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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원숙기(기원전 49년1월 - 기원전 44년 3월)
'루비콘' 직후
루비콘 강을 건넌 뒤 국경도시 리미니까지는 직선거리로 15㎞에 불과하다. 로마 군단의 행군속도가 시속 5㎞이므로, 오전 10시경에는 리미니에 도착했을 것이다. 국경 도시라고는 하지만 리미니는 이미 150년 전부터 로마화가 진행되고있는 북이탈리아 속주와 로마 본국의 경계에있는 도시다.
로마의 중앙정부는 여기에 1개 대대(600명) 규모의 경비대조차 두고 있지 않았다. 이곳 리미니에 카이사르와 그 휘하의 제13군단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입성했다. 리미니에서는 현직 호민관 신분인 탓에 국경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안토니우스와 또 한 명의 호민관 카시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함께 수도를 탈출한 쿠리오는 원로원 의원이기 때문에 행동도 자유로워서, 라벤나에 있던 카이사르에게 맨 먼저 달려갈 수도 있었고, 그래서 카이사르를 다라 루비콘 강도 함께 건넜을 것이다.
리미니에 무혈 입성했다고는 하지만, 카이사르 휘하에있는 병력은 제13군단 10개 대대뿐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결원을 보충하지 않았기 때문에, 10개 대대라 해도 정원 6천명보다 훨씬 적은 4천 500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 정도 병력으로 더구나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한겨울에 국법을 어기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따위의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게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 예상을 뒤엎는 행동으로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국법을 어긴 뒤의 행동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휘하로 돌아온 안토니우스에게 전체 병력의 절반이나 되는 5개 대대를 떼어준 뒤,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초를 공격하게 했다.
그의 휘하에 새롭게 들어온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떼어준 뒤,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하하는 길목에 염주처럼 늘어서있는 페사로,파노, 안코나를 차례로 공략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2개 대대와 함께 리미니에 남았다.
아레초 공략은 수도 로마에서 북쪽으로 가는 간선도로의 하나인 카시아 가도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고, 페사로,파노, 안코나를 수중에 넣는 것은 수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간선 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시야에 넣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리미니를 확보하는 것은 로마에서 북쪽으로 가는 간선도로의 하나인 플라미니아 가도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33세의 안토니우스도, 그와 같은 나이 또래인 쿠리오도 카이사르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1월 12일 새벽에 루비콘 강을 건너 같은 날 오전에 리미니에 입성한 뒤 계속 그 곳에 머무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는 그날 밤부터 벌써 승전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쿠리오의 3개 대대가 30㎞ 남쪽에있는 페사로 공략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곧이어 이튿날인 13일에는파노 공략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그 이튿날인 14일에는 100㎞ 떨어진 안코나도 수중에 넣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5일에는 안토니우스의 5개 대대가 아레초에 입성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이것은 모두 예상을 뒤엎은 카이사르의 행동에 폼페이우스 진영이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허를 찔렸기 때문이지만, 갈리아 정복의 영웅에게 열광한 주민들이 카이사르 군대의 도착을 환영하기는 할망정 적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로써 카이사르는 카시아 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라는 두 개의 간선도로만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어느 길을 택하든 수도 로마에는 사흘이면 도착할 수있는 거리다.
<내전기>에는 날짜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전후의 문맥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지만, 아마 카이사르가 리미니에서 쿠리오와 안토니우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1월 15일 전후일 것이다. 원로원 결의를 카이사르에게 전달하기 위한 공식 사절 두 명이 수도 로마에서 리미니에 도착했다. 이제 와서 사절은 무슨 사절이냐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카이사르의 행동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설마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루비콘강을 건너지는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이 이때쯤 공식 통보를 보내는 절차를 밟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절은루비콘 이북의 라벤나에서 카이사르에게 전달할 작정이었던 통보를 루비콘 이남의 리미니에서 전달하게 되어 버렸다.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동생뻘인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가져온 통보는 1월 7일 원로원 회의에서 의결된 '원로원 최종권고'였다. 그 내용인즉, 카이사르에게 당장 군단을 해산하고 귀국할 것을 명령하면서, 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대권을 부여받은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최종권고'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카이사르를 국가의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였다. 카이사르의 후임자가 에노발부스로 결정되었다는 사실도 전했다.
그런데 공식사절에 카이사르의 친척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포함시킨 것은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보내는 사신을 루키우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대에게파견될 군대를 내가 지휘하기로 결심한 것을 그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나는 언제나 사적인 관계보다는 공적인 책무를 우위에 놓고 살아왔다. 그러니까 그렇게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있는 그대도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보다는 국익을 우선해야 하고, 분노에 사로잡혀 반국가적인 행동으로 치달으면 안 된다.
폼페이우스는 구체적인 해결책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사회적 지위에서나 연령에서도 우위에있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젊은 혈기를 타이르는 식이다. 하지만 사신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는 해도, 원로원 결의로 사실상의 독재관(딕타토르)이 된 폼페이우스의 친서다. 카이사르는 여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폼페이우스의 친서에 답장을 써서 법무관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맡긴 것이다.
글을 조목조목 쓰는 버릇이있는 카이사르를 흉내내어 그 편지 내용을 정리하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본받아 공적인 의무 앞에서는 사적인 감정도 잊어버리고, 국가 로마를 참사에서 구하는 방책을 생각한 결과"라고 전제해 놓고, 폼페이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안했다.
첫째, 당신은 임지인 에스파냐로 떠날 것.
둘째, 당신도 나도 휘하 군단을 해산하여 이탈리아를 비군사화하고, 그로써 국가 로마를 평상시의 정치체제로 돌려놓을 것. 즉 시민들을 군사적 공포에서 해방하고 민회에도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게 한 뒤, 당신과 원로원이나 카이사르의 집정관 입후보를 인정할 것.
셋째, 이상의 두 가지 방안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더욱 자세히 타합하여 세부까지 분명하게 결정하고 서약도 나누기 위해, 당신이 나한테 오든가 내가 당신한테 가서 양자 회담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루카 회담', 즉 정상회담 방식의 부활을 노린 제안이었고, 10년 전의 '삼두정치' 체제가 단순히 카이사르의 즉흥적인 착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반 카이사르파, 즉 원로원파가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는 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리미를 떠난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급히 남하하여 수도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는 편지를 건네받을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도, 현직 집정관 두 사람도, 원로원의 대다수 의원들도 수도 로마에서 달아나 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 수도를 포기하다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공식 사절로 카이사르에게파견된 뒤, 로마에서는 사태가 급변하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을 뿐만 아니라 이미 리미니에 입성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에 뒤이어 페사로와파노만이 아니라 안코나와 아레초까지도 카이사르 밑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전시가 아닌 한 수도에는 수비군을 두지 않는 것이 관례인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도두 집정관도 '맨주먹 상태'였다.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임명한 에노발부스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이제 막 군단 편성에 착수한 단계였다.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에 대해 전투력으로 활용할 수있는 군단은 시리아에파견한다는 구실로 카이사르한테서 빼앗아 둔 카푸아의 2개 군단뿐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를 알기 전에 친서를 보냈지만, 도하가 실현된 지금에 와서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로마에서 그 회답을 기다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는 2개 군단이 주둔해있는 카푸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는 회답을 가진 두 사절이 말을 달려 플라미나아 가도를 급히 남하하고 있을 때였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와 그 직후의 전격작전으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폼페이우스만이 아니었다. 현직 집정관인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도 확고한 카이사르 반대파였기 때문에, 그토록 믿었던 폼페이우스가 떠나버린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둘 다 폼페이우스가 떠난 이튿날 당장 수도를 떠났다.
로마에 남는 의원은 카이사르파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이 효과를 거두어 상당수의 원로원 의원들도 두 집정관과 동행하게 되었다. 수도를 등진 이들의 머릿속에는 30년 전에 있었던 술라의 로마진군이 되살아났을 게 분명하다. 가족까지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하인과 노예를 총동원하여 떠날 준비를 하느라 집집마다 소동이 벌어졌다. 가져갈 짐도 엄청났고, 그래서 수도의 짐수레가 동이 나버렸다.
피난민이라 해도 모두 유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개인 재산을 가져가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은 집정관도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국고에 들어있는 재산도 가져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쯤에는 그것을 실어서 운반할 짐수레를 수도 로마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개인 재산을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두 집정관도 그 때문에 출발을 미룰 생각은 없었다.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짐수레를 구하는 즉시 국고재산을 실어 보내라고 명령해 놓고는 부랴부랴 수도를 떠났다. 두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 그들에게 딸린 가족과 노예들의 긴 행렬이 아피아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떠난 뒤 수도 로마는 자신의 운명에 맡겨졌다. 기원전 49년 1월 18일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지 엿새 뒤, 카이사르 군대가 카시아 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와 발레리아 가도를 장악한 지 사흘 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로마를 떠난 지 불과 하루 뒤의 '낙향'이었다.
국고 재산은 결국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책임지고 수송수단을 마련 할 사람이 없었다기보다, 그런 일을 할 수있는 권한을 가진 공직자가 모두 로마에서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고위층 인사들이 모두 수도를 버린 것은 군사적으로는 어떻든 간에 정치적으로는 커다란 실책이었다.
첫째, 현직 집정관은 속주 총독인 카이사르보다 지위가 높지만, 수도 로마에 있어야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수도를 버린 것은 그 권력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된다. 정통 권력의 담당자라는 위치를 자진해서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둘째, 수도 로마의 시민들, 즉 국가 로마의 최고 결정기관인 민회에서 실제로 표를 던지는 사람들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로마에 도착한 두 사절은 도망친 사람들을 뒤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폼페이우스와 두 집정관을 따라잡은 것은 1월 23일, 아피아 가도를 따라 카푸아까지 달려간 뒤였다.
로마에 도착해 보니 모두 탈출한 뒤여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뒤따라온 것은 라비에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 휘하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라비에누스도 여행을 계속하여 카푸아까지 와서야 겨우 폼페이우스를 만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파는 카이사르의 '오른팔'이 자기 진영에 가담한 것을 뛸 듯이 기뻐했다.
로마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좀처럼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키케로는 이틀 동안만 집정관 일행과 동행했을 뿐, 도중에 그들과 헤어져 아피아 가도 연변에있는 포르미아의 별장에 틀어박혀 버렸다. 폼페이우스와 동갑인 56세니까, 고령을 구실로 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키케로답게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어 '도중하차'했을 게 분명하다.
한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해결책을 제안한 뒤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월 20일, 쿠리오가 이끄는 3개 대대는 안코나를 수중에 넣자마자 내륙으로 들어가 구비오에 입성했다. 구비오는 리미니에서 아드리아 해를 따라파노까지 남하한 다음, 내륙을 가로질러 로마까지 뻗어있는 플라미나아 가도의 중간쯤에있는 도시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카시아 가도를 이용하든 플라미니아 가도를 이용하든 이틀만 행군하면 수도에 들어갈 수있는 지점까지 바싹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수도로 가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와 두 집정관이 수도에서 탈출했다는 정보를 어느새 입수한 카이사르는 그들을 앞질러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카이사르는 지금까지 후방 사령부나 마찬가지였던 리미니에서 비로소 엉덩이를 일으켰다. 수도 로마로 가는 게 아니므로 플라미니아 가도는 택하지 않았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쿠리오에게 합류할 것을 명령해 놓고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쿠리오가 점령한 페사로와파노를 지난 다음, 안코나에 도착하기 직전에 폼페이우스의 회답을 받았다.
폼페이우스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위에 포진해있는 두 집정관을 비롯한 원로원파의 뜻에 따른 그 회답은 다음 네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카이사르는 지금까지의 점령지를 버리고, 당장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이북으로 철수하여 거기서 즉시 군단을 해산하라.
2.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계속해서 군사력을 증강한다.
3. 이것이 이루어지면, 카이사르의 집정관 입후보를 인정하고, 수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도 허용한다.
4. 그 후에 폼페이우스는 임지인 에스파냐로 떠난다.
수도에서 황급히 달아난 처지 치고는 굉장히 강경한 내용이다. '원로원파', 즉 보수파가 원로원이 갖고있는 '전가의 보도'라 해도 좋은 '원로원 최종권고'의 위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카이사르가 받아들일 없는 내용이었다.
첫째, 카이사르가 제안한 폼페이우스와의 양자회담이 묵살되었다.
둘째, 카이사르한테만 군사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원로원파의 태도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셋째,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로 떠나는 시기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이상, 폼페이우스가 군사력을 가진 채 본국에 계속 눌러앉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루비콘 도하를 감행한 의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를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한테 덤벼든 정도의 국법 위반으로밖에는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폼페이우스의 회답은 진격을 계속해야겠다는 카이사르의 결심을 더욱 굳혀주었을 뿐이다.
2월 3일, 카이사르는 안코나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오시모에 입성했다. 안코나보다 더 남쪽으로 진격하려면 카이사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다. 오시모부터는 폼페이우스의 개인 영지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파트로네스'인 폼페이우스와 집안 대대로 강력한 관계를 맺고있는 '클리엔테스'들이 많이 사는 지방이다. 카이사르가 남진을 서두른 데에는 로마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고있는 폼페이우스를 앞질러 가려는 목적 이외에, 폼페이우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폼페이우스도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갈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남쪽으로 가려면 아피아 가도가 더 안전하고 거리도 가까운데, 카이사르에게 회답을 보낸 직후에 아피아 가도를 버리고 아드리아 해에 가까운 루체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이사르의 전격작전이 폼페이우스의 의도를 뒤엎고 말았다.
안토니우스와 쿠리오가 아직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에 들어갔을 때 거느리고 있던 병력은 2개 대대 900명 안팎에 불과했다. 휘하 장수에게는 각각 5개 대대와 3개 대대를 떼어주고 그 자신은 2개 대대만으로 만족한 것은, 카이사르의 존재만으로도 몇 개 군단에 필적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통찰은 옳았다. 그리고 뒷북을 친 폼페이우스가 이 통찰의 정확성을 입증해 주었다. 폼페이우스가 수도 로마를 버리고 떠난 1월 17일에 재빨리 사유지로 사람을 보내 본격적으로 병력을 모집했더라면, 카이사르도 이렇게 쉽사리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그것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실수는 폼페이우스 진영의 대군 편성 가능성을 없애버린 결과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일대의 '클리엔테스'들에게 폼페이우스가 그들을 버렸다는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자기 기반의 관문에 해당하는 오시모를 지키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일찍부터 심복 두 명을 배치해놓고 있었다. 하나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테렌티우스 바로였고, 또 하나는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수석 백인대장으로 오리엔트 원정을 치른 루키우스 푸피우스였다.
두 사람은 폼페이우스의 명령이 없는데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때는 한겨울이었다. 그들 역시 이런 계절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카이사르가 출현한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이 두 장수보다 오히려 오시모 주민들이었다. 폼페이우스를 믿을 수 없게 된 주민들은 두 장수에게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투쟁은 우리의 판단력을 넘어서는 문제다.
그렇긴 하지만, 갈리아에서 거둔 위대한 업적으로 국가에 공을 세운 카이사르를 이대로 성문 밖에 놓아둘 수는 없다. 그러니 당신들도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있는가를 충분히 고려하여 행동을 결정해 달라.
두 장수는 주민들의 속뜻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모집한 병사들만 거느리고 오시모를 떠났다. 물론 카이사르가 그것을 눈감아줄 리 없다. 두 장수와 그들의 휘하 병력은 모두 카이사르가 내보낸 병사들의 포로가 되었다. 잠시 맞서는 시늉만 한 뒤 병사들이 모조리 항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투항한 병사들에게 거취를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 병사들 대다수는 징집된 지 얼마 안 된 탓도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나머지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카이사르는 이때 자기 휘하에 들어온 병사의 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그리 대단한 숫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로와 푸피우스에게도 거취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들은 폼페이우스 밑에서 출세한 심복부하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한테 가기를 원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때와는 달리 동족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포로에 대한 처우도 그때와는 다른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시모에 무혈 입성한 카이사르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처신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시모 바로 근처에 칭골리라는 마을이 있다. 칭골리는 카이사르의 옛 부장인 라비에누스의 고향인데, 라비에누스는 사재를 털어 고향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썼다. 평민 출신인 그에게는 그것이 출세한 보람이었다. 오시모주민에 대한 카이사르의 태도를 전해들은 칭골리 주민들도 카이사르에게 대표를 보냈다. 그들도 카이사르 밑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전해온 것이다.
카이사르는 칭골리 주민에게는 병력 제공을 요구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적에게 달려간 라비에누스에게 카이사르로서는 드물게 심술을 부린 셈이다. 작은 마을에서 조달할 수있는 병사의 수는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렇게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대로 병사들을 보내왔다."
이틀 뒤인 2월 5일, 카이사르는 어느새 오시모에서 40㎞남쪽에있는 페르모에 들어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반으로 진격하는 작전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소집해둔 2개 군단 가운데 제12군단이 갈리아 중부의 월동지에서 먼 길을 지나 마침내 페르모에 도착했다. 카이사르는 지금까지 거느리고 있던 제13군단과 새로 합류한 제12군단을 이끌고 아스콜리피체노로 행군했다. 폼페이우스의 사유지 중심인 이 도시는 기원전 57년도 집정관인 렌툴루스가 10개 대대와 함께 지키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해안의 평탄한 길을 버리면서까지 내륙에있는 아스콜리피체노에 집착한 것도 10개 대대가 지키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를 방치해둔 채 진군을 계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스콜리피체노 공략도 간단히 끝났다. 카이사르가 진격해오는 것을 안 렌툴루스가 허둥지둥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10개 대대도 이끌고 달아날 작정이었지만, 병사들이 따르지 않아서 측근 수십 명만 데리고 도망치다가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블리우스 루푸스와 우연히 맞닥뜨렸다. 루푸스는 렌툴루스를 따라온 병사들을 자기 휘하에 편입시키고, 렌툴루스는 마음대로 도망치게 내버려두었다.
카이사르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싸워보지도 않은 채 달아난 것은 렌툴루스만이 아니었다.
6개 대대와 함께 도망친 자도 있었다. 그래도 루푸스는 13개 대대나 되는 나머지 병력을 긁어모아 코르피니오로 데려갔다. 카이사르 대신 갈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된 에노발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코르피니오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 진영은 발레리아 가도를 이용하면 이틀 만에 수도 로마에 도착할 수있는 이 산간 도시에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대결을 벌일 작정이었다.
33개 대대라면 약 3.3개 군단이다. 접근하고있는 카이사르의 전력은 그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 제13군단과 갈리아에서 뒤늦게 도착한 제12군단을 합하여 2개 군단이다. 거기에 포로로 잡혔다가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우기를 선택한 자들과 새로 모집한 병사들이 추가된다. 카이사르는 그 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고참병 2개 군단과 신병 약간을 이끌고 코르피니오에 도착한 것은 2월 15일이었다. 여전히 한겨울의 행군이다.
하지만 겨울철에 북부 갈리아에서 싸운 경험까지 갖고있는 카이사르 휘하의 고참병들에게 이탈리아 남부의 겨울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코르피니오 성벽 앞에 도착하자마자 진영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코르피니오 입성
에노발부스는 코르피니오에서 카이사르의 전진을 저지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지만, 33개 대대로는 그 임무를 수행할 자신이 없었다. 이 무렵, 북부 갈리아에 있던 제8군단이 카이사르와 합류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이탈리아에 들어왔다. 이 군단이 합류하면 카이사르의 전력은 3개 군단이 되고, 대대로는 30개 대대가 된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의 전력이 거의 비슷해진다.
불안해진 에노발부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 무렵 폼페이우스는 코르피니오에서 직선거리로 치면 남쪽으로 120㎞떨어진 루체라에 있었는데, 그는 카이사르한테 빼앗은 2개 군단과 새로 모집한 신병을 합해 30개 대대의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에노발부스는 자신의 33개 대대와 폼페이우스의 30개 대대가 카이사르의 30개 대대를 협공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코르피니오로 간 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코르피니오를 향해 북상하기는커녕 루체라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진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에노발부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카이사르를 맞아 싸울 준비에 착수했다. 성벽도 보강하고, 병사들에게는 이 싸움에 이기면 이탈리아 남부에있는 자신의 사유지를 한 사람당 15유겔룸(3.5ha)씩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2월 15일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카이사르군의 공격 준비는 그 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코르피니오에서 10㎞쯤 떨어져있는 술모나 주민들이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지만 시내에 주둔해있는 수비대 7개 대대가 무서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카이사르에게 들어왔다. 카이사르는 당장 안토니우스에게 5개 대대를 주어 술모나로 보냈다. 술모나 주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였다.
이들을 맞아들인 주민들 중에는 폼페이우스 쪽에서 싸워야 할 수비대 병사들까지 끼여 있었다. 이 수비대의 지휘관이었던 두 명의 폼페이우스파 장교는 부대를 지휘하기는커녕 오히려 포로가 되어버렸다. 안토니우스는 이 두 장교를 데리고 그날 안으로 카이사르에게 돌아왔다. 카이사르는 술모나의 무혈입성을 도와준 수비대는 자기 휘하에 넣었지만, 지휘관 두 명은 그대로 석방했다.
공략 준비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준비에는 포위망 건설 이외에 군량조달도 포함된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이후, 즉 내전이 일어난 이후 줄곧 약탈 같은 폭력행위를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은 어디까지나 돈을 주고 사들였다.
그럭저럭하는 동안 제8군단에 이어 남프랑스 속주의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종다리군단' 22개 대대도 도착했다. 카이사르는 진영지를 하나 더 세우라고 명령했다. 진영지를 하나 더 세우는 것은 병사들을 수용하는 문제 이외에 전략적인 의미도 갖고 있었다. 제2진영지 책임자로는 쿠리오가 임명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보다 쿠리오를 더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두 배로 늘어난 카이사르 진영의 규모를 보고 수비군은 주눅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타격은 이 무렵에 배달된 폼페이우스의 회답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코르피니오에서 카이사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의 전략이 아니라 에노발부스가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라면서 지원군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비군을 데리고 코르피니오에서 철수하여 자기와 합류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포위망은 완성되기 일보 직전까지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살면 모를까 33개 대대 2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적에게 들키지 않고 데리고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폼페이우스의 지원군도 없이 휘하 병력만으로 카이사를 맞아 싸울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면 요인들만 데리고 탈출할까. 에노발부스는 폼페이우스의 회답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휘하 지휘관들에게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먹물이 번지듯 퍼진 소문은 에노발부스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병사들은 동요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자기들끼리만 도망칠 작정이다. 그 준비도 다 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살길을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다...
마침내 병사들은 에노발부스를 포위하여 사로잡은 다음, 카이사르에게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성문을 열고, 카이사르의 명령에 복종하고, 에노발부스를 넘겨줄 용의가 있다고.
희생을 치르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쁜 일이지만, 서두를 필요가있는 카이사르로서는 그 기쁨이 더욱 각별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밤중에 찾아온 수비군 대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믿는 척했다. 그는 우선 그들의 결심을 치하한 다음, 성벽의 요소요소를 지키면서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한밤중에 결행할 경우 일어나게 마련인 혼란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에게 대표를 보낸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요인들도 대표를 보냈는데, 카이사를 찾아온 사절은 불과 며칠 전 카이사르가 접근하는 것을 알고는 싸워보지도 않은 채 도망쳤던 아스콜리피체노의 렌툴루스였다. 그는 폼페이우스한테 갈 예정이었지만, 도중에 들른 코르피니오에서 다시금 카이사르와 마주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아날 길이 없었다. 렌툴루스의 장황한 변명을 정리하면, 요컨대 코르피니오에있는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날 밤에는 아무대답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튿날인 2월 21일 아침, 카이사르는 우선 코르피니오 시내에있는 요인들과 그 가족들을 데려오게 했다. 이들을 병사들의 폭언이나 폭행에서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는 휘하 병사들을파견해야 했다.
요인들은 원로원 의원인 에노발부스와 렌툴루스와 루푸스, 회계감사관 2명, 에노발부스의 아들을 비롯한 로마의 양갓집 자제들, '기사'라고 불린 경제인과 장교들이었다. 카이사르는 몇 마디하고 나서 그들을 모두 석방했다. 병사들은 카이사르 밑에서 싸우겠다고 스스로 서약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휘하에 편입되었다. 그날 오후에 이미 카이사르는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을 석방했지만, 코르피니오에서 석방한 요인들 중에는 에노발부스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에노발부스는 카이사르 후임으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된 인물이고, 따라서 카이사르에게는 당면한 최대의 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친구한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키케로는 사르한테도 편지를 보내 그 관대한 조치를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행군중인데도 답장을 보내왔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서는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을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 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서서 기쁘기 한량없소.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폼페이우스, 본국을 포기하다
코르피니오가 이렇게 쉽사리 함락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해도, 코르피니오에 지원군파병을 거절했을 때부터 그때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폼페이우스의 생각도 뚜렷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코르피니오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카노사를 지나 브린디시로 향하는 폼페이우스파의 후퇴 행렬은 도중에 잠시도 멈추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명의 현직 집정관과 상당수의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한 폼페이우스파 일행은 코르피니오가 카이사르에게 함락된 지 나흘 뒤인 2월 25일에는 그리스로 건너가는 주요 항구인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이를 예상한 카이사르가 코르피니오를 손에 넣자마자 당장 남진을 다시 서두른 것은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을 본국 안에서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도, 카이사르가 외교 수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거취 선택권을 부여받고도 카이사르 휘하에 남기를 택한 폼페이우스파 장교가 폼페이우스에게파견되었다.
그 장교가 지니고 간 카이사르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대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 나도 브린디시로 향하고 있소. 국가를 위해,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 그대와 직접 만나 회담을 갖고 싶소.
멀리 떨어진 거리를 사절이 오가며 간접적으로 서로의 뜻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우리 두 사람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면 서로의 뜻을 더 잘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외교 수단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는 것도 그만두지 않았다. 고참병으로 구성된 제8군단·제12군단·제13군단에 '종다리 군단'과 폼페이우스군 투항병을 합하여 부린디시호 향하는 카이사르군은 6개 군단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대 단위로는 60개 대대 병력이다. 이와는 반대로 브린디시에 도착한 폼페이우스군은, 어렵사리 모집한 9개 대대가 한꺼번에 카이사르 진영으로 돌아서 버렸기 때문에 50개 대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는 누구나 이탈리아에서 탈출할 생각 밖에 없었다.
3월 4일, 브린디시에 도착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수도를 버린 데 이어 본국까지 버렸다. 그런데 3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할 선박을 모을 수 없었고, 충분한 배가 모이기를 기다릴 마음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두 패로 나뉘어 이탈리아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두 집정관이 먼저 30개 대대를 이끌고 떠났다. 폼페이우스는 나머지 20개 대대와 함께 브린디시에 남아서, 아드리아해를 건너간 수송선단이 그리스 서해안에 병사들을 내려놓고 회항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제서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카이사르가 제안한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를 따라 여기까지 온 사람들을 배신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할 수 없소."
그러는 동안 두 집정관과 30개 대대가 출항한 지 닷새 밖에 지나지 않은 3월 9일, 카이사르도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카이사르는 브린디시 항구 근처에있는 폼페이우스에게 전령을 보내 다시 한 번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이번에도 폼페이우스의 대답은 거부였다. 다만 이번에는 "두 집정관과 의논하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단둘이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면 '루카회담'때처럼 결국 카이사르의 뜻에 휘말리게 될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카이사르가 요구하는 정상회담 방식은 원로원 주도의 현체제에 어긋난다고 확신했기 때문일까. 10년 전의 '삼두정치'나 6년 전의 '루카회담'은 일시적인 대책일 뿐 영속화할 만한 방식은 아니라고 반성하고, 키케로나 소카토 같은 공화정주의자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얻은 결론일까. 어쨌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직접 회담을 계속 요구했고, 폼페이우스는 그때마다 거절을 되풀이하곤 했다.
물론 카이사르도 외교 수단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브린디시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맨 먼저 지시한 것은 진영지 건설이었고, 그 일이 끝나자마자 항구를 봉쇄하는 공사를 명령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진영이 배를 모조리 징발해 버렸기 때문에 바다 쪽에서 출입구를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봉쇄 공사라기 보다는 출항 저지 공사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당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배만 있으면 그것을 출입구 근처에 몇 척씩 침몰시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상 육지 쪽에서 돌이나 나무 울타리 같은 것으로 조금씩 바다를 메워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폼페이우스군의 방해를 받으면서 이 일을 진행 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도중에 그리스에서 돌아온 선단의 입항을 허용해 버렸다. 선단이 돌아온 이상, 폼페이우스의 염두에는 오직 출항밖에 없었다.
3월 17일, 해가 지기를 기다려 20개 대대를 배에 태운 폼페이우스는 한밤중에 집단적인 저지선 돌파를 감행했다. 카이사르 진영도 공사가 진행되고있는 제방에서 선단의 출항을 방해하려고 애썼지만, 대형 선박이 잇달아 돌파하는 것까지는 도저히 저지할 수가 없었다.
배가 없는 카이사르 쪽에서는 추격할 수도 없었다. 내전을 조기 수습하려던 꿈은 사라져 버렸다. 선단을 이룬 배들의 고물에서 타오르는 등불이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카이사르는 내전의 장기화와 확대화를 각오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30년 전의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과는 달랐다.
이틀 뒤, 카이사르는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진 브린디시를 떠났다. 그리고는 아피아가도를 따라 로마로 북상했다. 이때부터 당대 제일의 무장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정변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대전략
로마의 패권 아래있는 '로마 세계'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 북쪽은 라인강과 그 연장선상에있는 북해, 남쪽은 사하라 사막을 경계로 하는 광활한 영역을 갖고 있었다. 그 중심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지중해가 있다. 로마인들이 지중해를 '내해' 또는 '우리바다'라고 부른 것은 당시 그들의 머릿속에 있던 지리 감각을 여실히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브린디시를 떠난 폼페이우스와 그것을 저지하려다 실패한 카이사르가 앞으로의 전략을 세울 때, 그들의 염두에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지리 감각이었다. 그런데 전략을 세울 때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또 하나 있었다. 공식 명칭은 동맹국이지만, 당시로마인에게 더 친숙한 말을 사용하면 '클리엔테스'관계다.
내가 라틴어를 번역하면서 이 '클리엔테스' 만큼 고심한 낱말은 없었다. 현대 영어에서 이 라틴어 낱말을 어원으로 하는 것은 '클라이언트'(client)인데, 이것은 상점의 고객이나 변호사, 광고회사 등의 의뢰인을 뜻하는 말이다. 라틴어에 기원을 두고있는 낱말 가운데 현대어에서 본디 의미와 멀어져버린 대표적인 예가 '클리엔테스'와 '콘술'(consul)이다.
콘술은 비록 현대어에서는 영사라는 의미밖에 없지만 로마 시대의 관직을 나타낼 때는 본디 의미인 '집정관'으로 역어가 정착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낫다. 그런데 클리엔테스는 사전에 나와있는 것처럼 단순히 '피보호자'로 번역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파트로네스'는 보호자이고 '클리엔테스'는 피보자라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보호자와 피보자라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건국 당시부터 700여 년 동안 대단히 중요한 인간관계이자 대외관계였다.
로마인은 바람처럼 습격해서 죽이고 약탈한 다음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유형의 정복자가 아니었다. 로마인은 정복한 땅을 자기네 세계에 편입시켰다. 동맹관계를 맺은 속국이냐, 아니면 로마가 총독을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속주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고 일신교를 믿는 민족이라면 신과의 약속을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이 신과의 약속보다는 인간끼리의 서약을 중시한 것도 그 생활방식, 즉 문명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다.
게다가 로마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제압한 뒤 고도성장기를 맞고 있었다. 고도성장기에는 자칫하면 성장을 뒷받침하는 체제정비가 성장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사태가 초래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간의 공식 협정보다는 개인간의 인간관계가 앞서기 쉽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국가 관계를 벌충하는 것이 개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공화정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이자 국가 관계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사내대장부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다'는 식의 생활방식을 중시한 로마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도성장기라는 시대의 요청에 따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관계가 후세의 평등 이념에서는 과거의 유물로 평가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즉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부당한 관계는 아니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 소탕작전으로 지중해에 '팩스 로마나'(로마 주도의 평화)를 확립했기 때문에 지중해 일대의 '파트로네스'가 되어 있었다. 바꿔 말하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은 그의 '클리엔테스'가 된 셈이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오린엔트를 제패한 뒤에는 오리엔트 나라들이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를 제패하여 갈리아 부족들과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관계를 수립했다.
보호자 역할을 맡은 이상. '파트로네스'는 피보호자를 보호하는 책무를 갖는 것이 서약의 첫 번째 항목이 된다. 이 관계에서 '보호'는 안전보장이고, 로마 중앙정부에 대해 '클리엔테스'들의 권익을 옹호해 주는 것이었다. 마치 두목이 부하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보호해 줄테니까 안심하고 나한테 맡겨라 하고 가슴을 두드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폼페이우스도 카이사르도 자신의 '클리엔테스'로 삼은 지방의 질서를 확립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마치 두목이 부하들을 생각하듯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클리엔테스'의 책무는 무엇인가.
'파트로네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적시에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책무다. 내가 '보호자'와 '피보하자'로 번역하지 않고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라는 라틴어 원어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부상조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바람처럼 습격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과는 방법과 지배 형태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속주가 로마에 지불하는 속주세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속주세는 병역 의무를 지지 않는 속주민이 병역 의무를 지고있는 (설령 지원제라해도)로마 시민에게 지불하는 안전보장비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도 성장기라서 국가 체제가 성장 속도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이처럼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가 국가간의 관계와 공존하는 형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예를 들어 이집트는 독립국이기 때문에 로마와는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폼페이우스가 이집트 왕의 복귀를 위해 애썼기 때문에 이집트 왕가는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의 정면 대결이 두려워서 이탈리아를 탈출한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했던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와 그 후의 신속한 작전에 허를 찔린 나머지 카이사르보다 한 발 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에서 맞서기보다는 힘을 완전히 갖추기 위해 일단 후퇴하여 휘하의 '클리엔테스'를 총동원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저지하려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시야를 넓히면,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군사력은 동원할 수있는 병력으로는 나타낼 수 없다. 그 병력을 유지하고 보충하고 때로는 대신 싸울 수있는 예비 병력을 모두 합한 총량으로 가늠된다.
카이사르의 '클리엔테스'는 8년 동안의 갈리아 원정을 뒷받침한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속주, 그리고 속주세로 계산하면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경제력 밖에 갖지 못한 갈리아였다.
한편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로는 우선 2억 세스테르티우스의 속주세를 낼 수 있을 만큼 물산이 풍부한 소아시아와 시리아, 경제력에서는 그에 뒤지지 않는 그리스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가 있다. 지중해 동부지역에 비하면 가난하지만 병력 제공 능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에스파냐도 폼페이우스가 현직 총독이기 때문에 그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실제로 에스파냐 속주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세 장수가 7개 군단과 함께 다스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프리카 속주도 대대로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이 총독에 취임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해적 소탕작전 이후 그의 '클리엔테스'가 된 마르세유를 비롯한 항구도시들이 추가된다. 이런 '바다의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선박 제공을 요청하고 기지로 사용할 수있는 존재였다.
본국에서는 일단 탈출했지만, 폼페이우스의 머릿속에는 웅대한 전략이 있었다. 동쪽의 오리엔트와 서쪽의 에스파냐와 남쪽의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와 갈리아에 기반을 둔 카이사르를 포위 공격한다는 구상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바다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충분히 실현할 수있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정치든 군사든, 아니 인간이 관련되어있는 거의 모든 일은 반드시 공식처럼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1더하기 1'이 항상 '2'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 '3'이 될 수도 있고 '4'가 될 수도 있고 '0.5'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루비콘 강에서 메시나 해협까지 뻗어있는 국가 로마는 본국인만큼 '플러스알파'가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 점을 간과했다.
나중에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도, 브루투스를 무찌른 안토니우스도 숫자나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는 이 '플러스알파'를 간과하게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 당시 컴퓨터가 존재했다 해도 그것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이 '플러스알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뒤를 잇게 된 옥타비아누스도 이것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그릇임을 보여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태우고 떠나는 배의 등불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로 떠날 때까지 이틀 동안 해야 할 일은 빠짐없이 끝냈다.
선박 - 브린디시 일대에서 배로 사용할 수있는 것은 폼페이우스가 모조리 징발해 버렸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갈라이아세 배를 소집하거나 아니면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리함 속에서 유일하게 유리한 점은 브린디시 주민들이 카이사르 편이었다는 점이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10개 군단을 수송할 수있는 배를 반년 안에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단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지중해 제해권을 갖고있는 폼페이우스에 대해 본국 로마를 방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식량 - 이 문제는 카이사르군 병사들의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루비콘 강에서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를 본국으로 삼고있는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200년 전부터 식량의 자급자족 노선을 버렸다. 로마인의주식인 밀은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 북아프리카 등 3개의 속주에서 들여오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에 식량을 공급하는 이 속주들은 모두 이탈리아 반도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이 바다의 제해권은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도하를 결행한 지 두 달 만에 단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이 반도에 사는 로마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의 여부는 첫째 안전, 둘째 식량 확보에 달려 있었다.
첫 번째 문제인 안전은 카이사르 자신이 "나는 술라가 아니다"라고 공언하면서 로마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았고, 부하 병사들에게는 약탈을 비롯한 폭력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병사들도 이 명령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보장되었다.
두 번째 문제인 식량도 해결책을 빨리 마련하지 않으면 적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57년 이후 '식량청 장관'도 겸하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 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국에 수입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식량 공급지인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와 북아프리카 속주에는 휘하 장수를 총독으로 보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우선 소규모 부대를 보내 사르데냐 섬을 수중에 넣었다. 시칠리아 섬에는 쿠리오를파견했다. 시칠리아에는 반카이사르파의 선봉장인 소카토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량 생산지 확보가 최우선 목표인 이 군사행동에 카이사르는 오랜 전부터 자신과 함께 싸워온 군단을 보내지 않고, 지난 두 달 동안 그에게 투항한 폼페이우스군 병사들을 보냈다. 고참병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떠난 지 이틀 사이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지시를 끝낸 카이사르는 브린디시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로 출발했다. 고참병 군단이 그 뒤를 따랐다. 기원전 49년 3월 19일인 이날부터 내전 제2막이 시작되었다.
브린디시에서 로마까지 가려면 이탈리아 반도를 절반쯤 종단해야 한다. 그 거리를 카이사르는 12일 만에 주파했다.
3월 25일 베네벤토 도착, 이튿날인 26일에는 카푸아 입성. 이런 식으로 쉴틈도 없이 수도를 향해 달려가는 카이사르의 머릿속에는 폼페이우스의 성향까지 계산에 넣은 내전 제2막의 시나리오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선 서쪽을 치자는 것이었다.
수도 로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2대 간선도로인 라티나 가도와 아피아 가도가 합류하는 요지 카푸아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모두에게 4월 1일 수도에서 원로원회의를 소집한다는 통보를 보냈다. 그렇게 해놓고 다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한 카이사르가 도중에 딱 한 군데 들른 데가 있었다.
키케로 대책
일급 변호사이면서 철학과 정치를 좋아한 키케로는 개인적으로는 폼페이우스 보다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했고 둘도 없는 문학 동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일류 지식인인 키케로는 원로원 주도의 소수 지도체제. 즉 과두정이야말로 국가 로마의 정치체제여야 한다고 믿은 점에서는 카이사르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견해는 달라도 완고한 월로원파, 즉 보수파는 아니었다. 포에니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로마 역사가 보여주듯, 뛰어난 인재들이 '나'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정치체제야말로 지식인 키케로의 이상이었다.
이런 키케로의 가장 큰 소망은 현재 로마의 두 실력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손을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시기하고 증오한 나머지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밖에 생각지 않은 원로원파의 '원로원 최종권고'와 거기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로 말미암아 키케로의 소망은 꿈으로 사라져버려다.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한 '원로원 최종권고'에는 키케로도 찬성표를 던졌으니까,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뒤에는 폼페이우스와 행동을 같이하는 것이 일관된 처신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로마를 버린 폼페이우스를 아피아 가도의 10분의 1거리까지만 따라가다가 도중하차하는 쪽을 선택했다. 키케로의 많은 편지가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적으로는 아무래도 폼페이우스라는 나무에 의지할 마음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가 불성실하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폼페이우스는 성실하기 이를데없는 사나이였다. 동갑인 키케로를 존경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역량'에 있었다. 오리엔트에서 개선한 이후 폼페이우스가 보여준 역량을 키케로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역량을 충분히 인정하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카이사를 편들 수도 없었다. 고민에 빠진 키케로는 결국 중립을 선택하여 포르미아의 별장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진격하고 폼페이우스가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은 바닷가 별장에 틀어박힌 키케로의 귀에 상세히 들어오고 있었다. 친구들이 전해주었다기보다는 그가 친구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보내 꼬치꼬치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필경 은둔생활 따위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키케로에게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고있는 카이사르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
우리 공통의 친구이기도 한 푸르니우스(카이사르의 비서)와는 잠시 밖에 만나지 못했소. 그래서 그대의 근황을 만족할 만큼 자세히 들을 시간이 없었소. 나는 군단을 앞서 보내고 지금 강행군을 하고있는 중이오. 그렇긴 하지만, 언제나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주는 그대에게 답장을 쓰는 것마저 단념해야 할 정도는 아니오.
그리고 그대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나는 되도록 빨리 로마에 들어가고 싶은데, 로마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소. 나는 지금 그대의 조언을 듣고, 그대의 권위에 도움을 받고, 많은 면에서 그대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소.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합시다. 편지가 너무 성급하고 짧은 것을 용서해주시오. 나머지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푸르니우스가 말해줄 거요."
이 편지를 받고 키케로는 깜짝 놀랐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떠나버렸고, 이탈리아 안에서 현재 군사력을 갖고있는 것은 카이사르다. 그런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4월 1일에 수도에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다는 통보는 키케로가있는 포르미아 마을에도 당도해 있었다. '로마에서 만나고 싶다'는 것은 곧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뜻이다. 이런 시기에 그 요청에 응하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당연히 그를 카이사르파로 단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군사력을 갖고있는 것은 카이사르다. 불안에 휩싸인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친구인 마티우스 한테까지 편지를 보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청했다. 무슨 일이든 다 털어놓는 친구인 아티쿠스한테도 당장 편지를 보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든 사태는 다급했다.
'나머지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푸르니우스가 말해줄 거'라고 카이사르는 말했지만, 그 '나머지'란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별장에 들러 편지에서 언급한 문제를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는 방문 예고였기 때문이다. 바다에도 면해있는 최고의 별장지였다. 부동산 투자에도 일가견을 가진 키케로의 경제 감각이 이때는 오히려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오늘(3월 27일) 이 편지를 쓰면서 나는 트레바티우스(키케로의 청탁으로 카이사르가 비서로 삼은 키케로의 고향 출신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네. 그와 마티우스의 조언을 듣고, 카이사르한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결정할 작정일세. 그렇긴 하지만, 얼마나 참담한 나날인가. 카이사르는 틀림없이 무력을 사용해서 로마로 가자고 나한테 압력을 가해올게 분명해.
이곳 포르미아에도 4월 1일에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다는 포고령이 나붙었네. 어떡하면 좋을까. 거절할까?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어쨌든 회담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알려주겠네. 여차하면 이곳을 떠나 아르피노에나 가버릴 작정일세. 수많은 걱정거리에 둘러싸여 사는 건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네."
아르피노는 키케로의 고향인데, 라티나 가도에서 내륙으로 깊이 들어간 산지에 있다. 이제 키케로한테는 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절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키케로 방문은 이로부터 사흘 뒤에 실현되었다. 길을 서두르고있는 카이사르는 군장도 풀지 않았고, 키케로도 원로원 의원에게 허용되어있는 붉은 테두리 장식을 댄 하얀 토가 차림으로 그를 맞았을 것이다. 문학적인 대화는 아니다.
피차 편안한 차림으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담화는 아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다. 56세의 키케로와 50세의 카이사르 사이에 오간 대화는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키케로가 걱정했던 무력시위는 전혀 없었다.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자네의 충고도 충분히 받아들여 나는 카이사르에게 이야기했네. 로마에는 가지 않겠다고.
이런 결심을 나는 끝내 굽히지 않았네. 그런데 자네는 기억하고 있나? 카이사르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우리는 이야기 했었지. 폼페이우스만한 인물도 길들일 수 있었으니까 카이사르 따위는 훨씬 간단히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이제 나는 그 예측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겠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이 로마로 가지 않겠다는 것은 내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다른 원로원 의원들한테도 영향을 준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그래서 나는 항변했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와는 다르오.'
여기서 잠시 언쟁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네.
'좋소이다. 그럼 로마에 가서 화평공작을 위해 애써주면 어떻겠소?'
'내 뜻대로 말해도 좋소이까?'
'다름 아닌 키케로가 할 말까지 카이사르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가르칠 수야 없는 일 아니겠소. '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소. 원로원은 에스파냐에있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세 장수에게 카이사르가 군대를 보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폼페이우스가 달아난 그리스로 군대를파견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그리고 폼페이우스를 기다리고있는 운명을 나는 개인적으로 깊이 슬퍼한다고.'
'오오, 아니되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원치 않소. '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그 때문에도 나는 로마에 가고 싶지 않소. 나로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뿐만 아니라 원로원에 출석한 그대가 잠자코 들을 수 없다는 말까지 하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니 나는 안 가는 게 좋겠소이다.'
카이사르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더군.
'어쨌든 잘 생각해보시오.'
나는 이 말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네. 그리고 카이사르는 떠났지. 카이사르가 내 태도에 만족하지 않은 것은 확실해. 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만족했네. 이런 만족감은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것이었지....
그렇긴 하지만, 카이사르를 따라 다니는 무리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네.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모두 자원해서 카이사르를 따라 다니며 폼페이우스나 자기네 부친을 공격하다니. 카이사르의 명령은 그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군단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네. 게다가 카이사르 자신은 대담한 결단 그 자체야. 나로서는 나쁜 결과밖에 예상할 수가 없네. 아무래도 자네의 충고를 받아들여 계속 은둔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대가 시작된 모양일세."
이 편지, 특히 전반부를 읽은 사람은 카이사르조차도 논쟁에 진 걸보니 과연 키케로는 로마 제일의 변호사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뜻을 끝까지 관철한 것은 키케로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키케로 자신이 '로마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느니 '나는 나 자신에게 만족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을 정도니까. 키케로 자신도 카이사르한테 이겼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카이사르의 언행도 시종일관했지만, 키케로의 언행도 이 시기에는 아직 나름대로 시종일관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만약 키케로가 더욱 완강하게 자기 생각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무력 대결을 피하면서 그 생각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로마에 가서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 이편지에도 나와 있듯이 카이사르의 행위에 대한 반대 의견을 당당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최악의 사태는 바로 키케로가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로마에서 가장 권위있는 '매스컴'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언제나 현실을 직시했다. 불과 두 달 만에 이탈리아 반도를 무혈제패 했지만,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은 뒤로 미루어졌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사상적으로는 폼페이우스파인 키케로가 한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카이사르파로 말을 갈아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키케로를 방문한 속뜻은 키케로가 로마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입으로는 로마에 가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했지만, 실제 의도는 키케로가 원로원 회의에서 발언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로마 최고의 지식인인 키케로가 보기 좋게 넘어가 버렸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카이사르의 꾀에 넘어간 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했다. 물론 카이사르에게 가장 좋은 사태는 키케로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여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최악의 사태는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발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선이라고 할 수있는 상태는 키케로가 중립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즉 수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별장에 틀어박혀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 회담의 주도권을 줄곧 키케로가 쥐고 있었고, 키케로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카이사르는 실망감을 안고 떠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키케로를 방문한 목적은 달성되었다. 게다가 키케로에게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까지 안겨주면서, 역시 키케로보다는 그의 성향까지파악하고 일에 임한 카이사르가 한 수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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