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부문 신인상 ◆
[김정희 시인 작품 원고]
1. 묵언수행(默言修行)
무탈 /김정희
부는 바람은
내 유년의 사랑을 앗아가고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해가 떠도
별이 져도
가슴을 적시던
흥건한 눈물
윤곽이 흐릿한
나 아닌
나의 그림자
그나마 존재하던
내 버진은
첫 키스의 추억에 눈을 감았다.
잃어버린 사랑보다
추억으로 앓는 몸살이
더 두려운 이유다
생야 일편 부운기 (生也一片浮雲起)
사야 일편 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나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 이거늘
뜬구름 같은 삶
입을 열면 쏟아져 나오는 구업(口業)
침묵을 열공한다
2. 가을 여행
무탈 / 김정희
봄내 싹을 틔워
여름내 살찌우던 대지
찬 서리 내리기 전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산비탈
낮게 앉은 들국화
서릿발 서린 눈동자
그렁그렁 눈물 달고
가을 속으로 떠나는 여행
낙엽이 쌓이는 골짜기
무지갯빛 기다림의 로망
가을 여행은
홀로 가는 외로움이 아니다
시나브로 마주 오는 그림자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다.
3. 서리꽃
무탈 / 김정희
꽃별 같은 사랑 찾아
낮이나 밤이나
떠돌아다니는 집시
온몸을 타고 흐르는 눈물
망나니의 칼바람 춤사위
찰나의 주문으로
얼음 화석 속에 갇혀
눈물이 마르고
호흡도 멎는다
태양이 다가오면
흔적도 없이 스러진다 해도
내가 살다 간 이유
발자국마다
고인 눈물이
사랑이었다고 말하리
[김정희 시인 등단 심사평]
-김정희 시인을 신인상 후보로 추천하면서-
작품 속에 숨 쉬는 감성이 눈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산사(山寺) 공양간에서 눈물 섞인 밥 한 수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아 내야 할 것 같은 외로움이 김정희의 작품에는 녹아 있다. 생로병사의 윤회와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자신을 찾아내는 일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詩는 살며 사랑하며 스스로를 가리키며 자신의 감성에 살아야 할 이유를 전달하는 메시지라고 볼 때 그녀는 그 과정 속 자신의 존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분명한 언어로 전달하면서도 확신을 하지 못한다. 만만한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여자다움 때문이 아니라 천형처럼 달고 다니는 혼자라는 이유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품집이라기보다 그녀의 일상이 담긴 노트가 데스크 위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 사는 이야기는 평소 사람을 만나 비교적 밝게 웃고 당당한 대화를 통하여 본인의 의사를 선명하게 밝히는 똑똑한 여자라기보다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와 주변의 관계 지인들 이야기였지만 결과 속에 여운 있는 독백이 에필로그였다. 인내의 한계에 오열하고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리고 출구는 산사를 찾는 것이고 방안은 소지를 태우며 기원에 합장하는 것. 평범한 아낙의 모습으로 극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트에는 정제되지 않은 글귀마다 번뜩이는 시심(詩心)과 시상(詩想)이 있었다. 성장의 재목으로 주목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의 산실에 들어와 함께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여 덕향문학 11호 신인상 후보로 추천하고 이제 등단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그의 노트에는 ‘인연’, ‘외로움’, ‘난초의 향기’, ‘관계’, ‘이별’ 등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들 중 3편 ‘묵언 수행’, ‘가을 여행’, ‘서리꽃’을 선택하였다.
‘묵언 수행’ / 하루 3만 단어를 읊조려야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생리적 취약점을 지녔다고 하는 여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형벌에 준한다고 이야기한다. 침묵이란 여자에겐 형벌일 수 있다, 한데 시인은 세상 사람들 구업(口業)에 경종을 울리면서 자신에게는 내면의 속 깊은 울음을 소리 죽여 인내하는 고강도의 처방을 스스로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는 독자들에게 불경 구절로 삶과 죽음에 초월적 경고한다. 유년의 사랑도 버려진 처녀에 대한 연민도 한 조각구름 같은 것이다. 수작이다.
‘가을 여행’ / 평범한 모든 사람이 겪는 가을은 시인 김정희에게도 가을이다. 피부가 옷깃 속에 스며드는 순간 다가오는 본원적 외로움을 혼자 하기에는 가을은 무지갯빛 로망이다. 홀로 가기에는 계절이 너무 추연하다. 생활에 찌든 일상을 되찾는 나 자신을 찾는 순례의 여행을 조용한 음성으로 노래하였다. 이가을은 시인 김정희의 가을이 되기를 바라며 천한다.
‘서리꽃 ’(상고대 )/ 감탄이다. 서리꽃은 습하고 차가워야 꽃을 피운다. 습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피우는 꽃들과는 정 반대다. 태양을 맞이하여 찬란하게 빛을 발하다 스러지는 그 모습을 이토록 시적(詩的) 감성으로 여과시킬 수 있는 실력이면 기성 문단 어느 시인과 견주어도 탁월하다.
태양이 다가오면
흔적도 없이 스러진다 해도
내가 살다 간 이유
발자국마다
고인 눈물이
사랑이었다고 말하리
지리산과 소백산 계곡에만 핀다는 전설 같은 꽃 상고대를 등단 작품으로 추천한다. 시인으로서 시작한 새 인생에 서광이 비칠 것을 확신하며 등단을 축하드린다.
(심사 위원 김구부, 신상성, 최기복, 최태호(記))
[김정희 시인 등단 소감문]
덕향문학 문학 강좌에서 최기복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제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일에 끌려가면서 가족을 끌고 가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단한 여정에서 노트에 끄적이는 글은 한 줄기 빛이었는지 모릅니다.
강의 시간에 최기복 교수님께서는 글은 진솔한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꽃과 나무들이 하는 말을 글로 적으면 시가 된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언어만 구사하는 것은 내용 없는 모자이크가 되지만 길을 걷다가 발에 차이는 작은 돌을 주워서 물끄러미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분명 그 돌이 하는 말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을 그대로 노트에 옮겨 적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깃든 시가 된다고 했습니다.
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제 안에서 꿈틀하고 무언가 움직였습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고 첫 태동을 느꼈을 때의 소스라치는 전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들을수록 용기가 생겨 지금까지 써 왔던 글을 내놓았습니다.
누군들 성실하지 않았을까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삶의 여정을 걷는 이 땅의 모든 여성이 그랬듯 드러나지 않는 치열을 내면으로 감싸면서 걸어왔습니다. 가정사 티격태격하고 아웅다웅하는 것들이 다반사였고 세상사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삶의 동그라미 안에서 사건을 메모하고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스치는 사연들을 묶어두고 싶었습니다. 더러는 유년 시절의 그리움이 깃들고 별을 향한 꿈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빛바랜 시작 노트 속에···
등단 시인으로 추천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많은 글 중에 이름표 달고 떳떳하게 내놓을 것이 있었나 생각하면서 잠 못 이루고 하얗게 보냈습니다. 제 이름에 시인이라는 별을 달게 될 줄 몰랐습니다.
심사 끝에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는 화석처럼 굳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기쁨의 환희라기보다 그 이름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태산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수련을 받은 적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받들기에는 버거운 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덕향문학 문학의 산실, 문학강좌 『나의 삶의 나침반』에서 열심히 배우고 익히겠습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문우님들과 아름다운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가겠습니다.
시인 김정희로 새로운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멀리 있는 내 남편에게 영광을 전합니다. 이제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고 있는 금쪽같은 내 자식들 세정 · 민정 · 은빈 · 효정 · 창준 · 선영과 이 기쁨을 나눕니다. 덕향문학 홍성도 회장님과 문우님들 함께 공부하고 계신 홍원표 시인님 감사합니다. 효지도사 과정에 동문수학 하신 정옥자, 함성덕 언니, 아우 같고 친구 같은 정인순 대표에게도 영광을 전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글을 검토하시고 등단의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 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덕향문학의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께 큰절 올립니다. 묵언수행(?) 중이니 말을 아끼고 열심히 배우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으로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 김정희 시인 프로필 ◆
1966년. 충북 영동 산
2016년 건양대 여성자치대학.
효 지도사.
덕향문학회 회원
충청효교육원 논산시 분원장
첫댓글
김정희 시인님!
아름다운 이름에 시인이란 날개를 붙이겠습니다.
덕향문학 11호 시인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함초롬한 가을 냄새가 나는 여인!
임의 詩를 감상하면서 떠올랐습니다.
'묵언수행', '가을 여행', '서리꽃'
작품이 이미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덕향문학이라는 공간에서
같이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꽃을 찾고 별을 헤면서
좋은 글 많이 창작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