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카보베르데 카보베르데 공화국 |
문화어 | 까부 웨르드[3] 까부 웨르드공화국 |
영어 | Cape Verde Republic of Cabo Verde |
일본어 | カーボベルデ カーボベルデ共和国 |
포르투갈어 | Cabo Verde República de Cabo Verde |
중국어 | 佛得角 維德角共和国 |
힌디어 | केप वर्दे केप वर्दे गणराज्य |
아랍어 | الرأس الأخضر جمهورية الرأس الأخضر |
러시아어 | Кабо-Верде Республика Кабо-Верде |
프랑스어 | Cap-Vert République du Cap-Vert |
3. 지리
3.1. 자연
4. 주민과 언어
5. 정치
6. 역사
7. 경제
8. 사회
9. 교통
10. 여행
13. 카보베르데의 국가
14. 여담
서아프리카 대서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정식국명은 카부베르데 공화국. 수도는 해변이라는 뜻의 프라이아(Praia),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다. 통화는 이쉬쿠두를 사용한다. 마카로네시아의 구성지역 중, 유일하게 독립국이다. 인구는 약 56만 명(2017)으로,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다. 때문에 2015년 1월 5일, 첫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임명되었다. 또 다수 인종이 흑인과 포르투갈계 백인 혈통이 섞인 혼혈인이다. 그러기에 포르투갈과 비슷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고있으며 그 외 1% 정도의 백인도 소수 잔존해 있다. 아프리카 최서단에서도 좀 더 서쪽으로 떨어진 해상에 있다보니 지역별로 세세하게 그리는 세계지도에는 여백상 문
제[4]로 인해 자주 누락되거나 붙여넣기 형식으로 꼽사리 껴서 나오는 비운의 나라이기도 하다. 심지어 가장 공신력이 큰 지도책인 아틀라스(Atlas)에서도 어지간하면 발견하기 쉽지 않다. 수도인 프라이아는 간혹 나와도 국명 카보베르데는 잘 안 나오는 정도. 그래도 최근에는 어느 정도 넣어주거나 언급해주는 경우도 조금씩 늘고 있다. 이렇게 존재감이 없기 때문인지 아르헨티나에선 오미크론 변이로 아프리카발 입국자를 제한하던 와중에 방역 담당자가 카보베르데가 아시아 국가라며 입국을 허용하는 대참사가 터졌다. 세이셸, 모리셔스 등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몇 안 되는 치안이 안정된 국가 중 하나이다.
자세한 내용은 카보베르데/국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자연
섬들의 면적을 다 합쳐보면 4,033㎢로, 전라북도의 절반과 거의 같으며, 가장 큰 섬이자 수도 프라이아의 소재지인 상티아구 섬은 약 991㎢로 강원도 횡성군과 거의 비슷하다.
기후는 바다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을 받아 열대 해양성 기후. 연평균 22도, 최고 기온도 30도를 넘지 않아 쾌적한 편이다. 최저 기온은 15도까지도 떨어질 정도. 특히 우기에 비가 오면 밤에 15도까지 떨어져서 외투없이 못다닐 정도로 쌀쌀해진다. 낮에만 좀 뜨겁고 밤엔 선선한 한국의 늦봄이나 초여름, 늦여름이나 초가을 날씨가 1년 내내 계속된다고 보면 된다. 즉, 살기 제법 괜찮은 날씨.
화산 활동과 침식으로 생긴 섬이기 때문에 화산 활동이 있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을 보면 전형적인 화산 지형 국가라는걸 알 수 있다. 암석도 현무암이 많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카보베르데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주민들의 대부분은 전술했다시피 흑인과 포르투갈계 혼혈인 뮬라토가 대부분이다. 또한, 일부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카보베르데로 이주하는 포르투갈인들이 늘고 있다. 그 외 기니비사우에서 온 발란타족, 만자크족 등이 있다. 공용어는 포르투갈의 지배와 영향으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에도 가입되어 있다. 주민들은 일상생활에서 카보베르데 크레올어라는 포르투갈어 크레올을 사용한다. 또한, 카보베르데는 프랑코포니에도 가입되어 있다.
아프리카의 몇 안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심지어 36위 벨기에보다도 높다.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했으며,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5년에 한 번씩 선출하고 의회에서 지명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가 장관들을 임명한다. 주요 정당들로는 민주운동(MPD)과 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PAICV)이 있다.
국명 "카보베르데(카부베르드)"는 포르투갈어로 녹색의 곶(=베르데 곶)[5]"이라는 뜻인데 정작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목격한 진짜 베르데 곶은 이 섬이 아니라 바다 건너편 세네갈에 있다.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다른 여러 아프리카의 나라들과는 역사가 달랐다. 페니키아인, 아랍인, 무어인 및 인근 서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이 섬을 왔다갔는데 포르투갈의 항해사들이 발견했을 때는 무인도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포르투갈인들이 건너와 정착하기 시작하고, 16세기경에 노예 무
역이 성행했을 때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끌려왔다. 때문에 이들과 이들의 혼혈로 이뤄진게 현재 카보베르데 주민의 조상들인 셈. 그렇게 노예무역이 쇠퇴한 후에도 이 지역은 대서양의 거점항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에 불어닥친 민족주의 열풍에 편승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1975년 독립하였다. 이때 같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기니비사우와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끝내 성사되진 못
했다. 왼쪽이 카보베르데의 옛 국기(1975년부터 1992년까지), 오른쪽이 기니비사우의 국기이다. 둘이 서로 비슷하게 생겼는데, 둘 다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의 당기에서 유래한 디자인으로 이는 카보베르데와 기니비사우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니비사우와 통합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1992년 현재의 국기가 제정되기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통합이 안된게 다행이다. 2009년에 뎅기열이 발생하자 카보베르데 방역당국이 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 등으로부터 방역팀을 지원받아 대대적인 방역작업에 나서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중산층은 휴대폰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주변 국가들에 비해선 매우 안정적이다. 주요 산업은 관광업을 필두로 한 서비스 산업이고, 그 외에는 어업과 항만 산업이 있다. 최근에는 포르투갈의 경제 침체로 인하여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으므로 경제성장률이 조금이라도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서아프리카 지역 국가 가운데서 사회가 안정되고 정치적 자유도 있는 나라다. 때문인지 2010년대 들어선 포르투갈에서 유로존 경제위기 등으로 청년실업이 심각해지자, 이에 절망한 2~30대 청년들이 대거 포르투갈을 버리고 이 나라로 건너오는 케이스도 생겼다. 그래서 다시 점점 활력을 찾아가는 아이러니한 상황. 포르투갈 청년들 입장에선 일자리도 없고 미어터지는 본국에서 N포 세대가 되느니 차라리 언어, 종교, 문화적 코드가 어느 정도 맞는 이 나라에 건너와 떵떵거리고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포르투갈 본토와도 생각보다 멀지 않은 거리로 비행기로 리스본에서 6시간 정도. 2010년대 세계 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정치적 자유 지수와 시민적 자유 지수가 동시에 1점을 받았다.[6] 또한 취약국가지수에서는 73.7점으로 세계에서 94위를 기록했다. 이건 아프리카에서 국가 실패 위험이 8번째로 적은 국가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겨우 5년 전인 2008년에는 80.7점으로 65위였다. 5년 새 30계단 가까이 내려간
셈. 2021년 기준으로는 64.2점으로 110위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아프리카에서 국가 실패 위험이 5번째로 낮은 수치다.) 2021년 EIU의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도 32위로 체코와 동급을 기록했다.[7] 국경없는 기자회가 집계한 2021년 언론자유지수에서는 한국(42위), 미국(44위), 일본(67위)보다도 높은 27위를 기록했다.
또한 2014년 서아프리카 일대에서 에볼라가 번졌을 때 카보베르데는 에볼라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리적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다만 2016년 초기에는 소두증 등 지카 바이러스가 나타나기도 했었다.
수도인 프라이아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이외에도 몇몇 국제공항이 있지만 대부분 폐쇄되었다고 한다. 도로는 대부분 조약돌로 포장돼있으나 최근 중국의 원조로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있다. 작은 섬이 여럿 모인 국토 특성상 현재 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와 도시는 서아프리카의 최서단인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임에도 프라이아의 국제공항에서 직항편이 드문 편이다. 오히려 후술되어있듯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역사 때문에 더 멀리 있는 리스본과 항공편이 비교적 더 많다.
한국에서 가기 위해서는 항공편을 여러 번 환승해야하는데, 카보베르데에 들어가기 전 대개 리스본을 많이 경유하지만 그 리스본으로 가는 한국발 직항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카보베르데가 포르투갈 식민지였다 보니 카보베르데 항공과 TAP 포르투갈 항공이 모두 리스본과 카보베르데 간 항공편을 운항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 (인천)/ 부산(김해) ↔ 리스본, 리스본 ↔ 프라이아 구간을 따로 끊어야 하며, 이렇게 끊을 경우 인천 출발은 1,200달러 정도, 김해 출발은 1,500달러
정도 한다. 만약 인천 ↔ 프라이아를 한 구간으로 끊을 경우 최소 3,000달러 정도 하므로 주의할 것. 그래서 캐세이퍼시픽으로 인천/김해-홍콩-런던을 이용 후 히드로 국제공항에서 영국항공으로 리스본, 그리고 리스본에서 다시 TAP로 이 나라로 가는게 효율적이다. 아니면 두바이 국제공항을 거치는 에미레이트 항공이나 이스탄불을 거치는 터키항공도 있다. 2022년 3월 한국인 여행자(차박차박)가 카보베르데 프라이아 국제공항에서 명확한 이유없이 입국거부를 당하는 일이 발
생했다. 입국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구비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주머니에 현금이 없다는 이유로 입국거부(주머니에 달러는 있었고 유로가 없었다고 함)를 당한 것이다. 아프리카라고는 하지만 이 나라가 신용카드조차 통용이 안 될 정도로 격오지는 아니다. 단지 소지현금이 없다=불법체류시도 라는 인식이 박혀있어서인지, 아니면 COVID-19의 발원지인 중국 때문에 동양인 전체를 차별하는 행위인지는 위 영상만으로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런 비상식적인 입국거부 사례가 발생한 만큼 이 나라에 입국하려는 여행객은 각별한 주의와 사전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카보베르데/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크게 북부의 바를라벤투(Barlavento)[8] 제도, 남부의 소타벤투(Sotavento)[9] 제도로 구분된다.
자유의 노래(포르투갈어: Cântico da Liberdade)는 카보베르데의 국가이다. 아밀카르 스펜세르 로페스가 작사했고, 아달베르토 이히노 타바레스 실바가 작곡하였다.
원본가사 | 한국어 가사 | |
후렴 | ||
Canta, irmão Canta, meu irmão Que a liberdade é hino E o homem a certeza. | 형제여, 노래하라 나의 형제여, 노래하라 자유는 찬송가라네 그 사람은 확실하다네. | |
1절 | ||
Com dignidade, enterra a semente No pó da ilha nua; No despenhadeiro da vida A esperança é do tamanho do mar Que nos abraça, Sentinela de mares e ventos Perseverantes Entre estrelas e o Atlântico Entoa o cântico da liberdade. | 진심을 다해 씨앗을 심었네 벌거벗은 섬의 먼지에서 인생의 절벽에서 희망은 바다처럼 크다네 바다와 바람의 산호초는 우리를 꼭 껴안았다네 변하지 않는 별과 대서양 사이에서 우린 자유의 노래를 읊조리네. |
14. 여담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디바 세자리아 에보라가 바로 이 나라 출신. 특유의 애수어린 목소리로 카보베르데 모르나 음악의 여왕이라 불렸다. 이외의 뮤지션으론 페드로 코스타 영화에 삽입된 Os Tubaroes 같은 카보베르데 록 밴드도 있다. 스포츠는 축구가 인기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나니가 여기 태생이다. 또한 스웨덴의 레전드 축구선수 헨릭 라르손의 아버지가 여기 출신이다. 파트리크 비에이라도 여기 혈통이다. 국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카보베르데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한국과는 1988년에 수교하였고,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하였다. 1988 서울 올림픽이 열렸을 당시에는 IOC 정회원 가입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포르투갈 감독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 대부분이 이 나라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용암의 집을 보면 살라자르 정권 하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카보베르데로 떠났다는걸 알 수 있다. 캠퍼 애니메이션 1화에서는 콘도 미코토가 이 나라에서 보내온 편지가 나왔다. 미드 화이트칼라에서 주인공 닐 카프리가 FBI를 피해 도피한 곳이기도 하다.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가장 많이 믿으며(약 85% 이상) 그 다음으로 개신교 및 기타 기독교 종파들을 믿는다. 이슬람과 그 외의 다른 종교들도 각자 극소수로서 존재한다. 약 10%가 무종교에 해당된다.
Cape Verde - Santa Maria Beach
(산타 마리아 해변의 카보 베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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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카부 베르드 Cabo Verde. 찰랑거리는 리듬 속 망향(望鄕)의 노래
바다를 숙명으로 여기면서 살아 온 사람들의 아련한 정서를 표현하는 음악 모르나(morna), 이 작은 아프리카의 섬나라 카부 베르데의 음악 속에는 까부베르드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바다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팍팍한 삶의 이야기가 마치 검푸른 바다처럼 짙은 감동으로 담겨 있는데 음악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Cabo Verde의 디바 "Cesaria Evora 세자리아 에보라" '슬퍼하다'라는 뜻의 'Mourn'에서 유래한 모르나는 아프리카 토속 리듬 위에
포르투갈의 파두, 브라질 서정 음악 모디냐(Modinha), 영국 뱃사람들이 부르던 발라드가 섞여 경쾌하면서 슬픔과 애수가 깔린 음악이다. 대서양의 한가운데 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카부베르드(Cape Verde)라는 작은 나라가 있다. 15세기 포루투갈 사람들이 무인도였던 이 섬을 발견 했고 정착민이 생겼다. 노예무역이 성했던 시절에는 노예선의 정박지로 발전했다. 이곳 전통음악을 모르나(Morna)라고 하는데 아프리카와 남미대륙 사이의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프리카와 남미의 문화적 영향을 보여준다.
Cesaria Evora - Sodade
소다드는 "고향에 대한 짙은 그리움"에 대한 노래이며 포르투갈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은 이 단어는 절대 다른 언어로는 완벽하게 번역될 수 없는 단어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사우다드(포르투갈식), 혹은 사우다지(브라질식)라고 읽히는 이 단어는, Saudade를 품고 계속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듯 아프고, 끝내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아주 짙은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모르나의 특징은 소다드라 불리는 정서인데, 이는 고향을 떠난 이들이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인데, 섬나라 사람들이 가난과 가뭄 등을 견디지 못하고 이민을 떠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다드란 과거의 우울한 감정을 표현하는'노스탈지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행복하였거나 슬픈 과거의 추억들과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안타까움 이상으로 과거에는 사랑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되찾을것 이라는 강한 욕망을 내포한 노래를 하고 있다. 가수로서 성공 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살던 섬 상 빈센트 Sao Vincente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가혹한 현실을 피하여 떠나온 이민자들이 들끓는 건조하고 불모지인 곳에서 2011년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때 까지 고국에 대한 지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며 가난과 헐벗은 어린이와 여성들의 삶을 도우면서 살았다.
Cesária Evora - Sodade
(세자리아 에보라 - 소다이드, Official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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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상투메로 가는 이 길
Esse caminho pa São Tomé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상투메로 가는 이 길
Esse caminho pa São Tomé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상투메로 가는 이 길
Esse caminho pra São Tomé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누가 이 먼 길을 보여 주었나요?
Quem mostrava esse caminho longe?
상투메로 가는 이 길
Esse caminho pra São Tomé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글을 많이 쓰게 된다면
Se vou escrever muito a escrever
잊어야 할 일을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면
Se vou esquecer muito a esquecer
내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Até dia que vou voltar
글을 많이 쓰게 된다면
Se vou escrever muito a escrever
잊어야 할 일을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면
Se vou esquecer muito a esquecer
내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Até dia que vou voltar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사회 사회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나의 땅, 성 니콜라스의 소다이드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내 땅의 사회, 상 니콜라우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내 땅의 사회, 상 니콜라우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내 땅의 사회, 상 니콜라우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소다, 소다
Sodade, sodade
내 땅의 사회, 상 니콜라우
Sodade dessa minha terra, São Nicolau
독특한 정서를 담고 음악 애호가들의 가슴을 울리는 세계 여러 지역의 음악들 중에는 역사를 통해 그 정서의 근원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스페인에 잉카 문명의 주권을 빼앗긴 인디오들의 서글픈 한이 서린 안데스 음악이나 무어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포르투갈의 음악 파두가 그렇다. 숙명론적인 세계관이 배어 있는 포르투갈 음악 속의 정서는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지배했던 나라들의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포르투갈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리카 몇몇 나라들의 음악은 아프리카 특유의 색채감이나 율동적인 감각의 리듬보다는 선율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예상 밖의 면모를 보여 준다. 그중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
아 온 나라가 대서양에 떠 있는 섬나라 카부 베르드(Cabo Verde)다.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라는 걸출한 가수의 등장으로 인해 월드 뮤직 애호가들에게만큼은 잘 알려진 나라다. 카부 베르드는 ‘모르나(Morna)’라는 그들만의 매력적인 음악을 가지고 있다. 파두처럼 바다를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아련한 정서를 표현하며 월드 뮤직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 작은 섬나라의 음악 ‘모르나’ 속에는 카부 베르드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바다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팍팍한 삶의 이야기가 검푸른 바다처럼 짙은 감동으로 담겨 있다.
대서양의 고도(孤島) 카부 베르드
영어로는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라는 명칭으로 통용되는 카부 베르드는 서 아프리카 대륙의 세네갈 해안에서 500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대서양 한 가운데에 십여 개의 섬으로 흩뿌려져 있는 군도(群島)로 이루어져 있는 나라다. 15세기경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포르투갈 국왕의 개인 소유지였다가 식민지화되었다. 한때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를 오가는 노예선의 정박지로 번영을 누리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 노예무역이 쇠퇴하면서 카부 베르드는 점차 황량한 섬으로 변해갔다. 아프리카 대륙 서부에 위치한, 역시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를 받았던 나라인 기니비사우(Guinea-Bissau)와 연합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75년에야 단독으로 독립했다. 처음 발견할 당시 무인도였다고 전해질만큼 카부 베르드의 자연환경은 황폐하다. 여러 섬이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탓에 국토면적의 85% 이상이 암석이 많은 산림지역이며, 표층을 덮고 있는 화산재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토양이 비옥하지 않아 농경지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렇듯 황폐한 자연환경은 경제적 궁핍으로 이어졌고, 주기적으로 닥치는 가뭄과 기근은 많은 카부 베르드 사람들을 다른 나라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조국에 남아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생계형 이민으로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고향에 남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역시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덕에 바다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 북대서양의 섬나라 카보 베르데(Cabo Verde). 포르투갈어로 "푸른 곶" 이라는 뜻의 이 나라는 10여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포르투갈 항해자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무인도였다고 합니다. 이 섬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파한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는 섬에 사람을 보내 정착하도록 했고 이것으로부터 카보 베르데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6세기 카보 베르데에는 프랑스인과 유럽인이 정착하고 사탕수수
농장에 많은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상당 수의 백인들과 흑인 노예들이 살고 있었지만, 턱없이 모자라는 물과 황량한 토지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정착민이나 노예들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고 갈수록 크리올(혼혈)들이 늘어났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크리올들은 카보 베르데에 뿌리를 내려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카보 베르데 사람들은 이 곳의 부족한 강우량, 제한된 토지, 주기적으로 닥치는 가뭄과 기근 등 혹독한 시련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특히 심한 가뭄과 기근은 이 섬의 3분의 1의 인구를 앗아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는 것만이 생존을 위한 길이 되었던 겁니다. 이는 아일랜드의 역사와도 비슷한 부분인데,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카보 베르데는 아일랜드처럼 섬에 살고 있는 인구보다 해외 동포들이 더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Cesaria Evora - Vida Tem Um So Vida
(세자리아 에보라 - 인생은 한번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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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난 새벽에만 끝없는 음표를 말해요
Sô na madrugada di um note sem fim
보름달이 뜨는 길에서
Na estrada na lua cheia
사람 없는 땅에서
Na terra di ninguem
내 목소리로 태양을 노래하는 게 좋아
Bô parcê um cantar di sol na nha ôie
내 꿈 속의 달빛
Luar na nha sonho
젊고 온화한 새벽 신부
Noiva d'madrugada suave juvenil
내 영혼을 체포해줘
Bô prendê'me nha alma
난 지참금을 천 개까지 계산해
'M contá até mil dotes
보에서 아름다움을 말해보세요
Di beleza na bô
즉, 내 불쌍한 마음에 갇혀
Qui dixá preso nha pobre coraçon
난 새벽에만 끝없는 음표를 말해요
Sô na madrugada di um note sem fim
보름달이 뜨는 길에서
Na estrada na lua cheia
사람 없는 땅에서
Na terra di ninguem
내 목소리로 태양을 노래하는 게 좋아
Bô parcê um cantar di sol na nha ôie
내 꿈 속의 달빛
Luar na nha sonho
젊고 온화한 새벽 신부
Noiva d'madrugada suave juvenil
내 영혼을 체포해줘
Bô prendê'me nha alma
M은 지참금을 천 개까지 계산해
'M contá até mil dotes
디 뷰티 인 더 보
Di beleza na bô
즉, 내 불쌍한 마음에 갇혀
Qui dixá preso nha pobre coraçon
하지만 아무런 혜택도 없이 내 자유의 감옥에서
Ma na prisâo d'nha liberdade sem bô
쿤하 이유는 맛도 없이 아파
Cu nha razâo magoado sem gosto
내 영혼에는 공허함
Na nha alma um vazio
깊은 슬픔
Dum tristeza profundo
'M conchê 이 세상의 진실
'M conchê um verdade dess mundo
인생은 한번뿐이야
C'ma vida tem um sô vida
하지만 아무런 혜택도 없이 내 자유의 감옥에서
Ma na prisâo d'nha liberdade sem bô
쿤하 이유는 맛도 없이 아파
Cu nha razâo magoado sem gosto
내 영혼에는 공허함
Na nha alma um vazio
깊은 슬픔에
Dum tristeza profundo
'M conchê 이 세상의 진실
'M conchê um verdade dess mundo
인생은 한번뿐이야
C'ma vida tem um sô vida
하지만 아무런 혜택도 없이 내 자유의 감옥에서
Ma na prisâo d'nha liberdade sem bô
쿤하 이유는 맛도 없이 아파
Cu nha razâo magoado sem gosto
내 영혼에는 공허함
Na nha alma um vazio
깊은 슬픔에
Dum tristeza profundo
'M conchê 이 세상의 진실
'M conchê um verdade dess mundo
인생은 한번뿐이야
C'ma vida tem um sô vida
하지만 아무런 혜택도 없이 내 자유의 감옥에서
Ma na prisâo d'nha liberdade sem bô
쿤하 이유는 맛도 없이 아파
Cu nha razâo magoado sem gosto
내 영혼에는 공허함
Na nha alma um vazio
깊은 슬픔에
Dum tristeza profundo
'M conchê 이 세상의 진실
'M conchê um verdade dess mundo
인생은 한번뿐이야
C'ma vida tem um sô vida
그리움과 희망을 담은 노래 모르나(Morna)
카부 베르드 고유의 음악 ‘모르나’에는 이처럼 바다와 떼어놓을 수 없는 카부 베르드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떠난 사람들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움,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섬나라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가난의 슬픔이 진하게 녹아 있다. 이러한 카부 베르드 사람들이 지닌 한의 정서를 ‘소다드(Sodade)’라고 하는데, 이는 카부 베르드를 식민 지배했던 포르투갈의 음악 파두에 담겨 있는 정서인 ‘사우다드(Saudade)’와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모르나’의 주된 소재들 역시 바다, 사랑, 이별, 그리움, 향수와 같은 통속적인 것들이
다. 또 한편으로는 생계형 이민으로 인해 흩어져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기도 한다. 국내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프랑스나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의 노래 속에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흩어져 살고 있는 카부 베르드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이 노랫말로 담겨 있다. 루소포니아(Lusofonia)라는 말이 있다. 포르투갈어권의 나라 혹은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부 베르드와 같은 나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포르투갈이 식민지배했던 나라들로 포르투갈과 유사한 음악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카부 베르드의 ‘모르나’ 역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음악과 달리 선율적이고 애상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카보 베르데의 가난, 그리고 헤어짐의 풍토에서 나온 음악, 모르나. 영어의 "슬퍼하다(Mourn)"에서 유래된 모르나는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리듬 위에 경쾌한 서구적 멜로디가 얹혀져 있으며, 반복되는 리듬과 선율 뒤에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섬 사람들이 겪어온 가난의 슬픔과 망향의 아픔이 진하게 묻어 납니다. 모르나는 포르투갈및 브라질의 멜로디와 화성이 아프리카의 퍼커션, 리듬과 결합된 스타일이지만 모르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까부 베르드에 들락거리던 영국 선원들의 뱃노래(이른바 'sea-chantey')의 영향을 받아 형성
되었다는 설이 있고, 1800년대 브라질에서 형성된 모디냐 Modinha가 선원들에 의해 수입되어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포르투갈어와 아프리카의 언어가 섞인 크레올의 여운 위에 클라리넷과 아코디언, 바이올린, 기타 그리고 카바키뇨라는 작은 유럽식 기타가 어울린 음악은 아프리카를 품고 있는 대서양의 파도와 바람과도 같다. 포르투갈의 파두와 아르헨티나의 탱고, 앙골라의 라먼트(애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어원상 영어의 ‘to mourn’과 포르투갈어의 ‘morno’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뜻은 생각보다 미묘하다. 어떤 이는 말한다. “그것은 향수와 갈망, 그리움과 슬픔, 후회와 연민이 교차하고 뒤섞인 감정이다”라고..... 카부 베르드
의 음악 ‘모르나’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독특한 리듬이 지닌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조용히 일렁이고 있는 파도와도 같은 특별한 느낌의 이 리듬은 명료한 음색의 4현 기타인 카바킹뉴(Cavaquinho)와 기타에 의해 표현된다. ‘모르나’의 기원은 19세기에 브라질을 오가던 선원들에 의해 파두와 비슷한 유럽풍의 노래인 ‘모딩냐(Modinha)’가 전해지면서 생겨났다는 설을 비롯해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포르투갈 파두의 정서적인 면과 브라질 음악의 형식적인 부분들이 만
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다와 얽힌 숙명적인 그리움이 찰랑거리는 리듬 뒤에 구슬픈 감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음악인 것이다. 카부 베르드의 다른 음악 스타일로 아프리카 특유의 색채감이 묻어나는 리듬을 지닌 춤곡 양식의 ‘콜라데이라(Coladeira)’나 ‘푸나나(Funana)’ 등이 있다. 세자리아 에보라를 비롯한 카부 베르드 출신의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음악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는 스타일이지만, ‘모르나’만큼 카부 베르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한 눈에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다.
Cesaria Evora - Besame Mucho
베사메무쵸는 볼레로의 대표적인 곡으로서 볼레로라고 하면 연상되는 곡이다. 작곡가 Enrique Granados (1867~1916 스페인)가 화가 고야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쓴 피아노 작품 Goyescas suite의 "Quejas o la maja y el ruiseñor(1911)"를 1916년에 편곡하여 Goyescas라는 오페라에 사용하였고, 이 편곡을 바탕으로 멕시코의 여류 가곡 작가며 피아니스트인 콘수엘로 베라스케스 (Consuelo Velazquez)가 1941년에 만든 곡으로 1943년 서니 스카일러 (Sunny Skylar)가 가사를 붙여 베
사 메 무쵸(kiss me much)가 되었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1997년에 스윙과 발라드 스타일의 두 가지 버전으로 녹음했다.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세자리아 에보라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건 기네스 펠트로와 벤 에플렉 주연의 영화 `위대한 유산` 사운드 트랙에서인데 영화 속 노라 여사(앤 밴크로프트 분)가 부르던 `베사메 무초`가 사운드 트랙에선 에보라의 목소리로 담겼다. 담담한 목소리로 슬픔과 흥을 동시에 전하는 그의 노래는 영화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Cesaria Evora - Besame Mucho
(키스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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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Como si fuera esta noche la última vez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당신을 갖고 나중에 당신을 잃을 까봐 두렵다는 것
Que tengo miedo a tenerte y perderte después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Como si fuera esta noche la última vez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당신을 갖고 나중에 당신을 잃을 까봐 두렵다는 것
Que tengo miedo a tenerte y perderte después
나는 당신이 아주 가까이 있기를 원합니다
Quiero tenerte muy cerca
네 눈으로 나를 봐, 내 옆에 있는 너를 봐
Mirarme en tus ojos, verte junto a mí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세요
Piensa que tal vez mañana
나는 너에게서 아주 멀리, 아주 멀리 있을 것이다
Ya estaré muy lejos, muy lejos de ti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Como si fuera esta noche la última vez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당신을 갖고 나중에 당신을 잃을 까봐 두렵다는 것
Que tengo miedo a tenerte y perderte después
나는 당신이 아주 가까이 있기를 원합니다
Quiero tenerte muy cerca
네 눈으로 나를 봐, 내 옆에 있는 너를 봐
Mirarme en tus ojos, verte junto a mí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세요
Piensa que tal vez mañana
나는 너에게서 아주 멀리, 아주 멀리 있을 것이다
Ya estaré muy lejos, muy lejos de ti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Como si fuera esta noche la última vez
키스해줘 많이 키스해줘
Bésame, bésame mucho
내가 당신을 갖는 것이 두렵다는 것
Que tengo miedo a tenerte
그리고 나중에 널 잃게 돼
Y perderte después
Sumi Jo - Besame Mucho
(조수미, 키스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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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디바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열풍은 우리나라에도 월드 뮤직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고, 그 뒤를 따라 비영어권 문화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국내에도 줄을 이어 소개되어 왔다. 그중 카부 베르드라는 아프리카의 생소한 나라를 알리며 국내 음악팬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세자리아 에보라였다. ‘맨발의 디바’, ‘모르나(morna)의 여왕’으로 불리며 카부 베르드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은 연륜이 담긴 목소리로 노래하던 세자리아 에보라는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났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도 통할만한 보편적인 공감대를 지닌 그 노래들은 세월이 흘러
도 많은 사람들에게 굵직한 감동을 전할 것이다. 아프리카 전설의 맨발의 디바 여가수 세자리아 에보라 (Cesaria Evora)는 1941년 출생으로 맨발의 디바로 유명하다. 무명의 가수였던 그녀가 세계에서 주목받는 가수로 거듭난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는 7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원에 버려진 후 16살부터 카부베르데의 전통음악인 '모르나'와 '콜데라'를 배워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 번의 결혼 파경을 맞은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가 노래도 거의 포기하고 줄담배와 술에 찌들어 생활하다가 1985년 44세의 나이로 동향 가수의 초청으로 포르투갈에서 무대에 올랐는데 그때 음반 기획사에 눈에 띄어 1988년 47세의 늦은 나이로
첫 앨범 발표하며 정식 데뷔했다. 그녀의 음색이 포르투갈의 파두와 비슷하고 선율은 브라질 특유의 부드러움과 닮았고 여기에 아프리카 퍼커션 리듬이 가미되어 모르나만의 독특한 정취로 카보베르데의 음악을 전 세계에 퍼뜨리며 월드뮤직을 대표하는 스타로 칭송받았다. 그녀의 대표곡으로는 '앤솔로지' '소다드,'앙골라', '베이로나의 피', '시제'등등 2004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월드 뮤직 앨범상을 받았지만, 그녀는 2011년 12월에 사망하였다.
Cesaria Evora - Angola
(앙골라)
▼
Lyrics
이 삶은 당신이 무엇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Ess vida sabe qu'nhôs ta vivê
패러디 데이와 노트 만체
Parodia dia e note manché
들것은 없지만 엉덩이 사부라
Sem maca ma cu sabura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삶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Ess vida sabe qu'nhôs ta vivê
패러디 데이와 노트 만체
Parodia dia e note manché
들것 없음 ma ass sabura
Sem maca ma cu sabura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잘 cu hora pa'me ba nha camino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잘 cu hora pa'me ba nha camino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이러한 경험의 공존
Ess convivência dess nhôs vivência
결과에 따른 인내심
Paciência dum consequência
사치에 대한 저항
Resistência dum estravagância
이러한 경험의 공존
Ess convivência dess nhôs vivência
결과에 따른 인내심
Paciência dum consequência
사치에 대한 저항
Resistência dum estravagância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친구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어
Ami nhos ca ta matá-me
잘 cu hora pa'me ba nha camino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잘 cu hora pa'me ba nha camino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잘 cu hora pa'me ba nha camino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글쎄, 이제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줄 시간이야'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이러한 경험의 공존
Ess convivência dess nhôs vivência
결과에 따른 인내심
Paciência dum consequência
사치에 대한 저항
Resistência dum estravagância
이러한 경험의 공존
Ess convivência dess nhôs vivência
결과에 대한 인내심
Paciência dum consequência
사치에 대한 저항
Resistência dum estravagância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글쎄, 이제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줄 시간이야'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친구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어
Ami nhos ca ta matá-me
'글쎄, 이제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줄 시간이야'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친구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어
Ami nhos ca ta matá-me
잘 cu hora pa'me ba nha camino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친구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어
Ami nhos ca ta matá-me
'글쎄, 이제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줄 시간이야'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친구들이 나를 죽일 수도 있어
Ami nhos ca ta matá-me
'글쎄, 이제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줄 시간이야'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내 친구들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Ami nhos ca ta matá-me
'글쎄, 이제 가는 길에 나를 태워줄 시간이야'
'M bem cu hora pa'me ba nha caminho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앙골라 앙골라
Angola angola
안녕, 사람들이 뭘 알아?
Oi qu'povo sabe
국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면서 낙후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카부 베르드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힘들다. 세자리아 에보라 역시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들기 이전에는, 그녀가 지닌 목소리처럼 힘들고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사웅 비센트(São Vicente) 섬의 항구 도시인 민델루(Mindelo)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남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면서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다시는 한 지붕 아래 남자를 두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큰 상실감에 빠져 지내던 그녀는 카부 베르드 출신의 한 프랑스 프로듀서에 의해 프랑스 파리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 온
갖 세월의 풍상을 겪었던 세자리아 에보라는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인생의 깊이가 담긴 목소리로 ‘모르나’를 노래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세계를 매료시켰다. 1988년 자신의 별명이기도 한 [La Diva aux Pieds Nus(맨발의 디바)]라는 제목으로 첫 앨범을 발표한 뒤 수많은 국제무대에서 최고의 월드 뮤직 디바로 인정받으며 활동해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깊고도 독특한 목소리로 ‘모르나’를 노래하는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결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 오랜 시간을 보냈던 탓인지 자신이 겪어왔던 세월의 풍상만큼이나 깊은 주름살이 패인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를 닮은 ‘모르나’의 리듬을 배경으로 노래하는 그 목소리는 짙은 애상과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그녀의 연륜 있는 목소리는 카부 베르드 여인들이 짊어져야 했던 고단한 삶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에 더욱 진솔한 감동을 전한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목소리는 영화 속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가 음악을 맡았던 에밀 쿠스트리챠(Emir Kusturica) 감독의 영화 [언더그라운드] 속의 ‘Ausencia(부재)’라는 곡이나,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 노래했던 ‘Besame Mucho’를 통해 세자리아 에보라의 목소리를 먼저 만나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편 그녀가 ‘맨발의 디바’로 불리는 이유는 맨발로 무대에서 노래하기도 하고, 고향 민델루의 바닷가를 맨발로 산책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Roda Vida - Teofilo Chantre
(인생의 수레바퀴)
▼
Lyrics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해요
M tem na nha lembranca um tempo d'inocenca
인생은 돌고 돌고 돌아
Vido tem volta e volta
그렇구나, 그럴 리가 없어.
Qui to leva' no podia ser
당신은 신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No t'ama na tude confianca
우리의 노다지, 젊음의 새로운 사랑을 믿습니까?
Ta cre na nos bonanca amor novo na mocidode
Ta comve'no pa se naiveté
Ta comve'no pa se ingenuidade
아, 인생에서 실망한 적이 없었다면
Ah se nunca tivesse desilusao roda vida vida
바퀴바퀴 시간 노래 노래 바람
Roda roda tempo canta canta vento
꿈이 있는 사람은 읽으러 가세요
Quem tem sonho vai a lido
노래하며 생명을 주는 아이는 매혹적이다
A crianca que canta e do vida se encanta
궁금하고 꿈을 꾸지만 아직은 아픔을 모르겠어
Maravilhando e sonhando nao sab ainda do dor
사랑을 잃은 첫 느낌
De perder o seu candor a sensacao primeira
자연이 아낌없이 베푸는 것
Que a natureza oferece na sua generosidade
일시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Pode nao ser passageira
그 신선함을 둥글게 평생 간직한다면
Se guardarmos o seu frescor roda roda vida
바퀴바퀴 시간 노래 노래 바람
Roda roda tempo canta canta vento
피가 있는 사람은 일하러 가세요
Quem tem sango vai a lida
세자리아 에보라와 함께 모르나의 매력을 전해 온 다른 카부 베르드 출신 뮤지션들 역시 프랑스, 미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세계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작곡자이자 최고의 작곡가이자 매력적인 음색으로 노래하는 남성 가수 테오필루 샹트르(Teofilo Chantre)는 세자리아 에보라의 여러 노래들을 작곡해 준 인물이기도 하며, 세자리아 에보라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이기도 했다. 국내 월드 뮤직 페스티벌에도 참여해 좋은 인상
을 남긴바 있으며, 그의 대표곡 ‘Roda Vida(인생의 수레바퀴)’는 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는 월드 뮤직 명곡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우(Bau)라는 뮤지션도 빼놓을 수 없다.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의 마지막 장면을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이다. 세계적인 안무가인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무용 작품 ‘마주르카 포고(Masurca Fogo)’ 뒤에 흐르던 ‘Raquel’이라는 음악의 주인공이다. 바우는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연주자다. 기타, 바이올린, 카바킹뉴 등의 연주를 통해 ‘모르나’ 특유의 정서를 표현하며 카부 베르드의 음악을 세계에 알리며 찬사를 받고 있다.
Cesaria Evora - Petit Pays
(작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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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포르투갈어 | 포르투갈어를 구글을 이용해서 한국어로 번역함 |
La na céu bô é um estrela Ki ka ta brilha Li na mar bô é um areia Ki ka ta moiá Espaiód nesse munde fora So rotcha i már Terra pobre chei di amor Tem morna tem coladera Terra sabe chei di amor Tem batuco tem funaná Oi tonte sodade Sodade, sodade Oi tonte sodade Sodade sem fim Petit pays, je t'aime beaucoup Petit petit, je l'aime beaucoup | 저기 하늘에는 보가 별이네 키카타샤인 나는 바다에서 읽었다 bô는 모래다 키 카 타 모이아 이 세상 밖의 공간 그러니 잘 지내요 사랑이 가득한 가난한 땅 따뜻한 것도 있고 콜라데라도 있고 지구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투코(batuco)가 있고, 푸나나(funaná)가 있다 안녕 바보 소다드 소다, 소다 안녕 바보 소다드 끝없는 소다이드 작은 나라야, 정말 사랑해 작은 나라야, 정말 사랑해 |
카보베르데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섬나라로서 세네갈의 해안에서 약 620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10개의 큰 섬과 8개의 작은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그곳은 처음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오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460년,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해 가는 중에 발견해, 중요 연결 거점 중 하나로 삼으면서 아프리카로부터 많은 흑인들이 이 군도에 노예로 끌려오게 되면서 카보 베르데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용수 공급과 사탕수수 재배, 노예 거래의 중심으로 시작한 나라. 그런 그들의 종속된 역사는 1975년이 돼서야 비로소 독립을 쟁취한다. 500년의 포르투갈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투쟁과 그 결과인
승리가 느껴지지만 아직도 언어문제와 정치적 이해관계들로 어두운 현실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역 전진기지이자 노예무역의 중간기착지역할을 하면서 이 섬은 유럽의 백인-아프리카 흑인간에 태어난 크리올 (혼혈인)이 기하급수적으로 현재 인구의 약80%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열악한 자연환경은 카보베르데에 혹독한 시련을 거듭 안겨주었습니다. 사막과 사바나지역으로 뒤덮힌 땅은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주기적인 가뭄과 또 이에 따른 기근은 이 땅을 죽음의 땅으로
내몰았습니다. 1975년 정식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국을 등지고 유럽과 아메리카등지로 떠났으며 지금도 이민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현재 카보베르데의 인구는 불과 45만명에 불과하고 전체 인구의 3/5이 20세미만입니다.평균 수명은 65세입니다. 경제는 매우 취약하여 식량의 대부분을 거의 수입과 지원에 의존합니다만 이 섬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매우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에서 뒤떨어진 아프리카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가 딱 하나 자랑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음악과 문학" 입니다.
Cesaria Evora - Maria Elena
(세자리아 에보라 - 마리아 엘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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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당신의 것이 내 마음이에요
Tuyo es mi corazón
오, 내 사랑의 태양
Oh, sol de mi querer
내 환상의 여자
Mujer de mi ilusión
내 사랑 당신을 봉헌합니다
Mi amor te consagré
내 인생은 그것을 아름답게
Mi vida la embellece
푸른 희망
Una esperanza azul
내 인생에는 하늘이 있어요
Mi vida tiene un cielo
그에게 무엇을 주었나요?
Que le diste tú
당신의 것이 내 마음이에요
Tuyo es mi corazón
오, 내 사랑의 태양
Oh, sol de mi querer
당신은 내 존재의 전부입니다
Tuyo es todo mi ser
그것은 당신 것입니다, 여자
Tuyo es, mujer
나는 이미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바쳤어요
Ya todo el corazón yo le entregué
당신은 나의 믿음입니다
Eres mi fe
당신은 나의 신입니다
Eres mi Dios
너는 나의 사랑이야
Eres mi amor
당신의 것이 내 마음이에요
Tuyo es mi corazón
오, 내 사랑의 태양
Oh, sol de mi querer
당신은 내 존재의 전부입니다
Tuyo es todo mi ser
그것은 당신 것입니다, 여자
Tuyo es, mujer
나는 이미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바쳤어요
Ya todo el corazón yo le entregué
당신은 나의 믿음입니다
Eres mi fe
당신은 나의 신입니다
Eres mi Dios
너는 나의 사랑이야
Eres mi amor
나는 이미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바쳤어요
Ya todo el corazón yo le entregué
당신은 나의 믿음입니다
Eres mi fe
당신은 나의 신입니다
Eres mi Dios
너는 나의 사랑이야
Eres mi amor
Maria Elena - Los Indios Tabajaras
(마리아 엘레나 - 로스 인디오스 타바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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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지만 대부분의 카보베르데인들은 크리오울로(Crioulo)를 사용한다 합니다.. 크리오울로(Crioulo)는 아프리카어와 다른 여러지역의 유럽어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변형된 고풍스런 포르투갈어를 말한다 합니다. 카보베르데는 크레올로 문학과 음악에서 풍부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보베르테는 유럽 백인의 후예가 아주 많이 살고 있으므로 포르투갈의 문화 유산이 아프리카의 문화보다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상당수의 문학작품이 해방과 독립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또한 카보베르데인이 미국으로 건너간 '아메리카노'에 대한 주제도 많다 합니다. 음악장르도 다양하여 가장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춤곡 풋스톰핑
퓨나나입니다. 또한 느리고 우울한 듯한 모르나, 빠른 움직임의 코라데이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모진 노예의 역사,척박한 자연환경,유럽문화+아프리카의 문화등이 뒤섞여 카보베르데 특유의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카보베르데의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이가 바로 "세자리아 에볼라 Cesaria Evora" 입니다. 세자리아 에볼라는 카보베르데의 음악 "모르나"를 상징하는 디바입니다. 1941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노래를 시작하였습니다. 열두살에 처음 결혼을 한 후 남자들의 배신등으로 이혼과 재혼등을 반복,, 그녀 역시 카보베르데 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모진 인생을 보내었습니다. 쎄자리아 에보라를 포함한 모르나 아티스트들 중에는
싸웅 비쎈뜨(Sao Vicente) 섬, 특히 그곳의 도시인 민델루 Mindelo 출신이 많다. 항구 도시인 민델루는 바와 카페, 그리고 음악이 많은 곳이었고, 에보라는 1941년 이곳에서 태어나 일곱 명의 남매와 함께 자랐다.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꾸 샤비에르 다 끄루스(Francisco Xavier Da Cruz)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그곳의 유명한 작곡가인 레자(B. Leza)와 사촌 관계였다. 쎄자리아 에보라가 10살 때 레자가, 2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형제들은 하나 둘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고, 에보
라는 12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그녀는 형제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까부 베르드를 떠나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에보라는 레자가 작곡한 곡에 민델루의 전설적인 음유 시인 에우제니우 따바레스(Eugenio Tavares)의 시를 가사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17살 때부터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녀는 1960년대 후반에는 까부 베르드 전체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무렵 라디오 방송을 녹음한 테이프 두 종이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에서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Cesaria Evora -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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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다음 중 하나입니다.
Que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르도 알아요, 그 사람 출신이에요
Le sabe, el é dos
누가 알고 싶어?
Quem qu're sabê
베이로나 피는 그래' 알잖아
Sangue Beirona é sim' sabe
Ta ba panha'l ê la na fundo dilopera
Ta ba panha'l ê la na fundo di ladera
누가 알고 싶어?
Quem qu're sabê
베이로나 피는 그래' 알잖아
Sangue Beirona é sim' sabe
Ta ba panha'l ê la na fundo dilopera
Ta ba panha'l ê la na fundo di lader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 사람은 알아요, 그 사람 출신이에요
El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 사람은 알아요, 그 사람 출신이에요
El sabe, el é dos
Si bô c'octha'l
Si bô c'octha'l
경사면 바닥에서
La na fundo di ladera
그것은 내 잘못이야'
Bo ta culpa'
이 콜라데라는 누가 만드는 걸까요?
Ê quem fazé ess coladera
Si bô c'octha'l
Si bô c'octha'l
경사면 바닥에서
La na fundo di ladera
그것은 내 잘못이야'
Bo ta culpa'
이 콜라데라는 누가 만드는 걸까요?
Ê quem fazé ess colader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르도 알아요, 그 사람 출신이에요
Le sabe, el é dos
Si bô c'octha'l
Si bô c'octha'l
경사면 바닥에서
La na fundo di ladera
그것은 내 잘못이야'
Bo ta culpa'
이 콜라데라는 누가 만드는 걸까요?
Ê quem fazé ess coladera
Si bô c'octha'l
Si bô c'octha'l
경사면 바닥에서
La na fundo di ladera
그것은 내 잘못이야'
Bo ta culpa'
이 콜라데라는 누가 만드는 걸까요?
Ê quem fazé ess colader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는 알고 있어요, 그는 출신이에요
El é sabe, el é dos
베이로나의 피
Sangue de Beirona
그렇지만 1970년대 중반 그녀는 더 이상의 활동을 포기했는데, 무엇보다도 '노래 한 곡당 25 에스꾸두(약 800원)를 받는' 민델루의 상황에서는 노래부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개인적 불행도 겹쳤는데 12살 때의 첫 번째 결혼을 포함하여 모두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일생을 사는 동안 한 지붕 안에 남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쓰라린 결론만을 낳았다. 시련과 고통의 나날은 폭음과 폭연의 나날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여러 여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남편들이지요. 그게 내가 지금 '악'의 근원을 잘라 버리려는 이유입니다". 일곱남매로 태어
났으나 그녀를 제외한 모든 형제가 섬을 떠나 이민을 간 탓에 그녀의 외로움도 아마 컸으리라 봅니다. 1970년부터 노래를 중단하고 술과 담배에 의존하며 폐인같은 생활을 하다가 1985년 마흔다섯살이란 나이에 다시 재기,파리에서 "맨발의 디바"란 이름으로 유럽 데뷔 앨범을 냅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카보베르데의 "모르나"는 파리에서 열렬한 인기를 얻습니다. 크리올어로 만들어진 그녀의 노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으나 이별과 죽음,실패,고통등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법한 음률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고난의 세월로 보내온 세자리아 에볼라의 희노애락이 노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한편 카보베르데 최고의 남성가수이자 작곡가로는 "테오필루 샹트레"가 있습니다. 테오필루 샹트레는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는 카보베르데 섬사람들과 그들의 바다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곡들을 많이 작사,작곡하고 직접 많이 불렀습니다. 이처럼 세자리아 에볼라나 테오필루 샹트레가 부르는 카보베르데의 노래에는 "소다드"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소다드는 우리나라식 풀이로 하자면 "한"입니다. 슬픔과 회한,,하지만 그 속
에서도 꾿꾿이 이겨내는 또는 이겨낼수밖에 없는 절박한 인생 그러한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합니다. '악의 근원'을 잘라버린 에보라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은 1985년 45세의 나이에 포르투갈로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이 녹음은 까부 베르드 출신 여가수들의 앤솔로지 형식의 앨범을 위한 것이었고, 대중적인 레코딩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현재의 지위로 등극시킨 것은 동향 출신으로 파리로 이민하여 살고 있던 호세 다 실바(Jose Da Silva)와의 만남에서 음악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 씰바와 더불어 에보라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네 장의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습니다.
Cesaria Evora - Mar Azul
(푸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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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바다, 정말 좋은데, 딕삼바이
O mar, detá quitinho bô dixam bai
Bô dixam bai spiá nha terra
Bô dixam bai spiá nha terra
Bô dixam Bai 우리 어머니를 구해주세요
Bô dixam bai salvá nha Mâe
아 바다
Oh Mar
Detá quitinho bô dixam bai
Detá quitinho bô dixam bai
Bô dixam bai spiá nha terra
Bô dixam bai spiá nha terra
Bô dixam Bai 우리 어머니를 구해주세요
Bô dixam bai salvá nha Mâe
아 바다
Oh Mar
푸른 바다, 유유히 올라갔지
Mar azul, subi mansinho
보름달 빛 길
Lua cheia lumiam caminho
팜 바 나 테라 디 메우
Pam ba nha terra di meu
세인트 빈센트 페퀴니노
São Vicente pequinino
Pam bà armra nha cretcheu...
Pam bà braçá nha cretcheu...
푸른 바다, 유유히 올라갔지
Mar azul, subi mansinho
보름달 빛 길
Lua cheia lumiam caminho
팜 바 나 테라 디 메우
Pam ba nha terra di meu
세인트 빈센트 페퀴니노
São Vicente pequinino
Pam bà armra nha cretcheu...
Pam bà braçá nha cretcheu...
아 바다아 시간은 흘러가네
Oh mar, anô passá tempo corrê
해가 뜨고 달이 뜬다
Sol raiá, lua sai
미는 머나먼 땅에 부재중이다
A mi ausente na terra longe
아 바다야, 아 바다야
Oh Mar, oh mar
한 해가 흘러 시간이 흘러
Anô passá tempo corrê
해가 뜨고 달이 뜬다
Sol raiá, lua sai
미는 머나먼 땅에 부재중이다
A mi ausente na terra longe
아 바다...
Oh Mar...
푸른 바다, 유유히 올라갔지
Mar azul, subi mansinho
보름달 빛 길
Lua cheia lumiam caminho
팜 바 나 테라 디 메우
Pam ba nha terra di meu
세인트 빈센트 페퀴니노
São Vicente pequinino
Pam bà braçá nha cretcheu
Pam bà braçá nha cretcheu
푸른 바다, 유유히 올라갔지
Mar azul, subi mansinho
보름달 빛 길
Lua cheia lumiam caminho
팜 바 나 테라 디 메우
Pam ba nha terra di meu
세인트 빈센트 페퀴니노
São Vicente pequinino
Pam bà armra nha cretcheu...
Pam bà braçá nha cretcheu...
1988년 첫 앨범 [La Diva aux Pieds Nus(맨발의 디바)]가 Lusafrica 레이블에서 발매되었고 1990년 두 번째 앨범 [Distino di Belita]을 발매 되었으며1991년 세 번째 앨범이자 어쿠스틱한 분위기의 [Mar Azul(푸른 바다)] 발매되었고 1992년 [Miss Perfumada(향기로운 처녀)]가 발매 되었습니다. 그녀의 앨범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세 번째 앨범 ‘Mar Azul’ 부터였다. 그리고 1992년 발매된 ‘Miss Perfumado’가 드디어 프랑스에서만 30만장 이상을 판매하며 에보라 열풍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이어 발표한 Cesaria, Cabo Verde, Best of Cesaria 등의 앨범은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유럽을 넘어 미국, 캐나다 그리고 일본, 홍콩에 이르는
에보라의 세계 투어는 과히 폭발적이었다. 에보라의 목소리에 전 세계 관객들과 평단은 환호했고, 언론은 그녀를 빌리 홀리데이에 비유했다. ‘세자리에 에보라’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그녀의 노래가 처음 소개된 것은 기네스 팰트로우와 에단 호크가 출연한 영화 <위대한 유산>을 통해서였다. 남녀 주인공이 정원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담담하면서도 깊이있는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세자리아의 ‘베사메무초’는 영화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귓가를 잔잔히 스친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깊은 그리움을 가지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갈 수 밖에 없었던 카보 베르데 사람들. 그 아픈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그녀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자신의 조국인 카보 베르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우리의 가슴 속 밑바닥의 심연을 울립니다. 에보라의 타계 이후 카보베르데에서는 이틀 동안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으며, 항상 문이 열려 있던 그의 집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생전 그가 즐겨 피웠던 담배를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첫 앨범의 제목처럼 에보라는 '맨발의 디바'라고 불리는데 그녀가 민델루의 거리를 맨발로 산책하기를 즐겼고 공연장에서도 종종 맨발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 데서 연유한 별명입니다. '월드 뮤직'이라는 범주를 마케팅하기 위해서는 '자연주의적'이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이미지가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적어
도 에보라의 경우 이런 마케팅이 가식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맨발은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가 시련을 거친 끝에 비로소 터득한 자립의 의지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까부 베르드 여자들의 유달리 고단한 삶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그녀의 목소리와 동일합니다. 줄담배와 와인으로 쩔은 목소리는 아름다운 음색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폭발적 창법으로 분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세계에서 가장 예외적인 곳에서 자란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음악이 주는 공감은 가장 예외적 경험을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가장 길고 넓었다는 역설도 얼마든지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 음악 평론가및 넷상 여러사람들 글 편집 ]
① 아프리카의 숨겨진 보석, 카보베르데(Cabo Verde)
대서양 중앙에 있는 카보베르데는 문화, 역사, 맛있는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을 찾는 사람들에게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사진을 통해 카보 베르드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해보자.
②카보베르데
카보베르데는 아프리카 대륙 서쪽 해안에 있는 섬으로 대서양 중앙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10개의 화산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③역사
무인도였던 이 섬들은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했다. 이 나라는 1975년에 독립했다.
④인구
카보베르데의 인구는 약 54만명이다.
⑤언어
카보베르데의 공식 언어는 포르투갈어이지만 카보베르데 크리올어가 일상어로 쓰이며 더 많이 사용된다.
⑥음식
카보베르데의 음식은 주로 생선, 옥수수 그리고 밥으로 구성된다. 카보베르데의 국민 음식은 카츄파(cachupa)로 오랜 시간 동안 옥수수와 콩을 넣어 끓은 스튜이다. 이 스튜에 생선 및 고기를 곁들여 먹는다.
⑦경제
카보베르데의 경제는 주로 관광에 의존하며 농업과 어업은 GDP의 약 9%를 차지한다.
⑧교통
섬을 잇는 교통편은 주로 비행기이며 에어라인 빈터(airline Binter)가 카보베르데의 모든 국내선을 맡고 있다. 또한 배를 타고 섬을 이동할 수도 있다.
⑨기후
날씨는 연중 온화하며 우기는 보통 8월부터 10월 사이이다.
⑩비자
카보베르데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반드시 비자를 취득해야 한다. 입국하기 전에 비자를 취득하거나 공항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⑪ 산티아고
산티아고는 크기와 인구면에서 가장 큰 섬으로 카보베르데의 수도인 프라이아(Praia)가 있는 곳이다.
⑫산티아고
산티아고는 아름다운 경치와 다양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차를 타고 섬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⑬산티아고
산티아고섬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은 올드타운인 시다드 벨랴("Cidade Velha"), 테라팔 해변(Terrafal beach) 그리고 포르투갈 독재 정권 시기 정치 범죄자들이 수감되었던 테라팔 수용소(Tarrafal concentration camp)이다.
⑭상 빈센트 (São Vicente)
상 빈센트는 카보베르데의 문화적 중심지로 여겨지며 유명한 음악 장르인 "모르나스(mornas)"와 "콜라데라(coladera)"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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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상 빈센트 (São Vicente)
카보베르데의 작가들과 아티스트 또한 상 빈센트와 연결되어 있다. 이 섬은 카보베르데의 문화를 체험할 있는 훌륭한 장소이다.
⑯상 빈센트 (São Vicente)
민델로(Mindelo)지역이 가장 유명하며 라기냐(Laginha) 해변의 파란 바닷물도 꼭 즐겨야 하는 명소이다.
⑰산투안탕섬 (Santo Antão)
산투안탕섬은 하이킹과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섬이다.
⑱산투안탕섬 (Santo Antão)
해안 절벽과 아무도 없는 해변부터 북동쪽에 있는 수풀림까지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⑲산투안탕섬 (Santo Antão)
이 섬을 모두 둘러보는데 적어도 3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카보베르데의 전통술인 그로그("grogue")를 맛보도록 하자.
⑳살섬(Sal)
살섬은 관광객들이 가장 맞이 찾는 섬으로 카보베르데에서 최고의 해변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휴식을 취하고 싶다면 살섬이 안성맞춤이다.
㉑살섬(Sal)
살섬의 가장 유명한 해변은 산타 마리아(Santa Maria)해변으로 아침마다 현지인들이 신선한 생선으르 팔기 위해 항구로 모여든다.
㉒살섬(Sal)
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다면 폰타 프레타 해변(Ponta Preta)로 가보자. 하지만 부라코나("Blue eyes")를 방문하는 것을 잊지 마라. 부라코나는 해저 동굴이 있는 천연 풀장이다.
㉓상니콜라우섬 (São Nicolau)
상니콜라우 섬(São Nicolau)의 환상적인 봉우리와 경치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당긴다.
㉔상니콜라우섬 (São Nicolau)
몬트 고르두 국립공원(The Monte Gordo Natural Park)과 바이슈 호샤 해변(Baixo Rocha Beach )이 상니콜라우 섬의 관광 명소이다.
㉕포구섬(Fogo)
포구섬은 활화산이 있는 곳으로 2015년에 분출한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산책길과 함께 광활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㉖포구섬(Fogo)
또한 포구섬에서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카보베르데의 랍스터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와인 또한 매우 훌륭하다.
㉗보아비스타섬(Boavista)
보아비스타섬 또한 해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섬이다. 이 섬은 다소 건조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㉘보아비스타섬(Boavista)
겨울에 가면 고래를 볼 수 있으며 여름에 가면 거북이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보아비스타 섬의 산타 모니카(Santa Mónica) 해변과 샤브스(Chaves) 해변을 방문해보자!
㉙브라바섬(Brava)
작물을 기르기에 알맞은 기후 덕분에 브라바섬에는 농업이 이루어진다.
㉚음악
음악은 카보베르드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로 모르나, 콜라데라 그리고 푸나나를 포함해 여러 전통 음악이 있다고 한다. 세자리아 에보라(Cesária Évora)는 카보베르데를 대표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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