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34년
〈경신〉 34년(1080) 봄 2월 병신.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고(故) 문하시중(門下侍中) 왕총지(王寵之)와 예부상서 중추사(禮部尙書 中樞使) 정배걸(鄭倍傑)은 모두 충직함이 매우 뛰어나고 재능과 식견이 출중하였다. 세상을 떠난지 이미 오래이지만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내려서 내가 어진 이를 생각하는 뜻을 밝히려고 한다. 왕총지(王寵之)에게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정배걸(鄭倍傑)에게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중 상주국 광유후(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尉 門下侍中 上柱國 光儒侯)를 추증(追贈)하라.”
라고 하였다.
임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3월 병인. 왕자 왕수(王㸂)를 책봉하여 검교사공 수상서령 부여후(檢校司空 守尙書令 扶餘侯)로 삼았다.
임신. 형부(刑部)에서 아뢰기를,
“호부(戶部)에서 마음대로 흥왕사(興王寺)의 토지를 만령전(萬齡殿)에 지급하였으므로 처벌하시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자, 제서(制書)를 내려 호부 관리의 관직을 삭탈하고 시골로 추방하였다.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유신(劉信)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과 예부시랑(禮部侍郞) 박인량(朴寅亮)을 송(宋)에 보내, 약재(藥材)를 보낸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고 아울러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여름 5월 정묘. 김상제(金尙磾) 등을 급제시켰다.
6월 흥왕사(興王寺) 석탑(石塔)이 완성되자 사면령을 내렸다.
가을 7월 계해. 유홍(柳洪) 등이 송(宋)에서 돌아왔는데, 송 황제가 칙서(勅書) 8통[八道]을 보내왔다.
첫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경(卿)은 요(遼)의 좌측에 위치하므로 이는 해동(海東)이고, 옛날과 같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몸소 편안히 누리고 있다. 덕을 행하되 어긋남이 없고 직분을 수행하되 엄정함이 있으며, 경의 정성스런 글을 펴보니 간곡한 정의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에 더욱 포상을 드러내어 보살핌을 두텁게 하려 한다.”
라고 했다.
두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진상한 사은품을 살펴보니, 어의(御衣) 2령, 금요대(金腰帶) 2조, 금사라(金鐁鑼) 1면, 금화 은기(金花銀器) 2,000냥, 색라(色羅) 100필, 색릉(色綾) 100필, 생라(生羅) 300필, 생릉(生綾) 300필, 복두사(幞頭紗) 40매, 모자사(帽子紗) 20매, 계병(罽屛) 1합, 화룡장(畵龍帳) 2대, 대지(大紙) 2,000폭, 묵(墨) 400정, 금은으로 도금하여 가죽으로 싼 병기[器仗] 2부, 세궁(細弓) 4장, 효자전(哮子箭) 24개, 세전(細箭) 80개, 안장과 고삐[鞍轡] 2부, 세마(細馬) 2필, 산마(散馬) 6필 등을 잘 받았다. 근래에 사신을 갖추어 그곳에 예물을 보낸 것은 나의 지극한 뜻으로 경(卿)의 공경하는 마음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사신과 공물과 글을 갖추어 조정에 와서 더 많이 보답하니, 그 정성과 공손함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상하다.”
라고 하였다.
세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경(卿)은 나라를 수호하고 잘 다스리며 직무에 힘써 해이하지 않았으니, 오직 근면하고 힘씀을 잘 깨달아 알겠다. 참으로 선물을 보내 은총을 두텁게 하니, 더욱 공경하는 마음에 힘써 길이 영예를 누리라. 이제 유홍(柳洪) 등이 돌아가므로 경(卿)에게 국신(國信) 물품을 보내고, 아울러 별도로 의대(衣對)와 금기(錦綺)를 보내려 한다.”
라고 하였다.
네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경(卿)은 마침내 순일(純一)한 덕을 이루고 삼한(三韓)을 위무하며,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하다가 몸의 일부분에 열병과 창질[疢癘]이 걸리게 되었다. 근래에 이 말을 듣고 항상 마음에 두어 의술(醫術)은 〈한(漢) 명의인〉 창령(倉令)과 같은 이름을 구하고, 약(藥)은 〈채약으로 유명한〉 동군(桐君)의 옛 기록을 조사하였다. 바라건대 잘 복용하여서 몸이 쾌유하고, 세월이 지나면 어떤 병인들 나아지지 않겠는가? 멀리서 〈경의〉 고통을 생각할 때 나의 근심이 깊어지고, 생각이 고려(高麗)로 달리나 역사(驛使)의 소식은 더디다. 경(卿)은 화평을 오로지하여 복을 이루며, 뜻과 정신을 잘 보존하여 장수의 복[壽祺]을 누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진상한 물품을 살펴보니, 금합(金合) 2부, 반잔(盤盞) 2부, 주자(注子) 1부, 홍계기배(紅罽倚背) 10개, 홍계욕(紅罽褥) 2개, 장도(長刀) 20개, 생중포(生中布) 2,000필, 삼(蔘) 1,000근, 송자(松子) 2,200근, 향유(香油) 220근, 안장과 고삐[鞍轡] 2부, 세마(細馬) 2필, 나전장차(螺鈿裝車) 1냥을 잘 받았다. 경(卿)은 평생 훌륭한 덕행을 이루고 공물(貢物)을 풍성하게 갖추었다. 이같이 때맞춰 사신이 왔으므로 이에 후하게 보내되 예물(禮物)을 갖추어 각별한 은혜를 드러내니, 후한 복록을 같이 누리고 우호관계를 더욱 영원토록 하라!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경(卿)에게 의착(衣著), 은기(銀器)를 보낸다.”
라고 하였다.
여섯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태황태후(太皇太后)께 드린 토산물도 잘 받았다. 경(卿)은 멀리서 사신을 통하여 태황태후[東朝]께 안부를 여쭈었으나, 이미 돌아가셔서 마침내 토산물이 헛되이 되었다. 상중에 아픈 마음으로 풍성한 예물을 보니 애통함이 더 크다. 특별히 하사품을 나누어 가서 경(卿)의 근순(勤順)함을 기리고자 하여 이제 경(卿)에게 의복, 은기(銀器)를 보낸다.”
라고 하였다.
일곱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황태후께 진상한 토산물 등도 잘 받았다. 경(卿)은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래 모후[慈闈]를 공경하고 봉양한다 하여, 멀리서 예물을 보내고 장락궁(長樂宮)에 글을 올렸다. 예물이 풍성하고 뜻이 두텁고 섬김이 부지런하므로, 마땅히 은총을 내려 은덕을 펴고자 한다. 이제 돌아가는 사신 편에 경(卿)에게 의복과 은기(銀器)를 보낸다.”
라고 하였다.
여덟 번째 통에서 이르기를,
“멀리서 사절을 갖추어 각별히 나라의 수레를 정비하여 넓은 바다를 횡단할 때, 거센 풍랑에 놀라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게 되고 물품이 유실되기도 한다. 진실로 배를 조종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것이지, 명령을 받드는 것이 경건치 못해서가 아니다. 더구나 경(卿)은 공손함을 먼저 하며 친선관계를 길이 하려고 하였으니, 이미 충성의 두터움을 알면서 어찌 공물의 많은 것만을 따지겠는가? 마땅히 나의 유언(諭言)을 받아들여 힘써 긍휼히 여겨 풀어주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처음에 유홍(柳洪) 등이 바다로 나갈 때 맹렬한 폭풍[颶風]이 갑자기 일어나 거의 배가 전복(轉覆)할 정도였기 때문에, 송에 이르러 조공할 토산물을 헤아려 보니 유실되어 없어진 것이 태반이었다. 왕이 〈송 황제의〉 칙서에 따라 유홍(柳洪) 등의 죄를 용서하였다.
정묘. 송(宋)에서 의관(醫官) 마세안(馬世安)을 보냈다.
9월 신유. 재상(宰相) 정유산(鄭惟産)이 3차례 글을 올려 연로하다고 퇴직을 요청하였다. 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일을 보게 하였으나, 얼마 후에 굳이 사양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병술.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다.
윤9월 경자. 일본국(日本國) 살마주(薩摩州)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1월 기축. 초하루 일식(日食)이 있었다.
기해. 왕이 서경(西京)에서 돌아와 사면령을 내렸다.
12월 기미. 초하루 요(遼)에서 영주관내관찰사(永州管內觀察使) 고사(高嗣)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동번(東蕃)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석(崔奭)과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을 병마사(兵馬使)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삼아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는데, 사로잡거나 목을 벤 것이 431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