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대인기구가 1933년 3월 24일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독일과 유대인은 그때부터 이미 전쟁 상태였다. 유대인의 선전을 받아쓴 역사책들은 이 점을 도외시하고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유대인을 핍박한 것처럼 서술하면서 히틀러를 광적인 인종주의자로 몰고 갔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선전포고 기사
제3제국의 유대인 정책은 기본이 해외 이주였고 많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대인의 해외 이주가 불가능하게 되자 1940년부터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구금하기 시작했다. 독일로서는 스스로 독일의 적이라고 선언한 유대인들의 적대행위가 우려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에 전쟁 중인 독일의 후방에서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전력이 있었다. 악명이 자자한 강제수용소 문제는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해방 당시 모습
현재 모습
영화 쉰들러 리스트 - 가스실 앞 대기 행렬
영화 쉰들러 리스트 - 가스실에서 공포에 질린 모습
영화 쉰들러 리스트 - 분사기에서 쏟아지는 독가스
영화 '아우슈비츠 온 마이 마인드' - 가스실과 소각장
수용소에서 안내하는 가스실과 소각장 (필자 직접 촬영)
영화 속의 건물에 비해 규모가 초라하다
가스실 (필자 직접 촬영)
살인가스실이라면 가스분사기가 있어야 하고, 사망시 생기는 배설물 등을 물청소하기 위해 수도꼭지와 배수구도 있어야 한다. 내가 현장을 확인한 바로는 아무 시설도 없는 창고로 면적은 10평이 안 된다. 보다시피 문짝도 엉성해서 독가스 누출을 막을 수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밖에 있는 독일군도 독가스에 즉사한다.
시체 소각로 (필자 직접 촬영)
규모가 작아 대량 처리는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태인들 가운데 일할 수 없는 자들은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고 일할 수 있는 자들은 죽도록 혹사당하다 죽었다고 알려져 왔다. 특히 노약자나 어린이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즉결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4년 4월 5일자로 SS 총감 히믈러에게 제출된 보고서는 아우슈비츠 수감자 67,000명 가운데 18,000명이 입원 중이거나 노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보고하고 있다. 비르케나우에 대해서는 여성이 대부분인 36,000명의 수감자 중에 일할 수 없는 인원이 15,000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일할 수 없는 자들이 처형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리처드 하우드 - 정말 600만이 죽었나?]
아우슈비츠 항공 사진 1944. 5. 31
오늘날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원래 있던 시설의 일부만 남아있고 마주하고 있던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흔적만 남아 있다. 아우슈비츠가 곧 처형될 사람을 수용하는 시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훌륭하다. 한국전쟁 중에 유엔군이 운영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전시의 수용소로는 거제도 수용소가 정상일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자 숙소 (필자 직접 촬영)
거제도 수용소 취사장
현재 모습
아우슈비츠 수용소 취사장 (필자 직접 촬영)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부근 공단에 인력을 공급하는 강제노동수용소였다.
1989년 소련 정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당국이 작성한 69,000건의 사망증명서가 담겨있는 46권의 사망자 명부를 소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소련 정부는 발표 직후 국제적십자사가 69,000건의 사망증명서를 복사하도록 허락했다. 국제적십자사는 이 명단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미국 적십자사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악의적인 선전과는 달리 수용소 당국은 사망한 수감자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개인별 사망증명서는 성명, 직업, 종교, 생년월일, 출생지, 수감 전 주소, 부모의 이름, 사망 시각, 사망 원인 등을 기록하고 있다. 수용소 당국이 철수 전 이 문서를 파기하려 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명부는 1941년~1943년까지의 기록이며 1944년 이후의 기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국제적십자사는 실종된 사망자 명부가 구소련의 3,250개소에 달하는 문서보관소들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현재 이 명부의 원본은 아우슈비츠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나 박물관은 아직까지 사망자 명부 열람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800장의 사망증명서 사본은 노동이 불가능한 노인, 병자, 어린이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즉결 처형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한다. 아래에 4건의 유대인 사망증명서를 샘플로 예시한다.
Chaim Richter : 세일즈맨, 향년 81세, 1942년 3월 1일 사망, 사망원인 – 老死
Josef Hoffmann ; 도축업자, 향년 89세, 1942년 6월 22일 사망, 사망원인 – 老死
Abraham Stieber ; 세일즈맨, 향년 79세, 1942년 7월 2일 사망, 사망원인 – 老死
Emil Kaufmann ; 변호사, 향년 78세, 1943년 2월 15일 사망, 사망원인 – 老死
[리처드 하우드 - 정말 600만이 죽었나?]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할 당시 수용소에는 7천 명 정도의 수감자가 남아있었는데 어린이와 노인도 많았다. 아래 사진은 해방 당일의 모습으로 심하게 굶주린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뒤편에 수녀가 보인다.
노인도 많았다
학살의 증거를 찾지 못한 유대인들은 독일이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아무런 문서도 작성하지 않았다고 선전해왔다.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했다면 무엇 하러 사망증명서를 작성했을까? 폴란드는 유대인과 공범이니까 그렇다 치고 원본을 복사해간 국제적십자사는 왜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보나마나 유대인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6만 9천 건의 사망증명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대인의 선전은 설 자리를 잃었다. 진실은 결국 밝혀질 것이다.
첫댓글 중립적이어야 할 국제적십자도
유태인의 압력으로 정당하고 공정한 할동을 하지 않은 증거가 밝혀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