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열미 사람들
허 정 분
벌열미에 삶의 뿌리를 내린
먼 옛날부터 집성촌 씨족들은
산과 들과 내를 모양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며 피붙이로 끼고 살았다
도롱지 산과 거무래산 품안에
지명으로 생김새가 드러나는
노적골 승지골 도장골 범덕골 호랑이안방골
고사리골 병목골 쇠마루재 수리재 은더미고개며
등 굽고 낮은 골짝과 등성이를
병풍처럼 두른 채 살아갔다
졸졸 흐르는 도랑 건너 돌사닥다리 밭에도
옷담불 소따배기 텃골 자치배미 구목쟁이
사글피 망째 솟전말 봇뜰 찬우물 등
원색의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이름을 불러 줌으로
기를 북돋워 제 땅에 어울리는 곡식들을
밭고랑 가득 쏟아냈던 것이다
이십여 리 밖에서 발원한 작은 냇물 굽돌이도
광심이 모사리 작은 백인대 큰 백인대로 나눠 부르며
보를 막고 수로를 만들어
순하게 엎드려 있는 다랭이 논에도
젖줄 같은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그것뿐만 아니다 집안 항렬의 높낮이가
거북스러운 어머니들은
친정이 있는 향리의 이름을 따서
새울댁이니 다부리댁 두랭이댁 소목재댁 거무래댁
가래울댁 대댕이댁 부개울댁 품담댁 버리앗댁 등
자칫 잊을 고향을 앞세워
품위를 세우고 속내를 다독이며
동구 밖 수령이 몇 세기를 넘은
늙은 느티나무를 수호신처럼 아끼고 살았더니라
시제 날
-충렬공 할아버님 시제-
문중 시제 날이다
능 안 산허리 반듯한 유택에서
잘 익은 상달 날 받아 놓으신
영의정 할아버지
씨방 터트리듯 고만고만한 무덤
숱하게 끼고 자리에 앉으셨다
잘 차린 제수들이
봉분처럼 괴어져 상석에 오르고
묘 자리 주위로 넘실대는 향 내음
물씬 몇 세기의 태고가 흐른다
사방 십리 하사받은 사패지 금빛 보료 위
대대손손 머리 숙이는 공경 대견스러워
줄줄이 절 올리는 제관들 손끝마다
음복술을 권하시는 시조 할아버지
이끼 낀 신도비
청량한 햇살 한 무리가 혼자 읽는다
蔭德
-청백리 재상 구치관 할아버님-
육백여년 전 당신의 출중한 육신을 볼모로 조산왕조 4대 임금 섬겨 온 충정이 사방 동서남북 금표비 꽂듯 당신 사후死後에 벌열미 산하를 하사받으셨다는 능성구씨 9세조 할아버님 벼슬의 영욕을 초개처럼 여기신 청백리의 한평생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후손들이 무량한 세월건너 아직도 항렬에 따라 표표히 뼈를 세우는 집성촌에는 산 사람보다 저승으로 번지수를 옮겨간 조산들의 무덤이 더 많아 할아버님 당신의 묘역아래 줄줄이 감자알처럼 누웠습니다
오늘은 휘몰아치는 폭우가 수백 평 산허리를 내리치는 칠월칠석입니다 푸른 나무들이 미친 듯이 나부끼고 상석이 젖고 망부석이 젖고 둥근 봉분에서도 빗물이 흐릅니다 온몸을 흔들며 환호작약하는 개망초 군락처럼 잡종의 텃세가 기세등등한 놀랍고 희한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아직은 당신의 핏줄로 문패를 건 19대 손부孫婦 깊은 경배를 올립니다.
늘 굽어 살피시옵소서!
한 가계가
삼동三冬들어 잦아진 눈발들이 휩쓰는
벌열미 마을 곳곳에
올곧은 정신들이 기립해 있다
층층시하 푸른 영화를 누린
늙은 느티나무가 몇 백 년 묵은
제 속을 대 비우고도 정정하게
바람의 광기를 받아주는
능성구씨 집성촌 문중
조선조 일인지하 만인지상 一人之下萬人之上
자리에 오르셨던
영의정 충렬공 할아버지 신도비
청백리의 일생이 하사받은
이 마을 산하 그 큰 그늘에
송덕비 효자비 이름석자
골수에 새긴 살아있는 기개들이
찬 눈발 마다않고
검버섯 번진 좌선으로
세세손손 껴안은 유서 깊은 근본에
한 가계가
한 핏줄이
한 마을이
대나무 마디처럼 올곧은 정신에 끌려간다
벌열미 느티나무
쇠털 같은 날이 흐르고 흘러 신神이 된다
벌열미 느티나무
누대를 굽어 본 수백 년의 세월이
가을볕 정갈한 날 신목神木이 되셨다
한 마을의 시조 그 조상이 뿌리내린
수 아름드리 텅 빈 동공
소멸업장에 든 노거수
해마다 푸른 잎 경전 수십만 장 펼쳐놓고
부질없다, 부질없다, 염불을 외워도
검은 동맥 살비듬으로 타고 오르는 개미떼
노거수 그늘에 심신 놓은 늙은 인간사의
무심한 발길에 뭉개져도
지극정성 탁발한 시주로 공양을 올리는
지극정성에 해마다 다시 환생하는
저 풍찬노숙의 극락왕생이여,
큰댁 형님
큰댁 형님이 돌아가셨다
늙은 며느리가 울고 맏상제 인 장손이
문상객을 맞는 장례식장 영정아래서
건巾쓴 통덕랑공파 상주들에 섞여
나도 허리 굽혀 절을 올린다
한 가문의 뼈대를 세우느라
궂은 일이나 좋은 일 같이 나눈 집안들이
황천으로 향하는 이승의 경계에서
제 각각의 상념으로 곡哭을 받으시는
구십년 생애를 놓으신 형님
난리 통에 지아비 잃고 아들먼저 앞세운 슬픔에도
대문 앞 산수유나무 해마다
소문만복래笑問萬福來 만개한 향을 걸어놓아
온 마을이 잠기더니
사흘밤낮 벗어 논 신발 숫자처럼
끗발 터진 꽃자리에 슬픔보다 더 환한
꽃상여 타고 만장 휘날리며
두랭이댁 문패를 이름으로 달았던 대문을 돌아
불원 하늘 길을 가시는 큰댁 형님,
벌초
칠팔월 벌초시절 한반도가 들썩인다
산 구릉 봉분마다 예초기 날이 돌면
한집안 핏줄로 엉킨 자손들이 모였다
한식경 원을 돌아 등근 유택 다듬는다
가닥가닥 흩어진 풀 묘비에 핀 인동 꽃
사무친 그리움 풀어 빗질하듯 쓸어낸다
내리물림 전통이란 사람만의 흔적이다
금빛 보료 반석아래 혈손들이 엎드리면
바람이 혼령을 깨워 음복술을 마신다
벌열미 온달 아저씨
아저씨가 쓰러졌다 대로변 맨땅위에
병원 문턱 간 일 없는 무쇠 팔 무쇠다리
고희가 무색한 동심 어른 중에 어른인
시골농부 일생이야 일밖에 더 있으랴
호미 들면 밭일이고 낫을 들면 논일인데
잡초가 자랄 새 없는 논두렁과 밭두렁
한 생을 산다는 게 노동이며 구박이던
막걸리 한 병이면 하루 품을 공짜로 준
웃음을 더께로 얹어 물결치던 하회탈
생전 처음 문턱 밟은 병원의 의사에게
이까짓 거 넘어져도 술 먹으면 낫는다고
유유히 처방 전 내린 순진무구 그 어르신
나무 미라
헌집 한 채가 실려 왔다
1톤 트럭 여섯 대 분량이다
흙벽을 털어낸 마른 강골들이
얼기설기 동산을 이룬 앞마당
대들보 중방 서까래며 문틀
영락없이 백골만 남은 미라 납골당이다
*-단기 4285 임진년 4월 상량-
유독 큰 기둥 마룻대 한 면에
집을 세운 내력이 적혀있다
꼭 올해로 환갑이 된 나이다
푸른 날의 생목이 잘려져 수형을 사는 동안
무수히 대못을 친 천형의 유배지에선
아이들을 키우고 노파의 시신을 염습하고
슬픔과 기쁨을 교차하는
꽃무늬 벽지로 덧칠을 하기도 했지만
환갑이 되고 나서야 사각의 감옥에서 해방된
뻣뻣하게 마른 주검이
다비식을 기다리고 있다
고운 뼛가루 속 못의 사리가
이승의 마지막 유물처럼
자석에 달라붙는 형장
헌 감옥 한 채가 소실되었다
* 열미리 구정서씨 옛집
눈발
멀리 보이는 산이 사라졌다
하늘과 지상의 경계가 모호한 한낮
사방팔방 흩날리는 필경 외로운 생들의
눈물이거나 한숨이었을 것들이 모여
희디흰 스크럼을 짠다
저 무진장의 복병을 거느린
불투명한 벌열미 시계視界속으로
통증 없이 발 디딜 자 누구인가
차디찬 허공중에 투신한
순결한 저 언약은
최루성 강한 시한폭탄이다
펑펑 날리는 피편에 온 몸을 던진 새떼
전투병처럼 외줄의 보초를 서는데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늙은 노병의
상심이 깊어가는 마을 어귀
끝없이 이어진 차량들이
돌아오지 않은 식솔들의 불안까지 싣고
느릿느릿 패잔병처럼 끌려 간다
겨울산에 오르다
명(命)줄 늘이는 비법을 산에서 전수받는지
심심찮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벌열미 마을을 품에 안은 도롱지 산줄기가
입은 옷 다 벗은 붉은 살을 내준다
닳고 닳은 발자국들이 무수히 살의 파편을 찍으며
걷는 산길 양옆의 할벗은 나무군락들이
세상 인간사를 그대로 빼닮았다
저, 휘어지고 상처 난 가지들을 지닌 채
묵묵히 봄날의 영화를 기다리는
나무들의 고독은 얼마나 단단한 결속이냐
나이테 하나 얹기 위해 맨몸으로 선
무서운 집념은 얼마나 견고한 정신이냐
구불구불 산비탈을 도는 눈앞에서
산마루의 찬바람이 찢어진다
파편을 줍다
누가 쓰던 그릇일까
깨지고 깨져 밑바탕 세운 테두리만 남아있는
사기파편 한 무더기
가쁜 숨 서너 번 고르며 오른
마을 뒷산 *사글피 고봉 분지에서
무한한 추측만 반추하는 사금파리의
옛 주인 그리워라
절터였을까 몰래 스며든 젊은 노비부부였을까
그도 아니면 대역죄인의 누명을 쓰고
숨어살던 반상의 후예였을까
수백 년 전 숨을 거둔
한마을의 조상님 산소 몇 기에
굴착기가 묏등을 올리는
드넓은 사초 묘 터에서 발굴된
질화로의 테두리 기왓장 쪼가리
용도를 알 수 없는 두꺼운 시금파리가
여기저기 빛 부신 햇살에 반짝이는데
뉘신지 간곳없는 주인이여
세월의 허망한 간극이여
첫댓글 선생님 벌열미 느티나무 지금은 없지요 ?
느티나무가 왜 없어요?
맨날 다니면서 눈은 어디다 두고~~~~ㅜㅜ
잘 계셔요.
좋아요
시인이라면 내가 사는 마을의 내력을 몇 편쯤은 시로 써볼 일인데 생각만 하고 있네요
어제 사진임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