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성지순례를 다니던중 가장 험한 길이었다. 길이 너무 좁아 겨우 차 한대 지나가는 길
차를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기어갈 정도였는데 나올 때는 그나마 넓어 보였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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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막골' 일대가 사목 중심지이며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북 연풍에서 이주해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전주대학교 교수)가 최근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서종태 박사는 “충남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천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있었고 특히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산막골은 서천 일대의 사목 중심지로서의 주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그동안 돌보는 이 없이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밝혀진 것이 거의 없었다”며 조선조 말 박해시기에 서천지역에서 처형된 신자가 57명이나 기록돼 있어 서천지역이 단순히 교회사적지에 그치지 않고 성지로서 의미도 겸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교우촌 '산막골'은 지금까지 경북 상주군 모동면 신흥1리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에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로 최종 확인됐다.
이 산막골 신앙 공동체의 신자로는 황석두(黃碩斗, 루가),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황천일 (黃千一,요한), 황석두의 형, 김 가브리엘, 김 요셉, 김 안드레아, 전춘서(田春西, 안드레아), 김 서방 김필선 (金必先, 요셉), 김성첨(金成添, 베드로), 강호경(姜浩景) 등이 찾아진다. 산막골 신앙 공동체는 황석두가 양자인 황천일과 형 및 조카인 황기원 등을 이끌고 연풍에서 산막골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주한 시기는 1857년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57년 3월에 입국한 페롱 신부가 같은 해 가을에 황석두를 복사로 정하여 산막골을 사목 중심지로 삼음에 따라 산막골 교우촌은 서천 지역의 주된 공소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 가브리엘과 김 요셉은 형제간으로 비인서 오래 살다가 1866년 전부터 산막골로 이주하여 1866년 12월 3일 경포에서 체포될 때까지 거주하였는데, 김 요셉은 페롱 신부 전교 때 본 공소 회장으로 열두 공소 소임을 겸했다고 한다. 또한 임천에서 살다가 산막골로 이주한 김 안드레아는 1866년 12월 3일 김 요셉 회장과 함께 경포에게 체포될 때까지 산막골에 살았으며 본디 금산 사람으로 산막골로 이주한 전춘서는 1866년 12월 28일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풀려나 남포 습의면(習衣面) 간재로 이사할때까지 산막골에 살았고, 김 서방은 치명일기 129번에 황천일(요한)과 한가지로 잡혀 서울로가 치명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66년 12월 15일 황천일과 함께 체포될 때까치 산막골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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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막동 사람으로 1865년 가을에 황천일에게 배워 요셉이라고 본명을 지은 김필선은 1867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산막골에서 살았다. 본디 산막동 사람으로 1865년 봄에 황기원에게 배우고 베드로라고 본명을 지은 김성첨은 1867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산막동에 거주했고 홍산 판교 사람으로 1866년 봄 박해 이후에 산막골의 천주교 신자가 살다가 도피한 빈 집으로 이주한 강호경은 같은 해 12월에 체포될 때까지 산막골에 살았다
페롱 신부는 산막골에서 1858년 9월 24일부터 1865년7월 24일까지 총 6통의 편지를 작성하였으며, 내포지역에서 사목하던 조안노 신부도 1862년 11월 4일 한차례 산막골에서 서한을 작성하였다.
◆ 페롱(權, Feron, Stanislas, 1827∼1903) 신부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이다.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