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설교
2011.7.31
최완재
제목 : “조화로움에 관하여...”
성경구절 : 34.“이제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13:34~35)
평신도 설교를 권유받고 한 달여간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내가 잘 해낼수 있을까? 부터 주제는 무엇으로 해야할까? 등...
그러나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저의 입장에서는 딱히 설교 주제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더군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base로 이야기를 전개 하자니 평범한 평신도인 저의 입장에서는 전문성이 덜하여 , 이야기의 전달과, 감동을 주기에는 무게감이 떨어져 소정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생각되고...
그렇다고 평신도가 많이들 하는 찬양설교나, 간증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하자니 무릇 평범하게 살아온 저로서는 별반 내세울 내용이 없어 밋밋 할거같고... 쉽지 않더라구요...
저는 그렇다면 전문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인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어떨까? 라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평신도 설교의 의미와도 잘 맞아 떨어 질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뭐 눈에 띄는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구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꼭 어떤 사고를 치겠다는 것은 아니구요,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 다들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이야기의 주제는 ‘조화’입니다. 장례식에 많이 쓰는 인조 꽃이 아니라 조화로움의 조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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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별로 잘 쓰여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성경을 접하다보면 머릿속에 절로 자주 떠오르는 말입니다. 이유는 딱히 모르겠습니다. 그냥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크게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놀라운 의미와 그 이유 안에서 악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선을 쫒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자연과의조화를 이루며 공존해야하는 필연을, 선지자와, 예수님을 통해 오직 하나님 안에서의 삶의 이유와, 목적과, 경험적 교훈을 서술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큰 텍스트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찌 보면 너무도 포괄적이며 온 세상을 넘어 우주를 담고도 남을 것 같단 생각이 저는 듭니다. 저는 어떨때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조금 어렵게 다가올 때도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직 유일한 진리라 여기며, 하나님께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삶을 살고저 한다면 그 사랑을 제대로 알길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적 이라 생각합니다. 즉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됐던, 사람이됐던, 사물이 됐던...그 모든 사랑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하기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알아야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대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됐던...나 이외의 그 모든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관심이고, 배려이고, 더불어이고, 공존이고...결국에는 그것이 “조화로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조화란 사랑을 하거나, 알기위한 필요조건의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주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가장먼저 나의 그 대상이 되는 모든 것 중에서 으뜸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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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31절에 보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함에 가장 나중에 만물의 중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심에 하나가 아닌 쌍의 개념으로 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둘의 형상은 육체나, 정신도 서로 다른 형질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시차를 두고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모든 만물을 하나가아닌 쌍으로, 동시에 만드셨고, 또한 모든 만물 중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이성적 생각의 축복을 주셨으나, 또한, 유독 인간만 시차를 두고 만드신 부분에 있어서는 신앙인으로서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 같은데 솔직히 저는 아직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더욱이 후자에 창조된 인간으로 말미아마 원죄의 원인 제공자 라는 불명예를 짊어 지게 하셨음은 더욱 저를 혼란 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둘이 갈등이 아닌 미래 지향적인 조화를 이뤄 감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즉, 하나님께서는 시작과 끝의 전지전능하신 궁극의 유일 분이시기 때문에 시작도, 과거도, 미래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음을 생각할 때......음....솔직히 조금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물론 저 만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지금 설교하는 이 자리라고 해서 그러한 생각을 속이고 싶진 않습니다.
아니 재가 갑자기 웬 이상한 말을 ... 뭔가 조금은 불안한...불안해하지지 마십시오... 사고 안칩니다... 이런 돌출적인 말은 목사님께서는 하기 곤란한 말이죠ㅎㅎ... 저 같은 평신도 많이 할 수 있겠죠 ㅎㅎ
쌍의 개념은 혼자이면서 둘, 즉 혼자서는 존재 할 수 없고 둘이 조화를 이뤄야 존재할수 있음을 말합니다.-존 그레이의 화성남과, 금성녀를 보면 남과 여는 완전히 다릅니다. 조화를 모르면 공존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서로 간 조화를 이뤄가야만 함에 있어서도 둘은 개인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별로 조화롭다기 보다는 갈등적인 관계가 더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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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인간의 성의 역사를 저보고 평가하여 말하라면 저는 지금 까지의 성의 역사는 불평등과, 지배로 얼룩진 지극히 이기적인 남성주의적인 역사로 당연히 실패한 역사이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는 역사로 생각합니다.
오늘의 주제에서 벗어난 부분이기에 더 이상의 언급은 않겠습니다만. 이러한 아쉬운 역사의 생산과 지속에 크리스트교 또한 일조와, 방임으로써 책임 또한 많은 부분 있다고 저는 생각하며, 회계와 통찰을 통한 미래지향적인 역할 수행에 교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가올 성의 미래의 역사가 어떻게 지속 전개 될지는 몰라도 지금의 방식과 느슨한 패러다임을 가지고는 별로 희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너무 우울한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천년을 지나 현재에 이르는 인류 역사를 되집어 보니 그렇다는 겁니다... 오해 마시길...
데즈먼드 모리스의“동물학적 인간론”을 보면 남성과 여성의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행동양식 자체가 일반 동물들의 숫컷과 암컷의 행동 양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듣기에 기분 나쁠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일리가 있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점은 이성적인 사고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축복이죠...
즉 조화를통해 갈등과 지배를 지양하고 미래지향적인 창조적 새로움을 만들어 공존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두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생산적인 일에 많은 노력을 쏟지 않고서는 우리의 미래는 꼭 장및빛 만은 아닐꺼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며 보여 주었던 하나님의 세계에 부합하여 진일보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도대체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는 언제쯤 사라질까요??
제 얘기가 너무 이상적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다른 대안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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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페미니스트들만의 역할은 아닐껍니다.
하나님을 및는 범 크리스트교가 적극적으로 그러한 계몽에 나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조금더 알게되며 그분의 세계로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조화로움의 실천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조화로움에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릇된 패러다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계몽할수 있는 모범을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에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의 복잡하고 , 다변화된 세상일수록 더욱더 “나와 하나님, 나와 나 이외의 이웃과, 공동체 및 모든 사람에 대하여 따뜻한 관심을 같는 것이 더욱더 필요할 때라 생각됩니다.
그 것이 “조화로움”라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사람과 사람간에 어떻게 서로 관심을 갖고 어떻게 조화로움을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따뜻한 영화 한편을 소개 합니다.
영화제목은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입니다.
이영화는 전형적인 저예산 인디 펜덴스 영화입니다.
영화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조그마한 식당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사람과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서로에 대하여 관심을갖고, 그것이 거미줄처럼 서로를 엮어 마치 전염병처럼 서로간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어떻게 싹트고, 발아되고, 만들어져 가는지를 잔잔하게 보여줍니다.
그 정점에 있는 주인공은 보잘것없는 이방인인 중년의 일본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영화에 서 이방인과 본지인의 관계는 무의미합니다. 오직 진실많이 존재합니다.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분들은 밍밍할수도 있습니다만 한번쯤은 꼭 권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영화를 3번쯤 보았는데 볼때마다 새맘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저의 생각입니다... -5-
두 번째 조화로움의 대상은 자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은 무한하면 오직 좋겠습니까만은 아쉽게도 유한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는 인간자체와, 그 외 질병등등 이기도 하지만 인간 이외의 그 모든 대상의 존재 여부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비 조화적인 존재로 보일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전형적인 무책임한 소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안전과, 안락함과, 명예로움 등등의 이유로 인간은 문명의 이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자연으로부터 얻고 재생산합니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주고 받는 싸이클링의 관계에서 자연으로 다시 돌려주는 관계에 문제가 만들어지면서 자연과 인간사이의 조화는 깨지고 맙니다. 어디까지가 한계점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상태로 계속나아가기만 한다면 분명 우울한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사에 그것보다 더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니 미룰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제일 우선시 될 문제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너무 여유롭고 별반 급할게 없는듯 보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게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보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알고져, 하나님께 한발더 나아 가고져 한다면 하나님께서주신 소중함을 소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죄에 버금가는 의무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지 않으면 생각이, 마음이 타락 즉,내적인 붕괴로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바깥 세상은 어떻더라도 기독인들과, 교회는 생태 운동에 적극 나서야하며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 소임을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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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교회의 의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의 역사를 보면 대다수 교회역시 대부분 소비적 역사의 적극 동참자로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8:32절에서 말합니다. “진리가(참됨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 즉, 참됨의 진정함은 우리의 실천이 있을 때 비로소 참이다라는 뜻이라 생각 됩니다.
이것은 실천이 없는 참 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며, 행동을 강요합니다.
프란츠 알트는 “생태주의자 예수”란 저서에서 이렇게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전에 이렇게 가르쳤다. 감탄하고, 사랑하고, 배울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이세상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곳이라는것이 그분의 가르침 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생존하기위해서는 생태주의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필연의 이유를 말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의 현시대 사람들은 안으로의 내적위기와, 밖으로의 외적위기에 봉면해있다 생각합니다.
내적위기는 생각의 타락을 의미하고, 외적위기는 생태적위기를 말합니다. 둘다 어느것 하나 뺄수가 없는 당면한 위기입니다. 교회가 나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그런이유에서 지금의 저 4대강 사업과 같은 코메디같은 일들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꿈같은 생각일지 몰라도 범 교회가 적극 나서고 계몽해야 하는 바램을 가져보지만 대형교회를 비롯 힘있는 교회들은 별반 관심이 없나봅니다. 안타깝습니다.
저는 새맘공동체와 함께하면서 훌륭한 토론 문화나, 여럿 시스템이나, 과정의일들이 있습니다만 친환경적인 운동들이 마음에 듭니다. 그 작은 행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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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고, 평화롭게 교육되거든요...저는 그것이 참 조화로움 시작이라 생각 됩니다.
우리가 자연과 참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에 관심을 갖고 알기를 시도해야겠지요...그것이 참 진리를 향해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이 되구요....
마태복음5:45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신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에게도 공평하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요는 그것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와,오만을 뒤돌아 보아야합니다. 거기서부터 조화로움은 시작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너는? 이라고 말하면 저는 ㅎㅎㅎ...계속 진도 나갈 수 밖에 없겠죠...ㅎㅎㅎ
여기에서 인간이 자연앞에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지에 대하여 통렬하게 풍자하는 영화 한 편과, 한 인간이 자연속에서 생명의 참뜻을 찿고, 자연과 완벽한 동화를 꿈꾸며,그꿈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를 소개 합니다.
전자의 제목은 WALL-E이고, 헐리웃 애니메이션영화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완벽하게 인간의 오만함에 대하여 통렬하게 그려낸 영화를 근래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둘째녀석 때문에 보게 됐지만 감동은 제가 더 받았습니다.
영화의 전개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추악한 이기적 산물인 문명의 이기들의 쓰레기에의해 지구에 인간이외의 생명체는 멸종하고 결국에는 인간은 다른우주 공간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쓰레기를 치우는 한 로봇은 수백년동안 지구에 남겨져 묵묵히 그일을 인간을 대신하여 합니다. 그순간 인간은 새로운 우주공간에서 인공적인 환경속에서 지구에서의 자연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인공적인 규칙과, 통제에 의하여 삶을 영위하면서 막연히 지구로의 귀환을 동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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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중 이 한낮 쓰레기청소 로봇에의해 쓰레기 더미에서 식물의싹이발견되고 로봇은 그것을 키우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는 한편 로봇은 인간들의 쓰레기속에서 컴퓨터를 통해 인간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차츰 자연과 생명과 사랑을 알게됩니다...
다 이야기 하면 못보신 분들게 제가 못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하튼 만물의 영장 인간은 오직 그 자신들에의해 버려졌던 보잘것없는 쓰레기 로봇에 의해 한가닥 희망을 품게되고 생명의 미래를 꿈꿀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이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전체적 내용전개가 성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감독의 의도가 정말 제생각하고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창조주에의해 창조된 피조물에의해 창조된 또하나의 창조물, 그리고 그무엇과도 대체될수없는 생명의 존귀함, 순종과 희생,그리고 또하나의 로봇 이-브의 등장과 사랑의 감정 등등...
두 번째 소개할 영화의 제목은 배우 숀팬 감독의"In to the wild...("자연 속으로...“)입니다.
이영화는 인디펜덴스 영화라 볼수 있습니다.
영화는 한 젊은이가 삶의 즉, 생명의 참의미를 찿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속세에 내려놓고 문명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젊었을적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스콧니어링등 자연주의 사상가들의 실천 사상에 심취했던 기억이 떠올라 굉장히 감동적으로 보았고, 내자신의 삶의 의미를 한번다시 되돌아 볼수있었던 영화입니다.
특히나 마지막에 그가 죽기직전 톨스토이의 <행복>을 읽고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행복은 나눌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라고 되뇌이고 눈물을 흘리며, 삶의 눈을 감는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숙연해짐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가흘렸던 눈물의 의미에대한 여운이 지금도 저에게는 너무도 강렬한 자극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9-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읽었던 책들-잭런던의 늑대개와 야성의 아침, 톨스토이의 행복론, 닥터지바고, 그리고, 헨리데이빗소로우의 월든 등등의 장면이 잠깐 등장하는데 모두가 잘 알려진 책들로써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세 번째 “조화로움”은 이웃과,사회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한 부분이지만, 사회는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즉, 교회는 사회 속에서 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사회와 “조화로움”에 대해서 필연하게 의무지어짐을 저는 말하고저합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크리스트교와, 크리스트인들이 얼마나 세상과 조화롭기를 갈망했고, 실천하기를 노력했는지에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쉽지않은 물음입니다만, 저는 이물음에대해 딱히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왜냐하면 인류 역사를 보면 크리스트교가 세상과 조화롭기에 순응한것도 사실이지만, 한 편으로는 몹시 부끄럽게도 세상과 조화롭기를 거부하고 역행한것도 여럿 사실이거든요...
글쎄 어느쪽이 많은 부분을 차지 했느냐고 물으신다면...글세...선뜻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순응한 쪽은 크리스트교인 면으로 볼때 많은것 같고, 교회적이나 국가적인 단위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것 같이 생각드니 말입니다. 주식에서 개미나 기관에 비유한다고나 할까???
중세의 종교적 배척주의의십자군전쟁이나, 파리코뮌에서의 크리스트교의 박해가 있었으나 파리 코뮌 이전의 일반 국민들과 조화로움에 역행하는 교회의 특권적인 모습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의 모습들, 근대의 노예제도에대한 교회의 어정쩡한 암묵적 동의, 콜롬버스로 대표되는 신대륙찬탈 과정, 갈기갈기 찢기워 나눠진 아프리카 대륙의 찬탈...이 모든게 크리스트교를 국가의 종교로 삼는 나라들에 의해서 자행 된 역사들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보나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시각 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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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열거한 여럿 들 중에서 아메리카 신대륙 찬탈 과정을 하워드진 교수의 “미국 민중 혁명사”에서 보면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콜롬버스의 신대륙은 부끄럽게도 황금에 눈먼 기독인에 의한 학살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서에 따르면 당시 원주민들은 싸움 자체를 모르는 아주 순박한 종족으로 묘사돼있습니다.
콜럼버스는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그는 세 번째 신대륙 항해에서 최초로 발견한 섬을 트리니다드(Trinidad)라고 명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개념에서 따온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항해에 성공하는 데에도, 분명히 종교적 신념도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항해일지나 편지를 보면 그의 신앙심의 깊이와 추구했던 바를 알 수 있습니다.
편지의 일부를 인용해보겠습니다.
"두 분 폐하, 저는 그들(원주민)의 언어를 잘 아는 독실한 종교인이 있으면 그들이 모두 쉽게 그리스도 교도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두 분 폐하께서 일찍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을 멸망시켰듯이, 이 종족을 개종시켜 교회로 이끌기 위해 단호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결정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은 체격이 좋고 용모가 수려한 건장한 사람들입니다. 무기를 알지 못해 칼날을 쥐다 다치기도 했습니다. 좋은 노예가 될 것입니다. 50명의 병사로 그들을 정복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습니다." "성삼위의 이름으로, 팔만한 노예는 모두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노예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노예들은 비록 살아 있는 물건이지만 황금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분명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원주민들은 노예가 됐고,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25만 명에 달하던 아이티 원주민은 1550년에 5만으로 줄었고, 지금은 씨가 말랐습니다. -11-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대륙에관한 또하나의 기독교인이 있어 그를통해 그나마 위안을 얻습니다.
그는 콜럼버스 친구의 아들로 알려진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입니다. 그도 신앙심이 깊었습니다.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많은 부를 축적해, 부러울 것 없는 신앙인이었습니다.그러다 1510년 주교가 돼 아메리카 대륙으로 갑니다. 최초의 신대륙 선교사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때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원주민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자비한 침략자들에의해 자행되는 악랄한 만행을 그는 신앙인으로써 외면 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속세의 성공한 신앙인은 재산을 다 포기하고 원주민의 권리 투쟁을 위해 남은 삶을 희생했습니다. 그는 인디언 보호법을 제정하고, 서양의 불법행위를 고발했고,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라는 책도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해방신학의 원조'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의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스페인들은 칼날 시험한다고 10명~20명의 인디언을 죽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독교인이라는 두 사람이 어떻게 앵무새를 들고가는 소년의 목을 장난삼아 자를 수 있을까??" "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굶주린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는다. 쿠바에서만 석 달만에 700명의 아이가 죽었다. 절망감에 어머니가 아기를 물에 던져 죽이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콜롬버스“는 국가 단위의 이야기고,“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일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이 크리스트교의 두 모습에서 여러분은 어떻한 생각이 드십니까?
이쯤에서 제가 소개 할 영화가 어떤 영화라고 혹시 짐작이 가시는지요?....
“미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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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이란 영화는 너무도 유명해서 제가 따로 설명을 않겠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못 보신 분들이 아지 계시다면 다시 한번 꼭 권해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두 신부님들의 선택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라는 물음에 저는 지금도 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미 지난 역사는 뒷장으로 넘기고 현재의 우리가 사는 이 시간, 이 땅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요즘 우리의 관심을 원하는 것에는 “홍수로 인한 이재민과, 김진숙과 한진
중 사태, 노숙자들, 신 인간차별주의인 비정규직문제, 환경파괴로 비쳐지는 4대강문제, 남녀 차별주의, 방송및 언론사의 무기력화시도, 철거민들의 절규 등등... 우리주위에는 우리의 관심을 원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모든일에 일일이 다 도움을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신앙인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의 외침에 직접 참여는 못할 지라도 관심을 가지기를 게을리 해서는 않됩니다.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여론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계몽이고, 더불어 삶의 의무이자 조화로움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앞서 열거한 여럿 사항들 중 “비정규직”이란 문제에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많습니다.
이유는 근대의 인종차별주의나, 노예제도에 버금가는 신 인간 차별주의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고가 가져오는 부정적이 효과는 실로 엄청난 사회적문제를 새롭게 생산 할 것이고, 그 것으로 말미아마 사회는 안으로부터 병들고, 붕괴될 것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세기에 일어난 차별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못한 이시기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미 비정규직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닌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일본 속담에 “바람불면, 통장수가 흥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뜻은, 바람불면 먼지가 날리고, 먼지가 날리면 눈병이 창궐하고, 그러면 안대가 필요하고,안대는고양이 가죽으로만드니 고양이가 많이줄것이고,-13-
고양이가줄면 쥐가 들끓고, 쥐는 나무로된 통을 갉아버리고, 그러면 통장수는 흥하게된다는 말입니다.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세상에는 그 어느것하나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남의 문제가 언젠가는 나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필요한곳에는 언제는 관심을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조화로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3-
여기에서 사회적 관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이 “It is a Free world”, 자유로운 세상 이라는 역시 켄로치 감독의 인디펜덴스 영화입니다.
영화는 영국의 유럽 각지의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모여사는 런던의 허름한 지역에서 평범한 노동자인 한 여자가 이주노동자들의 취업을 알선해주는 일을 시작 하면서 점점 더 커가는 마음속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점점더 그들을 이용해 악랄하게 착취하며, 자본주의의 괴물로 성장해가면서, 자본주의 전사로써 철저한 약자와의 비조화로움으로 인하여 자신도 내면 속 안으로의 타락을 격으면서도 중단하지 못하고 더욱더 추악한 자본주의의 괴물로 성장해가는 것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조화롭지 못한 삶은 악의 편”이라는 말이 생각났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저 영화속의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때 자본의 악마로움으로부터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옳게 보호할 수 있을까?란 물음에 많은 생각을 했었던 기억입니다.
이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한 제가 준비한 “조화로움”이란 주제의 이야기는 끝을 맺으려 합니다.
부족한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야기 중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부디 좋은 쪽으로 생각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저 이상한 녀석 아닙니다...믿으셔도 괞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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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짧은 기도의 시로써 오늘의 설교를 마치고저 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하나님은 너무도 형언할 수도 없을 만큼 놀라움과,
위대함으로 다가오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암흑처럼 모름으로 저희를 힘들게도 하십니다.
또한, 천상의 홋곁 물결비단처럼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미풍처럼 다가오시기도 하며,
때로는, 어느 봄날 한없는 나른함 같이 저희에게 평안함을 주시기도하며...
때로는 가을날 짙은 청적 빛 깊은 사색으로 만나시길 원하시고...
또한,때로는 저희의 과오를 침묵으로 써 저희를 부끄럽게도 하십니다.
주여!
때로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저희가
저희 눈앞에 보여지는 저 많은 아픔들의 아우성에...
안타까움에...
하나님을 방관자라 감히 하나님이 너무도 미운 생각이 들 때도 솔직히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고백을 들어주시고,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저희는 세상에서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것들과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알길 원하옵고,
아버지께 한걸음 더 나아가길 원하옵나이다.
새볔 물안개처럼 소리없는없는 그림자처럼 언제나 저희를 감싸 주시옵고,
저희를 붙들어 주시고,
저희가 주춤할 때 저희에게 지혜와,용기를 주소서...
이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