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詩
忠正公 민영환의 자결을 哀悼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詩
[임철순, 2021. 1. 24]
2015년 7월 10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일본 쓰시마(對馬島),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이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죽음에 부친 시가 생각나 소개한 바 있습니다.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하며 자진(自盡)한 분이지요. 젊은 나이에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이토는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을사늑약을 체결케 한 뒤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는데 1909년 사임 후 하얼빈에 갔다가 안중근 장군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민영환의 죽음에 부친 시에 대해 어떤 책은 ‘비록 적국의 신하라 할지라도 그 신하된 도리에 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설했습니다. 그 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君在臣先死(군재신선사) 임금이 계신데 신하가 먼저 죽고
母在子先死(모재자선사) 어머니가 계신데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皆非臣子義(개비신자의) 다 신하와 자식의 도리가 아니나
無奈死於死(무내사어사) 죽을 때에 죽는 것을 어찌하리오(어찌할 수 있으리오)
그런가 하면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추도사를 낭독한 행위로 인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과 ‘부산을 빛낸 인물’ 선정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다음은 2010년 3월 4일 ‘프레시안’에 실렸던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 글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4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애도와 추모 행사가 끊일 줄 몰랐다. 당시 신문들은 관련 기사를 매일 같이 쏟아내었다. 애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듯, 10월 29일 대한제국 순종 황제는 메이지(明治) 천황에게 ‘吾國의 兇手에게 死’, 즉 우리나라 악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을 쓰며 이토의 ‘훙서(薨逝)’에 애통해 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지석영이 낭독한 추도문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순종 황제의 것과 비슷했을 터이다.
지석영은 그 3년 전인 1906년 11월 30일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기 위하여 흥화학교에서 열린 1주기 추도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약 보름 뒤에는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한 사건에 연루된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석방되기도 하였다.
3년 사이에 정반대 성격의 추모회에서 연설하거나 추도문을 읽었던 지석영. 일제에 우호적인 행위를 했음에도 한 달도 안 되어 반일 혐의를 받았던 지석영.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세월이었지만, 그것이 지석영의 친일적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변명해주지는 못한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특히 역사 앞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5년 7월에 쓴 글>
[출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詩|작성자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