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제용어
구마(舊磨)
정의
18세기 후반 이후 함경북도 지역에서 관의 각종 물품 구입 비용을 곡식으로 환산해 정하고 백성에게 징수한 것.
내용
함경북도 지역의 길주로부터 명천·경성·부령 등 경흥에 이르는 10개 고을에는 화폐 유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의 각종 물품은 항상 시가(時價)에 따라 임시로 사서 써 왔는데, 물품을 구입하는 비용을 곡식으로 환산하여 정하고 신마라고 하였다. 신마의 법은 새로 수령이 부임하면 1년간 관아에 소용되는 모든 물품을 계산하고 그 비용을 곡식으로 환산한 다음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것이었다. 관청의 용도는 먼저 창고에 보관된 곡물 중 전미(田米)를 마음대로 가져다 쓰고는 곧바로 ‘신마’라는 명목으로 곡식으로 환산한 액수를 호조에서 관리하는 환곡에 옮겨서 기록하여 징수하였다. 이 액수를 연말까지 다 받지 못한 것은 다시 다음 해에 신마에 보태어 기록하고 ‘구마(舊磨)’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마라는 명목으로 징수하다 보면 호조의 환곡과 지방관이 비용을 위하여 백성에게 징수하는 잡세(雜稅)가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 또 호조 환곡은 전미이고, 잡세 명목의 신마는 잡곡이기 때문에 전미와 잡곡을 환산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곡물을 환산할 때에 호식(戶式)과 토식(土式)을 사용하고 있었다. 호식은 바로 호조의 원작곡(元作穀)의 식례(式例)인데, 조·보리는 2석 7두 5승(升), 기장·귀보리·메밀은 3석 11두 영(零)을 각각 전미(田米) 1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 토식은 바로 각 고을 본토의 법으로, 전미 1석 대신 조·보리는 각각 2석이고 기장·귀보리·메밀은 3석인 것이었다. 나누어 주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을 막론하고 순전히 토식을 사용하고, 원회곡(元會穀)의 전미를 계산하여 감할 때에는 호식 13두로 계산하여 감하므로 쌀은 1석마다 3두가 남고 피곡(皮穀)은 11두 2승 영이 남았다.
환곡은 농작 상황과 받은 사람의 사정에 따라 징수하지 못한 액수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징수하지 못한 부분을 신마 혹은 구마의 명목으로 백성에게 징수하였기 때문에 민의 입장에서는 그해에 내야 하는 액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지방관은 임기가 끝나 돌아갈 때에 빚이 있으면 일체를 이방(吏房) 아전에게 위임하여 구마 중 더 기록해 장수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용례
所謂作穀云者 北十州以無錢貨 故官雜種 常以時價 臨時買用 自夫數十年來 一切作穀 名曰新磨 其法 新官到任 卽使統計一年所用 全數作穀 分俵於民 而官用則先就倉穀中田米 惟意取用 乃以新磨作穀條 移錄元還中徵捧 及夫歲終而未及盡納者 更爲添錄於明年新磨 名曰舊磨[『순조실록』 20년 7월 23일]
구환(舊還)
정의
왕조 정부의 허락을 얻어 징수가 연기된 환곡.
개설
환곡은 기근이나 농민의 파산으로 인해 항상 징수하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었다.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였다. 17세기 후반에 환곡은 분급된 시기를 기준으로 당해 연도에 분급한 신환(新還)과 받아들이지 못한 묵은 환곡인 구환(舊還)으로 구분되었다. 구환은 독촉해도 거두어들일 가능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환곡을 적정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신환만이 아니라 구환도 일부를 징수하려고 노력하였고, 일부는 탕감하기도 하였다. 구환을 징수하기 위해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양을 기준으로 지방관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18세기 중엽까지 징수하지 못한 미봉곡은 아직 고질적인 폐단에 이르지는 않았다. 1776년(영조 52) 현재 전국의 미봉액은 1,290,000여 석으로 전체 환곡 액수의 약 15%의 미봉률을 기록하였다. 18세기 말에는 당해 연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정퇴(停退), 2년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여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체화하여 구별하였다.
19세기 전반에는 1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잉정(仍停), 3년 이상 징수하지 못한 것은 구환으로 세분하여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다. 이런 정퇴·잉정·구환은 왕조 정부에서 징수의 연기를 허가한 것이었으나, 마땅히 징수해야 할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읍미봉(邑未捧)이라 하였으며, 이는 구환에 포함되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구환에 대한 탕감이 종종 이루어졌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구환의 탕감을 억제하였다. 또한 19세기의 환곡 운영은 18세기와는 달리 미징수곡에 대한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왕조 정부에서 징수를 연기해 주는 구환의 액수를 감소시켰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명목상 환곡의 총액을 유지할 뿐 실제 각 지역에서는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다수 존재하였다. 또한 19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많은 양의 환곡이 진휼의 재원으로 소비되어 환곡은 감축되었다. 징수하지 못한 환곡은 증가하여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虛留穀)의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1862년(철종 13)의 환곡 상황은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이 환곡 총액의 절반을 넘어 54%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런 포흠곡을 무리하게 징수하려는 시도는 결국 농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환곡은 그 기능으로 인해 갚지 못하는 환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갚지 못한 환곡은 징수를 연기해 주거나 탕감해 주어야만 했다. 환곡은 분급된 시기를 기준으로 당해 연도에 분급한 신환과 받아들이지 못한 묵은 환곡인 구환으로 구분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당해 연도 환곡은 신환, 해마다 독촉해도 거두어들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구환으로 구분되었다. 환곡을 적정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환과 구환의 징수가 매우 중요하였다. 17세기 말까지도 구환과 신환의 환수 비율을 통하여 환곡의 총량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에는 미징수 곡물의 양과 농민들의 부담 능력도 고려되었다. 또한 미징수곡의 양을 기준으로 지방관을 처벌할 규정을 마련하여 징수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구환은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탕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 및 변천
1759년(영조 35)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여지도서』 환곡 항목에는 경기도 일부 지역의 미봉액수가 기재되어 있으며, 환곡을 징수하지 못한 시점이 4년 이내로 나타나 있다. 이는 이 시기까지 아직 고질적인 미봉의 폐단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전국적인 미봉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는 『곡부합록』으로, 1776년 현재 전국의 미봉액은 1,290,000여 석으로 약 15%의 미봉률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17세기 후반의 신환과 구환의 이분법적인 구분과는 달리 징수하지 못한 미봉을 정퇴·구환 등으로 세분하였다. 당해 연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부상에서 정퇴와 구환의 항목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퇴와 구환 규정을 다시 명확히 하고, 정퇴곡은 바로 그해에 분급한 환곡과 동일하게 징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규정은 19세기 전반의 『만기요람』에서 더욱 세분되었다. 1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정퇴, 2년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잉정(仍停), 3년 이상 징수하지 못한 것은 구환으로 세분되어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다. 이런 정퇴·잉정·구환은 정부에서 징수를 연기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으나, 마땅히 징수해야 할 곡식을 징수하지 못한 것은 읍미봉이라 하였다. 읍미봉은 구환에 포함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에는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100만석 이상 항상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많으면 200만 여석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환곡의 총액을 1000만석으로 추정할 때 10∼20%에 해당하는 환곡이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으로 존재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 많은 것은 빈번한 기근의 발생과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 보유 곡물로 무상 혹은 유상으로 식량을 나누어 주는 진휼정책을 실시한 결과였다. 진휼정책 이외에도 구환에 대해 주기적으로 탕감이 이루어졌으므로 양반과 관속 등의 세력가와 일반 민인들이 고의적으로 환곡 납부를 미루기도 하였다. 지방관의 부정행위도 미징수 환곡의 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100만석 이상의 걷지 못한 곡물이 늘 존재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액수는 거의 징수할 가능성이 없는 고질적인 포흠곡이었다.
이 수치는 비록 흉년 후에 대대적으로 구환을 탕감하였음에도 여전히 징수하지 못한 환곡이었다. 이처럼 흉년이 들면 당연히 징수해야 할 환곡을 징수하지 못하고, 또한 비축곡의 일부를 진휼의 재원으로 활용해야 했으므로 각 지역의 창고에 남아 있는 수량은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18세기 말에 이르러 환곡의 총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환의 징수를 강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19세기 들어서는 구환의 범위를 축소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징수해야 할 구환을 징수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읍미봉으로 칭하고 구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구환의 징수를 강화하여, 구환의 범위를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제 징수하지 못한 구환을 왕조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이에 따라 19세기 들어 장부상의 구환 액수는 크게 감축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장부상의 액수였고, 실제로 징수하지 못한 구환은 18세기 후반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의 구환을 징수하려는 노력은 19세기 들어 강화되었다. 이에 짝하여 구환의 탕감도 18세기에 비하여 감축되었다. 이것은 재정에 충당되고 있던 환곡 총액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지만, 실제의 환곡 운영에서는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의 증가를 가져올 뿐이었다. 18세기에는 폭넓게 구환을 인정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여 환곡 총액이 감소하더라도, 현실적인 환곡 운영을 하려고 하였다. 반면, 19세기에는 구환의 범위를 제한하고 탕감을 적게 함으로써 환총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이는 고스란히 백성의 부담으로 귀결되어 환곡의 허류화 현상을 가속시켰으며, 폐단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776년에는 전체 환곡의 약 15%를 징수하지 못하였는데, 1862년에는 54% 이상을 징수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환곡의 실재 보유량은 장부상 액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포흠곡을 무리하게 징수하려는 시도는 백성들의 저항을 유발하였다. 1860년대 농민들의 저항이 발발한 데에는 19세기 환곡 운영의 모순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전반의 집중적인 자연재해로 인하여 환곡은 감소하고 징수하지 못한 포흠곡은 증가하였지만, 구환에 대한 탕감은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진휼을 목적으로 설치된 환곡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비용 조달을 위한 환곡도 일부가 감소하였다. 그러나 미징수 환곡을 제대로 징수할 수 없으면서도 탕감을 하지 않고 징수하려 한 정책은 환곡을 수탈의 도구로 변화시켰고, 결국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의의
환곡 운영 과정에서 오랫동안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으로 규정하고 때때로 탕감한 것은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주고 체제 안정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환곡을 일정량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곡의 일부를 징수해야 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구환의 규정을 세밀히 하여 구환에 포함되는 환곡을 억제하려 하였고, 구환에 탕감도 줄었다. 이로 인해 환곡의 재정 기능은 강화되고 있었으나,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류곡이 급증하여 환곡 폐단을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목민심서(牧民心書)』
『사정고(四政考)』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문용식, 「19세기 전반 환곡 진휼기능의 변화과정」, 『부산사학』 19, 1990.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 1989.
오일주, 「조선후기의 재정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실학사상연구』 3 , 1992.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오일주, 「조선후기 국가재정과 환곡의 부세적 기능의 강화」,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권분(勸分)
정의
흉년에 부유한 자에게 사적으로 진휼에 필요한 곡식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권하던 일.
개설
흉년이 들었을 때에 부유한 사람에게 권하여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게 하는 일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세종·세조·성종·명종대에서 이런 사례가 보이며, 선조·광해군대에도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흉년이 들었을 때에 곡물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권분이 지속적으로 시행된 것은 조선후기의 상황이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에 민간의 부유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곡식을 출연하는 권분은 진휼곡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진휼 곡물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부민에게 강제적으로 징수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으며, 지방관이 마련해야 하는 자비곡(自備穀)을 권분을 통해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런 폐단으로 인해 『속대전』은 ‘곡식을 비축한다고 핑계대고 민간에서 권분하는 것을 엄금한다.’고 규정하였으나, 권분이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권분을 금한다는 지시가 내려오고 일시적으로 금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다시 권분이 시행되었다. 권분이라는 말 대신에 ‘자발적으로 바친다’는 ‘원납(願納)’ 혹은 ‘부민원납’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대전통편』에서는 진휼곡을 원납하는 사람에 대한 포상 기준을 50석을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19세기에도 진휼사업이 시행될 때에는 민간의 곡식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권분이나 원납이 활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는 각종 전란과 군영의 설치, 임시 아문의 증가, 재해의 빈발 등으로 만성적인 재정 부족 현상을 빚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에서 곡물을 징수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선조대에서 효종대까지는 전후 복구사업과 외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정량 이상의 곡식을 국가에 납부하면 실직(實職)을 제수하였고, 현종에서 경종대까지는 흉년에 진휼곡을 마련하기 위해서 공명첩(空名帖)을 판매하였으며, 영조·정조대에도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유한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곡식 납부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곡식납부제도는 영조대 이후에 법제화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왕조 정부에서 곡물을 모집하는 납속책으로서는 공명첩의 발급, 권분의 시행 혹은 원납의 장려 등이 있었다. 권분이나 원납의 시행은 형식적으로 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 직첩의 지급이나 실직의 제수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공명첩은 대량으로 싼 가격에 발급하여 곡물을 모집하는 제도였다. 공명첩에 대해 왕조 정부는 국가 재정을 소비하지 않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공명첩이나 권분을 통하여 확보한 곡물은 진휼시에 우선적으로 사용되었다. 흉년 시에 주로 진휼사업에 사용되는 곡물은 국가 보유 곡물·자비곡·공명첩가곡·부민원납곡 등이었다. 분급을 하고 남은 곡물은 국가 보유 곡물에 다시 회록되어 원곡의 감축을 최소화하는 데 충당되었다. 즉 지방에서 마련한 자비곡과 공명첩가곡·부민원납곡이 모두 사용되었지만, 왕조 정부의 관리 곡물은 획급한 곡물 모두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명첩가곡은 무상 분급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진휼사업의 부대 비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진휼사업시에는 곡물의 분급 이외에 된장·소금·미역 등을 함께 분급하였는데 그 비용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숙종 연간에 일반화되었던 공명첩의 발매는 영조대 『속대전』에서 큰 흉년에만 발매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권분은 부유한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수령이 자비곡을 비용절감에서 마련하지 않고 부민에게서 곡식을 거둬내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민수탈로 인해 권분을 금하였으나 기근시에 진휼 곡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원납이라는 명목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공명첩의 매득이 단순히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원납은 좀 더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원납가는 공명첩의 발매가보다 월등히 높은 액수를 권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조 연간에 제정된 「부민권분논상별단」에서는 1,000석 이상이면 실직을 제수하도록 하고 있었고, 500석, 100석, 50석 이상 등으로 구분하여 시상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러한 권분이 시행되더라도 공명첩의 판매가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원납이 민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관의 강제에 의해 억지로 참여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여 폐단을 일으키자 원납을 금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권분·원납에서의 폐단은 주로 소액을 납부하는 민에게 집중되었다. 1,000석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에게는 실직을 제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액 납부자들은 관직을 위하여 자원하여 납부하기도 하였다. 원납을 금하는 명령은 종종 내려지지만 공명첩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금할 수는 없어 치폐가 반복되었다. 권분을 통하여 일부 사람들은 벼슬을 얻거나 직역을 바꾸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19세기 들어서도 진휼사업이 실시될 때에는 부유한 백성들에게 권분을 장려하여 진휼곡의 확보에 힘쓰고 있었다.
의의
흉년이 들었을 때에 민간 보유 곡물을 진휼곡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행한 권분은 국가 보유 곡물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시행하였다. 지방관이 권분을 활용하여 부민을 수탈하는 경우도 발생하였지만, 이를 통해 일부는 벼슬길로 나아갔고, 힘든 직역을 벗어났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서한교, 『조선후기 납속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급대(給代)
정의
어떤 목적에 쓰기 위한 비용을 다른 명목으로 마련하여 지급하는 것.
내용
조선시대 급대의 대상은 다양하였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는 18세기 군역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도인 균역법의 시행 과정에서 등장하였던 급대책이었다. 균역법은 과중한 군역의 부담을 해결하기 위하여 군역 담당자가 1년에 내야할 2필을 1필로 줄여서 내도록 한 제도였다. 군역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문제가 된 것은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된 재정의 부족이었다. 그에 따라 우선 군사 수를 감축하고, 이들을 군포납부자로 만들었다. 그래도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 급대의 방법이었다. 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대책은 곧 다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급대를 위한 재원(財源) 중 주된 항목으로 ① 이획(移劃), ② 어염선세(魚鹽船稅), ③ 은여결세(隱餘結稅), ④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⑤ 결미(結米) 또는 결전(結錢)을 들 수 있다. 이획은 선혜청의 저치미(儲置米), 세작목(稅作木)·상진모(常賑耗)·군향모(軍餉耗) 등을 균역청으로 이속시키도록 한 것이었다. 어염선세는 해세(海稅)라고도 하는데 왕족이나 궁방에 지급되었던 어전세(漁箭稅)·염분세(鹽盆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 수입으로 삼은 것이었다. 은여결세는 각 고을에서 경작되는 전답 중에 거짓으로 진탈(陳頉)이라고 하여 경작하지 않고 세를 부과하는 대상에서 누락된 은결이나 여결에 부과한 세로서 수령들이 사적으로 쓰던 것이었다. 선무군관포는 양민 중에서 군역을 피하여 역을 맡고 있지 않는 한정(閑丁)을 대상으로 선무군관으로 삼고, 해당 도에서 도시(都試)를 시행하되 포를 징수하여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미 혹은 결전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토지에 쌀 2말 혹은 돈으로 5전을 거두도록 하였다.
균역법 시행을 위한 급대안 중에서 환곡과 관련된 것은 회록(會錄)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 각 도에 있는 전곡(錢穀)을 헤아려서 회록하고, 군작미 100,000석도 균역청에 이속시켜 절반을 환곡으로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급대는 원래의 목적에 쓰기 위한 비용이 부족할 때 변통적인 측면에서 시행하는 것이었다.
용례
蓋爲良役之弊 由於冗費之多門 就其中可以變通者變通之 可以省減者省減之 然後冗費之門杜 冗費之門杜則減布給代之數不多 減布給代之數不多 則區劃生財之策不難故也 笏記中最緊要諸條 乃爲群議所掣 不能見用 許多給代之數 皆從白地辦出 故其勢不得不分排於各營閫 而猶患不贍 此不足以支過目前 則況可以永久遵行平 臣以此意陳達筵中 遂有四件事區劃 所謂魚鹽·陳田·隱結·軍官等事是也 其議或出於臣 或出於僚相諸堂 蓋皆土地人民之所出 不過收尾閭之泄 括漏稅之田 搜逃役之類而已 初非剝割巧歛於常賦之外 又非歛散聚息 陰奪民財如靑苗之爲者也 始慮落落難成 今則稍稍凝聚 大略計之 與給代米木之數 幾乎相當矣 [『영조실록』 27년 5월 1일]
참고문헌
『균역사실(均役事實)』
『균역청사목(均役廳事目)』
납곡회환(納穀回換)
정의
조선초기에 평안도·함경도 지방에 부족한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하여 상인 혹은 자원자들을 이용하던 방식.
내용
평안도와 함길도 등 변방 지역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곳으로 군수(軍需)의 조달이 중요하였다. 이를 위하여 남쪽 지방의 미곡을 수송하여 해결하려는 방법이 제시되었으나, 곡물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길이 험난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납곡회환은 이 같은 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즉, 상인 및 자원자들이 미리 북쪽 지방에 곡물을 납입하게 한 후, 납입 증서를 받아 오면 값을 더하여 경기·충청 등지에서 조세로 거둔 미곡으로 지급하던 제도였다.
그러나 장사치들이 미곡을 바치지 않고 권세가와 결탁하여 면포나 다른 물품으로 납부하였고, 수령들은 마치 미곡을 받아들인 것처럼 거짓으로 기록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앙에서는 차사원을 따로 보내어 해당 읍의 수령과 함께 미곡을 감독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다시 사실을 조사한 후 호조에 관문을 보내면 값을 주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용례
近年以來 東西兩界 防禦最緊 糧餉之畜 不可不慮也 防禦人民衣食之備 又不可不慮也 且咸吉道新設四鎭 土地沃饒 遇災不甚 則民食必有餘矣 可以懋遷有無 以資其生也 若於兩界各官 皆令納穀回換 則必至搔擾 甚不可也 今欲咸吉道某官以北各官·平安道沿邊某官以北各官 令自願者納穀換給 邊郡有畜積之多 戍卒免無衣之嘆 何如 下政府議之 皆議曰 咸吉道四鎭 雖云土地沃饒 民食有餘 然近年以來 下三道人民入居者頗多 各以布物買穀資生 民間所畜 尙且不贍 今若許令自願者買穀納官 則興利之徒 各持布貨 爭相貿易 慮恐民間所畜尤爲不贍 似未可也 [『세종실록』 22년 7월 14일]
단대봉(單代捧)
정의
재해를 당하여 환곡으로 나누어 준 곡물을 거두어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하였을 때, 곡물들 간의 상대적인 교환비율을 적용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방식.
개설
대봉이란 원래 나누어 준 곡물의 작황이 매우 열악하거나 혹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곡물로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전되어 온 곡물이라든지, 동일한 곡물로 갚지 못하게 된 사정이 발생하였을 때, 곡물 상호간에 상대적인 교환비율을 적용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뜻하였다. 이에 비하여 단대봉은 원래의 곡물[正穀]을 대신하면서 곡물 상호간에 적용되던 상대비율이 아니라, 1대 1의 비율로 처리하여 거두어들이는 방식이었다. 단대봉은 곡물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가 많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원래 단대봉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대봉의 형태를 변형한 것이었다. 환곡으로 이용되는 곡물들은 흔히 그것이 지닌 곡물가가 동일하지 않았다. 단대봉은 값이 다른 곡물들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동일한 양을 거두도록 한 것이다. 그 때문에 수령·이서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컸다. 이는 환곡이 크게 줄어드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내용 및 변천
단대봉은 대봉의 변칙적인 형태였다. 『만기요람』에서는 대봉을 황두(黃豆) 1석으로써 쌀 1석을 대(代)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관청에서 대봉할 때에는 원래 나누어 준 곡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곡물을 정해진 비율에 따라 대신 거둘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나누어 준 곡물이 아닌 거두어들인 곡물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나 단대봉은 장부상으로 교환비율이 서로 다른 곡물들을 같은 비율로 처리하였다. 그 결과 환곡 장부에 기록된 곡물들의 명색이 섞이게 마련이었다. 이는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며, 환곡의 감축을 초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영조대 이후 곡품의 품질과 곡물의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석(石)을 단위로 대봉하는 사례들이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곡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양만 채웠으며, 다음해 가을에도 원래의 곡물의 종류로 바꾸어 놓지 않아서 고가의 곡물, 즉 환곡의 양이 줄어들고, 환곡 장부 또한 제대로 작성되지 않게 어지럽게 되고 있음이 자주 등장한다. 국가는 단대봉으로 인한 폐단이 점차 커지자, 단대봉을 행한 수령을 엄히 다스렸다.
대봉과 관련한 조항은 『속대전』 「호전」 창고조에서 찾을 수 있다. 대봉이 가능한 곡물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미(米) 1석에 대해 황두 2석, 조(租) 2석 7두 5승, 소두(小豆) 1석 7두 5승을 대봉할 수 있었다. 소두 1석에 대해서는 황두 1석 4두, 속조(粟租) 1석 5두, 황두 1석에 대해서는 소두 11두 2승 5합, 속조 1석 3두, 조 1석에 대해서는 황두 12두로 대봉할 수 있었다. 반면 대미(大米)를 기준으로 소미(小米)를 상대(相代) 즉 1:1로 대봉할 수 있었으며, 다만 소미를 대미로 대봉할 때에는 모(耗)를 거두지 않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직미(稷米)와 서미(黍米), 녹두(菉豆)와 소두, 직당(稷唐)과 황조(荒租), 진맥(眞麥)과 정조(正租)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곡물 간에 상대비율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와 같은 형태를 제외하고 다른 곡물로 거두어들이면서 단대봉할 경우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봉에 비해 단대봉은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되었고, 그로 인한 폐해도 컸다. 단대봉의 문제는 대봉의 문제와 달리 곡물의 품질이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일 양만 채워 원래의 것으로 바꿔 놓지 않았으므로, 가격이 낮은 곡물을 비싼 곡물로 대체하여 피잡곡(皮雜穀)만 남게 되면서 실질적인 곡물의 감소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곡물을 장부에 기입하게 되어 원래의 명색과 나중의 명색이 달라져서 장부의 혼잡을 더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실제 창고에 곡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환곡의 허류화(虛留化), 장부의 허부화(虛簿化)를 초래하였다. 단대봉은 수령들이 해당 고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에 급급하여 발생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관서의 강변지역의 여러 읍에서는 모두가 단대봉을 행하였을 정도였다.
단대봉의 폐단은 단순히 대봉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각종 폐단을 낳을 소지가 많았다. 각 고을에서 품질이 좋은 미곡을 이용한 후, 가격 혹은 품질이 낮은 곡물을 받아들여 환곡의 질을 떨어뜨렸으며, 양적인 면에서도 실질적인 감소가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수령이나 이서들은 부족한 곡을 메우거나 원곡을 채우기 위해 나이(那移)·번질(反作)·요판(料販)·허록(虛錄) 등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단대봉에 머물지 않고 다른 형태의 방법들과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었다.
18세기 대봉의 방식은 대곡(代穀)·대전(代錢)의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대봉은 환곡을 거두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수단이었으며, 일정 기간이 되면 다시 원래의 곡물의 형태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러나 곡물의 관리가 이와 같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의 곡물로 바꾸어 놓지 않거나, 양을 제대로 채워 놓지 못하여 원래보다 곡물의 양이 줄어들었으며,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가 있었다. 이와 같은 대봉의 방식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변형하여 운영한 것이 단대봉이었다. 단대봉은 곡물의 질과 상관없이 해당 곡물을 받아들인 것처럼 양을 채우기 위해 같은 비율로 고가의 곡물을 거두어들인 것으로 처리하여 등장하였으며, 곡물에만 적용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전(作錢)의 방식과 결합되어 많은 폐해를 낳았다.
의의
단대봉은 수령과 이서들이 환곡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는 방법 중 하나로, 환곡장부의 허류화와 허부화를 초래하였으며, 환곡문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대전(代錢)의 형태와 함께 환곡을 거두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이지만, 원래의 곡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곡물의 축소와 운영자들의 농간의 여지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속대전(續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제도어사재거사목(諸道御史齎去事目)」 『암행일기(暗行日記)』(金相稷)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0.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대봉(代捧)
정의
조선후기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누어 준 환곡과 같은 종류의 곡물로 거두어들일 수 없을 때, 같은 값의 다른 곡물 혹은 화폐로 대신하여 갚게 하는 방식.
개설
재해 등으로 원래 환곡으로 지급한 것과 같은 곡물의 종류로 거두어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임시방편으로 원래의 곡물이 아닌 다른 종류의 곡물로 정해진 교환비율에 따라 대신 거둘 수 있었다. 해당 관청은 다음 해에 곡물 간에 일정한 교환비율에 따라 다른 곡물로 거두어들였던 것을 원래의 곡물로 다시 바꾸어 놓아야 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심한 재해를 입었을 때 주로 적용되었다. 지급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곡물을 마련하려면 먼 곳까지 가서 곡물을 구해야 하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인 비용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운반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원래의 환곡으로 이용된 곡물 대신에 다른 곡물로 받았다가 여건이 되면 원래 나누어 준 곡물로 다시 바꾸도록 하였다.
내용
작황의 부진으로 그 지역에서 곡물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옮겨 와 나누어 준 것이 그 지역에서 경작되지 않는 곡물이 있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부득이한 사정이 발생하여 환곡으로 나누어 준 것과 동일한 곡물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환곡을 받은 자가 다른 지역에서 같은 종류의 곡물을 마련하여 납부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봉이라 하여 환곡을 받은 자에게 해당 곡물이 아닌 다른 곡물이나 화폐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대봉할 때에는 곡물과 곡물 혹은 곡물과 화폐 사이에는 상정가(詳定價), 즉 상호간의 교환비율을 적용하였다.
대봉은 변칙적인 방법이었으나, 원래의 곡물을 대체하는 형태로 필요한 곡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봉이 적용되는 경우는 심한 재해를 입어 감사가 재실분등을 보고할 때 적용되었으며, 국가가 필요한 경우에도 허락되었다. 이후 해당 곡물을 확보할 수 있는 사정이 되면 원래의 곡물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대봉과 관련된 규정을 보면, 『속대전』 「호전」 창고조에 의하면, 대미(大米)를 기준으로 소미(小米)는 일대일로 교환하고 소미를 대미로 대봉할 때에는 모를 거두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米) 1석에 황두(黃豆) 2석, 조(租) 2석 7두 5승, 소두(小豆) 1석 7두 5승을 대봉하게 하였다. 그리고 소두 1석에 황두 1석 4두, 속조(粟租) 1석 5두를 대봉하게 하였으며, 황두 1석은 소두 11두 2승 5합, 속조 1석 3두으로 대봉하게 하였다. 조 1석은 황두 12두로 대봉하게 하였다. 그리고 직미(稷米)와 서미(黍米), 녹두(菉豆)와 소두, 직당(稷唐)과 황조(荒租), 진맥(眞麥)과 정조(正租)를 각각 상대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곡물 간에 교환비율이 정해져 있었으며, 곡물을 화폐로 대신 거두는 대전(代錢) 비율은 관행적인 예가 적용되었다.
대봉은 계절적 지역적인 곡물가의 차액으로 발생하는 이득을 노린 수령이나 이서들에게 자주 악용되었다. 담당자들이 대상곡물을 바꾸어 바치거나, 혹은 향임과 이서들이 짜고 기한을 넘기면서 납부하지 않다가 질이 떨어지는 다른 곡물로 바치는 방법 등을 이용하였다. 대봉은 담당자들이 이득을 얻는 방법으로 이용한 반면, 농민들은 원래의 의도와 달리 곤란을 겪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속대전(續大典)』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모곡(耗穀)
정의
농민에게 분급한 환곡을 돌려받을 때 추가로 징수하였던 곡식.
개설
조선에서는 농민을 재생산구조와 생활 안정을 위한 대책으로 환곡제도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곡식을 보관·관리하고 환곡을 분급·환급받는 과정에서 많은 손실분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손실의 발생은 국가 재정의 부담으로 작용하였고, 이에 따라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였다. 이에 따라 원곡의 1/10에 해당하는 모곡을 징수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모곡은 명종 9년 이전 어느 시점에 국가제도로 정착되었고, 이후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한편으로는 명종대부터 모곡 중 일부가 국가 재정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환곡의 재정적 기능이 크게 부각되었다. 조선후기 들어 환곡의 운영이 문란해졌는데, 이는 모곡을 국가 재정으로 전용(轉用)한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초에 시작된 환곡제도에서는, 농민에게 분급한 양의 곡식만을 환수하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원인으로 발생하는 곡식의 손실분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세종대부터 모곡 징수 방법이 논의되었다. 최초로 모곡 징수가 법제화되었던 것은 1424년(세종 5)이었다. 당시 모곡은 1석당 3승을 거두는 것으로써 그 양이 매우 적었다[『세종실록』 5년 9월 16일]. 그러나 이러한 3승모곡마저도 곧 혁파되었다. 이후에 모곡 수취에 관한 것이 여러 차례 논의되었으나 정식으로 법제화되지는 못하였고, 성종대 편찬된 『경국대전』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1554년(명종 9)의 기록에 의하면 1/10에 해당하는 모곡을 징수한다고 하고 있어, 적어도 명종 9년 시점에서는 모곡의 징수가 제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영조대 발간되는 『속대전』에는 1/10의 모곡 징수를 정식(定式)으로 규정하였다.
내용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 사회에서는 흉년 등의 이유로 자주 기근이 발생하였다. 국가에서는 기근이 발생하면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고, 다음 해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돕는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바로 환곡제도였다. 조선은 왕조 개창 당시부터 의창제도를 수립하고 환곡제도를 운영하였다. 조세 등을 통해 확보한 곡식을 백성에게 분급하고, 다음 해 농사가 끝나면 빌린 곡식을 갚도록 하는 것이 제도의 골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곡 운영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연 손실분이 발생하였다. 곡식을 분급받은 백성이 유리(流離)·도산하게 되어 원곡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대규모 곡식의 저장·관리 과정에서 다량의 곡식이 부패하였고, 쥐나 새 등이 파먹는 곡식 역시 상당하였다. 곡식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분도 있었다. 이러한 손실분의 발생은 환곡 운영의 난점으로 작용하였고, 또 국가 재정에도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조선초 의창제도 하에서는 분급해 준 곡식의 양만큼을 다음 해에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환곡 운영에서 발생하는 손실분을 보충할 다른 방법이 없었고, 때문에 이러한 점은 고스란히 국가의 부담이 되었다. 이에 세종대부터 의창 원곡을 보장 받기 위한 여러 제도적 모색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시된 방법 중 하나가 모곡을 징수하는 것이었는데, 빌려준 원곡에 약간의 추가분을 징수하여 손실분을 만회하도록 한 것이었다. 모곡은 모미(耗米)·비모(費耗)·비모(備耗)·작모(雀耗)·서모(鼠耗)·모조(耗條)·모흠(耗欠)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곡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다만 명종 9년 이전에는 제도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명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곡 징수량은 원곡의 1/1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모곡 징수는 국가 비축곡의 원곡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도화되었지만, 16세기 명종대 이후 모곡의 일부가 경상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 조선후기에 이르면 환곡의 모곡이 국가 재정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각 아문에서는 경쟁적으로 환곡을 설치하여 모곡을 징수하였다. 각 지방에서도 환곡과 관련된 각종 폐단이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폐단의 대부분은 무분별한 모곡 징수와 관련된 것이었다.
변천
16세기 국가 재정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모곡의 일부를 국가의 경상비로 사용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원곡의 1/10에 해당하는 모곡 중에서 1/10을 국가 경비로 사용하는 소위 1분회록법(一分會錄法)이 명종대에 실시된 것이다. 이후 효종대에 이르러서는 모곡의 3/10을 경비로 사용하는 3분회록법(三分會錄法)이 정착되었다[『효종실록』 1년 4월 5일]. 이러한 조치로 인해 각 아문·군문별로 환곡을 통한 재원 마련이 광범위하게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전체 중앙 아문의 재원 중에서 모곡이 차지하는 비중이 3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중은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합친 전결세 다음으로 많은 것이었으며, 군포 수입의 약 2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중앙 재정뿐 아니라 각 지방의 재정도 환곡에 의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는 무분별한 모곡 징수가 자행되었다. 19세기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문란(三政紊亂)에서도 환곡의 문란은 가장 큰 부분이었다. 1862년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임술농민항쟁 당시 농민들이 가장 강하게 요구한 것 가운데 하나도 환곡의 폐지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환곡은 혁파되었고, 이에 따라 모곡의 징수 또한 중지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송찬식, 「이조시대 환상취모보용고」, 『역사학보』 27, 1965.
모상첨모(耗上添耗)
정의
환곡의 모곡이 다시 원곡으로 처리되어 그에 따른 모곡을 받게 되는 것.
개설
제정 경위 및 목적
환곡의 모곡(耗穀)을 이용하여 더 많은 모곡을 거두려는 방식이었다. 환곡을 분급한 후 가을이 되면 원곡과 모곡을 함께 거두었다. 그러나 환곡을 받은 자가 그해에 곡물을 내지 못하게 되면, 관청에서는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물에다 모곡의 양을 더하여 이를 원곡으로 분급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처음에는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나, 모곡을 이용한 경비 보충이 적극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되었다.
내용
1. 모곡 회록의 실시
환곡으로 분급한 것에는 모곡의 명목으로 원곡의 1/10을 부가적으로 거두었다. 모곡이라 함은 새나 쥐가 먹어서 소모되어 원곡이 줄어드는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1석에 1두 5승의 모곡을 거두었는데, 모곡 중에 1/10인 1두 5홉을 관청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회록이 시작되었다.
2. 회록 관청의 증가
회록은 환곡을 분급하였다가 원곡과 함께 거두어들인 모곡을 다시 원곡화하여 원곡뿐만 아니라 모곡을 거두는 방식이었다. 이는 모곡에 대한 모곡을 거둠으로써 원곡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즉, 그해의 모곡은 다음 해에는 환곡의 원회부(元會付) 형태로 파악되면서 모곡이 원곡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환곡을 분급할 원곡이 증가되었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관청들이 이를 따랐는데, 이는 복리식 이자계산법과 동일하여 관청에 의한 고리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회록은 군자곡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는 원회곡(元會穀)·창원곡(倉元穀)·호조곡(戶曹穀)이라고도 하였다.
군자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회록이, 1650년(효종 1)에 지평김응조(金應祖)가 상평곡 모곡에 대해 4/5를 회록하는 법을 청하였고, 이로서 호조의 회록곡 외에도 상평곡 등이 회록을 하게 되었다. 이후 감영을 비롯한 지방의 각 읍에서 이를 따랐으며, 그 외에도 많은 관청들이 이를 모방하였으며, 전모(全耗)를 회록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와 같이 모곡을 이용하여 원곡이 증가하게 된 것은 회록을 확대·실시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영조대 사간박필간(朴弼幹)은 모곡에다 모곡을 더하여 거두면 첫해에 1석이었던 환곡이 30년이 지나면 16배나 된다고 제시하였다. 그는 1석을 제외한 나머지 15석은 결국 백성들의 고혈(膏血)이라고 하였다.
변천
1. 전모회록의 발생
모상생모는 처음에는 군자곡을 중심으로 모곡의 1/10을 호조에 회록하여 이를 호조회록곡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효종대 이후 상평청에서는 회록하는 비율이 높아져 회부곡의 4/5를 회록하였으며, 평안도에서는 전모를 회록하였다. 각 관청들은 이후 모상생모의 원리를 이용하여 환곡의 양을 급격하게 늘렸다.
2. 와환의 시행
와환은 강제로 환곡을 분급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등장하였다. 원곡을 창고에서 출납하지 않고 이미 분급한 것처럼 혹은 거두어들인 것처럼 장부를 꾸며 모곡만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 와환이었다. 환곡을 부담하는 자들은 원곡 외에도 모곡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하였으므로) 일시에 환곡을 납부하기가 힘들었다. 와환은 민들의 환곡부담을 줄이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었지만, 다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모곡의 일부를 회록하는 방식이 지속되는 한 환곡은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회록법의 적용을 금지하지 않는 상태에서 모생첨모를 통한 환곡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의의
환곡은 원래 조세는 아니었지만, 조선후기에 삼정의 하나로 포함될 정도로 조세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사회의 재정의 특성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모상생모는 환곡의 자기증식 구조를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만기요람(萬機要覽)』
『경세유표(經世遺表)』
『사정고(四政攷)』
모환(牟還)
정의
환곡으로 분급해 준 보리.
개설
환곡으로 사용하는 곡물은 쌀 외에도 다양하였다. 그중에 모환은 대맥과 소맥을 이용하여 구휼 시에 진휼곡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대맥과 소맥은 성질이 쉽게 썩고 상하여 오랫동안 보관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모환은 구황 시에 미곡이 부족한 것을 메우면서 진휼곡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모환은 봄보리와 가을보리 모두가 이용되었다.
내용
환곡으로 이용된 주된 곡물은 쌀이었다. 그렇지만 쌀이 많이 나지 않는 지역에서는 보리를 경작하는 예가 많았으며, 보릿고개라 하여 쌀 등이 떨어져 먹을 것이 모자라는 시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모환도 환곡이었으므로 반은 창고에 남기고 반은 나누어 주는 반류반분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곡물의 성질상 반류반분을 따르기 힘들었다. 이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진분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고, 곡물의 양을 줄이기 위해 작조(作租)하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곡물을 이전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곳에 따라 작전(作錢)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모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모환의 1/4을 창고에 남기도록 새롭게 정식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는 반류반분에 비하여 많은 곡물을 민간에 나누어 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기대와 달리 모환을 거두어들일 때 많은 양의 곡물을 바치지 못하는 자들이 발생하였다. 그 때문에 환곡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진휼을 할 때 필요한 구황곡물이 부족하게 되었다.
의의
미곡만으로 환곡을 운영하기에는 필요한 곡물을 모두 마련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특히 논이 적고 밭이 많은 지역에서 모환이 이용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