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35. 백부장의 믿음 (눅 7:1-10)
◆ 백부장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백부장은 문자대로라면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지휘관인데, 실제로는 부하가 50명에서 100명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계급으로는 장교 밑의 하사관급이고 현장에서 발로 뛰는 군인이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자라서 백성들과는 자주 접하는 군인이며, 당시 로마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에서 백부장은 꽤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백부장들은 거칠고 무자비하여 백성들과 사이가 안 좋은 데 비해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칭찬을 들었고, 심지어 백성을 위한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놀랍다. 아마도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백부장이 다섯 명이 언급되어 있는데, 신앙을 가진 자는 오늘 본문의 백부장과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다.
◆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있다(마 8:5-13).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대신 간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나아와서 중풍에 걸린 자기 하인을 위해 간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마태는 사건을 간략히 줄여서 기록한 데 비해 누가(Luke)는 보다 세밀하게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께서 백성 장로들의 하소연을 듣고 직접 고치러 가실 때, 백부장은 자기 친구들을 보내어서 말씀만으로 고쳐주실 것을 구했다. 얼핏 보면 백부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사람만 보내서 이것 저것 요구하는 것 같아서 매우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백부장이 속국의 일개 백성에게 굽실거릴 만한 위치는 아니기도 하지만,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직접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자신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려진 분을 자신이 감히 맞닥뜨릴 수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부족하고, 죄인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떻게 이방인 백부장이 이렇게 겸손할 수 있을까?
또한 예수께서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그는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엘리사가 자기 종을 문둥병이 걸린 나아만 장군에게 보내어서 치료한 사실(왕하 5:10)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 백부장의 하인은 즉시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는다. 이 백부장이 요청하지 않았어도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런 쉬운 방법을 몰라서 직접 고치러 가셨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인간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이 커지자 주님께서는 거기에 걸맞는 놀라운 반응을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지만, 언제나 문제는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건만, 그 믿음이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무한하시다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실은 무한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모른다. 무한은 거대한 유한이 아니라, 아예 유한과 속성 자체가 다르다. 무한은 전 인류에게 무한을 나누어주어도 무한이 조금도 줄지 않는 특이한 속성을 가진다. 칸토어 같은 수학 천재도 무한을 연구하다가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찬양하는 기도가 여러 번 있다. “주님,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하게 하소서!”(시 40:16)
'광대하시다'는 말씀은 히브리어 '가달'인데, 이것은 아주 크게 증가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창 12:2)라고 할 때 사용하신 단어다. '하나님은 광대하시도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확대해서 상상하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KJV성경은 이 단어를 'magnify(확대하다, 과장하다)'로 번역했다. '광대하시도다'라는 말을 개역개정 성경이 단순히 '위대하시다'라고 고쳐서 번역한 것은 크게 잘못한 것이다. 오히려 '무한히 크신 분이시다'라고 번역했어야 한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는 말은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하나님을 네 상상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과대평가해라. 그래도 아직 한참 과소평가한 것이다. 마치 우물가의 개구리가 소의 크기를 상상할 때 자기 배를 크게 불리면서 이 정도면 되겠니? 라고 질문하자, 진짜 소를 보고 온 개구리가 비웃는다. 당신 배가 터져도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도다라고 함은 당신 상상을 찢을 정도로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성경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믿음의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고침을 받은 혈루증 여인, 골리앗을 겨우 매끄러운 조약돌 몇 개로 맞선 다윗... 그들이 바로 믿음의 선진들이며, 우리가 본받을 사람들이다. 남보다 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게 될 때, 그는 믿음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종종 하나님을 자기 지식에 가둔 신학자들보다 초신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가진 것을 본다. 더 큰 믿음은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광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더욱더 알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더 깊고 큰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3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눅 7:11-17)
◆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일명 '혜경 스님'으로 알려진 김성화 씨는 불교계에서 꽤 영향력 있던 승려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무척 혐오했었다. 그렇지만 기독교계의 여러 장점들을 불교에 잘 접목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한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을 하면서 불교 대학, 동네 사찰, 찬불가 등 기독교를 모방한 획기적인 의견을 많이 냈다. 그런데 5공화국 시절에 불교계의 정치 분쟁에 휩쓸리면서 감옥에 잠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염불을 외우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꺼려서 던져 버렸지만, 호기심이 발동하여 한번 읽어보게 되었다. 조금도 미혹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이렇게 순서대로 읽어나갔다. 그리고 누가복음까지 별문제 없이 잘 읽다가 오늘 본문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과부의 독자가 죽은 이런 사건은 불경에도 있는데, 해결 방법이 너무나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에게 독자를 잃은 과부가 와서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자, 석가모니는 그 여자에게 동네에 내려가서 한 번도 죽음을 겪지 않은 집에서 쌀 한 줌을 얻어서 미음을 쑤어 아들에게 먹이면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 여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동네를 뒤졌지만 한 번도 죽음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어깨가 처져서 돌아온 그 여자에게 석가모니는 위로하면서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하며 위로했다. 이에 여자는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내려갔다. 불교는 매우 철학적이고, 얼핏 심오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언가? 독자를 잃은 과부는 절망 속에서 심히 슬퍼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더니 독자를 덜컥 살려놓지 않으시는가? 장례를 망쳐놓으셨다. 전혀 철학적이 아니다. 무모할 정도로 파격적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에 김성화 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난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심리적인 위로만 추구하던 불교에 익숙해 있던 자가 갑자기 고난을 극복하고, 실제적인 위로와 평화를 주시는 실체를 만나자 당황했다. 그는 그때부터 심마(心魔)에 빠졌다. 소위 미혹(?)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절에서 아무리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워도 잡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무수한 번민 끝에 결국 법복을 벗고 개종하였다. 이제 그는 목사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다. 이것은 말로 전하는 심리적인 위로가 아니다. 실제적 위로다. 이 기쁨, 이 충격 ...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단순히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서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16).
과부는 설사 다시 아들이 죽을지라도 전처럼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한 이상, 더는 죽음에 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은 잠깐의 위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알리심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병도, 죽음도, 고난도 모두 극복이 가능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진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위로다. 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는 위로다. 믿는 자에게 임하는 평화는 단순히 철학적 깨달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평화며, 하나님의 실제적 능력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평안과 능력의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없는 돈을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사려고 하면 망상가가 된다. 그러나 있는 돈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굶고 있다면 그는 멍청한 사람이 된다. 대통령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행세하면 그는 망상가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기가 대통령이 아니라고 믿어도 망상가인 것은 똑같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 시민인데,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멍청이거나 망상가다. 오, 주님 제가 이런 자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신분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신분에 걸맞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신분을 진짜로 믿어본 적이 있는가? 다른 것을 구하지 말자. 나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믿음에 굳게 서려고 하자.
우리가 속한 세계는 말로 그럴싸하게 꾸민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세계 만큼이나 분명한 영적 세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멘, 주 예수여. 제가 믿습니다. 주님은 부활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주님의 생명이 제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 신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37.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들 (눅 7:18-30)
◆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에녹, 모세, 엘리야... 등 구약의 기라성같은 인물들보다 더 큰 자란 말인가? 주님께서는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눅 16:22)이라고까지 표현하셨는데, 세례요한은 아브라함보다도 큰 자란 말인가?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가장 큰 자라고 하심은 그의 신분이나 위치가 가장 높은 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가장 큰 자라고 하심은 사역 면에서 말씀하심이다. 지금까지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서 희미하게 보고 예언하며 오실 것을 증거했지만, 세례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을 직접 뵙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증거했다. 과거의 선지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이며 큰 사명이다.
◆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자
(28)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방금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시고,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다고 하심은 매우 모순적으로 들린다. 이 구절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단, 사이비 교주들이 매우 애용하는 구절이다.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의 이론에 따르면 세례요한의 사명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는데, 쓸데없이 헤롯 왕의 사생활을 책망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힘으로써 사명 완수를 못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큰 자였던 자가 가장 작은 자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제법 그럴싸하다. 그들 주장처럼 만일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예수님의 사역은 더욱 강력해지지 않았을까?
나는 청년 시절에 왜 이들이 그렇게 세례요한의 실패를 집요하게 주장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에 이어지는 논리에 아연실색했다. 세례요한이 실패함으로써 예수님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예수께서 본래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본래 사명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신데, 이들은 이상한 결론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 본래 하고자 하시는 일을 미완수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 완성해야 하는데, 그게 누구겠는가? 라는 식으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한다. 통일교 문선명,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모두 그런 종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셨다. 그들에게 미혹되지 말라.
과연 세례요한은 사명에 실패했을까? 아니다. 그는 자기 사명을 다 완수했다.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간 것이나 감옥에 갇힌 것이나 목 베어 죽임을 당한 것은 그의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했고, 자기 제자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라고 했으며, 그중에 예수님을 따라간 이가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다(요 1:40). 그리고 남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언급함으로써 자기 사명을 다했다.
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을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예수님의 사역이 훨씬 더 탄력을 받고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일단 예수님은 대략 3년간의 사역 끝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다. 그것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 대속하는 자로 오셨다(마 10:45). 그런데 지나치게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면 그 사명을 이루시기에 곤란해진다. 그것이 오히려 사명 완수를 방해할 것이다. 그래서 병 고친 소문마저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고(마 8:4),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마 16:20).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안 되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말한 그 그리스도이심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증거해준 것으로 자기 사명을 다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또한 세례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다. 그의 사명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며,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것까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살아있으면 안 되었다. 그 이전에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헤롯에게 목베임을 받은 것은 그의 사명이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맡을 것이다.
◆ 십자가의 은혜
(28)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세례요한보다도 크다고 하신다. 여기서 언급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동안 구약의 모든 인물들도 다 포함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곧 복음 시대에 예수님으로 비롯되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당신과 내가 세례요한보다 훨씬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세례요한 같은 분과 나 같은 자가 비교될 수 있을까? 그냥 덕담 정도로 간주하고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그런 빈말이나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세례요한보다 큰 자일 수 있을까? 인격 면이나 삶을 비교해볼 때, 세례요한의 발꿈치도 못 쫓아갈 듯하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큰 자라고 선언하신다. 일단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행 1:8)이라는 면에서 세례요한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맡은 자다. 세례요한은 하나님 아들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지만,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전하는 증인들이다. 이것은 비교 불가의 영광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고 거듭났으며,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세례요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을 받은 자다. 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총이 대단한 것이다. 주님, 이 은총의 크기를 알게 해주십시오.
금수저란 말이 있다. 개인적인 인격이나 능력으로 보면 한참 모자라지만, 오로지 아버지를 잘 만나서 호강을 누리게 된 사람이다. 우리가 그렇다. 시대를 잘 만나서 우리는 복음의 금수저가 된 셈이다. 구약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무리 잘났어도 세례요한을 넘어설 수 없었을 텐데, 이제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서 지극히 못난 자도 세례요한을 넘어섰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시대에 태어나고 우연히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나를 택하셨다는 말씀(엡 1:4)을 믿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과장된 덕담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가를 알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충분히 나를 아신 분이시며, 내 머리털까지 모두 세신 분이심을 믿게 되었다. 내가 이런 엄청난 은총을 받은 금수저라니!
소라껍데기 속에 숨어있는 소라처럼 열등감 속에 숨어있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극히 높으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그리면 주님의 말씀이 믿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영광스러운 은혜와 은총을 감사하자.
주님, 저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해주십시오.
38. 동조하지 않는 이 세대 사람들 (눅 7:31-35)
◆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를 한다고 피리를 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제는 반대로 장례 놀이를 하는 데도 관심이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놀이가 재미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함께 놀기 싫다는 의미다. 당시에 바리새인 중에 뛰어난 자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했다. 대단한 금식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존경한다. 바리새인들도 그것을 아니까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런 자랑의 힘이 그 힘든 것을 견디게 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기들보다 더 금식을 열심히 했다. 이것은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더니, 이제는 자기보다 더 금식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정상이 아니라고 판정했고, 심지어 '귀신 들렸다'고 말했다.
반대로 이번에는 예수님을 관찰해보니 도대체 금식하질 않으신다. 자기들처럼 일주일에 이틀은 못 해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금식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매일 꼬박꼬박 드시는가?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는 자, 포도주를 즐기는 자'로 판정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함으로써 그들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과연 세례요한은 귀신 들린 자고,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일까? 말도 안 된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판단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보다 잘난 사람은 깎아내리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은 멸시한다.
장터 아이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질까? 피리 불고 곡하는 자는 예수님과 세례요한, 꼼짝하지 않고 소가 닭 보듯 하는 아이들은 바로 이 세대 사람들이다. 애초에 함께할 마음도, 회개할 마음도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영광'이다. 바리새인이 옳을까, 예수님이 옳을까? 열매를 보면 안다. 35절의 말씀처럼 지혜는 그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삶을 통해 증명된다.
원죄의 본질이 무엇인가? 거짓말, 도둑질, 강도, 간음, 살인... 이런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본질이 아니라 단지 열매일 뿐이다. 진짜 원죄의 본질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다는 말은 모든 것을 판단하며 오로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표현함이다. 한마디로 교만과 건방짐의 극치다. 원죄의 본질을 주목할 때 우리는 자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자기 영광 추구라는 면에서 세리의 탐욕이나 바리새인의 자아도취는 뿌리가 똑같다. 떡잎 두 개가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으로 나왔을지라도 뿌리가 똑같음과 같다.
매일 SNS로 각종 좋은 말들이 전달된다. 그런데 전달하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심지어 그 글을 쓴 사람도 실천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직 하나, 모두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만이 공통이다. 성경을 영해 한답시고 이상하게 해석하는 사람이나, 이것저것 모조리 트집 잡고 판단하는 사람들 이면의 상당 부분이 자기 영광 추구가 도사리고 있다.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 영광 추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회개할 때, 그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했다(갈 2:19).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자기 자랑에서 죽었다는 의미다. 율법주의의 본질은 자기 의(義)이며, 자만이고, 자기 자랑이다. 반면에 복음의 중요한 핵심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엡 2:9).
오늘도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이것저것 계획하는가? 회개하자. 그럴싸한 종교적인 위선을 다 벗어버리고, 칭찬받기 위해서 이것저것 애쓰지 말자. 그런 인생에서 벗어나자.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자. 칭찬하는 소리 듣고 싶어서 여기 저기 귀를 기울였다가는 오히려 저주하는 소리에 상처받을 수 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전 7:21)
오, 주님, 저를 자기 자랑에서 건져주십시오. 저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해주십시오.
39. 향유를 부은 여인 – 사랑과 감격이 있는 신앙 (눅 7:36-50)
◆ 예수님의 본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만일 당신에게 동네에서 타락한 여자라고 알려진 자가 나를 존경한다며 가까이 다가오면 어떨까? 그것도 수많은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데... 대부분 이런 일을 당하면 분명히 움츠러들 것이다. 아무리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와도 그 여자의 대접보다는 타인의 평가가 더 신경 쓰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과 나는 관계가 없는 자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거나 심지어 단호히 거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이 여자의 대접을 받아주는 것이 분명히 평판에 도움이 안 됨을 아시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께는 타인의 평가가 가치 기준이 아니었다. 오직 진리만이 기준이셨다. 이는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다.
하나님은 온 천하가 대적할지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본받아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진리를 따라 행한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골똘한 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는지를 모르는 자다.
◆ 탕감을 많이 받은 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오늘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시몬이 아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대접한답시고 집으로 초청했지만, 발 씻을 물도, 입을 맞추지도 않은 것을 보면 귀한 손님을 대하는 예를 취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예수님을 초청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이 올라가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과 동급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소문난 탕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주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선지자임을 의심했다. 타인의 평가에 목숨을 거는 자신의 인생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시몬의 마음까지 갈파하시고 질문을 던지셨다. "오천만 원 빚진 자와, 오백만 원 빚진 자를 모두 탕감해주면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는가?“
"많이 탕감받은 자입니다."
"이 여자가 바로 그러한 자다."
타인의 평가와 수군댐을 개의치 않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나는 이 여자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 본문에도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의 말을 빌리자면 '죄인'이었다. 행실이 나쁜 여자였거나, 혹은 창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여자는 더는 과거의 죄인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자다. 살아야 할 이유를 얻은 자다. 예수님은 자기 인생을 바꾸신 분,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 자학하며 살던 자신을 진짜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게 해주신 분이시다.
이 여자의 눈물은 죄책감의 눈물일까, 감격의 눈물일까?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이 여자가 많은 죄를 용서받은 자임을 말씀하셨다. 즉 이 여자의 사랑과 눈물은 바로 그러한 용서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다. 주님께서 이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고 하심은 이제 막 용서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사함을 받았음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확신을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시다. 왜냐하면 47절에서 죄 사함을 받은 그 결과로 이런 사랑이 나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위축되는가? 이제 자책감보다 이 모든 것을 용서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자. 과거의 죄가 크게 느껴지는가? 내 죄보다 더 큰 십자가의 은총을 깊이 깨닫자. 그래서 더 열심히 감사하고 사랑하자. 차마 예수님께 다가가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며 그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 여인처럼 감사와 감격이 있는 신앙인이 되자.
죄책감으로 사는 것이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다. 비록 과거의 죄가 부끄럽지만,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감사와 감격으로 사는 것이 진짜 신앙인이다. 우리가 종종 성찬을 하면서 우는 이유는 죄책감에서가 아니라, 용서의 감격 때문이다.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복음이 얼마나 달콤한지. 전에 나는 잃어버린 자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찾은 바 되었고, 전에 나는 어둠 속에 있는 장님이었지만, 이제는 진리의 빛을 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