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병대
혹한 속의 혈투
선봉을 맡은 제7해병연대는 칼바람이 부는 강추위와 싸우며 황초령을 향해 나아갔다. 제7해병연대 1대대 B중대는 고토리 남쪽 1.5킬로미터 지점에서 강력한 중국군의 저지선을 만났다. 이 상황을 파악하고자 앞으로 나선 중대장 조셉 쿠르카바(Joseph Kurcaba) 중위는 휘하 소대장들을 모아서 돌파 계획을 세우던 중에 한 발의 총탄을 이마에 맞아 절명하고 말았다. 사실 그는 기존의 중대장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지휘권을 인계받아 줄곧 B중대를 이끌어온 것이었다. 그는 유담리 전투 첫날 C중대를 구출하는 작전과 데이비스 중령 지휘 하에 유담리 포위망 돌파의 선두에 서서 산악 행군을 해내는 등 10여 일이 넘는 동안 휘하 병사들을 훌륭하게 지휘하였다. 이렇게 최후를 맞은 이 덩치 큰 폴란드 혈통의 장교에게는 아쉽게도 명예훈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중대장직을 인수받은 츄엔 리 중위는 쿠르카바 중위가 생전에 지시한 대로 조셉 오웬(Joshep Owen) 중위에게 남아 있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중국군의 저지선을 우회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리 중위 역시 부하들을 독려하다가 두 발의 총탄을 각각 오른팔과 얼굴에 맞아 쓰러졌다. 그날 밤은 영하 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밤이었다. 눈보라가 잦아들자 살아남은 생존자들 중 일부는 고토리로 물러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이렇게 병력이 소모되면서 B중대의 경우 180명 중에 27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3대대의 경우에도 세 개 중대를 합쳐 멀쩡한 자는 120명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도 소규모 중국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황초령 기슭의 진흥리 철도 야적장을 방어하고 있던 도널드 슈먹 중령의 제1해병연대 1대대는 당시 사단 내에서 유일하게 전투력을 온전히 보존한 대대였다. 대대는 사단 본대가 이용할 경로인 황초령 길이 얼마나 안전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슈먹 중령 본인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정찰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중령 본인과 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 소령, 그리고 포병 전방관측반으로 이루어진 본대와 1개 분대의 소총수들로 이루어진 ‘미끼 그룹’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미끼 그룹은 중국군에게 노출되어 본대에 쏠릴지도 모를 주의를 돌리고자 했다. 수문교를 건너서 고토리를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 방어선의 뒤편까지 진출한 정찰대는 고토리 남쪽 3킬로미터 지점의 능선 반대편에 중국군 병력이 매복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포병관측반이 포격을 요청하여 이 매복 부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이 정찰 활동은 중국군 병력 일부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했지만, 수문교를 감제할 수 있는 1081고지가 지닌 전략적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에 따라 사단 본대의 움직임에 맞춰서 제1해병연대 1대대는 황초령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때마침 행운이 찾아왔다. 전날인 12월 7일, 중국군 제60사단의 연대서기가 포로로 잡혀 고토리 진지의 첩보부 텐트에 이송되어 있었는데, 그가 고토리 남단의 중국군 배치 현황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철수계획 수립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중국군 제60사단은 고토리 남단을 막아 해병대의 전진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중 제60사단 제178연대가 진흥리의 제1해병연대 1대대의 이동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제179연대는 진흥리 남단의 철도 터널 쪽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월 8일 새벽 2시, 이틀 치 식량을 휴대한 제1해병연대 1대대는 연대장 풀러 대령에게 무전으로 집결보고를 한 후 30분 뒤 폭설을 뚫고 북쪽으로 활로를 뚫기 위한 행군을 시작했다. 이 폭설은 항공 지원은 물론 지원포격도 받을 수 없게 했고 행군 자체에도 방해가 되었지만, 중국군이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도록 가려주는 역할도 했다. 공교롭게도 A중대장 로버트 배로(Robert Barrow) 대위는 2차 대전 시기에 팔로군과 함께 활동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악천후를 뚫고 가파른 비탈과 얼음을 무릅쓴 10여 킬로미터의 산악 행군 끝에 1081고지 정상 턱밑까지 도달했다. A중대가 공격 준비를 마쳤고, B중대도 고지 근처까지 접근해서 지휘소 설치를 마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107mm 중박격포까지 매고 이 강행군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장진호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081고지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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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은 미 해병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제1해병사단 사입니다. 그래서 이미 태평양 전쟁을 다루었고, 지금 장진호 전투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 전까지 이어집니다.
가끔 정치 이야기가 나왔고, 앞에도 조금 나올 것이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해병대와 관련된 부분에 한정됩니다. 즉 한국 정치와는 거의 무관한 글입니다. 읽고 계신 분 들 중 일부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성향(좌우를 막론하고) 이나 가지고 계신 역사의식에 따라 몸 글과 상관없는 댓글을 다십니다. 얼마 전 현재 정치상황과 연결시킬 정도로 지나치게 ‘오버’ 하신 두 분은 삭제 조치를 취했지만, 그 정도까지 가지 않는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생각이지만, ‘경고’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연재는 어디까지나 미 해병대의 이야기이이며, 불필요한 댓글은 필자를 불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글과 무관한 (본인은 유관하다고 주장하겠지만) 댓글은 엉뚱한 곳에 자기주장을 하는 무례한 행동입니다. 그런 생각 가지고 계시면 잘 정리해서 자기 블로그에 올리면 됩니다.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면 경고 댓글을 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연재를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평소에 가만히 있다가 불쾌한 댓글에 ‘좋아요’ 누르시는 분들도 그에 못지않게 필자를 불쾌하게 만든 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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