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조선말과 근대를 이은 궁중음악의 인맥
성경린(예술원 회원)
1. 아악부의 노스승들과 아악부의 신세대
1)조선조 마지막 세습음악인의 맥
이왕직아악부는 조선조 장악원의 후신이요 을유 조국 광복후 개창된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것은 오늘날 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보다 조선조의 장악원은 고려조의 대악서와 전악서 그리고 더 올라가 신라시대의 음성서에 그 연원과 전통을 계승하는 것 도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여기 간략히 조선조 장악원의 연혁을 살펴 보면 태조초에 이미 아악서와 전악서를 두어 포용한 악인이 무려 팔백여명이었고 세종조에는
악학도감과 관습도감을 두었고 세조조에는 위의 두 곳을 아울러 악학도감이라 부르고 한편 아악서와 전악서를 합쳐 장악서라 일컬었다.
연산조에 연방원과 함방원을 설치하였다가 중종 반정후에 이것을 없애고 다시 장악원이라 고쳤다.
고종 34년 정유(丁酉)에 장악원을 교방사로 개칭하고 순종 융희 원년(1907) 교방사를 장악과라 고치고 궁내부 장례원에 매이게 하고 관제
개정으로 국악사장 이하 305인을 두었다. 경술 한일병합 후(1911) 장악과를 아악대라고 개칭하고 아악사장 이하 오십 육인의 악인을 남겼다.
조선조의 관직은 봉건적인 계급체제로 원직과 상직 두 층으로 구별하니 원직은 소위 양반 출신이 밟아 올라가는 계제요 상직은 상민이 밟아 올라가는 계제로서 그 명칭도 양반의 원직은 이를 '벼슬'이라 하였고 상민의 상직은 이를 구슬 굴리어 '구실'이라 일컬었다.
장악원에도 원직과 상직 두 계급으로 엄연히 나뉘어 있은바 그 원직에는 제조·부제조·정·주부 등 양반계급의 벼슬이었고 한편 상직에는 악사·전악·악생·악공 등은 이 모두 상민계급에 구실(직임)에
속하였다. 말하자면 원직은 주행정 관리를 맡은 관리요 상직은 그 연주와 이습 등 주악(奏樂)을 맡은 음악인이라 할 것이다.
이쪽 음악측의 기구로는 악사·전악·전율(典律)·전음(典音)·전성(典聲)·악공(樂工)·악생(樂生)·관현맹인(管絃盲人)등이 각각 나뉘어 있더니 순종 융희년간에는 전날 서울의 다섯 영문에 소속이었던
취악내취·세악내취 등이 다 악원에 이부되어 악인의 수효가 많이 불어났다.
순종 융희 원년 장시사에 매었던 양악대와 구별하기 위하여 제사과에
매인 장악과라고 변경한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이제 잠시 양악대에 대하여 상고하면 구 한국시대 군대에 서양음악의
군악대를 두었던 바 한일합병 직전에 군대를 해산하게 되니 군악대는
한때 궁내부 장시사에 이부되어 그 이름도 양악대로 명명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양악대의 수장을 양악사장 그 이하를 양악사·양악수라고 일컫고 이쪽 아악대의 직명도 국악사장 국악사로 일컫다가 경술 국치이후 아악사장·아악사로 그 직명이 개칭된 것이었다.
초대 국악사장에는 해은(海隱) 김종남(金宗南)이 임명되었고 순종 2년
겸와 함재운이 아악사장에 임명되어 1916년까지 재직하였다.
제1대 국악사장 김종남은 철종·고종 때 악사로 호는 해은이요 제4대
아악사장을 지낸 김영제의 양조부이다. 순종때 관제 개혁으로 초대
국악사장이 되고 가야금의 명수였다. 순조 때 악사로 동궁 효명세자(추존 익종)를 도와 궁중정재 창작에 공로가 큰 김창하는 바로 김종남의 숙부가 되고 김영제의 종증조부가 되었다. 김종남의 아우 김종표는 철종 때 악사로 김영제의 생정조부이었다. 또한 가야금의 명수인데 덕행과 지조가 청고하여 그 수하를 사랑함이 지극하였음으로 악공들이 사표로 받들고 길이 숭모하기 위해 그의 초상을 난계 박연 신실
배위 봉안하고 매달 삭망 고사와 삼월 구월 대제를 설행하여 기렸다고 한다.
제2대 국악사장이며 초대 아악사장을 지낸 함재운은 헌종때 악사로
대금과 단소의 명인이었던 함제홍의 제3자요 제5대 아악사장 함화진의 부친이다. 거문고를 장인식에게 배워 대가를 이루었고 그중에도
여민락은 당대 독보였다. 한편 악리에 밝고 궁중, 연향 등 제반 행사에
능통하였으며 전래의 악보를 수정하고 정재 교수에도 당시 제1인자였다. 고종 때 악사 함재영은 함재운의 맏형으로 함화진의 백부가 된다.
부친 함제홍을 닮아 대금과 단소의 명수이었다.
초대 국악사장에 수악사였던 김종남이 임명된 것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으나 제2대는 함제운이 아니고 비음악인인 이남희가 얼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정을 뒷날 함화진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국악사장 김종남 선생은 누대 세업으로 음률에 정통하여 가야금으로(저문하고) 그 성격이 쾌활하고 사리에 통달하나 그 신체가 비만하고
행보가 부자유하여 임명말기에 사임하였다. 그 후임에 이남희가 임명되었으니 그는 양반의 후예로 악부에 출사한 전례가 없었으나 지금(당시) 국악사장은 당당한 고등관이라 음악을 알거나 모르거나 비열한 세력으로 그 자리를 약탈하고 한번 출근하는 일도 없으므로 실상
악원들과 일차 상면한 일도 없이 사임되었다…".
초대 통감 이등박문이 사임하고 부통감으로 있던 증니황조가 통감에
올랐는데 그가 궁내대신 이윤용을 앞세우고 악부에 와서 음악과 무용을 감상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저들을 영접하고 연주를 지휘하며 악원의 연혁이며 악무의 해설을 당한 이가 함재원인데 실제 국악사장의
직임은 이남희로 음악에는 무지한 인물인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증니(통감)는 궁내대신에게 말하되 악부의 책임자는 반드시 음악인
중에도 그 기술이 가장 우수한 인격자라야 그 책임을 감당할 것이어늘 음악에 전연 소매하고 내정에 불통한 자로 그 책임(자리)에 있다는
것은 크게 모순되는 일이라 모름지기 대신은 인사행정에 분명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러함으로서 이남희가 사임하고 가친(함재운)이 임명되었으니 가친 악원 계통으로 제2세의 국악사장이었다."
위에서 소상히 보아온 바와 같이 김종남 초대 국악사장 다음으로 이남희가 임명되었으나 곧 해임되므로 이남희의 일은 물시되어 마땅하다. 그러므로 악원의 자랑되고 엄격한 전통으로 제2대 국악사장은 당연히 함재운의 몫이 되고 아악사장의 계보 또한 그렇게 바로잡아 내려오는 것이다.
제3대 아악사장은 명완벽이다. 전날 장악원의 인사기록부인 전악안(典樂案)에 의하면 본관은 서촉(중국), 자는 덕조, 호는 진당이었다. 철종 12년(1860) 가전악이 되고 고종 30년(1893) 전악에 낙점되었다.
융희원년(1907) 장례원 국악사에 임명되엇다. 경술 팔월 국망으로 잔무취급의 일에 위촉되었다가 1911년 잔무취급이 풀리면서 이왕직 아악사가 되었다. 1916년 병진 아악사장에 오르니 김종남·함재운에 이어 제3대 악원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일찌기 함화진이 명완벽을 거론한 기술에서「가야금 명수로 가곡 여창의 선수로 이론에 능치 못하나 각종 악기에 무불능통하였다.」또는
「기악에는 천재적 소질을 가졌으나 한문의 소양이 없어 유감이었다」는 귀절이 말해 주듯이 그의 음악적 기능은 비록 우수하지만 그의
소양·식견·경륜 등은 아악부의 대표로는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별로 틀리지 않을 것같다. 그러므로 아악사장에 임명된 것이 칠십 가까운 고령이기도 하지만 딱히 고령이나 또는 건강상의 이유에서만도 아니고 아악부의 행정이요. 연주·교육 등에 관한
일체를 김영제·함화진 두 아악사가 대행하고 있었던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완벽은 나이 20에 장악원 전악으로 임명되어 1921년은 바로 입사
회갑에 해당하여 조선교풍회(회장 박영효)주최로 소공동에 있던 공회당에서 성대한 기념식과 기념연주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도 실로 진귀한 기록으로 아악의 일반 사회에 공개된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아들 호진이 아악부원 양성소 제1기생으로 입소하여 전공은 가야금이었는데 아악수장에까지 정진하지 못하고 아악부를 떠났다.
제4대 아악사장 김영제는 고종 20년(1883) 충북 괴산 내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요 자는 문약 호는 괴정이었다. 철종 때의 악사로 악원이 덕망가로 존경을 받던 김종표(한)는 그의 조부가 되고 역시 철종
때의 악사요 순종때 초대 국악사장을 지낸 김종남은 그의 양조부가
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순조 대의 이름 높은 악사 김창하, 김창록은 그의 종증조부 정조 때의 악사 김대건은 그의 고조부가 되니 악원에 있어 김영제에 오를 명문세가가 다시 없었다.
김영제는 고종 37년(1897) 장례원 가전악으로 입사하여 곧 전악이 되고 융희 2년(1908) 3월 국악사에 임명되니 제3대 아악사장을 역임한
명완벽과는 두 세달을 전후해서 국악사가 된 동관이었고 그때 두 사람의 터울은 사십년이나 되었으니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함화진도 뒷날 국악원 회고에서 "초대 국악사장에는 원 수악사 김종남씨가 임명되고 국악사에는 명완벽씨와 김영제씨가 임명되었다. 김영제 선생의 호는 괴정이니 김종남 선생의 손이다. 제4대 아악사장으로 악리를 연구하고 관악 보법을 수정하고 참고서를 수집하여 아악생
교과자료에 보충하고 악률개정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기리고 있다.
일을 알고 기능에 능한 노악사들이 그득한 속에 20대 소자인 손자를
탁용한 김종남의 과감한 인사는 과시 특출한 것이 아니라면 아니다.
악원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기수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손자가 갖추어
지녔다고 하는 굳은 신념 없이는 아니될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조 말엽 장악원의 명운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도 같던 암울의 세월, 악원의 전통을 굳세게 붙잡고 튼튼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쇠운의
아악을 오히려 반석위에 올려 오늘을 있게 한 아악부의 큰 스승 괴정
김영제의 이름은 길이 빛나야 할 것이다.
김영제는 아들 동윤·동원 형제를 두었으나 둘 다 자랑스런 세업을
잇게 하지는 않아 뜻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게
하고 있다. 장자 동윤은 아악수장 박덕인이 경영하는 악기상 안동상점에 취직시켜 겨우 왕십리 공장에서 북·장구를 메우는 갓바치의 기술을 배우게 했고, 차자 동원이 비록 전문학교를 표방하는 법정학교의 모표를 달았으나 일정 말기 동회 직원에 머무르던 신분인 것을 생각하면 명완벽이 외아들 호진을 아악부원양성소 1기생으로 입소시켜
아악수장에 오르게 하고, 이수경 또한 장자 병성을 야성소 2기생으로
입학시켜 아악수장·아악사가 되게하고 정가의 대가를 출세하게 한
것과 비교할 때 애석하고 민망한 마음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함화진은 제5대 아악사장을 지냈다. 함화진의 자는 순종 호는 오당인데 거문고·가야금 등의 기재가 거의 오동나무인 것인데 그의 자호한
걸로 보여진다. 본관은 양근으로 본디 강원도 간성에서 살았는데 증조 윤옥이 순조 때 상경하여 악사에 봉직한 것이 악원과의 인연이었다.
전악선생안에 보면 함윤옥은 본관 양근, 향리 간성, 자는 윤여라 되어있고 순조 십칠년 가전악 헌종 십년 전악에 낙점인 걸로 나와 있다. 함화진도 증조부가 악원의악사직을 배명하였다는 것 외에 그의 전공과
소장에 대해 밝힌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그에 대면 조부 제홍은 헌종 때의 악사로 단소의 명수로 당시 독보이었다고 한다. 헌종 십이년 가전악 철종 삼년 전악 낙점으로 나와 있다. 여기 가전악이란 곧 권부전악이란 것으로 전악서리에 해당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슨 전악사무를 보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악공만을 면하여 있는 임시직원을 이름이었다.
이제 함화진의 부친 재운의 차례가 되었으나 이미 위에서 상세히 소개하였기에 여기서는 모두 생략키로 한다. 함화진는 장악원 동년배의
김영제·이수경과는 달리 어려서 서숙에서의 한문 수학 말고 소학교·고등학교·일어 야학교 중동학교의 부기과까지 졸업한 다채한 학력을 자랑하여 비교적 신학문·신지식의 소유자이기도한 것이 이색적이랄 수 있겠다.
"나는 십육세 때 다시 가정에서 한문을 연구하였더니 십칠세 때는 즉
고종 광무 사년 경자 겨울이었다. 듯밖에 장악원 전악에 임명되었으니 이것은 고종 삼십 일년 을미에 명성황후 민씨는 왜적에게 피살된
뒤로 정계는 극도의 혼란을 일으켜 장례도 맘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그뒤 육년만에 비로소 경운궁에 명성황후묘를 건립하고 묘호를 경효전이라 했다. 여기에는 종묘와 같이 사계절로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해당한 악인이 필요하게 되므로 이때에 나는 정완덕군과 함께
전악에 피임되었으니 이것이 영인이 된 시초였다."
약관 십칠세로 장악원 전악이 되어 1939년 3월 아악사장으로 사직하기 까지 실로 40년을 악원에 봉사하였으니 장하고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함화진의 음악 생활은 그뒤 재야에서 계속해서 쇠함이 없었으니 가위 칠십평생을 일관한 것이었다.
함화진의 사악에 끼친 공적을 제대로 가리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거문고·가야금 등 현악기에 무불능민의 명인이요 높은 범사이었을 뿐만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비범한 수완과 능력을 과시했고 음악이론과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으로 그명성이 과히 천하에 떨쳤던 것이다.
김영제가 아악부의 제일인자로 군림했을 시절에도 바깥에서는 아악부의 함화진 있는 것은 알아도 김영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함화진의 정규 음악 수업은 궁내부 장례원 전악에 임명된 뒤로 시작된 것만은 확실하다. 어려서 집에서 보고 듣고 또 스스로도 이를 즐기고 좋아해서 서투른대로 악기를 다룰 줄은 알았지만 정칙으로의 학습은 아무래도 전악이 된 이후로 잡아야 옳다.
거문고를 이병문에게 배우고 가야금을 명완벽에게 수학하였는데 이병문은 악원에 적을 둔 이가 아닌 듯이 보인다. 명완벽은 여섯 악사중의 일인으로 가야금의 명인일 뿐 아니라 여창가곡의 선가요 뒷날 아악사장을 지낸 대가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함화진을 연주가로 보느냐 이론가로 보느냐 하는 것에 각각 이론이
있을 것이나 나는 그 연주가의 편에 좌단하고 싶다. 그는 거문고가 전공이었지만 가야금도 겸공하여 높은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거문고
가야금뿐이 아니었다. 양금·비파·월금 등 현악기에는 가위 능치 않음이 없는 대가이었다. 탄법은 정말 요묘 간엄의 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야금도 마찬가지로 맑고도 밝은 선금이었다.
함화진은 일찍부터 문사에 조예가 깊어 아악인으로는 처음이다 싶게
아악에 관한 논고도 지상에 발표하고 아악생의 교재로 『조선악기편』(1933)『이조 악제원류』(1933)를 편저하고 거슬러 최초의 저술로는 경술 국치 이후 당시 아악대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 궁내성에 제출한『조선아악개요』(1915)가 될 것이다. 위는 모두 필사본
또는 등간본에 속하고 제대로의 판본 저작은 『증보가곡원류』(1938)『조선음악통론』(1948)등이 있고 고악보『양금신보』에 부록된 『한국음악소사』그리고 유고로 『국악50년사』(미발간)가 더있다.
함화진의 아악사장으로서의 특이한 공업의 하나로 1932년 10월부터
매달 이습회를 열어 아악의 수호 및 악원의 연주기능의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개인의 독주·독창 위주의 발표 무대를 마련하고 1년에
한번 기념 연주회를 열어 일반에 공개도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악인의 기량이 향상되고 일반의 아악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 적이 고양된
것은 말할것도 없다.
함화진은 1939년 3월 후진에게 자릴 물리기 위해 용퇴한다고 아악사장직을 물러났다.
김영제 아악사장의 퇴진 때와는 달리 그의 사직에는 일간 신문들이
다투어 아악의 명가 함화진 아악사장의 융퇴를 크게 보도하여 그의
높은 권위와 명성을 또 한번 들레이는 것이 되었다.
"신체도 허약할 뿐 아니라 나와같은 노인이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젊은 사람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금후는 향토음악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할 각오로 있습니다."
아악사장을 용퇴하고 조선음악협회 조선음악부장의 직책으로 주로
재야의 국악인들을 결속하여 그런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8·15 조국
광복이후 함화진은 대한국악원을 창설하고 그 초대원장에 피선되어
많은 활약을 하였다.
함화진도 아들 연모를 두었으나 김영제와 더불어 가업을 승계시키지는 않았다 한치 걸러 조카 연춘이 아악부원양성소 제4기생으로 입소하여 백부 밑에서 가야금을 전공하였으나 음악적 자질도 모자라고 적성 또한 바히 부적하여 일찍 그만두고 딴 업으로 바꾸었다.
송사 이수경은 괴정 김영제·오당 함화진과 더불어 누대악원의 세가로 악사의 가계에 속하여 이른바 명문이었다. 부친 원근은 악사로 지냈고 조부 인식도 또한 악사로 피리가 전공이었는데 당시 누구도 감히 추종을 불허한 명인이었다.
이수경은 어린 나이 십세에 장악원 악공으로 임명되어 전악·장악·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한 일세의 거장으로 전공은 거문고였다.
이수경은 희세의 명금으로 그 웅건청장의 탄법은 가히 비류가 없고 <영산회상>에 특히 선탄이었다. 그점 함화진의 요묘간엄의 거문고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어 그야말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수경은 거문고만의 명인이 아니다. 종묘악장의 창법과 가락을 이회하는 이로 독보적인 사실이 이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악장은 전악이 이수해야 할 필수의 과목이었는데 김영제 함화진이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직 그만이 알고 부르고 더욱 섬세하고 정묘하였다. 종묘악장의 특이하고 난삽한 창법을 이수경 아니더면 천만 일실했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수경은 궁중 정재에도 해박하고 통효한 범사였다.
한편 악기 제작에도 훌륭한 기능을 발휘한 명공이었다. 전업의 악기장을 무색케 할 정도의 거문고 가야금 등 그것도 놀라운 명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아악부에서 쓰는 현악기의 수요가 실로 적지 않았는데 그걸 주구 조력도 없이 독당하여 제작 공급한 것이다.
이수경은 장자 병성이 아악부원양성소 2기생으로 피리가 전공이었으나 뒤에 우뚝한 가객으로 전문하였고 손자 동규·정규가 모두 국악양성소·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규는 부친 병성을 이어 가곡으로
몸을 세워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에 보유자 후보에 올라 있고
국립국악원 연주단 지도위원의 직에 있다. 아우 정규는 대금 전공이었으나 그도 작금 가곡 수업에 전념하고 현재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가 전공에 정진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악원의 세습 악인은 비록 아니었으나 아악부시대 가곡 촉탁으로 아악부원 양성소에 나와 이미 제1기·제2기를 졸업한 아악수·아악수보와 재학중인 아악생들에게 가곡·가사·시조 등을 교수하여 전통가악 곧 정가의 전통을 만대에 드리운 선가 하규일의 이름과 공로는 어느 명가의 악사 못지않게 찬연히 빛날 것이다.
"장악원은 원래 음악과 무용만을 교수하였을 뿐이요. 가요는 악장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일 궁중에서 가요가 필요할 때에는 민간의 가객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 때는 궁중에서도 가요가
그렇게 필요치는 않았다. 그러나 근 천여년간 전통의 고전가요가 폐지하게 됨은 너무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때 민간에서도 시대사조에 따라 이것을 연구하는 이가 전연 없고 선생층으로는 다만
금하 하규일씨 한 사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규일씨는 이왕직 촉탁에 임명되어 고전가요를 교수하게 되어 아악생 뿐만 아니라
전직원에게까지 가곡·가사·시조 등을 가르쳤다."
뒷날 함화진의 회고인 바 긴 설명이 부질없을 것이다.
하규일의 자는 성소요 호는 금하, 본관은 진주로 철종 14년(1863) 계해 음력으로 유월 초열흘 한성에서 태어났다.
육세부터 11년간 가숙에서 한문을 수학하니 총명한 자질도 겸하여 경사에 밝았고 14세에 관례, 19세에 뜻한 바 있어 음악수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규일이 음악을 가까이한 데에는 그의 가문에 대하여 조금
챙겨야 할 것 같다. 당시 대원군이 총애하던 '천하장안' 즉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네 호협사의 하나인 하정일과 동행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숙부되는 하준권 그리고 재종되는 하순일이 모두 당대의 이름 높은 가객으로 운현궁에 자주 출입하던 대령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음악에의 감화는 자연 이런 가계와 환경에서 싹튼 것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규일은 천부의 좋은 목을 타고나진 못했으나 그 대신 남이 따르지 못할 인고의 노력과 독공으로 대성한 그런
선가에 속하였다. 목이 부었다가 터지고 그 때마다 몇동이씩 선지같은 응고된 선혈을 쏟고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하여 드디어 그의 목은
금강처럼 굳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하규일은 관계에 진출하여 한성소윤 겸 한성재판소 판사를 비롯하여
내장원 문교정리위원, 전남독쇄관, 진안군수등을 십여년 역임하였는데 한일합병이 되자 망국에 뜻을 잃고 관직을 사퇴하고는 두 번 다시
구사하지 않았다.
이로부터가 그의 청년시절에 배우고 닦은 음악예술을 자재로이 발양하는 좋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하규일은 1911년 정악전습소 학감에
취임하여 쇠운의 정악을 전수하는데 정열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하규일은 정악전습소 학감에 있으면서 중부 상다동에 위치한 동소 여악분교실장을 겸하니 이것이 하규일이 그 뒤 기생조합과 관련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하규일이 아악부에 들어온 것은 1926년의 일이다. 원래 역대 장악원에서는 아악과 궁중정재만을 전하여 왔고 가곡·가사·시조 등은 교수하지 않았다. 그래도 때로 궁중에 수요가 있을 경우 민간으로부터
가객을 청래하여 대령하는 정도였다. 가곡 등의 고상한 정가는 민간에서도 중류이상의 신신간에 호상되어 전래하였으나 이것도 시대의
추세에 따라 애상하는 이가 줄어들어 악원에서도 교습치 않으니까 일로 쇠멸의 길로 조락하고 있었다. 이에 당시 아악부의 김영제, 함화진
두 아악사의 진력으로 가곡교사를 고비앟여 아악생에게 가곡을 교수할 것을 상부에 건의하여 비로소 아악부에서 가곡을 교수하게 된 것이다. 그 뒤 하규일이 작고할 때까지 장장 12년간을 매일 아악부에 나와 열심히 교수하였는데 강의는 몹시 엄중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전공인 가악 외에 궁중정재에도 밝았고 거문고에는 대가였다.
하규일은 1937년 5월 22일 다동 자택에서 장서할 때까지 그는 정대한
노래와 풍류 그리고 아름다운 정재속에 실컷 호강한 너무도 유복했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규일이 많은 업적 중에도 아악부의 촉탁으로 임명되어 아악생에게
가곡을 교수한 일이야말로 길이 가곡의 전통을 영세 확고하게 하였을뿐 아니라 그의 방명을 천수에 전하는 아름다운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규일 보다 목이 타고 났다는 숙부 하준권, 재종 하순일의 이름은 겨우 당대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하규일은 어떠한가. 가곡의
자랑스런 이름과 더불어 영세토록 불후일 것이니 장하지 아니한가.
그가 길러낸 제자는 많다. 아악부원양성소 제1기생, 제2기생, 제3기생, 제4기생, 총수 50여명을 헤일 수 있고 그 중에도 수제자의 이름을
뽑내던 이병성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다시 악원의 악사에게로 말머리를 돌려야 하겠다. 아악부시대 피리의
사범으로 정악피리를 아악생에게 전수한 최순영이 있다.
최순영은 고종 원치 원년(1864) 갑자 경성 순화방 효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요 자는 경화인데 초명은 순룡이었다.
고종 11년 갑술 장악원 악공이 되고 순조 2년(1908) 가전악이 되었다.
여기 가전악이란 달리 권착전악 또는 권전악으로도 일러 정작 전악이
되기 전에 임시로 주던 일종의 전악 대우직이었던 것이다. 전악에는
순종 5년(1911) 2월에 올랐다. 1913년 아악수장이 되고 1932년 아악사에 승임되었다
최순영의 피리 실력이 한창이었을 20대, 영예스런 어전연주의 모습은
당시 『진찬의궤』에 또렷이 전하고 있다. 즉 고종 24년(1887)·동
29년(1892) 각기 『진찬의궤』권 3 공령조에 보면 만경전·또는 근정전 진찬 때 최순영은 능상 전상 피리군에 속하고 이름은 구명 최순룡으로 나오고 있다.
최순영의 칠십 생애에 있어서 가장 혁혁한 업적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아악부시대 아악생 양성에 기울인 공로를 들어야 할 것이다.
제2기 아악생에서부터 제4기생에 이르기까지의 정악 피리의 교육을
독 담당한 이가 바로 최순영이었다. 김기수도 그의 『국악입문』에서
최순영은 서울 태생으로 피리에 대가였으니 장악원의 전악을 거쳐 이왕직 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고 새사람 양성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 것이 그의 불후의 업적을 찬양한 것이다. 바로 오늘날 정악피리의 우람한 전통은 전혀 최순영의 공로인 것을 말할 것도 없다.
최순영과 동시대의 악인으로 장악원의 악공을 거쳐 아악부시대 아악수장에 올라 대금 사범으로 아악부원양성소 아악생들에 정악대금을
전수한 이에 유의석이 있다.
유의석은 철종9년(1858) 5월 16일 경성 서부 반석방 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경재, 고종 4년(1867) 장악원 악공에 임명되고
전공은 대금이었다. 순종 2년 가전악이다가 동 5년(1911) 전악에 임명되었다. 1913년 아악수장이 되어 아악부원양성소가 개소되어 아악생을 공모하여 아악을 교수할 때에 유의석은 대금반을 담당하여 타계할 때까지 그 직임을 다하였다.
유의석은 젊은날 대금잽이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자주 어전주악의 반역에도 참여하는 영광을 가졌으니 그 증빙으로는 고종 14년(1877), 24년(1887), 동 광무 5년(1901) 『진찬의궤』 및 광무 6년(1902) 『진연의궤』등에 전상 대금잽이로 유의석의 이름이 전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유의석은 최순영의 어질고 부드러운 성격에 대면 매우 자상한 속에서
강직하고 냉엄한 인품에 속하였다. 유의석하면 전날 아악부 연습실에서의 그의 지도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해령>이라는 곡은 대금의 특유한 연음으로 저 <수제천>, <관악 영산회상>의 상령산과 맞먹는 일곡인데 그 열 여섯째 숨의 연음이 매우
난삽하고 까다로왔다. <해령>도 거의 끝날 그 어름에 이르면 유의석은 고이춤을 추키면서 단상에서 내려와 대금잽이들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가 피리가 원가락을 불고 대금의 연음과 동시에
누니를 나니레…하고 구음을 외웠다. 그러나 대금잽이들이 하나같이
만족하게 그 대목을 불어대는 자가 없어 실망하고 씁쓰레 다시 단상으로 오르는 모습은 지금에 돌이켜도 그처럼 딱하고 미안한 일이 없어 우리는 잽이를 달리하면서도 내일처럼 송구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1915년 12월 현재 아악대 악원 이력서철에 보면 아악사장에는 공백으로 되어 있고 아악사에 명완벽·김영제 그리고 아악수장에 안덕수·이원근·강희진·함화진·이수경·최순영·박덕인·고익삼의 차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수석의 아악수장인 안덕수는 문묘제례악 밖에 모르는 문묘악
전공의 좌방 전악이었고 차석 이원근은 이수경의 부친으로 부자가 함께 전악에 열하여 있었는데 전공은 피리였다. 전공별로 보면 문묘악의 악생 출신에 안덕수 고익삼이 있고 그 밖에는 모두 우방의 악공 또는 전악으로 발신한 이로 피리에 이원근·최순영, 해금에 강희진, 거문고에 함화진·이수경 그리고 생황의 박덕인 등이 될 것이다. 이 때만 하여도 함화진·이수경은 아악수장 직위에 머물러 있었고 문묘제례악의 안덕수의 위광이 가장 빛나 있었다.
1926년 4월 내가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한 당시 아악부의 인사는 아악사장에 명완벽, 아악사에 김영제·함화진, 그리고 아악수장에 최순영·유의석·이수경·안덕수·박덕현·박덕인 등 판도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안덕수는 고종 14년(1877) 10월 26일 경성 남부 동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고종 25년 장악원 악생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전악에 오르니 그런 빠른 승진이 다시 없었다. 고종 43년 악사에 임명되고
1913년 아악수장이 되었다.
아악부원양성소의 교육과정은 악과와 학과 두 갈래로 가르고 악과는
다시 필수 공통의 보통악과 각기 전공악기에 별러 이수하는 전공악과를 나뉘어 있는데 안덕수와 박덕현은 제1학년·제2학년에 교과인 보통악과의 교사였다. 안덕수는 문묘제례악을 가르쳤고 박덕현은 종묘제례악을 가르쳤다. 최순영·유의석은 각기 거문고·피리·대금 등
전공악과의 교사였다.
박덕현은 고종 5년(1868) 경성 중부 박동에서 태어났다. 동 29년(1892) 장악원 악생에 임명되고 1913년 아악수장이 되었다. 좌방 출신의 악생으로 아악 아닌 종묘례악에 통효하고 이의 편종 잽이로 명성을 떨쳤고 종생하였다.
1926년 4월 내가 아악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하여도 노인 아악수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젊은이로는 1기 졸업생 9명 2기 졸업생 18명 모두 이 삼십명에 지나지 않았고 노장 아악수들이 중심을 이루고
젊은이의 갑절정도는 되었던 듯이 알고 있다.
여기 그 명단을 다 챙길 도리는 없고 기억에 남는 이만도 이봉기 수석을 비롯하여 마성운·이성창·이경옥·김영기·이순룡·박영석·박주현·이용진·이영지·이창식·김수천·고영재·김계선·박윤근·조상준·황종준·박덕준·최봉철·안흥덕·이덕화·황한준·김자선·김영집 등 예전 장악원의 악공과 악생 거기다 주전원 내취 출신의 세악수까지 어울러 자못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봉기 수석과 더불어 원로급에는 이성창·마성운·이경옥·김영기
등을 들수 있고 이성창·마성운은 당시 각각 78세 79세를 기록한 고령이었으니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좌방과 우방 즉 좌방의 악생 우방의 악공으로 그 계파가 둘이던 것이 구한말 겸내취 출신의 세악수까지 등장하고 보니 갈래가 솥발모양 세 가지나 되었다. 그러나 세악수의 잽이요 곡목이 우방과 악공과 별로 다르지 않아 이들은 우방 악공 측에 접근하여 있었고 기실
우방계로 간주해서 그닥 틀릴 것이 없었다.
김계선·김수천·황종순 등 몇이 바로 주전원 겸내취 출신인데 그 예능은 취고수·세악수가 해산되고 그중 기량 좋은 몇 사람만이 장악원에 구제된 모양이어서 월등 우수하였던 것이다.
이봉기 수석의 본관은 전주요, 서울 서부 반송방 냉동에서 철종 4년(1853) 9월에 태어났다. 고종 8년 장악원 악공에 임명되고 전공은 피리였다. 1911년 이왕직 악공이었다가 이태 후 아악수가 되고 수석에
위촉되어 아악수의 어른이 되었다.
수석의 직임은 그 명성이나 권위가 사실 전악인 아악수장을 능가하면
하였지 결코 뒤지지 않는 그런 위엄이요. 세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칠 팔십, 많으면 백 여명을 바라보는 아악수의 총수요. 대표이고 하니 그 책무가 스스로 가볍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소사에 이수석이 나서지 않을 일이 별로 없고 또 그가 나섰다 하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은 듯이 듣고 있었다.
원로급의 아악수들에는 조금 기고하고 오만한 성격의 사람도 있어 말이 거칠고 감정이 경악하는 이도 없지 않았는데 이봉기 수석은 늘 화평한 부드러운 얼굴이어서 어린 마음에도 호감이 갔다. 이봉기 수석이 타계하고 아악부에는 또 다시 수석 제도는 두지 않은 듯이 나는 알고 있다. 그점 우리의 이봉기는 아악부의 마지막 수석을 장식만 명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장구잽이의 기숙 이경옥이 살았을 때도 워낙 고령이라 그가 합주를
이끌지는 못했고 황종순·김수천이 주역이었고 아악생 물림의 이은봉·박영복이 그 뒤를 받치었다. 황종순·김수천은 다 겸내취 출신으로 장악원의 세습적 악공의 계열이 아니었다. 그 말고 대금의 명인 김계선이 또 세악 내취에서 전임한 악인이었는데 그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 본다.
김계선의 초명은 기석, 고종28(1891) 서울 중부 정선방 동구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주전원 내취에 임명되나 선계가 반드시 음악에 종사하였던가는 분명치가 않다. 아무튼지 불세출의 대악재가 태어난 것이니 놀랍고 환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비범한 음악의 내능은 천부한 체질이요. 용모에 달려 있은거나
아닌가 그런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아악부에는 자주는 아니지만 귀중한 내객이 더러 있었는데 손님이 오면 먼저 악기 진열실을 보이고 연주실에 인도되어 아악감상이 있었다. 연주되는 아악의 곡목이요. 인원은 한결같지 않았지만 거의 빠지지 않는 곡목이요. 연주에 우리의 김계선이 있었다.
아악에는 독주 악기도 미상불 주저로웠지만 알맞은 독주곡은 더욱 흔치가 않은 것 같아 오직 대금이 그 유일한 것이었고 연주되는 곡목도
<평조회상(유초신지곡)>의 상령산의 초장·2장이 아니면 <성성자진한잎(요천순일지곡)> 정도이었다.
평조회상은 주로 저음으로 취주되는 비절한 가락이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퉁소의 그것인 양 '끊길 듯 이어지고, 끊어지고 그러면서 원망하듯 사모하듯 우는 듯 호소하듯 여음이 요요'하단 바로 그것이었다.
또 한 곡 <청성자진한잎>의 독주는 그 높은 음으로만 드러내는 천마
하늘을 달리는듯한 자유스럽고 신비스러운 가락인데 그 취주의 모습이 또한 장관이었다. 막막 높은 음을 대금 특유의 청공을 드러낼 때면
저를 든 어깨쭉지가 날짐승의 그것처럼 모양스레 출렁이었다.
그런 점에서 명저 김계선은 젓대를 한갖 입으로 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온 마음을 기울여 불어대는 진정한 명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피리잽이의 이용진은 문묘제례악은 아예 영역 밖이요. 가곡 반주의
세피리를 불지 못한 뿐 당피리던 향피리의 영글고 아름다운 소리에
그를 따를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이것저것 두루 통하는 유능한 악인이 있는가 하면 당피리면 당피리 하나인데 도저하게 잘 부는 명피리도 전날에는 별로 드물지가 않았다. 이창식이 그런 잽이가 될 것이다. 피리가 전공이요. 피리에도 당피리로 종묘제례악이 주장이었다. 당피리가 본래 그런 음색이긴 하지만 어딘가 거세고 거친 소리가 그것인데 당피리로의 취주는
감히 이창식을 추급할 이가 없다고 하였다.
피리의 발음은 주로 그 서(혀)에 좌우하는 것이어서 서를 알맞게 굽고
갈고 손질하여야 하는데 너무 두꺼우면 입김은 그만치 더 드나 무겁고 힘찬 소리가 나고 얇으면 불기에는 용이하나 그 대신 소리가 가벼워 홀홀 날리듯하여 벌써 제 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창식은 당피리의 서를 남보다 두껍게 하여 힘주어 실하게
내므로 다른 잽이의 두 서너 몫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종묘악의
당피리는 이창식을 단연 엄지로 꼽았다. 이용진은 영롱하고 절묘한
음색이요. 이창식은 질박하고 웅건한 음색이었다. 그런 점 양인은 실로 대조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남이 아니고 숙질간으로 이창식이 숙부이고 이용진이 조카가 되었다.
문묘악의 연주는 아악수장 안덕수의 지도로 이루어지고 그아래로 이른바 전날의 좌방 악생들이 나열해 안자 있었다.
한국현·조상준·김자선·박덕준·김영집·오원식·이덕화·황한준·박윤근·안흥덕·최봉철등 여럿이었는데 이들도 모두 아악기인
훈·지·약·적 등을 취주하는 것이었다.
문묘악 잽이에 비하면 종묘악 잽이는 악기의 기법이랄지 악곡의 가지수, 더욱 그 난이도로 따져 제법 월등하달 수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묘악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다른 연악 잽이의 다양하고 많은 곡목에 비하면 또 문제가 아니 되었다.
이영지는 종묘악의 편종잽이었다.
종묘악이 그 문묘악에 비겨 분량일지 기교면에 있어 그와는 비교가
안되게 과중하다는 것은 이미 아는 바와 같다.
종묘제례악도 그 잽이는 물론 정해있다. 피리·대금·해금·좌고·장구 등이 되고 편종·편경·방향 등이 더 있는데 편경잽이·방향잽이도 각각 자재하였겠지만 우리가 아악부에 입소한 때는 이미 그런
잽이는 도태된지 오래인 듯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중에
유일하게 이영지가 있어 편종잽이의 건재와 그 타종의 기교랄지 요령을 적이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2) 아악부원 양성소의 후예들
아악부원양성소 1기·2기 때만 하더라도 일반에서 공모라고는 하지만 모두 아악부 아악수들의 자제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우선 1기만 보더라도 김득길(뒷날 덕규로 개명)은 아악수 김흥식의 아들이요, 명호진은 아악사장 명완벽의 외아들이었다. 박수봉(창균으로
개명)은 아악수장 박덕현의 양자이었고 박노아(흥균으로 개명)는 아악수 박덕준의 아들인 바 박덕현과 박덕준은 형제간이요, 그러니까
박창균·박흥균 양인은 종형제 사이가 되었다. 이병호는 아악수였던
이수덕의 아들이요. 아악수장 이수경의 조카가 되고 이은봉은 아악수인 이원성의 손자이었다.
이원성은 해금의 명인으로 1기·2기 아악생의 해금 사범이기도 하였다. 그의 원이름은 원근인데 전악에 이원근이 있어 한 관아에서 상하의 직계가 분명한데 같은 이름은 곤란하다고 하여서 악공 이원근이
이름 끝자를 부득이 바꾼것이라 하였다. 박삼쇠 또한 뒷날 덕인으로
개명하였는데 아악수 박영석의 아들이었다. 박영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덕인은 둘째 아들이었다.
제2기 졸업생의 명단은 이러하다. 박성재·장정봉(개명 인식)·김천룡·이병성·김천흥·유금돌(개명 길수)·강명복·김선득·이순봉·서상운·김만흥·박놈쇠(개명 영복)·최명룡·고억만·이수만·김정봉 16명이다. 18명 정원에서 2명은 중도 탈락인 걸로 보여진다.
박성재는 2기 중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아악부원양성소 출신 전부를 모아 놓아도 그에 오를 음악적 재능이요, 절륜한
총명이 없지 않은가. 나는 이날 그렇게 여기고 있는 한 사람이다.
박성재는 피리 전공인데 부전공으로 거문고를 보았고 장정봉은 거문고 전공에 피리를 부전공으로 보았는데 졸업시험에 있어 능히 만점인
10점을 얻은 것은 오직 박성재의 세피리가 있을 뿐이고 장정봉의 거문고 전공 점수보다 박성재의 거문고 점수가 보다 높아 있었다.
아악부원양성소 아악생의 실기 성적은 그 기술과 암기력이 종합되어
평가되는 것으로 어찌 보면 암기력이 더 그 점수를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능이 있어도 연주 중도에 불통이면 가차없이 절반 5점으로
떨어졌다.
2기에 있어서의 전공 배정은 아직 확고하니 정립되지 못하고 조금 애매하였던 것은 현악에 있어 거문고는 뚜렷하게 전공으로 되면서 가야금·양금 등은 이를 겸공(부전공)으로 밀어붙인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가야금에는 피리 전공의 강명복·김선득이 부전공으로 가야금을 익혔고 피리의 이병서·해금의 김천흥이 또한 부전공으로 이에 매었고
비파에는 대금의 김천룡이 이를 겸공으로 섭렵했는데 그래도 졸업시험에 저들 부전공의 점수가 별로 나쁘지 않았던 걸 보면 당시의 교육
선배들의 자질이 정말 범상하지 않았던 것을 알게 한다.
이병성은 피리가 전공이었으나 선가 하규일을 초빙하여 가곡을 전수하면서부터 성악으로 돌려 좋은 성대와 타고난 음악성으로 스승의 의발을 잇는 훌륭한 가인으로 대성하였고 해금 전공의 김천흥은 전공인
해금으로 일세의 거장으로 타에 추종을 불허하고 있고 그 궁중무용인
정재에는 더욱 저문하여 한국전통무용의 대가로 군림하고 있다. 만근왕년 겸공의 양금 정악의 진작을 위해 경주하는 노력 또한 괄목되고
있는 그의 잦은 양금 연주회의 기록으로 잘 증명하고 있다.
함화진·이수경에게 사사 아악부원양성소 출신 거문고 정악의 제일인자로 선진이요, 훌륭한 사범이 장인식(정봉)이다. 아악부원양성소
제4기생부터 그가 두분 스승을 돕고 대신하여 후진을 지도하였으니까
교육의 경력도 그중 오래일 것으로 믿고 있다.
대금잽이로는 김천흥의 중형 김천룡이 있고 그 아래로 유길수(금돌)·최명룡·고억만·서상운·이수만 등이 있으나 한몫 충실한 대금
주자로는 김천룡·유길수가 있은 것로 알고 있다.
서상운·이수만은 체격부터 너무 왜소하고 그만큼 기약하여 대금잽이로는 첫째 부적한 재목이었다. 어찌해서 저들이 대금에 배정되었는지 조차가 의심스러운 정도이다. 이왕 잽이에 벼른다고 하면 피리나
해금쪽이 더 어울릴지 몰랐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무리한 대금잽이로의 고생이며 보람도 없는 전수는 본인이며 아악부에 함께 이득이 없는 것이었다.
최명룡이 체격으로 보나 발음으로 보나 김천룡·유길수의 아차랄 수
있었으나 그는 도무지 근무며 노력 그리고 정진이 거의 없었고 고억만은 그 입으로의 히떠운 허세로 보아 조금 불 것 같아도 그 또한 음악적 자질의 결여로 늘 하위에 맴돌 수 밖에 없었다.
유길수는 건장한 체구부터가 대금잽이로 제격인 듯 싶었다. 김천룡이
노성한 터로 대금과 잘 어울려 보이듯 유길수는 강건한 육체요, 힘으로 대금을 비낀 자세도 매우 듬직하였고 그 발음에 있어서의 김이 억세게 실하였다.
제3기 졸업생의 명단을 전공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거문고에 성경린·이동식, 가야금에 김강본·김영윤, 비파에 태재복·고칠동, 피리에
이복길(개명 주환)·이재천·김보남·이점룡, 대금에 봉해룡·임장길·김경룡·김봉완·박창진·최경희, 해금에 왕종진·강낙인 등 18명이다.
성경린은 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거쳐 국립국악원 악사장·원장, 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립국악원 연주단 사범으로
있다. 이주환(복길)은 아악수, 아악수장, 아악사 구왕궁 아악사장,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동 41호 가사의 기능보유자이기도 하였다. 1972년 타계하였다. 이석재(재천)는 이왕직 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고 8·15이후 사직하고 상업에 종사하더니 1970년대 국립국악원 연구원으로 복직하고
서울대 음대, 한양대 음대 등 국악과 강사로 활동하였다. 김보남은 이왕직 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역임하였다. 8·15 조국 광복후 무용활동으로 저문하여 경기여고·숙명여고·중앙여고·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쳤다.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가 개소되자 국악사 양성에 진력한 공이 크다. 김영윤은 정악
가야금의 범사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오늘날 정악 가야금의 전수 보급은 그에 힘입은 바 실로 크다 할 것이다. 봉해룡은 대금 전공이나 겸공인 단소의 명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아악수보·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 국립국악원 장악과장을 역임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동 제39호 처용무의 기능보유자로 있다. 김강본은 이왕직
아악수로 가야금의 선수이었으나 요절하였다. 1930년 영친왕 내외분의 기국 근친 때 인정전 서행각에서 있은 정재의 어전공연에서 춘앵전을 추어 명성을 날리기도 한 수재요 미동이었다. 박창진은 대금이
전공이었으나 보다 가곡창에 열심하여 여창가곡을 잘 불렀다. 성음이
여자처럼 곱고 가늘어 아악부에서의 가곡 발표에는 으레 박창진의 여창가곡이 들레이었다. 그는 또 궁중정재 중 처용무의 중무로 무용에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였다.
2기생의 교육과정에선 전공과 겸공(부전공)을 갈라 특히 그 관악 잽이에 한하여 그것도 극히 소수에게 가야금·양금·비파 등을 가르쳤으나 3기생에 이르러는 가야금을 아예 전공에 벼르고 게다가 새로이 비파까지를 전공으로 택한 것은 큰 용단이요 이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야금의 성공을 말고는 비파의 경우는 완전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것이 악기의 탓인지 아니면 교수의 잘못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배정된 아악생의 탓인지 그리고 그런저런 것이 서로 어울리고
맞물린 결과인지도 또한 모르겠다. 첫째 비파의 악기됨이 완전하지
못했던 점을 들 수 있고 거문고와 가야금의 차이처럼 가락이나 주법에 무슨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비파는 거문고의 가락 거문고의 주법을 도습하고 있어 비파잽이가 그 악기에 대한 애착이 첫째 부실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비파에 별른 두 잽이가 악과나 학과의 성적이 하위를 맴돌고 그러므로 이 학업에 의욕마저 잃어 있으니 성취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태재복·고칠동 양인이 졸업하자 아악부를 떠나니 비파를 전공악기로 올리려는 아악부 고위층의 의도와 목표는 좋았으나 결과는 영으로 돌아간 것이다.
제4기생 졸업생의 명단의 여기서도 전공악기별로 본다.
거문고에 김철영·장사훈, 가야금에 이창규·함연춘, 피리에 김성태·홍윤기·김진환·주성배·김준현, 대금에 김기수·최의식·전영선·김성진·김해영, 해금에 김종희·김교성·이덕환 등 18명이다.
김기수는 수석 졸업으로 장래가 크게 촉망되어 있었는데 그대로 대성한 것이었다. 아악수로 근무하다가 일시 아악부를 퇴직하고 나갔다가
8·15 해방되고 구왕궁아악부 촉탁 국립국악원 개원후 국악사·악사장·원장 그리고 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국립국악원 근무로
있다가 1986년 10월 별세하였다. 일찍부터 신국악 작곡에 유의하여
많은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동
제39호 처용무의 기능보유자이기도 하였다. 1986년 10월 영면하니
향년 69이었다.
김성진은 대금 전공으로 동기의 같은 잽이에 비해서는 체격도 작고
기질도 허약한 편에 속하지만 일관 대금으로 70평생 아악부와 국립국악원에 현직으로 남아 오늘에 이른 사람은 그가 동기에서 뿐만 아니라 4·5·6기를 훑어도 유일인이 되고 있다. 아악부를 졸업하고부터
대금독주로 저문, 원내원외며 라디오방송을 통한 대금독주 등으로 김성진은 가히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친 사람으로 알려 있다. 국립국악원
장악과장·악사장·원장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동 제20호 대금정악의 기능보유자로 있다.
김종희는 해금 전공으로 이왕직 아악수보,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 도립국악원 사범으로 근무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이다. 장사훈은 거문고 전공으로 이왕직 아악수보·아악수, 경성중앙방송국 국악담당, 연세대도서관 사서 등을 거쳐 서울대 음대 국악과 교수로 문학박사 학위도 취득한 바
현재는 서울대 명예고수, 청주대 예술대학 교수로 있고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평생 정력적인 저술로『국악총론』·『한국음악사』·『한국악기대관』·『국악대사전』등 30여권의 저서와 수백편의 논문을 기록하고 있다.
제5기 졸업생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피리 전공에 이장성·이성수, 대금전공 장흥기·황병욱·이강숙, 해금전공 김동열·한백순, 거문고전공 박진규·황유봉·이성훈, 가야금전공 홍원기·양영환·박성원,
비파전공 김하진·김봉진, 양금전공 김석중·허무량 등 18명이다. 비파 전공을 다시 살리고 양금전공을 새로 마련한 것이 5기 아악생 교육의 특색이 되었으나 비파전공은 3기에서의 전철을 도습한 꼴이 되었고 양금 전공 또한 교육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수석 졸업의
촉망되던 이장성이 피리도 잘 불고 출중했으나 아깝게 요절하였다.
김태섭이 5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이왕직아악부·국립국악원 일관하게 봉직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개소후 초기에서부터 피리전공의 학생들을 교도한 공이 실로 지대하다 할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종묘제례악, 동 제39후 처용무기능보유자로 있다. 김태섭과 동갑내기로 가야금을 전공한 홍원기는 가야금
정악의 원로이면서 한편 가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선배 이병성,
가곡 선배 이주환이 있으나 이주환은 가창에서 보다 뛰어난 사범으로
후진지도·가곡보급에 진췌한 공이 지대한 반면 실제 전통가곡의 가창이던 연주는 젊은 시절 가위 홍원기의 독무대요 그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그는 이주환이 가고 그가 보유했던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남창가곡의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제6기 출신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피리전공 이강덕·한재수·한문교·김보영, 대금전공 김창진·윤철영·이해영·심관석, 해금전공 이은영·황지연·심동섭·박일서, 거문고전공 황수정·이채석, 가야금전공 유영수·김상진·이재국, 양금전공 김종성·김덕문 등 20명이다.
제6기 아악생은 정원 18명에서 7명을 더한 25명을 공모했고 수업년한도 종래 5개년에서 1년을 감축해 4개년 수학으로 졸업이 된 것이
이제까지와 달라 있었다.
이강덕은 피리 전공으로 제6기의 수석 졸업이기도 발군의 성적이요,
음악적 재능도 출중하였다. 아악수에 임명되고 구왕궁 아악사, 국립국악원 개원후 국악사를 역임하였다. 전공인 피리 외에도 거문고도
탔고 특히 무용은 졸업후 일반에게 전통무용을 교수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사정으로 국립국악원을 사직,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작곡위원·악장을 지냈고 그 직을 정년으로 물러나 현재는 청주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 국악창작곡만도 관현악 '새하늘'·'죽의 환상'·'해금산조를
위한 합주곡'·'송춘곡'외 그 수효 이루 매거할 수 없게 다작을 하였다.
제6기 출신은 6·25 사변으로 말미암아 크게 피해를 입은 동아리이기도 하다. 이강덕을 제하고는 6·25 동란 중 전사하였거나 실종된 사람만도 적지 않은 것이 그것을 잘 말하고 있다.
황수정은 사변중 생사를 모르고 있다. 황지연·김덕문·심동섭·박일서 등이 모두 전사로 나와 있다. 윤철영 그밖에 한 둘 월북이거나 납북이 된 축도 없지 않을 걸로 알고 있다. 당시 저들의 나이가 의용군에
맞춤이어서 안전하기 어려운 신상이었던 것도 제6기 졸업생에 희생이
보다 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 점 이강덕은 아악부의 막내둥이로 동기생이 못하는 몫까지 혼자서
하는 가위 일당백의 용장이요 맹장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직을 받들고 있는 아악부원양성서 출신은 2기의
김천흥, 3기의 성경린, 4기의 김성진, 5기의 김태섭 네사람이다.
조선고악(朝鮮古樂)의 변천(變遷)과
역대악단(歷代樂壇)의 명인물(名人物)
風 流 郎
‥‥‥ 상략 ‥‥‥
그 후 역대 악단의 명인물은 그 수가 또한 많아서 일일이 매거(枚擧)하기 불황(不遑)하거니와 현재 이왕직(李王職) 아악대 중에는 악사장(樂師長) 명완벽(明完墮)노인은 그의 이름이 완벽이니만치 악계에도 가위 완벽이라 하겠는데 특히 가곡과 가야금에 능하고, 악사 함화진(咸和鎭)군은 전 악사장 함재운(咸在韻)씨의 자(子)로 일반악에 다 능한
중 특히 현금에 더 능하고 그와 백중(伯仲)을 다투는 김영제(金寧濟)군은 가야금의 명수였다.
그리고, 악수(樂手)중 최순영(崔淳永)군의 피리, 이수경(李壽景)군의
현금, 유의석(劉儀錫)군의 대금, 박덕인(朴德仁)군의 생황(笙黃), 안덕수(安德秀)군의 칠현금, 명호진(明鎬振) (明完壁 子)군의 가야금, 박창균(朴昌均)군의 대금은 다 금세 독보이다.
현금으로는 조이순(趙彛淳), 양금(洋琴)에는 백용진(白溶鎭) 노인이 대성이라 하겠고 김계선(金桂善)의 장적(長笛)은 또한 금세의 독보(獨步)다.
‥‥(중략)‥‥‥
옳지 가곡 대가로는 하규일(河奎一) 노인이 제1위를 점할 것이다.
그는 풍류 노인으로 몸이 비록 화류교방(花柳敎坊)에 들어 있으나, 세세(世世) 가곡 대가(大家)로 아악대의 명완벽(明完璧) 노인과 백중(伯仲)을 다투는데, 명(明)씨도 역시 하규일 노인의 부친 하준권(河俊權)씨의 고제(高第)이다.
차외경향(此外京鄕)에 기명(其名)을 저(著)한 인물이 또한 많으나 후일
다른 기회로 미루고 이만 약(略)한다.
《별건곤. 1928年 5월호 pp.154∼157》
나와 대금(大芩)
金 桂 善
나는 명치 24년(1891년) 구력으로 3월 3일 김덕화(金德化)의 장남으로 한양에서 출생 하였읍니다. 부친의 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던 가세가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후해서 영락(零落)하여 한미(寒微)하기 짝이 없는 경향이었읍니다.
당시의 유소들이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서당에 천자문을 끼고 드나들었으나 빈핍(貧乏)하기 마련 없는 집안의 경제는 그거나마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말았읍니다.
어리다고는 하여도 하는 소업없이 빈둥빈둥 집 안에 틀어 박혀 장난이나 치고 노는 것이 안되었던지, 이웃에 사는 부친의 친구에 그 때 겸내취(兼內吹)에 출재(出在)하던 한모라는 어른이, 마침 영문(營門)에서
악수(樂手)견습을 87명이나 모집하니, 이 기회에 한번 응하여 봄이 어떠냐고 종용하는 것이었읍니다.
철 없는 자기야 별다른 생각을 가져 볼 나이도 아니기야 하였지만, 그렇게 큰 기대도 없는 대신 그리 싫은 마음도 없는 것이나, 집안에서는
궁색한 살림에 보탬이라도 있을까 그 한가지 바램에, 14세 소년은 내취도가대청(內吹都家大廳)에 적은 머리를 조아린 것이었읍니다.
까다로운 고시가 있는 것도 아니요, 응모자가 과다한 것도 아니라서
내취(內吹) 겸내취(兼內吹)에는 쉽사리 뽑힐 수가 있었읍니다. 잠간 내취(內吹)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면, 서울안 육영문(六營門)에는 다 각기 그에 부속한 취악대(吹樂隊)가 있었읍니다. 마치 오늘의 군대와 흡사한 것이다.
그러한 여섯 영문의 내취들이 모두 영문 폐쇄와 함께 해산되고, 그 수효도 무척 줄어들어 수십의 악수가 근조 내영(內營)에 부속하여 그 내영 겸내취만이 잔존한 것이었읍니다.
그 내영 겸내취도가는 지금 종일 일정목(一丁目) 각전양복점(角田洋服店)뒤 예전 상사동(相思洞)에 있었읍니다.
그 때 자기가 수업할 악기가 대금으로 선생에게서 지시된 이래 40년이나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금(大 )은 신라 삼죽(三竹)의 하나로 중금(中 ), 소금(小 )이 또한
자재한 것은 아시는 일이지만 대금을 전공한다 하여도, 첫날부터 대금에 착수함이 아니요, 그보다 척장(尺長)도 약간 자르고 지공(指孔)사이도 매우 가까운 중금을 얼마간 능숙한 뒤에 비로소 배우는 것인데
자기도 처음은 중금을 익혔읍니다.
이와 전후하여 나는 궁내부 장악원(宮內府掌樂院)에 출사하시던 당대
대금으로는 비견할 리 없는 최고봉 최학봉(崔鶴鳳) 선생에게 개인교수를 받는 편의를 얻게 되었읍니다.
배우는 이에게 있어서 어진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같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 없는 것인데, 사계에 출발에서부터 이렇듯 은혜 받었다는 것은 진실로 감사로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읍니다.
그보다도 여러가지 사정으로 내영의 겸내취까지도 폐문의 비경에 이르러 입소하여 2년만에 파해버렸는데, 자기와 몇몇만이 운 좋게 장악원에 취직하게 된 것은 이 또한 보이지 않는 힘의 가호라고 믿을 수 밖에 없읍니다.
명치 39년(1906년) 11월, 음악에 종사하려면 누구나 우러러보는 궁내부 장악원에 자기도 사람과 어깨를 겨누고 드나들게 되는 때의 스물도 못된 16세 소년의 득의는 지금도 돌이켜 생각해도 즐거운 것입니다.
더욱, 존경하는 스승 최학봉(崔鶴鳳) 선생 문하에서 일의(一意) 일관대금(一管大 )을 연찬하게되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겠읍니까.
질시, 반목, 파벌도 있었고 해서 최학봉 선생의 비판은 그의 대금의 기와는 매우 거리가 있었으나 제자들에 대하는 선생은 어디까지나 엄격하시고 친절하신 존경 할 어른이었읍니 다.
문하에는 나 이외에도 여럿이 선생의 교수를 입었지만 그 중에도 자기는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주셨읍니다. 그에 따라 동료의 미움도 면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말할 수 있겠읍니다.
그것도 선생은 편애라기보다, 쉬지않고 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끈기
있는 열성을 조금 보아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읍니다.
은사 최학봉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에게 있어서 모두 생생한 기억이요, 거의 육친의 정까지 푸로한 것이나, 다른 날로 미루고, 악기「대금」의 해설을 조금 하여 보려고 합니다.
편집하는 이의 특별한 청이기도 하여 물리치지 못하고 써 보는 것이나, 악기 대금의 이야기는 나보다도 몇배 고명하신 선생이 많을 터인데 기실, 한 하잘 것 없는 그것의 연주자에 불과하는 자기에게 맡기시는 진의는 자못 불가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대로 기록하여 보면 대금은 신라 신문왕시의 창작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왕은 신라 제31대 왕이신데 재위 11,2년인가 하셨읍니다.
그런데, 대금은 신문왕대의 제작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전한다는 아래의 전설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로 신문왕시에 동해 한 가운데 홀연 소산(小山)이 생기(生起)하였는데, 형상은 구두(龜頭)와 유사하더랍니다. 그 후에 한 간죽(竿竹)이 났는데,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고로 왕이
기이하다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르게 하여 그것으로 적(笛)을 만들어 이름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읍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이
비록 있으나, 기괴하여 가히 친하기 어렵다는 것을 신라고기 (新羅古記) 스스로가 부언하였읍니다.
이것으로써 보면 대금을 위의 허황하다 할 괴담(怪談)에 의하여 신문왕 때에 창작된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한쪽으로 생각하여 덜 부합하는 것이나 더 확실한 징거가 모자라는 이 중으론 우선 그런대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겠읍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유하는 것은 자기의 학구적으로는 매우 천박한 견해일 뿐이요. 이런 문제는 달리 동양음악사의 권위에게 사양할 수밖에 없읍니다.
그저 대금을 필두하는 삼죽(三竹)이 신라에서 기원하여 고려, 이조, 현대, 이렇게 오늘까지 전래한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역역한 사실이겠읍니다.
한림별곡(輪林別曲)인가 하는 가사에 관현 자지러진 음악의 도취경을
그린 대목에 최종구(句)를 '一枝紅의 빗근 笛吹, 一枝紅의 빗근笛吹,
過夜景 귀 어떠하니잇고'하였읍니다.
고려조에서도 대금이 얼마나 중요한 악기 이었는가를 잘 증명해 주는
것으로 주목할 것이 있읍니다.
이조에 있어서도 제7대왕 세조대왕이 가야금과 아울러 대금을 선취하셨다는 것은 너무도 대금의 진가를 빛내는 것입니다.
나의 스승 최학동 선생의 일적수(一敵手)으로 명금(名 ) 정약대(鄭若大) 선생이 계셨는데, 정 선생은 그 제일보부터 사람과 상의하여 매일
인왕산(仁旺山)에 등산하여 대금을 취주하기 무릇 10년에 대성한 비범한 어른이었읍니다.
흔히 대금에 선수되는 별다른 비전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도
그 선취하는 묘제(妙諸)의 지시를 바라는 분이 없지도 않은데, 나는 그럴 때마다 많이 부는 도리이외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평에 쫓으면 자기도 무척 천품에 득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내게 음악적 특성이 남달리 지녔는지는 표현할 수
없읍니다.
내세운다면 누가 묻더라도 가볍게 순순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소리치고 .자랑이라도 할 것이 있다면, 남의 곱(倍),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대금을 불었다고 하는 것 뿐입니다.
그 밖에 아무 것도 없읍니다.
중에라도 내가 남에게 뛰어난, 타고난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읍니다.
「난 재분이 없으니까.」 「음악은 예술이니까 그런 소질이라야지.」
눈물나는 정진도 없이 체념해 버리고 범속한 경계에 주저앉아 타협해버리는 젊은 악인들의 무척 마음편한 태도에 접하게 되면, 시세이니까 어쩌는 수 없지 하다가 매우 안타깝습니다.
음악에 대성하는 조건으로 생활의 여유를 울부짖고, 그래야 비로소
그 길에 감연히 매진할 수가 있을 듯이 강개하는 후진도 있읍니다.
자부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까지 걸어온 길은, 오늘날 우리의 후배가 걷는 길 수백 배의 고난의 길이었읍니다.
살림의 궁핍은 차치하고 나로 그 멸시, 냉대, 오욕의 환경에서 우우(優遇)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제법 안정한 자기의 현금 위치에 상도할
때 참는 것만이 귀한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은 것 같이 느끼는 것은 제법 느긋한 심경의 하나입니다.
관악은 40이 명수이니, 50이 그러니 하고 대금도 4,50이면 볼 일 다
본 듯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 먹기에 있지 않은가 하고 싶읍니다.
그야, 체질과 먼저 의논한 후가 아니면 가볍게 단정하기 어려우나 나의 신조는 불 수 있을 때 까지는 대금 불기를 놓지 않으리라 하고 있읍니다.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지병의 신경통이 늘 걱정이나 얼마간은 매우 건강합니다.
《韓光. 1941년 4월호, pp. 258∼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