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가는 데 혈을 찾아라
혈( 穴)을 잘라라
남오는 고속도로로 나왔다.
“선생님, 도로를 낸다고 산을 토막토막 낸 요즈음에도 산에 명당이 있습니까?”
“산을 파괴한다면 큰 인물이 나지 않겠지.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고자 할 때인 l894년 흥선 대원군이 이런 말을 했다네. ‘만약 철도를 부설하자면 산을 헐고 골을 메울 필요가 있을 것인즉, 그러할 때 암석을 파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암석은 국가의 척추이니, 척추를 다치고 어찌 그 나라가 오래가기를 바랄 수 있으랴?’
흥선 대원군은 철도가 생기는 것은 곧 나라의 척추를 부러뜨리는 것이라고 반대했는데 1902년 경의선 기공식 날에 다시 말했네. ‘서울은 용(龍)의 머리요 기공식 거행 중인 서대문은 용의 얼굴에 해당하는 바, 이는 국가의 변란’이라 개탄하며 칙사를 보내 공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한 일도 있었지. 물론 유림들의 반대도 굉장했지. 자네도 한번 생각해 봐. 난도질한 산에 무슨 기운이 있겠나?”
“선생님, 산에는 정말로 산신령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산신령? 물론 있지. 그런데 그건 왜?”
“저희 집 먼 집안 사람 중에 공병대에 근무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경부고속도로를 뚫을 때 현장에 나가 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영동 어디쯤인가 산중턱을 자르고 불도저로 밀어내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산을 자르지 마라, 그리고 정히 목 공사를 하려거든 내가 다른 데로 옮기거든 공사를 하라’하고 말하더래요 그래도 이 사람은 명령을 받은 터라 그냥 밀어부쳤는데 갑자기 큰 바위가 산에서 굴러내려와 중대장과 군인들이 깔려 죽었어요.”
“고속도로를 낼 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군포 달래네 고개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하루는 공사 현장의 소장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수염이 허연 영감이 나타나 ‘이 나무를 건드리지 마라’하고 말하는 거야 잠에서 깨어난 소장이 이 꿈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사람은 개꿈이라며 그냥 베어버리자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돼지머리를 놓고 제시를 지내자는 사람도 있었대. 그런데 시간도 없고 하니까 그냥 나무를 베어버리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던거야. 그후 나무를 베어버리고 불도저로 흙을 밀고 있는데 나무를 벤 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자리에 눕고 만거야 그 후에도 현장 소장이 아파서 눕고 제사를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아파 눕게 되었으며 아픈 사람은 순서대로 시들시들 앓다가는 하나 둘씩 죽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지.”
“그런 일도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귀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네요?”
“물론이지, 산에는 산신령이 있어 꿈에 선몽을 주기도 하지. 언젠가 심마니를 만났는데 그 심마니의 말을 들어보면 산삼을 발견 했을 때 준비한 물건을 내놓고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산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런데 선생님 산을 자르거나 바위를 깨면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사람의 동맥을 잘라봐, 피가 나겠지. 어느 부위를 잘라도 피가 나게 마련이야 산도 마찬가지야 바로 재만 넘으면 풍양(豊陽)과 고흥(高興)의 경계지역이지. 이 경계지역에 먹곡재가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 고홍에 유명한 인재가 많이 날 것 같으니 먹곡재를 뚫어버렸는데 먹곡재를 파다보니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거야 그후, 고흥에는 인재가 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옛말에도 왜 이사를 갈려면 먹곡재를 피해 가라는 말이 있지? 그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거야”
“산을 잘라 피가 나왔다는 말은 많이 듣긴했지만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나라도 혈을 많이 지른 모양이지요?”
“내가 듣기에도 경기도 양평군에 장수가 나온다고 혈맥을 잘랐고 강릉의 삿갓봉에 부자가 난다고 정철이 구멍을 뚫었고, 강원도의 금성산이 바로 용의 혈인데 거기에 묘를 쓰면 큰 인물이 난다고 해서 혈을 잘랐더니 사흘간 피가 흘러내렸다는 이야기 이외에도 경상북도 선산(善山)에 큰 인물이 날 것같아 숯을 굽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어.”
“이여송이 우리 나라의 땅을 난도질했다면서요?”
“이여송이도 그랬고 왜놈도 그랬지, 이여송은 자기 조상의 혈도 끊은 사람이야”
“조상의 혈을요?”
“그래, 이여송은 원래 조선 사람이야 선조실록에 보면 이여송의 5대 선조는 성주(星州) 이씨로 죄를 짓고 중국으로 도망을 가서 명나라에 귀화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지.”
“이여송은 대단했던 인물인가보죠?”
“명장이었지.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김막봉, 어막봉 두 장군이 명나라로 대군을 청하러 가게 되었는데 두 장군은 명나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을 찾아들어가게 되었지.
두 장군이 주인장을 찾자 노파가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하는거야 두 장군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험상굿게 생긴 화상이 눈에 띄었지. 두 장군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누구의 화상이냐고 물었어. 그 노파는 두 장수가 왜 명나라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듯 ‘이런 장수가 아니면 왜군을 물리칠 수 없다’고 대답했지.
그러면서 노파는 두 장군에게 화상을 내주었는데 두 장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노파는 온데간데 없고 화상만 놓여져 있었어. 그 노파는 천태산 마고 할머니로 화상을 주려고 나타난 것이었지. 두 장군은 그 길로 명나라로 들어가서 할머니가 준 화상을 천자에게 보이며 원군을 청하니 천자는 ‘화상의 장군은 보내 줄 수가 없으나 대신 군사 삼천 명을 주겠다’고 한거야 그러나 두 장군이 삼일을 대궐 앞에서 울며 ‘삼천 군사가 필요 없으니 이 화상의 장군을 보내달라’고 청하자 천자가 할 수 없이 장군을 불러오게 했지. 얼마 후. 들어오는 장군을 보니 화상의 장군과 똑같이 생긴거야 그러나 그는 조선을 도우러 왔다면서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진군을 요구하는 조선의 대신들을 발로 차는가 하면 왜적을 눈 앞에 두고도 싸우지 않고 관망만 하다가 선조가 있는 곳에 왕기가 서리는 것을 보고서야 이길 것을 알고 남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어. 심지어는 조선 산천의 수려함을 알고 스스로 왕이되고싶어 하는 흑심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 구전설화에 보면 이여송은 원병 오는 조건으로 ‘압록강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갈 수 없다’고 배짱을 부리기도 했고, ‘용의 간을 먹어야
한다‘고 아주 불가능한 말만 했다는 거야 그는 조선에 와서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하지도 않고 뒤쫓아가는 조선 장군을 붙잡아 목을 메어 끌고 다녔다는 그런 일도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더군.”
“선조가 조선 사람이라면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어디 그 뿐인가? 이여송은 우리 나라의 좋다는 혈은 죄다 잘라버렸어. 아마 이여송이가 혈만 자르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에도 수많은 인재가 태어났을 거야”
“선생님 어떻게 하면 풍수를 배울 수 있나요?”
“풍수는 배워서 무얼하게?”
“저도 선생님같이 풍수를 배워 유명한 지관이 되게요”
“이 사람아, 지관(地官)이란 원래 벼슬의 이름이야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시험과목으로 삼고 인재를 뽑아 이를 상지관(上地官)에 임명하여 국장(國葬)이 있을 때 장지(葬地)를 선택하게 했지. 각 지방에도 지관이나 음양가들이 있어서 집터나 묘터를 잡아주었지. 그렇지만 지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옮는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뒤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워 보면 안될까요? 비록 지관이 안되더라도 묘를 보고 좋다 나쁘다 하는 평이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더욱 어렵지. 평을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지 못하고는 대답하기 어려운 거야. 사람들은 지관이라면 묘터나 집터를 잡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네.”
“지관이란 직업이 어렵군요”
“어렵다 뿐인가? 그런데 명지관은 성공하고 가짜 지관은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반대로 명지관은 실패하고 가짜 지관이 성공할 때도 있지. 꼭 명지관이라 해서 묘터를 잘 잡는 법은 없으니까.
“가짜 지관이 명당을 잡은 예도 있나요?”
“그럼 있지. 어떤 4대 독자가 홀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어머니가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된거야. 이 아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장사를 치를 돈이 없었지. 할 수 없이 총각은 어머니를 관속에 넣고 지게에 짊어진채 산으로 올라갔지. 총각은 산중턱에 올라가서 어머니를 묻을 장소를 찾아보았지만 어머니를 묻을 장소를 찾지 못했어. 총각은 한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지. 그런데 잠결에 총각은 지게를 발로 차버렸어.
그러자 관은 데굴데굴 산 아래로 구르더니 어느 지점에서 거꾸로 서버렸지. 총각은 자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 관이 서있는 곳에까지가서 그 자리에 땅을 파고 어머니를 선채로 묻고 집에 돌아왔지. 그날 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자 총각은 어머니를 묻은 그 자리가 몹시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거야 그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보니 처마 밑에 웬 여자가 비를 피해 서 있는 것이 아니겠어? 총각은 여인을 방으로 들어오게 한 후, ‘어디서 사는 누구며 그리고 왜 이 밤중에 여기에 서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인의 대답은 ‘자기 집은 원래 부자 집으로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계모에게 잘못보여 계모가 죽이려고 해서 밤중에 도망을 쳐 갈 곳이 없어 여기에 서 있다’고 대답하는거야.
총각은 여인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있다가 인연이 되어 혼인하여 살았는데 이 여인과 살다보니 재산이 날로 번창하여 큰 부자가 된거야 하루는 어머니의 제삿날을 맞아 갑자기 어머니를 함부로 묻은 죄책감이 들어 명지관이라고 소문난 사람을 불러 어머니의 묘를 이장해 달라고 사정을 했지. 명지관은 그 이튿날 총각과 함께 어머니의 산소로 가서 땅을 살펴보고난 후, 어머니가 묻힌 터는 장승혈로 원래 관을 세워서 써야 명당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지.”
“무식한 사람이 명당자리에 어머니를 모셨군요?”
“그렇게 된 셈이지.”
“죽은 사람을 세워서 묻는 데도 명당이 될 수 있나요?”
“그럼, 있구말구. 시체를 앉혀서 묻는 것을 고양이 혈이라 하고 시체를 세워서 묘를 쓰는 것을 장승혈이라 하며, 시체를 엎어 묻는 것을 가재혈이라 하고 시체를 거꾸로 세워 묻는 것을 벌통혈이라 하지.”
“그런 장례도 있어요?”
“강원도로 어떤 국풍(國風)이 지나다가 묘를 보니 봉황이 죽실을 물고 가는 형국을 발견했는데 가만히 보니 시체가 가로 누운거야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어떤 지관이 이곳에 묘를 썼는가 알아보니 글쎄, 풍수의 풍자도 모르는 사람의 장난기 있는 행동이었지 뭔가”
“장난기 있는 행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떤 아버지가 망나니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파 들어 눕게 된거야 어느날 아버지 친구가 찾아와서 ‘이 사람아 그렇게 있지 말고 약방에 가서 약이라도 지어서 달여드리도록 하게’ 하고 아들에게 말했지. 아들은 이 말을 듣고는 곧장 약방으로 쫓아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약방에 초상이 나서 문을 잠근거야
이 아들은 생각하기를 약방을 하면서도 부모의 병을 못 고쳤는데 자기 아버지도 약을 먹어본들 별 소용없을거라고 판단하고는 그냥 집으로 돌아온거야 결국 이 아버지는 약 한 첩도 먹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아버지 친구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지관을 데리고 오라고 시켰지. 아들은 그 길로 지관의 집으로 달려갔는 데 가서 보니 글쎄, 그 지관은 쌀 한 톨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거야 그러자 이 아들은 ‘저렇게 못 사는 사람이 무슨 지관이야 지관에게 묘를 쓸 때는 부자가 되기 위해 부탁하는 거지’하고 생각하고는 그냥 집으로 돌아온거야
이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친구는 기가 막혀 ‘에잇 고얀 놈’ 하고 욕을 하고는 집으로 가버렸어. 망나니 아들은 할 수 없이 혼자 아버지를 지게에 걸머지고 산으로 올라갔지. 그리고는 산 중턱에 올라가서는 ‘아버지가 묻힐 자리를 직접 잡으시오’ 하고 아버지가 든 관을 굴린 거야 관은 데굴데굴 한참 동안 굴러가다 멈추었는데 이들은 관이 놓인 상태로 묘를 써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선생님 우리가 정읍에 갔었잖아요?”
“그래. 그런데?”
”선생님이 산에 가시고 식당에 앉아 있는데 식당 주인이 와서 같이 있던 사람은 무얼하는 사람이냐고 묻던데요”
“그래서?”
“풍수하시는 분이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정읍의 숯굽는 총각 이야기를 잘 알겠다고 하시대요. 그래서 모른다고 했더니 총각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이 사람 참, 그 짧은 시간에 언제 그런 이야길 들었나? 어디 한번 이야기 해 보게.”
“정읍에 홀아비와 숯굽는 총각 둘이 살고 있었대요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답니다. 총각은 저승길을 가는 아버지를 혼자 보내기가 너무나 슬퍼서 자기 그림자도 함께 묻으려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자기의 그림자자 비치기 시작할 때 장사를 치루었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오시(午時)에 장사를 지내면 미시(未時)에 발복하는 자리라 총각은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장사를 하는 시기도 발복하는 데 영향을 주나요?”
“그럼, 이르다 뿐인가 경상북도 선산군에 장동이란 사람이 있었지. 장동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움막집에서 살고 있었어. 그런데 그는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남의 집 품앗이를 하며 살다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참 허무하다고 생각했지. 장동이는 어머니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땅을 파기 시작한거야
그때 명지관 성지가 그곳을 지나다가 장동이가 잡은 묘터를 보고 무릎을 탁 치며 탄복했다지 뭔가 성지는 자기가 죽으면 묻힐 자리를 잡아두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는데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장동이가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지. ‘옳지, 저 자리가 명당이구나, 그런데 해가 광중에 들어갔을 때 관을 묻어야 명당 구실을 할텐데 어떻게 하나보자’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장동이의 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아직 해가 들려면 한참 있어야 했지. 장동이는 혼자 땀을 흘리며 광중을 다 파고나자 너무 힘이 들어 그 옆에 앉아 쉬고 있었지.
그러다가 관을 묻으려고 하는데 해가 중천에 올라 광중으로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가는 게 아닌가 성지는 깜짝놀라 ‘나보다 더 유능한 지관이 있구나’ 하고 하산을 한거야 장동이가 어머니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여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 여인은 갈 길이 멀어 하룻밤 쉬어가자고 청했어. 장동이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고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여인은 정승의 딸로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 하는거야 그들은 그날로 서로 배필을 맺고 정승딸이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하는 설화가 있지. 이처럼 아무리 명당이라도 장사를 지내는 시(時)가 맞지 않으면 명당의 구실을 할 수 없지.”
“선생님 한 가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뭔데?”
“서울에 있는 산을 북악(北岳)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
“그럼, 남악(南岳)도 있나요?”
“그럼, 우리 나라가 남북통일이 되면 북악은 대륙을 관장할 것이며 남악은 해안을 관장하게 되어 2015년에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때가 올거야. 그런데 남악은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몰라. 그렇지만 술가(術家)에서는 삼남(三南) 최대의 승지(勝地)로 무안의 승달산(僧達山)과 목포의 유달산(儒達山), 해남의 두륜산(頭輪山)을 꼽고 있는데 이 산을 서로 꼭지점을 이으면 그 중앙지점이 남악이라는 주장도 있지.
그런데 사람들은 전라도를 다소 천대한다든가,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고 말들을 하지만 우리 나라가 남북통일만 되면 전라도는 가장 발달한 도로 인정받게 되고 이곳에서 우리 나라를 이끌고 나갈 큰 인물도 나오게 되지. 이 전라남도는 풍수에서 금거북의 자궁에 해당되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으로 전라도가 우리 나라의 중심도시로 변모하게 될 때도 있을 거야 앞으로 중국 사람들이 전라도의 항구를 통하여 들어오는 시대를 맞게되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식을 달리하는 지역이 될거야.”
“김대중(金大中) 선생은 언젠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겠지요?”
“김대중 선생은 지도자 상(相)이지 군주의 상이 못돼. 그러나 언제나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은 받을 수 있는 분이지. 같은 야당(野黨)이지만 김영삼(金泳三)씨는 군주(君主)의 상이야. 만약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고 그 다음에 40년의 야당동지로서 김대중 선생의 손을 들어주면 군주가 될 수도 있지.
또 다른 방법은 국민들이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범국민 운동을 전개하는 거야 그렇다면 가능하지만
자력으로는 힘들어.”
남오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군주란 천운(天運)을 타고나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천운을 타고 나지 않으면 군주가 되지 못하며 군주는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
김구(金九) 선생도 대통령의 자격이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고, 신익희 씨나, 조병욱 씨 모두 천운을 타고나지 못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기(氣)가 너무 세어 그 기에 눌려 목숨을 잃게 되었다.
군주란 주먹을 쥐었을 때 엄지 손가락이 네 개의 손을 거머쥐기도 하고 또 엄지 손가락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손가락은 굽히지 못하지만 엄지 손가락만은 자유로이 왕래하며 위에 있기도 하고 밑에 있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군주는 엄지 손가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고 또 백성의 심부름꾼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엄지 손가락은 또한 어느 손가락보다 겸손하다. 겸괘는 땅이 위에 있고 산이 아래에 있는 상이다. 땅 위에 우뚝 솟아야할 산이 오히려 땅 밑에 몸을 숨긴다.
하늘은 위에 있되 겸손하여 아래로 빛을 비추어 주고 땅은 아래에서 모든 생물을 자라게 하여 하늘을 받드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나 모든 생물은 겸손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교만한 것을 싫어하고 겸손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하늘은 보름달의 교만함이 있을까 이즈러지게 하여 초승달처럼 겸손하게 한다. 땅은 치솟는 물을 흐르게 하여 움푹 파진 곳에 가득 메워 자신의 겸손함을 표현한다.
땅에서 태어난 사람도 군주가 되면 자기가 잘 나서 되었다고 생각하고 오만하고 교만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로가 오히려 새끼 손가락보다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남오는 생각했다.
동자북과 개구리 바위
남오가 탄 차는 충청남도 서천 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천군 한산면에는 한산 이씨가 800여년 동안 이어온 고장으로 여기에는 한산 이씨 조묘(組墓)와 이곡(李殺), 이색(李穡)의 묘, 그리고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한산 이씨가 이렇게 번성한 것은 군(那)의 호장(戶長) 이었던 이윤경(李允卿)을 길지(吉地)에 묻었기 때문에 그 자손이 번성하여 고관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윤경이 고려 중엽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그 지방의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또가 앉은 그 자리의 널판지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다른 사환에게 물어보았더니 사또가 앉은 자리는 이상하게 나무가 쉽게 삭아 일 년에 한 번씩 널판지를 뜯어내고 갈아주는 것이 년중행사의 하나라 했다.
그로부터 이 호장은 더욱 관심을 두고 마루 밑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퇴청한 후에 마루 밑을 기어들어가 살펴보았다. 그곳은 뜨끈뜨끈하고 땅에서는 김이 솟아올라 금세 옷이 젖어들었다.
‘참 기이한 일이다.’
이 호장은 집에 돌아와 이유가 무엇일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떻게 하면 년중행사로 되어 있는 판자갈이를 하지 않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고을에서 꽤나 이름있는 지관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보게, 한 가지 물어볼 일이 있네. 다름이 아니고 내 친구가 집을 샀는데 대청마루 밑에서 김이 올라와 판자가 썩는다고 하질 않는가? 왜 그렇게 판자가 썩는 지를 물어보는데 내가 대답을 못해 주었네.”
“그 자리가 어디에 있는 지는 몰라도 아마도 명당인가 봅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묘를 쓰면 고관대작이 나올겁니다.”
“허허, 이 사람아 농담하지 말게. 산이나 들이 아닌 마루 밑인데 어떻게 묘터로 쓰겠는가?”
“마루 밑이면 어떻습니까? 아직도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모르긴해도 그 땅에는 생기(生氣)가 왕성할 겁니다. 널빤지가 썩는 것은 거기가 바로 지중(地中)의 생기가 넘쳐 흘러서 새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온 이 호장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곳이 명당이라 하더라도 사또가 앉아 있는 자리 밑에다 아버지를 묻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그는 음식을 먹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만약 판자 밑에다 묘를 썼다가 들키는 날에는 호장의 목숨이 달아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 호장은 며칠간 관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 있다가 결국 들킬 때는 들키더라도 자손이 잘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의 묘를 파혜치고 시신을 거두어 새벽에 관청의 담을 월장하여 마루 밑에 아버지를 묻었다.
그 이튿날 호장은 사또가 앉아 있는 마루 밑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김이나던 판자에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았다.
그 후, 이 호장의 후손이 순찰사가 되어 한산을 순시하게 되어 사또가 앉아 있는 널판지를 뜯어내고 땅을 파 본즉 할아버지의 유골이 나왔다.
순찰사는 다시 그대로 시신을 묻어놓고 개경으로 돌아와 상감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상감은 이 사연을 듣고 사직서를 즉시 돌려주고 오히려 기뻐하며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기록하다’고 말하고는 관청을 딴 곳으로 옮기고 그 곳에 분묘를 쓰라고 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 그곳에는 고려 호장 이공 지묘(高麗戶長李公之墓)라는 묘비가 서있다.
“박 기사, 우리 공주에 가서 밥을 먹지.”
남오는 공주로 승용차를 몰게 했다. 국도를 타고 가는 길은 몹시 험했다.
“선생님, 그런데 혈이 아무리 좋아도 혈장이 나쁘면 명당이 될수 없나 보지요?”
“이 사람 이러다가 진짜 지관이 되는 거 아니야?”
“아니예요, 제가 무슨 지관이 되겠습니까?”
“그래 지관이 되게. 대신 운전은 똑바로 하게. 결혈의 장소는 혈성(六星)이 곱고 광채가 있으며 정교하고 세밀한 것을 중요시 여기는 데 조잡한 것을 싫어하지. 마치 사람도 조잡하고 누추한 것은 마음도 흉악하고 불량한 것과 같아 산도 마찬가지지. 산이 조잡하면 혈처는 반드시 추악하고 불량한 소응을 발하게 되지. 그리고 혈장은 가파른 곳은 쓰질 않네, 대개 혈처는 평탄하고 완만해야 하는거야. 혈처가 가파르면 수용하는 성질이 결하게 되어 융결을 바랄 수가 없어. 또한 고립된 산에는 써서는 안되네.
혈처는 그 주위가 빽빽하고 따뜻해야 하는데 만약에 산의 주위에 산이 없고 외따로 있으면 고한의 혈은 빈궁함으로 후손이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마침내 절멸하게 되지. 중요한 것은 혈처에 종기가 나서는 안돼.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얼굴에 뭐가 이리 튀어 나오고 저리 튀어 나왔으면 첫 인상이 아주 나쁘게 보여 말하기도 싫지 않은가? 또 얼굴을 보면 눈에서 광채가 나고 짙은 눈썹을 보면 괜히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산도 종기가 난 산은 좋지 않지. 그리고 용기(龍氣)가 너무 허약하면 못써. 용기가 허약하면 뱀이나 쥐의 서식처가 되어 버리는 거야. 용기가 허약하면 신(神)이 머물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사람도 마찬가지야. ‘국력은 체력’이라고 하듯이 기골이 장대하고 건강한 사람에게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야. 기(氣)와 혈이 쇠하면 못써. 생기가 있는 곳에는 땅이 건실하고 강고해서 개미나 땅강아지 같은 것들이 살지를 못하지. 그리고 입혈(人六)은 오목하면 적풍(賊風)이 불어 장정이 절멸하기 때문에 혈처 주위는 빽빽하게 차단되어야 하지. 또한 혈처가 너무 둑 튀어나온 곳에 묘를 써서도 안돼. 너무 돌출된 곳에 묘를 쓰면 항상 바람을 받게 되어 생기가 모이지를 않아 진혈이 결합되지 못해.
그리고 기(氣)라는 것은 흙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용이 가파르고 험한 곳에 혈처를 정하면 안돼. 또 높은 곳에는 돌이 많아 시신을 돌산에 묻는 것이 아니지. 비록 돌산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둡고 그늘지고 한냉한 곳을 정해서도 안되네. 이런 땅을 양시(養門)라고 하는데 이런 곳에 시신을 묻으면 백년이 가도 시신이 썩질 않아. 얼굴색도 변하지를 않고 광택이 나는데 바람에 시신이 닿으면 그때 비로소 변해 버리지. 그 이유는 땅에 생기가 없다는 증거야 용에 진맥(眞脈)이 없고 산에 정혈(正六)이 없는 곳에는 묘를 써서는 안되네. 알겠나?”
“네, 선생님. 그런데 땅이 젖어 있는 곳에도 쓰면 안된다면서요?”
“암, 혈처가 질펀하고 광연(曠軟)해서 마치 손가죽이 나른하고 평평한 곳도 써서는 안되지만 혈처가 미련하고 딱딱하고 준직(峻直)한 것은 피해야 하지.”
“이것저것 가리다가 보면 실제로 명당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겠습니다.”
“그럼 명당 찾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았냐? 내 평생 지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진짜 명당을 구한 것은 열 손가락에도 들지 않아.”
남오가 공주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공주 지방은 옛부터 묘지 풍수에 의하지 않으면 개운(開運)이 되지 않고 길지(吉地)를 정하면 개운이 된다는 지세를 갖고 있다. 특히 이 지방은 묘지의 좌강(左同), 즉 청룡이 문무(文武), 현관(顯官)을 관장하고 우강(右同), 즉백호가 다자재부(多子財富)를 맡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고 있다.
사람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묘자리를 좋은 곳에 선택한 지관의 의견보다 자기 스스로 음덕을 쌓아놓으면 하늘에서 그 복을 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l928년 공주의 김 부지는 대전의 지사(地師)로부터 만 명의 목숨을 구하면 저절로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가난한 사람을 도와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남오는 저녁을 먹고 나서 피곤한 다리를 주물렀다. 긴 여정에 몸은 그만 녹초가 되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우선 공주라면 조선 말기에 태어나 6.25 동란을 겪으며 87세로 타계한 공주 최대 갑부 김갑순(金甲淳)을 잊을 수가 없다. 노비 출신의 신분으로 28세에 충북관찰부 주사 판임의 8등 관직에 들어가게 된 것은 모두 김갑순이 아버지의 묘를 명당에 썼기 때문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공주 감영의 관노인 김갑순은 왕실에 바치는 상납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때 그가 만난 사람은 왕실 출납을 맡았던 이용익(李容翊)이었는데 김갑순을 대한 이용익은 그의 모습에서 과거에 자기의 어렵던 과거를 회상하여 그를 휘하에 두고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후, 김갑순은 충북관찰부 주사를 거쳐 29세에 6품인 중추원의관을 지내고 30세에는 내장원 봉세관이 되었다. 또한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l년 전에는 부여 군수로 부임했다. 33세에 노성 군수가 되고 임천 군수를 거쳐 공주 군수로 부임했으며 강원도 김화군수를 거쳐 고향 근방인 아산에서 관직을 마감했다.
그는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부를 장만했다. 마침 총독부가 발표한 ‘공전범포감령’으로 수령을 지낸 김갑순에게는 큰 부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김갑순은 공주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승지의 집을 구입하여 가지고 있던 돈을 굴리기 시작하여 49세되던 l92l년에는 공주뿐만 아니라 대전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는 대전 지역의 38%나 되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유성온천이나 온양온천은 김갑순의 땅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면회하기가 어려운 사람은 금명함을 보냈으며 총독부 국장에게는 호피를 보냈다. 심지어 기차를 타고 달려도 김갑순의 땅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그런 그가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89세로 타계할 때는 빈털털이가 되었다고 한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하지만 그렇게 싹쓸이 없어진 것은 분명히 부친의 산소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김갑순의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계룡산 밑의 갑사(甲寺) 입구 중장리 마을에서 구왕리(九旺里)로 통하는 장하 고개를 넘어가면 오른편에 수도암이라는 작은 절이 하나 있고 그 절 위편에 김갑순의 아버지 묘소가 있다.
묘비에는 앞면에 ‘증 통정대부 김해김공지묘’라 써 있고 뒷면에는 ‘자 통정대부 행 노성군수 갑순 임신생 손종석 기해생 을사 4월생’ 이라고 써 있는 것으로 보아 김갑순이 노성군수 시절에 이묘비를 세운 것이며, 종석은 김갑순의 아들의 이름이다.
이곳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묘자리를 얻는데 김갑순의 어머니는 공주에서 주막집을 하며 당시에 유명하디는 지관에게 벼한 섬을 주고 잡은 묘자리라 한다.
남오는 묘 앞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계룡산 줄기가 북진하여 수정봉을 만들고 그 한 가닥이 떨어져 혈을 맺고 있다.
혈의 좌향이 서북향인데 이곳에서 청룡 밖의 서남방에는 문필봉이 솟아있다. 음양오행의 법칙을 따르면 동남방으로 들어온 산은금(金)에 해당되고 이 금은 서남방에 관록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안산은 아주 가까워 발복을 재촉하며 오른쪽의 백호가 수구(水口)를 막고 있다. 물은 서쪽에서 들어와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형국은 금계포란형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며 혈은 알 자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아뿔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묘 앞에 큰 길이 마치 뱀이 기어오는 형상이 아닌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데 뱀이 알을 가지러 오니 닭은 놀라 도망을 가야할 형국이다. 길은 곧 재물의 흐름을 막고 있는데 금룡(金龍)이 물을 만나 죽는 방위에 해당이 되니 이는 길가는 나그네의 발길과 같아 김갑순의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김갑순은 도로로 인하여 선친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했다.
남오는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공주에서 북으로 20여리 가면 공주시 월성동 석방현에 시조의 아버지 묘가 있고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는 전의(全義) 이씨 시조 이도(李掉)의 묘가 있다. 이도의 처음 이름은 이치(李齒)로 알려지고 있다. 이도는 고려의 삼한 통합 때의 공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어 전산후(全山候)에 봉해졌는데 그가 묻힌 묘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으로 충남에서는 최고 길지로 손꼽히고 있다.
전의 이씨 시조(始祖) 이도(李掉)가 통합삼한삼중대공신(統合韓三重大功巨)으로 추증된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명당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조가 생길 무렵, 금강 유역의 조그만한 산밑에 이모(李某)라는 가난한 나룻배 사공이 살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자비스러운 사람으로서 궁색한 사람을 보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도와주는 성미였다. 그래서 공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구걸하여 먹고사는 거지들로부터 신처럼 존경받고 아버지처럼 친해졌다.
어느날 나그네 중이 나루를 건너게 해 달라기에 건네주니 얼마 안되어 되돌아 와서 다시 건네 달라고 하였다. 한숨 돌릴 사이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4,5회를 거듭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성을 냈겠지만 이씨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언짢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중은 크게 감탄하며 뱃사공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여보시오, 보자니 상중(喪中) 같은데 어디 좋은 자리라도 찾으셨소?”
“좋은 자리가 뭡니까? 사실은 아버님이 세상을 떠난 지가 삼 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모셔야 할 지를 몰라서요.”
나그네 중은 손가락으로 산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 산의 산복(山腹)이 길지이니 묘지로 정하여 아버지를 그 곳에 매장하시지요. 그런데 그곳은 양지(良地)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 사람이 파헤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묘혈을 석회 천 가마니로 굳게 만들고 돌을 세워 내가 시킨 대로 써 놓으시오.
남래요사 박상래 단지일절지사미지만대영화지지(南來妖師朴相來單知一節之死未知萬代榮華之地) 라는 글을 돌에 새겨 묘의 상층에 묻어야 하오.”
뱃사공은 그날부터 공주의 거지를 불러모아 석회로 광을 만들고 아버지의 유해를 넣은 다음, 석회로 굳게 다지고 상층 밑에 각석(刻石)을 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그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대를 이어 뱃사공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코자 남하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이다. 갑자기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진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강을 함으로써 승전을 하게 되었다. 왕건은 그의 공을 높이 여겨 이등공신을 추증하고 전산후(全山候)에 봉하는 한편, 도(掉)라 사명(陽名)까지 받았다.
그런데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몇 대 뒤에 박상래(朴相來)라는 지관이 이 곳을 둘러보고 그 후손에게 강력하게 말했다.
“이 뒷산의 용(龍), 즉 내룡(來龍)의 맥이 중단되어 있으니 일시 발복을 했다 하더라도 일족이 망할 것이요 그러니 선조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좋겠소.”
전의 이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발각 뒤집어졌다. 박상래라면 당시 가장 유명한 지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에서는 입을 모아 이장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래서 후손들은 묘를 이장할 것을 결의하고 묘를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묘는 석회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파지지 않았다. 겨우 상층을 벗겨보니 한 장의 각석이 나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남래요운운 (남래요운운(南來妖去去)……)’ 이라고 쓰여 있었다.
즉, ‘박상래라고하는 요지관(妖地官)이 와서 이곳을 흉지(兒地)라고 하고 이장(移葬)하기를 권하는 일이 있을 터이나 결코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글이었다.
자손들은 각석을 읽고 다시 팠던 묘를 원상태로 해두었다.
남오는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묘 앞에 앉아 그의 후손을 생각해보았다. 삼한 개국공신 삼중대광태시(三重大直太師) 이도에게 씨족의 문을 열어준 지 일천 년, 조선조에 상신(相巨) 5명을 비롯하여 대제학 l명, 청백리 7명, 공신 6명과 문과 l2명을 냈는데
그 중에서도 시조의 11대손인 이정공(李靖公) 정간(貞幹)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유명하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노모를 분양하기 위해 사직한 출천대효자(出天大孝子)이다. 그의 나이 8O세이고 어머니 나이 lOO세를 맞이할 때였다.
그는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여 노모를 웃겼다. 세종은 늦게야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정2품을 하사하고 직접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이라는 글을 써서 보냈는데 이 글이 아직도 전의 이씨의 가훈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전의 이씨의 후손 중 최근의 인물로는 국문학자 이희승 씨, 그리고 야당 당수였던 이철승 씨 등이 있다.
남오는 시 한 수를 외었다.
아, 이 나라에 주권이 없으니 같은 외교관도 평등치 못하구나.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하니 혈기 있는 자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아, 나라는 장차 폐허가 되고 민족은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산들 그 욕됨이 자심할지니
한시 바삐 죽어서 잊음만 같지 못하리라.
이제 결심하니 따로 할말이 없구나.
이 시는 전의 이씨인 이한응(李漢應)이 고종 38년 영국의 대리대사로 근무하면서 피나는 호소와 항변을 하다가 수포로 돌아가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반년 전 당시 나이 32세로 음독 자결하면서 지은 시이다.
남오는 전의 이씨의 웃대 조상의 묘 앞에 서서 안산이 되는 옥녀봉을 바라보며 산에서 내려왔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서 회라도 한 사라 먹고 가야지.’
남오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차를 서천쪽으로 몰게 했다. 금강의 하류를 거슬러 부여를 지나 29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서천군 한산면 동산리 동자북이라는 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
“자네, 이 동자북이라는 마을 이름이 왜 동자북인지 아나?”
“모르는데요.”
“동자북이란 동자가 북을 치는 형세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저 동자북 뒷산은 원래 상당히 높은 산이었는데 동자가 묻히고 난 후에 저 산이 차츰 낮아지기 시작했다고 하더군.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북소리가 난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하지.”
남오는 차를 세우게 하고 동자북이 잘 보이는 곳으로 올라갔다. 건지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동네는 행복하게만 보였다. 동자북에는 아직도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세상이 이상해졌다.”
“나라가 망한 모양이야.”
“그런데 원님은 왜 행차할까?”
“글쩨 말이야. 어른들이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으니 알수가 있어야지.”
“하여튼 전쟁놀이나 끝내자.”
동네의 아이들은 다시 전쟁놀이를 시작했다. 모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야산인 건지산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서로 편을 갈라 칼싸움을 하다가는 육박전으로 땅에서 딩굴었다. 이 싸움은 상대방이 지쳐 항복할 때까지 했다. 싸움은 점심시간도 넘길 때가 많았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에서 내려 올 때 아이들은 모두 기진맥진했다.
이러한 소문은 궁궐에까지 들어갔다.
왕자는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즐겁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구경을 하러 오기도 했다. 아이들은 두 패로 나누어 한패는 산 위에서 내려오고 한 패는 산 아래에서 위로 북을 치고 올라가는데 거의 산중턱에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왕자는 전쟁놀이 구경이 재미있어 대궐로 돌아갈 마음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우리들 모두 군사로 갈 수가 없을까?”
“글쩨말이야. 우리를 군사로 뽑이주면 산성 하나 쯤은 지킬텐데……”
“그러게 말이야, 회양에 사는 나무꾼도 군사가 되었데.”
“그 나무꾼보다야 우리가 낫지.”
“우리 다시 원님에게 가서 사정 한 번 해볼까?”
“또 그 소리겠지. 너희들은 글이나 읽고 무예를 닦아라.”
아이들은 그 말에 풀이 죽었다.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비로소 부모로부터 나라가 망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제는 이제 나라가 없어졌다. 우리 의자왕은 피하셨다가 돌아와 항복을 했단다.”
부모들의 말에 아이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랑곳 하지않고 전쟁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지방 곳곳에서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아이들은 머리를 칡순으로 칭칭 감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고함을 치며 전쟁놀이를 시작하였다.
“저기 당나라 놈들이 간다. 잡아라!”
아이들은 산을 오르내리고 북을 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놀이를 계속해서 했다. 사비성은 함락되었으나, 그들이 사는 이곳에는 도승과 왕자 그리고 좌평 한 분이 있어서 백제를 구하려는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시들해졌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오후였다. 아이들은 비가 오는 것도 잊고 열심히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자가 비를 흠뻑 맞고 건지산 아래로 찾아왔다.
“왕자님이시다.”
어느 아이가 왕자를 보고 고함을 지르자 아이들은 왕자의 앞으로 몰려갔다.
“나는 그대들을 믿노라. 나를 따르라.”
왕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왕자가 사는 성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그날부터 왕자를 호위하는 군사가 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이곳까지 쳐들어왔다. 아이들은 북을 치며 당나라군을 격퇴시켰다. 날이 훤히 밝아오는 데 새벽 비는 장대같이 퍼부었다. 그래도 당나라 군사는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왕자를 다른 곳으로 피난을 시키고 그들이 훈련하던 건지산으로 올라갔다.
당나라 군사들은 건지산으로 개미떼처럼 기어올라왔다. 아이들은 북을 치며 당나라 군사와 싸움을 시작했다. 차츰 북소리가 작아지면서 열아홉 명의 어린 소년은 건지산 꼭대기에서 장렬한 전사를 했다.
그로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건지산에서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다고 한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일치 단결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운 것을 보더라도 이 지방의 단결심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오는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에 있는 생선회 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장, 저 산을 무슨 산이라 부르오?”
“저 산 말입니까? 망내산이라 하지요.”
“망내산이라?”
“장항을 처음 와 보십니까?”
“예, 처음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면 망내산은 가보셔야죠.”
“볼 것이라도 있습니까?”
“볼 것보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전망이 좋지요. 서해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고요 전설에 의하면 저기에는 개구리 바위가 있었대요. 산을 올라가다 보면 꼭 개구리 모양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개구리 바위라고 불렀지요. 옛날에 추(秋)씨 성을 가지고 있는 분이 살고 계셨는데 대대로 살아가는 동안에 날로 번성했다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잘되어 추씨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갔답니다.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 들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만선을 이루고 장사를 하면 큰돈을 모아 추씨들은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은 모두 개구리 바위 덕택이라고 생각하고 개구리 바위를 수호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봄부터 가물기 시작하더니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 방울 오지를 않았답니다. 산에는 나무가 타 버리고 들에는 곡식이 말라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샘조차도 모두 말라 버려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군데에만 물이 마르지 않고 있었는데, 그곳은 추씨네 집 가운데 있는 우물이었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추씨네 집으로 물을 길러 갔지요. 하루는 마을에 사는 어느 아낙네가 물을 길러 그 집을 갔었답니다. 마침 대문이 열려 있기에 아낙네는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긴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나타났답니다.
주인 남자는 아낙네를 힐끔 쳐다보고는 ‘당신이 물을 길어가면 우리는 물을 어디서 길어다 먹어야 하는거요?‘ 이렇게 말하고는 두레박으로 퍼올린 물을 자기 우물에 다시 쏟아 붓고는 아낙을 쫓아보냈습니다. 이 아낙네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답니다. ’어디 가서 물을 길어야 할까?‘ 아낙네는 그 집을 나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웃 마을로 물을 길러 가려고 생각을 하니 분함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요?”
“아낙네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갑자기 구름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천둥번개가 쳐서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어디서 쾅하는 소리가 나면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비가 말끔히 개였대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어디로 벼락이 떨어졌는가 알아보니 추씨네가 애지중지하는 개구리 바위가 두 조각이 나 있었답니다. 그로부터 추씨네는 날로 집안이 망했대요.”
“그럼 현재 이 동네에 추씨들은 몇 가구나 살고 있어요?”
“그 후에 추씨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한 가구도 없지요.”
“그랬군요. 이야기 잘 듣고 갑니다.”
남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개구리 바위까지 올라가 보자고 생각했다. 어둠이 깔린 항구의 밤은 청사초롱을 단 것 같았다. 어느 주막에서는 생선을 굽는 냄새, 또 어느 집에서는 노랫소리가 초저녁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항구든지 마찬가지이겠지만 장항의 항구는 조용한 편이다.
남오는 좁은 길을 지나 개구리 바위쪽으로 올라갔다. 강바람이 한결 시원했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고 멀리서 발동기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고기잡이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모양이라고 남오는 생각했다.
남오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깜박이는 별 자리를 응시했다.
‘별은 별을 치고 친별은 또 다른 별을 치고 별은 떨어지고.’
남오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이모 변호사와 술을 마시고 얼큰히 취한 날 이 변호사는 시 한 구절을 읊었는데 그 시가 생각이 났다.
공은 치면 뛰어솟고
자유는 억압에서 잉태되듯
독재발톱 도끼로 날세워
유신헌법 내리친다.
긴급조치 9호 발동
만법 중에 만법일까.
유신시작 궁정동이면
유신종말 궁정동일거다.
산(山)의 관상법
남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새해 아침 괘상을 뽑아보았더니 천금성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또 무슨 변화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사무실을 너무 오래 비워두어 오늘 밤을 보내고 상경하여 일을 좀 보고 다시 지방을 돌려고 생각했었다.
그때 운전수 박씨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산의 유형을 보시고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나타내어 옥녀단발형이니 금구음수형이니 하시는 데 이같은 유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우리가 사람을 보고 오늘 선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어떻더냐고 물으면 도둑놈 같이 생겼다느니 생기기는 순진하게 생겼더라느니하는 대답을 하지않아? 산도 그 모습을 보고 사람이나, 날짐승, 사물 등으로 구분해서 형국을 논하게 되지. 사람으로 유추시키는 산의 오성(五星)의 성격은 목성(木星)과 화성(火星)의 산에 해당되고, 정혈(定穴)이 되는 곳은 심장부와 배꼽, 음부 등을 취한다.
날짐승으로 유추시키는 산의 오성 성격은 금성인 산에 해당되며 정혈이 되는 곳은 날개나 벼슬, 둥우리 부분을 취한다. 들 짐승으로 유추시키는 산의 오성은 토성(土星)인 산에 해당되며 짐승의 모양과 특성에 뱀으로 유추시키는 산의 오성의 성격은 수성(水星)인 산에 해당되며 정혈이 되는 것은 머리나 꼬리 부분을 많이 정하지.
유형에는 단독형과 복류형 두 가지가 있는데 풍수에서는 산형(山形)을 하늘의 오성으로 나누지. 그 형태가 곧게 솟아 있는 것을 목산이라하며, 뾰죽하고 좁은 것을 화산, 모가 나고 책상모양인 것을 토산, 꼭대기가 둥글고 다리가 넓으며 복종과 같은 것을 금산이라 하며, 굽이쳐 움직이는 파랑과 같은 것을 수산이라 하는데 이 다섯 가지가 꼭 들어 맞지 않기 때문에 풍수에는 산상물형취방불(山象物形取彷彿)이라 하여 그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지.
복류형(複類形)은 혈을 중심으로 주위의 여러 사(砂)를 복합 종합한 것인데 통상 형(形)이라고 하지.
복류형에는 제일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인데 사람의 모습에는 여자, 선인, 장군, 승려, 어부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고 있지.
옥녀단장형(玉女端粧形),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옥녀세족형(玉女洗足形),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옥녀무수형(玉女舞袖形), 옥녀등공형(玉女登空形), 옥녀개화형(玉女開花形) 옥녀봉반형(玉女奉盤形), 미녀헌화형(美女獻花形), 천녀등천형(天女登天形), 삼녀동좌형(三女同坐形), 뢰부돌족형(賴痛突足形), 아미명수형(蛾眉明秀形)이 있는데
옥녀탄금형의 경우는 옥녀란 유예(游藝)에 뛰어난 여자이며, 금(琴)은 악기를 말하지. 풍류절미의 옥녀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면 따라 노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경상도 달성군 유가면 금리라는 곳에 가면 동쪽에 나즈막한 산 하나가 있는데 주산은 비슬산이 되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얌전히 앉아 있는 산을 옥녀봉이라 부르지. 이 동네 이름이 금리인데 금리와 옥녀봉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담겨져 있지.
옛날 어느 예쁜 아가씨 한 사람이 동쪽의 산봉우리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대. 그런데 며칠 동안이나 거문고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앞산에서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려 오기에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이 되어 산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아무 흔적도 없더래. 그래서 동네 이름을 직금(織錦)이라해서 오녀가 베를 짰다는 뜻을 나타냈지. 그런데 조선 초기에 한 무명대사가 직금이리는 동네 앞을 지나다가 이곳의 지형을 살피면서 ‘이 지형은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형이 아니고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이니 금산이라 부르라’고 했지.
그후, 동네 이름을 금산이라 불렀는데 l9l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풍군이 달성군이 되고 금산이 금리로 바뀌자 이곳 사람들은 지김이라고도 불렀지. 이 지김은 직금을 잘 못 부른거야. 이런 유형에 묘를 쓰면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고 부자가 되며 옥녀 같은 예쁜 자식을 가진다고 하지. 그리고 옥녀산발형은 안산에 달빛형, 오른쪽에 거울형, 왼쪽에 분갑 기름 항아리형이 있는데 산발은 화장을 하기 위한 자세이므로 곧 단장한 모습을 의미하지.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낸다고 전해지고 있어.
옥녀산발형은 그 대표적인 묘가 의안대군의 묘소인데, 경기도 미금시 평내리 산 97번지 잣봉산(拍峰山) 서쪽에 태조 이성계의 중형인 이화(李和) 의안대군(義安大君)의 묘소가 있지. 이태조가 등극하고 난 후 그의 마지막 소원은 자기가 죽고 난 다음 어디에 묻힐 것인가였지. 그가 묘소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어느날 무학대사와 중형인 의안대군이 밝은 얼굴로 태조를 찾아왔어. 무학과 의안은 망우리까지 나가서 동구릉(東九陵) 자리를 보고 묻힐 자리를 보고 드리러 온거야
‘형과 대사가 웬 일로 이렇게 일찍 나를 찾아왔소?’ 하고 물었지. 사실 태조는 무학대사를 존경했지만 의안대군은 무학을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태조는 알고 있었지. 무학은 동구릉 자리가 ‘산곡(山谷)의 형상은 마치 일월(日月)이 서로 껴안은 것과 같은 희유(稀有)의 대지(大地)’라고 설명을 하자 태조는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않았어. 태조가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의안대군은 대사, 그럼 내 자리는 어디가 좋겠소?‘ 하고 묻질 않았겠나.
무학은 ‘서슴지 않고 대군의 자리는 이미 잡아 놓은 지가 오래입니다.’ ‘그래 그게 어디오?’ 하고 의안대군이 물었지. ‘그 자리는 백봉산 기슭에 있는데 옥녀산발형으로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하고 무학이 대답했지. 평소에 대사도 의안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우 태조가 등극하고 난 후, 중들을 4대문 밖으로 쫓아내고 중이 일반 사람들과 서로 만나면 ‘소승 문안 드립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탄압을 넣은 것도 모두 의안대군이지.
그래서 무학은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는 자리를 잡은거야 의안은 태조가 등극하자 모든 공을 아우인 태조와 조카인 정종과 태종에게 돌리고 평내리 54번지에 궁궐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단종사화로 이 궁궐을 헐어버렸지. 의안대군이 돌아가시자 태종은 중부(仲父))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여 유해를 백봉산 사좌(巳座)에 묻고 불천지위 사당을 건립했는데 이 사당은 소실되었다가 숙종대왕이 다시 재건했지. 내가 보기에는 옥녀산발형은 산발형인데 대가 수난을 당하는 형이더라고,
아마 무학이 의안대군에게 앙심을 품고 이곳에 묘소를 정해 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드는 곳이야.
의안대군이 죽고 얼마 후에 단종사화가 일어나지 않았겠나? 단종사화 때 의안대군의 손자인 하령군 등 l6명이 처형을 당하는 수모도 겪었지.”
“선생님, 그리면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현재 의안대군의 묘 아래인 궁평부락에 후손들이 살고 있지. 그리고 옥녀직금형이란 앞에 농사형(弄梭形), 오른쪽에 침사수(沈絲水)가 있어야 해. 만약 침시수가 없으면 우물을 파야 하는데 이런 곳에 묘소를 정하면 끊임없이 귀한 자손이 나오기 마련이지.”
“선생님, 그런데 의안대군의 묘소에서도 귀한 인재가 나온다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귀한 인물이 나왔지. 단종사화로 인해 비록 하령군이 처형을 당하기는 했지만 숙종대왕 때는 의안대군과 아들 완천군을 개국정사(開國政事), 좌명원훈(佐命原勳),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추대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람 중에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으로 장군 두 사람이 서로 작전을 의논하는 형상이며,
장군무검형(將軍舞劍形)으로 장군이 적진에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있으며, 장군출진형(將軍出陣形)으로 장군이 싸우러 나가는 모습이 있고, 장군전기형(將軍展旗形)이 있고, 장군격고월적형(將軍擊鼓越敵形)으로 장군이 북을 치며 도망가는 적을 쫓아가는 모습이 있어.
그 이외에도 장군만궁형(將軍蠻弓形), 장군전마형(將軍轉馬形) 등이 있는데 장군은 꼭 부하를 거느리고 있어야 하고 보검 등이 있어야 되는거야. 그리고 졸병의 사(砂)나 명마(名馬), 보검 등이 갖추어야 길격이 되지. 이런 곳에 묘소를 쓰면 후손 중에 명장(名將)이나 명지휘관이 태어나기 마련이야.
그리고 주산(主山)을 목성(木星)으로하고 화성(火星)을 두고 있는 모습을 선인형(仙人形)이라고 하는데 선인형에는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으로 선인이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을 말하며, 선인격고형(仙人擊鼓形), 선인무수형(仙人舞袖形), 선인대좌형(仙人對坐形), 그리고 선인이 팔짱을 끼고 있는 선인앙장형(仙人仙掌形), 쌍선망월형(雙仙望月形), 선인과마형(仙人跨馬形), 이선대기형(二仙對幕形)으로 두 신선이 마주 보고 바둑을 보는 형상이며 그 이외에도 무선형(舞仙形)이라 해서 선인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이 있지.
충남 부여군 외산면 화성리에 가면 그 지세가 선인무수형이며 경남 남해군 이동면 벽련리는 쌍선대기형이고 경남 김해시 구산동 매정마을은 운중선무형으로 구름속에 선인이 춤을 추는 형상을 지니고 있지. 그리고 사람과 관계되는 형상으로는 승려를 많이 비유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늙은 중이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하여 호승배불형(胡曾拜佛形)이라고 하고 떠돌이 중이 예불드리는 모습을 유승예불형(游僧禮佛形)이라고 하지.
유승예불형의 대표적인 곳이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내가리와 경남 김해군 녹산면 삼문리, 충남 논산군 벌곡면 만목리 라는 곳에 가면 찾이볼 수가 있지. 그 이외에도 호승불무형(胡增佛舞形)은 전남 광양군 골약면 중동리에 가면 볼 수가 있어.
그리고 중의방랑형도 있는데 경남 양산군 철마면 암기리를 찾아가봐. 그게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 수 있을 거야 사람과 관계되는 형상 중에는 어부에 관한 것도 있지. 어옹철망형(漁翁鐵網形)이라해서 늙은 어부가 그물을 거두는 형상이 있고 어부설망형(漁夫設網形)이라 해서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설치하는 모습이 있으며, 어옹수조형(漁翁垂釣形)이라 해서 어부가 낚시를 던져놓고 대어를 낚는 모습을 말하는데 이런 곳은 물고기의 사가 있으면 더욱 좋지.
대어를 낚는다는 것은 고관대작을 탄생시킨다고 풍수에서는 믿고 있어. 그런데 역시 동물들의 형상이 제일 많아. 그 대표적인 것이 거북인데 거북은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로 팔괘를 완성하는데 낙서를 제공한 동물이 바로 거북이지. 거북은 또한 하늘의 기(氣)를 마시며 사는 거북이를 금구(金龜)라고 하지.
거북이의 형상에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라고 있는데 금구는 천귀(天龜)라고도 말해. 천귀란 기를 잘 합해서 사물을 만들지. 이 천귀가 흙탕물 속에 빠지면 토생금(土生金), 즉 오행의 상생관계가 되기 때문에 이 토(土)는 오행의 기를 받아 땅속으로부터 땅속의 기를 합해서 사물을 잘 만들어. 때문에 이 형은 묘지보다 택지로서 더 좋지. 거북이가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 금구음수형(金龜飮水形)이고 부해금구형(浮海金龜形)은 거북이가 口倒 바다에 떠있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지.
금구입수형도 거북이가 머리를 내미는 듯한 모습과 물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있고 거북의 꼬리와 같이 생긴 것을 구미형(龜尾形)이라 하지. 이 구미형은 거북이의 꼬리에 생기가 있기 때문에 꼬리부분에 묘지를 쓰면 틀림없이 부귀영화를 가져오게 돼. 청양군 사양면 새말이란 곳에 구산(龜山)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조선 중엽 김한림(金輪林)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지.
그 선비가 묘지를 찾아 산역(山初을 하는데 땅속에서 흰거북이가 나와 마을로 기어오는거야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구경하고 있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던 지관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말하기를 저 흰거북이가 마을을 벗어나면 마을이 망하니 마을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지. 그 방법은 당(堂)을 짓고 당산제(堂山察)를 지내야 한다기에 당산제를 지냈더니 마을은 무사했는데 거북이가 나온 산을 구산이라 하고 마을이 부촌
으로되자 이곳 마을을 흥산이라 했지. 이같이 거북이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묘지는 대개 후손에게 부(富)와 귀(貴)를 안겨주지. 그리고 호랑이(虎)에 대한 형상인 복호형(伏虎形)이 있는데 이 복호형은 혈 앞에 장형(獐形)사가 있고, 건술방(乾戌方) 즉 백호의 허리에 결처가 있어서 이곳으로부터 혈을 향해서 바람이 불어와야 되거든. 장형사는 엎드린 호랑이의 잠든 눈을 깨우는데 좋은 것이고 술(戌) 방향의 바람은 견성(犬聲)이라 해서 만일 이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면 엎드린 호랑이는 이 바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게 되지.
이렇게 움직일 때 산 기운이 발동해서 이곳의 땅 주인은 복을 받게 되는 거야. 호랑이는 힘이 세고 용맹하여 동물의 왕으로 손꼽고 있는데 맹호가 나타났다는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이나 맹호하산형(猛虎下山形), 그 이외에도 맹호하전형(猛虎下田形), 갈호음수형(渴虎飮水形), 노호하산형(老虎下山形)이 있지. 특히 순천 마이산 우변에 오호와령형(五虎臥嶺形)이 있어 두삼혈(頭三穴)과 미이혈(尾二穴)이 있다고 하는데 가 보지를 못했어. 언제 한 번 가 볼 작정이야 그런데 동물 중에서 길지로 알려지고 있는 형상으로는 용(龍)과 뱀(姓)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뱀의 경우에는 기(氣)가 눈과 귀에 쏠리어 있기 때문에 눈이나 귀의
부분에 정혈(定穴)을 해야 되며 독기가 있는 부분에 쓰면 도리어 화를 입게 되지. 사두형(已頭形)의 경우에는 전안에 개구리형의 사가 있으면 더욱 좋지. 마치 뱀이 개구리를 먹는 모양이어서 산기운의 발복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 그리고 생사청합형(生蛇聽蛤形)이라 하여 뱀이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는 모습이 있고, 초사토설형(草蛇吐舌形)이 있는데 문자 그대로 뱀이 풀더미 속에서 혀를 내밀고 나오는 모습이라서 아주 길지라고 하지.
그 외에도 용사취회형(龍蛇翠會形)이 있고, 장사축와형(長蛇逐蛙形)이 있지. 용에 대해서는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어야 더욱 용의 가치가 있는거야 만약 용이 여의주를 얻지 못하면 만년이 지나도 승천할 수가 없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용은 구슬을 얻으려고 노력을 하고 만약 구슬을 얻으면 즐거워서 놀게되지.
여의주를 얻어 즐겁게 노는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같은 곳에 묘지를 얻게 되면 틀림없이 대관(大官)을 얻게 될 거야 구슬을 가지고 노는 용으로는 여룡농주형(女龍弄珠形)이 있고,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 있는데 그 중에서는 제일 좋은 길지로 용이 승천하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 있어. 그리고 이 길지를 따라 잡을 길지는 없어. 그 이외에도 용이 돌아다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租形), 잠룡입수형(潛龍入首形), 와룡형(臥龍形), 갈룡고수형(渴龍考水形) 등이 있지.
또 동물 중에는 단연 말을 치는데 말 중에서는 용마를 제일 알아주지 않겠나. 용마음수형(龍馬飮水形)이 있고,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이라하여 천마가 울부짖으며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모습의 상은 최고 길지로 알려지고 있지. 그런데 갈마음수형이나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은 모두 혈 앞에 연못이 있어야 해. 만약 연못이 없으면 대신 못을 파 주어야 하지. 동물들은 목이 마르면 당장 물을 찾으니까 물은 꼭 있어야 하는거야”
“선생님, 천마시풍형이 좋다고 하셨는데 우리 나라에도 그런 자리가 있습니까?”
“있지. 자네 전라남도 진도를 가 보았나?”
“네, 어릴 때 가보았습니다.”
“그럼 보았겠군. 님해 대교를 건너서 조금 들어가면 진도 시내로 들어가는 오른편 길목의 산에 큰 바위를 보았을 것이네. 아마 거기가 지산면 와우리에 있는 지력산이지. 친도의 칠암(七岩)에 속하는 바위인데 산등성에는 큰 암반이 있는데 이것이 말굽바위로 알려지고 있지. 내가 그곳을 갔다가 진도의 사찰에 있다는 중을 만났는데 우연히 길동무가 된거야.
그 중의 말이 지력산에 동백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거야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는데 예로 부터 동백사의 북쪽은 산이 험하고 높아서 다니기가 불편하지만 절대로 길을 만들지 말라고 고려 초부터 전해 왔디는 거야 그런데 동백사 주지가 동북방의 고야리나 보전리 방면으로 길이 없어 멀리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니까 중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길을 내기 시작한 거야 길을 뚫고 있는 어느날 지금의 말발굽 있는데까지 길을 내었는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 구름이끼더니 천둥이 치고 폭풍이 일기 시작했대.
그런데 어디선가 천마가 비명을 지르며 나타나 목에서 검붉은 피를 쏟으면서 암반 위를 힘차게 뛰다가 몇 발자욱 못가서 숨을 거두었대. 그 때 힘차게 뛰던 천마의 앞 발굽은 약간 얄고 뒷발굽은 깊게 파였는데 그 후에 동백사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는 거야 그 동백사가 있던 자리는 천마시풍형으로 최고의 명당이었다지. 만약 길을 뚫지 않았더라면 진도에 큰 인물이 태어났을거야.”
운전사 박씨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묵묵히 남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나? 말이야기까진가? 자네는 지관이 되겠다는 욕심이 많군. 이렇게 어려워도 꼭 풍수를 배우려나?”
“네,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한 번 열심히 해봐. 지관이 되려면 재담도 있어야 하네. 그럴려면 풍수에 대한 설화도 많이 알아야 하고 풍수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해야하네. 짐승 중에는 와우형(臥牛形)이 있지. 서울의 무너진 와우 아파트가 있었던 그 자리도 명당인데 건물을 날림으로 지어서 변을 당했지. 이 와우형(臥牛形)은 소가 누워서 먹이를 한가롭게 먹고 있는 모습의 상이며, 우면형(牛眼形)은 소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말하지.
그리고 쥐는 곡식이 있어야 하지.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형에는 혈 앞에 조 또는 고품(庫稟)형의 사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 사가 없으면 쥐가 숨을 장소가 없어서 소나 개에게 잡혀 먹거나 고양이에게 물려가게 되는데 쥐는 새끼를 많이 낳기 때문에 대가 끊어지려는 가문에 좋으며 또한 먹고 사는데 걱정은 없게 되지.
또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이 있지. 옥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모습인데 이런 묘자리에는 월암형(月岩形)의 사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나쁘지. 달속에는 숫토끼가 있다고 믿고 있어. 때문에 이 옥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것은 숫토끼에 의해 잉태되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의욕이 강하며 발복도 역시 강해.
그리고 잠두형(蠶頭形)이 있지. 이 잠두형의 묘자리를 구한 사람은 혈 앞에 뽕나무 밭이 있어야 좋다고해. 뽕나무 밭이 없으면 누에는 먹고 살기가 어렵거든. 그러나 뽕나무 밭이 있다가 없어지면 가문이 기울게 되지. 그 외에도 벌, 지네, 양, 자라, 물고기, 조개, 잉어, 게, 가재 등도 있어. 완주군 이서면 이문리 산정부락에 가면 명당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지.
조선 중엽의 이야기인데 이 고을에는 아주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이들 부부는 산에 밭을 일구어 노모를 모시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한 가지 흠이라면 자식을 갖지 못해 안타까워 했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 부부는 어머니를 어떤 곳에 모실까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지.
그래서 뒷뜰에 단을 모셔놓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드리면서 어떻게 하든 명당자리에 어머니를 모시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한거야 그러던 어느날 길가던 중이 날이 어두워 갈 수가 없으니 하룻밤 묵어가게 해달라고 청했다지.
이 부부는 괘히 승락하고 정성을 다해 대접을 했대. 저녁을 먹고 이들 부부는 다시 제단에 나가 명당자리를 구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중이 이 광경을 보고 ‘내가 풍수를 조금 아니 내일 산으로 가 봅시다’ 하고 부부를 방으로 불러들였지.
그 다음날 중은 산에 올라가 산세를 살펴보고는 내려왔어. 그 이튿날도 또 산으로 올라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내려왔대. 이러기를 한 열흘이 지났지만 부부들은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어. 중은 어느날 주인을 부르더니 ‘당신의 정성에 탐복했소이다. 내가 당신 어머니의 묘자리를 구해 주겠소’ 하고 주인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서는 ‘이곳에 묘를 쓰시오 이 곳은 벌 명당이라는 혈이요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먹덩봉인데 바로 벌통을 말합니다.
바로 이 산이 꽃날봉이고 그 밑에 젖샘이 있고 옆에 있는 날줄기는 연모당이라 하오.’ 이렇게 중은 주인에게 하나하나 산세를 설명한 후에 다시 말하기를 ‘이곳에 묘를 쓴 뒤에는 멍덕산을 허물어 주시오. 멍덕산은 흙으로 덮여 있어 허물기가 쉬울거요 그래야만 벌이 나와 활동을 하게 되지요 그렇게되면 벌들이 꿀을 모아다 멍덕에 저장하고 새끼를 많이 치게 되며, 주인장도 자손이 번성하고 재물도 많이 생길 것이오’ 이렇게 일러주고 북으로 3O리 가량 가서 부부가 살 것이며 중이 보이지 않을 때에 명덕산을 허물으라고 일러 주었대.
중이 떠나자 부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어머니를 벌명당에 묻고 명덕봉을 헐어내기 시작했지. 그러자 벌떼들이 수없이 몰려나와 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하는 거야 부부는 이상히 여겨 벌떼들의 뒤를 쫒아가보니 중이 십리도 못가 죽어 있었어. 부부는 중의 말을 듣지 않고 미리 멍덕산을 허물었기 때문에 벌들이 나와 중을 쏘아 죽인 거야 부부는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소용이 없어 결국 시체를 어머니의 무덤 옆에다 묻어두고 북으로 3O리 떨어진 익산군 금마면으로 이사를 해서 자손들을 많이 낳고 살았대.
이들이 바로 발산 소씨(鉢山蘇民)의 시조라고 전하고 있지. 지금도 이들 부부가 살던 산정마을에 가면 나무들이 울창하고 6O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모두 부자들이지. 이 꽃날봉과 젖샘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한 여름에도 물에 손을 넣으면 시리다고 하지.”
남오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하늘의 별자리를 놓치지 않고 지켜 보고 있었다. lO윌의 찬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어 을씨년스럽지만 오늘만은 꼼짝도 하지않고 별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별이 빛을 발해야 하는데 왜 깜박일까? 틀림없이 무슨 변고만 일어날 것만 같다. 남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 어디 편찮으신거 아닙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아 오늘은 이곳에서 더 있고 싶어. 저기 보이는 별이 천문성이란 별인데 빛이 흐렸다 밝았다 하지 않나? 저 별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군으로서 군사혁명을 일으킬 때 떠오른 별인데…….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나?”
남오는 다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짐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짐승 중에도 날짐승으로 유형이 붙여진 새로는 매, 꿩, 꾀꼬리, 까마귀, 까치, 기러기, 제비, 부엉이, 비둘기, 오리, 학, 공작 등이 있는데, 특히 봉황과 금계가 으뜸이야 봉황으로는 단봉전서형(丹鳳傳書形)이 있고, 봉이 임금의 어서(御書)를 물고가는 단봉어서형(丹鳳御書形)이 있으며, 오봉쟁주형(五鳳爭珠形)이 있지.
오봉쟁주형의 대표적인 곳이 바로 경상북도 영주 땅인데 영주는 동쪽으로 청량산, 동북쪽으로 태백산, 서북쪽으로 소백산, 서남쪽으로 희양산, 남쪽으로 학가산이 있지. 이 산들이 바로 다섯 오봉에 해당되는데 태백산과 소백산은 널리 알려진 명산이며, 학가산도 태백산맥의 준령 속에 빼어난 산으로 예천과 안동을 양다리 짚고 있는 산이지. 그리고 청량산 역시 퇴계 이황 선생과 깊이 인연을 맺고 있는데 보살봉, 문수봉, 의상봉, 연화봉 등 36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있지.
봉황(鳳凰)이란 상상의 새는 암수가 서로 만나 봉황이 되는 것인데 봉(鳳)이란 숫놈을 이야기하고 황(凰)이란 암놈을 말히는 거야 숫컷에 해당하는 산은 태백산, 청량산, 학가산이고, 황에 해당히는 산은 소백산과 희양산이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모두 오봉에 속하지. 그렇다면 오황(五鳳)이란 다섯 개의 물이 있어야 제격인데 영주에는 감천천(甘泉川)과 단산천(丹山川) 두 개밖에 없어. 만약에 영주에 개울이 다섯 개가 있었다면 대구직할 시 정도의 큰 도시로 변했을 거야.
그러나 다행히도 영주는 물 대신에 다섯 개의 길을 가지고 있어. 물은 길따라 흐른다고 길은 물을 대신하여 동쪽으로는 봉화를 거쳐 불영계곡을 따라 울진으로 가게되어 울진에서 태백시나 영덕쪽으로 가며, 북쪽으로는 순흥 읍내를 거쳐 소수서원, 부석사,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있지. 서쪽으로는 풍기읍을 지나 죽령, 단양으로 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있고, 남서쪽으로는 예천을 거쳐 점촌, 상주를 거쳐 대구로 가며, 남동쪽으로는 평은, 웅천을 거쳐 안동, 그리고 부산까지 이르는 길이 있어 영주(榮州)를 오봉쟁주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지.
언젠가는 경북의 중심지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야 그리고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도 빼놓을 수 없어. 거 왜 봉황은 희대의 영조(靈鳥)라고 하지 않아? 만일 이 새가 나오면 인간에게는 군자가 나오는 데 보금자리로 돌이옴은 알을 낳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길지가 되지. 그 외에도 비봉쇄익형(飛鳳刷翼形)으로 봉황이 자기의 날개를 손질하는 형이 있고,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야 알이란 깨어지기 쉽기 때문에 묘지에는 비석 등 석물을 세우고 있지.
대개 우리 나라의 산 이름에는 봉(鳳)자가 들어가 있어. 예를들면 비봉산(飛鳳山) 같은 것 말이야 비봉산은 글자 그대로 두 날개를 펴고 긴 목을 내뻗어 하늘을 나를 것 같은 곳인데 이런 곳에서는 많은 인재가 배출되지. 경북 선산군 같은 곳을 봐, 선주읍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은 동쪽으로는 교동 뒷산이 되고, 서쪽으로는 노상동 뒷산이 양날개가 되잖아, 그리고 군청 뒤가 체구와 모가지가 되는 거야. 이 비봉을 읍(邑) 터로 보면 병풍처럼 된 동서 연산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데 중앙봉 아래에 군청이 좌정(坐定)하여 봉의 입이 바로 군청이 되고 있지.
다만 이 봉이 날려고 하는 것인지, 날으는 것인지는 몰라도 기개와 위용은 위압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야 금오산은 남쪽에서 안을 지키고, 서쪽으로 홀러오는 감천(甘川)은 동으로 낙동강과 합하여 이 고을을 지키면서 항상 봉황이 날아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이 쌓여 결국에는 못 날아가게끔 인망동(人望洞)이라 이름을 지었어. 그리고 봉황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물목동네 앞산을 황산(凰山)이라 이름지어 짝을 맺어주기도 했지.
봉황은 몸과 날개가 오색빛이 영롱하고 소리는 오음(五音)에 맞는 것만을 가려내며 오직 오동나무에만 깃들어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예천(醴泉)을 마시며 사는 새야. 그래서 대나무를 심고 봉황을 맞아들이기 위해 영봉동(迎鳳洞)이라 했으며 봉이 날아오는 마을을 무래동(舞來洞)이라 하여 모든 동네가 봉황과 관계되는 동으로 이름지어진 것이지.
뿐만 아니라 봉황은 알을 다섯 개 낳는데 이미 한 개가 낳은 알은 동산(東山)이라 하고 다시 네 개의 동산을 만들어 오동산 또는 오계산(五鷄山)이라 한 것이야.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에 원정온 명나라의 장군이 이 비봉산을 보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며 비봉산 목대기에 불을 피우고 큰 정을 꽂았다고 전해지고 있기도해.
오동산은 l966년 경지정리로 인하여 네 개는 없어지고 지금은 한 개 밖에 없는데 앞으로 선산군에는 명나라가 기대했던 그런 큰 인물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돼. 대개 도시나 읍이 번창하려면 행주형(行舟形)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 좋지. 그 다음이 금계인데 금계는 천계(天鷄)라고도 해. 천계가 한밤 중에 우선 새벽을 알리면 지상의 모든 닭이 따라 울게 되지. 이 금계형은 상길(上吉)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데 닭이라는 것은 알을 낳으면 2O여일이나 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위대한 호걸이 태어나고 대대로 많은 자식을 갖게 된다고 풍수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지.”
금계 중 가장 좋은 길지는 무엇보다 금계포란형이다. 포란형으로는 앵소포란형(鸚巢抱卵形),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 학소포란형(鶴巢抱卵形)이 있으며, 비안도잠형(飛雁度岑形)으로 기러기가 산을 넘는 산형이 있고, 연소형(燕巢形)이라 하여 제비가 집을 짓는 모습이 있다. 제비집 모양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제비리라는 곳인데 이곳은 지형이 마치 제비집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제비가 깃을 품는 듯한 형상의 제비바위가 있다. 이 지방에서는 할미바위(始岩)의 전설도 함께 전하여 지고 있다.
강씨라는 부자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아주 부자였다. 그런데 이 강씨는 재물을 모을 줄만 아는 자빈고리라 남을 돕는 일에는 항상 인색하여 노랭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하루는 어느 도승이 강씨네 집을 찾아가 시주를 청했다.
강씨는 대뜸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당신에게 줄 것이라고는 쇠똥 밖에 없으니 쇠똥이라도 필요하면 가지고 가시오’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강씨 부인은 남편 몰래 뒤주에서 쌀 한말을 떠다가 도승에게 주면서 남편의 잘못을 사죄했다.
도승은 쌀을 받아가며 말하기를 ‘할미바위가 없으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 하고 합장을 한 후 가버렸다. 때마침 이 소리를 들은 강씨는 옳다 싶어 무릎을 치고는 사람들을 시켜 할미바위를 집밖으로 굴러내버렸다. 그런데 할미바위를 밖으로 밀어내버린 그날부터 온 식구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면서 돈도 모이지 않고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강씨는 할미바위를 다시 집안으로 끌어다 놓고 자기의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가세가 차츰 펴지기 시작했다.
할미바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청양군에는 매 때문에 날지 못하는 매바위가 있다. 또 청양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꼭두바위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부엉이가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은 워낙 명당터라 많은 사람들이 묘를 여기에다 썼다. 그런데 매때문에 봉황이 날지 못한다 하여 이장하는 소동이 일어났고 정자를 지었다가 헐어버린 일도 있었다. 큰 인물이 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외에도 말하려면 몇날 며칠을 두고 이야기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연꽃에 대한 유형도 많은데 제일 많이 등장되는 것이 연회부수형(運花浮水形)이다. 원래 연꽃은 물 밖이나 물 속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연꽃은 수면에 뜰 때 비로소 향기가 나므로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지손이 고귀하고 부자가 된다. 연꽃에는 연화출수형(運花出水形), 연화도수형(運花滔水形)이 있고, 매화에도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 있는데 매화는 꽃이 땅에 떨어질 때 가장 향기가 좋다고 한다.
이런 땅에 묘지를 쓰면 자손에게 큰 발복이 온다고한다. 반대로 도화낙지형(挑花落地形)이 있는데 복숭아나, 배니무의 꽃은 땅에 떨어지면 모든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해 이런 땅에 묘지를 쓰면 사람들이 모두 다 애석해 하는 군자가 태어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보도출갑형(寶刀出匣形)이라 하여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 아무리 희대의 보검이라 해도 칼집 속에 들어 있는 검은 가치가 없다.
칼은 칼집속에서 나와야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이외에 야자형(也字形)이 있는데 이 형은 혈 뒤에 호(乎)자 형의 사가 있고, 혈 앞에 천(天)자형의 사가 있으면 좋은 길지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문자의 시작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되어 끝은 반드시 이(也)자나, 호(乎)자로 끝을 맺게 되는데 이 야자형은 세상에 이름 있는 학지를 배출해 낸다. 천지는 문자의 첫머리이기 때문에 일세를 풍미할 학자가 나오기 마련인 것이다.
남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왜 천보성이 흐려지고 있는 것일까? 저 별은 박 대통령의 운명이 담긴 별이 아닌가? 남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늘의 별자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