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진실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이며, 의식연구를 통해서 확인가능하다. 그렇구나!! 세살이전에는 망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마치 환한 불이 켜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void에서 개인적 존재에 대한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앎이 일어났다. 저절로, 달갑지 않게, 언어를 통하지 않고 주관적 상태의 경험적 기초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앎이 왔다. 존재와 표면상으로 대립하는 것인 비존재의 가설적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이렇듯 세살적에 존재대 궁극적 실상으로서의 비존재라는 이원성, 전부임으로서의 궁극적 실상vs무라는 양극성과의 대면이 있었다. 그 경험은 전적으로 비언어적으로 압도적으로 그리고 순전히 대결적이었다. 어린시절의 평범한 활동은 지루했고, 철학에서 피난처를 구했으며, 생활방식은 내성적으로 내향적이었다. 학업의 성취는 용이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를 비롯하여 정신적 동반자가 된 마음들을 열렬히 탐독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고, 대성당과 고전 종교음악에 심취하여 어느 대성당의 합창단에서 보이 스프라노로서 음악과 목소리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어느날 늦게 어두워진 저녁에 눈보라속에서 신문을 배달하다가 영하 30도의 바람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었다. 눈더미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쉬고 있는데, 그 속에서 마음이 녹아내리고 침묵하게 된 어떤 의식상태가 졀묘하게 출현했다. 영원하고 부드럽지만 무한히 강한 현존이 스며들었고, 그 압도적인 사랑이 정신화를 대체했다. 시간은 멈췄고, 영원과의 하나임에 대한 앎이 사적인 자기의 모든 생각이나 감각을 대체했다. 현존의 나-임(I-NESS)이 전부임으로서 그 자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모든 우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즉 말할수 없고, 보이지 않고, 모든 것에 스며있고, 설명할 수 없으며, 이름을 넘어선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죽음에 대한 온갖 두려움이 사라졌고, 삶은 자연발생적으로 저절로 지속되었다. 이 상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소해정에서 위험한 임무를 맡았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덕분에 임무수행이 용이했다. 지상에서의 삶의 요구들로 인해 주의와 관여가 불가피했다. 지성에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은 덕분에 학업성취와 의대졸업이 가능했고,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을 공부할 수 있었다. 뒤이어 뉴욕에서 대규모 정신병원을 세웠다. 25년간의 고된 일끝에 진실과 지복의 상태로서 신의 현존으로 되돌아가려는 열망이 깊은 명상의 재개로 인도했다. 어느날 숲속을 걷던 도중 청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고 전체가 육중하게 드러났다. 이는 신이 저런 상태를 허락할 수 있었다는 엄청난 충격과 경악의 감정으로 귀결되었다. 마음은 신을 비난했고, 그 다음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타는 듯한 의문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신이 없다면 존재의 진실의 핵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교는 신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피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실상의 드러남을 잃어버린데 대한 절망이 있었다. 이는 깊은 명상으로 그리고 진실 자체에 대한 치열한 내적탐구로 이어졌고, 결국은 심각한 실존적 우울과 절망으로 귀결되었다. 부동의 목적을 가지고 영혼의 심연을 탐험하는 동안, 깊은 명상상태는 지독한 절망의 영역들로,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이 빛과 차단된 영원한 고통의무시간적 차원들 속의 지옥의 심연으로 인도했다. 심연에는 바닥이 없으며, 사람은 여기에 들어온 너희들 모두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영원한 고립에 대한 공포가 뒤따랐는데, 거기에는 그것이 끝나리라는 희망, 사멸에 대한 구원조차 없었다. 왜나햐면 그곳에는 궁극적 도피로서의 죽음의 가능성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희망 그 자체의 내맡김에 따랐다. 그것은 영원한 공포로 대체되었다. 그 다음에 내면에서 침묵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신이시여 계시다면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망각으로 이어졌고, 그 다음에 마음은 침묵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마침내 앎이 돌아왔지만, 세계의 겉모습은 이미 바뀌었으며 극적으로 변형되었다. 이제 그것은 침묵하는 통일된 하나임이었고, 전존재의 신성을 내뿜는 찬란함속에서 장려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망아 있는 단 하나의 부조화스러운 불일치를 확대시켰는데, 그것은 생명과 존재의 핵심으로서의 사적인 자기감각의 지속이었다. 그것 또한 현존에 내맡겨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다음에 진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로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러한 공포와 함께 선불교의 어떤 가르침에 대한 인식이 왔는데, 그것은 이러했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곧장 앞으로 나아가라. 모든 두려움은 환상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자기 정체를 버리고 내맡길 필요성은 강력한 인식이었다. 그 다음에 살려는 의지, 생명 그 자체의 표면적 핵심을 신에게 내맡기자 잠시 무시무시한 고통의 순간이 그 다음에 죽음 그 자체의 경험이 뒤따랐다. 그것은 사람이 갑자기 자유로워진 채 거기 누워있는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이전에 여러차례 일어났던 육체의 죽음과는 달랐다. 아니 그것은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때이다. 그 죽음의 최종성은 압도적이었다. 마침에 고통이 그치고 광채와 장려함, 무한 멎어있음,침묵, 심원한 무한한 사랑의 평화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마음은 멍해진채 경외감에 압도되었다. 그 다음에 마음은 침묵하게 되었고 그리고 사라졌다. 이후부터는 오직 현존만이 압도했고, 전부가 개인적 의지나 동기부여없이 자동적으로 출현했다. 그 상태가 사적인 자기를 영구히 대체했다. 침묵하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현존에 의해 전부임의 전체성이 이전의 모든 의식상태, 혹은 사적인 자기나 나에 대한 추정을 대체한다. 흥미롭게도 육체는 동기부여없이 저절로 움직였고 자율적인 활동을 계속 수행했는데, 그것은 생각의 생각하는 사람도, 계획의 계획하는 사람도, 행동의 행동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재성이 현실로 그 자체를 표현함에 따라 전부가 그 자체의 본질에서 일어났다. 이 조건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나타난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삶은 저절로 펼쳐졌다. 그 상태는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30년 이상 그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상태는 결국 명상과 고독과 거기에 적응하는 세월을 위해 보통의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시골오지로 옮겨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조건안에서 이해는 저절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생각을 동반하지 않았다. 이전에 소승불교를 따랐던 나는 불성의 궁극적 실상이 무 또는 공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공 자체는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오류였지만, 이번 생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 그것은 경험적 실상으로 반복되었다. 부정의 길을 지속적으로 추구할때 공의 상태로 되돌아오곤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무한하며, 공간 시간 혹은 묘사를 넘어서 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속속들이 스며있으며, 모든 생각이나 의지작용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그 표면상의 비선형적 전체성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적 눈더미 속에서 경험했던 결정적 성질, 즉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움, 고향에 돌아온 느낌, 친숙함, 전부를 포함하는 사랑으로서 실상의 전부임, 그 본질에 대한 인지가 부재하다는 앎이 있었다. 이 사랑의 성질은 기쁨이나 황홀경을 넘어서 있으며 평화상태의 본원적인 것이다. 놀랍게도 공은 궁극적 상태와 매우 흡사한데, 단 하나 다른 것은 신성의 본질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랑없는 공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텅빈 공간과 같다. 그것을 신성으로 확인해주는 성질이 결여된 공은 한계이다. 이는 표면적 대립들의 최후의 큰양극성/이원성으로 나타났고, 이것의 해결은 그 속에서 창조가 솟아나는 전부임과 하나임으로 참나의 각성을 허락해주었다. 의식 연구의 발달 고독의 세월뒤에 다시한번 세상을 포함하려는 꿈틀거림이 있었다. 사람들이 질문을 던져왔고, 그래서 나눔/가르침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보, 영감, 명상에 관한 교육을 제공하는 전통적 양식에 의하지 않고서는 내적 상태를 설명하거나 길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존 다이어몬드 박사가 이끄는 운동역학 강의에 초대받았다. 강의 중에 교사는 운동역학적 반응을 국소적 현상으로 맥락화했지만, 이 의식상태는 그것을 보편적 의식 그자체의 비개인적 반응으로 목격했다. 의식의 장이 어떤 자극의 에너지 강도 수준에 걸맞게 반응할 수 있는 무한한, 움직임이 없는 정전기장과 같다는 것은 명백했다. 진실하거나 생명을 지지하는 것이 긍정적 반응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쉽사리 증명되었다. 대조적으로 거짓이나 생명에 해로운 에너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은 근육의 약화였다. 그 다음에는 반응이 사실상 "예 vs 아니오"가 아니라 "예 혹은 예아님"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게 되었다. 연구를 통해 운동역학적 반응이 어떤 자극의 에너지 수준과 일치하는 기울기를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응들의 스펙트럼은 자극의 성질에 걸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시험적으로 임의적인 수학적 단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의식 측정연구라는 경험적 임상과학의 발달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형광등, 농약, 인공감미료가 모든 사람을 약하게 만든 반면, 기적수업 공부모임 회원들이 약 75과까지 진도를 나간뒤부터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연히 관찰하게 된 일이었다. 이렇듯 운동역학적 반응은 의식수준과 관계가 있었다. 연구와 관찰을 통해 모든 생명이 그 모든 표현속에 약에서 강에 이르는 내재적 에너지 수준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스펙트럼은 측정가능한 수치적 단계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그 모든 생명의 수치적 지시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숫자가 요구됨으로 인해 이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 문제는 1에서 1000까지의 범위를 갖는 임의적 단계의 실용적 이용을 가능케한 로그를 활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측정수준 1은 이행성에서 최초로 식별이 가능한 생명에너지(박테리아)를 반영했으며, 지구와 동물계를 통틀어 지상의 궁극적 가능성으로서 1000수준까지 이어졌다' 수준 1000은 모든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와 같은 소수의 위대한 화신들만이 도달한 의식수준임이 판명되었다. 에너지-스펙트럼 단계는 동물이나 인간 생명의 모든 가능성들의 의식수준 측정을 숫자로 반영했다. 이 단계를 이용함으로써 의식의 진화를 생명으로서 최초의 출현에서 깨달음의 상태자체로서의 궁극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수천의 개인, 장소, 개념, 저작, 신념체계, 감정, 지적수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 모든 영적상태, 종교, 영적 스승, 영적 길, 성인, 현인들의 의식수준을 측정하는 연구 및 적용의 세월이 뒤따랐다. 어떤 종교에서든 신비주의자들(즉 참나를 각성한)이 의식척도상에서 가장 높게 측정되었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다. 측정 단계상 600은 500대 후반으로 측정되며, 수많은 영적 스승과 이름난 성인을 포함하는 무조건적인 성스러운 상태를 비이원성을 깨달은 상태와 구별지은 수준이었다. 500수준은 주지화에서 경험적 주관성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리켰고, 사랑의 다양한 수준을 나타냈다. 또한 세계 인구의 4%만이 측정 수준 500에 도달하고, 불과 세계 인구의 0.4%만이 540 무조건적 사랑에 도달한다는 것도 주목할만 했다. 의식수준 600은 지극히 드물었다. 400대의 수준은 지성, 이성, 논리, 과학 그리고 뉴턴적 패러다임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교육받은 구도자들에게 400대는 디딤돌이지만, 종종 큰 장벽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아이작 뉴턴 경이 모두 499로 측정되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200대와 300대는 온전성, 선의, 도덕성 그리고 의도의 전반적 선함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 의식수준 200이 결정적이라는 중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실과 거짓을 가르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200이상의 수준은 힘을 나타내고, 200이하의 수준은 낮은 힘을 나타낸다. 200이하의 수준은 명백한 이기주의로 전락하는데, 자부심, 욕망, 탐욕, 분노, 증오, 죄책감, 수치심, 무감정의 동물적 본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측정수준들은 또한 영적 통찰능력, 감정성, 세계와 자기에 대한 지각과도 상관있다. 측정된 단계 및 그 상호관련들이 지금 널리 알려진 의식지도의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에고/마음은 동물의식으로 시작된 이원적 구조인데, 장구한 세월뒤에 그것은 원인을 거쳐 호모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진화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오래된 동물 뇌에 전전두 피질이 추가되어 선형적, 개념적 사고능력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마음은 지금 에고라고 불리는 것을 통한 동물 본능의 표현을 위한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마음의 구조에 대한 고찰은 마음의 기능이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비할만 하고, 소프트웨어는 상속받은 영향력들은 물론 사회에 의한 프로그래밍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류의 기본적 무구함은 인간 정신이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지 못하는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 정신에는 사전동의, 식별, 혹은 의지의 선택지없이 설치된 모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기 위해 그 하드웨어를 이용하는 것을 막는 내재적 방어장치가 없다. 소프트웨어의 본성 및 저변에 있는 하드웨어로 인해, 마음의 일차적 환상은 의식/앎의 근원으로서의 무한한 참나에서 분리된 존재로서의 사적인 나/에고/자기의 기본적 이원성으로 의식을 분화시킨 것이다. 이 환상적 오류에서 에고는 맥락이 아닌 내용과 동일시하고 따라서 동물적 동기의 부침, 감정, 결함있는 사고작용에 지배된다. 측정된 의식수준은 실상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지각의 대치와 왜곡으로, 그리고 현상을 본질로 오인함으로 인해 손상된 정도를 가리킨다. 또한 대단히 흥미로웠던 발견은 일체의 행위, 감정, 혹은 생각이 전부를 둘러싸는 의식의 맥락의 장속에 시공을 초월하여 영구적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건이든, 그것이 생각이든, 감정이든 혹은 행위든 의식측정기법과 같은 적절한 도구에 의해 항상 확인하고 되불러 올 수 있다. 의식의 장들은 에너지 진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패턴은 식별가능한 궤적을 남기며 주관성으로 경험된다. 진동하는 궤적의 패턴속에서 의지적 행위의 카르마적 귀결에 고유한 형상이 일어난다. 에고의 이원적 구조는 선형적 위치성의 핵심요소에서 비롯된다. 사적인 자기의 집중된 이미지가 작인으로서 즉 생각의 생각하는 사람, 행동의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죄책감과 자책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자기에 대한 신념으로 출현한다. 일부 성질들은 거부되며 그래서 동물적 본능의 잔재인 감정과 함께 무의식속에 묻히게 된다. 의식수준 200으로 진화한 뒤에야, 기능적으로 영적 앎, 의도, 카르마적 책임의 능력이 있는 에테르 뇌가 출현한다. 순진하게 개인의 의식은 자기를 육체, 마음,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 다음에는 행운이나 카르마적 공덕의 결과로서 영적 진실을 듣고 영감을 얻게 되며, 그리고 더 큰 행운이 따르면 영적 스승을 만난다. 스승의 오라의 높은 진동주파수는 영적 제자에게서 발생기의 에테르 상위영체들을 활성화시킨다. 높은 영적 존재들에게 있어 에테르뇌의 활성화는 쿤달리니, 혹은 영적 에너지가 상승한 결과인데 이는 상위영체들과 에테르뇌의 형성으로 귀착될뿐 아니라, 실제로 인간 뇌의 생리를 변화시켜, 이제는 들어오는 자극을 다르게 전달한다. 사람은 좀더 우뇌적으로된다. 의식수준 200이하에서 들어오는 자극은 감정중추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반면, 영적 지향이 있는 사람에게서 빠른 경로는 자극에서 전전두 피질로 그 다음에 감정중추로 간다. 크게 진화한 영적인 사람들에게서 들어오는 정보는 에테르 전전두피질을 통해 처리된 다음 유도에 의해 뇌의 물질적 신경회로로 간다. 의식수준 200이하에서는 전전두 피질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전달이 감정중추로 가는 직접적 경로에 비해 보다 느리기 때문에 동물 반응성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200이하에서 마음은 투쟁-도주 반응이나 스트레스 반응으로 설정되는데, 이는 경락을 통한 에너지 흐름을 붕괴시키며 부정적 운동역학 반응으로 반영된다. 200이상에서 처리과정은 보다 큰 내적평화 및 조화의 감정으로 귀결되며, 뇌 신경전달물질은 아드레날린보다는 엔돌핀을 방출한다. 6장의 뇌생리 참조 활성화와 함께 영적 에너지는 이제 생존과 성욕의 기저 차크라에서 나와 차크라계를 따라, 감정성의 어두운 면인 비장을 거쳐 성취, 공격적 획득, 그리고 욕구를 활성화시키는 태양신경총을 통과하여 위로 올라간다. 영적 의도성 및 의지의 동의와 더불어 영적 노력은 그 다음에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반영되는 의식수준 500에서의 가슴의 우세한 에너지 축적으로 인도한다. 그 이상의 정화는 540으로 측정되는 무조건적 사랑으로 인도한다. 500대 후반은 기쁨과 황홀경을 나타내며, 평화의 수준이자 붓디 에테르 영체의 제삼의 눈(통찰력)의 고전적 개안인 600으로 이끈다. - 인류의 의식주준은 수천년동안 느리게 진화했다. 사람과의 모든 발달계통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루시는 약 300만년 전에 측정수준 70으로 출현. - 네안데르탈인 75 - 직립원인 80 - 60만년 전에 현대인 호모사피엔스 이달투 85 - 붓다의 탄생당시 전 인류의 의식수준은 90 - 예수그리스도 탄생시에는 100에 도달 지난 500~600년 동안 인류의 의식수준은 190에 머무르다가, 1980년대 후반 조화로운 수렴의 때와 동시에 205로 눈부신 도약했다. 에고의 본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에고의 모든 위치성과 결과적 이원성들이 내맡겨질 때 에고는 초월되고 마침내 붕괴하며 사라진다. 에고는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며, 초월적 실상이 에고를 대체한다. 구름이 사라질때 태양이 빛나듯이, 참나의 실상은 드러남, 각성 그리고 깨달음으로서 저절로 빛을 발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전의 의식상태를 대체하는 조건이다. 깨달음의 발생은 전 시대와 문화에 걸쳐 본성상 동일하다고 주관적으로 보고되어 왔으며, 모든 각성한 신비주위자와 화신들은 그것이 심오하며 적절한 언어화를 넘어서 있다는데 동의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 에고에 대한 최후의 도전인데, 도전받는 것은 에고가 정체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근원이자 소재라는 중심핵을 이루는 신념이다. 그 지점에서 사람은 온전히 혼자이며 모든 보호나 위안이 되는 버팀목, 신념체계 혹은 기억조차 박탈당한 상태이다. 다만 사람의 오라안에서 깨달은 스승의 의식의 고주파 진동을 그 암호화된 인식과 더불어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걸음은 되돌아 오는 것이 불가능한 최종성으로 직관되고 그래서 그 최종성의 절대성에 대한 경악이 있다. 그 다음에 "무슨일이 있어도 곧장 앞으로 가라. 모든 두려움은 환상이다"라는 인식이 떠오른다. 영적 의지로써 이 마지막 걸음을 내디딜때 죽음이 경험되는데, 그러나 격렬한 고통은 아주 잠깐 지속될 뿐이다. 에고의 죽음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실제의 죽음이며, 이에 반해 육체를 떠나는 이전의 죽음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했다. 죽음의 경험은 궁극적 실상의 드러남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종결되고, 그 다음에는 경외심조차 사라지며 참나는 존재대 비존재, 전부임대 무, 편재대 공의 이원성을 초월한다. 있음과 존재조차도 무의미한 정신작용으로 보인다. 무한한 사랑의 상태는 모든 언어의 명사 ,형용사, 동사를 녹이는데, 왜냐하면 지고는 이름과 분류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평화는 주관성이다. 흥미롭게도 육체는 그 어떤 내적 행위자없이도 저절로 기능을 계속한다. 행위는 의지작용이나 의도가 없어도 저절로 일어난다. 잠재성이 창조의 현상으로서의 진화의 출현으로 나타나고, 이로써 나타나지 않은 것이 나타난 것이 된다는 각성이 있다. 실상은 그다음에 단순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맥락으로 각성된다. 생명은 영원한 의식의 표현이고 따라서 실제의 진짜 죽음은 가능성조차 없는데, 이는 보다 익숙한 에너지와 물질의 보존법칙에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모두가 날때부터 이미 측정가능한 의식수준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카르마적 유산을 반영한다. 지상에서의 삶은 다른 차원의 의식수준들에 대해 중간역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모두가 저 의식의 진화하는 여정에 있으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외침에 의한 각성에서 연민이 태어난다. 깨달음은 모든 이원적 환상을 진실에 내맡긴 결과다. 모든 고통은 에고의 위치성들이 해소되면서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빛을 발하고 계심에 대해 주 하느님을 찬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