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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미 스크랩 목포문단木浦文壇 소사小史
녹유 추천 0 조회 192 16.05.02 10: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cafe.daum.net/qurwjsghktlf/6sal/104

* 이글은 이미 발표되었으나 편집자의 착오로 누락된 부분이 많아 다시 수정 보완하여 목포문학에 재게재함

(자료)

목포문단木浦文壇 소사小史

최 재 환

목포를 흔히들 예향이라 부른다. 그것은 단순히 목포가 많은 예술인을 배출한 도시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시민 모두가 예술을 사랑하고 널리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예술인들이 시민들의 사랑속에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또한 도시 전체가 예술적 분위기에 젖어 있다는 뜻이리라.

문단에 등단하는 일이 하늘의 별을 따는 일보다 힘들다는 지난 날에도 목포의 문인들은 타지방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별로 어려움 없이 한국문단을 파고 들었었다. 어렵게 등단을 해도 글을 써서 생활하기 힘들던 시절이라 일자리를 찾아 서울을 비롯한 외지로 자리를 옮긴 문인들도 많았지만 그러나 이들의 가슴은 언제 목포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기도 했었다.

요즈음은 많이 극복되었지만 전근대적 사고 개념인 ‘경향’, 즉 중앙과 지방이라는 종속적 의미가 강요되던 서울 중심 문화의 오만과 횡포에 시달리면서도 불리한 지역적 특성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과 예술인들이 예향정신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출판의 규제가 풀려 많은 문학지가 범람하는 바람에 문학인구가 배가되고 있지만, 그래도 목포문단은 크게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내실을 다지고 있다.

이제 목포 시민들의 가슴에 흐르고 있는 뜨거운 열정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어 아직까지 꺼지지 않고 활활 타고 있는지를 연대별로 작가와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허지만 자료가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과 신문, 도서관, 문화원, 인터넷, 또는 지난 날 스크? 자료들을 뒤적이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 지방 문인들의 정확한 자료요청을 했는데도 응답이 없어 부득히 필자의 기억 내에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아쉬움으로 남긴다.

목포의 근대 문학은 비운의 작가 초성 김우진과, 한국 여류문학의 상징인 소영 박화성, 그리고 수필가이자 비평가인 청천 김진섭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목포 문학이 일찍이 싹이 트게 된 간접적인 원인은 1897년 목포가 개항하면서 통상무역이 활발해진 점과 일본 유학생이 타 지역에 비해 눈에 띄게 많았다는 점을 빼 놓을 수 없다. 광주, 나주, 순천, 영광 등 소읍에서는 고작 서너 명에 불과했는데 1930년대만 해도 목포에서는 그 시기적 선후 관계는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많은 일본 유학생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목포 사람의 진취적인 기질과 예능면의 잠재적 능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실증의 하나로 1920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지면에「木浦靑年의 노래」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상 높고 용맹스런 우리 청년아

오늘이 우리들의 활동할 때일세

온 세계의 우승권을 목표삼아

대활보와 대진취를 활동해 보세

활동하세 굳은 마음으로 활동하세 끝까지......

김우진은 1897년 9월 19일 출생하여 1926년 8월 4일 시모노세끼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던 관부 연락선 뱃전에서 가수 윤심덕과 투신할 때까지 29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세계 문학작품들을 모두 섭렵, 가장 합리적이며 냉철한 서구적 교양과 인격을 갖추었다.

1920년「극예술협회」를 조직, 신극운동에 앞장섰으며, 1921년 ‘학지광學之光’에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사망하기까지 창작 희곡 5편, 시 48편, 번역 3편, 연극 및 문학 비평 10 편, 논문 6편 외 일기, 수필 서간문 등을 남겼다.

그의 문학사적 업적은 주요한 이전에 벌써 근대시를 실험했고, 20년대 초 체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비평계의 무잡성을 매도했으며 어느 작가보다 먼저 근대극다운 희곡작품을 썼을 뿐 아니라, 서구를 풍미했던 표현주의 문학사조를 받아들여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학사상 최초며 최후의 표현주의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화성은 1904년 출생, 1988년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1922년 영광중학원에 부임, 조 운이 운영하는「자유예원」에 작품을 발표, 세 번이나 장원을 했으며, 방직공장 여공을 주인공으로 썼던 <추석전야>로 1925년 1월「조선 문단」에 춘원 이광수 선생의 추천을 받아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로 등단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2년 발표된 <하수도공사>부터였으며, 계속해서 여성으로서의 첫 장편소설이자 최초의 신문 연재소설이었던 <백화>를 동아일보에 6개월 동안 연재하여 독자들의 열열한 성원을 얻기도 했다.

계속해서 <북국의 여명><홍수전야><고향없는 사람들>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으며, 1940년대 일본의 조선어 말살정책과 일본어 사용의 강요가 노골화 되자 박화성은 절필하고 낙향하여 후배 양성에 전념하기도 했다.

1930년대 박용철, 김영랑 등의 시문학파가 중앙 문단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을 무렵, 우리 목포에서는 「호남 평론」을 중심으로 시문학의 기반을 닦고 있었다.

「호남 평론」은 김우진의 동생인 김철진이 사장이고 배치문이 주간이었으며, 여기에 참가한 필진은 오덕, 정철, 나천수, 박동화, 김일로, 이영해, 심인섭, 그리고 ‘목포의 눈물’ 작사자로 알려진 문일석 등이었으나 훗날 동인들은 뚜렷한 문학적 성과 없이 해방을 맞게 된다.

그리고 1932년 광산 출신 명창 임방울과「목포시사」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전국 규모의 한시 백일장을 봄, 가을에 두 차례씩 열었던 무정 정만조의 활동도 기반을 다지는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겠다.

김진섭은 1903년 8월 출생했으나 묘가 나주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만 무성할 뿐,사망 년대는 기록이 없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 대학 문학부 독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1926년 손우성, 정인섭, 이하윤 등과 ‘해외문학파’ 일원으로 ‘해외문학(1927)’창간에도 참가했다.

김진섭은 ‘해외문학’ 창간호에 <표현주의 문학론>을 발표한 이래 독일 하인리히만의 소설인 <문전의 일보>를 번역했고. 독일의 시인 케에프 메이야의 시 <모든 것은 유희였다> 외 7명의 독일 시인의 시도 번역 소개했으며 1931년 윤백남, 홍해성, 유치진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35년에는 「목포평론」,「전남평론」의 속간 형식인 「호남평론」이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직접 창작에 임하기도 했던 김철진(김우진의 아우)이 주간을, 나만성이 편집책임을 맡는 터라 많은 문인들의 발표의 장이 되기도 했다. 필진을 보면 대부분 문학 동호인들이었지만 방인근, 이무영, 박화성 등이 동참하여 무게를 실어 주기도 했다.

1940년대 초 목포에서 문학활동을 하고 있던 동경 유학생 홍순태, 박문석, 박경창, 장병준, 백두성 등이 가끔 싸구려 설렁탕 집에서 막소주를 마시면서 문학에 도취하기도 했으나 결실을 본 것은 광복 후 「호남평론」에서 활동하던 문인들과 문화운동의 중요성을 공감 차남진, 천독근, 김철진 등의 도움을 얻어 시, 수필, 시론, 꽁트 등을 게재한 타블로이드판 문예지의 발간이었다. 이것이 1945년 탄생한 「예술문화」다.

목포 연극의 터밭을 기름지게 일궈놓은 박경창은 1945년 「예술문화」를 통해 등단하며 훗날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그 이면상을 작품의 세계로 즐겨 택했다.

1946년에는 조희관, 차재석, 박기동, 박진철 등이 모여 조희관의 발의로 「보국문학」을 발간하였고, 박화성, 이동주, 이가형, 박기동, 나천수, 박종옥, 오성덕, 심인섭, 정철, 홍순태, 박문석, 박경창, 장병준, 백두성, 서광호, 김일로, 최기영, 심응섭, 박동화, 강원순, 이영해, 문일석 등이 주로 활동하였다.

1947에는 목포에서는 최초로 박화성의 단편집 「고향없는 사람들」의 출판 기념회가 열렸고, 또한 1948년에는 국문학에 열중해 오던 박종옥(1953년 작고)의 상원桑園 시조집을 발간했는데 이태극의 「시조의 사적연구」외 김해성의「한국 현대 시문학 전사」,「한국시조 큰 사전」에 영인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1951년 9.28수복이 되자 해군 목포경비부가 정훈사업으로 월간지 「갈매기」와 주간지「전우」를 발간했다.

편집위원은 해군 정훈실의 위촉을 받은 조희관, 이가형, 장병준, 백상건, 이진모, 장덕, 김장한, 차재석 등이 편집주간은 「갈매기」는 김평옥이,「전우」는 조희관, 차재석이 맡았었다.

「갈매기」는 비록 지령 4호로 중단 되었지만 목포문단의 바탕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었고 한편 6.25이후 모든 출판계를 통털어 최초의 월간지였다.

1951년 2월 1일자로 발행된 창간호의 필진을 보면, 시에 김현승, 조희관, 목일신, 이수복, 박흡, 이석봉, 박순자, 임성순, 장병준. 소설에 이가형, 김해석, 희곡에 차범석 등의 작품이 실렸으며, 이어 정소파, 이영식, 이을호, 허건, 김평옥, 홍순태, 손철, 김방한, 이동주, 전병순, 김승한, 승지행, 임병주, 조영암, 박계주, 김송, 공중인, 국승돈, 이금남 등이 참여해 피난살이하는 문인들의 작품발표의 광장이 되어 주었고, 한편「전우」는 16절판 20여 페이지에 시, 꽁트, 수필, 희곡 등 중.고생 작품을 실어 미래의 한국문단을 예약하기도 했다.

1951년 1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목포지부」가 발족되었고, 이때 차범석은 목포문화협회 주최 예술제에서 2막극 「별은 밤마다」를 상연함으로써 실질적인 처녀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952년 서근배의 단편「항구」가 2년전「탁보」(1950)에 이어 「문예」에 추천됨으로써 목포를 널리 알렸고, 강범우는 학생잡지 「학생예원」을 발행하기도 했다.

500부 한정판으로 1952년 9월 창간된「시정신」은 목포 뿐 아니라 한국문단사에도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잡지다. 차재석의 편집으로 항도출판사에서 발행된「시정신」은 이병기, 신석정, 서정주, 김현승, 박흡, 이동주, 박용철의 시와 계용묵의 산문을 싣고 있어 명실공히 한국 대표시인들의 집결지가 되었고 1966년 5집까지 이어졌다.

전쟁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선배들의 영향을 받은 젊은 문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가 바로 1950년대 중반부터다.

1953년 김일로의 동시집 「꽃씨」가 발행되어 이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며, 1954년 조희관의 수필집 「철없는 사람들」나왔었고(뒤에 딸 조수향이 부친의 유지를 기리고자「소청문학상」제정했고, 김효자, 임성순 등 선생의 항도여중 제자들이 힘을 모아 목포문학관 앞 길 옆에 문학비를 세움), 1955년「밀주」에 이어 56년 「귀향」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차범석은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성장 예술원 원장을 지냈으며, 57년 서울신문 장막 희곡 모집에 박동화의 작품이 당선, 이어 권일송이 57년 한국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불면의 흉장」「강변이야기」가 각각 당선, 목포문단을 화려하게 수 놓았다. 이해에 한국일보에 김재희, 정일진이 시를, 이창렬이 소설을 선 보여 항구를 뜨겁게 달구었으며, 「학원문단」의 기수 정규남과 정영래의 본격적인 활동도 이무렵이다.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는 박정온의 시집「최후의 서정」과 뒷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당선되었던 김우정의 시집「태양과 지옥의 시」가 발간된 것도 이 무렵이다.

최일수의 평론 「현대문학과 민족의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김상일의 평론 「문체론에의 반성」과「한국의 상징주의」가 현대문학에 추천되던 것도 이 시기다.

이 시기에 문학 동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었는데 정규남이 주동이 된 「시와 산문」과 최성문, 안정훈, 김우정, 강보현, 이영식, 오유찬 등의 「각서」, 그리고 김소남, 김희웅, 김길주, 고광득 김종규 등이 참여한 「낙서」가 돋보인다.

또한 훗날 목포 문학의 밑거름이 되었던 각 고등학교 학생동인지를 살펴보면, 목포여고의「송사리」, 목포사범의「해솔」,「벌판」, 목포고의「밀꽃」,「보리수」, 문태고의「바위」, 동광고(홍일고 전신)의「호박」, 목포상고의「여울」의 멤버들이 마치 경쟁하듯 항구를 누볐었고, 이들 중 각 학교 대표들이 모여 「청도靑濤」동인회를 조직 활동한 일은 퍽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시 낭송회라든가 상호 작품비평, 동인지 발간 등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청도」동인으로는 김순광(사범), 신균준(영흥), 이인택(한일은행), 이석운(목고), 이광섭(상고), 박정환(문고), 박준배(동광), 그리고 현재 문단활동을 하고 있는 최재환(상고), 이태웅(사범), 미국 L.A에 거주하며 국내 문예지를 통해 평론, 수필, 시로 등단한 박영호(사범) 등이다.

1958년 박화성의 차남 천승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점례와 소」가 당선, 59년에는 현대문학에 「견족」「내일」이 추천, 64년 국립극장 장편 현상모집에 희곡 「만선」이 당선하는 등 분단과 산업사회가 낳은 모순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정규남의「허공에 머리칼 하나」가 발행된 것이 이 무렵이며, 정영래는「불모지대」를 상재하며 그후 「문학예술」에 〈동구밖〉이 추천되기도 한다.

윤종석은 국도신문, 평화신문,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와 「자유문학」, 「풀과 별」을 통해 등단하며 시집 「환상무도」를 상재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등단한 문인으로는 최일수 (조선일보:평론), 차범석(조선일보:희곡), 이창렬(한국일보:소설), 박동화(서울신문:희곡), 권일송(한국일보, 동아일보:시), 김재희(문학예술, 한국일보:시), 윤삼하(조선일보:시), 박훤(전남일보:시), 천승세(현대문학:소설), 최덕원(시조문학:시조), 정일진(한국일보:시), 윤종석(평화신문,국도신문:시), 박문재(여수일보:시), 최인훈(자유문학:소설), 전승묵(한국일보:시) 등이다.

1958년 9월에는 목포문화협회(회장:남농 허건)와 목포문학회(회장:차재석)가 창립되어 명실공히 조직적인 문단활동을 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목포문단은 더한층 활발하게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1960년을 목포문단사에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은「목포문학」의 창간이다. 발행인은 차재석, 편집위원은 백두성, 전승묵, 차재석, 김우정, 권일송, 정규남 등이며 181페이지 분량이었다.

1961년에는 최하림, 윤종석, 정일진, 김중식, 최규철, 김소남, 최광섭, 박금석 등으로 구성된「아틀라스의 사람들」이나 김우정, 최성민, 차양, 라향 등의 「아카데미」동인들이 문학의 씨 뿌리기에 최선을 다 했으며, 목포문화협회도 한국예총 목포지부로 개편되었다.

최일환이 1963년 아동문학에 동시 ‘선생님이 나를’이 추천 받았고 김현, 최하림은 강호무, 김산초.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동인활동을 펼쳤는데 5집까지 발간되었다. 천승준이 현대문학에 평론 「인간의 긍정」(59)「현대적 작가형」으로 추천, 김우정이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미망迷妄의 도표道標」로, 낭만파 시를 다룬 박진환의 평론 「수난기의 유산」이 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 1964년 최하림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한 올훼의 회상」으로 당선, 그리고 66년 윤종석이 현대문학을 통해「검척기」로 등장한다. 한편 정규남이 현대문학에 「내 가슴에 피는 꽃」으로, 박건한이 <문학>신인상에 「밤바다」외 3편으로 당선하기도 한다.

황지우 시인이 ‘내 개인적 예감으로는 김현은 우리의 근대문학에서, 그의 생존시기를 전후로 1세기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비평가가 아닐까 한다.’라고 평가했던 평론가 김현이 서울대 불문과 재학시절 「나르시스의 시론-시와 악의 문제」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하기도 한다.

196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김길호의 희곡 「소매치기」가 당선, 그후 김길호는 연기자로도 대성했으며, 주정연, 정영일, 김창완, 정설헌, 박광호, 승린, 양문열, 정지하, 윤미순, 부원배 등의 시 전문동인지「흑조」가 창간되던 해다. 이들은 ‘어둠을 지나 밝음에로 또는 미명을 거쳐 참다운 삶에 옮겨 가고자하는 의지로서의 검정색 이미지’를 내걸고 청마 유치환의 격려사를 머리에 곁들이며 창간호가 냈었다. 또한 60년대 학생동인의 대명사인「강강수월래」「징검다리」「뚝배기」의 활동도 활발했다.

1967년에는 생활속에서 문학을 찾고, 문학의 길을 가면서 생활하는 생활문학의 시도로「보륨문학」이 창간된다. 6호까지 발간되었으며, 개업 의사였던 박동철을 중심으로 이태웅, 정영수, 김관재, 임차랑, 박용주, 김봉식, 명기환, 이재용, 임중철, 최덕원, 김충곤, 차원재 등이 처음에, 뒤에 나순녀, 김순녀, 안양순이 참여한다.

최일환의 첫 동시집 「푸른색 웃음이」가 나온 것은 1968년이며, 목포에서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은 1972년 영흥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다.

이어 교단중심의 문학 써클로 박현숙, 김용원, 이준행, 나영복, 김정옥, 김현수, 박종봉, 김성자, 김길순, 양대성, 강갑순, 양문열, 양재철, 김원기, 박진남, 김준기, 홍성구, 박무웅 등의 「해안선」이 창간되어 계간으로 8집까지 발간되며, 윤미순, 김상수, 김성원, 양계승, 김정원 이무성이 뒤에 동참했다. 또한 김학래, 최두호, 박성천 중심의「목요회」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69년은 김지하가 <시인>지에 「황톳길」「비」등을 발표하면서 후에 민중문학의 기수가 되었고, 권일송의 제2시집 「도시의 화전민」, 박광호의 「금단의 늪」이 발간되기도 했다. 또한 박순범 김학래 김재희 등이 주축이 되었던 「목문학」이 얼굴을 내민다.

1960년대 등단 문인은 천승준(현대문학:평론), 윤종석(자유문학,현대문학:시),조정자(여원:시), 김정숙(현대문학:시), 김하림(자유문학:시), 박홍원(현대문학:시), 최일환(아동문학:동시), 김현(자유문학:평론), 김송희(현대문학:시), 최하림(조선일보:시), 김종한(서울신문:동화), 김길호(중앙일보:희곡), 천승세(국립극장:희곡), 김학래(새교실, 교육자료:수필), 박훤(TBC-TV:드라마), 송기숙(현대문학:평론), 정규남(현대문학:시), 박건한(문학:시), 원갑희(중앙일보:희곡), 정영일(문화공보부:시), 강무창(전남일보:소설), 김엄조(호남매일:시), 김지하(시인:시), 양동온(교육자료:동시) 등이다.

1970년대는 사회의 혼란속에서도 서울에서 원로 문학인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기도 하고, 출판기념회, 시 낭송회, 시화전 등으로 겉으로는 평온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내실을 기하면서 타오르는 문학적 정열을 억제하며 내일의 힘을 축적하는 시기였다. 한편 김익배 편집, 이복주를 발행인으로 「월간향토」가 1972년 6월 30일부터 1984년 9월 사이 27호까지 발행되어 종합지로써 한 몫을 톡톡히 했음도 간과할 수 없다.

1970년 정중수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하늘」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강가에서」가 각각 당선 기염을 토했으며, 주정연의 시집「인구문제」도 이 해에 간행되며, 1971년엔 차원재의 「뿔난 염소」가, 1972년엔 김재희의「우울의 바다」,

1976년은 새로운 동인지 「청호」와「나루」가 창간되기도 한다.

「청호」는 목포의 옛 이름을 표방, 이미 1974년에 결성된 문학 동인회로 40대 문인들이 향토를 지키면서 목포문학의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기치를 내세운다. 현재까지 멤버는 바뀌었어도 이어지고 있는 장수 동인회로 창간 동인은 김신철, 김재희, 문성원, 양문열, 박순범, 이태웅, 김학래, 최일환, 최재환 등이다.

「나루」는 목포시 대학 연합체 동인지로 시에 강정숙, 신수균, 박순례, 신종식, 황부영, 최점순, 지형원, 전성연 등이 수필에 박영자, 박원석, 윤종기, 정희숙, 이문임, 문행규, 추행수, 양선일 등이, 오재원, 박수호가 논단을, 채희윤이 희곡으로 참여한다.

1974년엔 양문열의「민들래의 말」이, 그리고 최연종의 처녀시집「어떤 연가」, 문성원의「작은 바람이」,그리고 김신철의「이곳으로 좀 오십시오」가 상재된 것이 75년이다.

특히 1976년은 박훤이 월간문학에 「모가지頌」으로 등단했으며, 김학래의 수필집「겨울밤」이 발간되며, 조승기가 소설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돌을 던지는 여자」로, 김청원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두 개의 얼굴」로, 최재환이 중앙일보(소년중앙) 신춘문예에 동시「고추잠자리」와 월간「시문학」지에 시「표구속의 얼굴」의 추천으로 등단한다.

그 해에 최재환의 처녀시집 「표구속의 얼굴」과 김종두의「해님이 사는 꽃밭」이 이어 발간된다.

또한 김재용이 78년 아동문예에 「종소리」로, 박순범 또한 78년 아동문예를 통해 등단하며 최건이 시집 「풀잎에게」를 발간하기도 한다.

정태정씨가 12회, 16회「신동아」넌픽션에 최우수 당선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뒤, 김상석은 월간문학으로, 고정선은 아동문예, 김광채는 아동문학, 정대성은 아동문예로 얼굴을 내민다.

1970년대 등단한 문인은 정중수(한국일보:시,동화. 중앙일보:동시 ), 허형만(월간문학:시. 아동문예:동시), 주정연(시집:인구문제), 이지흔(전남일보:희곡, 한국일보:소설), 윤미순(새교실:동시), 김청원(중앙일보, 서울신문:희곡), 조승기(중앙일보:소설), 정일진(현대문학:시), 김종두(소년:동시), 최재환(중앙일보:동시, 시문학:시), 박훤(월간문학:시), 김수기(서울신문:넌픽션), 서오근(월간문학:동시), 김종두(소년:동시), 김양호(한국일보:소설), 김재용(아동문예:동시), 박순범(아동문예:동시)김시일(월간교육) 등이다.

1980년대는 이 고장 문학의 발전과 문학정신의 저변확대를 위해 애쓰는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국문협의 전국순회 문학강연에서 소설가 김동리 선생「신인간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소설가 정을병의「문학에 있어서의 진실문제」,김윤성 시인의「왜 시를 쓰는가?」를 통해 참석자의 문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며, 8월 2일부터 4일까지 한국현대시인협회는 목포해양대학에서「현대시의 실험과 개방성」이라는 주제로 김규태 시인의「해양문학과 현대시」, 신세훈 시인의「시는 왜 존재하는가」,함동선 시인의「현대시는 어디만큼 왔나」, 김재희 시인의「목포문단의 오늘」을 발표하여 성황을 이루었던 일이 새삼스럽다.

80년대는 문학활동도 돋보였지만 초창기 목포문단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문인들을 잃은 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

목포문단의 산 증인으로 향토예술인의 긍지를 심어준 다목동 차재석 선생이 83년 2월 6일 타계했고, 85년 2월 4일에 문성원 시인, 12월 8일에 황의돈 시인, 87년 9월 15일 정규남 시인, 88년 1월 30일 소설가 박화성 선생, 89년 9월 1일에는 박순범 시인이 각각 유명을 달리했다.

81년 조승기의 소설집「돌을 던지는 여자」, 86년엔 시집「씨」가 출간 되었으며, 84년 10월 27일 열린 한국현대시조협회「’84 목포대회」는 「현대시조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서울여대 김준 교수, 현대시조 주간 이우종 주간, 박순범 시인, 목포대 허형만 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흑조」시인회가 황금찬 시인을 초청 시의 밤을 8월 21일 열었고, 황의돈 시인 유고시집 「백년초」발간 기념회를 시립 도서관에서 12월 7일 가졌었다.

80년 양동온에 의해 동인지「시류」가 탄생했고, 81년 해외에까지 선풍을 이르켰던 김시라의「품바」가 등장하며, 82년엔 김재용이 동시집 「종소리」를, 84년에는 동인「시울」이 발족, 동인지 창간호를 발간했는데 양회성, 홍로기, 김현수, 김영미, 김화숙, 김선기 등이 참여했으며, 뒤에 김민재, 이동범, 최재건, 류현옥, 박소미, 서유미, 고춘림, 황금산, 김광우 등이 동참했다. 또한「새솔문학」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명기환이 시문학을 통해 등단하고, 처녀시집「목포항」을 발간한 것이 1984년 3월이며, 김수기의 수필집 「당신은 바람을 보았는가」가 나온 것은 1988년이며, 시집「그렇게도 먼 지구」,「즐거운 하드록」을 상재한 신정숙이 「현대시학」을 딛고 기지개를 켠 것은 1989년이다.

하나 더 남기고 싶은 건 1980년「문주회文酒會」라는 시인들의 친목단체 조직이다. 황의돈 시인을 주령으로 술을 즐기는 시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창작의욕을 북돋우자는 모임이었다. 창립 멤버는 황의돈, 최건, 김종두, 김엄조. 주정연, 최병두, 최재환으로 모이는 장소는 해양대학교 뒷산 모조등대 아래였으며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흩어져 추억을 되새김하며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 최초(?)로 지방 문학단체를 조직하여 예향 목포의 자존심을 굳게 다지던 한국문협 목포지부가 지부장 임기가 가까워지자 새로 전남지부 결성이라는 석연찮은 명분을 내 걸어 해체해버린 것은 87년 5월이다.

그 당시의 기록을 ‘목포개항 백년사’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5월 10일 기존의 한국문협 목포지부가 해체되고 그 대신 전남지부 (지부장 최일환, 사무국장 김수기)로 결성되었다가 8월 26일 다시 환원되어 새로이 임원을 선출하고 새 출발을 했다.(새 지부장 김학래, 부지부장 김재용, 박길장 총무 윤종석, 감사 정순열, 양회성)>

즉, 목포문단에서 거의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다시피 하던「흑조」동인들을 중심으로 해체 모임에 참석치 못한 뜻있는 문학인들이 곧 거세게 반발하였고, 그들이 새로운 목포문학 재건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었으나 해체에 참여했던 문인들이 다시 몰려와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새 집행부를 구성했던 것이 오늘날 목포문협의 실상이다.

1987년엔 김화숙이 「한국아동문학」동화가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80년대 등단한 이 고장 문인으로는 이충이(월간문학) ,박록담(한국시학, 현대시조, 시조문예, 월간문학), 고정선(교육자료,아동문예), 김선기(경향신문:생활수기), 최건(시문학), 김지수(한국문학), 정기석(시문학), 최병두(시와 의식), 김재용(새벗), 조승기(시와 의식), 김정삼(월간문학), 명기환(시문학), 양회성(아동문예,월간문학), 김찬호(시와 의식), 김수기(아동문학평론, 월간문학), 정순열(월간문학), 김재석(세계의 문학), 신정숙(현대시학), 장근양(영화진흥공사,스포츠 서울), 김광채(아동문학,수필문학), 채승재(동양문학), 이중기(동양문학), 윤미순(문학과 의식), 김하린(시집), 조기호(광주일보), 박문재(현대문학),김관재(한국시:시), 박행신(아동문예,눈높이 문학), 김화숙(한국아동문학)등이다.

1990년대 목포 문단은 다양한 문예지의 등장에 힘 입어 작품 활동도 활발했지만, 문인으로서의 자질을 높이고 확인할 수 있는 각종 행사들이 줄을 이어 개최 되었다.

84년 광주일보 신춘으로 자질을 시험하던 조기호가 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화려한 신고를 마쳤고, 1990년 4월 16일 민간단체인「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중앙대 교수:평론가)에서 목포 출신 문인 박화성, 김우진, 김진섭의 표지비를 세움으로써 지역 최초의 문인 현창사업으로 평가 받았으며, 목포 KBS 초청 서울대 박동규 교수(평론가)의 문학강좌(7월 2일), 동원산업과 YMCA의 공동 최로 열린「바다」글짓기 대회(5월 50일), 고 박순범 시인 유고시집 출판기념회(8월 19일), 「흑조」송년 시의 밤이 열렸으며,

1991년 1월 11일부터 3일간 한국소설가협회 제 13차 심포지엄이 「한국 소설의 세계성 지향」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1993년에는 한국희곡작가협회 하계 세미나가, 8월 14일부터는 한국아동문학회 하계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민족문학과 지역문화의 중흥과 창달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목포민예총문학위원회가 출범했으며, 여기에는 강흐들, 김주완, 유종, 유종화, 이기봉, 문영란, 김성호, 이수행, 박관서, 고운, 김승필, 최정윤, 정경이 최기종 등 젊은 작가들이 참여하여 시 낭송회, 연간집, 회보를 발간하며 의기를 불태우고 있다.

1990년 김재석이「세계의 문학」으로 얼굴을 내밀며, 1993년에 시집「까마귀 」를 상재하는가 하면, 1991년 정순열의 희곡 「해선망」이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93년엔 장막극「바다의 뿌리」가 삼성미술재단에서 모집하는 삼성도의 저작상에 당선하여 오늘까지 치열하고 끈질긴 몸짓으로 창작에 열중하고 있으며, 9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김희저가「엇모리」로 당선, 오랜만에 여류 소설가가 탄생하기도 한다.

1995년 4월 15일에는 목포향토문화관에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문학비 제막을 했는데 문학과 지성사 김병익 대표를 비롯한 김현 문학비 건립위원회에서 건립한 이 문학비 제막식에는 전국에서 200여 문인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제막후 김병익 대표는 목포문학의 중흥을 위해 창작기금 1,000만원을 최재환 한국문협 목포지부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14일 저녁 MBC 공개홀에서는 전야제 형식의 <목포문학의 밤>이 열렸는데 허형만 시인의 사회로 최재환 지부장의 환영사, 김지하, 최하림 시인의 문학강연, 그리고 황동규, 황지우, 김혜순 시인과 목포 거주 시인들의 시 시 낭송이 있었다.

1986년「아동문예」로 등단 동시집「먹장구름 심술보」를 낸 바 있는 고정선이 1993년 「시세계」로 재등단 시집「비는 산을 울리고」를 1997년 에 냈고,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눈높이 문학상을 수상한 박행신이 1999년에 동시집「내가 먼저 볼거야」를 냈다.

한편, 고규석이「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 후 시집「구두의 충고」를, 안효순이 시집「이름을 살라서」상재 후 1993년「한겨레 문학」신인상에 당선되며, 문학춘추를 통해 등단한 고재복은 1994년 첫시집「긴 겨울 끝자락에」를, 1995년 이수행이 광주일보 신춘문예 통과 후 시집 「영산강」을, 이어 1996년「문학」지로 박관서가 등단 후 첫시집「철도원 일기」를 2000년 발간했으며, 1997년 박남인이「시대문학」을 통해 시를, 1998년 정인태가 지구문학 시부문 신인상을,

또한 백정희가 「농민신문」신춘문예로 소설이 통과했으며,「문학세계」, 「한국시」를 업고 나온 김영천이 1997년 시집「슬픔조차도 희망입니다」를 선 보이기도 했다.

참고로 장르에 관계없이 1990년대에 등단 및 활동한 목포출신 및 목포거주 문인들을 살펴보면,

조기호(조선일보), 김재석(세계의 문학), 우영숙(동양문학), 고복록(문학세계), 이생연(문학세계), 최완복(월간문학), 이태웅(한국시), 최추자(한국시), 고규석(경향신문), 김광채(동양문학,한맥), 강성상(한국시), 박주익(시세계), 고재복(문학춘추,시세계), 이윤정(문예한국), 장희(광주일보), 유종화(시인과 사회,민족문학), 박관서(문학과 사회), 강흐들(시세계), 안효순(한겨레문학), 이수행(광주일보), 최훈주(우리문학), 김영균(우리문학), 염성철(우리문학), 김희저(창조문학, 세계일보), 김영진(우리문학), 김선태(광주일보,현대문학), 김영천(문학세계, 한국시), 김혜경(문학춘추, 한국시), 박행자(한국시, 해동문학), 안정환(문학춘추, 순수문학, 시문학), 이명길(문학춘추), 이환채(창조문학), 박미경(우리문학), 유용남(시세계), 임용운(겨레시조), 강영애(문학춘추), 서재복(문학21), 김용원(세기문학, 문학춘추), 이현보(문학춘추), 김문옥(창조문학), 박시린(한국시), 전상동(아동문학), 김병남(한국시), 박춘배(한맥, 평화신문), 권기태(아동문예), 김정식(문학춘추), 정대성(아동문예), 김상근(문학춘추, 순수문학), 김경춘(우리문학), 김동하(한겨레문학), 신화금(시문학), 유태원(문학세계), 서영호(문학세계), 최현규(문학춘추), 안정배(전남일보), 윤정애(문학춘추), 김혜경(KBS-TV), 김화영(창조문학) 이순희(문학춘추), 김병화(문학21, 문학춘추, 문예사조), 김문희(문학시대), 박달재(문예비젼),김소남(아동문학), 김동길(문학춘추), 전상동(아동문학,한국시), 박경서(통일안보 공모)와 김동헌, 전경란(지구문학), 강경숙(세기문학), 정대성(한국시), 정인태(지구문학)이성일, 정민수, 신상준(문학춘추), 백정희(농민신문), 박영희(민의), 김관호, 이갑수, 이삼남, 조대현, 박길장, 박성안, 최춘단, 최보영, 최은하, 김남복(한맥), 양남일, 조성화 등이 내일의 목포문학을 위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목포문단은 더한층 젊은 문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1990년대 말에 창간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목포 나그네」의 활동도 빼 놓을 수 없는 성과의 하나다.

목포를 떠난 목포와 연고가 있는 시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목포 나그네」는 목포에 거주하다 직장 따라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외롭게 활동을 하다 2012년 사망한 최병두와 주정연, 조희범에 의해 발간되었으며, 목포를 스쳐간 문인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목포시문학회(현 회장 김상근)의 그간 활동을 빼 놓을 수 없다.

해마다 동인지를 발행하며, 여름마다 날을 가려 펼치는 선상시 낭송회는 이 회의 백미다. 또한 매년 11월 1일이면 시의 날 기념식을 열어 시에 굶주린 시민들의 가슴을 적셔 주며 젊은 문사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목포는 예술적인 많은 잠재력을 지닌 도시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어 붓을 가다듬는 예비문인이 많은 도시다. 언제 어디서 터질 줄 모르는 이들의 순발력, 목포는 과거가 화려했던 것처럼 미래 또한 보다 탄탄하고 밝고 아름다우리라 믿는다.

2000년에 들어 김창묵이「한울문학」에 시로, 박승자가「광주일보」로 얼굴을 내밀며, 또한 같은 해 김성호가「호남신문」신춘으로 등단하며, 2001년 이순희 시인이, 1996년 문학춘추 신인상을 받았으나 문예사조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저력을 확인, 이어 시집「아름다운 여정」을 상재하였고, 정경란이「광주매일」신춘문예를 거쳐 2002년에는「무등일보」신춘문예에 소설로, 2003년에는「시와 사람」에서 시로 얼굴을 내민다. 또 2002년에는 임점호가 수필로「문예사조」를 통과하며, 박성민이「전남일보」신춘문예를 통과 한다. 이어 박준상의 시가 지구문학을 통과 계속해서「돌아온 세월도 아름다우리라」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내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2005년에는 강해자가 시로「대한문학세계」의 신인상을, 유종이「문학」의 신인상을 거머쥔다.

2002년 8월, 한국현대시인협회 주관 하계 세미나가 목포해양대 강당에서 열렸는데 전국에서 200여명의 시인들이 참석했었으며, 목포에선 최재환 시인의 주제발표, 그리고 고 권일송 시인의 추도회에 이어 밤에는 신안비치호텔에서 목포시장이 베푸는 만찬회에 목포의 문인들과 함께 시를 낭독하는 등 우리고장 문단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2005년에 한보리가 「문학과 세상」을, 2007년엔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임혜주가, 「푸른문학」신인상에 안오일이 당선되며 시집「화려한 반란」을 펴냈다. 또한 2008년엔 박창복이「서정과 상상」으로 등단의 영예를 껴안는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아 당선작을 발표한 전국규모의 신인등용문인 목포문학상이 고료 5,000만원을 내걸고 2009년 제정 제1회 당선작 발표를 했었고, 특히 올해 제4회엔 소설부문에서 우리고장 출신의 이혜정 씨의 「초록 눈」이 당선 되어 오랜만의 여류소설가 등장에 시민들의 즐거운 비명이 터지고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능력있는 신인 희망자들이 몰려들어 관계자들의 즐거운 비명이라는 것이다.

2010년에는 윤경관이 시로「문학과 의식」을, 서은철이「현대문예」를 통해 시 로 등장한다.

2011년엔 약속이나 한 듯 2005년「대한문학세계」로 관문을 뚫었던 김경애가 다시 시로「문학과 의식」을, 고미선이「문학마을」, 정영숙이「시와 사람」,2004년「아동문예」로 선을 보인 박애경이 다시「시와 경계」를 통해 시들 들고 나오며, 또 유헌이 2011년 월간문학 시조에 이어 2012년「국제신문」신춘문예 시조부문을 꿰어찼다. 2012년에는 김혜자가 시를 들고「서울문학」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며, 강성희가「시조시학」을 통해 시조로 내일을 기약하기도 했다.

2010년 11월 19일 예술원 회원 황동규 시인의「시의 아픔과 문학의 기품」강연이 있었으며, 1년 뒤인 2011년 11월 19일에는 예술원 회원이며 시인인 이근배 선생의 「우리만의 고유 문자언어로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위하여」라는 주제 강연을 통해 우리고장 문인들의 잠을 깨워 주기도 했다. 또한 이날「목포문학의 미래와 과제」라는 주제로 수필가 김학래의 수필문학의 현실을, 최재환 시인의 목포문학의 소사를 더듬어 정리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소영 박화성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박화성 백일장이 해마다 열려 예비 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인근 초당대학교 박화성 연구회에서는 금년 6회째 소영 박화성 문학 페스티벌을 열어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는 선생의 문학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기쁨 뒤에는 아쉬움도 남는 법, 2000년데 들어 유명을 달리한 문인들도 많았다. 예술원회장을 지낸 한국연극의 자존심 차범석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 하셨고, 이생연, 최일환, 김종두, 최병두 김동하 시인 등이 세상을 떠났다.

2000년대에 등단하거나 활동을 하고 있는 얼굴들을 살펴보면,

정경란(광주매일, 무등일보, 시와 사람), 한보리(문학과 세상), 안오일(푸른문학 신인상), 김창묵(한울문학:시),임점호(문예사조:수필), 강해자(대한문학세계:시), 윤경관(문학과 의식:시), 서은철(현대문예:시), 김경애(문학과 의식, 대한문학세계:시), 고미선(문학마을:시), 김혜자(서울문학:시), 김향숙(한울문학), 박준상(지구문학), 정정길(신동아 논픽션), 강경숙(세기문학), 김애화(박화성 백일장) 김준귀(한울문학:시), 김찬율(문학춘추:수필), 유종(문학), 김성호(호남신문), 임혜주(전남일보), 정경이(전남일보), 유헌(월간문학, 국제신문), 박승자(광주일보, 시안), 박애경(아동문예, 시와 경계), 박창복(서정과 상상), 강성희(시조시학), 이봉환, 조대현, 김정렬, 김정옥, 김진호, 김재영, 최은하, 정서경, 임순희, 이학자, 이순애, 서두인, 김혜숙, 김해자, 김경수 등을 들 수 있다.

정리를 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서울과 목포라는 지역성을 극복하면서 안팎에서 향토를 지키는 목포 문학인이야말로 참으로 한국적이요 예향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2000년대는 보다 능력있는 신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침체된 예향 목포 문학을 책임지고 활성화 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해 줘야 하리라 믿는다

욕심같으면 문단사와 함께 우리 고장 출신 문인들의 개별적인 인명록을 만들어 광주나 서울 등의 관계 기관에서 요청이 있을시 자료제공을 해 줌으로써 우리 고장의 문단 모습을 보여 줬으면 싶다.

하나 덧붙여 모두 함께 환영할 일은 50년대 초 목포문학의 초창기「갈매기」와 「전우」를 통해 작품을 발표, 문학활동을 하다가 진로를 바꾸었던 이영식(서울대;어문학)교수와 임성순(동국대:국문과)부부가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 우리 목포에 머물면서 문화활동을 재개했다는 사실이다. 별도 탐방기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겠지만 두 내외분께서는 소청 조희관 선생께서 맺어 주신 커플로 선생의 문학비를 세우는데 역할을 하였고, 여사께서는 항도여중 출신으로 현재는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고 계신다. 실로 60년 만의 외출인 셈이다.

대학 도서관, 시립 도서관, 문화원, 또 필자의 소장 자료들을 뒤적이며 시간을 축냈어도 미흡한 점이 많다. 문협 모임 때마다 개인 자료를 부탁했으며(자료제출이 있더라도 등단연도가 표시되지 않은 분은 부득히 마지막 총람에만 표시됨), 더 이상 괜한 자존심 건드릴 필요가 없다 싶어 아쉬움만 남기며 끝을 맺는다.

(필자?ㆍ 전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참고자료>

.목포문학 3(1974:목포문협), 4(1976), 5(1978), 6(1982), 22(1999), 29(2006)

.목포예총 창간호(1979:목포예총)

.광주문학사(1994:한림)

.목포 100년의 문학(1997:백년회)

.목포개항백년사(1997:백년회)

,전남문학변천사(1997:전남문학백년사업추진위원회)

목포문단의 어제와 오늘(2002:허형만)

.광주 전남 문학통사(2011:한국지역문학인협회)

.뿔난 염소(1971:차원재)

.감 딸 때(1981:양동온)

.목포작가회의 자료(추)

* 편집자 주:

본 원고는 작년 목포문학 34호에 발표되었으나 편집자의 착오로 누락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 잡았고, 또한 자료를 보완하여 다시 게재하오니 목포문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일독을 권합니다. 혹시 다시 착오가 발견 되거나 보충할 자료가 있다면 편집실로 연락 주시면 다음에 바로 잡겠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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