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지리99/엉겅퀴님 글
1623년, 조겸, <유두류산기>
유두류산기』 계해년(1623) 가을
내가
일찍이 (魯)논어1)를
읽다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란 구절에 이르러 가만히 홀로 탄식하며 말하였다. “산은, 우뚝 솟아 높은 것은 산이 되어
두텁고 무거워 옮겨갈 수 없으니 산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지 아니한가? 물은, 유연하게 가는 것은 물이 되어 두루 흘러 머물지 않으니 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지 아니한가?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것은 인자(仁者)가 아니라면 할 수 없고 지자(智者)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나
역시 仁과 智를 배우는 자로, 성격이 산수벽(癖 *병적일 정도로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이름난 승경(勝境)에서 한번 노닐고자 생각한 지
오래되었다.
마침
9월의 열흘 동안 덕천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마치고 부사공(浮査 成汝信 1546~1632 *1616년의「방장산선유일기」가 옛산행기방에
있다)어른을 모시고, 옥립 김여휘君, 양여 진명기君, 조준명·조익명君과 함께 성황君 역시 지팡이와 미투리 차림으로 따라나섰다. 세심정에서
출발하여 공전촌을 지나고 달빛을 타고 살천의 당하촌에 당도하여 묵었다.
한밤중에
成어른께서 설사병에 걸려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운이 가라앉지 않아 산에 오르자는 약속을 같이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쓸쓸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이별에 즈음하여 각자 부(賦) 한 구절씩을 지어 떠나고 머무는 감회를 여기에 부쳤다.
잠시
후 어른께서 말씀하시길, “지금 아픈 것이 좀 나았고, 일찍이 중도에 염구가 스스로 한계2)를
긋는 것을 배우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여기서 물러나겠는가? 비록 제일봉에는 못 오를지라도 말(馬)이 갈 수 있는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겠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통인암(通引巖)을 지나고 낙종담(落鍾潭)을 통과하여 가섭마전(伽葉麻田)에서 휴식하니 천왕봉이 이미 머리 위로 가까워졌다. 산에는 돌멩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 말이 갈 수 없어 말을 버리고 거기서부터는 도보로 가는데, 비로소 어른께서는 죽장을 들고 짚신을 신고 문득 우리들을
돌아보고는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미 여기까지 당도했으니 내가 어찌 뒤에 와서 앞서 오르겠는가?”라 하였다. 우리는 멈추지도 못하고 모시고 나아가
용담에 이르렀다.
깍아지른
바위와 돌덩이들이 큰 것은 집채 만하고 작은 것은 종(鍾) 만한데 쌓이거나 떨어져 서로 받쳐주고 있는 것이 거의 이십 여리에 걸쳐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지난 기미년의 대홍수 때 천왕봉 일각이 붕괴되어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돌을 넘고 바위를 부여잡고 법계사로 향하였다. 절은 천왕봉 동쪽 7리쯤에 있는데,
巨石이 가로막혀 길은 이마에 닿을 듯하고 그런 길을 한 걸음씩 올라 천 걸음을 가야 1리에 해당하니 마땅히 천리 길도 한치 한치 나아가야
하리라. 달빛이 어두워 길을 가다 불을 잡고 이에 의지하여 나아갔다.
(덕천)서원의
노비 선복이가 어른을 업었는데 오를수록 길이 험해져 더 이상 업고가기 힘든 곳에 이르자 어른께서는 지팡이를 짚고 가셨다. 멈추지 않고 길을 가
어렵게 절에 당도하니 밤이 이미 깊은 때였다. 이를 소재로 각자 유산가 한 곡씩을 지었다. 이 절에는 승려는 없고 노파가 있어 밥을 지어 우리
앞에 차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어른께서는 절에 머물러 몸을 쉬고 우리 모두는 상봉에 올랐다. 상봉으로 가는 길은 가장 높고 급하였다. 한곳에 이르자 너럭바위가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있어 나는 무릎으로 기면서 나아가니 노파가 보고는 가련하다·가련하다고 하여 내가 가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억지로라도 이렇게
오르고자 하니 역시 산수를 사랑하는 병(癖)이라.
상봉에
이르러 아래를 보니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봉은 솟았고, 뭇산은 밤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어 혹 개미둑 같기도 하고 벌떼 같기도 하였다.
동으로
자굴 여항, 서로 월출 무등, 남으로 와룡 금산, 북으로 가야 덕유가 제법 높다. 그 외 정읍 내장산, 태인 운주산, 익산 미륵산, 담양
추월산, 광양 백운산, 순천 조계산, 나주 금성산·용구산, 전주 모악산이 모두 바라보였다.
우리
동방에서 웅장하고 넓으며 깎아세운 듯 높고 뾰족하게 하늘로 치솟아 거기서 구름과 비가 일어나 변화하는 모습은 신묘한 신선의 발자취인 듯 비할 데
없이 기이하니, 어느 산이 있어 이보다 더할 것인가! 원래 붓 하나로 그 본모습을 그려내기에는 만에 하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구경을
끝내고 내려오려고 하니 가파르고 울퉁불퉁하여 새도 넘기 어려울 만큼 험한 산길은 황홀하여 내려다보기조차 힘드니 그 높고 위태로움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와 법계사에서 잤다.
어른을
모시고 내려오다가 한 곳에 이르니 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고 덮개가 마치 처마를 드리운 것 같아 비바람에도 젖지 않을 곳이었다.
이에
八仙이라 호를 붙였는데, 부사(浮査)는 소선(少仙), 봉강(鳳岡)은 초선(撨仙), 죽교(竹橋)는 여선(驢仙), 송강(松江)은 조선(釣仙),
백야(白也)는 시선(詩仙), 도원(桃源)은 일선(逸仙), 무릉(武陵)은 어선(漁仙), 그리고 벼루를 받들고 온 천립(天笠)은 금선(金仙)이라
하였다. 즉 승려 언해도 수행하였기에 봉연(奉硯 *벼루를 받들다)이라 하여 그(팔선의) 말석에 참여시켰던 것이다.
또
짧은 절구(絶句)를 지었다. 이날은 살천의 당하촌에서 자고 돌아왔다.
아,
산수를 사랑하는 내 뜻이 청년 시절보다도 더 도타워졌지만 번거롭고 쓸데없는 일에 휩쓸려 세속의 인연도 아직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천명(知天命)
하고도 다섯에 비로소 높이 오르매, 내 나이로도(*55세) 오히려 오르내리기 힘들었는데, 하물며 어른께서는
이미 팔순에 이르러서도(*당시 성여신은 78세) 굴강하고 건강하여 무난히 산에 올랐으니 이 연세에 古今의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웅장한 문장과 글씨로 風雨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리니 세상에 드문 기이한 일이라, 하여 부족하나마 이를 기록한다.
때는
천계 3년(天啓 *명나라 희종의 연호 1621~1627) 계해년 9월 기망(旣望 *음력16일), 임천 조씨의 後人 봉강 초수 조某 형연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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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겸(趙㻩
1569~1652) 조선 중기의 학자. 갑자사화 때 희생된 조지서(趙之瑞 1454~1504)의 증손. 자 瑩然 호 鳳岡 본관 林川 출생 진주.
문장과 효행으로 알려졌다.
遊頭流山記
癸亥秋
余嘗讀魯論1)至仁者樂山智者樂水竊自歎曰山者不以峙然高者爲山而於厚重不遷乎樂水者不以悠然逝者爲水而於周流不滯乎樂然則山之樂水之樂非仁者不能非智者不能余亦學仁智者性癖山水思一遊於名區勝境者久矣適於九月之旬行祀事於德川書院畢陪成丈浮査公偕金君玉立汝輝陳君亮汝明曁曺君俊明益明而成君鎤亦隨杖屨而行焉發自洗心亭歷公田村乘月到薩川堂下村而宿中夜成丈患洩痢朝起氣不平似不共登山之約余等皆不勝落莫臨別各賦一絶以寓去留之懷俄而丈曰今者疾小愈曾有莫學中途求也畵2)之句吾何忍背雖未登第一峯當馬首窮處而還於是歷通引巖過落鍾潭憇伽葉麻田天王峯已近頭上矣山石錯落馬不能行捨而徒步自此而始丈忽擧竹杖着芒鞋顧余等言曰今旣到此吾何後卽先登余等不能止陪行行至龍潭巉巖石骨大如屋小如鍾磊落相撑者幾二十餘里問於人則曰去己未年大雨水天王峯一角崩頹致此云遂越石攀巖向法界寺寺在天王峯東去七里許巨石當路路觸額上一步直千步一里當千里寸寸而進月黑中路束火以進賴院奴仙僕者負丈以上至益險難負處則丈輒擧杖以行行之不已艱得到寺則夜已深矣因各作遊山歌一闋此寺無緇髠只有老婆炊飯面進翌日丈留寺中以安身余等皆登上峯峯路最高急至一處有盤石如懸余匐匍膝行有老婆見之曰可憐可憐得此可憐之名而强欲登之斯亦癖矣至上峯則下臨無地衆山星羅或如蟻垤或如蜂屯東闍屈餘航西月出無等南臥龍錦山北伽倻德裕乃稍高焉其他井邑內藏山泰仁雲住山益山彌勒山潭陽秋月山光陽白雲山順天祖溪山羅州錦成山龍龜山全州母嶽山皆在望中吾東方䧺盤屹立高揷中天興雲雨變化之狀秘仙蹤奇絶之處孰有加於此哉固不可以一筆形容其萬一矣遊覽畢欲下則崎嶇鳥道怳惚難視其爲高且危可想矣還宿法界寺陪丈而下至一處有巖削立蓋若垂簷雖有風雨不能漏汚於是題八仙號曰浮査少仙曰鳳岡撨仙曰竹橋驢仙曰松江釣仙曰白也詩仙曰桃源逸仙曰武陵漁仙而奉硯者天笠金仙僧彦海亦隨而行故奉硯而參其末又題短絶是日宿薩川堂而還噫余之志於山水者雖篤於靑年而煩宂所靡未免俗緣知命有五始得登臨以余之年尙艱上下況丈已至八旬崛强益健登陟無難筭諸今古孰有如斯況長篇巨筆之以驚風雨泣鬼神乃稀世之勝事故聊以記之時天啓三年癸亥九月旣望也林川後人鳳岡撨叟趙某瑩然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