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전시사칼럼
자유를 낭비하고 상식을 버린 대가
사람들은 이번 총선에서 야당은 ‘압승’하고 여당은 ‘참패’했다고 말한다. 그냥 참패라는 말도 엄청난 충격인데 ‘사상 초유의 대참패’라고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부추긴다. 물론 야당은 승리했고 여당은 패배했다. 하지만 야당이 압승하고 여당이 참패했다는 표현은 틀렸다. 중앙선관위는 최종 개표 결과 득표수에서 민주당 50%, 국민의 힘 45%, 조국당, 이준석당 등 야권 5%로 밝혔다. 의석수는 192석 대 108석이지만 득표수를 비례로 의석수를 다시 환산하면 민주당, 야권 합쳐서 165석, 국민의 힘 135석이다.
그래서 압승, 참패 같은 용어를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냥 ‘야당이 이겼다.’하면 될 것을 대부분의 언론은 ‘민심이 윤석열에게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라고 말한다. 경솔한 표현이다. 호남과 수도권의 민심만 민심이고 PK, TK의 민심은 민심이 아닌가? 45%의 민심을 우습게 보는 표현이다. 진정한 민심의 흐름은 의석수가 아니라 득표수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전국이 하나의 선거구인 대통령 선거와 달리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제도의 프레임 자체가 다르다. 총선 승패를 판단하는 잣대인 의석수는 오로지 250여개의 지역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단 한 명의 득표수만 반영된 결과다. 어쨌든 선거법을 손봐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선거법을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나라도 있는 세상인데 한국은 이재명 한 사람이 선거제도를 결정하는 나라다. 이게 바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는 이 나라의 한심한 정치 수준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는 이재명 후보보다 0,78% 더 득표해 당선되었다. 만약 이번 총선을 대선 형식에 대입한다면 야당 후보가 5,4% 더 득표해 당선되었을 것이다. 물론 민심이 2년 전 대선 당시보다 야권 쪽으로 더 기울어진 것은 맞다. 하지만 의석수만 놓고 총선 결과를 단순 평가하는 것은 착시 현상 그 자체다. 그러므로 여권은 반성은 해야겠지만 머리를 풀어 헤치고 석고대죄(席藁待罪)할 일까지는 아니다. 지나치게 절망하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몸을 낮추어야 할 곳은 야권이다. 입이 귀에 걸리만큼 기고만장(氣高萬丈)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승리의 축배를 이내 독배로 만들어 주는 게 민심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인 것처럼 선거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늘 바람 앞에 드러눕는 풀잎 같은 존재다.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뒤엎을 수도 있는 바다 같은 존재다. 늘 옳은 것도 아니면서 민심은 늘 변덕스럽다.
사실 선거는 대체로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거란 말도 있다. 이번 총선도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아마 여당에 투표한 사람들은 이재명, 조국같은 범죄자에게 날개를 달아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절박감으로 투표했을 것이다. 또 야당에 투표한 사람은 윤석열, 김건희 아니면 한동훈이 꼴도 보기 싫어서 증오의 마음으로 투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제대로 된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면 이재명, 조국과 그들 진영의 막말과 범죄를 동의하고 표를 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어느 정치 전문가는 총선 결과 분석에서 ‘권위주의가 윤리와 도덕을 삼켜버린 선거였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용산의 고집불통이 이재명, 조국 진영의 막말, 온갖 범죄들을 다 덮어버린 선거였다는 말인데 나름 설명력이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공은 사법부의 코트로 넘어갔다. 기대난망(期待難望)이긴 하지만 공의로운 사법부가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지는 총선 결과만큼이나 초미의 관심으로 지켜볼 일이다.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앞으로 4년, 대한민국은 거대 야당의 입법폭주라는 격랑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용산과 이런 판을 깔아 준 국민들에게는 오롯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여당 내부에서 반란표가 나오지 않는 한 거부권, 그리고 시행령 밖에 손에 쥔 게 없는 윤석열 정부는 남은 3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만들 수 없는데 무슨 수로 국가를 새롭게 경영하고 나라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 이번 선거에서 그렇게 흠씬 두들겨 팼으면 이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정권 심판’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일을 할 수 없도록 손발을 묶어 놓고 또 무슨 심판을 한다는 건가? 감을 따라고 머슴을 감나무에 올려보내 놓고 감나무를 뒤흔들 훼방꾼을 불러들인 주인은 머슴을 심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제 거대 야당은 온갖 특검으로 용산을 조리돌려 만신창이를 만들려 할 것이다. 저들이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내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은 남은 3년 이재명과 조국의 미친 바다 위에서 윤석열이란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맡기고 헤매야 한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여 매는 일 외에 아무런 대안이 없어 보인다. 이 역시 자업자득이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은 나라의 운명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이토록 느슨한 선악(善惡)구분 능력과 이토록 한가로운 피아(彼我)구분 능력으로는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국내외의 절박한 파고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돌아보면 80여 년 전 해방공간의 이념 지형이 요즈음과 비슷했다. 좌파가 전체의 70%를 넘어서 있었다. 조선왕조 봉건시대와 일제강점기를 통해 뿌리내린 전체주의 통치체제의 트라우마와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는 심각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말 그대로 언제 폭발할지 모를 모닥불 옆 기름탱크였다. 국민 대부분이 농민인 나라에서 소작농이 70%, 문맹율은 80%였다. 대중을 향한 선전 선동이 요즈음처럼 기막히게 잘 먹혀드는 구조였다. 그래서 남로당의 박헌영, 북의 김일성, 즉 남북의 좌파들은 남조선 적화통일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쉽다고 오판했다. 그리고 재앙이 몰려왔다.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은 그 예고편이었고 6,25전쟁은 그 피날레였다.
2024년 22대 총선 이후, 이제 나라를 걱정하는 한국인들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게 하나 있다. 대한민국의 바닥을 흔들 수 있는 거대 야당의 오판이다. 가장 심각한 시나리오는 바로 함부로 헌법에 손을 대는 상황이다. 이는 기필코 6.25전쟁에 버금가는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헌법개정은 가능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여야가 반드시 국회에서 의석의 황금 분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시도해서는 안 된다. 지금 국회를 장악한 종북 좌파 세력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빛바랜 깃발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한미일 동맹은 언제든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려도 좋을 구겨진 종이쪽지다. 그래도 대한민국 건국 초기는 이승만이란 지도자가 있고 그의 머리에서 나온 ‘농지개혁’이란 신의 한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는 이승만 같은 지도자도 ‘농지개혁’ 같은 신의 한 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신의 한 수다. 나 스스로 우리 시대의 구경꾼으로 살지 않겠다는 각오라면 우리 모두 최소한의 지도자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속한 이념의 담벼락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가 온전한지 우리 사회의 상식은 건강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야만 명백한 범죄행위에도 ‘그럴 수 있지 않나?’ 날조된 사실과 입에 담지 못할 막말에도 ‘그게 뭐가 어떤데?’ 같은 꼬여버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범법자에게 관대한 온정주의,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가벼움, 내 편이라면 적반하장(賊反荷杖)도 감싸주는 고장 난 상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2024년 한국 사회는 비로소 희망이 있다. 본시 희망이 없는 상황이란 없다. 다만 희망이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80년 전 해방공간의 한국 현대사가 오늘 우리 시대에 남긴 교훈이다. 역사는 우리 선대의 삶이 생산한 소중한 경험의 모음이다. 그래서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바보는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경험에서 배운다.’ * 2024.4.13. 글/최익제(敎博)
첫댓글 최박사의 세상을 날카롭게 깨뚫어 보는 혜안과 뛰어난 필력에 경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