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연
박 현 옥
중고 서점을 들러 책을 몇 권 산 후 아이들이 가고 싶다는 시내의 한 카페를 찾았다. 카페는 노란 목향 장미 넝쿨이 커튼처럼 한쪽 담벼락과 계단 전체를 덮고 있다. SNS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대구의 목향장미 명소로 소문난 곳이라고 한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꽃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장미꽃이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이처럼 가치 있어지면 좋으련만...
어버이날을 열흘 정도 앞두고 서울에 사는 큰아들에게서 주말에 내려오겠다고 전화가 왔다. 대구에 내려오면 맛 집과 카페 투어를 할 예정이므로 자기들을 위한 음식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의 말도 곁들인다. 그중 한 곳이 이 카페이다.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카페를 서울에 사는 며느리를 통해 알게 되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빈자리가 없어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마침 한 팀이 일어선다. 쟁탈이라도 하듯 자리를 확보하고 앉았다. 아들은 음료를 주문하고 며느리는 카페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려고 서 있는 사람들 뒤로 줄을 선다. 카페의 야외 공간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머리 위로 간간이 3호선 지상 열차가 지나고 지대가 높아 시야도 넓고 전망이 꽤 괜찮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온 아이들과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펼쳐놓고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큰 아들 내외는 서른다섯 살 동갑내기이고 결혼한 지 만 2년이 지났다. 며느리는 적은 나이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올해 신학기부터 근무하던 학교에 1년간 난임 휴가를 내고 병원을 다니면서 아이를 갖기 위해 준비 중이다. 4월 초순쯤 산부인과를 찾아 간절히 바라던 임신을 확인했으나 태아가 착상이 바르게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호르몬 수치가 차즘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의사 선생님이 이 상태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유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약물을 복용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은 많은 고민 끝에 약물 복용을 선택했고 그렇게 해서 아기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잠시 침묵이 흐르고 며느리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더 좋은 인연 만나려고 그렇겠지. 유산도 애를 낳는 것만큼이나 몸이 많이 상하는 일이니 보약이라도 한재 지어먹으면서 몸을 추스르도록 하자"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요즘은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젊은이들을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친한 친구의 경우도 그렇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아들이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면서 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와서 많이 속상했다고 한다. 난임 휴가까지 쓰면서 아이를 낳겠다고 애쓰고 있는 아이들인데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약 30여 년 전 임신을 하고 생활 여건 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유산을 한 적이 있다. 살아가면서 그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가끔 죄스런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때는 철이 없어 잘 몰라서 그랬다고,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자신을 위로 했다. 나이 먹고 철이 든 지금은 모르는 게 더 큰 죄임을 알아 백중이면 영가천도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불교에서는 세상사 모든 것이 인연법이라고 한다. 시절인연이라는 말도 있듯이 모든 인연은 다 때가 되어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짧은 인연으로 끝난 우리의 아이들과는 아마도 설익은 인연이었나 보다.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디선가 본 글귀가 생각난다.
‘좋은 일, 좋은 사람, 좋은 삶을 만나려면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 좋은 나’
봄이면 예쁜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목향장미처럼 우리 아이들도 더불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아가길 희망해본다, 그리하여 선업(善業)의 결과로 좋은 인연 만나 다시는 마음 아프지 않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은다.
첫댓글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수업 때 보다는 한결 잘 읽히네요. 술술 넘어갑니다. 그리고 주제가 더욱 선명하고 마음에 와 닿아요.
아이들이 선업을 쌓고쌓아, 그 복지음이 크게 빛나고 궁극에는 좋은 인연으로 열매 맺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