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고 준비하는 나으 노년은...그러니까 구체적으로 60살부터...
주옥같은 한국단편들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할 것이야~
그래서 금싸라기 같은 우리나라 단편작품들을 글로벌 애장도서로 만드는 데 노력을 집중할 것이야~
그렇게 하고 싶어서 요즘 안되는 머리로 자나깨나 끙끙거리며 공부를 하고 있단다~
시작이 너무 늦긴 했는데.....결과보다는 과정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그러다 늙어 죽어도 좋을 것 같아서....ㅎ
가끔 친구들이 이 나이에 나더러 공부를 왜 하냐고 물어서 우선 요런 걸로 답하는도다.....헹....ㅎ
밑에 꺼는 엊저녁에 또 끙끙거리며 썼으...교수님께 제출하려고...
그러다가 기냥 이리로 가져와 봤다......옛날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엔드 나으 영원한 친구이자 화이낸셜 서포터 남편에게도 감사하고 싶어서...헤헤헤....ㅋ
버뜨, 지루해서 읽다보면 잠이 저절로 올 것이다....ㅎㅎㅎ
함 디비졸려 볼래?....ㅋ
내가 새삼스럽게 이 오래된 한국단편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전영택의 <화수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화수분’이란 말 그대로 재물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는 설화상의 단지라고 한다. 그렇다. 그야말로 끝없이 필요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단지. 이것은 내게도 있다. 바로 내게는 남편이 그 화수분인 것이다.
나만의 화수분을 지면에 옮기기 전에 전영택의 작품 <화수분>을 먼저 훑어보자.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었을 우리만의 단편들, 그 중에서도 세계적 반열에 오른 여타의 외국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작품성이나 예술성, 역사성 모두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주옥 같은 작품들은 무수히 많지만 전영택의 <화수분> 또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백미의 반열에서 추호도 빠짐이 없는 예술작품이 분명할 것이다. 나의 기억 저편에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작품성 뛰어난 단편들은 사는 동안 내내 나의 추억 그리기, 혹은 나의 상상력과 감정선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에서 그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허구와 실상의 구별조차 모호해질 만큼 리얼리티가 실감나는가 하면, 어느 때는 내 일기 곳곳에, 혹은 어쩌다 쓰게 되는 수필 곳곳에 그 흔적들을 뚜렷하게 남기고 있는 나만의 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화수분>이 내게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역시 화수분으로 작용한 보물 중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작가 전영택은 이 작품을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하였다. 19세기 세계적 문예사조의 흐름은 허구적 언어가 춤추는 낭만주의에 반하여 사실적 묘사와 구체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춘 자연주의가 팽배한 흐름을 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내 생각에는 문예사조를 논하기보다는 일본의 수탈이 한창 무르익었을 시기적 적절성과 그에 따른 현실 고발이랄까 억압과 착취 행태에 대한 간접적 대항의 수단으로 예리하고도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 막연한 해방에 대한 작가의 간절함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호가 ‘늘봄’인 작가 전영택은 독실한 기독교 목사로서 투철한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그에 따른 인도주의, 즉 세계동포주의 정신이 그의 작품 곳곳에 짙게 배어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굳이 일컫자면 인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을 주로 썼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겠다.
그러면 작품의 내용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무렵 서울과 양평 부근이고, 공간적 배경은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묘사된 어느 추운 겨울 과거를 회상하는 허구적 공간이다. 등장인물로는, 일인칭 관찰자인 ‘나’가 계속 따라가며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인물, ‘화수분’이 주인공이고 작품 속에서는 ‘행랑 아범’으로 지칭된다.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사는 다수의 가장이 그 시절 그러했듯이 이 행랑 아범도 지게꾼 노릇을 하는 속에서도 가족애를 잃지 않는, 무식하고 우직하지만 순박하고 순진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독자인 나로서는 시대적 배경에 초점을 맞춰서 좀더 집중분석하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화수분의 아내로 주인공의 행동이 극에 달하는 데 기여하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인물로 ‘어멈’이 등장한다. 이것 역시 나로서는 이 아내의 역할에 초점을 맞출 때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현대의 나와도 비교되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그밖에 가난 때문에 정체성이 없어지는 화수분의 큰딸 ‘귀동이’, 또 작품 맨 끝에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갓난아기 작은딸로 ‘옥분이’가 나오고, 일인칭 화자인 ‘나’의 아내가 잠깐 등장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화수분’은 그야말로 부자로 살라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순종적 인물로 극도의 가난으로 거지와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를 딱히 여긴 주변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린 큰딸을 낯선 사람에게 보내고 밤늦도록 슬피 운다. 그런 다음 시골에서 부자소리를 듣는 형이 발을 다쳐 농사일을 못한다는 기별을 받고 겨울이 오기 전에 다녀오겠다며 안채 주인인 ‘나’에게 가족을 부탁하는 인사를 남기고 떠난다. 그러다가 입동이 지나고 매서운 추위가 닥쳐와도 소식이 없자 남편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던 어멈은 갓난아이를 업고 아범을 찾아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시골로 향한다. 한편, 화수분은 형 대신 예의 그 순박하고 우직함으로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그만 과로로 쓰러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열에 들떠서 다른 사람에게 준 큰딸 이름을 부르며 울다가 어멈이 보낸 편지를 읽고는 마침내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서울로 향한다. 이 때, 묘사되는 공간적 배경은 추위와 눈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서울을 향해 달아나듯이 가는 아범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인적 드문 고갯길 나무 밑에 웅크린 채 있는 처자식이었고, 다음날 아침 지나가는 나무장수가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둘 사이에서 아직 막 자다 깨인 어린애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줄거리 요약하기 부분이 제일 버겁다. 줄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써야지만 다른 읽지 않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그나마도 이해할 텐데 중간중간 자꾸 나만의 분석이 하고 싶어져서 곤란할 때가 많다. 지금도 그러하다.
처음부터 다시 보자. 글 맨 첫머리에서 작가는 ‘첫겨울 추운 밤’으로 시작한다. 추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작품의 배경이 춥고 어두울 것이라는 것부터 암시하는데 이 또한 일제하의 우리 실상에 대한 고발을 염두에 두기도 했으리라. 그 뒤로 바로 울음소리가 나온다. 이것 또한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일 것이다. 극심한 추위와 어둠 속에서 울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순박한 주인공, 즉 일제 하 우리 민족의 실상으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는 문으로써 울음소리를 등장시킨 것이다. 이어서 아범과 어멈이 궁핍함 속에서도 순수한 애정과 순박함과 순종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견뎌내는 것을 함께 묘사함으로써 당시 실제 대다수 백성들의 순박한 실상을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가난의 지경은 자식을 남에게 주는 행위, 순박하고 우직한 화수분이 그로 인해 소리 내어 울었다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또한 화수분이 생계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홀로 시골로 향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 정든 산천을 버리고 만주 벌판 등지로 떠나야 했던 당시 시대상도 역시 염두에 두었으리라. 이어서 타지에서도 예의 그 우직함과 순종적인 모습으로 말미암아 못내 과로로 쓰러져서 가족을 그리며 우는 장면에서도 당시 횡행했음직한 구체적 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자연주의 기법이 두드러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비극적 결말로 매듭짓는 것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당시 시대상의 암담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테고 작가 나름으로 해방에 대한 막연한 절망감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자연주의적 성향이 짙다고 하겠으나, 마지막 문장에서 ‘따뜻한 햇볕’을 묘사하는 것으로 독실한 기독교적 인도주의와 해방에 대한 희망적 갈망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또한 그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어린 생명이 그 가운데 살아 있는 것으로 끝맺음하는 것 역시 희망이 살아 있음에 대한 암시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여운으로 두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보라, 세계 문학애호가들이 두고두고 읽고 애장하고 감상하는 여타의 작품들과 비교해볼 때 추호도 뒤지지 않을 이 예술작품의 진가를! 노란색 렌즈로 들여다보면 노란 꽃이 피어 있고, 파란색 렌즈로 들여다보면 파란 꽃이 피어 있는 이 작품들의 무한한 예술적 감각과 뛰어난 인본주의 정신을 그 누가 감탄치 않을 수 있으랴. 바라건대 이 뛰어난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위대한 문호들의 그것들처럼 훌륭하게 번역되고 회자되어서 세계 문학애호가들에게 그야말로 고전처럼 읽혀지고 소장되고 아름다운 영상 등으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전영택 님의 ‘화수분’에 힘입어 나만의 화수분을 일컬어보자
말 그대로 필요한 재물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 항아리. 그렇다. 남편이 내게는 화수분이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나온다.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어주고,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좋아라 하며 퇴근길에 사서 들고 들어오는, 필요한 물건과 돈과 그밖에 모든 재화가 그로부터 나오는 화수분. 새삼스럽게 화수분이라는 단어로 그를 묘사하려니 모든 잔잔한 일상들마저도 내게는 큰 복이었던 것임에 새삼 감복한다. 그 뿐이랴. 친구도 되고, 애인도 되고, 때로는 귀여운 장난감도 되어주는 나만의 화수분. 현금자동인출기처럼 번호만 누르면 필요한 만큼 재화가 쏟아져 나오는 그런 화수분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수분’의 어멈도 아니고, 기다리다 지쳐서 춥고 어두운 거리로 어린 것을 업고 마중 나가는 그런 순종적 아내도 아닌데 그는 여전히 우직하고 순박하고 성실하게 아내인 내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화수분처럼. 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그 화수분을 떠올린다. 작품 속 화수분이 내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와서 문득문득 내게 깊은 잔상과 감명과 긴 여운으로 수시로 감명 깊은 책을 읽고 난 듯이 그렇게 살아나는 것이다. 내가 디디고 서 있는 땅 위에서 펄벅의 ‘대지’가 문득문득 살아나고, 굽이치는 삶의 바다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문득문득 끈기와 인내로 살아 걸어 나오듯이, 전영택의 ‘화수분’ 또한 내 삶 속에서 남편의 모습으로, 그 애정 어린 우직한 순박함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던 것이다. 삶 속에 체화된 작품 속 인물. 그 주인공 옆에서 ‘어멈’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이기적 아내의 모습으로 화수분 옆에 무주룩하게 서 있는 나를 본다. 감동과 감사가 새삼스러우랴마는 두고두고 읽어도 아깝지 않을 단편 소설 한 편이, 내게는 귀한 재물이 끝없이 솟아나는 화수분으로 살아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첫댓글 아, 정말 대단해! 쉽지 않겠지만 자네 말처럼 도전해볼 만한... 갱욱이, 아자아자아자!!!
자네가 눈 밝은 사람이란 걸 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소설 하나를 얼마나 반복해 읽어야 이 정도의 시각이 가능한 것이지?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선생으로, 따순 이웃으로, 소통할 수 있는 친구로...
자네는 이미 내게 화수분 못지않아. 감사할 따름...ㅎ
남편이 화수분이란 말에 난 누굴까 잠시 생각했는데...
삶에 늘 힘이 되어주시고 의지가 되어주시는 빛과 소금의 그분이 아닐까.
주변에 이렇게 글쟁이들이 있어서 참 좋다^^*
게다가 이 나이에 열정을 가지고 계속 일을 한다는건 축복이야~~
자알 될거라 믿어!! 경욱아~~
경욱아! 홧팅 아마 잘하고 잘될거야... 이렇게 감정도 풍부하고, 글도 잼나게 잘쓰는데..뭐가 걱정이여
나도 우리남편한테 잘해야겠다..맨날 투정만부리거든... 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