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의
예언 난해절 연구
이 상락 저
들어가는 말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는 정말 만만찮은 난해구절로 가득 찼다. 그 중에서 주요한 교훈을 포함하고 재림성도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임의로 골라 여기에 제시한다.
학자들이 유명한 난해 구절들과 특정한 문단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제안과 시도를 내놓았으나 아직까지 명쾌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부분이 많다. 필자는 난해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불일치의 견해들을 접하면서 장단점을 살피고 본문의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간파하기 위해 문맥적, 문법적, 구조적, 그리고 신학적 반론 등을 살펴본 후 재림교회의 최근의 입장과 영감의 기별을 근거로 하여 의견이 분분(紛紛)한 난해구절들을 해석하고자 노력하였다. 일관성 있게 주로 성경이 성경을 설명하는 방식을 따랐다. 성경에는 아직도 더 많은 연구와 올바른 해석을 기다리는 난제들이 있다. 장차 언젠가는 성령의 인도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우리 더 열심히 연구하자.
이상락
차 례
다니엘서 난해 구절
여호야김 삼년(단 1:1) 5
고레스왕 원년(단 1:21) 8
후일(단 2:28) 11
나누일 것임(단 2:40-41) 12
벨사살 왕(단 5:1) 13
다리오 왕단 6:1-3) 16
열 뿔(단 7:7) 20
7장의 작은 뿔(단 7:8) 22
조사심판(단 7:9-10) 24
하늘 성소 둘째 칸 봉사(단 7:13-14) 26
성도들이 나라를 얻음(단 7:22) 28
작은 뿔이 저지를 악행들(단 7:25) 29
8장의 작은 뿔(단 8:9) 36
작은 뿔의 승리(단 8:10-12) 44
2300주야(단 8:14) 54
490년(단 9:24) 59
하늘 성소 관유(단 9:24) 61
2300주야 기산점(단 9:25) 62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임(단 9:27) 68
로마와 교황권 69
마지막 남방왕과 북방왕(단 11:40) 70
교황권의 역할(단 11:41) 72
애굽(단 11:42-43) 73
장막궁전(단 11:44-45) 74
1290일(단 12:11) 75
1335일(단 12:12) 77
요한계시록 난해 구절
삼위일체 하나님(계 1:4-5) 78
장차 오실 자(계 1:4) 79
먼저 나신 자(계 1:5) 80
특별부활(계 1:7) 81
계시록의 주제(계 1:7-8) 82
주의 날(계 1:10) 84
지상의 교회들(계 1:12) 86
니골라 당(계 2:6) 87
일곱 교회 적용문제 88
귀 있는 자(계 2:7) 91
열린 문(계 3:8) 93
창조의 근본(계 3:14) 95
보좌에 동석(계 3:21) 96
하늘 성소의 원형들(계 4:1) 97
첫째 칸에 있던 하나님의 보좌(계 4:2-3) 99
24장로들(계 4:4) 102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계4:5) 106
네 생물(계 4:6-8) 108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계 5:1) 111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이심(계 5:6) 113
두루마리를 취하심(계 5:7) 114
네 생물의 사역(계 5:8) 116
제단아래 있는 영혼(계 6:9-11) 117
재림 때 성부 하나님의 동행(계 6:16) 123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계 7:1) 124
인치는 천사(계 7:2-3)) 127
하나님의 인(계 7:2) 129
144,000인(1)(계 7:4) 131
144,000인(2)(계 7:5-8) 134
불가승수의 무리(계 7:9-10) 137
일곱 나팔의 도입부 계시(계 8:2) 140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계 8:3-4) 142
중보사역의 끝(계 8:5) 145
유프라테스 강에 결박한 네 천사(계 9:14) 146
힘센 다른 천사의 정체(계 10:1) 149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계 10:2) 153
일곱 우레가 말한 것(계 10:3) 155
일곱 우레가 말한 것 인봉(계 10:4) 157
지체치 아니하리라(계 10:5-6) 159
불특정의 기간(계 10:7) 162
하늘 성소진리(계 11:1) 164
바깥마당은 지구임(계 11:2) 167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계 11:7) 169
일곱째 나팔의 시작(계 11:15) 171
하늘 지성소의 열림(계 11:19) 173
1260일(계 12:6) 175
사단의 패배와 추방(계 12:7-9) 178
남은 자(계 12:17) 185
짐승의 우상(계 13:14-15) 189
짐승의 표(계 13:16-17) 192
짐승의 표 666(계 13:18) 195
영원한 복음(계 14:6) 200
세세토록 고난 받음(계 14:11) 203
특별부활(계 14:13) 204
성전에 연기가 가득참(계 15:8) 206
제단이 말함(계 16:7) 207
여섯째 재앙(계 16:12) 207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계 16:13-14) 209
아마겟돈(계 16:16) 211
바벨론의 멸망(계 16:19) 214
17장의 시점 215
큰 음녀의 정체(계 17:1-2) 215
17장 짐승의 정체(계 17:3) 217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다(계 17:8) 218
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있고(계 17:9-10) 220
열 뿔은 열 왕(계 17:12-13) 223
아마겟돈 전쟁(계 17:14) 226
삼중연합의 붕(계 17:16) 227
다른 천사(계 18:1) 228
어린양의 혼인(계 19:7-8) 229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9) 238
예언의 신(계 19:10) 239
하늘의 군대(계 19:14) 240
불 못의 심판(계 19:19-21) 241
곡과 마곡의 전쟁(계 20:7-8) 242
영멸(지옥)(계 20:10) 243
백보좌 심판(계 20:11) 244
성전을 보지 못함(계 21:22) 246
성 밖의 생활(계 21:24-26) 246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1)(계 22:1) 248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2)(계 22:3-4) 249
조사심판의 종결(계 22:11) 250
두루마기를 빠는 자(계 22:14-15) 250
여호야김 삼년
단 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1-2절은 명백하게 역대하 36:5-8에 근거하여 느부갓네살에 의한 유대인들의 제1차 바벨론 강제 이주를 언급 한다. 이 때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의 성취였다(렘 25:8-11).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시작되었던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간의 포로 생활은 고레스가 그의 재위 원년에 내린 조서로 끝났다. 바벨론 왕의 통치 계산법이었던 즉위년 계산 원칙과 유대민력(가을부터 가을까지 계산함)에 의해 이 70년 기간은 현대의 역산법(曆算法)으로 BC 606/605에서 537/536년이 된다. 이 예언의 성취를 목격한 다니엘이 고레스 원년에 70여 년 전의 역사적 사건들을 자신의 일생과 연관시켜 1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1절). 1절에서 악의 통치를 상징하는 바벨론과 의의 통치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이 동시에 언급되므로 다니엘서는 선과 악의 대쟁투를 그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경 전반에 걸쳐 예루살렘과 바벨론의 치열한 충돌은 선악의 대쟁투를 예시하는 것이다.
유다 왕 여호야김(Jehoiakim, BC 609-598재위)은 요시야(Josiah, BC 640-609재위) 왕의 둘째아들이다(대상 3:15). BC 609년 여름 애굽 26왕조의 바로 느고 2세(Neco II, BC 610-595)가 아시리아 왕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북진하고 있었다. 실지로는 그 당시 역사적인 정황을 보아 바벨론을 대항하는 아시리아의 잔군들을 돕기 위해 출병하여 유프라테스 강(Euphrates River)가에 위치한 갈그미스로 올라가고 있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이 그 당시 원정로였던 므깃도에 나가 애굽의 느고 2세와 맞서 싸우다가 비명에 죽고 말았다(왕하 23:29). 이 연대는 느부갓네살 통치의 첫 11년간에 대한 공식적 기록인 바빌로니아 연대기에 의하면 아주 정확한 해이다. 백성들은 요시야의 후임으로 그의 넷째 아들 살룸이라고 불리던(대상 3:15 렘 22:11) 여호아하스(Jehoahaz, BC 609재위)를 왕으로 삼았다. 아마 그의 친 바벨론적인 경향 때문인 것 같다. 애굽의 바로 느고는 BC 609년 같은 해 가을 북시리아로부터 회군하여 돌아오던 중에 석 달 동안 왕 노릇한 여호아하스 왕을 폐위시켜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버렸다(왕하 23:33). 그리고 그 후임으로 요시야의 아들 25세의 친애굽의 경향을 가진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아 그 이름을 “여호와가 일으킨다”는 뜻을 가진 여호야김이라고 하였다(왕하 23:34-36 대하 35:20--36:8). 결국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애굽으로 잡혀간 여호아하스는 거기서 죽었다(왕하 23:34 렘 22:10-12). 유다는 계속 애굽의 종주권아래 있게 되었고 여호야김은 백성들에게 은금을 징수하여 애굽의 바로에게 보냈다(왕하 23:35). 여호야김은 삼년간 바벨론에도 조공을 바치며 느부갓네살을 섬겼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노선을 바꾸어 바벨론을 공개적으로 배반하였다(왕하 24:1). 그리고 점점 친 이집트 정책을 펴서 동맹까지 맺자 이에 화가 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제2차 갈그미스 전쟁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애굽군을 추격하여 남하하다가 예루살렘까지 침공하였다(렘 22:18-19; 36:30 왕하 24:1-6). 그는 이때 항복한 여호야김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갔다(대하 36:6).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는 정확하게 언제인가? 여호야김이 BC 609년 가을에 통치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재위 삼 년은 BC 606/605년에 해당된다. 유대민력(가을에서 가을까지)에 의하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여호야김 통치 삼년은 유대식 해인 BC 606년 가을부터 605년 가을까지이다. 통치연대를 왜 그렇게 매기는가? 즉위년 계산 방법과 유대 민력을 따른 계산방법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연대기의 세계적인 권위자 에드윈 R. 티엘(E. R. Thiele)은 히브리 왕들의 통치년을 매기는 두 가지 제도를 소개했다. 즉 즉위년(accession year) 계산법과 비즉위년(nonaccession year) 계산법이다. 즉위년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왕이 등극했을 때 선왕(先王)이 죽은 해의 마지막 기간 곧 새해가 되기까지의 여분의 기간을 단순히 즉위년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그 새해부터 후임 왕의 공식적인 원년(元年)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호야김이 즉위한 것은 가을에 있는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 즉 티쉬리월 1일의 신년(New Year) 후였기 때문에 그의 통치 0년 혹은 즉위년은 BC 609년 가을부터 608년 가을 신년이 되기까지이고, 공식적인 통치 첫 해 곧 원년은 BC 608년 가을신년에서 607년 가을신년이 되기까지이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 2년은 BC 607년 가을에서 606년 가을까지이고, 통치 3년은 BC 606년 가을부터 605년 가을까지이며, 재위 4년은 605년 가을부터 604년 가을까지가 된다. 이와 같이 1절의 여호야김 3년은 즉위년 계산법과 유대력에 따라 BC 606/605년이 되며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BC 605년 여호야김 재위 삼년에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한 것이다.
참고; 바벨론의 연대 매김법을 살펴보면 연도는 항상 니산월 1일 새해 설날부터 시작하는데 오늘날의 3월 내지 4월에 해당 된다. 이 책력에 의하면 여호야김 왕의 즉위년은 BC 609년 가을부터 608년 봄 신년이 되기까지이고, 그의 공식적인 원년은 BC 608년 니산월 1일부터이다. 그의 통치 2년은 BC 607년이며, 제3년은 BC 606년이다. 제4년은 물론 BC 605년이다.
그런데 예레미야 25:1에 보면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고 되어있다. 예레미야의 이 언급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첫 예루살렘 정복의 해가 여호야김 제3년이라고 말한 것과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 같다. 어떤 주장이 맞는가? 이 외견상의 모순은 그 당시 바벨론에서 왕들의 통치년을 매기는 방법이 유다에서와 같이 왕들의 즉위년 계산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호야김 재위 삼년(BC 606년 가을부터 605년 가을까지)은 느부갓네살 왕의 즉위년이고 여호야김 재위 넷째 해(BC 605년 가을부터 604년 가을 까지)는 느부갓네살 왕의 원년인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부왕의 부음(訃音)을 듣기 바로 전 여름에 예루살렘을 침략했다(BC 605년 4, 5월 즉 오늘날 7월 혹은 8월경). 그리고 남하하여 애굽으로 향하였다. 그때쯤 나보폴랏사르 왕이 바벨론 도성에서 서거했다. 바벨론의 연대기 점토판에 의하면 나보폴랏사르는 BC 605년 아브(Ab, 5월)월 8일(오늘날 8월 15일)에 병사(病死)하였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은 부왕이 죽은 후 열흘 가량 지나 애굽 국경지대 부근에서 부음(訃音)을 접하고 그는 유다와 베니게(Phoenicia)와 애굽과 시리아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로들을 동료 장군들에게 맡겨 바벨론으로 데려오게 하고 자신은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급히 아라비아 북부의 사막 길을 횡단하여 귀국함으로 왕위를 보존하고 있던 충성스런 신하에 의해 안전하게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BC 605년 엘룰(Elul, 6월)월 1일(오늘날 9월 7일)에 등극하였다. 이때가 BC 605년 가을 새해가 되기 바로 전이었으며 그의 즉위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즉위년이 여호야김에게는 재위 3년(BC 606년 가을에서 605년 가을 새해가 되기까지)이 된다. 실제로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은 옹근 한 해가 아니라 6월 1일에 등극하였으므로 새해(7월 1일)가 되기까지 한 달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유대력이 아니라 봄부터 재위 년을 산정하는 바벨론 책력에 의하면 그 다음해 604년 새해(니산월 1일)가 되기까지 즉위년은 몇 개월이 더 연장된다. 가을부터 재위년(在位年)을 매기는 유대력에 의하면 그의 공식적인 원년은 BC 605년 새해인 7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아무튼 여호야김 통치 4년(BC 605년 가을에서 604년 가을까지)은 느부갓네살 원년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에 1절과 예레미야 25:1에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라는 말이 정확하게 일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예레미야의 언급은 서로가 완전히 일치한다.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 일년을 여호야김의 제4년과 일치시켰으나 다니엘은 그의 즉위년을 여호야김 제3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비즉위년 계산법(nonaccession-year dating)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비즉위년 산정법이란 선왕이 죽은 해가 다음 왕의 원년이 되는 중복 계산법이다. 다니엘은 즉위년 방식으로, 예레미야는 비즉위년 산정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비즉위년으로 보면, 여호야김 재위 4년인 BC 605년 가을에서 604년까지가 느부갓네살에게는 원년이 된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여호야김도 비즉위년 계산법으로 산정해야되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재기하면 할 말이 없다. 다른 주석가들은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버지 나보폴랏사르가 동시 집권한 것으로 추측함으로서,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다 제도를 따르고 다니엘은 바벨론의 제도를 따르는 서로 다른 계산법에 따라 사건들의 연대를 매겼다고 추정함으로서, 이 모순점을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재림교회 성경주석은 이 두 가지 설명이 다 오늘날 낡은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혹자는 유대력의 가을부터 시작하는 민력과 봄부터 시작하는 종교력의 6개월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추정함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나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바벨론과 유다가 왕들의 통치 연대를 즉위년 방식으로 산정한 것과 유대민력에 대해 알고 나면 이 난제가 시원하게 해결된다.
고레스왕 원년
1:21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이 구절은 다니엘이 고레스 왕 때 즉 그의 생애 말년에 제1장을 기록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니엘은 페르시아 시대까지 살았다. 그는 페르시아 왕 밑에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였다.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용어들이 1장에 사용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아스부나스(3절), 귀족(3절), 진미(5, 8, 13, 15, 16절) 등은 바벨론어가 아니며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하젤(Gerhard F. Hasel)의 관찰에 의하면 다니엘서 2장에 8번이나 나오는 “은밀한 것” 등 다니엘서에서 아람어로 쓰인 부분에 19개 정도의 페르시아의 어휘가 등장한다고 했다. 주로 관직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고레스는 누구인가? 성경의 고레스는 키루스 2세(Cyrus II, BC 559-529재위: 신정부에서는 BC 539-529재위)를 말한다. 아카드어로 된 한 설형문자 문헌에 고레스의 정체에 대해, “그는 항상 왕권을 행사해온 가문 출신으로 안샨 왕 테이스페스 대왕의 후손이며 안샨 왕 고레스 대왕의 손자이고 안샨 왕 캄비세스 대왕의 아들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테이스페스(Teispes, BC 675~640재위)는 초기 아케메네스 왕조시대의 페르시아 왕이다. 아케네메스 왕조의 이름은 테이스페스의 부친 아케메네스에서 나왔다. 그는 페르시아만 북부에 있는 엘람 왕국의 안샨(Anshan) 지방을 지배했었다. 안샨은 지금의 이란 남서부, 시라즈시 북쪽지방에 있던 고대 왕국 엘람의 도시로서 BC 675년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페르시아인들은 BC 522년 다리우스 1세가 즉위할 때까지 “안샨의 왕들”이라는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역사서』1권 91장에 나오는 “델픽 오러클”(Delphic Oracle)에 의하면 BC 6세기경에 활동한 메디아 제국의 실질적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 BC 585~550재위)가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Mandane)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하여 딸을 메디아의 귀족에게 시집 보내지 않고 멀리 떨어진 안샨(Anshan)의 페르시스(지금의 이란 파르스)에 있는 캄비세스 1세(Cambyses I)라는 봉신왕(封臣王)과 결혼시켰다. 이들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난 것이다. 그 아기가 자라서 자기를 멸망시키는 꿈을 꾼 아스티아게스는 고레스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수석고문관이었던 하르파구스(Harpague)가 고레스를 죽이는 대신 양치기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그는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10세가 된 고레스는 뛰어난 자질 때문에 아스티아게스에게 발각되지만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꿈에 개의치 않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살려주었다.
고레스 유년기에 대해 크세노폰(Xenophon)이 기록한 키로파이디아(Cyropaedia)에 의하면, 고레스가 그의 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의 궁궐에서 높은 지위의 대신 역할을 했고, 고레스의 어머니가 고레스에게 앞으로 메디아 땅에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유능한 말 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한다. 성인이 된 고레스는 그의 부친 캄비세스 1세의 뒤를 이어 BC 559년 엘람(Elam)에서 아케메니아 왕조의 안샨(Anshan, 이란 남서부)의 페르시아 왕이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비문에 의하면, 고레스는 BC 553년 종주국(宗主國)인 메디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 왕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는데, 처음 두 번은 패했지만, 세 번째 BC 550년의 싸움에서 메디아의 주장(主將) 하르파구스(Harpagus)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는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의 군대가 자신을 사로잡아 고레스에게 항복하여버렸다. 고레스는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Ecbatana)를 점령하고 약탈하였으며 아스티아게스 왕을 선대(善待)하여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장관으로 보내버렸다. 고레스는 메디아 사람들에게 유화정책을 써서 유능한 메디아 사람들을 여전히 정부요직에 기용하여 공존하였으며,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이자 고레스의 외삼촌이었던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를 즉위시켜 메디아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게 하였다. 그리고 시악사레스 2세의 딸인 카산다네(Kasandane)와 결혼하였다. BC 547년 고레스는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Sardis)를 함락시켰고 소아시아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고레스는 주전 546년부터 540년까지 동편의 나라들 파르티아, 드랑기아나, 아리아, 코라스미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간다라, 스키타이, 사타귀리아, 아라크시아, 마카를 정벌하였다. BC 539년에는 바벨론도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바벨론의 점령으로 고레스는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이전에 바빌로니아인들이 정복했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수중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그리고 고레스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다. BC 529년 고레스가 70세가 되던 해에 아랄해(Aral Sea)에 있는 마싸게테(Massagetae)를 침공했는데 그해 7월에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의 시신이 페르시아왕국의 파사르가데로 옮겨져 장사되었다. 그의 시신은 푸살가대(Pusargadae)라는 곳에 여섯 계단으로 만들어진 석조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풀루타크(Plutarch)에 의하면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남겨졌다한다. “오! 인간, 나는 캄비세스의 아들 고레스, 페르시아제국을 세웠고 아시아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몸을 덮고 있는 약간의 땅을 아까워하지 마시오.” 그는 실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1971년 이란은 고레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통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러면 고레스는 언제부터 왕이었는가? 인도 유럽족에 속하는 폐르시아인들은 BC 7세기에 페르시아만 북동쪽의 안샨(Anshan)을 중심으로 거주했다. 아카메네스(Achaemenes)가 BC 7세기 초에 아케메네스가 왕조(Achaemenian dynasty)를 창시하였지만 사실상 키루스 2세(Cyrus II, BC 559-529재위, 성경의 고레스 대왕)가 그 왕조를 세운자로 여겨진다. 따라서 고레스가 엘람(Elam)에서 아케메니아 왕조의 안샨의 왕위에 오른 BC 559년을 제국의 기원으로 삼는다. 고레스가 나타나기 전에는 메디아의 속국이었으며 페르시아 왕은 “안샨의 왕”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왕조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우고 다스린 이란의 고대 왕조로서, 그 영토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에게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근동지역을 포함하였다. 이란 동부지역의 호전적 부족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고레스는 BC 529년 옥수스와 작사르테스 강변 부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를 뒤이어 몇 왕들이 등극하였으며 다리우스 3세(Darius III, BC 336-331)에 이르러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함으로 이 왕조는 사라졌다. 따라서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기 전에 수년 동안 왕으로 통치했었는데, 처음에는 안샨(Anshan)의 왕이었고, 그 다음에는 메디아-페르시아의 왕이었으며, 그 후에는 메디아(구 앗수르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하여)와 소아시아의 리디아를 추가한 지역의 왕이었다.
고레스는 그가 정복한 바벨론의 신정부에서 왕이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함락시키고 거기에 다리오를 봉신왕으로 등극시켰다. 그러나 고레스는 점령한 바벨론을 포함하는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실질적 왕이었다(BC 539-529재위). 그는 바벨론 신하들에게 자신을 자랑스럽게 “고레스, 우주의 왕, 위대한 왕, 강력한 왕, 바벨론의 왕, 수메르와 악갓의 왕, 세계 도처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고레스 왕 원년은 언제인가? 바벨론 도성은 나보니두스 재위 17년 즉 BC 539년 티쉬리월(제7월) 16일 오늘날 10월 13일에 함락되었다. 고레스 통치가 나보니두스의 통치 다음에 바로 이어졌다면 다리오 왕과는 어떤 관계인가? “그가 고레스보다 먼저 통치했거나 동시에 통치한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의 바벨론 기록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목록은 고레스의 통치가 나보니두스의 마지막 해가 끝난 직후에 시작한 것으로 계산한다.” 다리오 왕이 즉위했었으나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형식상의 왕이었고 최고의 권력을 잡은 실권자는 동위 왕이었던 고레스 왕이었다. 바벨론 점토판들에 나타난 계산에 의하면 고레스 왕의 통치 원년은 바벨론 함락이후의 바벨론 새해 설날인 BC 538년 봄에 시작되었다. 가을을 기산점으로 하는 유대민력으로 보면 고레스 원년은 BC 538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바벨론 성은 BC 539년 유대 민력의 새해 설날(티쉬리월 1일, Rosh Hashanah)이 지나간 후 티쉬리 16일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고레스 통치의 첫해는 그 다음해 새해 설날 즉 538년 가을의 티쉬리월 1일 이전에는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즉위년이다. 그러므로 바벨론 멸망 때(BC 539년 10월 13일)부터 계산하면 BC 539/538년은 즉위년이고 그의 원년은 BC 538/537년이 된다. 고레스 제1차포로 석방령은 BC 537년 종반에 내려졌고 포로들이 536년 봄에 귀환 했다. 그러므로 21절에서 고레스 왕 원년은 그가 포로 석방령을 내린 후 즉 BC 537년 마지막쯤이었다. 이때에 다니엘은 이미 86세가 된 고령이었다. 18살에 포로로 잡혀온 그는 바벨론의 총리와 왕의 수석보좌관을 지냈다. 느부갓네살이 실각되어 있는 시기 동안과 또한 권세와 왕위를 복권한 후에 다니엘이 무엇을 하였는지 그의 활동에 대하여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을 계승한 몇 왕들, 즉 아멜 마르두크(Amel-Marduk 성경상의 에윌므로닥), 네르갈샤르우수르(Nergal-shar-usur), 라바써마르두크(Labashi-Marduk), 나보니두스(Nabonidus) 등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다니엘은 중용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바벨론이 망했던 그 밤에 벨사살의 잔치가 베풀어졌던 그 현장에서 다니엘은 또 다시 왕궁의 셋째 치리자가 된 것이다. 홀의 벽에 손으로 쓰인 운명의 글을 읽고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벨론이 그 밤에 메디아-페르시아에게 패망당한 후 그 바벨론 땅에 새로 세워진 정부에 또 다시 다니엘은 부름을 받아 수석총리가 되었다.
다니엘이 왜 하필 고레스 왕 원년을 언급했을까? 물론 BC 537년은 유다 포로 제1차 석방령이 내린 해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렘 29:10)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제1차포로 석방령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인 일에 일조하였다. 그가 어찌 그 해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고레스 원년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기념할만한 해였다. 다니엘은 동포들의 해방과 귀환을 목도한 산증인으로서 고레스 왕 원년을 언급한 것이다.
어떤 주석가는 21절과 10:1에 다니엘이 고레스 3년에 전쟁에 관한 이상을 보았다고 한 것이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레스 원년 이후까지 살았던 다니엘이 여기서 고레스 원년을 언급한 것은 아마 그가 목도한 유다 석방령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대하 36:22-23 스 1:1-5; 6:3). 다니엘은 페르시아에서 혜성같이 나타나는 고레스 왕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 고레스라는 이름이 예언 중에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사 44:28; 45:1). 다니엘은 그의 나이 약 88세 되었던 고레스 재위 3년까지 바벨론의 공직에 있었다. 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발흥과 통치와 몰락은 물론 그 뒤를 이은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시작을 목격한 산 증인이었다. 수산 도성에 있는 한 무덤이 전통적으로 다니엘의 무덤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예루살렘 근처에서 다니엘 선지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후일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후일이란 언제를 말하는가? 후일은 미래를 뜻하는 관용어이다. 본문에서는 다니엘이 살았던 바벨론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르는 장래를 가리킨다. “후일에”라는 용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시대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창 49:1 민 24:14 신 4:30; 31:29 렘 23:20; 30:24; 48:47; 49:39 겔 38:16 단 2:28; 10:14 호 3:5 미 4:1). 야곱은 정복이나 왕의 등장(민 24:14)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미래역사에 후일을 적용하여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하였다. 신명기 31:29에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고 말세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이 예언은 사사 시대에 성취되었다. 반복해서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일어난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에 성취한 예언이다. 또한 후일이라는 용어가 메시아 시대나(사 2:2 호 3:5) 그 이후에 이어질 시대에 적용되기도 하였다(겔 38:16).
재림교회 신학자들에게 “후일에”(Latter day)라는 문구는 종말의 때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데스몬드 포드(D. Ford)가 종말의 때는 1798년이 아니라 주후 3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러나 종말의 때를 1798년부터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재림교회의 입장이다. 영(Edward J. Young)은 28절의 후일을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로 제한한다.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28절에서 후일은 바벨론부터 돌 나라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르는 미래를 가리킨다. 7장과 비교하면 그것은 너무나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후일”은 예언이 미래에 성취되는 것을 의미하는 묵시적인 언어이지 세상의 완전한 종말 지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나누일 것임
단 2:40-41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쇠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이 구절은 헬라 제국을 무너뜨리고 일어날 라틴 민족의 철나라 로마제국(BC 168-476)을 가리킨다(7:7 주석 참조하라). 원문에는 나라 라는 말이 없다. 역사에서 철의 제국으로 명성을 떨치며 전 세계를 지배하였던 로마는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처럼 자기들을 대항하는 나라들을 짓밟고 무력으로 쳐부수었다. BC 168년 6월 22일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멸망시켰고, BC 30년에는 이집트를 멸망시켰다. 로마제국은 500년 이상 무적의 대제국으로 군림하였다. “영국의 섬들로부터 아라비아 만까지, 북해로부터 사하라까지, 대서양으로부터 유프라테스까지 지배했다.” 그러나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던 이 철의 제국도 “그 나라가 나누일 것”(2:41)이라는 예언대로 AD 476년 게르만족 헤룰리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게 무너졌다. 그리고 그 영토는 사분오열하여 현대 유럽 국가들로 자리 잡은 독립된 열국시대로 접어들었다.
발과 발가락은 열국시대를 상징한다(AD 476년 이후). 발가락은 7장에 나오는 넷째 짐승의 열 뿔에 해당된다. 로마가 붕괴하여 분열되어 그 상태가 세상 끝까지 갈 것으로 천명되었다. 자크 B. 두캉은 철과 진흙으로 된 열강을 다섯째 왕국으로 분류하였고, 그 진흙은 정치와 타협하려는 종교적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진흙과 철의 섞임은 7장의 작은 뿔이 종교와 정치의 연합세력을 나타내는 것과 비견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진흙과 쇠로 섞인 것의 강조점은 분열과 불일치이다. 각기 성격이 다른 두 세력의 공존을 암시한다. 철처럼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제국이 진흙이 철 속에 유입된 것처럼 가장 쇠약하고 분열된 나라로 바뀔 것이다. 사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제국 로마가 가장 연약한 나라들로 분열되었다. 3-4세기 게르만 민족이 로마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들이 함께 로마로 들어와서 로마의 용병이 되었고 나중에는 로마 군대의 장군과 재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 안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로마제국은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재위)가 죽기 직전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계승시킴으로 그의 사망과 함께 동서로 양분되었다. 그 중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민족 헤룰리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퇴위 당함으로 멸망되어 제국시대는 끝났으며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우라야 스미스(U. Smith)가 주장하는 넷째 제국이 갈라진 열나라는 동고트(Ostrogoths, AD 453, 이탈리아), 서고트(Visigoths, AD 408, 스페인), 프랑크(Franks, AD 351, 프랑스), 반달(Vandals, AD 406, 아프리카), 수에비(Suevi, AD 406, 포르트갈), 알레마니(Alemanni, AD 351, 독일), 앵글로-색슨(Anglo-Saxons, AD 409, 영국), 헤룰리(Heruli, AD 476, 이탈리아), 롬바르드(Lombards, AD 453, 이탈리아), 그리고 부르군디(Burgundians, AD 406, 스위스)이다. 티엘(Thiele), 왜그너, 존스 등은 알라만니 대신에 훈족(Huns)을 목록에 넣었지만 훈족은 일정한 나라를 남기지 못하고 453년 아틸라(Attila)가 죽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열 나라들이 오늘날의 서구세계를 이루는 근간(根幹)이 되었지만 이 나라들 외에도 여러 민족들이 있었다(Quadi, Rugier, Jules, Frisians, Gepidae, Markomanni, Helvetii, Belgi, Thuringians). 따라서 열이라는 숫자는 대략적인 숫자로 보아야 한다. 열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어림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욥 19:3 전 7:19 슥 8:23 마 25:1 눅 15:8). 발가락은 재림 때까지 존재하게 될 열국(列國) 시대의 다수의 나라들을 상징한다.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하여 서쪽에서 옮겨간 동로마는 1453년에 이슬람의 모하멧에 의해서 완전하게 정복되기까지 존속했다. 동로마가 비록 작기는 했지만 기독교 제국이었다. 1453년 후로부터는 이슬람 제국이 역사에 명성을 떨쳤다.
벨사살 왕
단 5:1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다니엘이 5장에서 신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벨사살이라 하였다. 그것을 두고 두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첫째, 일반 고대역사기에는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이 벨사살이 아닌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6-539)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 비평학자들이 벨사살을 역사에 없던 가공적 인물로 몰아붙여 다니엘서의 신빙성을 부인하는 증거로 삼았다. 둘째, 바벨론 본성이 함락될 때에 나보니두스 왕은 왜 거기 없었을까? 이다.
로울레이(H. H. Rowley)는 벨사살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다는 기록이 성경 외에 전혀 없음을 들어 다니엘서는 역사적 대 과오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24년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가 대영박물관에 수집돼 있던 서판 38, 299 소위 “나보니두스에 관한 한 절의 이야기”(Verse account of Nabonidus)를 연구하여 벨사살의 신원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 그것을 출판함으로 의구심을 떨쳐버렸다. 벨사살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6-539)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아 동위왕(同位王)으로 재위했음이 밝혔진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그는 재위 3년이 막 시작될 때에 군대(the army)를 그의 장자에게 맡겼다. 그는 그 나라 병력(the troops)을 그의 수하에 두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도록 그에게 왕권(Kingship)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이 머나먼 여행을 출발했다. 아카드(Akkad)의 군사가 그와 함께 행진하여 서쪽 테마(Tema)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는 전쟁에서 테마 왕을 죽였다... 그는 테마를 차지하고 바벨론 궁궐 같은 한 궁궐을 건축했다...]
이 본문에서 장자에게 왕권을 맡기고 자신은 먼 여행을 떠났다는 대목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나보니두스 왕이 정확하게 BC 556년 5월 25일 등극하였다. 벨사살은 부왕인 나보니두스 3년에 이미 군권을 위임받았으며 바벨론 군대의 통수권을 받았다. 그의 재위 6년(BC 550/549년) 겨울에 서부 아라비아에 있는 테마(Tema)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그의 장자 벨사살에게 왕권을 위임하여 동위 왕이 되게 한 것이다. 그가 위임한 권력에는 왕권, 군권, 신궁의 유지권, 맹세권, 그리고 조공권도 포함되어있었다. 이 때(BC 550년)에 고레스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를 무너뜨렸다. 나보니두스는 테마를 정복한 후 거기를 재건하여 바벨론 궁궐처럼 만들어 신병(身病) 요양차 10여 년간 틈틈이 거기 머물렀으며 역사와 종교와 고고학에 관심을 가지고 외유만 즐기고 바벨론의 공식적인 모든 국무는 벨사살에게 맡겨 수행케 하였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벨사살을 왕이라고 부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성경에 공동으로 섭정 통치했던 왕들이 있었다. 아사 왕과 여호사밧 왕(왕상 22:41, 42 왕하 8:16), 여호사밧과 요람의 경우이다(왕하 1:17; 3:1). 셰이(W. H. Shea)는 공동통치 방법이 팔레스타인과 바벨로니아에 있었던 예들을 제시했다. BC 699년 아시리아 왕 산혜립(Sennacherib)은 그의 아들 아수르나딘 수미(Ashur-nadin-shumi)를 보좌에 앉혔다. BC 668년 에사르하돈(Essarhaddon) 왕은 그의 아들 사마쉬슈무킨(Shamash-shum-ukin)을 바벨론의 왕으로 선언했었다. 신바빌로니아 왕 네리글리사르(Neriglissar)는 그의 아버지 벨슘미쉬쿤(Belshumishkun)을 바벨론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바벨론 본성이 함락될 때에 나보니두스 왕은 왜 거기 없었을까? “나보니두스의 연대기”(The Nabonidus Chronicle)에 의하면 나보니두스 왕이 그의 재위 6년 혹은 7년(BC 550/549), 9년(BC 547), 10년(BC 546), 그리고 11년(BC 545)에 테마에 있었고 바벨론에 있지 않았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3년(BC 553/552)에 ... 병들었다가 회복했다... 제6년(BC 550/549)에 아스티아게스 왕이 군대를 소집하여 안샨왕 고레스를 대항하여 출정했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가 혁명을 일으켜 그를 잡아 족쇄를 채워 고레스에게 넘겼다.... 제7년(BC 549/548)에 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황태자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아카드(Akkad, 바벨론을 뜻함)에 있었다. 왕은 니산누(Nisannu, 유대력 1월 Nisan) 달의 신년 의식에 바벨론에 오지 않았다... 나부(Nabu)신은 바벨론에 오지 않았다. 벨(Bel)신은 에사길라(Esagila)에서 나오지 않았다. 신년 축제는 생략되었다... 제9년(BC 547/546)에 나보니두스 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황태자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아카드에 있었다. 니산누 달의 의식에 왕은 바벨론에 오지 않았다. 나부(Nabu)신은 바벨론에 오지 않았다. 벨(Bel)신은 에사길라(Esagila)에서 나오지 않았다. 신년 축제는 생략되었다... 니산누 달 5일에 왕의 어머니가 시파르(Sippar) 위쪽 유프라테스의 강변에 있는 진영에서 죽었다... 제10년(BC 546/545)에 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황태자,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아카드에 있었다... 제11년(BC 545/544)에 왕은 테마에 머물렀다... 제17년(539/538)에... 고레스가 오피스(Opis)에 아카드 군대를 공격했던 타스리투(Tasritu, 유대력 7월 Tishri) 달에... 15일(10월 12일), 시파르(Sippar)가 전쟁없이 점령당했다. 나보니두스는 도망갔다. 16일(10월 13일), 구티움(Gutium)의 총독 고브리아스(Gobryas)와 고레스 군대는 전쟁 없이 바벨론에 들어갔다. 그 후에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에 돌아왔을 때 붙잡혔다... 아라삼나(Arahsamna, 유대력 8월 Marheshvan) 달 셋째 날(10월 29일), 고레스는 바벨론에 들어갔다... 그의 총독 고브리아스는 바벨론에서 부총독(sub-governors)으로 취임하였다. 키슬리무(Kislimu, 유대력 9월 Kislev) 달로부터 아따루(Addaru, 유대력 12월 Adar) 달까지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에 가져왔던 아카드의 신들이 저들 거룩한 도시로 보내졌다. 아라삼나(Arahsamna) 달 11일 (11월 6일) 밤에 고브리아스는 죽었다. 아따루 달 ( )일, 왕후가 죽었다. 아따루 달 27일부터 니산누(Nisannu) 3일까지(3월 20-26) 공식적인 애곡이 아카드에서 행해졌다... ].
이 연대기에 의하면 나보니두스는 그의 재위 17년(BC 539)에 바벨론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본성이 함락되기 몇 주일 전에 빠져나왔는데, 바벨론을 향해 침공하여 오는 고레스 군대를 맞아 싸우기 위해 본성을 아들 벨사살에게 맡기고 자기는 군대를 이끌고 나간 것이다. 두 왕은 부자간의 역할을 분담하여 부왕(父王)은 적들이 맹습해오는 전장으로 나가고 자왕(子王)은 수도를 방어하는 일을 맡았다. 나보니두스는 고레스 군대가 티그리스 강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티그리스강변의 요충지인 바벨론 북방 185km에 위치해 있던 오피스(Opis)에 나가 적을 맞아 싸웠으나 그만 패하고 말았다. 나보니두스는 다급하게 소수의 군대만 이끌고 10월 10일 남쪽으로 퇴각하여 바벨론 북방 80km에 위치한 시파르(Sippar)를 포기하고 남쪽의 보르시파(Borsippa) 성에 들어가 은신하며 거기서 진을 쳤다. 고레스의 페르시아 군사는 계속 진격하여 BC 539년 10월 12일 유프라테스 강변의 요충도시인 시파르(Sippar)를 아무 저항 없이 점령하여버렸다. 그 때까지 벨사살은 여전히 보르시파 성에서 남쪽으로 35마일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던 바벨론 본성에서 꼼짝하지 않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이 함락되던 날 밤 본성에는 나보니두스 왕이 없었던 이유이다. 벨사살은 부왕인 나보니두스 6년에 왕권을 위임받아 섭정왕으로서 바벨론 군대의 통수권을 가지고 BC 550/549년부터 539년까지 통치한 셈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벨사살을 바벨론 함락당시에 마지막 왕으로 칭한 것은 아무런 모순이 없다.
다리오 왕
단 6:1-3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2]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의 하나이라 이는 고관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1절과 5:31은 내용과 구조상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5:31이 6:1로 되어 있다. 6장의 배경은 다리오 왕과 고레스 왕이다. 그들이 정복한 바벨론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면서 다니엘을 발탁하여 행정부의 수반(首班)으로 등용시켰다. 그와 함께 두 명의 총리가 더 있었으며 총리들 밑에 120명의 방백을 두어 광범위한 영토를 통치하게 하였다. 다니엘을 전 영토의 조정석에 앉힌 것은 왕이 그의 탁월한 행정 능력과 경륜을 인정하여 적임자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다리오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추론이 있다. 다니엘서의 신빙성과 정확성을 의심하는 고등 비평가들은 다리오를 BC 2세기경 익명의 저자가 다니엘서를 기록할 때 조작해 낸 가공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속적 자료에서 다리오라는 인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BC 6세기경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영감을 주어 기록케 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니엘이 다니엘서에서 밝혀놓은 다리오 왕의 신분과 직임은 다음과 같다. 그는 메대 사람이며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고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9:1). 등극하여 새정부를 구성했을 때 62세였다(5:30-31). 또한 그는 통치를 위해 나라 전체에 방백 120명을 임명했으며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다(6:1-2). 성경에 오직 그의 통치 원년만 기록되었지만(9:1; 11:1), 그가 죽자 그와 동시에 통치를 하던 고레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홀로 통치했다(6:28). 헬라 저술가들의 저서와 그리고 설형문자로 된 자료들에서 그의 신분에 대한 암시를 단편적으로 찾을 수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아래와 같이 썼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와 메디아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두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헬라인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언급에 따라 다리오가 고레스 당시의 역사적 인물들 중의 다른 이름을 가진 자였음을 밝히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다리오의 신분과 직분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갈라진다. 첫째, 메대 족이었던(11:1) 다리오는 고레스의 외조부요 느부갓네살 왕의 매부였던 메디아국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 이다. 둘째, 다리오는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이다. 셋째, 다리오는 바벨론의 총독이었던 구바루(Gubaru)였다. 넷째, 다리오는 고레스 휘하의 고브리아스(Gobryas/Ugbaru) 장군이다. 고브리아스는 구바루(Gubaru)의 헬라식 표기이다. 다섯째, 메대 사람 다리오는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이자 고레스의 외숙부인 키악사레스 2세(Cyaxares II)이다. 고레스가 외조부 아스티아게스 왕을 몰아낸 후 그의 외숙부인 키악사레스 2세를 메대의 상징적인 왕 노릇을 하게 했다. 바벨론을 점령했을 때 그를 거기의 봉신왕이 되게 했다. 따라서 고레스의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가 아하수에로라고 여긴다. 여섯째, 다리오는 바로 고레스를 가리킨다. 와이즈만(D. J. Wiseman), 불만(J. M. Bulman) 등 다수의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였다.
위와 같은 여섯 개의 주장 중에 하젤은 첫째 견해를 반대하여, 비록 아스티아게스가 메대사람 다리오였다는 가설이 제롬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견고한 증거가 없으며 그는 결코 바벨론에 온 적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아하수에로가 아니었음을 지적하였다. 셰이는 다리오가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였다는 둘째 견해에 대해 고레스가 일년 동안 그의 아들을 바벨론의 봉신왕으로 세웠고 고레스는 여전히 페르시아제국의 왕이었지만 그러나 고레스가 아하수에로가 아니었음과 나이가 62세가 아니었으므로 맞지 않는 견해라 하였다. 또한 하젤은 세 번째 견해인 다리오가 바벨론의 총독이었던 구바루(Gubaru) 혹은 욱바루(Ugbaru)였다는 견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도 역시 바벨론의 왕이었다는 증거가 아무 곳에도 없으며, 또한 그가 메대 사람이란 증거도 없고 그의 아버지가 아하수에로였다는 증거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하젤은 바벨론의 총독 구바루는 단지 나보니두스를 배반하여 고레스에게로 투항한 자그로스(the Zagros, 이란의 남서쪽에 있는 산지)의 산악민족인 구티움(Gutium)의 총독 구바루(Gubaru)로 간주한다. 맥스웰은 네 번째 주장을 지지하여 다리오는 고레스 휘하의 고브리아스(Gobryas/Ugbaru) 장군이다고 하였다. 그는 다리오가 구티움(Gutium) 사람 고브리아스 장군과 동일인이며 메디아-페르시아 제국 내에 한 분봉왕(local king)으로서 BC 539년 가을부터 538년 가을까지 점령지 바벨론을 통치했다고 하였다. 그것은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의하면 바벨론 성을 공격한 장군은 구바루(Gubaru/Gobryas)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며 그가 바벨론 총독으로 임명됐는데 6:1의 다리오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구바루는 구티움의 총독이었고 구티움은 메디아의 한 도였으므로 메대 사람 다리오라고 언급하기에 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젤(Gerhard F. Hasel)은 네 번째 주장에 대해서 고레스 군대의 장군 구바루 혹은 고브리아스는 바벨론의 총독으로 임명받은 구티움의 구바루(Gubaru) 혹은 욱바루(Ugbaru)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기 때문에 혼동하지 말아야한다고 했으며, 구바루 장군이 바벨론의 왕이었다는 증거는 아무 곳에도 없고, 또한 그가 메대 사람이란 증거도 없으며, 그의 아버지가 아하수에로였다는 증거도 없음을 지적하였다. 나보니두스의 연대기를 보면 바벨론 정복 때 고브리아스라는 동명이인이 있었다는 하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구티움(Gutium)의 총독 고브리아스 혹은 욱바루는 고레스 군대와 함께 바벨론 성에 들어갔으나(BC 539년 10월 13일) 한 달이 채 못 되어 죽었다(11월 6일). 고레스는 바벨론 성에 들어가서(BC 539년 10얼 29일) 구티움의 총독과 동명이인이었던 그의 총독 고브리아스(Gobryas)를 부총독(sub-governor)으로 취임시켰다(참조: 5:1 주석). 그는 거의 14년 동안이나 총독 노릇하였다. 셰이는 처음에 맥스웰의 주장과 노선을 같이 했으나 대영 박물관의 쐐기문자 본문 연구에 의하여 당시 고레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의 섭정 연대 해석의 차질과 구바루의 사망 날짜도 잘못 이해하였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견해를 취소하여 다니엘서의 “메대 사람 다리오”를 다름 아닌 고레스 자신이었다고 여섯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셰이는 설형문자 점토판을 연구한 결과 고레스 대왕은 BC 539년 바벨론 도성이 함락된 후 9개월 동안 “바벨론 왕”이란 명칭을 갖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바벨론의 왕”이란 명칭은 고레스 휘하에 있었던 한 봉신 왕의 직함이었다. 성경은 다리오를 왕이라 하였다(6, 9, 25절). 고레스가 그 9개월 동안 가졌던 명칭은 “땅들의 왕”(king of Lands)이었다. 그의 재위 일 년 끝에야 비로소 거기에 덧붙여 “바벨론 왕, 땅들의 왕”이란 직함을 사용했으며 그것이 그의 나머지 통치기간 동안 표준적인 명칭이 되었다. 고레스 통치 동안 쓰인 하란(Harran)으로부터 나온 나보니두스 점토판 중 하나에는 나보니두스 재위 10년(BC 546) 메대의 왕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메대의 왕”이란 명칭이 고레스가 BC 550년에 메대를 정복한 후에 존재했음을 가리킨다. 여섯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다리오”라는 이름은 고레스의 메디아 보좌명으로 여기며 BC 539년은 고레스의 나이 62세쯤 되었을 거라 간주한다.
재림교회 성경주석은 다섯 번째 주장을 지지하여 다리오가 키악사레스 2세라고 하였다. 이 주장은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가장 널리 받아들이는 제안이다. 그리고 다리오라는 명칭은 개인적 이름이 아니고 여러 왕들에 의해 채택된 통칭(通稱)인 보통 명사로 간주한다. 즉 정복자(Subduer)라는 뜻을 가진 보좌명(寶座名, throne name)으로 본 것이다. 고대 왕들이 흔히 보좌에 오르기 전에 개인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즉위한 후에 공식적인 이름을 갖는 관례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는 풀루(Pulu)라는 보좌명을 받았고(왕하 15:19, 29), 유다의 아사랴 왕이 웃시야라는 보좌명을 받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왕하 15:1 대하 26:1). 여디디아도 솔로몬의 개인적 이름이고(삼하 12:25) 솔로몬은 보좌명일 것이다. 하젤은 다리오가 고레스였다는 여섯 번째 견해도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다리오 왕과 고레스 왕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1:21; 6:28; 9:1; 10:1; 11:1). 따라서 다리오의 신원에 대한 위에 언급한 여섯 가지 주장 중에 어떤 주장이 맞는 것인지 시간이 좀 더 흘러봐야 할 것 같다. 고고학이 5장의 벨사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준 것 같이 다리오와 고레스의 치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더 많은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다리오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우세한 견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 왕의 딸 만다네(Mandane) 사이에 태어났다. 고레스는 안샨(Anshan 페르시아) 왕이 된 후 종주국인 메디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외조부 아스티아게스 왕에게 도전하여 BC 550년 수도 에크바타나(Ecbatana)를 점령하였다. 아스티아게스 왕을 사로잡아 폐위시키고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장관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그의 아들 키악사레스 2세를 명목상으로 메디아의 상징적 왕으로 세웠다. 키악사레스 2세는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와 남매관계였으므로 고레스의 외숙부였다. 이것은 메디아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고레스가 실권자로서 메디아의 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고레스를 실질적인 통치자로 간주했으며 키악사레스 2세는 단지 형식상의 꼭두각시 왕이었을 뿐이었다.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면 결국 고레스는 외숙부의 딸 카산다네(Kasadane)와 혼인하였으며 장인 키악사레스 2세는 결혼선물로 메디아 나라를 사위 고레스에게 주었다고 했다. 이리하여 메디아-페르시아 왕이 된 고레스는 연합군을 이끌고 바벨론 도성을 함락시켰다. 고레스는 점령한 바벨론 땅에 페르시아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그의 장인 다리오를 내세워 봉신왕(vassal king)으로 삼아 바벨론을 다스리게 했다. 키악사레스 2세는 사위 고레스의 초청에 응하여 명예만의 왕직을 수행하기 위해 바벨론에 와서 등극하였던 것이다. 5:30-31에서는 다리오가 바벨론이 멸망하고 벨사살이 죽음으로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고 했다. 다리오는 점령한 갈대아 나라(바벨론)의 왕이었지만 실질적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왕은 어디까지나 고레스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10:1에서 “바사 왕 고레스 제 삼년”을 바벨론 멸망 때(BC 539년)부터 계산하여 BC 536/535년으로 잡는 것이다. 다리오는 봉신왕이 된지 2년 안에 죽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다리오 통치 원년만 나오는 이유이다. 다니엘은 그가 받은 이상을 고레스의 통치연대보다 다리오의 통치연대로 나타냈다(9:1; 11:1). 그러나 다리오 통치 1년 이후의 사건들은 고레스의 통치연대로 나타냈다(1:21; 10:1). 다니엘 9:1에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9:1)라고 하여 다리오가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레스의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가 바로 아하수에로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여긴다.
열 뿔
단 7:7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
바다에서 네 번째로 올라와 역사 속으로 행진하는 넷째 짐승은 2장의 넷째 왕국에 비견되는데 그 영향력을 자기 시대 너머까지 행사할 것으로 예언되었다. 네 번째 짐승의 정체에 대해 학자들 간에는 의견이 갈린다. 재림교회는 그것이 로마제국이라고 단정한다. 다른 학자들은 이 짐승이 셀레오시드 왕조가 세운 시리아 왕국이라고 주장한다. 시리아의 왕들과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야만적으로 다룬 것을 “먹고 부서뜨리는 철 이빨” 을 가진 것으로 적용하고, 열 왕은 시리아의 열 왕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며, “작은 뿔”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atiochus IV Epiphanes)로 적용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후자의 견해는 예언에 맞지 않는다.
로마제국(Roma 帝國, 라틴어: Imperium Romanum)이란 용어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제정을 시작한 BC 27년부터 로마의 몰락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제국은 395년 동서 로마로 분열돼 476년 서로마가 멸망되고 1453년 동로마가 멸망되었다.
다니엘이 넷째 짐승을 가리켜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라고 묘사한 것은 직전에 본 사자, 곰 같은 짐승, 그리고 표범과 같은 짐승과는 달랐다는 뜻이다. 원어에는 짐승 앞에 정관사가 있으므로 “전의 그 모든 짐승”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아람어도 주로 질을 강조할 때는 관사를 생략하고 정체성을 강조할 때는 정관사를 붙인다. 무엇이 다른가? 첫째, 실제로 로마제국은 막강한 군사조직을 가지고 진군하여 전무후무하게 승승장구하여 강대국을 이루었다. 둘째, 결국 예수님께서도 무섭고 놀라운 짐승으로 상징된 로마제국에 의해 돌아가셨고 야고보, 베드로, 바울 등을 비롯하여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아 순교 당했다. 셋째, 다른 짐승들(나라들)은 왕을 가지고 있는 군주제이다. 반면에 로마는 주전 2세기 경 나라들을 정복하게 될 때 공화정이었다. 주전 500년경부터 공화정으로 이어져왔다. 넷째, 열 뿔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른 짐승과 달랐다. 로마가 이전의 제국들처럼 다른 나라에 정복되지 않았고 분열되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열 뿔은 로마에서 일어날 열 왕이다. 천사는 24절에서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라고 해석하였다. 왕은 나라를 의미함으로(2:38-39) 왕(king)과 나라(kingdom)는 서로 통용된다. 천사는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17절)라고 말한 후에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23절)라고 말했다. 열 뿔이 짐승에게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네 번째 짐승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다니엘 2장의 철과 진흙에 합쳐진 것에 해당한다. 그 열 나라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그 영역 안에서 로마제국을 뒤이어 일어날 여러 나라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존속할 나라들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부터 서로마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이탈리아에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이용하여 AD 376년 서고트족(Visigoths)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제국 영토로 진입해 왔다. 그 뒤를 이어 20여개의 게르만족이 침입하였다. 게르만족 헤룰리의 용병(傭兵)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76-493)가 AD 476년 서로마의 마지막 소년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lus, 475~476재위)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이탈리아 왕이라 자칭하였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제논도 그를 인정하여 총독의 칭호를 내렸다. 오도아케르도 동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결국 로마제국은 게르만족들에 의해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어 열 뿔 곧 유럽의 여러 나라를 이루어 점차적으로 현대 유럽의 국가들로 발전하였다. 우라야 스미스(U. Smith)가 주장하는 열나라는 동고트(Ostrogoths), 서고트(Vizigoths), 프랑크(Franks), 반달(Vandals), 수에비(Suevi), 알라만니(Alamani), 앵글로-색슨(Anglo-Saxous), 헤룰리(Heruli), 롬바르드(Lombards), 부르군디(Burundians) 이다. 티엘(Thiele), 왜그너, 존스 등은 알라만니 대신에 훈족(Huns)을 목록에 넣었지만 훈족은 정착된 나라를 남기지 못하였다. 이 나라들 외에 여러 민족들이 있었다(Quadi, Rugier, Jules, Frisians, Gepidae, Markomanni, Helvetii, Belgi, Thuringians). 사실 열 이라는 숫자는 다수의 나라를 상징하는 대략적인 숫자로 보아야 옳다. 열이라는 숫자가 성경에 어림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욥 19:3 전 7:19 슥 8:23 마 25:1 눅 15:8). 야곱은 여러 번이라는 의미로 열 번이라고 하여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창 31:7)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들이 거역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상당히 여러 번이라는 의미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민 14:22)이라 하셨다. 엘가나도 한나에게 말하기를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 1:8)라고 위로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예들은 열이라는 숫자가 정확하게 열을 의미한다기보다 상당히 여러 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열 뿔은 정확하게 열 개의 나라가 아니라 어림수적 다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저 로마제국이 많은 나라로 갈라진다는 뜻이다. 자크 B. 두캉은 선지자가 열이라는 숫자를 사용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성경의 상징에서 열이라는 말은 “최소한도라는 개념”(the idea of minimum)을 전달하는 수이다. 혹은 더 이상 논하기에 적절치 않은 한계를 표시하는 수이다. 둘째, 상징적인 언급을 넘어서는 어떤 역사적 실체를 언급하고 있다.
7장의 작은 뿔
단 7: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에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첫 번째 뿔 중의 셋이 그 앞에서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들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더라”
8절에서 열나라 다음으로(24절) 다른 작은 뿔 세력이 열한 번째 뿔로 나타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 24-25절에 하늘의 존재에 의해 주어졌다. 이 작은 뿔은 지금까지의 짐승의 세력과는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며 크게 활동할 것을 7장에서 가장 긴 본문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작은 뿔 세력이 사람의 특성인 눈과 입을 가진 것은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다(4:16; 7:4). 자크 B. 두캉은 2장의 진흙은 정치와 타협하려는 종교적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진흙과 철의 섞임은 7장의 작은 뿔이 종교와 정치의 연합세력을 나타내는 것과 비견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다니엘 2장에서 인간적인 요소인 진흙과 7장에서 인간적 특성을 지닌 작은 뿔은 종교적이면서 정치적인 모호한 같은 세력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7장의 안식일 변경과 2장에서 종교와 정치와의 타협을 상호 연관시켰다. 그러면 작은 뿔의 정체는 무엇인가? 7장 서론에서 밝혔듯이 로마 교황권이다.
다니엘이 넷째 짐승의 열 뿔을 주시하여 보았다. 로마제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된 후를 본 것이다. 다른 작은 뿔이란 열 뿔 외에 열한 번째 뿔로 대표되는 작은 뿔을 가리킨다. 또한 열 뿔은 정치적 세력이지만 작은 뿔은 종교적인 세력이기 때문에 다른 뿔이다. 작은 뿔이 교황권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 대해 큰 말을 하고 하나님의 성도를 핍박하기 때문이다(8, 25절). 8장에 나오는 작은 뿔도 뚜렷하게 종교적인 동일한 세력이다(8:9-10). 로마제국을 계승한 로마 교황의 종교적 국면이다. 왜 그 뿔이 작다고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작은 뿔이 장래 큰 세력이 될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될 때 작다는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처음 형성시기에는 단지 작았으나 그것이 신속하게 자라서 나중에 “그 모양이 그의 동류보다 더 커 보이더라”(20절)고 하였다. 이것은 로마제국이 로마 교황으로 발전하면서 성취됐다. 8장에서도 진전(進展) 상황이 표현되었다. 숫양(메디아-페르시아)은 스스로 강하여졌다(8:4). 그 후에 숫염소(헬라)도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졌다(8:8). 작은 뿔이 나서 심히 커지더니,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졌다(8:10). 이러한 최상급으로의 진전 상황은 작은 뿔을 안티오코스 왕과 같은 일개 통치자에게는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는 숫염소 두 눈 사이에 있는 현저한 뿔로 상징된 알렉산드로스(8:5, 21)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나더니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첫째, 작은 뿔 곧 교황권이 일어나는 시점(始點)이 넷째 나라 즉 로마제국이 여러 나라로 갈라진 후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둘째, 작은 뿔 곧 교황권 세력이 일어나는 장소는 로마제국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분열된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은 뿔의 정체는 넷째 짐승의 정체에 좌우된다. 넷째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따라서 작은 뿔은 로마제국 자체는 아니지만 로마제국으로부터 출현하는 로마적인 세력인 것이 분명하다. 이해남은 “서로마의 황제가 없어진 후에 로마 사람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조직을 유일한 국가 조직으로 알고 로마 주교를 전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섬기게 되었으며 또 사실상 대 교황 레오 1세는 훈족 앗틸라의 로마 침입을 외교로 막아내고(452년), 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롬바르드 족의 침입을 막으면서, 실제로 로마 국왕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틸라(Attila) 휘하의 훈족(Huns)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 성 밖에 이르렀을 때 교황 레오 1세(Leo I, 440-461재위)가 성문에 나가 담판을 했다. 아틸라는 레오 1세의 영적인 힘에 압도당해 로마 약탈의 계획을 포기하고 퇴각하여버렸다. 로마를 수호한 사람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 로마 교황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레오 1세는 대표적인 교황 수위권(首位權) 옹호자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AD 590-604재위)는 로마 교회의 주교를 전 가톨릭의 교황으로 호칭을 시작케 하였으며, 교황은 왕들과 황제들을 마음대로 폐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재판장이라고 주장함으로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 “교황직의 아버지”라 일컬음을 받았다. 이리하여 “정치적 로마의 폐허로부터 거대한 형태의 로마 교회인 도덕적 대제국이 일어났다”. 게르만족들에 의해 서로마 황제가 사라진 후에 로마 교회는 세계 제국인 로마의 자리로 비밀리에 밀치고 들어왔는데, 이는 로마 교황이 로마제국의 실제적인 연속이 된 것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가장 유명한 교회사학자요 루터교 신학자였던 아돌프 하르낙(Adolf Harnack)은 로마제국이 망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변형된 것에 불과하며 분명히 로마 교회는 로마제국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로마 교황은 로마제국이 다른 옷을 입고 둔갑한 것이 틀림없다. 과거주의자들은 넷째 짐승의 정체를 잘못파악하기 때문에 작은 뿔도 잘못 적용한다. 8장에서는 작은 뿔이 헬라의 분열 이후에 나타난 제국 로마와 로마 교황 둘 다를 대표한다(8:9, 23절). 과거주의 자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라제국이 분열된 후 안티오코스가 출현했으므로 넷째 나라를 헬라와 동일시 여긴다. 그리고 작은 뿔을 안티오코스로 간주한다. 그들은 넷째 나라의 신원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작은 뿔의 신원도 잘못 적용한 것이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셀레오시드 왕조(BC 301-64)의 27명의 왕 가운데 일곱 번째 왕이었다.
조사심판
단 7:9-10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여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2장의 내용에 없는 것이 7장에 덧붙여져 나오는데 그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재림 전 확인 심판의 극적인 장면이다. 다니엘은 9-14절에서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 혹은 재림 전 심판(Preadvent Judgment)의 세 국면을 부각시켰다. 하늘의 심판(9-10절), 심판의 결과 즉 네 번째 짐승의 종말(11-12절), 그리고 왕국을 받기 위해서 오시는 인자에 관한 장면이다(13-14절). 하늘 법정의 개정 장면에 나타난 존재들 즉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인자”, 그리고 천사들은 모두 다 실제적 존재들이다.
재림 전 확인 심판이란 무엇인가? 세상 법정에서도 선고를 집행하기 위해 판결을 내리기 전 조사가 선행(先行)되듯이(신 17: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선악 간에 행한 것을 갚아주시기 위해 사전 심사를 하시는 게 재림 전 심판이다(계 22:12 고후 5:10). 기록들이 펼쳐져 면밀히 조사되어 용납되는 자도 있고 거절되는 자도 있다. 이때 개인적으로 출두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변호사로 각 사람의 경우를 제기하신다(요일 2:1). 그리고 그분이 “성도를 위하여 신원(伸寃)하”(22절)신다. 반면에 1,000년기 동안에 있을 심판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졌거나 아예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다.
재림 전 확인심판의 시기는 언제인가? 7장에서 재림 전 확인심판의 정확한 시기를 본문에 명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8-10, 21-22, 25-26) 네 왕국들의 통치를 지나 작은 뿔이 등장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성도를 핍박한 후(1798년 후)에 얼마쯤 지나서 비로소 심판이 시작될 것인데 천사가 그것을 26-27절에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조사심판의 시작은 1798년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난다. 22절과 25절은 그 심판이 재림보다 앞서 있을 것을 확증해준다. 22절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성도들을 위해 신원하실 것을 말했다. 이 심판의 결과로서 성도는 왕국을 소유할 것이다. 8장에서 조사심판이 2,300주야 끝인 1844년에 있을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재림교회가 2,300주야가 끝나는 184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재림 전 확인심판은 기독교 안에서 자기들만이 가진 고유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 독특한 진리가 재림교회의 특별한 정체성과 그 사명을 더 강하게 해주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재림 전 확인심판을 성경으로 견고하게 뒷받침하며 그 조사심판을 복음의 맥락에서 보고 두려움과 정죄가 아니라 믿음과 확신과 소망을 일깨우는 기별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온 우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는 공개적이고 공의로운 재림 전 확인심판은 악을 반드시 정죄하고 선과 의를 옹호하는 공정한 심판으로 보기 때문이다.
재림 전 확인 심판에서 누가 심판을 받는가? 첫째, 하나님의 백성, 성도들이 심판을 받는다. 22절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고 하였다.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여 용서를 받은 자들만이 속죄일에 정결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재림교인 밖에 없다. 대부분의 비재림교인들이 대부분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어 사람이 죽을 때에 영혼이 즉시 천당이나 지옥에 가든지 아니면 그 중간단계를 주장하는 천주교 입장에 따라 연옥에 가든지 하기 때문에 사후에는 아무런 심판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긴다. 죽는 순간에 이미 하늘에 가 있기 때문에 재림 전 심판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다니엘 7장의 문맥을 보면 재림 전 심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9-12절). 재림 전 심판은 누가 하늘에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심판이다. 엘렌 G. 화잇은 조사심판에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기록책에 죄를 남겨두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그들의 선행의 기록도 하나님의 기념책에서 지워질 것이다”고 하였다. 재림 전 심판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생명책에 있는 명단의 계속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명단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첫째 부활에 나올 것이고 이름이 지워진 자들은 둘째 부활 때에 일어날 것이다. 둘째, 재림교회는 성도들의 심판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문맥적으로 볼 때에 작은 뿔이 심판을 받는다(11-12, 26절). 넷째 짐승과 그것의 열 뿔 곧 로마제국과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이며, 특별히 핍박과 참람을 일삼는 작은 뿔에 대한 심판이다. 셋째, 하나님이 심판을 받으신다. 바로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당화 되신다. 로마서 3:3, 4에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심판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물론 하나님은 심판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온 우주에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심판을 받으신다. 모든 악한 존재들에게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조사 심판은 우주에 있는 존재들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서는 아니다. 다니엘 7장의 심판은 다니엘 8장의 성소 정결과 동일한 것이다.
재림 전 확인심판을 통해 무엇이 확정되는가? 첫째, 작은 뿔, 짐승,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악인들의 파멸이 확정될 것이다(11, 26절). 둘째, 하나님의 영원한 왕권이 그리스도에게 넘겨질 것이 확정된다(13-14절). 그에게 부여될 왕권은 나라가 영원히 폐하지 아니 할 것임으로 영원토록 다스릴 실제적인 통치권이다. 셋째,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 확정될 것이다(22, 27절). 심판의 결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승리하여 세상의 통치권이 영원히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늘 성소 둘째 칸 봉사
단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13-14절은 그리스도께서 심판과 연관하여 임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동사들의 시제는 세 가지 국면을 각각 표현했다. 첫째, 분사형 파루시아(실제적 임함) 이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coming)” 이다. 둘째, 임하기 이전의 시간부터 언급하는 완료형 동사이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had come) 그 앞에 인도되매(had brought)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had been given)” 이다. 셋째, 그분이 임한 이후의 미래를 가리키는 미완료형 동사이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will serve)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shall not pass away)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shall not be destroyed).”
인자 같은 이는 아람어 크바르 에나쉬(kebar enas)인데 문자적으로 “사람의 한 아들과 같은”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인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27절과 연관시켜 성도를 신성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결합된 분이심으로 신자(神子)이자 인자(人子)이시다. 그래서 인자 같은 이 라는 표현을 썼다. 예수님께서는 인자라는 칭호를 자신과 인류와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40회 가량 사용하셨다(마 8:20 9:6; 10:23; 16:13, 27, 28; 17:9, 22; 24:27 요 1:51; 3:13-14). 신약에서 이 용어는 다니엘 7:13에서 인유된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나 13절에서 인자(son of man)는 복음서의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과 달리 관사가 없는 상태로 사용되었다. 아람어는 질을 강조할 때 정관사 없이 사용하고 정체성을 강조할 때 정관사를 사용한다. 인자는 메시아적 칭호이다. 대제사장은 인자라는 칭호를 들었을 때 이것을 메시아적 칭호로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마 26:64-65). 그분이 아버지 앞으로 나갈 때 하늘 구름을 타고 왔다. 구름은 신적 존재들이 움직이는 수레이다(시 104:3). 성경에 구름은 신의 속성을 암시한다(시 97:2). 그러므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은 예수님은 인간이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정관사를 가진 것은 9절에 이미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3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재림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 성소 정결을 위해 하늘 성소 둘째 칸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가리킨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 법궤 앞에 나아가는 모습과 같다. 만일 13-14절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해석하면 천사가 26-27절에 말한 13-14절 설명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밀러주의 자들은 13-14절을 재림으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여 대실망을 겪었다. 그들은 1844년 10월 22일 이후에야 비로소 여기에 인자가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예언이 재림이 아니고 하늘에서 발생된 것임을 깨달았다.
재림교회는 13절에서 그리스도가 아버지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을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300주야 끝인 1844년에 성소에서 나와 지성소로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여 왔다. 거기서 중재자로서 조사심판을 마치실 때 그분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다니엘 8:14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성소를 정결하기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가시는 것과, 다니엘서 7:13에서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의 앞에 나아가시는 것과, 말라기에 의해 예언된 바와 같이 주께서 홀연히 그 전에 임하신 것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묘사인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바 신랑이 혼인자리에 임하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라고 하였다.
14절에서 그는 인자 같은 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란 구원얻을 자들을 말한다(계 5:9; 21:24).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라는 구절로 보아 인자는 분명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신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양도해주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늘 성소에서 재림 전 확인심판을 끝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나아가 왕국과 온 하늘의 왕권을 받으시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이 땅에서 이미 은혜왕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셨지만(마 28:18 계 5:12),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영광의 나라를 가리킨다. 이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넘어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이다. 새 예루살렘 성이 있는 그의 왕국을 받으시는 것은 어린 양의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27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7)고 하였다. 실제로 영광의 왕국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도 둘 모두인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예복을 벗으시고 왕권을 가리키는 옷을 입으시고 천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양도받으신 자신의 나라를 성도들과 공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성도들은 유업을 받아 그분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 영원토록 그분을 섬기게 된다. 누가복음 19:12-15에 그리스도께서 손수 나라를 받으려고 먼 나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귀인으로 묘사된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인류구원에 관한 일체의 권한은 영원하고 그 나라도 영원할 것이다. 그의 권세는 심판과 통치의 권세이다(요 5:27 17:2).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이 작은 뿔을 이기고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14, 27절).
성도들이 나라를 얻음
단 7: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NIV는 “옛적부터 계신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심판을 선고하셨고”라 되어 있다. 공동번역은 “그러나 태고적부터 계시는 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재판을 하시고 당신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셨다”로 번역하였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정관사는 9, 13절에 나타나신 분과 동일한 분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도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다는 말은 재림 전 확인심판이 성도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것을 시사한다.
재림 전 확인심판의 두 가지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성도들을 신원하여 옹호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악의 징벌을 확정하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바로 7, 8장의 조사심판 혹은 성소정결이 작은 뿔의 심판과 관련된 문맥에서 주어진 이유인 것이다.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멸시와 핍박을 당해 왔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에서 그들을 위해 신원하시고 그것을 바로잡아 무죄를 인정하시며 작은 뿔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언하여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생각에는 심판할 때에 죄인들에게 형벌을 의인들에게는 옹호를 한다는 것이 전형적인 생각이었다(신 25:1 왕상 8:32). 예수님께서 심판에 의인의 보상과 악인의 형벌이 포함됨을 말씀하셨다(마 25:31-46).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어져 작은 뿔은 멸망하고 하나님의 왕국은 수립되어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옹호 받는다는 구원의 신학적 개념을 데오디시(theodicy)라 한다. 이 개념이 조사심판의 배경을 이루며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온 우주 앞에 옹호해야하는 이유가 된다. 이와 같이 성소정결은 작은 뿔을 심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옹호 하는 걸 포함하는 심판이다(마 22:1-13). 지상 성소에서 성소정결을 하던 대속죄일은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레 16장). 온 우주 앞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품성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백성도 옹호했다. 8:14의 2,300주야 예언에 사용된 정결하게 될 것으로 번역된 단어에 옹호되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재림 전 확인심판에서 옹호 받게 될 것을 뜻한다.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18, 22, 27절은 다소간 차이점이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언급한다. 한 동안 작은 뿔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공격하여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이며 영원한 왕국의 백성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조사심판(8장의 성소정결)의 결과로 쇠하지 않을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그 이상의 절정이다.
작은 뿔이 저지를 악행들
단 7:25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재림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하는 25절은 작은 뿔이 저지를 악행을 예언한 것이다. 교황권이 그 예언을 역사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시켰기 때문에 작은 뿔의 정체가 바로 로마 교황권이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한다.
25절에서 그는 작은 뿔 교황권을 말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말은 아람어 밀린(millin, words)인데 복수형으로서 말들이다. 대적하며의 아람어 르차드(lesad, against)는 마주 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작은 뿔이 하나님을 말로 대적한다는 것은 8절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을 마주보며 참람한 말을 하여 신성모독의 죄를 범할 것을 가리킨다. 작은 뿔이 자신을 높이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세우려할 것이다(사 14:13-14). 바울이 말한 저 “불법의 사람”의 행동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3-4). 작은 뿔이 하나님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라고 한 것은 교황권이 성도들을 잔혹하게 박해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로마제국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으나 여기에 예언된 핍박은 로마시대가 끝난 직후에 일어난 교황권이 성도를 박해함으로 성취되었다. 특별히 중세시대에 교황권이 제도화한 종교재판소(Inquisition)를 통해 박해가 잔학하게 이루어졌다. 교황권 세력은 이단자를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무수한 성도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다.” 때와 법이라는 것은 히브리 관용어에 해당한다. 정해진 때에 대한 법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이사일의(二詞一意, hendiadys)의 중언법이다. 때와 법의 결합은 안식일 계명을 시사한다. 여기서 때(times)를 뜻하는 아람어는 즈만(zeman, time)의 복수형인 짐닌(zimnin, times)인데 단수는 특정한 시점을 가리키지만 복수는 반복되는 시점을 언급한다. 그 뜻은 정해진 때나 고정된 시간, 일정한 기간 또는 해(年)를 의미한다. 2:21에 나오는 기한을 묘사하는 단어와 같은 아람어이다. 법과 연결될 때 정해진 시간이 반복되는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안식일 계명이다. 십계명 중에 때와 관련된 법은 넷째 계명뿐이다. 여기서 법은 아람어 단수 명사 다트(dat, law)인데, 인간의 법이나(2:9, 13, 15; 6:8, 12, 15) 하나님의 법(스 7:12, 14, 21, 25, 26)에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 법은 하나님의 법 곧 십계명을 가리키고 특별히 시간에 관한 넷째 계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때와 법은 안식일 계명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고치고자 할 것이며 라는 것은 아람어 스바르(sebar, chang)인데 의도하다 노력하다 혹은 애쓰다는 뜻으로 의도적인 시도를 나타낸다. 때와 기한을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뿔이 망령되게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때와 법을 명시한 안식일 계명을 의도적으로 고치고자 시도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은 교황권에 의해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겨짐으로 성취되었으며 정치와의 타협에 기초하여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늘가는 길 표지판을 반대로 꽂아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신계훈은 때의 변경과 법의 변경을 나누어서, 작은 뿔이 “때를 변경한 것”은 구속의 경륜에서 설정된 정해진 기간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시는(2:21) 것을 로마교황이 임의대로 행하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도전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법을 변경코자”하는 것을 안식일 변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림교회 학자들은 이 구절이 교황권에 의해 안식일의 때를 변개한 것으로 적용한다. 이것은 에스겔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전을 등지고 동방 태양을 경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겔 8:16).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을 버리고 본래 태양의 날인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말하기를, 아니다 나의 신성한 권위로서 안식일을 폐하고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교회 전통은 성경보다 위에 있다고 선포하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전통에 기초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마지스테리움(magisterium) 즉 교도권(敎導權, teaching authority)을 받았으므로 십계명을 변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찍이 그리스도는 이 교도권을 사도들에게 주었는데, 교회 안에서 주교직을 계승하는 주교들과 교황은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준 이 교도권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전통, 성경, 교도권은 동등한 권위로 작용한다.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은 점진적이었다. 처음에 로마제국은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으며 기독교를 하나의 유대교 분파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재위)는 문화적 동화책의 일환으로 할례를 금지했고 예루살렘에 로마군 주둔지 아일리아를 건설했으며, 유대교 성전을 헐고 그 자리에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세우도록 명했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은 유대지도자 바르 코크바(Bar Cocheba)의 주도하에 유대 제2차 반란(AD 132-135)을 일으켰다. 하드리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한 후 안식일 준수를 금지시켰다. 그 반란으로 인해 유대인과 유대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자 이때 로마에 있던 기독교인들 중에 자신들은 유대인들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일요일을 준수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안식일 준수를 유대인처럼 되는 것으로 간주하던 사회풍습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반란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다는 역사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보아 확실한 것이다. 재림교회 유명한 신학자 사무엘레 바키오키가 제시한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된 두 가지 이유는 첫째,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유대인과 동일시되기를 원치 않았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화 시키는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는 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준수를 역사적으로 처음 언급한 것은 바르나바의 편지(letter of Barnabas) 15장과 2세기 중반의 유명한 변증가요 순교자인 저스틴 말터(Justin Martyr)의 제1변증서 67장에 나오는데 둘 다 AD 150년경에 기록된 것이다. 바르나바는 일요일에 주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여덟째 날을 준수하고 있다고 하였다. 저스틴은 “일요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모이는 날”이라고 쓰고 있다. 저스틴이 제시한 일요일에 모이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일요일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둘째, 일요일에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다. 셋째, 일요일은 일곱째 날 뒤에 오는 여덟째 날이며 주일의 순환에서는 다시 첫째 날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2세기 말 경에 기록된 외경 베드로의 복음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서에 나온다.
그러나 일요일 준수는 처음에 안식일 준수와 병행하여 두 날을 다 지켰다. 예를 들자면 3세기 초 유명한 그리스도교 저작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AD 160-220)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또한 350-380년경에 초대교회의 법과 전례 규정을 8권으로 집대성한 전집인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s)에 “안식일과 주일(主日) 축제를 지키라”고 권고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AD 312∼337) 황제가 제국 내에 태양을 숭배하는 자들과 일요일을 지키고 있던 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AD 321년에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하는 일요일 휴업령을 선포하였다. “존경할만한 이 태양의 날에 모든 판사들과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휴업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해남은 이에 대해 “한편 그리스도교의 수락으로 말미암아 AD 321년부터 황제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할 것을 명하고, 이 날에 노동을 금한 것은 사회생활에 큰 변동을 일으킨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이 마련해 주는 것들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씨를 뿌리거나 포도나무를 재배함에 그토록 적합한 날이 없는 때가 자주 있으므로, 적기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날을 완전히, 자유롭게 농경에 종사하도록 하라.” 이러한 배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AD 364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를 통해 최초로 일요일 법령을 반포했다. 그 회의의 종규(宗規, canon) 29조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화 하여 안식일에 게으르지 말아야하며, 그날에 반드시 일하여야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날(일요일)을 특별히 존중히 여겨,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능하면 이날에 일하지 말라. 그런데도 만일 그들이 유대화한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톨릭의 첫 번째 공식적인 결정에서 그들이 안식일 준수를 피해야 할 이유로 유대인처럼 행하는 것을 지목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유대인처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D 400년경에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였던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 349-407)는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가 있어 유대인처럼 행한다고 진술하였다. 가톨릭교회는 다음과 같이 자인한다. “개신교가 존재하기 이전 일천년이 넘도록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신성한 사명감에 의해 그날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한 주간 날들 가운데 야훼에게 전적으로 바치기로 정한 날로 주일의 제7일(토요일)이다”(가톨릭 대사전, 안식일 조항).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이 되셨고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 날인 일요일이었다. 그러므로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며, 주일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부활이다”(가톨릭 대사전, 주일 난). 가톨릭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둘째 계명을 포함한다고 삭제하고 열째 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으며 넷째 계명을 주일을 지키고 라고 함으로 때와 법을 고친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각종 성상들을 숭배케 함으로 둘째 계명을 폐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에 발표한 “주님의 날”(Dies Domini)이라는 서신에서 주의 날을 더욱 신실히 지킬 것을 권면하므로 일요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다. 가톨릭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였다. 4세기경 스페인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의회였던 엘비라 공의회(Council of Elvira)는 교회의 질서와 규율을 바로잡기 위해 그들이 채택한 81개 법령들 중에 미사에 3회 이상 빠지면 형을 가하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이 구절은 작은 뿔 세력이 하나님의 참 백성을 핍박할 세력으로서 존속될 전성기간이 1,260년간일 것을 말한다. 때의 아람어 잇단(iddan, time)은 분명히 해(years)를 의미한다. 선지자는 이미 때를 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느부갓네살이 그의 정신을 회복하기까지 일곱 때 곧 일곱 해를 지낼 것이라고 하였다(4:16, 23 ,25, 32). 11:13에 “몇 때 곧 몇 해 후에”라고 하였다. 따라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합산하면 3년 반이 된다. 재림교인들은 오랫동안 연일원칙(day-year principle)을 적용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을 1,260년으로 해석해 왔다(겔 4:6 민 14:34). 9:24-27에서 이 원칙을 적용하여 보면 실제로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도록 의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마흔 두 달(11:2; 13:5), “천 이백 육십일”(11:3; 12:6),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 12:7 계 12:14)는 모두 다 동일한 기간(AD 538-1798)으로 성경에서 일곱 번이나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한 때 두 때 반 때”는 합산(合算)하면 삼 년 반으로 1,260일이 된다(3.5x360=1,260). 사단이 교회를 박해할 때 하나님께서 섭리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실 기간을 일컫는다. 1,260일, 마흔 두 달, 삼 년 반은 모두 같은 표현이므로 셋을 실제로 환산해 보면 성경의 예언력(豫言曆)이 나온다. 1,260일을 마흔 두 달로 나누면 한 달은 30일이고, 1,260일을 삼 년 반으로 나누면 360일로 일 년은 360일이다. 그러므로 성경 예언에서 한 달은 30일, 일 년은 360일이 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이것은 성경 고유의 예언역법이다. 따라서 가변적인 날 수를 가진 태양력이나 태음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그의 손에 붙인바 된다는 것은 작은 뿔이 성도들을 1,260년간 박해할 것을 가리킨다. 실제로 중세 교황권의 전성시대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
3년 반을 해석하는데 연일원칙(1일=1년)을 적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7, 8장의 이상 자체가 상징적이므로 이상에 포함된 기간도 문자적으로 아니라 역시 상징적으로 적용해야 옳은 것이다. 둘째, 이상 자체가 긴 기간까지 미치는 것이므로 거기 포함된 시간도 마땅히 긴 기간에 해당되어야 한다. 로마제국 시대에 일어난 작은 뿔의 세력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수천 년간 존속할 것인데, 그 활동 기간인 한 때, 두 때, 반 때를 문자적으로 취한다면 3년 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적용하지 아니하고 만일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작은 뿔이 로마시대에 일어나서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이라는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다. 셋째, 때의 기간이 표현된 독특한 방법, 한 때, 두 때, 반 때, 그리고 마흔 두 달(계 13:5), 또는 일천 이백 육십일(계 12:6)은 그것이 상징적으로 적용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만일 문자 그대로라면 다른 곳에서 실제 년 수를 말한 것처럼(삼하 2:11 눅 4:25 약 5:17 행 18:11) 분명하게 삼년 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넷째, 구약 성경에 년을 가리킬 때 날 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출 13:10, 삼상 2:19, 20:6 삿 11:40). 그리고 시편과 같은 시가적 부분에서도 등장한다. 날들이라는 것이 년들과 병행적으로 사용된다(욥 10:5, 32:7, 36:11, 시 77:5, 90:9-10). 민수기 14:34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날 수 40일을 40년이라 하였다. 에스겔 4:6에는 1일이 1년이라고 하였다. 다섯째, 9:24-27에서 연일원칙을 실제로 적용시켜보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참으로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도록 의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문자적으로 취한다면 예루살렘 중건 영이 내릴 때부터 메시아의 공생애까지 490일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되므로 도저히 맞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회가 연일원칙을 포기했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이다. 재림교회도 그런 경향이 생기기 시작 했다. 그러나 연일원칙은 바위처럼 견고한 성경적 근거를 두고 있다. 예언을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방편임이 틀림없다. 연일원칙에 대한 최상의 옹호는 셰이의 탁월한 논문이다. 데스몬드 포드(D. Ford)가 1978년에 쓴 다니엘서 주석에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포드는 그가 1996년에 쓴 다른 다니엘 주석 두 번째 책에서 그것을 완벽하게 거절하고 있다.
재림교회는 1,260년 기간을 법왕권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기간으로 보며, 법왕권이 확립되기 시작한 AD 538년에서 교황 피우스 6세가 프랑스혁명군에 사로잡혀 법왕권이 치명상을 입은 1798년까지로 주장하여왔다. 성경의 문맥이 1,260년 기간의 시작이 AD 476년 서로마가 멸망당한 이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면 AD 538년을 1,260년 기간예언의 기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 로마교회의 지상권 확립은 점진적이었다. 로마교회를 위협해온 헤룰리 왕국을 493년에 전복시켰던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3년 “로마교회의 감독이 모든 교회의 수장이 된다”는 조서를 반포함으로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공인하였다. 게르만 국가들에게 유린당하는 서로마를 회복하기 위해 서방의 정신적 지도자로 역할 하는 로마교회를 인정해줌으로 동로마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로마교회의 감독이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534년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the Justinian Code)에 포함돼 편찬되었다. 그리고 동로마는 로마교회와 적대하던 반달 왕국을 534년에 정복시켜 반가톨릭의 가시를 제거시켜주었고, 538년에는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대치하여 로마를 포위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의 비티기스 왕이 이끈 군대를 물러나게 함으로 동고트의 실질적 멸망을 초래케 하였다. 비록 동고트가 553년에 멸망되었다 할지라도 아리안주의를 신봉하던 게르만족에 시달려온 로마 감독에게 굴레를 벗겨 교권을 확립시켜 주었던 것은 538년 동고트의 철수였다. 그러므로 538년은 교황권이 확립된 1,260년의 시작으로 보기에 아주 적합한 연대가 되었다(참조: 8절 주석).
538년에 법왕권을 확립하여 전성기에 이르는 과정에 프랑크 왕 피핀 3세(Pepin III, AD 751-768재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교황 자마리아스의 승인을 얻어 751년 명목상의 왕이었던 힐데리히 3세(Childerich III)를 폐하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개막하였다. 피핀은 프랑크의 메로빙거(Merovingian) 왕조의 왕위를 불법으로 찬탈하여 왕이 되었지만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 752-757재위)는 대주교 보니파스(Boniface)를 보내어 그에게 왕관을 씌워줌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해 주었다. 피핀은 그 보답으로 롬바드족에게서 빼앗은 중부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과 펜타폴리스의 영지를 754년 1월 6일에 헌납하여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 교황권이 최초로 영토를 가진 교회국가가 되게 하였다.
또한 교황의 주도로 신성로마제국을 탄생시킨 사건은 교황권의 전성기의 일면을 보여준다. 교황 레오 3세(Leo III, 795-816재위)는 AD 800년 크리스마스에 피핀의 아들 프랑크의 샤를르마뉴(Charlemagne, AD 768-814) 대제에게 관을 씌워줌으로 신성로마제국을 탄생시켰다. 이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은 교황권의 보호자가 되었다(참조: 8절 주석).
그리고 교황권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1073-1085재위)의 행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하면서 교황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며 황제들을 폐위시킬 수 있다고 선포하여 교황권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속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을 주장하여, 1075년에 27개조 교황령(敎皇令)을 발표하여 속인(俗人)의 주교 서임권을 엄금하였다. 이 조치가 황제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 회의를 열어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였으나 교황은 도리어 로마교회 회의에서 황제의 파문과 퇴위 선언을 하는 것으로 맞섰다. 이것이 바로 성직 서임권을 두고 벌어졌던 카노사 굴욕을 초래케 한 것이었다(참조: 20절 주석).
교황권은 성지 탈환을 위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1088-1099재위)가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1095-1270)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로마 교황이 전 유럽을 총동원하여 150여 년 동안 예루살렘을 탈환하려했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기고만장하던 교황권도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말미암아 교황권의 권위가 실추되기 시작하였다. 1309년 프랑스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을 강제로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옮기고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 1305-1314재위)를 그곳에 유폐(幽閉)시켰다. 이를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교황청은 70여 년간(1309-1377) 아비뇽에 있었고, 연이어 7명의 교황이 모두 프랑스인이기도 하였으나(이 시기에 임명된 134명의 추기경 중 111명이 프랑스인이었다), 여러 차례의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1563)를 계기로 교황권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다. 교황권은 1798년까지 전성기를 누리면서 25절의 예언들을 성취시켰다.
그러면 AD 1798년을 1,260년 기간예언의 종결된 해로 삼을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 프랑스에서 민중을 억압하던 절대왕정과 교권에 대한 항거로 시민들에 의한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1789. 7, 14 - 1794. 7,27. 혹은 1799. 11, 9)은 자유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한 전형적인 시민 혁명이다. 인구 2500만 가운데 2%정도밖에 안 되는 제1신분(로마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고서도 면세의 혜택을 누리며 주요관직을 독점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누렸다. 거기다가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여함으로 국고가 바닥이 났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구의 98%를 차지한 제3신분(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하였고 정치과정에서는 배제 당하였다. 따라서 불만을 품은 억압받던 시민들이 일어나 혁명을 일으켰고 구제도(앙시엥 레짐)를 타파했으며 가톨릭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박해를 가했다. 공포정치 하에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가 처형당했고, 수도원들은 폐지되었으며 교회재산은 몰수되었고, 그리고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잡혀 투옥 유배 내지 처형되었다. 교권의 상징이었던 교황 피우스 6세(Pius VI)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프랑스 혁명군의 악렉산더 베르띠에(Alexander Berthier) 장군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1798년 2월 15일 교황 피우스 6세(Pius VI, 1775-1798재위)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의 즉위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장군은 그곳에 쳐들어가 교황을 사로잡아 폐위시켜버리고 교황은 앞으로 어떠한 기능도 행사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교황의 자리를 계승할 수 없다는 포고령을 반포하였고 80세의 노령에 이른 피우스 6세를 압송(押送)하여 유배 보내버렸다. 프랑스 남부 리옹과 마르세유 사이에 위치한 발랑스(Valence) 감옥에 유폐된 교황은 그 이듬해 8월 29일 죄수의 신분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한 동안 그의 시체는 매장도 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중세 동안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교황권이 꺾이어 1,260년 만에 치명상을 입고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피우스 6세의 유해는 1802년 2월에야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이리하여 1798년 프랑스 혁명세력에 의해 교황 피우스 6세가 폐위당해 교황권이 치명상을 입은 사건은 1,260년 기간의 종지부가 되기에 알맞은 역사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종식은 1794년 7월 27일 공포정치의 주된 세력이었던 45명을 단두대에서 처형시킴으로(이후 3일간 104명 처형) 쟈코뱅당의 독재를 몰락시키고 혁명의 열기를 끝낸 테르미도르의 반동(Thermidorian Reaction)을 그 마지막으로 본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폐지하고 통령정부(統領政府)를 수립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1799년 11월 9일을 프랑스 혁명 종식으로 간주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일어났던 프랑스 교회의 박해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함으로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교황권은 계속 추락하였다. 나폴레옹에 있어서 종교는 단지 하나의 정치적 요소였을 뿐이었지 그는 종교에 대해 무관심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가톨릭교회의 중심은 교황 피우스 7세(Pius VII, 1800-1823재위)였다. 나폴레옹은 1801년 7월 15일 제251대 교황 피우스 7세와 정교조약을 맺었다. 혁명으로 인해 황폐해진 프랑스의 질서를 바로 잡고 국민감정을 달래기 위해서 교황의 힘을 빌릴 의도였다. 조건은 교회 재산 몰수 승인,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파직하는 것, 성직자 공민 헌장에 따라 충성을 선서한 자를 주교로 임명하는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의 결과로 나폴레옹은 로마교회의 모든 감독들을 사임시켰고 자신이 새로운 감독들을 임명하였다.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을 거의 다 정복한 나폴레옹은 1803년에 독일을 침입하여 교황령 전부를 빼앗아버리므로 그곳에 속해 있던 3백만의 가톨릭 신자들을 잃게 하였다. 1804년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대관식에까지 참석하여 나폴레옹을 도유(塗油)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로마와 교황청을 점령하고 교황 피우스 7세를 감금한 채 교황청 군대를 나폴레옹 군대에 병합하여버렸다. 그리고 1809년 나폴레옹은 교황령을 프랑스에 합병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연 200만 프랑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피우스 7세가 이에 항의하여 1809년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교서를 작성했는데 미완성인 채 유럽과 프랑스에 유포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교서를 빌미로 교황을 납치 감금해버렸다. 교황은 1812년 6월 파리 근처의 퐁텐블로(Fontainebleau)로 이송됐다. 그리고 1814년 1월 퐁텐블로를 떠나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사보나(Savona)로 이송되었다가 나폴레옹의 세력이 몰락한 1814년에 석방되어 로마로 돌아오면서 침체의 나락으로부터 교황권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우스 7세는 예수회를 부활시켰다. 교황령은 1815년 빈회의에서 콘살비 추기경에 의해 회복되었다. 그리고 1816년에 성서공회를 정죄하고 백성들의 성경사용을 막는 일까지 하였다. 제1-2차 공의회를 주도한 피우스 9세(Pius IX, 1846∼1878재위)는 마리아의 무구희태설을 선포했으며, 1870년 7, 18일에는 교황무오설을 반포하였다. 이와 같이 피우스 7세부터 시작한 교황권의 부활은 계시록 13:1-4의 예언을 정확하게 성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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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