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잘 지내시고 계시지요? 5월달 답사는 우리 생일잔치를 해서 그런지 많이 기다려지고 설레입니다. 이번 생일상은 어떻게 차려야 많은 분들이 맛있게 드실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꽤 바쁜 일상을 보내곤 하지요.
'내가 부지런히 걸으면 없던 길도 생기지만 내가 걸음을 멈추면 있던 길도 없어진다.'
우리 모두 함께 걸어온 길이기에 더 소중하고 더 애틋하고 그러지 싶습니다. 저만의 생각은 아니겠지요? 두달에 한번 씩, 일년에 여섯번이 되고, 그 세월이 쌓이고 쌓여서 11년이라는 꽤 도타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두달에 한번은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푸짐한 생일상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힘내서 열공하시고, 좋은 기운 듬뿍안고 일상으로 복귀하시면.... 저는 행복하나이다.
소확행[小確幸]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1. 답사일 : 2019년 5월 12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김성 김명내 선생 묘(충북 충주시 신니면 모남리 산43-1)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시숙(始叔), 호는 천관(川觀). 광산부원군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이다.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나라가 망하자 존양대의(尊攘大義)를 지켜 벼슬에 뜻을 버리고 충주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썼으며, 일명 황명처사라 불렸다. 순조 때 충효와 학행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다.
*** 동문회 발족기념식 ***
중앙탑(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47-5)
[충주 탑평리 7층석탑]
국보 제6호. 화강암 석재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寺刹名)은 알 수 없다.
석탑의 건조연대는 기단부에서의 탱주의 배치, 탑신 굄대, 탑신부 탑신과 옥개석 등의 짜임 등 각 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리 선생 묘(충북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산73)
청풍김씨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장군 김순웅(金順雄)의 12세손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하여 고려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貫鄕)을 청풍(淸風)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김리는 청풍김씨 김의지와 광산김씨 부인의 아들로, 한산이씨 부인과의 사이에 극성 극함 극심 세 아들을 두었다.
김리의 묘는 무학대사가 소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이시진 선생 묘(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산17-1)
이시진(1578~1633)은 전주이씨 임영대군파 6세손이며, 조선시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기록된 효자로서 국가로부터 정려를 받은 인물이다. 무덤은 평면 사다리꼴 형태이며 가로 6m, 세로 6m, 높이 1.5m 정도이다. 부인 전주 황씨와 풍산 심씨를 합장하였다.
묘는 조성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순조 12년(1812)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시진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계체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후기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진다.
묘소 아래로는 이만재 묘, 이세언 묘, 이억령 묘, 이현창 묘가 있다. 5대묘는 봉분과 석물(상석, 혼유석, 향로석, 석비,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으며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등은 조성당시의 석물이며 석비와 망주석은 대개 2003년 종중에서 일괄 건립한 것이다.
또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등장하는 이시진의 효행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4) 허적 선생 묘(충북 충주시 오량리 산35)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이다. 허초(許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잠(許潛)이고, 아버지는 부사 허한(許僩)이며, 어머니는 김제(金悌)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9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그해 효종이 승하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만 1년 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 설)에 맞서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이번에는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1680년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들어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서인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관작을 추복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보각국사 부도탑 및 청룡사지(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561)
보각국사의 본관은 풍양(豊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 풍양조씨 전직공파 조지란(趙之蘭)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어머니는 청주경씨이다.
어머니의 권유로 13세부터 대선사 계송(繼松) 밑에서 공부하여 1341년(충혜왕 복위2년) 22세의 나이로 승과 선종선에 급제했다.
1370년(공민 19년) 공부선장(工夫選場)에서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궁궐에 머물게 하는 줄 알고 도망쳐 봉황산에 숨었다.
1383년(우왕 9년) 국사에 책봉되고 개천사 주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왜구가 충주에 침범하자 광암사로 옮겼다. 1388년(창왕 즉위년) 개천사로 돌아왔고, 1392년(공양 4년)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축하의 표문을 올리고 충주 청룡사로 옮긴 후 1392년(공양왕 4년) 9월 18일 입적하였다.
국사가 입적하자 조선 태조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權近)이 비문을 짓고 김천택(金天澤)이 글씨를 써서 1394년(태조 3)에 세우고 탑명을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왕의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은 것은 속세의 명리에 초연한 참된 구도자의 길을 걸었음을 말해 준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도 교유했다.
전해지는 저서 4권이 있는데, 1378년에 저술된 『선림보훈(禪林寶訓)』 2권 2책은 보물 제700호, 1378년에 저술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권 상·하〉 2책은 보물 제720호, 1379년에 저술된 『호법론(護法論)』은 보물 제702호, 1381년 저술된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은 보물 제6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김 종대 (010 - 4234 - 7074) 실장 하 태현 (010 - 9239 - 2139)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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