집이 있는데, 집 앞 노란색 간판에 영어로 요지경(YOJILYUNG)이라 쓰여 있다. 아마도 외국 손님을 받기 위해서 영어로 간판을 쓴 것일 게다. 현재는 단풍나무와 과실수 한 그루가 울창하게 집 앞에 서 있고, 점박이 검은 개와 누렁이 개가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련한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술집과 사창가는 붉은언덕과 발한천을 끼고 있는 동호동까지 번창했다. 지금도 그곳에 여인숙과 여관이 많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아가씨들을 봐 왔던 어느 가게 아주머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 씁쓸해 했다.
“밤 되면 이 거리에 아가씨들이 나와요. 흥정할 때보면 화대가 많지도 않더라고요. 겨우 2,3천원이었어요.”
역에 사람들이 내리면, 거리에 아가씨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뭘 했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한 마디로 말했다.
“집에 보냈지요. 일부는 포주에게 뜯기고요. 가난하던 시절에 딸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벌어 보낸 돈으로 동생들 공부시키고 집안에 보탰지요. 가족의 대들보였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그 말을 그 아주머니로부터 들으니 왠지 코끝이 찡하였다. 초등학교만 마치면 공장으로 나갔던 그 시절 우리 누나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가슴에 안은 채 산업전사로 나가 밤낮 일을 하다 청춘을 보냈던 슬픈 우리의 역사였다.
(이 내용은 동해시 묵호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작성하였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의 사업으로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