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헌신 용어의 의미와 배경 연구
김민정
1. 들어가는 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믿음의 성장에 따라 이 땅에서 육체를 통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았고, 우리 또한 믿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헌신’(獻身)은 말 그대로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인데, 사전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교회가 실천하는 ‘헌신’은 무엇인가? 먼저 성경에서 사용하는 ‘헌신’ 용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헌신에 해당하는 성서원어의 경우 고유하게 헌신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다. 즉, 헌신 개념을 담고 있는 원천언어(source language)와 수용언어(receptor language)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헌신으로 번역된 원문의 단어가 때로는 본문에 따라 다른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어 성경 내에서도 역본에 따라, 동일 본문이지만 헌신으로 번역된 곳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의미로 번역되기도 했다. 다양한 원어가 사용되고 서로 다른 배경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헌신의 성경적 의미를 규명하는 일이 헌신 연구의 기본 과제로 대두된다.
본고에서는 먼저 헌신을 가리키는 원어의 어의와 용례 연구를 통해 헌신 용어 번역의 적합성을 확인하고 일차적인 헌신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헌신’으로 번역된 시편 110편 3절의 히브리어 ‘네다보트’()는 여전히 해석의 이견이 존재하는 번역의 난제로서 의미의 규명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으로 헌신으로 번역된 구약 본문의 장르를 고려하고 주석적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헌신 개념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특별히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헌신 용어는 그것이 금송아지 숭배를 처벌하는 본문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연구가 미비한 상태다.
구약에 나타난 헌신 용어의 의미와 관련 본문의 배경 이해를 통해, 마지막으로 헌신의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헌신을 명하고 받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숙고다. 성경은 특별한 소수의 희생이나 종교적인 수양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가 자원하여 즐거이 드리는 헌신을 노래한다. 맹목적인 버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해 순종하는 헌신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핑계나 원함을 따라 변개시킬 수 없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온전히 성취해야 하는 헌신의 무게에 대해 가르친다.
2. 헌신 용어 연구
2.1. 헌신 용어 번역 현황
‘헌신’ 용어는 지명이나 인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개념을 표현하는 명사다. 이로 인해 역본마다 번역의 차이가 있다.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그리고 공동번역에 나오는 ‘헌신’ 용어를 비교하고 원문을 히브리어성경(BHS)을 중심으로 대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 ‘헌신’ 용어 사용의 현황을 파악하고 연구해야 할 원어와 본문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개역성경과 개역개정은 ‘헌신’ 용어 번역이 일치한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32장 29절로, 광야의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을 친 레위족속을 향해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고 선포한 모세의 말이다. 이때 ‘헌신하였다’로 번역된 원어 ‘밀루 예드켐’()은 직역하면, ‘너희들의 손을 채웠다’가 된다. 따라서 원어의 일차적 의미만으로는 왜 헌신으로 번역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공동번역의 경우 ‘충성을 다하다’라고 의역하여 나름대로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했다. 표준새번역은 헌신과 유사하게 ‘당신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으니’라고 번역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성별하다, 바치다’라는 종교적 단어인 ‘consecrate’를 사용했다. ‘밀루 예드켐’에 대한 용례와 본문 이해가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사사기 5장 2절과 9절에 나오는 ‘헌신’이다. 전쟁 후 불리운 드보라의 노래에서 언급된 헌신은 원어상 ‘나다브’()의 재귀형인 ‘히트나데브’()다. 이 단어의 ‘자원하다’는 기본 의미에 따라 개역과 개정에서는 ‘즐거이 헌신하다’로 번역되었고, 표준새번역 역시 ‘기꺼이 헌신하다’로 되어 있다. 공동번역의 경우에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문맥에 따라 ‘스스로 전진하다’는 해석이 담긴 번역을 제시했다. 헌신의 다양한 배경이 번역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시편 110편 3절에 나오는 ‘헌신’은 사사기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명사 ‘네다보트’()가 쓰였다. 개역, 개정, 표준새번역 모두 이를 ‘즐거이 헌신하다’로 번역했는데, 공동번역은 아예 헌신의 의미 자체를 삭제했다. 헌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나다브’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고, 적어도 재귀형과 명사형에 해당하는 파생어가 구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본문비평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번역을 의지하지 않고 사역을 제시하듯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1)
헌신관련 원어
본문
번역현황
개역
개정
표준
공동
~k,d>y< Wal.m
출 32:29
헌신하다
헌신하다
충성을 다하다
당신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
bDen:t.hi
삿 5:2, 9
즐거이 헌신하다
즐거이 헌신하다
기꺼이 헌신하다
스스로 전진하다
tbod'n>
시 110:3
즐거이 헌신하다
즐거이 헌신하다
즐거이 헌신하다
없음
헌신과 관련된 원어가 한국어 성경에서 번역된 현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2. 헌신 관련 원어의 어의와 용례
2.2.1. 밀루 예드켐
히브리어 ‘밀루 예드켐’()은 오직 출애굽기 32장 29절에서만 ‘헌신하게 되었느니라’로 해석된 문장이다. 먼저 원문의 뜻을 살펴보면, 사용된 동사의 원형은 ‘채우다, 가득차다’(fill, be full)라는 기본 뜻을 가진 ‘말레’()다. 성경에서 150회 이상 기본의미로 쓰인 이 단어는 문장에 따라 ‘성취하다, 성별하여 바치다’(accomplish, consecrate)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2) 이어지는 ‘예드켐’은 ‘너희들의 손’을 가리키는 명사구다. 구약에서 손은 수고로이 일하는 것(창 5:29),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욥 27:11)를 의미한다. ‘말레’와 ‘야드’는 표면적으로는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번역 역시 불명확하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과 같이 ‘말레’ 동사와 손을 가리키는 ‘야드’가 함께 쓰이는 용례가 중요하다. 열왕기상 8장 15절에 쓰인 ‘우베야도 밀레’()와 역대하 6장 4절의 ‘우베야다이브 밀레’()는 ‘그 손으로 이루셨도다’로 번역되었다. 문맥상 ‘말씀을 모두 그대로 이루셨다’는 뜻이 된다. 한편 열왕기서의 본문에서는 쏜 화살이 그 임무를 다하여 사람을 꿰뚫고 나왔음을 표현하는 데 ‘밀레 야도’()를 썼다(왕하 9:24). ‘말레’가 ‘야드’와 함께 쓰일 때는 손을 가득 채우듯,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을 말하는 관용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손이 가득 찼기 때문에 다른 것을 잡을 수 없고 그 일에 전심전력하여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 ‘말레’가 순종하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역시 관용적으로 쓰이는 문구가 있다. 네 곳의 본문에서 ‘밀레 아하레이 아도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모두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했다, 따랐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민 32:12, 신 1:36, 수 14:14, 왕상 11:6).3) ‘가득차다’를 뜻하는 ‘말레’가 헌신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는 해야 할 그것을 부족함이 없이 온전히 성취하는 것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2.2.2. 히트나데브
사사기 5장에 나오는 ‘히트나데브’()와 시편 110편에 나오는 ‘네다보트’()의 어근은 동일하게 ‘나다브’()다.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고귀하다’(be noble), ‘자발적이다’(be willing), ‘후하다, 관대하다’(be generous)이다. 이에 따라 주로 ‘자원하다’(volunteer)와 ‘자원 예물을 드리다’(offer free-will offerings)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4) 사사기의 경우는 재귀형인 ‘히트파엘’ 형태가 쓰였는데5) ‘나다브’의 어근이 ‘강권하다, 촉구하다’(urge on, prompt)에 해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강권하여 결국 자원한다는 의미가 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즐거이 헌신하였다’는 한글 번역은 그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헌신을 가리키는 ‘히트나데브’는 인색함이 없는 자원하는 마음을 강조해준다.
구약 전체에서 13회 등장하는 ‘히트나데브’의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대상 29:9),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 …’(스 2:68), ‘사람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스 3:5), ‘예루살렘 그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즐거이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스 7:16), ‘…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 29:17). 모든 본문이 하나님의 전을 위해 예물을 드리되 즐거이 드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한 가지 예외의 경우로서 느헤미야 11장 2절에서는 예물과 관계없이 ‘자원하다’는 의미로 ‘히트나데브’를 사용했다. 사사기에 사용된 ‘히트나데브’는 물질과는 관계가 없지만,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가리킨다.
2.2.3. 네다보트
시편 110편에 사용된 ‘네다보트’()는 ‘나다브’()의 여성복수 명사형이다. 역시 ‘자원,’ ‘자원하는 예물’을 의미한다. 명사형인 ‘네다바’가 사용된 성경의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는 성막 제조를 위해 예물을 드리는 출애굽기 본문에서 예물 드리기를 ‘자원하는 자’(35:21), 물품을 ‘즐거이 드림’(35:29), ‘자원하는 예물’(36:3)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성막 건축 이후의 본문에서는 제사에 드려지는 ‘낙헌 예물(낙헌제)’(레 22:23, 시 119:108, 암 3:4), ‘자원한 예물’(신 23:23), ‘즐거이(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신 16:10, 대하 31:14, 스 3:5; 8:28, 겔 46:12)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예외적으로 시편 68장 10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명사와 함께 쓰여 ‘흡족한 비’(a plentiful rain)를 나타내기도 했다. 히브리어 명사 ‘네다바’가 거의 모든 본문에서 성전 건축과 성전 제사에 드리는 예물, 특별히 자원하는 낙헌제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편 110편 3절에 사용된 ‘네다보트’의 경우는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은 자원하는 예물과는 관계가 없고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되어 있다. 개정과 표준새번역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be willing,’ ‘be volunteers,’ ‘offer willingly’ 등 즐거이 헌신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데, 공동번역의 경우는 전혀 다른 번역을 제시한다.
네가 나던 날, 모태에서부터,6) 네 젊음의 새벽녘에 너는 이미 거룩한 산에게7) 왕권을 받았다(시 110:3)
공동번역이 따르고 있는 칠십인역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주의 백성이 헌신한다’에 해당하는 ‘암카 네다보트’()를 ‘너의 안에 고귀함이 있다’로 번역했다.8) ‘나다브’의 의미를 ‘고귀하다’(be noble)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 본문은 헌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또한 ‘당신에게 … (새벽)이슬’에 해당하는 ‘레카 탈’()은 아예 생략하여 그 의미를 번역하는 것의 난해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사실 본 구절은 번역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시편 전체에서 가장 불확실한 구절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알렌(L.C. All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시편 110편은 동일하게 성전(聖戰)의 배경에서 ‘나다브’ 단어를 사용한 사사기 5장 2절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9) 이것은 시편의 본문 번역과 해석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두 본문의 맥락은 모두 ‘헌신’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칠십인역의 해석을 따르기 보다는 마소라 본문을 그대로 두고 오히려 그 배경 연구를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3. 헌신 본문 연구
3.1. 금송아지 숭배에 대한 처벌과 헌신(출 32:29)
3.1.1. 금송아지 숭배의 실태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잔인한 행동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배경에서인가? 본문은 시내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함으로 형벌을 받게 되는 내용이다. 이 사건의 심각성은 이스라엘의 범죄가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을 어겼다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었고 우상을 만들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앞에서 취한 행동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면서 했던 것과 동일했다. 그들은 율법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것처럼, 일찍 일어나서(출 24:4; 32:6),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출 24:5; 32:6), 먹고 마셨다(출 24:11; 32:6). 심지어는 기쁨에 도취되어 광란의 상태로 일어서서 뛰놀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그것을 잘 지키겠다고 세 차례에 걸쳐 다짐한 후 행한 첫 번째 행위다(출 19:7-8; 24:3, 7). 바로 얼마 전에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정면으로 부정하듯 충격적인 방법으로 파괴해버렸다고 볼 수 있다.10)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의 죄악만큼이나 극적이었다(출 32:9-10). 필연적으로, 32장 11절부터 34장에 이르는 긴 본문은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지 말아달라는 모세의 간절한 간구를 보여준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러한 모세의 기도가 상달되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는데(출 32:10), 왜 언약의 돌판을 깨뜨리고 우상을 태운 가루의 물을 마시우고 삼천명을 죽이기까지 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멸의 계획을 돌이키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모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불의에 대해 철저히 돌이키고, 이스라엘 진 중에서 불의를 제거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모세를 통해 세 단계의 형벌이 주어진 후,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주신다.
3.1.2. 형벌 집행과 레위인의 헌신
모세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형벌을 단행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직접 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고 공의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첫 번째로는 언약의 돌판을 깨뜨렸는데, 이는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신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현재 깨어진 돌판처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마시게 한 것은 우상의 허무함과 무용성을 몸소 체험케 한 것이었다. 그들의 신은 한 줌 가루가 되었고 마셔 없어졌다.11)
마지막으로 우상숭배에 가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를 나오게 하여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 곧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도륙하게 했다. 레위인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즉 이스라엘 전 진영을 왕래하였을 때, 일시에 삼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때 모세가 레위인을 향해 한 말이 원어로 ‘밀루 예드켐’()이다. 이 표현의 난해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이견을 낳았다. 더햄(J.I. Durham)은 이를 ‘임명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굽히지 않는 레위인들의 충성심을 볼 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임명된 유일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12) 군네벡(Gunnerweg)은 동일하게 본문에서 강조되는 레위인의 충성심에 주목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이 곧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일종의 헌신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레위인의 충성스런 헌신이 ‘밀루 예드켐’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13)
성경은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한다(출 32:29). 실제로 레위인의 손에 죽은 사람은 바로 그들의 형제, 친구 그리고 이웃이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명령에 순종하되,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성취하여 손을 채운 것이 바로 헌신이다. 세일해머(J.H. Sailhamer) 역시 진노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한 모세와 그의 지시에 따라 직접 일을 수행한 레위인의 행동에 주목한다.14) 레위인의 헌신은 인간의 부담과 희생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뜻이 아닌 주의 명령을 완전히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3.2. 드보라의 노래에 나타난 헌신(삿 5:2, 9)
3.2.1. 이스라엘의 전쟁과 승리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을 기리는 사사기 5장은 4장에 나오는 가나안 국가와의 전쟁 역사 기술에 이어지는 드보라의 노래다. 사사기 4장과 5장은 같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데, 각각 내러티브와 운문으로서 장르와 메시지를 달리한다.15) 따라서 사사기 5장이 노래하는 주제의 배경을 4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범죄-형벌-회개-회복’으로 전개되는 사사시대 역사의 전형처럼, 사사 에훗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 이에 하나님이 하솔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내주셔서 이스라엘은 이십 년 동안 심한 억압을 받았다. 이스라엘 자손의 울부짖음은 하나님께 전해졌고, 사사요 예언자인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을 패망시킬 전쟁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치도록 명했다.
가나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명하시고 주관하시는 성전(聖戰)이었다. 바락에게 용기를 주는 드보라 말을 통해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 4:14). 실제로 전쟁에서 시스라의 모든 병거와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한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이처럼 가나안과의 전쟁이 성전(聖戰)이 된 것은 이스라엘을 이방나라로부터 지키는 것이 곧 그들의 신앙을 우상숭배로부터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스라의 온 군대는 다 칼에 엎드러져 패망했고 남은 자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시스라는 드보라의 예언대로 한 여인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삿 4:15-22).
이십 여 년을 괴롭혀 온 이방나라와의 전쟁은 사사 드보라의 강력한 리더쉽을 원동력으로 해서 시작되었다. 우상을 섬김으로 타락하여 이방으로부터 전쟁의 위협을 당했어도, 이스라엘 사만 명 중 방패와 창을 들고 민족을 지킬 이가 없었다. 대로가 비고 행인들은 소로로 숨어 다니며 지도자가 없었을 때,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전쟁의 승리를 노래하는 사사기 5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헌신에 대해 칭송하고 있다. 그들이 자원하여 싸우고 협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3.2.2. 지도자와 백성의 헌신
드보라 노래의 서두 부분은 본고의 주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하면서 이스라엘 지도자의 지도력과 백성의 헌신을 기념하는 것으로 노래가 시작된다.16) 그리고 나서 전쟁시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라 전쟁용사이신 하나님(Divine Warrior)을 찬양한다(4-5절). 9절에 가서는 다시 한 번 즐거이 헌신한 자들을 기리고, 그들이 어떻게 군사로서 자원하여 싸웠는지의 내용을 묘사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는 전쟁에 참석한 자와 불참한 자의 명단을 제공하면서, 축복과 비난을 공개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스라엘 중에서 사모할 만하고 축복할 만한 자들은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사람이다. 이들은 자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백성이기 때문이다. 한편 비난을 받는 르우벤은 번민만 하면서 양의 우리에 앉아 피리 소리나 듣고 있었고, 길르앗은 요단강 건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단은 배에 머물러 있었으며, 아셀은 바닷가에 앉아 편히 쉬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이 거룩한 전쟁에 도움을 주지 않은 메로스 거민들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인 헤벨의 아내 야엘은 축복을 받는다.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본문의 의도에 부합하는 기원으로 마무리된다. 주의 대적, 즉 거룩한 전쟁에 자원하여 헌신하지 않은 자는 망하게 하시고, 자원하여 군사로서 헌신한 자, 즉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해달라는 것이다(삿 5:31).
드보라의 노래는 전쟁의 승리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돕는 자,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로서 백성들의 참여를 기념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아울러 헌신을 독력하되 헌신한 자들을 축복하고 방관한 자들을 저주하는 특별한 강조도 부각된다.
3.3. 제왕시의 왕권사상과 헌신(시 110:3)
3.3.1. 왕권에 대한 찬양
시편 110편은 번역 상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는데, 바로 문제가 되는 3절에서 이슬 같은 젊은이들의 헌신을 언급하고 있다. 본고의 용어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의 ‘네다보트’() 용어는 명백하게 즐거이 드리는 헌신을 뜻한다. 그렇다면 본 시의 주제 속에서 헌신의 개념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시편 110편의 장르와 주제를 파악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헌신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밝혀준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을 비롯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 110편을 메시아적 왕권에 대한 노래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본 시의 장르는 ‘제왕시’에 해당한다. 편집상으로 볼 때도, 시편 108편으로부터 110편에 이르는 시가 모두 다윗의 시편에 속하는데, ‘승리에 대한 간구’로 시작되어, ‘원수 징벌’을 통해 110편에서 ‘영원한 왕의 통치’로 매듭이 지어진다.17) 본문 내에서 볼 때, 1절의 “내 우편에 앉았으라”라는 표현은 고대근동과 구약의 문맥에서 왕권과 관련된 영광스런 자리를 의미한다.18) 한편 원수의 운명이 될 ‘발등상’은 전쟁을 통해 정복되어 발 아래 밟히는 원수를 상징한다. 2절의 ‘홀’ 역시 왕이 손에 들고서 권능을 행사하는 지팡이로서 왕권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시인은 명백하게 왕권을 노래하면서 왕을 ‘주’(lord)로 높이고 있다. 젊은이들의 헌신은 바로 왕을 향한 것인데, 그의 왕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확신이 강조되고 있다.
3.3.2. 왕에게 바치는 군사의 헌신
왕에게 바치는 젊은이들은 어떠한 자들이며, 그들의 헌신 내용은 무엇인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말씀하는 시편 110편 3절은 번역과 해석의 난제로 다루어져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문자적 해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우며 그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본문의 ‘네다보트’와 동일 어근을 가진 ‘히트나데브’를 통해 헌신을 노래하는 사사기 5장이 거룩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이스라엘 군대의 참여를 격려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문에서 헌신의 시점을 표현하는 ‘권능의 날’ 역시 바이저(A. Weiser)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열국의 왕들을 심판할 여호와의 심판날로 이해했다.19) 이것은 본문 5절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호응을 이룬다.
이렇게 볼 때, 칠십인역에서 다른 번역을 시도했던 ‘베하드레이 코데쉬’()의 의미도 명확해진다.20) ‘거룩한 옷을 입고’를 뜻하는 이 표현은 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릴 때 갖추는 거룩한 차림새를 말하는데(시 29:2; 96:9), 본문의 전쟁 배경에서는 거룩한 전투복을 입고 나온 청년들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열국의 왕들이며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권을 대적하는 원수다.21) 그러므로 이 전쟁 역시 불의를 제하는 성전(聖戰)의 특성을 보여주어 헌신의 의의를 더해준다. 한편 헌신하는 주체로서 젊은이들은 ‘새벽 이슬’로 은유되었다. 크라우스(H.J. Kraus)는 ‘새벽’이라는 용어가 밤에서 낮으로 가는 희망과 변화의 은유로 작용한다고 말한다.22) 원문은 보다 강력하게 ‘새벽의 모태로부터’(메레헴 미슈하르, )로 표현되어 있다. 이슬이나 가벼운 비를 뜻하는 ‘탈’()은 본문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볼프(W.H. Wolff)는 이슬의 의미를 ‘신비함’으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이슬로 표현된 군사들은 하나님이 왕에게 허락하신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해석되었다. 한편 바이저(A. Weiser)는 이슬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를 가리킨다고 여겼다.23) 알렌(L.C. Allen)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 눈에 보이듯 구체화된 것으로 이슬을 이해하기도 한다.24)
시편의 문장 구조를 보면 ‘이슬’과 ‘당신의 젊은이’를 가리키는 ‘얄두테카’()가 동격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이슬은 아침을 태동시키는 새벽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수식된다. 다양한 은유로 표현된 헌신하는 젊은이들은 아침이 되기 전, 만물을 다시 일으키는 활력소와 같이 역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로서 군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승리를 목표로 하는 전쟁의 날에 백성들이 왕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의 신성한 의무와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원하여, 즐거이 헌신하겠다고 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본문은 누가 누구에게 헌신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4. 헌신의 의의 제시
4.1. 하나님께 속한 자의 자원하여 내어드림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헌신 용어인 ‘나다브’ 관련어들은 기본적으로 헌신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함을 말해준다. 헌신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담은 억지로 희생을 치르는 것으로 여기거나 강요되는 의무로 느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헌신과는 거리가 멀다. 강권하고 동기를 부여하여 촉구하는 것을 뜻하는 ‘나다브’의 재귀형인 히트파엘 형태가 헌신을 의미하는 데 쓰인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누구의 권유나 의무에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권하는 자발성에 의한 드림이 헌신 용어의 뜻이 된다. 명사형인 ‘네다보트’ 역시 기꺼이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 자원함을 의미했다.
두 단어는 구약의 16회 이상의 본문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리되 즐거이 드리는 것과 성전에서 제사할 때 드리는 낙헌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출 35:21, 29; 36:3, 레 22:23, 신 16:10; 23:23, 대상 29:9, 17, 스 2:68; 3:5; 7:16; 8:28, 시 119:108, 암 3:4, 겔 46:12, 대하 31:14). 우리는 광야에서 성막을 건축할 때, 이스라엘 자손이 이 예물을 연하여 가져와서 쓰고 남게 되어 그만 가져오도록 모세가 공포한 사실을 기억한다(출 36:3-7). 그들의 자원하는 마음이 모든 필요를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러한 헌신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이름을 둘 성막이 지어졌던 것이다. ‘나다브’ 관련어를 사용한 사사기와 시편 본문처럼 헌신하는 자의 자세는 ‘즐거이’ 하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신약교회는 하나님께 속하여 힘대로 헌신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되 자원하였다고 말한다(고후 8:3). 바울은 하나님이 이러한 헌신의 자세를 사랑하신다고 권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헌신의 자세와 상태가 자원하고 즐거이 드리는 것이라고 할 때, ‘누가 그런 심령으로 헌신하는 자인가?’를 질문할 수 있다. 헌신의 자발적인 특성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이러한 헌신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모든 본문은 헌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드보라의 노래는 헌신한 자들을 강조하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의 헌신은 사모할 만한 것이었다. 시편은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레카’() 곧 당신의 소유라고 말한다.25) 모세 역시 헌신할 자들을 선별할 때, ‘미 레아도나이’() 곧 ‘누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적으로 우상을 떠나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 허리에 칼을 찬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헌신이라는 것은 그의 백성은 누구나 헌신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는 헌신한 자들과 방관한 자들을 대조시키면서 축복과 저주를 함으로 모두 헌신할 것을 독려했다. 성막에서 하나님 앞에 항상 진설하도록 한 떡은 이스라엘 지파의 수대로 열 두 덩이였다(레 24:5).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모두 참여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해석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 백성의 즐거이 드리는 헌신을 받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제 그에게 속한 자녀의 헌신을 받으신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첫 아담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 죄에서 벗어나 헌신하도록 하신 것이다. 죄의 근성은 자기 임의로 살려는 것으로서 즐거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6) 헌신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에게 속한 자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이제 무엇을 위한 헌신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자.
4.2. 의(義)를 위해 순종함
헌신의 의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義)와 관계되어야 하며 그럴 때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헌신을 말하는 구약의 세 본문 모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금송아지 숭배에 대한 처벌로서 칼을 차고 우상숭배자들을 도륙한 것이 헌신이 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의’를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살인 자체를 비인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로 비난할 수 있고, 한 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진멸당한 것을 충격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혹자는 삼천이라는 숫자가 육십만 대군의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큰 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문제는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의인 십계명을 거스리고 언약을 파기한 행동이 불의가 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진중의 불의를 심판하기 위해 살육한 행동은 궁극적으로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27)
거룩한 전쟁에서 군사로서 자원하는 헌신을 말하는 사사기와 시편의 본문도 마찬가지다. 소긴(J.A. Soggin)이나 맥켄(J.C. McCann)의 경우, 사사기 4장 전쟁의 의의를 보다 실리적인 관점에서 찾는다. 그 전쟁은 가나안에 의해 이스라엘의 영세농민이 착취를 당하는 생존 위협의 문제로 발발했고, 전쟁의 승리는 하나의 해방신학을 말해준다는 것이다.28) 그러나 이스라엘의 복지와 안녕을 위하는 것이 공의가 되고 전쟁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압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이십년간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부터 경제와 문화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며 성경은 이를 ‘학대’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러한 학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울부짖어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는 역할을 했고, 전쟁 후 얻게 된 사십년 동안의 태평은 이스라엘의 돌이킴과 헌신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전쟁의 의의는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나라와 동화되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룩의 문제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삿 5: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는 성전(聖戰)의 위엄을 말해준다. 그리고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시스라와 싸웠다는 표현을 통해 우주적 전쟁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6절).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과의 분리를 꾀하는 거룩한 전쟁에 자원하여 군사가 되는 것은 축복을 받을 만한 헌신이 된다.
동일하게 성전(聖戰)을 배경으로 하는 시편의 헌신은 왕께 바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왕권이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셔서 제정하신 것이며 권위와 권능이 따른다. 실제로 하나님은 왕에게 원수를 격파하고 승리할 것을 약속하셨다. 거룩한 전쟁의 날에 즐거이 헌신하여 군사로 나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며, 이를 대적하는 불의를 진멸하는 ‘의’가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시편 110편의 왕권을 ‘메시아적 예언’(messianic prophecy)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어왔다. 전통적인 교회의 성서 해석은 언제나 긍정이었다. 그러나 역사비평적 연구가 시작되면서부터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고, 특별히 그레스만(H. Gressmann)과 같이 메시아적 해석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무수한 신약의 증거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29) 더구나 구약 전체에서 본 시와 같이 왕과 제사장직의 공유를 말하는 본문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은 신약의 증언을 의지하여 해석할 것을 격려한다.30) 메시아의 제사장직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패를 머리에 쓰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으로서 돌아가신 것이다.31)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확인시켜주시고(막 12:36-37),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승천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했던 것처럼(행 2:34-35, 고전 15:25, 엡 1:20, 골 3:1, 히 1:3, 벧전 3:22), 본 시는 메시아로 오실 예수에 대한 예언을 담고 그 성취를 기다렸다. 이제는 시편의 왕에게 드리는 헌신, 의를 위한 헌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헌신의 의의는 그것이 인간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하며 그의 뜻을 따른다는 데 있다.32)
4.3. 온전히 이루고 감당함
시내산에서 행해진 레위인의 헌신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루는 헌신에 대해 말해준다. 그들이 헌신하여 죽인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형제요 친구요 이웃이었다. 원문의 표현인 ‘밀루 예드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그들의 손을 채웠다는 말로 설명된다(출 32:29). 헌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이미 자기 뜻과 자기 형편과는 길을 달리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희생을 감당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구약에서 사사 입다의 헌신 약속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끝까지 지켜야 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서원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 앞서, 하나님이 승리로 이끌어주시면 전쟁 후에 집으로 돌아올 때 누구든지 집 문에서 나와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런데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여 자신의 딸을 제물로 드리게 되었다.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나와 아버지를 영접한 것이다. 그의 이름 입다(이프타흐, )가 ‘열다’라는 뜻의 ‘파타흐’()에 기인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삿 11:35)라는 그의 말대로 자기가 한 약속이지만 이미 하나님께 상달되어 구별되었기 때문에 서원을 돌이킬 수 없었다.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잠 20:25)는 말씀과 같다.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 약속한 헌신이라도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성별되어 끝까지 감당해야 함을 알 수 있다.
5. 나가는 글
구약의 본문을 중심으로 헌신 관련 용어와 본문의 배경을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헌신의 의의를 제시해보았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본 헌신의 의의를 보다 깊게 궁구하는 데 있어 토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구약을 통해 증거받는 것은 헌신이 특별한 소수의 유별난 열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누구나 자신을 내어드리되 즐거이 내어드린다. 여기서 자신이란 물질로 시작해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말한다. 이러한 헌신은 자기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의(義)를 위해 그의 뜻대로 순종할 때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이루되 희생이 따르더라도, 손을 가득 채우듯 순전함으로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헌신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참 헌신과 그에 따른 영광을 보여주셨다. 그는 자원하여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시되 육체를 통해 이 땅에 살면서 아버지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셨다. 그것은 죽음을 당하는 십자가를 감당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며 결국 모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받으셨고 그를 살리시고 지극히 높이셨다. 모든 이름 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이들이 복종케 하셨다(빌 2:6-11).
신약시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자기 임의로 살려는 죄의 근성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니, 이제 그가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난에 함께 참여한 자녀로서 후사의 영광을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기쁘신 뜻대로 소원을 품게 하시고 순종하여 그 일을 이루게 하신다.
1) 살펴본 바와 같이 개역과 개정에서는 ‘헌신’이라는 용어가 구약에만 4회, 세 곳의 본문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역본에는 나오지 않지만 헌신 개념을 담고 있는 본문이 있다. 나실인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민수기 6장 ‘나자르’()의 파생어를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모두 ‘헌신’으로 번역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성직을 임명받고 헌신한(consecrate, ordination)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역과 개정에서는 ‘구별하다’(separation)로 하여 의미의 해석을 시도했다. 나실인을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으로 보는 것과 헌신된 사람으로 보는 것의 미묘한 차이다.
2) F. Brown·S.R. Driver·C.A. Briggs,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Massachusetts: Handrickson Publisher, 1979), 569-571.
3) 히브리어 표현을 그대로 하면, 여호와의 뒤를 따라 무엇인가를 완성하고 채운 것을 말한다.
4) W.A. VanGemeren,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vol. 3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1997), 31-33.
5) 정확하게 말하면, 2절에 사용된 ‘베히트나데브’(when willingly offer)는 전치사와 함께 재귀형 동사의 부정사 연계형이며, 9절에 나오는 ‘하미트나드빔’(offered themselves willingly)은 재귀형 동사의 분사 남성 복수 절대형이다. J.J. Owens, Analytical Key to the O.T. Vol. 2 (Grand Rapids, Michigan: Baker Academic, 1992), 21.
6) 이는 히브리어 본문에 있는 ‘메레헴’()을 직역한 것이다. ‘레헴’이 어머니의 태(胎)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장 내에서 어색한 표현이 되었다. 기원, 태동의 의미로 의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7) 이러한 번역이 제시된 것은 ‘거룩한 옷을 입고’에 해당하는 ‘베하드레이-코데쉬’를 다른 독법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제롬(Jerom)이 제시한 것을 따라, 유사하게 생긴 히브리어 자음 ‘달렛’(d)과 ‘레쉬’(r)를 바꾸어 읽게 되면 ‘베하르레이-코데쉬,’ 즉 ‘거룩한 산’이 된다. H.J. Kraus, Psalms 60-150: A Contenetal Commentary, Trans. H.C. Oswald (Minneapolis: Fortress, 1993), 344; ‘새벽,’ ‘산,’ ‘백성’의 모티브들은 요엘서의 본문과 평행을 이룬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욜 2:2) H.W. Wolff, Joel and Amos: A Commentary on the Books of the Prophets Joel and Amos, (Augsburg: Fortress, 1977), 43-47.
8) ‘ ’‘나다브’를 고귀함(nobility)의 의미로 볼 경우 크라우스(Kraus)가 언급한 대로 본문은 존경받는 가운데 고귀하고 찬란한 왕권이 수여되는 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 된다. H.J. Kraus, op. cit., 350.
9) L.C. Allen, Psalms 101-150, WBC 21 (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2001), 80.
10) 목회와신학 편집부, 『출애굽기』(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380-1.
11) 고대근동의 전쟁은 각자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전쟁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때 상대방 신의 형상을 부수어 마셔버리는 것은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진멸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Ibid., 390. 성경 내에서도 이와 같이 저주의 물을 마시우게 한 용례들을 볼 수 있다. 민수기에서는 여자의 간음 여부를 밝히기 위해 쓴 물을 마시게 했고(민 5:24), 시편에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자를 ‘눈물을 마시는 것’으로 묘사했다(시 80:5).
12) 더햄(J.I. Durham)은 바테레미(Barthelemy)가 ‘밀루’ 동사를 3인칭 복수 완료형으로 보아서 “그들이 당신의 손을 채웠습니다”로 해석한 것을 언급한다. 그럴 경우 여호와 하나님이 임명권자가 되시고 레위인들이 그의 손을 채워 임명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J.I. Durham, Exodus, WBC 3 (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87), 426.
13) Ibid., 431-2. 재인용.
14) 세일해머(J.H. Sailhamer)는 모세와 레위인의 중보적 사역이 강조된 이유는 다음 3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강조하기 위한 정경적 구성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진노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부연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 없어서나, 진노하실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노하심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알 수 있다. J.H. Sailhamer, 『서술로서의 모세오경』, 정충하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95), 166-7.
15) 사사기 4-5장은 구약에서 내러티브 내에 시(詩)나 노래를 포함하는(inset pslam) 몇 개의 형태 중 하나에 속한다. 출애굽기 15장의 미리암의 노래,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노래,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기도, 역대상 16장의 다윗의 감사 노래, 열왕기하 19장의 히스기야의 기도가 이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의 본문은 사건에 대한 내러티브가 먼저 나오고 그 내러티브의 주인공들이 시를 노래하거나 기도하는 방식이다. 통시적 방법론을 통한 연구는 내러티브와 시의 편집층을 발견하여 본문 형성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두 본문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G.F. Moore, A Critical Exegetical Commentary on Judges, ICC (Edinburgh: T&T Clock, 1985). 그러나 통시적 방법론에 대한 반향으로 등장한 공시적 방법론의 결과에 따라 알터(R. Alter)가 제시한 바와 같이, 두 본문의 차이는 내러티브와 시라는 장르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 차이 때문이다.
16)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 부르는 노래는 그 도입부에 주제를 담고 있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의 노래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함으로 주제를 선포한다.
17) L.C. Allen, op. cit., 79.
18) 구약 성경 내에서는 솔로몬이 자기 모친에게 자리를 베풀되 그 우편에 앉게 하였던 유사 상황이 있다(왕상 2:19). 이집트에서도 이와 같은 예우의 표현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O. Keel, The Symbolism of the Biblical World: Ancient Eastern Iconography and the Book of Psalms, Trans. by. Hallett (New York: Seabury, 1978), 263.
19) A. Weiser, 『시편 (Ⅱ)』, 김이곤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374.
20) 본고의 각주 5번을 보라. 물론 거룩한 ‘산’은 왕권에 대한 상징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하나님은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이시다(시 2:6). 그러나 바이저(A. Weiser)를 비롯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마소라 본문을 존중하여 제시하는 해석처럼 이 거룩한 옷을 전쟁의 전투복으로 해석할 수 있다.
21) 시편 110편은 많은 병행구절과 주제에 있어서의 유사성으로 인해 종종 시편 2편과 비교된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권을 반대하여 분노하는 열방, 허사를 경영하는 민족 그리고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군왕과 관원들을 오히려 조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기 때문이다.
22) 크라우스는 새벽의 은유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58장 8절 본문과 비교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H.J. Kraus, op. cit., 350.
23) 사무엘서에서는 당해낼 수 없는 군대가 엄습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이슬의 은유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그 만날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두지 아니할 것이요”(삼하 17:12) 다만, 구약의 성전(聖戰) 개념에서 군대의 많은 수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남긴다. A. Weiser, op. cit., 695.
24) L.C. Allen, op. cit., 86-7.
25) 전치사 ‘레’는 ‘~에게, ~향하여, ~위해, ~에게 속하여’(to, towards, for, belong to)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본문의 문맥은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당신께, 즉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A.E. Cowley, Gesenius’ Hebrew Grammar (Oxford: Clarendon Press, 1909), § 102.
26) 김기동, 『교회성장을 위한 예배와 헌신예배』(서울: 베뢰아, 1997), 290-1.
27) 살인을 금하고 있는 십계명의 제 칠 계명을 준행함에 있어서, 모든 경우의 살인이 금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목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의와 관계되어 진다. 박준서, 『십계명 새로보기』(서울: 한들, 2005), 127-137.
28) J.C. McCann, 『사사기』, 오택현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0), 107-9.
29) H.J. Kraus, op. cit., 353.
30) 시편 110편은 1-2절에서 왕권의 수여와 확립을 말하고 4절에서 “…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는 말로 제사장직을 겸하여 임명한다.
3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머리에 쓰신 패는 구약시대 제사장의 의복에서 갖춘 정금으로 만든 패와 동일한 상징이다(출 28:36). 아론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만들어 이마에 두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패를 머리 위에 두고 죽으셨다. 예수는 왕이실 뿐 아니라, 시편 110편이 언급하는 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임무를 감당하신 것이다. 원고를 감수하면서 이러한 통찰을 더하여 준 윤준호 교수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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