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고려수지침 대구 복현지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그 때 그 시절 스크랩 국립 민속 박물관 방문기 (3) - 만원데이트(완결)
오분순타 추천 0 조회 136 08.05.03 06: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진속에 너무나 이쁜 모양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의 이름은 화관(花冠)입니다. 화관은 대궐에서는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반가에서는 혼례 때나 경사 시의 대례복, 또는 소례복을 입을 때 착용하였습니다. 원래 중국의 것으로 신라문무왕 때 여자 복식을 '중국 제도화'하면서 들여온 것이며, 그들 복식 제도에서 온 활옷, 원삼 등이 나중에 국속화 된 것과 마찬가지로 화관 역시 거의 국속화 되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 때는 궁중의 내연에서 기녀와 동기, 무녀, 여령들이 썼으며, 그 모양은 약간씩 달랐습니다. 고려 때는 귀족 양반계급 부녀자가 예복에 쓰는 관모가 되었었고, 조선 초기에 일시 자취를 감추는 듯 하다가 연산군 이후에 다시 성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모라기보다는 미적 장식품이 되었고, 한때 모화 관념에 사로잡혀, 화관을 쓸 것인가, 아니면 몽고의 것이라고 일컫는 족두리를 쓸 것인가가 식자들 사이에서 시비가 되기도 하였으나 두 가지 다 병용되어 왔으며, 영조, 정조 양 대에 걸쳐서 가체의 사치로 인한 폐단을 시정키 위하여 족두리를 권장함에 이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하네요. 서민들은 혼례 때 활옷에 화관을 착용하였고, 특히 예관용으로 사용할 때는 칠보 등으로 꾸몄다고 합니다. 즉, 정장에는 족두리를 썼고 화려하게 꾸밀 때는 화관을 썼습니다.(백과사전 참고)

사진 왼쪽부터 진열되 있는것은 '남바위,호건,조바위' 입니다. '남바위'는 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하나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용하였으며 상류층 남녀가 쓰다가 착용범위가 넓어져 서민층에서도 썼다고 합니다. 호건(虎巾)은 조선시대 돌쟁이부터 5∼6세까지 사대부가의 사내아이가 머리에 쓴 건(巾)으로 보통 오방장두루마기(까치두루마기), 전복 또는 사규삼과 함께 착용했습니다. 호건의 모양은 복건과 거의 같으나, 다른 점은 복건의 머리부분에 호랑이 모습을 수놓았다는 것이라고 하네요. 조바위는 여자들이 쓰던 방한모의 한 종류라고 합니다. 참 이쁘네요.^^

장원급제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예비 암행어사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듯 보입니다. 지금 현재로 따지자면 '카퍼레이드' 정도로 상징될 법한 일인데 앞과 뒤를 따르는 수행원이 상당히 많았나 봅니다.

신랑,신부가 결혼하는 모습을 인형으로 재연(再演)해 놓은 장면 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 절하고 서로 합환주를 마시는 예식을 초례(醮禮)라고 하며, 예식을 치르는 곳을 초례청(醮禮廳)이라 합니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초례청은 신랑집에 차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래의 관행에 따라 신부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차렸습니다. 초례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음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청색,홍색의 초,솔가지와 대나무,수탉,암탉,밤,대추,붉은 팥,검은 콩등을 차렸다고 합니다. 초례청에서는 진행자가 초례상 뒤쪽에 서서 식순에 따라 혼례식을 진행하였는데, 음양의 원리에 따라 신랑은 동쪽,신부는 서쪽에 서서 예식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는 예식이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나무기러기' 입니다. 신랑이 신부의 부모 또는 친척 앞에서 신부와 백년해로 할것을 서약하는 전안례(奠雁禮)때 올리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라고 하네요. 상당히 잘 만들어져 보기에도 참 멋져 보입니다. '전안례'란 신랑이 신부 집에 기러기를 가지고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것이라 합니다.

'무명 베짜기'를 하고 있는 인형과 베틀의 모습입니다. 무명은 실이 감겨진 도투마리를 베틀에 걸어 놓고, 한 손으로는 바디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북을 들어 발을 당겼다 폈다 하면서 짜나갑니다. 보통 굵기가 8새인 무명 1필(40자: 길이 20m, 너비 36cm)을 짜는데 목화 20근이 필요하며,또한 씨아질부터 무명 짜기까지 김쌈 전 과정을 통해 완전히 1필을 짜는데는 약 5일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굉장한 막노동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이를 가지고 성인 옷 한 벌을 짓는데는 1필 반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런 부녀자들의 고된 생활을 길쌈 과정에서 삼 삼기노래,물레노래,베틀가 등에 실어 표현했다고 합니다. 옷 한벌을 위해 그토록 고생하셨던 어머님들을 생각하니 숙연해 지는군요. 

고구려 벽화에서 복원한 '삼국시대 귀족차림'의 모습입니다.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화려한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원색(原色)에 가까운 색상처럼 눈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 은은한 색감(色感)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멋진 의복들이 있었음에도 현시대에 응용되어 대중적으로 통용(通用)되지 못한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위에 인형을 보면 영화 '스켄들'에 출연한 전도연씨가 생각 납니다. 이 옷의 이름은 '장옷'이라 하며 조선시대의 복식(服飾)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우리 옷의 형태를 아름다운 한복양식으로 정형화시킨 시기라고 합니다. 유교적인 이념은 새 왕조를 복식제도의 재정비를 가져왔고 그에 바탕한 복식제도를 정착 시켰다고 합니다. 아울러 면화의 보급과 중국과의 교역으로 옷의 재료가 다양해져 한복양식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더욱 세련되졌다고 하네요. 여자 옷은 저고리가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생기고 삼회장 저고리가 생겼으며 은은한 색조 또는 강렬하게 대조되는 색과 흐르는 듯한 선을 조화시킨 것이 특징이였다고 합니다. 정말 단아하고 멋진 모습입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의 이름은 활옷(闊衣)이라고 합니다. '활옷'은 조선시대 여자 예복의 하나로, 화의(華衣)가 화의(花衣)로 변음된 것이라 추측됩니다. 조선초기 명(明)의 장배자(長褙子-조끼형식의 소매가 달린것)가 우리식으로 변모한 옷으로 상류계급에서 가례(嘉禮)때 주로 사용하였으며,일반서민도 혼례때에는 사용이 허용되었습니다.옷에 새겨진 문양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바램인 건강과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는 것이였으며 빨강치마 노랑저고리 위에 활옷을 입고,화관을 쓰는 것이 바른 예법이라고 하네요. 일본에 갔을때 일본 전통복장을 입은 작은 인형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이런 활옷을 입힌 인형을 관광상품으로 멋지게 만들어 판매 했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몸속에 호신용으로 하나씩 지니고 있었을 '장도' 입니다. 장도(粧刀)는 지니는 곳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허리에 차면 패도(佩刀), 주머니 속에 넣으면 낭도(囊刀)라 합니다. 신라시대부터 패용(佩用)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항상 차고 다니면서 주머니칼처럼 사용했습니다. 장도는 일상생활에 쓰거나 위급할 때를 대비한 호신용, 노리개와 함께 장신구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남자들은 주머니나 담배쌈지와 함께 허리띠에 찼는데, 장도끈은 요대(腰帶)와 같은 끈목으로 하기도 하고 비단을 접어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녀자들이 지니고 있던 장도는 호신용으로서 자기 몸을 지키거나 자결할 때 사용했다고 하네요. 사극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지요?!(^_^)

옛날 사람들이 신던 여러종류의 신발들 입니다. 왼쪽에 나막신,가죽미투리,짚신,등구니신,미투리 입니다. 필자가 신어본 것은 하나도 없네요.(^_^) 예전엔 도로가 지금처럼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가 아니여서 비가오면 상당히 질척 거렸을 겁니다. 그래서 나막신의 높은 굽이 걸어다니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을거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 '나막신'은 처음에 목혜(木鞋)·목극(木屐)·각색(脚濇) 등으로 통칭되었는데, 이는 '나무신'이 잘못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게다[下馱]와 비슷한 초기의 나막신은 나뭇바닥에 끈을 매어 신고 다녔습니다. 조선시대의 나막신은 보통 오리나무(통나무)·소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만들었으며 남자용은 거칠었고 여자용은 무늬를 넣어 맵시있게 만들었습니다. 또 마모(磨耗)를 방지하기 위해서 굽 끝에 쇠발을 달기도 했습니다. 나막신은 신분과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신다가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이로써 '국립민속 박물관'을 다 돌아 보았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시간이였고 재미 있었습니다. 박물관 관람후 주위에 '경복궁'도 있고 '인사동'이나 '삼청동'으로도 갈수 있으니 아마도  좋은 시간은 이여질듯 하네요.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