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퇴직 역사교사 야나세 가즈히데씨는 "동학군을 섬멸한 사실을 일본이 직시하고, 조선 지배에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1894년 봄 동학농민혁명 진압을 명분으로 제물포항에 상륙한 일본군.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통유림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철저한 항전’이었다. 천주교는 진리를 가장한 금수와 같은 윤리를 가르친다고 배척했다. 특히 두 차례의 양요(洋擾, 서양세력의 침략행위)는 바로 우리의 주권을 유린하고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므로 죽기를 결하고 철저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세 대처 항전●수용 맞서-
또 개항 이후 불평등 관계의 무역을 두고도 그들의 주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1차 산품인 쌀 등 식량이 유출되고 사치품 따위가 수입되어 나라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 국민을 기아상태로 만든다고 했다. 서양 사람들이 만든 물건은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환술(幻術)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들을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라 부른다. 척사파들은 전기·통신·철도 등 이른바 일련의 근대화 작업도 거부했다. 더욱이 서구식 정치제도의 수용 등에 대해서도 반대이론을 펴고, 전통적 군주제와 모든 기성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달리 19세기 중엽 이후, 외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해야 한다는 세력이 일어났다. 이들은 척사파와는 달리 소수이기는 하나 나름대로 민활하게 현실개혁을 시도했다. 이들은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개방정책을 주목했다. 그리하여 전통적 중화질서를 거부하고 기성의 제도와 문화를 개조하려는 새로운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때로 청국과 일본의 신문물 수용운동을 배우기도 하고 서양의 사상제도를 공부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새로운 운동의 밑천으로 삼아 동지를 모았다. 그리하여 몸소 양복을 입기도 하고, 서양식 풍습을 익히기도 하고, 기독교를 신앙하기도 했다.
이들을 개화파라 부른다. 개화파들은 청년 지식인 중심의 소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외국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고 협조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세력을 침략의 무리로 보는 데에는 둔감했다. 이들은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한편 조선 후기부터 꾸준하게 저항운동을 펴온 민중들이 있었다. 1812년 홍경래 주도의 관서농민전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변혁운동의 과정에서 직업적 봉기꾼들이 있었다. 봉기꾼들은 명화적과 농민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벌여왔다.
동학이 발생했을 때 포괄적 의미의 많은 민중은 여기에 가담했다. 순수한 종교적 의미만을 추구해 동학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정부패로 얼룩진 문벌정치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 또는 전직 벼슬아치들도 상당수 가담했으며 방황하던 몰락 유생들도 끼어들었다.
-타협없이 타도에만 몰두-
이들은 기본적으로 신분제도·토지제도 등 봉건체제를 거부했다. 실제로 천민을 포함한 전통적 신분제도는 무너지고 있었으며 토지제도도 문란해졌다. 따라서 봉건체제는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동학이라는 조직은 전국의 농민세력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한 농민세력이었다. 농민군 지도자들은 전통적 봉기꾼들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농민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지주와 부정부패의 원흉인 문벌정치와 그 하수인인 수령과 구실아치들을 적으로 돌렸다. 또 전통적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외부 세력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다시 세 세력의 지향을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척사파들은 외국침략 세력의 타도에는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으나 봉건 모순의 개선에는 전혀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문벌정치를 옹호하는 등 기득권을 계속 누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아들은 현실대처를 놓고 강경파와 절충파, 곧 동양의 도인 유교를 지키고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배우자는 동도서기파로 나뉘어졌다.
개화파들은 신문물의 수용을 놓고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졌으며 그 지원 대상을 두고도 일본·청국, 그리고 미국 등으로 갈라졌다. 개혁을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이 부족하자 청국 또는 일본세력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실패를 거듭하는 속에서 일본을 후원자로 받드는 계열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이들이 이른바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선봉에 나선 것이다.
농민세력은 저항의지가 강렬했다. 이들은 외세를 철저히 배격했다는 점에서는 척사파의 지향과 같았으나 봉건 모순의 개혁에는 개화파와 방향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왕조체제의 타도 의지가 확실치 않았고, 분명한 정치 프로그램의 추진이 미약했다. 하지만 가장 큰 규모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의 보·혁갈등과 유사-
세 세력은 서로 타협치 않고 상대를 철저히 적으로 돌렸다.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과 추진 방법에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척사파는 개화파와 농민세력을 왕조를 거부하는 역적으로 몰아갔다. 개화파는 척사파를 반동적 집단으로 보았으며 농민의 변혁의지와 역량을 얕보았다.
더욱이 농민세력을 근대화를 거부하는 부류로 보았다. 농민세력은 척사파를 민중을 압제해온 불량한 유림 또는 양반무리로 보아 타도하려 했으며 개화파를 외국 침략세력과 손을 잡은 반동적 무리로 보았다.
세 세력은 극한대결을 벌였다.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묵은 체제를 뒤엎으려 시도했고, 뒤이어 일본과 손을 잡고 갑오개혁을 통해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척사파들은 개화파와 일본세력이 연합하여 벌인 일련의 개혁과 민비를 살해한 근왕적 복수심으로 이른바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농민세력은 전국에 걸쳐 전면적 봉기를 단행하여 왕조체제와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려 했다. 하지만 척사파와 개화파,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실패했다. 그야말로 농민세상은 오지 않았다. 세 세력은 타협의 여지가 없이 서로 죽이는 등 극한적 대결을 벌였다.
19세기 끝 무렵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세 세력이 벌인 극한대결은 끝내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의 도정을 밟게 되었다. 과연 이들이 역사적 책무를 다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던가? 오늘날 분단구조와 외세의 압박 아래에서 수구 보수와 개혁 진보의 갈등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 귀착점은 어디일까? 훗날 역사적 평가는 어떨까?
-을사조약 체결 중명전-
을사조약이 체결된 중영전 복원전 모습
을사조약이 체결된 중영전 복원 후의 모습
일제는 군대를 파견해 대한제국 정부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면서 친일파를 양성했다. 친일파의 양성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병합을 진행시키면서 그 협조자를 만들어 내려는 음모에서 나왔다.
이 음모에 먼저 걸려든 것이 고관으로는 이완용·이지용·박제순 등이었고, 사회단체 인사로는 이용구·송병준 등이었다. 일제의 1차 목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이었다.
고종은 보호조약의 비준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1905년 추운 겨울인 11월17일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요에 따라 내각회의가 소집되었다. 참여한 대신은 8명이었는데 찬성은 5명이어서 과반수로 통과되었다. 찬성한 다섯 대신은 이완용·이지용·박제순·권중현·이근택 등이었다. 이들을 을사5적이라 부른다.
조약 체결의 장소는 서울 중구 정동에 자리한 중명전(重明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이었다. 당시 일제의 군대는 중명전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위협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물론 통행도 완전 차단되었다. 중명전은 경운궁(뒤에 덕수궁으로 바뀜)의 부속건물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에서 집무를 보았다. 그럴 때인 1900년 무렵 지어졌다.
중명전은 2,200여㎡의 대지에 2층으로 올린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덕수궁 석조전과 이준용의 사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초기 서양식 건물의 하나로 꼽힌다. 이곳에는 본디 수옥헌(漱玉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뒤에 석조전이 완성되어 황제의 거처로 지정되자 이 건물은 황제의 접견 장소 또는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덕수궁을 축소할 때 중명전은 궁 밖으로 밀려났다. 더욱이 이 건물을 외국 사람들에게 임대해주었다. 그리하여 경성구락부가 이 건물에 들어섰다. 경성구락부는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 사람들의 사교를 위해 만든 단체로 윤치호 등이 주도했다. 1925년 화재로 불에 타서 벽돌로 만든 벽면만 남아 이를 복구했다. 그러니 그 원형은 훼손되었고 골격만 남은 셈이다.
중명전은 해방 뒤 구황실 재산으로 등록되었으나 1960년대에 개인 소유로 넘어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정부가 49억원의 예산을 들여 중명전을 매입한 것은 지난해 5월. 문화관광부는 중명전의 보존 방안을 강구 중이다. 한편 지난 13일 여야 의원 41명은 중명전을 일제침략 역사자료관으로 활용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출처] : 이이화 역사학자 ; [한국사 바로보디]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