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14)
[에피소드37]
나는 76년 8월에 군 생활 중 한번 밖에 없었던 귀중한 10일 간의 휴가를 받았다. 그런데 휴가 도중에 8. 18 도끼 만행사건이 일어났다. 미군과 한국군은 즉각 전쟁직전 상태인 “데프콘2”를 발령했다. 외출이나 외박은 물론이고 휴가 중이던 전 장병들은 부대로 즉시 귀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보도를 들은 어머니는 혹시 내가 늦게 귀대하여 처벌을 받을까? 염려되어 빨리 돌아가라고 나를 재촉했다.
마지못해 귀대하니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부대는 너무나 고요했다. 모든 군장과 장비를 전투에 대비해 준비해 놓고 병력들은 아무 할 일 없이 내무반에 대기하며 쉬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일찍 귀대한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황금 같은 10일 간의 휴가를 이틀이나 단축하고 귀대했던 것이다. “운이 나쁜 사람은 접시 물에도 빠진다.”는 격언이 있는데 바로 나의 경우가 그러한 것이다.
그 국가 비상시에 2중대에 있는 K대학 출신 J라는 동기는 신상의 큰 변동을 겪었다. 데프콘 2라는 비상상황에서도 부대를 이탈, 마을에서 술을 곤드레만드레 먹다가 연대 인사주임과 헌병합동 순찰에 걸린 것이다. 연대장은 불같이 노하여 당장 군법회의에 회부한다고 소속 대대장에게 소리 질렀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내 동기는 겁을 먹고 대대장에게 2년 복무연장을 신청하였다. 그 당시는 학군단 장교가 장기복무나 복무연장을 신청하면 지휘관 평점이 올라가기 때문에 사건은 그것으로 무마가 되었다. 그러나 J는 나중에 77년 6월 우리가 일제히 제대할 때 같이 제대하지 못했다. 그는 괴로움으로 혼자 근무하는 전방벙커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나중에 그 친구는 미8군 연락장교, K대학 학군단에 근무하다가 대위로 제대했다. 그는 군에 있는 동안 간호장교(당시 대위)와 연애해 결혼했다. 그 후 소식을 들으니, J는 소싯적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그동안 다녔던 안정된 직장(S여고 행정실장)과 가정을 이탈, 단골 술집 마담과 함께 동남아 모처로 떠났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는 해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시신은 해외에서 부인이 운구해 와서 장례를 치렀다. 비록 가정과 부인을 버리고 해외에서 연인과 도피생활을 한 그였지만, 부인은 그의 잘못을 묻어두고, 그래도 한 때 남편으로서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주었던 것이다.
그가 서울 강남의 S여고의 행정실장으로 있을 때 이었다. 어느 날 그는 평소 맥주를 좋아하는 나에게 뼛속같이 시원한 맥주를 실컷 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을지로 6가에 있는 미군 병참부대 내 장교클럽에 나를 데리고 갔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소지한 미군부대 출입증을 그 때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바삭한 날개 치킨을 안주로 맥주를 먹었는데, 정말 그의 말대로 내 평생에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를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마 냉장고가 대형이었고, 특수 냉장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양주를 마시고 나는 맥주를 마셨는데, 술이 거나해 지자 그는 신상의 비밀을 털어 놓았다. 그가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 병영훈련을 마치고 스트레스 해소 차 속초에 내려갔었다고 했다.
여관방에서 하루 밤을 자려고 하는데, 여관 주인인 할머니가 한 밤중에 원피스바람으로 그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그의 옷을 벗겼고 자기가 시키는 데 로 하면 좋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J는 밤을 새면서 기상천외한 온갖 방중술을 할머니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어릴 때 너무나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할머니를 만나 J는 일찍 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12사단 51연대본부가 있는 천도리의 밤의 세계는 J가 가졌던 성의 호기심과 욕망을 만족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거기서 더욱 성의 맛을 들인 그는 제대 후에도 끝없는 욕망을 불태우며 생활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육체적 욕망이 분출한 결과는 결국 한인간의 가정과 본인의 인생을 마침내 파국으로 이끌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J의 부인은 그가 해외로 떠난 후 홀로 의연하게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그녀가 가졌던 군의 간호장교 경력을 살려 보건소에 수간호사로 취업해 자녀들을 양육했고 정년까지 열심히 일한 이 땅의 장한 어머니였다.
[에피소드38]
76년 가을에 대대 사격훈련이 있었다. 사격장에 숙영을 하고 3일간 훈련을 하였다. 2중대장 김창섭대위가 나를 포함하여 소대장들을 데리고 인근 마을에서 토종닭을 사주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먹은 닭백숙으로서는 최고의 맛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그 맛이 가끔 생각이 난다. 대대 작전장교로 있었던 모 장교(3사 8기)는 그 때 마을 가게에서 혼자서 술안주로 계란 프라이 50개를 먹었다.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각종 약초를 먹고 방목되는 토종닭과 계란은 맛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에피소드39]
옆 소대원 중에 고된 군 생활과 고참병들의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정신이 이상해진 사병이 있었다. 한번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 못해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H중대장은 그를 나무에다 묶어놓았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였다. 나는 그가 왠지 불쌍하게 생각되어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다독거려 주었다. 감정이 여리거나 예민한 사람은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 사병은 좀 회복된 후에 나를 찾아와 그 때 일을 얘기하며 고마워했다.
[에피소드40]
대대 피엑스(군대 매점)에 담배를 사려고 들렀을 때 사병 한명이 취사장에서 얻어온 돼지고기 한 조각을 연탄불에 굽고 있었다. 돼지고기는 살점은 거의 없고 기름만 잔뜩 붙어 있었다. 취사병들이 좋은 고기를 줄 리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형편없는 고기지만 사정을 하여 얻어 온 것 같았다. 연탄불에 굽는 고기는 기름이 타기 때문에, 피엑스 안은 마치 너구리굴처럼 연기가 자욱했다. 비계에 달린 손톱크기만큼이나 작은 살코기를 구워 먹으려고, 자욱한 연기 속에 돼지비계를 굽고 있는 사병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로 연기를 뿜으며 돼지고기를 굽고 있던 불쌍한 그 사병의 모습이 불현 듯 떠오르곤 한다.
[에피소드41]
우리 중대원 중에 병사 간 폭행사건으로 사단 헌병대 영창에 들어간 사병이 있었다. 그가 소정의 영창근무를 마쳤을 때 내가 데리러 갔다. 나는 원통에서 음식점에 들러 소주와 생두부를 그에게 권하면서 영창에서 고생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다시는 군대 영창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가 고생한 얘기는 다음과 같다.
새벽에 기상할 때 당직 헌병이 침상 맨 앞줄에 누워있는 죄수에게 모기소리만한 소리로 “기상”이라고 속삭이면, 40여명의 죄수가 순식간에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만큼 죄수들은 극도로 긴장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만약 죄수 중 누군가 동작이 굼떠서 늦게 일어 날 경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벌을 받는다고 한다. 입는 옷은 푸른 죄수복에 “재복무(再服務)”라는 글자가 등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두 시간 “정좌”라고 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규칙은 똑바로 앉아 있어야하고 만약 눈동자나 몸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혼이 난다. 또 규칙을 어기거나 하루 일과 후 암기사항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원숭이처럼 “철창 오르기”같은 고난도(高難度) 벌칙을 받는다고 한다. 영창의 하루는 일반 군대생활 몇 개월과 비교될 만큼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고 하였다. 영창근무야 말로 군대속의 생지옥이었던 것이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